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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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10/13 22:32
나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단편집부터 접했다. 그리고 최근 웹진 문지에서 지난 달 웹진문학상을 수상한 <옹기전>까지. 단편을 읽고 나니 <백의 그림자>라는 경장편을 읽기가 두려웠다. 언제나 좋아 뵈는 글은 최대한 미루고 아껴서 보게 된다. 가장 적확한 순간에 만나게 될 때까지. 내가 읽어 치우는 것들과 동급에 두기를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그 좋은 것들을 끝까지 보존해두기 위해서. 영화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다. 최상의 것들은 최상의 순간에 만나야 하고, 절실할 때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삶의 어느 순간엔, 언젠간, 꼭, 온다. 내가 책을 사 모은 채 보지 않고, '굿 다운로더'가 되어 영화를 다운 받아 둔 채 보지 않고, 한달에 돈 얼마 내면서 150곡을 다운 받고도 안 듣는 음악들이 있는 이유다. 여하튼 몇번이고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늘 실패했다. 부분적인 인용조차 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특히 무재와 은교 사이에 오고가는 짧은 대화가 무척 마음에 드나, 그 대화가 이 작고 하얀 책 밖으로 나오면 황량한 여백에 쉽게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이 소설을 근래 보기 드문 최상급의 사랑소설로 읽었고(연애소설이 아니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별로 겹칠게 없는 다른 범주라고 생각한다. 또 난 연애엔 도통 젬병이므로), 또한 윤리적 탐문으로 읽었다. 사랑과 윤리의 불가분적 관계. 사랑하지 않고 윤리가 어찌 있을 수 있으며, 윤리적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 어찌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혹은 이 소설을 마음에 품고 있는 한, 만났을 땐 손쉽게 서로 인지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라는 착란마저 들게 한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소설을 언젠가 쓰게 된다면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까 싶은,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공이 생긴다면 써보고 싶게 만드는 좋은 소설.

소설 자체에 대해 어쭙잖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과제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부분이 있어 옮겨두려고 한다. 소설에서 인용한 건 아니고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한 부분이다.


이 작가에 대한 기왕의 비평적 논평들을 존중하기 위해 '환상'이라는 용어를 고수했지만 사실 적절한 단어라고 하기 어렵다. 복잡한 문학 이론의 문제들은 제쳐 두고라도, 도대체가 이 소설에서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 주체가 어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발생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인' 환각을 뜻하는 환상이라는 용어로 그 현상을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간 비윤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차라리 '극(極)현실'에 가깝지 않은가.

황정은이 (이 소설뿐만 아니라 기왕의 작품들에서도) 환상을 동원하는 까닭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방금 짚어 본대로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수단으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종류의 것일 때, 소설가는 그 극한의 불행을 어떻게 소설화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학(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자세)의 문제다. 벤야민이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한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178-9)

원래는 문학이론을 가장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너무 붙어 있어서는 데일 수밖에 없으니 '취미'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언제나 스스로 환상 구조ㅡ행위자성, 혹은 주체를 탄생시키는ㅡ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결국엔 자신감 부족일테지) 그것은 잠시 미뤄둔 채 인류학 관련 전공, 더 넓게는 '질적 연구'를 하는 전공에 들어 갔다. 왜냐면, 나는 더 이상 "정보들"을 생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독성"을 밝히고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질적 연구방법론이 할 수 있는 것에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공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때때로 나는 오가는 이야기와 그 결과물에서 "단독성"에 대한 열망을 조금씩 읽을 수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그 열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아직 석사 1학기라 왜 그 전공을 택했냐는 말엔 상대방이 가장 원할 것 같은 말, 혹은 주변 상황에 따라 적당히 조절해서 말하곤 했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단독성"의 문제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블로그에라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요즘 수업에서 강독하는 버틀러 책의 일부분은 마침 이 단독성(singularity)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단수성인가, 단독성인가, 특이성인가, 혹은 독특성인가. 그 무엇으로 번역하든 universal-particular라는 이분항이 아닌 third term으로서 singularity 개념이 적확하게 한국어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지금 당장은 산적한 과제를 해치우고.. 방학 때 조금 더 몰입해 볼 주제.


부록 : http://webzine.moonji.com/?p=2910
나 이렇게 조금 수줍은 인터뷰가 완전 좋아 *-_-* 다음 작품 이야기에서 완전 기다리게 된다. 이 인터뷰도 한참 전에 봤는데 블로그에 올려서 나눌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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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13 00:08

창문을 모두 열어 놓으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노래도 물을 흠뻑 먹은 듯 질퍽대며 어딘가 힘겨워 잘 들리지 않는다. 김현 평론가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산울림의 <청춘>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뒀는데, 폭우 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들기 전까지 무한반복해 들을 예정이다. 이 노래가 어쩐지 스물 아홉에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서른 넘어갈 즈음에... 비가 과연 쏟아지는 중이다.

황정은의 소설집을 완독했다. 너무 좋아서 어느 작품은 두 번 세 번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백의 그림자> 해설에서 이 소설집을 발표한 순서대로 읽어보라고 하기에 그렇게 읽었다. 그러자 과연 이 작가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게 느껴졌다. 부러울만한 속도로 말이다. 사실 초기 작품인 <마더>나 <소년>은 조금 평이하다고 느꼈지만(그래도 좋은 작품), 그 이후에 발표한 작품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좋았다. 내가 느끼기엔 신형철 평론가가 좋아할만한 스타일ㅡ평소에 하던 이야기에 부합하는 스타일, 즉 나 역시 좋아할만한 스타일ㅡ을 갖춘 작가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작가가 명사(특히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이 작가는 배수아를 좋아할까?). 같이 구입한 <백의 그림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한나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뒹굴거릴 수 있을 때 읽으려 한다.

대가족적인 삶에 대해 동경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왜냐면 어렸을 적 꽤나 오래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까), 최근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재)발견한 동영상 몇개를 보면서 그것도 꽤나 좋을 때가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2006년 겨울 <열린 교실> 때였는데... 점심 때 아이들과 함께 김밥을 싸먹고 비빔밥을 해먹던 때였다. 언제나 시끌벅적 했다. 어느 손은 당연하다는 듯 서툴게, 어느 손은 김밥을 좀 팔았는지 능숙하게 밥을 펴고 재료를 깔고 둘둘둘.. 물론 맛있었다. 그리고 큰 양철에 고사리며 도라지며 콩나물이며 참치며 참기름이며를 듬뿍 넣고 사깡에서 사온 공기밥을 털어 넣고 고추장을 넣어 슥슥비벼서 입안 한가득 넣던 10명의 사람들. 내 컴플렉스인 목소리가 많이 들려서 민망했지만 어쨌든.

짐멜의 에세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을 읽고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했던 건데... 아이들에게 예쁜 걸 입히고 좋은 걸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는게 과연 아이에게 좋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반응에 민감하기 때문에, 부모 욕심이라는게 보이면 그것에 은근슬쩍 응해버리기 쉽다. 그건 결국 아이의 감성을 부모의 감성대로 패턴화하는 것, 아이를 작은 부모로 만들어 버리는 것, 달리 말해 자극을 처리하는 방법을 (시행착오 끝에) 아이 스스로 터득할 가능성을 막아 버리고 이미 한 번 처리된 자극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아이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부모들이 조금 거북하다. 아이들마저 레디-메이드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어릴 때는 '촌스러울'수록 좋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회사에서 만들어 파는 장난감을 줄 필요도 없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아이들은 모든 사물에서 장난감을 발견하니까. 옷도 예쁜 새옷을 입히느니, 어디서 받아와 성장의 흔적이 묻은 헌옷을 입히는 게 좋다고 믿는다. 또 아이의 조기 교육이 필요하다면 학원에 보내고 비디오를 보일 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된다. 미메시스의 원칙.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 특별히 잘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듯 기다리면서. 그리고 아이들 특유의 변덕을 인내하면서. 여기 덧붙인 사진은 나는 아니고 동생 어릴 때인데, 모두 어디서 받은 낡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예쁘잖아.

결국 저마다의 방식이란 게 있는 법이어서, 예전 같으면 이기적인 행동 아니냐고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를 어떤 방식에 대해 납득하게 되어버렸다. 납득하게 되었다는 건 나를 그 방식에 던져 넣는 것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게 과히 나쁘지 않다. 관계에 이기적인 건 어디에도 없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결국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니까. 어쩐지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덧) 이게 앞서 언급한 김밥 씬. 이런 동영상이 몇 개 더 있는데... 아 배가 고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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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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