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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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3/23 혁명서사, 사랑, 기억, 젠더
  2. 2008/06/07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3. 2008/04/23 낭만주의의 유산과 낙관주의 (4)
독서노트 / 2010/03/23 22:00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집단적인 담론 구조에서 혁명의 꿈은 개인의 시간으로 환치되고, 사랑의 열정과 사랑의 대상과 하나가 되었던 황홀한 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 앞에서 멈춰서버린다. 그래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꿈은 '청춘의 열병'으로, 혁명의 시간은 개인의 생애사적 시간 속의 빛나는 순간으로 그려진다. 이 서사는 지속되지 못한 혁명에 대한 사랑의 열병은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혁명을 살아남은 자의, 개인의 생애로 환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의 '좌절된 꿈'의 시간으로 환수된 혁명의 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와 환멸, 혹은 자기모멸의 시간 앞에서 멈춰 서버린다. 따라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사랑은 빛나는 순간 속에서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_권명아, <죽음과의 입맞춤 :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 사회 2010 봄, p. 298

이 글을 읽고 있자니 학부 때 알던 여러 남자들의 얼굴이 아주 새삼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저마다의 구호를 갖고, 저마다의 학정조(학생정치조직)등 집단의 후광을 두고, 가끔씩 일이 있으면 연례 사업처럼 깃발 들고 나가기도 하고, 술집에서는 과장된 영웅담이나 허세를 부리거나 고뇌를 연출하여 후배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선거철이 되었다 싶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수트를 빼입고 컬러 포스터 속에 등장하던 남자들. 그 남자들을 둘러싼 담화는 오직 뒷담화일 뿐이고, 그들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잠적하기 전까지는 매우 잘나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수없이 많은 연애를 했고, 그 연애의 끝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남자들만큼은 그 공동체 속에서 끝끝내 생존해 남았다. "혁명의 문법에서 사랑이 정치와 탈정치를 둘러싸고 젠더화된 위계를 구성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특정 주체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위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문법에서 청년의 열정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지만, 여성, 미성년, '무지한 대중'의 여정은 과잉되거나 부족한, 혹은 훼손되거나 결여된 것으로 간주된다. (같은 글, p. 295)" 음. 계속 다른 부분도 인용.

생애사의 리듬 속에서 혁명은 젊음의 열정, 젊은 날의 추억이 된다. 그 추억 속에서 첫사랑의 열병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지만, 결국 그 열병은 성장을 위해 누구나 겪는 성장통처럼, 통과제의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추억 속에서 혁명은 통과제의와 같은 자연사의 한 과정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생애사의 서사에서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자연 과정이 되어버리고, 현재가 아닌 과거의 몫이 된다.

또한 추억 속의 혁명은 혁명의 좌절에 대한 책임을 언제나 사랑의 대상에게 전가시키고, 추억의 주체는 혁명을 생애사의 원형적 기억으로 곱씹는다. 이렇게 추억이 된 혁명 속에서 변절은 언제나 타자의 몫이며, '나'는 혁명을 순수한 기억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배타적 소유권을 지닌 '순수한 주체'로 면죄된다. 추억이 된 혁명이 혁명에 대한 소유권, 혹은 혁명의 원본과 변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혁명을 생애의 "원형 기억"으로 추억하려는 욕망은 혁명을 과거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혁명의 좌절을 타자에게 전가한다.

_같은 글, pp. 300-1

권명아 평론가의 이 글은 4. 19에 대한 것이지만, 그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이는 단지 4. 19세대만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386세대", "87년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인 어떤 모종의 규칙이다.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젊음'과 사랑과 혁명과 열정과 섹스와 젠더의 결합 공식이랄까. 이 공식을 잘 풀어낸 사람들만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자격을 갖는다.

60년이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추억하는 서사들을 읽을 때 큰 불편함을 느꼈던 게 <정확히> 이런 점들 때문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도 매혹적인 배우들과는 별개로 불편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남자 작가들이 보여줬던 당시 세계는 분명히 예컨대 공지영 작가가 90년대 초반에 그려냈던 세계와는 다르다. 좀 더 생각과 독서를 이어나가야 할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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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06/07 20:25
한겨레의 문화 일반 코너에서 연재했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기획을 옮겨온다. 나는 당연하게도, 박정수씨 보다는 이현우씨와 이성민씨에 가까운 편.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9298.html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헤겔과 라캉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르크스·대중문화 이론적 틀까지
매혹과 혐오의 시선 동시에 받는
21세기 세계철학계의 이단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시대 넘나드는 철학적 재담으로
오늘날 이념적 지형·돌파구 찾아
‘독창성·진정성 없다’ 비판 불구
열정과 광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이현우/서울대 강사

[namunnib] 뭐 일단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사회운동"이 "'혁명 없는 혁명'" 내지는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은 운동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가 신사회운동의 대표적 주자인 것인양 명명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모든 운동들에도 개별성을 넘어서 "사회적 총체성"을 고려하는, 혹은 '보편성'을 고려하는 움직임들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신사회운동"이라 칭해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속성'들은, 그 어떤 '-이즘'에도 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것과 싸우고 그것과 구별하려는 움직임은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에서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을 터. 또한 소위 '개별' 운동들이 총체성과 아무련 연관이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같지'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초월'하고 '총체성'을 고려하고 어떻게 '보편성'에 이를 것인가. 그렇게 하려는 건 누구의 욕망인가?)




* *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0673.html


현실 비판할 뿐 대안찾기엔 침묵

② 실천 없는 철학

이현우씨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 면에서 ‘괴물’ 같은 철학자라 해도 그의 사유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 기여의 실체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결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게 박정수씨의 생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성민씨가 지젝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안수찬 기자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한 문장 속에 지젝의 비판 철학이 지닌 가치와 한계가 담겨 있다.

지젝은 헤겔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 좌파이다. 헤겔 좌파로서 지젝은 물신주의적 믿음 위에 세워진 현실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지만 정작 어떻게 그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모든 철학이 일상의 현실은 생각만큼 확고하게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연기론은 만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가르치고,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의 물질적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젝은 신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믿는 주체(인간)의 상상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방법을 따른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

신경증 환자의 실재인 ‘외상’도 마찬가지다. 외상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을 객관적 실재로 믿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속에서 객체화된 외상을 주체 자신의 창조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객관성의 형식으로 환자를 괴롭히던 외상이 주체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환자는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외상의 환상성을 깨달아도 신경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비도의 체질을 바꾸거나 대안적인 인간관계를 찾지 못하는 한, 증상은 괴롭지만 살아갈 의미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면 신앙생활은 지속되고,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 의사와 능력이 없으면 민족주의는 지속된다. 화폐의 물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걸 알아도 대안적인 교환 방법을 찾지 못하면 화폐 물신주의는 계속되며,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도 자본 권력을 대체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할 욕망과 능력이 없으면 자본가에게 좀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은 자유로운 연합체를 구성하는 욕망들과 그 욕망들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가능하다. 신ㆍ민족ㆍ자본이라는 초월적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의 욕망이 구성하는 공통적(commune) 삶의 형식, 그것이 마르크스가 기획한 코뮨주의다. 그런 코뮨적 욕망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해 노예가 되는 사회를 당연하다거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환상 숭배자들에게만 안 보일 뿐 우리의 삶 속에 실재적으로 잠재해 있다.

현실의 비실재성 폭로하면서
어떻게 벗어날까 언급 적어
인간은 서로에 대한 ‘타자’일 뿐
코뮨적 삶 불가능하다 주장도


지젝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이런 코뮨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에게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는 인간을 자연(사물, 신체)과 분리시키고,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고, 낱낱이 떨어진 개별 인간들로 분리시킨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미지의 타자로 존재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형식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유롭다고 한다. 아무도 타자의 욕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타자의 욕망은 배려의 대상일 뿐 아니라 유일한 가치척도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참아라’거나 ‘즐겨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할 뿐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척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시장 민주주의적인 가치척도를 위해 딱 하나 금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을 배려하지도 않고, 타자의 욕망을 척도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수’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것,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 경제가 대중을 일반적 노예로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지젝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넘어선 세계 질서를 언급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이 기획은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을 승인하면서 시작된다. 홉스가 말한 ‘국가’라는 괴물. 지젝은 프로이트의 문명론에 내재한 홉스주의를 충실히 반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은 ‘법’과 ‘초자아’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욕망을 억압하는 법과 억압을 욕망하는 초자아가 없으면 인간 무리는 욕망의 충족을 향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젝 역시 상징적 질서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미지의 타자이며, 평화로운 이웃들의 이면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이 욕망의 시장 체제를 초극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 주체 형식으로서의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모든 작은 타자들을 하나의 총체적 집합으로 통합하는 예외적 큰타자, 곧 헤겔의 입헌군주와 모든 작은 괴물들의 욕망을 중화시키는 보편적 욕망의 괴물, 곧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솔직히, 지젝의 기획이 정말 이걸까 의심했는데, 이현우씨의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욕망의 자유민주주의 벗어난
헤겔·레닌 결합한 제국 기획
‘헤겔 좌파’인지 ‘우파’인지 모호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불투명


헤겔의 입헌군주가 정말 ‘텅 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남아 있을까?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의 관료집단들이 정말 ‘비계급’으로서의 보편계급을 대변할까? ‘지젝의’ 레닌주의에 따라붙을 이런 의문들은 사실 본질적인 게 아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젝의 말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실천은 가짜 행위다. 실천의 근거는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예견에서 찾을 수 없다. 혁명의 실천은 전대미답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근거는 그로 인해 창조되는 세계가 좋은 세계라는 자기 확신뿐이다. 지젝은 정말 그걸 확신하고 있을까?

지젝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타자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그래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물어보게 만들지만) 그런 만큼 자유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자유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그래서 텅 빈 상징으로 존재하는 주인에 의존할 때만 자유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의 상징적 주인 밑에서 보편적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때 지젝은 더는 지배적 현실의 환상성을 비판하는 헤겔 좌파가 아니라, 유일한 지배자의 환상으로 수립된 현실을 추구하는 헤겔 우파의 자리에 선다. 그것도 좋다. 좌파든 우파든 중요한 건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삶을 창안하고 싶은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가? 지젝의 흥미진진한 비판의 뒷맛으로 그가 욕망하는 삶을 느끼고 싶다. 무리인가?

박정수 / 수유+너머 연구원


* *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 안수찬 기자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정치·경제체제 변화보다
개인 향유 방식의 변화가 더 시급
“문명의 모든 것을 재발명하라”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 아닌
혁명 가능성의 조건 탐색할 뿐
지젝의 ‘정치적 기획’ 주장은 오독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4/23 09:51

이사야 벌린(『낭만주의의 뿌리』)은, 낭만주의는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도 없고, 그 구체적 특징을 자세하게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쉽게 좌절되는 까다로운 사조이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 유산을 물려 받은 사조들 사이에 그 어떤 유사성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예컨대 파시즘과 실존주의), 두 가지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두 개의 원리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벌린은 한글판으로는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사상사/지성사적 탐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원리란 각각 "의지의 필연성"과 "사물의 구조의 부재"이다.

"의지의 필연성"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인간의 의지는 어디에나 있고 그 의지는 그 무엇도 억누를 수 없다. 물론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의 의지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특정 몇몇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통해서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빚을 수 있도록 창조할 수 있다'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구조의 부재"는 간단히 보면, '모든 사물의 구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부족한 인간들이 제멋대로 파악하려고 드는 순간 사물은 그 자체가 될 수 없게 되거나, 그 자리에 없게 되거나, 혹은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사물의 구조 자체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구속하는 힘이니 있어서도 안 된다.'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내 멋대로 정리;)

이 두 원리 사이의 결합, 그리고 이 두 원리들이 다른 어떤 사회적/국가적/문화적 상황과 맞물리느냐에 따라 수많은 변종들이 만들어졌다. 벌린이 보기에는 18~19세기의 수많은 사조들은 물론이거니와, 20세기 들어서 나타난 파시즘도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며,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이 두 원리들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인간의 의지는 필연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 보는 신비주의적 낙관주의. 다른 하나는 "인간은 의지도 있고 이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을 알 수도 없으므로, 우리들 운동의 결말은 예측할 수 없다. 그 결말은 어쩌면 우리들의 파멸일지도 모른다."고 보는 냉혹한 비관주의. (벌린에 따르면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해 왔다.)


왜 이런 포스팅을 하냐면, 며칠 전 하워드 진과 관련한 포스팅을 우연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랫만이었다. 4년 전에 그의 책 한 권을 가지고 세미나 한 이후로 그의 책을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왜냐면 성벽이 맞지를 않아서 -ㅠ- 도무지 참고 읽을 수가 없었다)... 어쨌건 그 포스팅에 링크된 유튜브 동영상을 보게 되었고(클릭), 왠지 선동되는 기운을 받아버렸다 -_-.... 쿠워워워 ^&%#$%#$#$^##@. 하워드 진의 말을 (나쁘게) 요약하자면 뭐 이렇다.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 살아주지 않아요! 세상은 물론 더럽죠!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든 좋게 바뀔 수 있어요! 우리의 의지로, 노력으로! ... 다소 신비주의적인 낙관주의랄까. 그의 낙관주의가 낭만주의의 유산에 기반해 있다는 점은, 그가 "불확실성에 대한 긍정"을 모토로 내세우기도 한다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의 낙관주의란 '근거'가 없다. 그래서 그는 "불확실성에 대한 긍정/낙관"을 내세운다. 예컨대 정부는 민중을 억누를 수 없고, 운동이 다 죽은 것 같아도 사실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가 함께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방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 정부, 의회, 더 나아가 세계 기구들은 우리를(people) 대표할 수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운동을 통해 그것들과 싸워야하고 그것들을 변혁시킬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갖가지 저항들, 그리고 절대 권력과 맞서 승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민중의 운동이 때때로 승리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쨌거나 더 나은 사회와 국가를, 더 나아가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헉 어쩐지 괜시리 힘이 된다 -_-...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다소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낙관주의가, 적어도 한국에(다른 사회권은 잘 모르니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두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한 의지와 노력, 운동의 지나친 강조는 사실 외부에 대한 노출에 너무나 취약한 것이어서, 역자의 말을 빌자면 어떻게 "지랄 발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말들은, 사실 현재의 제도랄까 습속들이랄까,에 대한 강력한 거부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거부란 사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부인(disavowal)'에 가까운 것이어서ㅡ주체에게 외상을 주는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ㅡ주체의 분열이나 심지어 '정신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는 흡사 전쟁을 상기시키는 '혁명'도 싫고, 여러 가지 '사회 운동'들의 "(푸코의 말을 빌자면) 전쟁 모형"에도 염증이 난다. 푸코에게 "전쟁 모형"이란, "한 사람이 반드시 상대방을 눌러버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가지는 "효능" 때문에, 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실상보다 "더 큰 정치적 무게"를 가진 양 착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쟁 모형"은 우리에 반대하는 '적'들이 있고, 그 적들을 파괴하고 '우리'가 승리하면 세상은 아름다워지리라는 생각들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상황이 변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전쟁 모형이 직접적으로 타자에 대한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워드 진의 말이 선동적으로 느껴지면서도 괜히 힘을 북돋아주는 이유도, 사실 명쾌하게 적을(정부/국가/의회 권력들) 설정하고 있으며 그 적을 무찌르는 것은 '우리들'이 모이는 것만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하면서도 낙관적인 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소위 '사회 운동의 대부'라는 사실이 끔찍하리만큼이나 싫다. 그의 책이 또 한 권 번역 출판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제목을 한국어로 하자면 '정부가 억압할 수 없는 힘' 정도? 아마도 내용은 '민중people'은 정부/국가가 아무리 억눌러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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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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