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 2010/04/25 11:34
1. 요샌 잠을 많이 자게 된다. 8시간 씩, 9시간 씩. 일상에서 잘 풀리는 일이 없다 보니 점점 잠으로 도피하는 것 같다. 방에서 깬 상태로 있을 때는 엎드려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뒤적인다. 새 책을 읽지 않게 된다. 예전에 좋았던 책은 보통 책귀가 많이 접혀 있다. 더 좋았던 책은 책의 앞뒤에 메모, 옮겨쓰기, 요약까지 들어 차있다. 그런 것들을 다시 읽는다. 다시 읽다보면 책귀 접힌 부분이 수정되기도 하고, 새 책귀가 접히기도 한다. 그걸 보면서 내가 겪은 변화를 짐작해 본다. 이제부터 읽을 책들은 언제 읽었나를 표시해 둬야겠다. 까먹지 않도록 아예 책 등에 표시를 해둘까?
2. 애드리언 리치(Adrienne Rich)는 영미권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책에 자주 언급되는 시인이고, 얼마 전에는 그 시인이 쓴 <The Burning of Paper Instead of Children>(링크 있음)을 감동 깊게 읽었다. 나중에 맘이 맞는 사람들 있으면 함께 리딩리스트 뽑아서 공부해봐도 좋을 시인인 것 같다. 시인데도 굳이 읽었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연구(?)를 하면서 봐야 했기 때문에(=_=). 예전에 영문학 강의 들을 때도 시를 읽을 때면 머리를 쥐어싸곤 했는데(근데 대체 대학에서 시의 가운데를 뻥뻥 비워놓고 채우라는 시험은 왜 보는거야?). 여하튼 시가 너무 좋아서 번역을 해둘까 했는데 미천한 실력이라 조금 해보다가 그만 두었다. 그래서 그 중 가장 좋았던 부분 2가지만.
시는 미국의 평화운동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Daniel Berrigan이 볼티모어의 재판장에서 했던 말을 제사로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나는 나의 도덕적인 충동을 실존 밖으로 언어화해야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I was in danger of verbalizing my moral impulses out of existence)." "충동"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추진력? 여하튼 이 말을 보고 나니 <경계도시2>에 이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경계도시2>를 국보법 관련 이슈(한국에서는 좌파든 우파든 국보법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식의)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의 실존에 대한 텍스트로 읽었다. 얼마나 사람들과 사회가, 집단과 정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의 실존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지를 말이다. 송교수에게 자꾸만 설명하라고, 증명하라고,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하던 언론과 주변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송교수님은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며 저마다 처방과 전략을 내어놓던 남자들. 침묵하는 법, 각각의 개개인을 '견뎌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말이 많아질수록, 말할 것을 강요 당할수록, 점점 침잠하고 잦아드는 송교수의 미간 주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다른 하나. "억압자들의 지식 / 이것은 억압자들의 언어이네 // 그러나 당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이 언어가 필요하네(knowledge of the oppressor / this is the oppressor's language // yet I need it to talk to you)". 미국 이주자들의 신산스러운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테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규범적인 '표준 영어'와 소수인종이 사용하며 규범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러 방언들의 문제도. 지식-언어-억압-권력, 그럼에도 이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순-분열-역설-자의식. 이 구절을 보고 올해 여성영화제에서 보았던 한국 단편 <파마>가 떠올랐다. <파마>는 결혼이주여성과 결혼이주여성을 맞는 한국 사회에 대한 영화다. 이주여성으로 나오는 출연자는 재밌게도, 그리고 천연덕스럽게도 한국인 연기자다. 유머와 위트를 잘 구사하는 영화인데 주제의식이나 문제의식은 정말 여러모로 묵직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영화였다. 그 중에 정말 일부분만.
이주여성은 막 입국해서 '시어머니'를 따라 재래시장의 미용실에 들어와 있다. '시어머니'는 자기가 돈을 쓰고 있다는 걸 강조하면서 이주여성에게 옷을 사주고 파마를 해주지만, 사실 이 여성의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한국에서는 '촌스러운' 것일 뿐이다. 말이 한 마디도 안통하는 사람들은 이 여성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지만(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다루듯이 말이다. 마치 언어를 모르면 사회적으로는 '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니 자기들 뜻대로 막 다루고 귀여워해주고, 그러다 짜증나거나 맘에 안든다 싶으면 화를 마구 내고 혼낼 수 있다는 듯이. 이는 이주'여성'이었으니 가능했을 이야기일 것이다. 사회가 젊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의 스펙트럼에서. 반면 흔히 이주'노동자'로 표상되는 이주'남성'들에게 한국 사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우한다), 아무것도 소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변의 한국인들은 끝까지 이 이주여성에게 '한국어'로만 말을 건넨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범람하는 한국어는, 차라리 어떤 폭력처럼 느껴진다.
예전에 김연수 소설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주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 문학을 쓰게 하는게 목표라고 말한 적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를테면 한국어와 한국문학의 결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즉 한국 문단의 배타성과 주제 중심성(문학 미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학의 주제와 작가 생애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문단의 관행)을 벗어날 수 있다는 요지였다. 동의할 수 있는 구절이지만, 한편으로는 난 이런 목표가 위험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주자들이 구사하는 한국어가 한국인과 한국문학에게 어떤 의미와 효용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뿐, 한국 이주자들에게 한국어가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뷰는 짧았기 때문에 소설가가 하는 생각을 다 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한국의 지배언어인 한국어로 이주자들에게 말을 건네되, 그리고 한국어로 말을 하되, 그것이 한편으로는 "억압자들의 언어"일 '수 있다'는 점을 더 깊게 감안하지 않는다면, 한국어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될까?
3. 오랜만에 사진기를 들고 나갔음. '출사'라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때문에 나간 것은 아님. 역시 지나친 관광지가 아닌 절은 죠쿠나~
절에 가면 누구나 찍는 풍경(風磬) 사진 ㅋㅋㅋ
2. 애드리언 리치(Adrienne Rich)는 영미권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책에 자주 언급되는 시인이고, 얼마 전에는 그 시인이 쓴 <The Burning of Paper Instead of Children>(링크 있음)을 감동 깊게 읽었다. 나중에 맘이 맞는 사람들 있으면 함께 리딩리스트 뽑아서 공부해봐도 좋을 시인인 것 같다. 시인데도 굳이 읽었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연구(?)를 하면서 봐야 했기 때문에(=_=). 예전에 영문학 강의 들을 때도 시를 읽을 때면 머리를 쥐어싸곤 했는데(근데 대체 대학에서 시의 가운데를 뻥뻥 비워놓고 채우라는 시험은 왜 보는거야?). 여하튼 시가 너무 좋아서 번역을 해둘까 했는데 미천한 실력이라 조금 해보다가 그만 두었다. 그래서 그 중 가장 좋았던 부분 2가지만.
시는 미국의 평화운동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Daniel Berrigan이 볼티모어의 재판장에서 했던 말을 제사로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나는 나의 도덕적인 충동을 실존 밖으로 언어화해야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I was in danger of verbalizing my moral impulses out of existence)." "충동"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추진력? 여하튼 이 말을 보고 나니 <경계도시2>에 이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경계도시2>를 국보법 관련 이슈(한국에서는 좌파든 우파든 국보법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식의)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의 실존에 대한 텍스트로 읽었다. 얼마나 사람들과 사회가, 집단과 정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의 실존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지를 말이다. 송교수에게 자꾸만 설명하라고, 증명하라고,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하던 언론과 주변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송교수님은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며 저마다 처방과 전략을 내어놓던 남자들. 침묵하는 법, 각각의 개개인을 '견뎌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말이 많아질수록, 말할 것을 강요 당할수록, 점점 침잠하고 잦아드는 송교수의 미간 주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다른 하나. "억압자들의 지식 / 이것은 억압자들의 언어이네 // 그러나 당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이 언어가 필요하네(knowledge of the oppressor / this is the oppressor's language // yet I need it to talk to you)". 미국 이주자들의 신산스러운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테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규범적인 '표준 영어'와 소수인종이 사용하며 규범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러 방언들의 문제도. 지식-언어-억압-권력, 그럼에도 이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순-분열-역설-자의식. 이 구절을 보고 올해 여성영화제에서 보았던 한국 단편 <파마>가 떠올랐다. <파마>는 결혼이주여성과 결혼이주여성을 맞는 한국 사회에 대한 영화다. 이주여성으로 나오는 출연자는 재밌게도, 그리고 천연덕스럽게도 한국인 연기자다. 유머와 위트를 잘 구사하는 영화인데 주제의식이나 문제의식은 정말 여러모로 묵직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영화였다. 그 중에 정말 일부분만.
이주여성은 막 입국해서 '시어머니'를 따라 재래시장의 미용실에 들어와 있다. '시어머니'는 자기가 돈을 쓰고 있다는 걸 강조하면서 이주여성에게 옷을 사주고 파마를 해주지만, 사실 이 여성의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한국에서는 '촌스러운' 것일 뿐이다. 말이 한 마디도 안통하는 사람들은 이 여성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지만(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다루듯이 말이다. 마치 언어를 모르면 사회적으로는 '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니 자기들 뜻대로 막 다루고 귀여워해주고, 그러다 짜증나거나 맘에 안든다 싶으면 화를 마구 내고 혼낼 수 있다는 듯이. 이는 이주'여성'이었으니 가능했을 이야기일 것이다. 사회가 젊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의 스펙트럼에서. 반면 흔히 이주'노동자'로 표상되는 이주'남성'들에게 한국 사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우한다), 아무것도 소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변의 한국인들은 끝까지 이 이주여성에게 '한국어'로만 말을 건넨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범람하는 한국어는, 차라리 어떤 폭력처럼 느껴진다.
예전에 김연수 소설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주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 문학을 쓰게 하는게 목표라고 말한 적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를테면 한국어와 한국문학의 결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즉 한국 문단의 배타성과 주제 중심성(문학 미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학의 주제와 작가 생애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문단의 관행)을 벗어날 수 있다는 요지였다. 동의할 수 있는 구절이지만, 한편으로는 난 이런 목표가 위험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주자들이 구사하는 한국어가 한국인과 한국문학에게 어떤 의미와 효용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뿐, 한국 이주자들에게 한국어가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뷰는 짧았기 때문에 소설가가 하는 생각을 다 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한국의 지배언어인 한국어로 이주자들에게 말을 건네되, 그리고 한국어로 말을 하되, 그것이 한편으로는 "억압자들의 언어"일 '수 있다'는 점을 더 깊게 감안하지 않는다면, 한국어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될까?
3. 오랜만에 사진기를 들고 나갔음. '출사'라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때문에 나간 것은 아님. 역시 지나친 관광지가 아닌 절은 죠쿠나~
절에 가면 누구나 찍는 풍경(風磬) 사진 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