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독서노트 / 2010/10/25 21:07
나는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작품(oeuvre), 책, 문장, 관념에 생명을 불어 넣는 비평에 대해 꿈꾸지 않을 수 없다. ... 이러한 비평은 판단이 아니라 삶의 징후를 증가시킬 것이다.  _미셸 푸코

그런 나쁜 습관에도 불구하고 지도 교수가 훌륭한 보호자로 보이기 떄문에 여러분이 꼭 그와 함께 논문을 작성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일관성 있게 정직하지 않도록 하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복사라는 알리바이에 빠지지 말 것! [...] 종종 복사는 하나의 알리바이로 이용되기도 한다. 수백 페이지의 복사물을 집에 가져 와서는, 그 복사된 책에 대한 간단한 수작업만으로도 그 책을 소유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복사물의 소유는 책 읽기를 방해한다. [...] 그것은 일종의 수집 현기증이며, 정보의 신자본주의다. 복사물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일단 복사를 하자마자 읽고 곧바로 기록하라. 정말로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전의 복사물을 소유하기(말하자면 읽고 기록하기) 이전에는 새로운 것을 복사하지 말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누군가 여러분이 쓴 것을 이해하는지 확인하라. 외로운 천재 놀이를 하지 마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_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신을 드러내는 것, 죽을 수 있는 것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으로 번뜩이는 사람들이 살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비평가라고 부른다. 비평가란 무엇인가? 죽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했던 사람이다. 서양과 북아메리카의 큰 수도에는 죽어서 부활할 수 있는 사람들과 부활하지 못하면서 죽이기만 하는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적 삶이라 부른다. 나는 문화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삶이라는 단어는 이보다 더 부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_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옛 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극소수이긴 하나 사랑에서 영원한 여행을 찾는 이들도 있다. 이 후자의 부류는 어머니 대지와의 접촉을 꺼려야 하는 멜랑콜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향의 우울함으로부터 그들을 멀리 벗어나게 해줄 사람을 그들은 찾는다. 그런 사람에게 그들은 충성한다. 인간의 체질을 논한 중세의 책들은 이러한 인간형이 품고 있는 먼 여행에 대한 동경을 알고 있었다. _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카르투지오 패랭이꽃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외롭게 보인다. _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2) 2010/12/28
젠장  (0) 2010/10/26
오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0) 2010/10/25
자아에 대한 설명  (0) 2010/10/24
아 재밌겠다  (0) 2010/10/20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10/24 19:19

며칠 간 피똥싸면서 한 요약과제 =_= 사실 매일 붙잡고 있진 않았고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만... 원문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하기 부담스러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제출 전날 피토하며 겨우 끝 마치게 되었다. 요약의 질이 높다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일단 텍스트를 내가 풀어서 한 번 써봄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해 안되는 소리는 거의 다 뺐으니... 흑. 어서 번역본이나 나와라.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by Judith Butler
1장 ‘An Account of Oneself’의 요약


  행동하는 것에 대한 탐구, 즉 도덕 철학은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는가? 오늘날 도덕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도덕적인 탐구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아도르노는 “도덕적 탐구는 언제나 공동체의 삶에서 도덕의 행동 규범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의문에 부쳐질 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집단에토스는 언제나 보수적이며, 여러 난관과 불연속적인 것들을 억압하는 허위의 통일성을 강제한다. 그렇기에 집단에토스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을 때에만(이때 집단에토스는 인용부호 “”를 달고 등장한다) 그래서 이 보수적인 에토스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 때에만, 도덕적인 질문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부호를 단 “집단에토스”는 이제 자신의 집단성 혹은 공통성이라는 가상(假想)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도구화한다. 또한 “집단에토스”는 일단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하면 폭력이 되어버린다. 폭력으로서 “집단에토스”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현재에 강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빛을 가리운다. 여기서 도덕성은 폭력적인 “에토스”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출현한다.

  아도르노는 폭력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이 출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정식화도 제공한다. 즉, 폭력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에 대한 요청에 대한 맥락에서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이란 것이 개인을 포함하지 못하기에 “보편”에 대한 요청이 곧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게 되는 경우, “보편”은 곧 폭력이자 개인과 상관없이 단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현존하는 사회 조건을 무시하는 “에토스”는 폭력이 된다. 이런 “에토스”가 특수성에 반응하지 못하고,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개인들에게 전유될 수 없을 때, “에토스”는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개정하기 위한 경합의 장소가 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보편적인 것(예컨대 사회적 조건, 도덕규범 등)과 특수한 것(예컨대 ‘나’) 사이의 어긋남과 불일치는 언제나 도덕적 질문을 위한 장소이다. 아도르노에게 도덕성은 어디까지나 경합에 열려 있는 일련의 보편 규칙을 개인들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렇게 개인의 자리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시켜 초연한 존재로 다루는 실수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점을 잊지 않는다. 물론 ‘나’ 없이는 도덕성이 존재할 수 없지만, ‘나’는 자신을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도덕규범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 혹은 도덕규범은, ‘나’를 인과적으로 생산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나’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는 ‘나’를 초과하고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에 이미 항상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가 도덕규범에 순응해야한다거나, 도덕규범과 궁극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나’를 이해함에 있어 그러한 도덕규범 혹은 “에토스”의 발생적 근원과 사회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에토스”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사회이론은 언제나 ‘나’가 생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할 때, ‘나’는 언제나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히 인식론적 질문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체가 규범들을 전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주체의 존재론적 장을 제공할 수 있는 규범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과연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주체가 될 수 없는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규범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까? 사회적 존재론의 영역에서 주체가 스스로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과정에 규범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을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Scenes of Address)

  여기서는 주체가 도덕성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주체의 생산에 있어 도덕성이 갖는 힘에 대해서 고려해볼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반추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상처 받고 고통 받을 때에만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나 고통 겪는 사람들의 옹호자들은,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를 질문한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은 기억을 만든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양식은 자아가 곧 고통의 원인이므로 특정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특정한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다름 아닌 어떤 기성의 권위이다. 정의와 처벌의 체계로서 권위는 우리를 호명하며, 우리는 그 권위에게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써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 행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게 된다. 요컨대, 니체에게 설명가능성/책임성(accountability)은 기성 권위의 위협과 비난을 받은 뒤에야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니체식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는 아니다. “너”를 알고 이해하려는 욕망과 처벌이 아닌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고 서술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마주할 때에만 설명을 시작한다.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해 나에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 즉 “그게 너였어?”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만, 우리는 설명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자아를 설명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서사(narrative)의 형식을 취하며, 말이 되도록 사건의 이행과정을 설명할 능력 뿐 아니라 서사의 목소리와 권위에도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침묵할 수도 있다. 침묵은 나에게 던져진 질문의 형식과 또 질문을 던진 사람에 대해 그리고 질문자가 호소하는 권위의 정당성을 의문에 던지거나, 혹은 침묵 속에서 질문자가 끼어들 수 없는 자율성의 영역을 보존함으로써 장면 안에 존재하던 관계를 바꾸어 낸다. 이렇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에 대해 진술을 거부하는 행위가 갖는 여러 차원의 의미는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scenes of address)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니체는 이러한 ‘대화’의 장면, 즉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을 완전히 고려하지는 않았다. 니체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사법적 체계의 처벌 위협에서만 도덕적 질문이 만들어지고 설명이 시작될 뿐이다. 이러한 위협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도덕 뿐 아니라 영혼의 국면까지 생산한다. 니체는 이러한 사법적 체계와 처벌 위협의 도덕체계에 귀속되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구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공격과 같은 범위에 걸쳐 있고, 삶의 근원으로서 공격을 금지하면 삶 자체도 금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고통을 입히더라도, 니체에게 이러한 공격과 고통은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분이며 심지어 일종의 생명력을 구성하기도 하므로 쉽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덕성은 차라리 부정적인 의미까지 갖는다.

  푸코는 감옥의 훈육 권력에 대해 설명한 바 있지만, 반성적 주체의 출현에 있어서 처벌 장면을 일반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푸코는 도덕과 ‘양심의 가책’이 어떻게 니체 식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말년의 푸코에게 주체란 일군의 코드와 규정, 혹은 규범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는데, 주체는 (1) 자기의 구성을 제작(poiesis)의 종류로 드러낼 뿐 아니라, (2) 자기제작(self-making)을 더 넓은 비판의 맥락에서 움직이도록 한다. 즉 푸코의 자기제작은 무로부터(ex nihilo) 급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떤 규범에 대한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의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는 늘 자기 자신의 형성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늘 윤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과정을 지지하는 “주체화의 양식”과 “자아의 금욕주의” 같은 자기활동성의 형식들이 도덕적 행위를 구성한다. 또한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실천 과정에 있어서 ‘비판’은 주체가 속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지평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아의 미학에 관여함으로써 “진리의 정치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의 과정 안에서 주체의 탈종속화를 보장”한다.

  푸코는 도덕을 니체처럼 창조적인 충동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니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도덕이 창안적(inventive)이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푸코에게도 주체화/종속화라는 푸코의 설명에서 보듯이 “나”는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생성될 수 있지만, 이러한 생성 과정은 니체처럼 자신을 꾸짖고 자책하는 심리적인 행위성의 결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아가 어떤 외부의 질문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만들고 형성하는가하는 문제는 열린 질문까지는 아니어도 또 하나의 도전이다. 요컨대, 도덕규범이 필연적으로 주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주체가 이러한 규범을 자유로이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방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택할 수 없었던 조건들과 갈등하고 투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만 도덕/윤리적인 주체는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형성과 행위의 구성 맥락이 완전히 자기에 정초해 있지 않다면, 그래서 주체가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하고 자기 스스로도 완전하게 인식해낼 수 없다면, 이러한 주체에게 행위에 따른 개인적·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주체는 윤리적 고려와 인간의 행위성 자체를 훼손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을 불가능한 기획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불투명성은 어쩌면 주체가 관계적 존재, 즉 관계성의 근본적인 형태를 요구하며 관계의 맥락에서 형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불투명하다면, 또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가 윤리적 책임감의 현장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에 대해 불투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주체는 윤리적으로 속박되고 이 속박을 유지한다고 말이다.


푸코적 주체(Foucaultian Subjects)

  푸코에게 자아구성의 문제에서 자기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진리체제(regime of truth)이다. 진리체제의 용어는 어떤 존재의 형식을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의 여부를 사전에 결정하면서, 주체의 본 모습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진리체제가 제공하는 규범은 자기제작에 따르는 일군의 결정에 틀과 참조점을 제공하면서 협상에 열려 있을 뿐, 우리를 결정론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코의 핵심은 우리와 진리체제의 규범이 언제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 외에도, 진리체제와 맺는 모든 관계가 곧 나와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다. 따라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자기 반성적 차원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진리체제는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를 실현하고 통치하지만, 이 통치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제작의 과정 속에서 항상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체제에 대한 의문은 진리체제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즉 진리체제를 문제 삼는 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이며, 이는 곧 나 자신에 대해 설명(account)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가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은 때로 자신의 존재조건과 관련을 맺는 진리체제와 자신을 동시에 의문에 던지면서 주체로서 인정불가능성을 감행하는 것이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인정가능한 주체인지에 대해 의문에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와 타인들이 진리체제 내부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규범은 나-너(타자)라는 이자 관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규범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총체성이나 불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정의 실천 속에서, 타자의, 혹은 타자라고 하는 인정불가능성이 발생시키는 인정의 붕괴와 파열이 진리체제의 규범적 지평을 문제 삼는 경우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보지 못한 점이지만) 다른 이를 인정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 즉 현존하는 진리체제에서는 언제나 충족될 수 없고 실패하는 상호 인정에 대한 욕망과 투쟁은, 진리체제의 규범들을 비판적으로 심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진리체제를 열어놓는 것은 진리체제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정욕망 속에서 진리체제 속의 나를 문제 삼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곧 미덕의 신호이자 윤리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진리체제에 대한 논의를 일인칭 관점을 택한 윤리적인 질문의 맥락에서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이자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을 단순한 형태로 직접 던지게 되면, 나는 사회적인 규범성의 영역 뿐 아니라 권력의 문제 틀에도 즉각 포획된다. 장면 속에 “나”와 “너”가 존재하더라도, 규범적인 프레임이 이 출현과 조우에 필수적이라면 규범은 나의 행위를 규제할 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만나는 장면의 출현도 좌우하게 된다. 또한 윤리의 영역은 사회적인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은 방향을 쉽게 상실한다. 이런 경우 만약 “나”가 “너”에게 인정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는 나 자신의 사적 근거에서 인정을 제공하지 않게 된다. “나”는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규범에 종속되며, 따라서 “나”는 어디까지나 규범의 행위성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가 규범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정도만큼 “나”는 규범에게 사용된다. “나”는 “너”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결국 내가 규범과의 싸움에 휘말려들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규범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포스트 헤겔적인 질문(Post-Hegelian Queries)

  헤겔이 지적하듯 인정은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동시에 나는 인정을 받게 되며, 또한 내가 인정을 제공한 형식도 잠재적으로 나에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두 주체 사이에서 인정이 가능해질 때 암묵적인 상호성의 조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정(recognition)은 헤겔이 지적하듯이 나와 타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호적인 행동에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구조적 동일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alterity)과의 만남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타자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헤겔적인 타자는 언제나 외부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탈-아적(ecstatic)이며, 따라서 나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에서 나 자신을 나의 밖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를 말하고 “나”를 알고 또한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일인칭 관점이 탈구되는 일인칭 너머의 관점에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나도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이며, 따라서 나 자신으로 귀환하는 여정의 최후의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겪는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되며, 따라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에는 과연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이 존재한다. 이렇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조건은 우리가 우리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 밖의 외부적 매개, 즉 규범이나 관습의 힘에 의해서만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헤겔적인 인정의 주체는 이렇듯 불가피하게 상실과 엑스타시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교환은 교환에 참여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규범의 언어와 관습, 그리고 침전에 의해 조건화되고 매개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묘사하는 인정투쟁은 다름 아니라 이자 관계가 사회적 삶을 이해하기 위한 참조점이 되기엔 부적합하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이자 관계에 대한 천착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그 무엇, 예컨대 ‘인륜성(Sittlichkeit)’이다. 다시 말해, 이자 관계의 교환은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어떤 규범을 향한다. 또한 인정의 무대에 서기 전에 서로를 인지하고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로를 독해할 수 있는 시각적 틀, 즉 이자 관계를 초월하는 규범 안에 들어갔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타자는 시각 장의 규범성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나의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내적 능력’을 통해서 나에게 인정을 수여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반응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시각 장의 규범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시각 장의 규범성은 타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인식론적인 장일 뿐 아니라 또한 권력의 작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개인의 얼굴은 쉽게 읽히고 다른 이들은 쉽게 읽히지 못하게 되는 걸까?


“너는 누구인가?”("Who Are You?")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정에 대한 사회이론은 주체의 인지가능성에 있어 비개인적인 규범이 작동한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실제 일상에서 우리는 주로 가까운 이들과의 생생한 교환 속에서 규범과 접촉하고 타자를 만나며, 우리가 누구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카바레로는 이러한 인정의 질문이 마치 사람됨의 그릇에 특정한 내용을 채워야 되는 것인 양 우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카바레로가 보기엔 질문을 던질 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 자체가 이 질문의 함의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한다.

  상호 인정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질문은 직접적인 질문으로, 이는 타자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타자관은 타자의 독특함과 대체불가능성을 가정하면서, 헤겔식의 상호 인정 모델이나 타인에 대해 더 일반적으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제한한다. 또한 이 질문에 함의된 ‘누구’라는 것은 이타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누구’냐는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처럼 도덕적 책임의 귀속과 설명가능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알려질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카바레로는 타자에 노출되는 존재로서, 그리고 취약한 존재로서, 또한 서로의 독특성(singularity) 안에서, 어떻게 이 필연적이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만남을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살핀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갇혀서 오직 나에게만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너”를 위해, 그리고 “너”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 속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나”가 말을 걸 “너”가 없다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너”와 연관해서만 “나”를 지칭할 수 있고, “너”가 없다면 “나”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성을 삭제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헤겔이 논의하는 바 이자 관계에서 사회적 인정이론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논의이다. 카바레로는 오히려 사회적인 것을 이자 관계에 정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카바레로는 그래서 “너”를 무시하고 “나”의 권리만을 칭송하는 모든 개인주의적 유파는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타락과 “너”의 우연성을 회피하는 대신 “우리”라는 집단적인 대명사를 특권화하면서 내부의 도덕에 천착하는 유파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쓴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너희들은 가능한 우리 편이며, 그들은 적대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나는 꼴사납고 너는 물론 불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너”라는 타자를 만날 때 “나” 자신을 드러냄으로써만 나 스스로의 독특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신체성에서 나온 삶의 특질이므로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적 영역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독특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카바레로가 보기에 자신의 사회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공성의 일부분이다. 또한 카바레로는 “나”의 독특함도 타자에게 드러나지만, 타자의 독특함도 “나”에게 드러난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것 때문에, 즉 우리의 독특성 때문에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독특성을, 나 스스로가 만남의 장면에서 드러났음을, “나”와 “너”가 서로의 독특성 때문에 묶여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가능하게 만들고자 할 때 사용하는 규범은 완전히 내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규범이 출현하는 시간은 내 삶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규범은 나의 생과 나의 죽음에 무관심하며, 나와 다른 시간에 존재하기에 나의 시간을 가로막기도 한다. 푸코는 이렇게 적는다. “담론은 삶이 아니며, 담론의 시간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담론으로서 제시하는 “나”에 대한 설명은 살아 있는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의 말은 내가 그 말을 할 때 탈취되어, 내 삶의 시간과 같지 않은 담론의 시간에 차단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규범의 무관심이나 방향상실 같은 것이 나의 생존을 추동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은 담론을 통해 회복되거나 확장될 수 없지만, 이는 불가지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불가피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나”의 것으로서의 “나”의 관점이 차단되고 탈취되는 것은 무엇이 인정할만한 설명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규범의 작동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규범에 어느 정도 순응하거나 협상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에서 설명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것에서 몰수되는 경우에만 완성될 수 있다. 오직 탈취 속에서만 “나”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을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서사는 “나”의 것이 아닌 무엇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만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를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의 독특함과 서사적 권위는 이렇게 규범의 관점과 시간에 어느 정도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다만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태를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그것은 지시체의 회복 불가능성과 폐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불가능성은 서사를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라캉이 얘기하듯, “허구적 방향”에서 서사를 생산한다. 이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차 반복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개연성 있는 판형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 여러 판형 중에 어느 것만이 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또한 내 서사의 조건, 내 서사의 주제에 종속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에 몸이라는 지시체가 있다. 몸은 내가 가리키고 지시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다시 말해 심지어 내 몸이 어디에 갔었고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함에도 완전히 서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몸이 있다. 따라서 몸이 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온전한 회상이 박탈당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을 정리하자면, 나의 독특성을 설립하는 서술 불가능한 (1)드러남(exposure)이 있으며, 내 삶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거듭하여 인상/자국을 형성하는 회복 불가능한 (2)일차적 관계(primary relations)들이 있다. 따라서 나의 (3)부분적인 불투명성(partial opacity)을 확립하는 역사가 존재한다. 여기서 (4)규범(norms)의 존재를 고려해야하는데, 규범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촉진하지만, 내가 지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독특성의 역사를 확립하려는 순간 나를 대체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탈취 현상은 내가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설명함으로써 내 설명의 서사구조가 (5)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structure of address)에 의해 대치된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구성적 통약불가능성(constitutive incommensurability)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나의 이야기가 뒤늦게야 도착하도록 만들고, 내가 서술하려고 하는 삶의 구성적 출발점과 전제조건의 어느 정도를 놓쳐버리는 방식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서사가 갑작스러운 사건 가운데(in media res)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의 손실을 회복하고 재구성한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기원을 픽션으로 만들고 우화로 만든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내고, 이 새로운 형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과거의 삶을 가진 “나”에 서사적인 “나”를 덧붙인다. 이러한 서사적인 “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계속 이야기에 효과적으로 더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서사적 관점에서 다시 나타나고, 또한 이렇게 더해지는 서사적 “나”는 문제가 되는 서사에 관점을 정박할 수 있는 순간에도 완전히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나에 대한 설명은 내가 정확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종속되어 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사적 재구성에 대한 나의 노력은 영원한 개정의 과정이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언제나 나에게 있으며, 또 나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윤리적인 실패로 간주해야 할까? 내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완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윤리가 소멸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투명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언어와 ‘너’에게 더욱 단단하게 묶어줄 관계성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윤리는 “자아”의 조건이 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눈멀게 하는 어떤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젠장  (0) 2010/10/26
오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0) 2010/10/25
자아에 대한 설명  (0) 2010/10/24
아 재밌겠다  (0) 2010/10/20
윤리, 단독성, 소설, 나  (4) 2010/10/13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9/03/15 18:19

1. 과히 나쁘지 않다. 끄덕 끄덕

-

2. 잠깐 동안 했던 임고 준비를 또 접어두고(ㅋㅋ;;) 그냥 쉬자는 마음으로, 이것 저것 가능성들을 재점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좀 더 나한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초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삶의 불확실성, 그로 인한 불안, 불안 끝의 절망과 우울증, 긴 우울을 헤치고 나온 뒤의 허탈한 해방감과 평온함,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제대로 껴안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 어차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임고 준비로 '도피'한다고 하여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또 뭐든 이상적인 것(the ideal)의 잣대로 사물을 대하지 않으면 성미가 풀리지 않는 내가, 설령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교사가 된다고 해도 5년 이상 버틸리 만무하니까. 무엇보다 교육학은 물론이고 영어교육론 등등도 내 식성에 안 맞으니까. 아아.. 임고 준비하며 들여다 보는 책들의 내용 중 흥미가 가는 분야가 있다면 화용론(pragmatics)이나 담화 분석(discourse analysis) 정도가 될텐데(좀 더 '순수'하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다면 통사론syntax 정도?) 임고에 쓰이는 교과서들은 잘해야 개론 수준을 못 벗어 나기 때문에... 하긴 그래도 양이 많으니 어렵다.

어쨌든. 당분간 타이틀은 임고 준비생으로 걸어 두고 다니려고 한다. 난 공식적으로는 임용고사 준비생이다. 흔하디 흔한 고시생. 왜냐면, 대학원에 진학 한다고 또 말하면 예전처럼 굳이 막지는 않으실테지만 엄마 아빠가 과외를 하라는 압력을 또 넣을 게 분명하니까 말야. :p 요새는 민법 책을 보고 있다는 한 친구님이랑 잠깐 얘기했던건데, 과외하기 싫어서 고시생하는 것 같다고-_-...;

-

3.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소설은 꼭 소장해 두어야 한다. 김형경씨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처음 만난 건 21세였는데, 그 때는 사실 '인구에 회자' 되던 소설이니까 읽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막연히, 아, 굉장히 정신 분석학적이군...이란 인상만 받았을 뿐. 소설 등을 읽으면 책 귀퉁이를 접어 두고 후에 그 부분만 다시 펴보는 습관이 있는 내가, 전혀 접어 놓지를 않았었다. 그 담에 만났을 때는 23세. 그 땐 내가 곧 세진이고 인혜였다. 그러니까, 인물과 적절히 거리를 두지 않고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그냥 몰입했달까.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최근에(25..ㅠㅠ) 다시 만났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하고 다시 읽었는데... 헉, 했다. 빌려와서 다시 읽다가, 책 귀퉁이를 꼭 접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라딘 마일리지로 주문(호호^.^)했다. 그 때 안 보였던 문구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젠 본격적으로 나를 분석할 수 있었다. 소설을 분석하면서, 특히 소설 속에 나오는 임상 상담하는 장면들을 보다 면밀히 읽으면서, 그리고 예전에 접했던 얇디 얇은 정신분석학 지식을 조금씩 동원해 가면서 말이다.

이제는 당분간 정신분석학도 다시 들여다 볼 요량이다. '정치적'인 독서 방식 말고(어떤 책이었던가에서 읽었는데. 정신분석학ㅡ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갖는 희한한 특징 중에 하나가, 자신이 해방적이고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학문을 한다고 믿는다고. 헐, 냉소적이구만~ 했다가 이내 끄덕끄덕) 철저히 자아를 탐색하는 도구로서 말이다. 이런 자아야 말로 근대의 산물이요 '개인의 발견' 이후에나 등장할 수 있는 신화적 대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무의식과 조금이라도 더 화해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대로 "사기 치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래서 요새 일상은 그리 나쁘진 않지만 엉망 진창이다. 기반이 없다.

-

4. 푸코의 짧은 글을 읽었다.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어김없이 너무나 푸코스러운 글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의 글을 제대로 독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보편적 지식인>이나 <구체적(특수한) 지식인>이라는 일반적인 이분법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지적했듯, 최근 수 년간 학계에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똑똑한 척 할 수 있는 말' 베스트 10위안에 들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탈맥락적이지 않나요?", "유럽 중심적이군요." 혹은 "당신은 도대체 어떤 xx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가요?" 류의 말일 것이다. 그 말의 적확성과 정치적 유효성 내지는 효과에 대해 무한히 긍정하는 것을 떠나서, 확실히 요즘에는 구체적 지식인, 특수하게 위치 지어진 지식 등을 언급하는 것에 더 점수를 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친 자본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느냐하는 점도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도 좀 답답하고.

어쨌거나 푸코는 그러한 이분법을 치워두고, 너무나 푸코 본인 스럽게도 "진리"와 "권력"을 문제 삼는다. 푸코에게 지식인이 보편적이냐 구체적이냐는 별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의 특수성을 거론하는 것은 그에게는 현상 기술적인 말일 뿐이다. 그냥 원래 지식인은 어쩔 수 없이, 태생부터 특수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다. 진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다르다. 허나 진리라는 것은 권력 밖에 있지도 않으며 권력이 박탈된 순수한 상태도 아니다. 진리의 지위, 그리고 진리가 행하는 정치적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 분석하고, 진리의 권력(혹은, 진리는 권력 그 자체이므로, 진리를)을 진리를 작동케 하는 헤게모니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특수한ㅡ단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부구조적이지는 않고 덧붙여 유물론적이며 이에 기반해 진리를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하는ㅡ체계(regime) 속에서,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이다.

이 말에 여러 가지 의미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게, 보편이냐 특수냐하는 구분이 그 자체로 명백히 정치적인 구분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씨가 했던 말대로, "인간 해방"(보편)을 말하는 백인 남성 지식인&담론과, '잘해야' "여성 해방", "게이 해방" 등을 말하는 여러 지식인&담론이, 애초부터 게임이 되겠느냐 말이다. 특히 한국에서 말이다! 그것들은 애당초 잘못된 구도였고, 애당초 피했어야 할 시스템이었고, 따라서 애당초 공격했어야 했을 이분법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문제틀(problematic)이었던 것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다른데 있다.

-

5. 그래, 임고 책이 아니라 이런 글, 소설을 읽고 블로그에나마 끄적거릴 수 있을 때, 나는 기쁘다.

-

6. 아, 맞다 가장 중요한 것. 동생이 강하게 주장해서 강아지를 입양해 왔다. 아빠가 모처럼 듣는 자식의 부탁인지라 이곳 저곳에 강아지 입양 공고를 낸 터라 총 3'마리'(마리라는 말이 과히 됴티 아니하다)가 입양되어 왔는데... 원래 같이 살고 있던 '해피'(이제는 완전 할머니다~)에 새로 입양한 아이를 더하면 4'마리'나 되는터라... 2'마리'는 다른 곳에 입양시킬 것 같다. 남매라는데 하나는 흰 털에 까망 점이 찍혔거나 까망 털에 하얀 점이 찍혔거나 한 강아지고 다른 하나는 약간 누런 털을 가진,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한 강아지 남매다.

결국 남는 아이는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이라나; 뭐라더나; 난 순혈인지 혼혈인지는 관심 없는데, 동생 님이 순혈을 극구 주장하여 돈을 좀 많이 들여 데리고 왔다. 40일 밖에 안되서 그런지 먹고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그리고 좀 많이 귀엽다 ㅠㅠ

아, 더 중요한 것. 이름이 무려 "지용"이다 ㅋㅋ 내가 지었음. 나중에 공연도 할지도 모른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견 해피  (2) 2009/04/12
오늘의 타로카드  (0) 2009/04/05
나쁘지 않은 일상  (2) 2009/03/15
맘에 드는 음악  (2) 2009/03/04
왠지 억울해  (2) 2009/02/23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9/19 00:34

만약 그 공동체가 바로 인종주의적 배제를 통해 구성된다면, 인종주의적 발언의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데 그 공동체를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 「문화의 보편성」.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p. 81.



마사 너스봄(누스바움)의 책을 읽다가 인용.

버틀러가 "만약"이라고 말했지만, 이를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오늘날 "인종주의적 배제"의 매커니즘을 갖지 않은 '공동체'가 과연 존재할까(국가는 말할 것도 없으니까)? 심지어 무한히 다양한 국가와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모인ㅡ따라서 더 이상 지배적인 인종이 없는 특별한ㅡ'공동체' 속에서도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종주의를 경유하지 않은 발화를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인종주의를 경유하지 않은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인종주의에 단순히 반대한다고, 우리는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는 순진한 다문화주의적 리버럴 좌파 인종주의자들과 거리를 둘 때 조차도,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은밀한 인종주의자들은 아닐까?

인종주의는 진짜 어려운 주제란 말이야 (..)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나오는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은,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것 이었다. 여태까지 볼 수 있었던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고 방법이었으니. 특히 인종주의 하면 딱 '흑인' 과 '라틴', 혹은 '홀로코스트' 운운하는 이야기들에 피곤해지기도 했고. 전부 다 미국-유럽산(産) 담론들. 한국에서도 뭐,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본격적으로 한국의 인종주의에 대해서 언급하는 글들은 찾기 힘든 것 같다. 다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폐지', 혹은 뭐 '인권', '다문화' 등등의 어휘로 그것들을 에둘러 풀어낼 뿐. 아마 인종주의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나 보다. 아마, 다들 그렇게 믿고 싶겠지.

푸코가 그 책에서 얘기하는 것은 인종주의 탄생의 역사적 비화랄까? 푸코가 보기에 인종주의의 탄생은 기존의 '주권적 역사'와 구분되면서, 16, 17세기 들어서 등장했다고 보는 넓은 범위에서의 "종족 투쟁의 역사" 내지는 "반역사"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족 전쟁의 역사" 관점 이후에 등장하였던(하지만, 푸코가 찬양하는ㅡ그러나 나중에 철회하는ㅡ"종족 투쟁의 역사"와 인종주의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가 '인종주의'라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국가'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반드시 '국가 인종주의'다. 또한 푸코는 이러한 "종족 투쟁의 역사" 이전에도 있었던, 예컨대 유대인에 대한 차별 같은 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놀라운 주장을 편다. 이러한 푸코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인종주의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담론을 세밀하게 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듯 하다. 사실 푸코가 인종주의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분석이 다소 미약하기는 하다마는..

물론, 게다가, 아직 이 책을 다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이어, Security, Territory, Popul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의(이건 세미나에서 다 같이 구해뒀음)와 그 이후의 The Birth of Biopolitic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의(아직 영역본이 출판되지도 않았다 한다)로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들을 다 보아야 하고, 『성의 역사』 1권의 5장 등을 꼼꼼히 참조해야겠지. 어쨌건 재미있고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는 분석들이라는 생각. 그리고 결국 이 일련의 세 강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니까(이기도 하니까), 꼼꼼히 읽어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건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 지반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치밀하게 알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 쿨럭 -_-


어쨌건... 마사 너스봄의 짧은 논문, 그리고 이 논문에 응답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답변을 모은 이 책, 은근히 재미있는 것 같다. 물론 짜증스러운 글들도 있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 책의 부제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애국주의"라는 말은,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 폐기 처분해줘야한다는 생각을 했을텐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너스봄의 센세이셔널한 질문, "순화된(purified) 애국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녀가 주장하듯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흐억.


덧) 버틀러의 이 짧은 글에서 "실행의 모순"이라고 번역된 "performative contradiction"은 일반적으로 "수행적 모순"이라고 번역하는 걸로 알고 있다. "실행의 모순"이 뭐람...;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방적 교육,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  (2) 2008/12/06
그냥 짧은 의문  (1) 2008/11/25
책을 훑다가  (2) 2008/09/19
"사랑의 은유"  (0) 2008/06/15
(다문화주의/사회에서) 전도되는 모더니즘  (6) 2008/05/01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12/12 20:24

출처:http://www.culturenews.net/read.asp?article_num=7794&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

이재원 / 그린비 편집장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도착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상가가 있는 반면, 이미 도착한 것 같은데 사실 도착하지 않은 사상가도 있다. 그의 주저 『에크리』(1966)의 국역본 출간 예고가 10년 전부터 있었지만 아직 그 흔적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전자의 경우라면, 사후 원고인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까지 차근차근 국역되고 있는 철학자 겸 역사학자 미셸 푸코(1926~1984)는 후자의 경우이다. 푸코의 저서가 16권이나 국역됐는데 “사실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푸코는 스스로 ‘권력의 이론가’라기보다는 ‘주체의 이론가’로 불리길 좋아했다. 그러니까 그의 주된 관심사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서구의 근대적 주체’가 만들어진 메커니즘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말과 글에서 ‘권력 테크놀로지’(혹은 권력 장치)에 대한 날선 비판만 읽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시종일관’ 주체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국역된 푸코의 1981~82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은 그가 왜 ‘주체의 이론가’인지, 그가 말하는 ‘주체의 이론’이 무엇인지를 (아마도 그의 유고작인 『성의 역사』의 3권 ‘자기에의 배려’보다 훨씬 더)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권력의 테크놀로지(지배)나 담론의 테크놀로지(지식)에 의해 구축된 서구의 근대적 주체보다는 규칙화된 자기 실천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주체의 또 다른 형상”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강의록의 편집자 중 하나는 푸코의 수고(手稿)에 의거해, 이 새로운 주체의 형상(혹은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이야말로 “푸코 저작의 개념적 완성과 완결 원리”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새로운 주체’란 누구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그것은 일단 ‘자기 인식’(“너 자신을 알라”[gnôthi seauton])을 특권화한 데카르트적 주체와 다른 주체이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 데카르트적 주체의 대척점에서 서 있는 주체, 즉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에 전념하는 주체를 발견한다. 푸코에 따르면 사실 이 자기 배려(혹은 자기 배려에 전념하는 주체)라는 관념이야말로 기원 전 5세기에 탄생해 기원 후 4~5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모든 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생활까지 관통”하고 있는 관념으로서, ‘주체성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핵심인 관념이다.

그런데 푸코는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에 종속된 관념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하는 ‘데카르트적 순간’(대략 16세기 말~17세기 초)에 뒤집혀졌을 뿐이다. 푸코가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관계가 전도된 이 데카르트적 순간을 문제삼는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 경유한 뒤에야 오늘날과 같은 서구의 근대적 주체가 완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주체는 권력의 테크놀로지만으로는 구축되지 않는다. 개인이 주체가 되려면 스스로 자신을 주체로 만드는 특정한 자기(자아) 테크놀로지가 결부되어야 한다. 요컨대 주체는 그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개인을 특정한 형태로 만드는 외적 방식과 개인이 자기 자신을 특정한 형태로 만드는 내적 방식이 서로 관계를 맺는 지점에서만 출현한다. 예컨대 민족국가와 결부된 주체(국민이자 시민)로서의 근대적 주체란 특정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특정한 자아의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산물이다. 여기서의 그 ‘특정한’ 자아가 바로 데카르트적 주체인 것이다(무리하게 도식화하자면, “서구의 근대적 주체=민족국가와 결부된 주체=훈육권력+데카르트적 주체의 결합”인 셈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염두에 둔 ‘새로운 주체’란 궁극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주체를 만든 기존 테크놀로지들과 전혀 다른 테크놀로지들이 새롭게 결합된 산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주체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권력과 자아 테크놀로지들의 개수가 무한히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테크놀로지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가 주목하는 ‘자기 배려’란 바로 그 가능한 ‘또 다른 자아 테크놀로지’ 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배려해야 할 자기는 도대체 무엇이며, 배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푸코는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들(특히 『알키비아데스』)을 분석하며 이를 설명한다. “배려해야 할 자기는 무엇입니까?”라는 알키비아데스의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영혼이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내 자신은 내 영혼”이기 때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때의 영혼(psukhê)이란 육체와 대비되는 실체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이다. 따라서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육체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주체, 즉 자신의 육체와 적성, 능력을 사용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영혼을 배려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신을 ‘배려’(epimeleia)한다는 것 역시 일련의 행동 양식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푸코는 지적한다. 그는 ‘배려’의 어원인 수련하기/단련하기(meletan)의 파생어들을 추적하면서 ‘배려’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자신을 점검하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통제하기, 자신을 주장하기, 자신을 해방하기, 자신을 존중하기, 자신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기, 자신에게서 환희를 느끼기 등을 포괄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배려란 이 모든 행동 양식들을 체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 전향/회귀해, 자기 자신을 변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이 모든 것을 일컬어 ‘자목적화’(auto-finalis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자목적화가 자기 내부로의 함몰, 즉 세계와 타자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전향/회귀-변형의 과정을 거치는 자기 배려는 우리를 정립하는 과정, 다시 말해서 세계와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비해 합리적 행동의 주체로서 행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푸코의 결론이다. “자기 배려는 행위 주체와 세계의 관계, 주체와 타자들의 관계를 조절하는 원칙이다.”

푸코는 언젠가 다른 글(「주체와 권력」)에서 이런 자기 배려의 목표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동시에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인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와 거기에 결부된 개인화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문제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물론 푸코가 ‘자기 배려에 전념하는’ 고대 그리스의 주체를 자신이 염두에 둔 ‘새로운 형태의 주체’로 곧장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 ‘새로운 형태의 주체’를 사유하는 데 자기 배려의 관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클 것이다.

만약 푸코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람들이 혁명의 포기 쪽으로만 전향/회귀하는 당대의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언젠가 혁명적 주체성이라 불리는 바에 대한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미 우리를 떠났고, 이 연구는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됐다. 어쩌면 우리는 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 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 등처럼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반영된 책들과 『주체의 해석학』을 겹쳐 읽으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몫을 수행하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12/12 20:19
교수신문에 있는 글들은 퍼오기 참 난감하다. 얼마 전엔 서 모 선생님의 글이 실렸기에 반가워서 퍼올랬더니 막 금지 금지 해놔서... 난 확실히 카피라이트에 대한 깜도 없고 카피라이트가 참 싫다. 카피라이트 막 해놓은 것 뿐 아니라, 서 모 선생님의 블로그에 있는 원문과 대조해 봤을 때 너무 많이 편집을 해놔서 정이 떨어졌다. 흥. 컬쳐뉴스는 무려 카피레프트인데. 솔직히 컬쳐뉴스에 있는 글들이 난 더 좋다. 뭐 어쨌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냥 옮겨 둔다..; 문제가 되면 자삭할께염


출처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4715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상복 / 목포대·정치외교학


프랑스 문예정책의 시조로 불리는 프랑수와 1세는 1530년에 왕립학술기관으로서 꼴레주 드 프랑스를 창설했다. 근 5백년의 역사를 갖는 그곳은 어떠한 제도화된 의무와 절차도 부여하지 않는, 자유롭고 개방된 지식 제공과 교류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프랑스에서 그 기관은 프랑스 최고의 학문의 전당으로 불리고 있다.

그곳에서 교수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광스런 일이다. 이는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는 1970년 겨울에 자신의 소망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당대 프랑스 최고의 헤겔 연구자였던 장 이뽈리뜨(Jean Hyppolite)의 사망에 따라 그가 맡고 있던 ‘철학적 사유의 역사’강좌를 담당할 교수직이 공석이 된 것이다. 푸코의 취임강의는 『담론의 질서』로 출간됐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학문이 이뽈리뜨에 빚지고 있음을 고백했다. 푸코와 이뽈리뜨의 만남은 푸코가 파리 고등사범학교입학 준비반에서 공부할 때인 194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보면 푸코가 이뽈리뜨의 자리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일로 다가온다.

『주체의 해석학』(L’Herm?neutique du Sujet)은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 푸코가 1981년 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진행했던 강의 내용을 정리해 출간한 작품이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푸코는 방대한 양의 강의(우리말 번역본 515쪽)를 통해 ‘주체’(sujet)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인 『광기와 정신착란』(1961) 이래 서구 근대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러한 주체의 형성과정에서 ‘담론’, 특히 지식 담론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진리의 외양을 갖춘 지식 담론이 어떠한 권력적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주체-지식-권력’의 근대적 관계 양식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역사학, 과학사, 철학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구축된 ‘고고학’과 ‘계보학’의 방법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근대를 역사적 진보의 산물로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근대 주체와 그 주체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지식 또한 보편적 진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식 속에는 근대적 권력의 전략이 은폐돼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분명 역사는 이성과 진보에 의해 발전하며, 지식은 모든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해주는 동력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계몽주의적 역사관과 지식관에 대한 근본적 도전인 것이다.

서구의 근대에 대한 그의 비판은 1976년에 출간된 성의 역사 시리즈 제1권 『성의 역사: 앎의 의지』에서 정점에 달했다. 근대인의 ‘정신’(『광기와 정신착란』), ‘신체’(『임상의학의 탄생』) 그리고 ‘행위’(『감시와 처벌』)는 실증적 분석을 지향하는 과학적 지식에 의해 철저히 대상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근대인은 자신의 모든 존재론적 조건과 행위를 통제하는 규칙과 원칙 및 도덕적 규범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존재, 즉 주체로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근대인의 성도 예외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1961년부터 열정적으로 진행된 푸코의 작업은 1976년을 기점으로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이는 푸코의 성의 역사 시리즈 제2권(『쾌락의 활용』)과 제3권(『자기배려』)이 1984년에 동시 출간됐다는 사실 속에서 명확해진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성의 역사 시리즈 2권과 3권이 1권과는 사뭇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근대적 주체 형성의 담론이 은폐하고 있는 권력의 논리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근대적 주체의 종속성에 대립하는 새로운 주체 형성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인 것이다. 많은 푸코 연구자들은 이러한 방향 선회를 기점으로 푸코가 구조주의자로부터 포스트구조주의자로 이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곤 한다. 또한, 푸코의 이러한 전환을 근대권력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고 개인의 윤리로 이행한 것을 의미한다는, 일정정도 비판적 해석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푸코의 이러한 전환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답은 결국 『주체의 해석학』에 대한 논의 속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84년에 출간된 성의 역사 2권과 3권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동안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윤리적 주체의 형성에 대한 꼼꼼하고 세밀한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푸코는 어떠한 방향에서 새로운 주체로서 윤리적 주체의 형성을 탐색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윤리적 주체는 과연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적 주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푸코가 지속적으로 견지하고자 했던 정치적 실천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인가? 『주체의 해석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들의 다양한 문헌들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푸코의 분석은 플라톤의 대화록 『알키비아데스』에서 출발하고 있다. 왜 그 책인가? 푸코에 따르면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대화를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는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라는 개념이다.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기록돼 있다. 우리는 이 경구를 자기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상 이는 자기인식이 아니라 자기배려로 해석해야 한다. 자기인식이란 대상화된 자신에 대한 지적인 앎이지만 자기배려는 다양한 실천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기인식과 자기배려는 전자가 자신에 대한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반면에 후자는 기존의 자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영혼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스 도시국가 시대에서 알키비아데스와 같이 특정한 계급, 즉 통치계급의 타인을 다스릴 필요성에 연관된 이 자기배려는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인간들이 영원히 수행해야 할 자율적이고 내적인 행위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자기배려는 은둔과 고행과 같은 자기고립, 타인(특히 스승)의 말에 대한 경청,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글쓰기, 자기와 타인 사이의 솔직한 대화 등 다양한 기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러한 기술들은 ‘자기의 테크놀로지’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배려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이외 어떤 외적인 목적이나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영혼과의 관계 맺기인 것이다. 푸코의 다음 주장을 음미해보자. “제우스는 누구일까요? 그는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존재입니다. 완벽한 순환성 속에 있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일종의 순수 상태의 epimeleia heautou, 바로 이것이 신성한 요소를 특징짓습니다. 제우스는 누구일까요? 그는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자기배려는 외견상 타자와의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고 존재하는 고립된 주체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외적인 것에 대한 의존 없이 오직 자기 스스로의 내적 의지와 용기를 통해 자신을 거듭나게 함으로써 자기 삶을 유도하는 윤리를 내면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참된 자율적 주체의 탄생을 예고한다. 푸코의 표현을 따라 ‘데카르트적 순간’에 의해 망각되고 상실되기 시작한 이러한 자기배려의 기술은 서구의 근대사회에서 배제된 인간들(종속적 주체들)의 진정한 해방이란 정치사회적·법적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양식을 통한 새로운 주체의 형성에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09/16 21:07

ㅡ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바를 확신하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당신은 또다시 변화하려고 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제기한 물음에 관련해 자리를 피하려고 하고 있으며, 반론이 당신이 말했던 바의 장소를 제대로 겨냥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려는가? 당신은 또다시 나는 사람들이 비난했던 바의 그러한 존재였던 적이 없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당신은 이미, 당신의 최근의 책에서, 당신을 달리 나타날 수 있도록 해주는, 당신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이 업신여길 수 있도록 해주는 주제를 정초하고 있다 :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당신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그곳에 있지 않다. 여기 이렇게 웃으면서 당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ㅡ 당신들은 내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또 그렇게 즐겁게 쓰고자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다소간 열에 들뜬 손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나의 기대를 옮기고, 그에게 지하통로를 열어주고, 그 자신으로부터 멀리 밀어넣고, 그에게서 그의 자취를 요약하고 변형시키는 돌출부를 찾아낼 수 있는 그리고 내가 길을 잃고 결국 다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할 두 눈에 나타날 수 있는 미로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에 집착하리라 믿는가. 한 사람 이상이, 의심할 바 없이 나처럼, 더 이상 얼굴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쓴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_Michel Foucault, <지식의 고고학> 서론에서
(민음사, 2000, 이정우 譯)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근에 나온 '성매매' 관련 서적  (0) 2007/10/14
사는 법을 배우기  (4) 2007/10/12
신분증명서의 원칙  (0) 2007/09/16
영원한 증인 中  (0) 2007/09/02
몸-도시  (0) 2007/08/20
Posted by 소이연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2.0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