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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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5/24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일기 / 2010/08/13 00:08

창문을 모두 열어 놓으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노래도 물을 흠뻑 먹은 듯 질퍽대며 어딘가 힘겨워 잘 들리지 않는다. 김현 평론가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산울림의 <청춘>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뒀는데, 폭우 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들기 전까지 무한반복해 들을 예정이다. 이 노래가 어쩐지 스물 아홉에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서른 넘어갈 즈음에... 비가 과연 쏟아지는 중이다.

황정은의 소설집을 완독했다. 너무 좋아서 어느 작품은 두 번 세 번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백의 그림자> 해설에서 이 소설집을 발표한 순서대로 읽어보라고 하기에 그렇게 읽었다. 그러자 과연 이 작가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게 느껴졌다. 부러울만한 속도로 말이다. 사실 초기 작품인 <마더>나 <소년>은 조금 평이하다고 느꼈지만(그래도 좋은 작품), 그 이후에 발표한 작품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좋았다. 내가 느끼기엔 신형철 평론가가 좋아할만한 스타일ㅡ평소에 하던 이야기에 부합하는 스타일, 즉 나 역시 좋아할만한 스타일ㅡ을 갖춘 작가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작가가 명사(특히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이 작가는 배수아를 좋아할까?). 같이 구입한 <백의 그림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한나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뒹굴거릴 수 있을 때 읽으려 한다.

대가족적인 삶에 대해 동경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왜냐면 어렸을 적 꽤나 오래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까), 최근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재)발견한 동영상 몇개를 보면서 그것도 꽤나 좋을 때가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2006년 겨울 <열린 교실> 때였는데... 점심 때 아이들과 함께 김밥을 싸먹고 비빔밥을 해먹던 때였다. 언제나 시끌벅적 했다. 어느 손은 당연하다는 듯 서툴게, 어느 손은 김밥을 좀 팔았는지 능숙하게 밥을 펴고 재료를 깔고 둘둘둘.. 물론 맛있었다. 그리고 큰 양철에 고사리며 도라지며 콩나물이며 참치며 참기름이며를 듬뿍 넣고 사깡에서 사온 공기밥을 털어 넣고 고추장을 넣어 슥슥비벼서 입안 한가득 넣던 10명의 사람들. 내 컴플렉스인 목소리가 많이 들려서 민망했지만 어쨌든.

짐멜의 에세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을 읽고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했던 건데... 아이들에게 예쁜 걸 입히고 좋은 걸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는게 과연 아이에게 좋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반응에 민감하기 때문에, 부모 욕심이라는게 보이면 그것에 은근슬쩍 응해버리기 쉽다. 그건 결국 아이의 감성을 부모의 감성대로 패턴화하는 것, 아이를 작은 부모로 만들어 버리는 것, 달리 말해 자극을 처리하는 방법을 (시행착오 끝에) 아이 스스로 터득할 가능성을 막아 버리고 이미 한 번 처리된 자극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아이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부모들이 조금 거북하다. 아이들마저 레디-메이드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어릴 때는 '촌스러울'수록 좋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회사에서 만들어 파는 장난감을 줄 필요도 없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아이들은 모든 사물에서 장난감을 발견하니까. 옷도 예쁜 새옷을 입히느니, 어디서 받아와 성장의 흔적이 묻은 헌옷을 입히는 게 좋다고 믿는다. 또 아이의 조기 교육이 필요하다면 학원에 보내고 비디오를 보일 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된다. 미메시스의 원칙.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 특별히 잘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듯 기다리면서. 그리고 아이들 특유의 변덕을 인내하면서. 여기 덧붙인 사진은 나는 아니고 동생 어릴 때인데, 모두 어디서 받은 낡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예쁘잖아.

결국 저마다의 방식이란 게 있는 법이어서, 예전 같으면 이기적인 행동 아니냐고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를 어떤 방식에 대해 납득하게 되어버렸다. 납득하게 되었다는 건 나를 그 방식에 던져 넣는 것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게 과히 나쁘지 않다. 관계에 이기적인 건 어디에도 없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결국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니까. 어쩐지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덧) 이게 앞서 언급한 김밥 씬. 이런 동영상이 몇 개 더 있는데... 아 배가 고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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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24 12:41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늘 새벽, 신경숙 소설가의 신간을 끝마침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썼다고 했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그 시간대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폈을 때는 어둑하고 눅눅한 새벽 3시였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 허리를 곧게 펴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제목과 소설이 정확히 상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아 좀 불만이기는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수작인 것 같다. 여느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을 읽기는 읽어도 늘 별다른 감동없이 읽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편집실에서, 낡디 낡은 보부아르의 책 앞면에 씌어있던 손글씨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 관계의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맺음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반전화와 편지와 전보만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던 시절의 청춘들은, 불가피하게 좀 더 깊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어도 관계도 좀 더 익을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내면에서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으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지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들ㅡ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와 퀵 메시지가 아니라, 어쩌면 침묵과 견뎌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재하거나 느리게 찾아오는 것들에 대한 환대.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해지는 것.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에게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말마따나 덥석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내가 이미 거쳐온 시간 혹은 지금도 거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관계의 부침(vicissitude)을,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여러 기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네에서 벤치에서 계단에서 혹은 누구도 앉자고 하지 못해 아예 선 채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들로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아침 해를 맞아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들.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온 신경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려하고 질투하고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간들. 그때의 냄새와 온도와 바람과 사소한 분위기나 오갔던 대화 같은 것들. 빈곤했던 기억에 얼마간 생생한 서사와 언어가 부여되면서- 기억이 비로소 재조립되고 있다. 그렇지. 기억이란 이렇게도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것이지. 그러므로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기억 뿐이겠지. 이것 외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이닥치는 기억을 견디느라 잠시 눈을 책에서 떼면, 머리 속으로 문장이 하나씩 깜빡깜빡 흘러갔다. 하나의 서술로도, 하나의 명제로도, 하나의 가설로도 문장은 재생되었다. 그 문장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책귀를 접어두는 걸로 갈음했다.

나의 20대 초중반은 '시시각각'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늘 바빴고 늘 일이 있었고 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망했지만, 늘 그 무게가 버거워 헐떡대며 꿇어 앉을까 벌렁 드러누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 단면이 지나면 다른 단면이 찾아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단면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시각각'은 점차 '시간'으로 누적되고, 누적된 시간이 임계점을 넘으면 '세월'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구잡이로 누적되어 쌓였던 나의 시간이 세월에 통합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점차 먹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진 청춘인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은 이제 시시각각이라기보다는 세월일 것임을 직감했다. 청춘 이후 세월 속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호품"은 어느 시인들이 말했던 대로 "그리움"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앞으로도 애도하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나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계속 사랑할 것이고 계속 질투할 것이고 계속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역사와 기억과 맥락과 그리움과 추억이 뒤섞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이며, 더 정직하고 더 여유롭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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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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