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킁.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와 더불어 사놓고 못 보고 있는 책... -ㅅ-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는 못사고 있다. 왜케 이 시리즈는 가격이 비싼겨;ㅅ;)
이런 저런 것들을 걸러서 읽자. 난 왜 이렇게 바디우의 생각이 무서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나의 계급이나 뭐 그런 것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솔직히 서구에서 '기독교'가 갖는 위치랄까 뭐랄까, 암튼 그게 완전히 와 닿지 않다보니, 왜 이렇게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이 사도 바울에 목을 매고 있는지 잘 모를 일이다.. 그런 담론이 한국에 넘어올 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잘 모르겠다. 별로 (적어도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의미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은. 아직은 판단 유보. 홍홍.
어쨌든, 강조는 비앙 :)
사도 바울, ‘다시’ 논쟁의 가운데 서다 알랭 바디우『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그러나 이렇게 말한 맑스 역시 잊은 것이 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반복이 꼭 비극-소극 짝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그 예외적인 경우 중 하나가 사도 바울(10?~67?)과 철학자들의 조우이다. 이들 간의 첫 번째 조우는 대략 51년경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등의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배꼽을 움켜잡은 채 파안대소하며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희극적이라고 할 만한 이 조우 이후 거의 20세기 뒤에 이뤄진 두 번째 조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현대 유럽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조우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1937~ )에 의해 촉발되어 지난 2005년 미국 뉴욕 주의 시러큐스 대학에서 제법 ‘진지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바디우인가? 바디우 이전에도 사도 바울을 언급한 철학자들은 부지기수이다(바디우 본인이 작성한 명단만 봐도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리오타르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바디우만이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의 두 번째 조우를 실제로 현실화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디우의 바울은 ‘사도’ 바울이기 전에 ‘투사’ 바울이기 때문이다. ‘투사’ 바울의 형상을 찾는 것 역시 바디우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로 그려진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새로운 투사였고, 이 새로운 투사로서의 바울이 갖는 동시대적인 의미는 동료 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번에 국역되어 나온 바디우의 1997년 저서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원래 제목은 “성 바울: 보편성의 정초”이다)는 바로 이 두 번째 조우의 발단이자 초대장 같은 책이다. 이 초대에 응할지 안 할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겠지만, 이 초대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보편성’의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기 때문이다. 흔히 보편성이란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모든 사람/사물에 적용되는 어떤 성질/원칙이다. 그런데 바디우의 설명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정초한 보편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는 기존의 모든 차이와 분리를 무화시키는 무엇인가가 보편성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자와 후자의 보편성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실제 대상들에서 뭔가 공통적인 것을 ‘추출’해낸 것이라면(이런 보편성은 “……이지만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지만 인간이다”), 후자는 공통적인 것을 ‘창출’해냄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보편성은 “……이고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고 그리스도교인이다).
<'사도 바울'과의 두 번째 조우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사진)에 의해 촉발됐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적 주체’라는 새 로운 주체를 창안함으로써 바로 이 새로운 보편 성의 윤곽을 정초했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적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를 창안함으로써 바로 이 새로운 보편성의 윤곽을 정초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 위해서 그/그녀가 반드시 어떤 특정한 귀속 조건(민족, 성별, 신분 등)을 미리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봤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28)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는 묘한 ‘도약’이 있다. 통상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것 안에서 통합된다. 가령 성별의 범주로 보면 그/그녀는 남성/여성이지만, 종(種)의 범주로 보면 인간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성별)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공통적인 것(종)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그녀의 정체성은 연속적이다, 혹은 말 그대로 동일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는 이런 연속성(동일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범주는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무화’된다. 그러므로 이때의 공통적인 것은 기존의 차이와 분리를 뛰어넘는(여기서 “뛰어넘는다”는 “극복한다”보다는 “초월한다”에 가깝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은 차이에 ‘무관심’하다) 제3항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가 창안되려면 그 이전의 주체에게서 미리 일종의 단절이 일어나야만 한다. 열정적으로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담하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을 사도 바울로 뒤바꿔놓은 것과 같은 단절 말이다.
바디우는 이 단절을 ‘사건의 도래’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단절이었다. 바디우가 그 안에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레닌에게는 1914년 8월에 발생한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 혹은 1917년 2월 혁명이 그런 사건이겠다(흥미롭게도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 시기를 레닌의 ‘철학적 계기’라고 부른 바 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실이 아니다. 사건은 “한 시대의 열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관계들의 변화”, 즉 가능성의 열림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음”) 때문이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열린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사건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건은 단절이기에 “……이 아니라 ……임”의 논리를 갖는다. 바디우에 따르면 여기에서 “……이 아니라”는 폐쇄적인 특수성들을 해체하는 과정이고, “……임”은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에 주체들이 동역자(즉, 사도)로서 임해야 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은 주체(화)와 하나의 구성적 짜임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 이 사건을 사건으로서 볼 수 있는 주체(사도)가 있다. 이 주체는 이 사건을 사건이라고, 혹은 이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의 사상가”가 “시인”인 동시에 “투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건의 사상가는 늘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하기에 시인(시인의 어원이 그리스어 ‘만들다’[ποιέω]인 점을 염두에 둬라)이며, 그 보편성에 근거해 새로운 세계를 열기 때문에 투사이다.
그리고 두 가지 공식이 있다. “……이 아니라 ……임”이라는 사건의 논리.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 이 두 가지 공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주체는 사건의 논리에 따라 이미 도래한 사건을 저지하려는(또는 보지 못하는) 힘을 해체하고, 주체화의 논리에 따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료들을 사건에 충실한 주체로 만듦으로써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걷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진리의 사건=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바로 이것이 바디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가 왜 첫 번째 조우 때와는 달리 희극적이지 않았나를 이해 할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들이다."-본문에서
사건, 주체성, 보편성. 바로 이것이 바디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가 왜 첫 번째 조우 때와는 달리 희극적이지 않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들이다(따라서 이 두 번째 조우에 “철학자들 한가운데의 성 바울: 주체성, 보편성, 그리고 사건”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인류의 위대한 실험이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체의 진리가 상대화되고, 인류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원칙이 의심받으면서 국가에 맞서는 정치가 정체성의 정치로 축소되어버린 오늘날, 우리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려 한다면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의 의미를 몸소 보여준 ‘우리의 동시대인’인 사도 바울을 외면할 수 있을까?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소 뒤처진 감이 있지만, 우리는 뛰어난 국역자의 도움으로 비로소 바디우가 내놓은 ‘미래를 위한 내기’에 동참할까 말까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이 내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철학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있다. 아감벤은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를 “……이지만 ……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남겨진 시간: 로마서에 대한 주해』, 2000)의 논리로 다시 읽는데, 이는 사도 바울을 “보편성의 정초자”가 아니라 “급진적인 분리의 주창자”로 읽는 방법으로서 바디우의 주체화 논리와 첨예한 쟁점을 형성 중이다. 그리고 『까다로운 주체』(1999)에서 『꼭두각시와 난장이: 그리스도교의 도착적 핵심』(2003)[이 책의 국역본 제목은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에 이르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표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의 결과 역시 곧 책으로 발간될 예정이며, 그리고 또…….
아무튼 우리에게는 더 많은 판단 자료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바디우의 말마따나 많은 사건들, 심지어 멀리 떨어진 사건들조차 여전히 우리가 그것들에 충실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재원은 중앙대 대학원 영문과(비평)를 졸업했으며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장으로 일했다. 『사진에 관하여』, 『속도와 정치』, 『타인의 고통』, 『불복종의 이유』, 『은유로서의 질병』 등을 옮겼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철학자가 쓰는 가면에 의해 속고 있다. 조로아스터와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인도인과 엘레아학파, 고대 이집트인과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와 중국인ㅡ모든 종류의 혼동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철학자의 덕에 대해서, 그의 금욕주의에 대해서, 지혜에 대한 그의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마스크 아래에 숨겨져 있는 특유의 고독과 감성, 위험한 실존의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목적들을 사람들은 인식할 수 없었다. 철학의 비밀은 그 시원에서부터 상실되었기 때문에 미래에 발견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철학은 역사적으로 퇴화하는 방식으로만, 자신에 적대하는 방식으로만, 그의 마스크에 집착하는 방식으로만 발전해 왔다. 능동적인 생과 긍정적인 사유의 통일성 대신에, 사상은 생을 재단하고, 소위 더 높은 가치들을 생에 대립시키며, 그러한 가치들에 따라서 생을 측정하며 제한하고 생을 단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된다. 사유가 이처럼 부정적인 것이 되는 동시에, 생은 가치를 잃고, 능동적이기를 그치며, 가장 연약한 형태들로, 즉 소위 더 높은 가치들과 양립할 수 있는 병약한 형태들로 환원된다. 능동적인 생에 대한 '반동'의 승리, 긍정적인 사유에 대한 부정의 승리다. 철학에게 그 결과는 심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입법자로서의 철학의 두 가지 덕은 기성의 모든 가치들, 즉 생보다도 우월한 가치들에 대한 비판, 그러한 가치들이 의거하는 원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 다른 원리를 요청하는 생의 가치의 창조였기 때문이다. 해머와 가치전환. 그러나 철학이 퇴화하면서,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는 복종적인 철학자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기성의 가치들을 비판하는 자 대신에 그리고 새로운 가치들과 새로운 가치평가를 창조하는 자 대신에, 용인된 가치들을 보수(保守)하는 자가 출현한다. 철학자는 더 이상 생리학자이거나 의사가 아니고 형이상학자가 된다. 더 이상 시인이 아니고 '공적인 교사'가 된다. 그는 자신이 진리와 이성의 요구에 복종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의 요구의 배후에서 사람들은 자주, 그다지 이성적이지 않은 힘들, 즉 국가, 종교, 현행(現行)의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은 인간이 복종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부여하는 모든 이유들을 조사하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작업 이상의 것이 아니게 된다. 철학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도 그러한 진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게으른 호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철학은 자신으로 인해서 어느 누구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성의 모든 권력들에게 거듭해서 보증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순수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Nitezsche)
"철학은 인간이 복종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부여하는 모든 이유들을 조사하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작업 이상의 것이 아니게 된다." → 이런 학문을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나는 학문 분과로서의 '사회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흐름은 행정적이거나 학제적인 편리함, 혹은 아카데미 권력의 메커니즘으로서 분류된 '사회학'과는 거의 무관하다. 이러한 흐름은 어떠한 분과학문에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다만 여기서는 딱히 명칭이 떠오르지 않아서(^^;)
인용한 글의 말미에 붙은 니체의 말 때문에 떠오른 일인데, 예전에 '채식주의'가지고 어떤 친구와 논쟁했던게 생각난다. 그 친구는 내가 '채식'(이런 말을 나에게 붙이는게 참 부끄러운 삶을 살고는 있지만)한다는 것을, 단지 나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즉 자신의 삶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채식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엔 '채식'이라는 말이 이미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외압(타자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고 생각했기에, '채식주의'에 대해서 글도 쓰고 말한 것 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면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글 자체에 아무런 윤리적/도덕적 요구가 없으면 그 글은 정말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약간의 비난 섞인 말을 내뱉자, 그 친구는 그때서야 발끈하는 것 같았다. (사실 옛날에도 티격태격 했었지만-_-) '채식주의'가 '채식'과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채식주의'에 윤리적/도덕적 요구가 갖는 특유의 강압force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타자성이 제거된 철학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책과 책의 저자가 요구하는 특수한 요구들, 그 요구들이 자신에게 압력이 되지 않는 한에서만 책을 소비하는 것. 그것은 정말 최악의 독서법은 아닐까?)
그리고 지금 당장 떠오르는 친구가 있는데, 나는 이 친구에게 감사해야 할 듯하다.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나 때때로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 날이 종종 있는데, 내가 "어쩔 수 없지; 먹고 살려면 먹어야지 뭐;"라고 말하면 그 때마다 이 친구는 나를 혼냈다(-_-;) 여러 가지 말이 오고 가곤 했고, 나는 싸운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주위 사람들이 말리고는 했는데, 어쨌든 요점은 "그럴거면 아예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그 친구는 '채식'하는 친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