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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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06/28 22:18
그가 골수 수집가가 되는 것은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아마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어떻게 수집가의 특성이 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건 나에게 금시초문인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된다. 이 방면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것이 옛날부터 있어온 해묵은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다시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인용해보자. 어느날 그는 그의 서재를 보고 감탄하고는 으레 의무적으로 하는 물음, 즉 "당신은 이 책을 모두 읽었습니까?"라는 어느 속물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십분의 일도 읽지 못했습니다. 혹시 당신은 매일같이 본 차이나로 식사를 합니까?"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반성완 譯 에서


첫 번째 두려움은 독서의 의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머지않아 사라질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런게 사실이다. 특히 일정 수의 모범적 텍스트들이 그런 신성시의 대상ㅡ물론 그런 텍스트들의 리스트는 분야에 따라 다르다ㅡ이 되는데, 그런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금기이며 이를 어기면 눈총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두려움은 정독해야 할 의무로 불릴 수 있는데, 이는 첫 번째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읽지 않는 것도 눈총을 받지만, 후딱 읽어치우거나 대충 읽어버리는 것, 특히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로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어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ㅡ강의자들 대부분이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ㅡ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담론과 관계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한데 내가 경험해본 바로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 상대 역시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점차 보게 되겠지만,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기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하거나 평문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책읽기에 어떤 위험들이 들러붙는지를 부단히 강조해나갈 것이다. [...]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벤야민의 저 부분은 좀 웃겨서 퍼왔다. 원문엔 세브르 도자기라고 되어 있는데..
피에르 바야르의 책은 심심할 때면 펴보게 된다. 무엇보다 재밌다. 다른 책도 몇 권 번역되었는데 다른 것들은 별로고. 바야르의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지금 인용한 부분에도 등장하는 "눈총"이라는 말이 이 책의 핵심 단어인 것 같다. 그의 전공인 정신분석학에서도 그렇고.

버는 돈은 그다지 없는데 식비보다 책 구입비가 더 많이 나갈 수 있는 지금이, 그래도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서울 생활 시작하면 지금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할테니까. 밥도 대체로 사먹어야 될테고- 교통비도 많이 나올테고- 무엇보다 술값이 많이 들겠지. 그렇게 되면 통장 잔고를 끝없이 생각하며 필요한 책과 사고 싶은 책, 훔치고 싶은 책 따위를 끝없이 비교하며 갈등하게 되겠지.

그렇지만 책도 많이 사버릇해야 감식안이 생긴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땐 그래서 언제나 삐끗하기 마련이다. 최근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를 넘어 한국 동시대 소설을 섭렵(수집)하겠다는 의지로 소설책을 막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요샌 소설책도 양장본이 많고 비싸단 말이야.) 읽다가 재미없어서 내던져버린 책, 읽고 나니 너무 못써서 슬퍼진 책... 어떤 평론가는 나쁜 작품은 같은 이유로 나쁘고 좋은 작품은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좋다고 했는데, 나쁜 책에도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나쁜 경우도 있다. 이런 책이 열다섯권이 쌓일 때 쯤, 나는 비로소 쉽게는 출판사의 마케팅 스킴에 낚이지 않을 눈을 갖게 된 거 같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저자의 이력은 어떤지, 번역자의 이력은 또 어떤지, 출판사는 어딘지, 참고문헌은 무엇이 있는지 ,특히 유명한 저자들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책의 어느 부분에서 인용해 왔는지, 인용할 때의 태도는 어떤지, 서문의 분위기는 어떤지(저자의 철학적 입장이 나타난다), 으레 쓰는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따위로 내게 좋은 책인지 아닌지를 좀 더 쉽게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게 교양이라면 교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편협과 습관이라면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래도 아직 멀었지.

헌데 교양이란 말은 너무 넓은 말이고, 사실 내가 딱히 '교양' 있는 집에서 태어나 자란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교양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주눅들기 일쑤다. 근데 문제는 교양인이 되는 것도 좋고 교양을 쌓는 것도 좋지만, 쌓으려면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양 속물은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지. 통속적이고 진부한 지식을 단정적으로 젠체하면서 말하는 건 정말 티 난다구. 계속 그러면 진짜 솜털까지 서버린다고, 내가 다 부끄러워서. 이를테면 이런 것. 인류학을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제국의 학문이지, 미국에서나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것. 사회학이나 통계를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엘리트를 위한 학문이지. 뭐 이런 것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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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4/16 00:18
1.

"다문화주의"라고 하면 늘 답답함을 느끼던 중에, 드디어 반색할만한 연구 성과가 나온 것 같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258 그래도 이제 겨우 시작이란 느낌이다. 역시 모든 건 현장에 가봐야 아는 거다. 보수적인 자유주의 냄새를 풍기는 다문화주의로는 언제나 부족하거나, 심지어 나쁘기까지 하다.

2.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저자가 쓴 최근에 출간된 어떤 책의 성공과, 오늘 온 책이 일으켰던 예전의 반향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잘 팔리는 책, 아니면 적어도 영향력 있는 책을 내려면, 지나치게 영민한 내용을 담거나 잘난체 해서는 안된다. 남들이 다 알만한 것, 혹은 남들이 이미 심적으로는 동의하고 있는 것을 잘 잡아내는게 우선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그 부분을 살살 긁어주면서, 마치 그것이 저자 고유의 생각인 것인양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해결 불가능한 논쟁이 오래 축적된 주제라면, 그 논쟁을 절대 길게 언급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자기가 마치 최초의 첫번째인양 기술해야만 한다. 논쟁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씹어 삼키기 좋은 데이터를 제공하고, 독자들에게 생각의 기준점을 비교적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다. 그 기준점이 사실상 얼마나 훌륭한 것이냐 하는 점은, 아쉽게도 책의 인기와는 큰 상관이 없다. 물론 여기에 출판사나 서점의 marketing scheme까지 곁들여야겠지만. 이건 절대 질투나서 이러는 건 아니다. 윽. ㅠ

3.

전주 영화제 예매가 모두 성공! 10시 50분부터 접속 시도를 했는데, 11시 30분 넘어서야 겨우 예매를 끝냈다. 이틀에 걸쳐 4편을 예약했다. 5월 3일이랑, 5월 5일. 이거 이틀 다 가야할까? 예매한 4편 중에 3편이 매진이라 왠지 꼭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흑. 여기서 전주 가는 차량은 하루에 2대 밖에 없는데. 그것도 시외버스 환승해서 가는 수밖에 없는데. 흑.

4.

모든 게 자조(self-help)와 자기책무성으로 설명되는 시대, 안 바쁜게 죄처럼 느껴지는 세상.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쁘지 않다는 건 마치 자기를 방기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자기계발의 시대에 자기 방기는 그야말로 죄악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쓸모 없는 인간이다. 에릭슨의 고전적인 사회심리학 발달이론을 보면 4세부터 5세 사이는 주도성 대 죄책감이 발달하는 시기다. 부모가 아이가 발달시키는 주도성을 억압하거나 책망하는 등 이를 박탈하면, 아이는 역으로 죄책감을 발달시키게 된다. 이게 꼭 지금 사람들 모습 같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아등바등하면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것 같아서. 안타깝긴한데, 이런 장면이 무척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이렇게 다같이 네다섯살 난 아이로 퇴행해버리는 걸까?

시간은 언제나 만들기 나름이다. "바쁘다"는 얘기는 정말 물리적 시간이 없다는 것을 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여유가 없음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즉 자기의 삶 그 자체, 혹은 자기가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을 대하는, 특정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바쁘다는 건, 이를테면 언제나 무엇인가 쫓기듯, 높은 장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보려 애쓰는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무엇인가 벅찬 것을 대해야만 하는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나는ㅡ사실 어느 정도 불안하긴 하지만ㅡ언제나 시간이 많다. 헤헤. 놀 시간은 언제나 많다고. 사실은, 그러니까 숨거나 바쁘다고 하지 말고 놀아달라는 얘기 ㅎㅎ 그러기 위해서는 시스템에 어느 정도까지만이라도 등록을 포기하면 된다(다 포기하는 건 물론 아니다). 포기는 소유의 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로지 포기함으로써만, 물러섬으로써만 소유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니, 소유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포기는 소유이자 연결의 한 형식이다. 포기함으로써 소유하게 되는 것들이 있고, 연결되는 것들이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5.

봄이 너무 더딘 것 같다. 이러다가 진짜 봄이 훅 가버리면 어떡하지? 아직 난 제대로 봄맞이도 안했는데. 이 달콤쌉싸름한 느낌은 오로지 봄에만 느낄 수 있는데. 요즘 허파에 바람은 잔뜩 들어갔는데 내쉴만한 곳이 없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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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2/23 23:37

"이 책[<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 정황의 차이가 그 책읽기의 차이를 부른 것이리라 생각한다." (89)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96)


생애 말년에 쓴 일기를 엮었다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아저씨'의 이미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배는 볼록도 아니고 불룩하게 튀어나와 늘어졌으며 목과 턱이 구분되지 않아 살집이 두둑하지만, 다리는 몸집에 비하면 얇은 그런 아저씨.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고 유행 한참 지난 고지식한 양복을 입으며 구두 역시 마찬가지다. 셔츠는 늘 꼭 윗단추까지 모두 잠그기에, 접시 위에 얹힌 돼지 머리를 상기시킨다. 바지는 늘 배바지다. 손목엔 금시계. 양말은 흰색이거나 검정색인데 늘 종아리 중간까지 올려 신으며 무좀 치료를 위한 발가락 양말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머리에 든건 많은데 그 학식이 땀으로만 배출되는지 봄 중순부터 가을 중순까지 몸을 움직일 때는 늘 땀을 흘리며 행여 식당에서 기름기 둥둥 떠있는 매운 찌개를 먹을 땐 티슈를 한통씩 써버리기 마련이다(그렇지만 맵고 짠 찌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산에라도 올라가서 찌개를 끓여 먹다가는 그 자리에서 나무아미타불 할지도 모른다. 물론, 젊었을 때엔 클레릭 이미지였을수도 있다.

책 읽기가 단지 책 읽기가 아니라 상황 읽기라는 그의 말, 그리고 사유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내 육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물론 그의 말에는 어폐가 좀 있다. 육체는, 어떤 초유기체적인 '나'가 있어서 '내'라는 소유격 명사를 통해 소유할 수 있는 대상(문법의 환상)이 아니라, 그냥 나 자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한국 남자 지식인들이 그랬고 그래왔으며 지금도 그렇듯이 정신주의자였던 셈이다.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김현은 데카르트 흉내를 내고 있지만(생각하다가 생각에 도달한다? 이 얼마나 @#$!한 표현인지), 의미심장하게도 뒤에 인용한 문단에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사회적 맥락의 냄새를 풍긴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많이 안좋았다고 한다. 누구나 말년이면, 별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상 건강이 안좋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육체)를 둘러싼 관계의 질서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가피하게 의존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건강한 그의 동료와 친구들이, 건강이 악화된 그를 어떻게 배려하고 도와주는지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앞서 인용한 96쪽에서 여기에 따오지 않은 내용을 보면, 젊었을 적 그의 육체는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을 때엔 육체가 그런 사고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적, 합리적, 비의존적 <사유>라는 환상은 건강한-이성애-개인-남성-육체에 의해 지배되고 관장된다. 그건 하나의 문화적 각본일 것이다. 그 환상이 생산하는 글 역시 어떤 육체 조건에 기반한 것이리라. 그런 각본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진다는 건 상당한 불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바치는 '후배'의 말을 보면, 그 후배 역시도 이 불운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자신의 육체적 징후들을 통해 몸 속 깊이 번져가는 죽음의 증식을 보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아무도 예측을 못한 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깊이, 그 응시와 사유의 궤적들을 글로 드러내왔었다."

그에 반해 시인 김수영은 좀 더 명민하다 할 수 있다. "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낙타과음(駱駝過飮) 중에서) 어떤 사람이 창작에 몰두할 때, 그 사람의 몸을 한 번 보자. 그는 빼어난 머리와 빠른 손으로 창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온 몸으로 창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뛰어난 비평가와 뛰어난 작가의 차이는, 이런 지점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서부터 나타나는게 아닐까?


여하간 그의 책은 신기하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지금은 전혀 알 수도 없고 거론되지도 않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 작가가 수두룩 하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100년은 갈것 같은데.. 이 책을 보니 역시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김현은 또 이렇게 적었다. "르네 샤르가 죽었다. 이제 대가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가보다." (148) 그러나 대가들은 늘 존재했고, 얼마 전에도 우리는 여러 대가를 떠나보냈다. 대가들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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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2/06 23:57

벨 훅스의 신간, <경ㄱ 넘기를 가르치기>의 초반부를 뒤적이다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읽어도 크게 와닿지 않으리라는 판단하에 일단은 잠시 접어 두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제약하는 경험의 폭 때문에도 그렇고, 현재 나의 '신분' 때문에도 그렇다 -_-


분명 '해방적 교육'이라느니,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이라느니 하는 개념들은 매력적이다. 여기서 매력적이라는 말은, 그 개념들이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하나 불가능한 것에 불과하다고 (암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될 수 없는 어떤 것,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어떤 것, 그러면서도 나를 확 잡아 끈다는 의미에서(많이 오버하자면, '소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ㅋㅋ) 매력적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더.

"가르치지를 원치 않는 교사"와 "배우기를 원치 않는 학생"이 있는 교육이란 대체 무엇일까. 벨 훅스가 말한 것처럼, "은행 출납식 교육"ㅡ교사가 전해준 지식만을 학생들은 그저 은행에서 빼다 쓰듯 훗날 사용할 수 있다는ㅡ이 대학에서도 주류 중의 주류인 지금, 대체 '교육'의 위상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 걸까.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 맑시스트들의 개념이나 소위 '비판 사회학' 같은 흐름에서 쓰이는 '사회과학'적 어휘들을 갖다 붙여서 뭐라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심정적으로 답답하고 갑갑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나에게 있어 "해방적 교육",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어디까지나 '맛만 봤다'는 얘기). 그렇다고 그 대학이 그 자체로 해방적이고 자유의 공간이었냐, 하면 다들 알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의가 다루는 것들은, 말 그대로 강단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에게 흥미도, 의미도, 전연 주지 못했다. 정말 단 한 냥의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다. 영어교육이었던 전공 강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강의들은, 너무나 단순했던 내 견해들ㅡ예컨대 평준화 찬성, 고교등급제 반대 등등ㅡ에 대해서 너무나 단편적이고 표면적이긴 했지만 지지하는 말들을 해주곤 했던 고등학교 논술 선생의 말들 보다도 힘이 없었다. 물론 때때로 재밌는 강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들과 지식을 만날 수 있었던 ㅇㄹㅎ 개론, 한국 현대사 입문 같은 강의들. 그러나 1년에 한 강의 정도? -_- 그나마도 수강자들의 태도 탓에 금방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수업은 2학년 말이었던가? 페미니즘의 미학과 예술이라는 수업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학회 세미나 등을 통해서 봤던 책들이 해방감과 자유로운 느낌을 주곤 했었지만(세미나 자체는 아니었다! 그 뒤의 수다가 그랬지), 대학 강의실에서는 처음이었다. 수업이, 그리고 교수자가 흥미롭다고 느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수업만은 시시하지 않았고, (벨 훅스가 강조하는) 흥(excitement)이 났다ㅡ물론 기말고사 시즌에는... 흑. 그 뒤로 수업의 연장선에서 방학 간 학기 간 안가리고 몇 년간 진행했던 세미나도 내게는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다. 교수자인 ㅇㅎㅅ 쌤은 여느 강사들과는 많이 달랐고, 수업 스타일도 당연히 다른 수업들과는 꽤나 달랐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점도 있었지만, 일단 '분위기'등이 달라서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발제를 맡거나 하면 의무감에 늦은 밤까지 시달리기도 했지만-_-) 수업과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버틀러의 사유들도 그 세미나에서 만난 거고.

그 다음으로는 풀집에서 들었던 정희ㅈ 선생님의 강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의 기대보다는 늘 수강자가 차고 넘쳐서, 애초에 의도했던, '책상 모아 놓고 썰 푸는' 강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 강의에 온 수강자들의 열정, 그리고 때때로 들을 수 있었던 정ㅎ진쌤을 포함한 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내게 큰 의미였다. 그리고 내 좁디 좁은 인식에 충격을 주어 확장시키는 이야기들을 강의 시간 내내 전해주는 ㅈ희진쌤의 이야기들은 노트에 기록해두고 지금도 틈나는대로 보고 있다(고작 노트한 것 가지고도 empower될 수 있다!). 그 덕에 이젠 왠만한 '쎈' 담론 아니면 자극 받지도 않는다. 너무 잰체하고 폼만 잡는 남성 학자들의 강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의. 그 다음으로는 여이연에서 들었던 ㅇㅅㅇ 강의도 있지만... 이 강의에 대해서는 일단 패스.

결과적으로 보면, 내게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결국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을 다루었다고 해서 어떤 교육의 장이 "자유의 실천"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떤 독문과 교수가 맡았던 어떤 강의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사회학적' 인식틀로만 페미니즘을 다루었던 어떤 강의도 정말이지 재미없었다.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그 교육의 장 내부에 있던 '관계의 질서'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교육의 장에서 당사자들이 '무엇을 습득하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들이 모여서 어떻게 습득하는가' 역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해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여러 학문이나 인식론들을 공부하는 모임들에 종종 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지긋지긋함을(때로는 공포를) 느끼면서 뛰쳐나왔다. 지식이 '해방적'이면 뭘하나, 그 지식을 공부하고 써먹는 사람들이 '해방적'이지 않은 걸.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자의식과 자기 연민으로만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교육의 장에서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진행되는 교육의 장이, 대학에서 유행하는 '실용적 지식'이나 "은행 출납식 교육" 보다 도대체 나은 점이 있었을까?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은 천천히 완독하도록 하자 ㅎㅎ

덧) 내가 좋아했던 강의나 모임에서, 나 스스로가 그 내부의 관계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느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편안함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뿐. 내가 그 모임들에 어떤 폐를 끼쳤는지는, 알 듯 말 듯 모르겠다. 흑.

덧2) 난 너무 관계에 있어 소심하고, 또 너무 자주 관계에 소홀해지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이거, '생각'만 할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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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3/28 22:13

피에르 바야르,『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김병욱 역, 여름언덕, pp.204-5

특정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 책을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두 진영으로 양단하려는 것은 독서 행위의 불확실성을 모르는 소치다. [...]

그렇다면 '타자가 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ㅡ여기서 '타자'란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ㅡ이야말로 우리가 읽었건 읽지 않았건 책들에 대해 좋은 여건에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일차적 조건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책들에 대한 담론에서 문제의 그 앎이란 불확실한 앎이며, '타자'란 우리의 대화 상대들에게 투영된 우리 자신의 불안한 형상이다. 학교 교육이 선전하는 교양 같은 존재, 그 허구성이 우리의 삶과 사유를 방해하는 흠결 없는 교양 같은 존재가 타자인 것이다.

'타자'가 알 거라는 생각이 주는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진정한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다. 타자가 읽었으리라는 생각, 그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 하는 생각은, 창작을 비독자가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부득이 의존하는 수단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 책의 핵심이라면 '핵심'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어서 옮겨둔다. ^^;

무엇보다 이 책은 재밌다. 문학 작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렇게 인용을 많이 하면서도 이 책이나 저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용이 된 원래의 책을 봐야겠다는 의심이 들지 않게 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쓰여진 책인 것 같다. 그만큼 '속아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인용은 속임과 속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게임이고 거기에서 비로소 의미가 만들어지니까. 사실 '그럴싸함plausible'을 텍스트에서 구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문학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라는데, 딱 그 느낌의 책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해법'도 거의 모두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내가 아는) 프랑스에서 이 책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이, 너무나 자연스러워보이는..

예전에 한 교수의 연구실에 찾아가서 면담했을 때 일부러 이런 질문을 던진적 있었는데. "연구실 여기에 있는 책, 쭉- 다 보신거에요?" 사실 대화를 나누다가 좀 조금 뒤틀려 버린 마음에서 했던 말이기는 했지만. 그 교수는 내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그걸 왜 걱정하니? 역시 ㅇㅇ대 애들은... 이런 말투;) 넘어가버렸다. 때문에 나는 이 말이 교수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좀 옹졸....; 이 책을 보고 나니, 그 때 의도했던 것 보다 그 교수에게 더 큰 실례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다 :)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8/03/21 16:18
장장 2시간 여만에 겨우겨우 정리했음.. -ㅅ- 거의 한 반 년째 미뤄뒀던 정리였다 :)
책꽂이 몇 개가 다 차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쌓아둘 수밖에 없었는데, 새 책꽂이를 "드디어"(!) 사는 바람에 겨우 정리할 여지가 생겼다는!

기념 삼아 올려둠 >_< ㅎㅎㅎ
(여기 있는 책 반만 다 읽었어도... orz)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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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황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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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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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보는 책들은 그냥 새 책꽂이 위에 올려놓고...
좌측 덩어리는 문학류(소설, 에세이)
가운데 덩어리는 정치/사회학 위주로
오른쪽 덩어리는 전기나 사회비평집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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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윗칸은 제본한 책들과 원서 몇 가지, 그리고 여/성이론 최근 몇 호를 두었고,
두 번째 칸 전부와 세 번째 칸 절반 정도는 정신분석 관련 책들과 지젝 콜렉션이다.
세 번째 칸의 반은 푸코 콜렉션ㅡ왜 사 모았는지 아직도 모르는.. (니체보단 낫다고 생각)
네 번째 칸은 역사서 몇 권과 문화이론, 수전 손택 책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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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칸의 절반, 두 번째 칸 전부, 세 번째 칸의 절반은 여성학 책
첫 번째 칸의 절반은 교지와 관심있던 살림지식총서
세 번째 칸의 절반은 엘피에서 출간한 루틀리지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와
웅진 지식하우스에서 나온 하우투리드 시리즈
네 번째 칸에는 온갖 논문들과 참고 프린트물들

그 위에 있는 책꽂이엔 소설류나 에세이류를 꽂아 두었다.
이 책꽂이 위에는 전공책과 영어학습서를 쌓아 두었고.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책상에 딸린 책꽂이엔 분류하기 힘든 온갖 잡서들로 분류해 뒀다.
김영사에서 나온 만화로 된 입문서 시리즈도 있고...
그 외엔 문학이론, 문화이론, 철학, 미학, 비평서, 정치학, 사회학, 생태학 등...


결론 : 이사는 절대로 못 가...

먼 훗날 이사갈 때는 무리를 하더라도
진짜 넓은 방으로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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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03/05 18:32

예전에 로쟈님의 서재에서 관련 기사를 보고서 기대를 잔뜩 품고 있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진작 접했었다. 아직 사지는 않고 있는데, 재밌고 두고두고 볼만한 내용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힘들기 때문이다(책 값은 아주 착한 9,800원이지만). 시시하리란 생각도 들고. 컨셉은 참 재밌기는 한데. 알라딘에 소개된 목차만 봐도 그 내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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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비독서의 방식들
제1장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 제2장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제3장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 제4장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담론의 상황들
제1장 사교 생활에서 / 제2장 선생 앞에서 / 제3장 작가 앞에서 / 제4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대처요령
제1장 부끄러워하지 말 것 / 제2장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 제3장 책을 꾸며낼 것 / 제4장 자기 얘기를 할 것

에필로그

정말 소위 '실용서'의 냄새가 풍기는 이 책에 대해서, 그런 '일반적인 실용서'는 아니라는 리뷰를 종종 본적이 있다. 책 편집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런 편집증을 잠시나마 견뎌내기 위해 또 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참... 뭐랄까, 안쓰럽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좀 재밌다. ㅎㅎ 기회가 되면 하루 정도면 슥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페이지도 230 정도면 얌전한 편이고..

근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았어도 이야기를 '왜' 해야하는지부터 질문해야지 않을까? 책을 읽어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명제는 그렇다 치더라손 말이다.

ㅇ에게 담비에 이 책 관련한 리뷰가 있다고 들어서 읽고서는 옮겨둔다. 강조는 내가. 저 밑에 나오는 소설은 한 번 읽고는 싶어지네 ㅎ



출처 : 학술저널 담비/연세대 대학원신문 157호
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8070


독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편집광적이고 망상적인 독서 
[걸리버의 시선] 어느 ‘탐정 비평가'의 새로운 책 읽기  

이충민│프랑스 빠리 8대학 불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egressio@hotmail.com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Comment parler des livres que l’on n’a pas lus?)』(Editions de Minuit, 2007)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Qui a tue Roger Ackroyd?)』(Minuit, 1998)


책읽기의 괴로움, 책은 꼭 다 읽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 집단의 착각 혹은 위선 한 가지.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 지식에 대한 자발적 선의지를 상정한다. 지식의 추구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독서는 일종의 연애이며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타 등등. 하지만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떻게 한 초등학생이 단번에 라틴어에 숙달되게 되는지, 어떤 기호(記號)들이 (사랑이나 고백하기조차 창피한 욕구로 인해) 그의 배움에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거꾸로 짝사랑이든 지적 스노비즘이든 이러한 개인적 동기부여를 얻지 못할 때 우리의 독서 경험은 흔히 생각보다 괴롭고 지루한 일이 되곤 한다. 더구나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수백수천권의 필독서를 읽을 의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의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끝까지 다 읽고 얘기해야할 의무 같은 구속에 짓눌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책이라는 것, 독서라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며 그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역시 ‘읽지 않은 책’의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도 자명한 노릇이고 습관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책을 읽지 않고 읽은 척 떠들어야할 상황도 있는 것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제목 선정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피에르 바야르가 올해 초 펴낸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독서 행위를 둘러싼 이러한 작은 오해와 환상들을 폭로하면서 독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를 시도하는 책이다.

하지만 분명 이론적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저작은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이론적 면죄부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고 그 때문에 출간 즉시 언론의 주목을 받아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동시에 (슈퍼마켓과 공항 서점에까지 깔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필요 이상의 가혹한 비난을 받아 저자를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뜨렸다. 다행히 독서와 교양에 대한 죄의식이나 부담감이 전무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이러한 선정적 논란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독서와 비독서의 모호한 경계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안 읽은 책’의 여러 양상을 검토하고 있는데 (모르는 책, 훑어본 책, 본 적은 없고 들어만 본 책, 읽었는데 잊은 책 등)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읽은 책’(독서)과 ‘안 읽은 책’(비독서)의 구별이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읽다가 만 책은 읽은 책인가 아닌가? 책의 몇 퍼센트를 읽어야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은 무엇인가? 오래 전에 읽어 다 잊어버린 책, 심지어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책은 펼쳐본 적도 없지만 대충 들어 개요를 알고 있는 책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더구나 모든 책은 읽고나면 즉시 점진적 망각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고 심지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망각은 벌써 진행 중이게 마련인데.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푸네스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지속적 망각이 없는 완전한 기억은 실질적으로 전적인 무의미를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가 책들과 맺는 관계는 결코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고 투명한 지식의 장소도 아니며 기억의 여러 파편이 섞여 있는 공간, 이 책에서 읽은 구절과 저 책에서 읽은 구절이 맥락에서 분리되어 유령처럼 배회하고 서로 결합하고 혼동되는 ‘변신-분리-합체’의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독서 경험은 대부분이 ‘철저한 완독’과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책’의 중간에 있고 이 중간 지대에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단계와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애초에 꼼꼼한 완독이 어려운 작품도 있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묘사 · 설명 · 고찰 · 대화를 건너뛴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 누가 프루스트를, 발자크를, 『전쟁과 평화』를 한자 한자 다 읽었단 말인가?” 이렇게 독서와 비독서의 구별이 애매해진다면 거꾸로 독서 자체의 규정도 어려워지며 결국은 텍스트의 개념 역시 교란될 수밖에 없어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이 된다.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 텍스트를 창조하라

그래서 바야르는 이러한 기억/망각의 문제를 텍스트 자체의 지위에 관한 논의로 이끈다. 아무리 텍스트를 꼼꼼히 읽더라도 우리는 일부만을 기억할 수밖에 없고 기억하는 부분들, 개요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텍스트는 결코 단일한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문학 텍스트의 경우 그 근본적 다의성으로 인해 한 명의 독자가 그 다양한 의미망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그에 대해 말하는 순간에는 기껏해야 한두 개의 의미망밖에 실현시킬 수 없으므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원론적으로 말해 애초에 글로 된 텍스트는 조각이나 그림과는 달리 우리가 그것에 대해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 바야르가 기대고 있는 미셸 샤를르(Michel Charles)의 해석학적 구조주의의 입장을 따를 경우 글이란 언어 기호로 되어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 독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음성과 의미로 실현시키지 않을 경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 뭉치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문학 작품은 우리가 사는 세계처럼 완전한 세계가 아니어서 묘사하는 세계에 대해 일련의 단편적 정보만을 제공할 뿐이고 이 정보들은 독자의 개입 없이는 충분할 수 없다. 문학 작품에서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해 접하는 것은 여러 개의 문장뿐이다. 하지만 험버트가 롤리타의 눈썹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롤리타가 눈썹이 없는 소녀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문학 텍스트란 독자의 보충 없이는 불완전한 파편들의 공간일 뿐이어서 텍스트의 문면을 넘어서는 독자의 상상과 해석은 나이브한 문학소녀들이나 저지르는 주제넘은 투사 독서가 아니라[비앙: 제발 이런 수사적 클리셰는 안 쓰면 안되려나? 읽다 보면 좀 거슬리고 짜증나서. 보통 문학'소년'들이 더 짜증나던데요?] 텍스트가 텍스트로 존재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구성적 요소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는 언제나 모자란) 텍스트를 보충하는 이러한 독서 작업에는 개인적 경험, 세계관, 우리가 속한 문화적 틀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보니 주관적 · 사회적 필터와 무관한 객관적 독서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읽는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당신이 읽는 『부서진 사월』과는 다른 텍스트이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수의 텍스트이며 텍스트의 단일성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구축해야할 픽션이다. 더구나 책을 처음에서 끝으로 나가는 진행 방향으로 읽는 선조적 독서 말고도 다양한 다른 독서/비독서 방식이 있고 (읽다 관두기, 뒤쪽부터 보기, 훑어보기, 필요한 챕터만 찾아 읽기, 이곳저곳을 뒤지며 마구잡이로 읽기,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가는 보겠다고 다짐하기 등등) 그 방식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서 경험을 결정하는 다음에야.

물론 피에르 바야르가 대중을 독서의 중압감에서 해방시키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 책, 독서 등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관념이 문학 이론 자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보니 완전히 폐기할 이유는 없지만 경직된 면이 없지는 않은 개념들을 더 세련되게 다듬기 위해 개별 독자의 실제적 구체적 독서 경험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텍스트의 모든 굴곡에 일일이 반응하는 모범적인 모델 독자를 세운 것은 에코와 문학 구조주의의 훌륭한 업적이지만 텍스트의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고 책을 읽다가 잠깐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 독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묵직한 이론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대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 책의 실용적 조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책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조적 완독’이 아닌 책을 읽는 다양한 방식을 시험해보라고, 창조성과 즐거움을 잃을 정도로 부담감을 갖고 책을 읽지는 말라는 조언 말이다(바야르는 한 대담에서 ‘끝없이 읽기만 하고 논문 집필을 결코 시작하지 못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의 병리학적 증상’을 언급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읽지 않을 책이 있다는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  

바야르는 최근에 있었던 한 대담에서 자신의 모든 저작은 아무리 사소한 이론적 결함도 트집을 잡으면서 억지스런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편집증적 서술자를 내세운 픽션 작품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개념의 극한을 탐구하는 훌륭한 기제로 사용되지만 『책을 읽지 않고…』의 경우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던) 이러한 역설적 서술자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그의 출세작인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해석서인 이 책에서 바야르는 ‘지금까지 비평가들은 문학을 해석하는데 그쳐왔다.

이제는 문학을 뜯어고칠 때이다’라는 제라르 쥬네트의 모토를 따라 작품의 자기완결성을 상정하는 수동적 비평이 아니라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interventionnisme critique)’를 주창한다(이러한 개입주의는 위고, 모파상, 프루스트, 뒤라스 등 대가들이 써낸 졸작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망친 작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Minuit, 2000)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며 스토리라인과 무관해 보이는 여담으로 가득한 프루스트 책에서 여담을 실제로 제거할 경우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검토하는 『주제 이탈 - 프루스트와 여담』(Minuit, 199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미의 다의성,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구호가 문학 비평에서 유행한지도 이미 수십 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추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고 기껏해야 작품의 작은 디테일 차원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바야르는 이 유명한 추리소설을 빌어 작품의 플롯, 줄거리, 결말 자체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실 추리소설이란 원칙적으로 가장 열려 있는 서술문학 장르이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일어난 사건’(범죄와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제시되며 개별 인물 자체도 자신의 해석을 여러 차례 수정한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은 단일한 플롯에 대한 여러 개의 버전을 내부에 갖고 있는 장르이다. 하지만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탐정이 다른 모든 해석의 선(線)들, 가능한 모든 스토리라인을 폐기하고 단 하나의 ‘옳은 추리’, 확고부동한 진실을 제시하는 관습 때문에 추리소설은 거꾸로 가장 닫힌 내러티브 양식이 된다.

바야르가 도전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야르는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말미에 에르큘 포와로가 밝히는 살인의 진상과 범인의 이름이 과연 옳은지를 재검토한다. 분명 텍스트에는 포와로의 최종 설명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포와로의 논리에는 결함이 없지 않다.

그래서 바야르는 적지 않은 이론적 우회를 거치면서 공식적인 작품의 결말을 폐기하고 포와로가 지목한 범인이 사실은 누명을 쓴 것이며 왜 그가 억울한 처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성공적으로 설명한다. (바야르가 말하는 편집증적 서술자가 실행하는 ‘망상적 독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추리소설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작품 전체의 줄거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바야르는 이 책의 서론에서 『애크로이드』 이외의 다른 추리소설도 마찬가지로 진범을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책에서는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 몇 개의 진범을 새롭게 폭로한다)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에 나오는 의문사도 마찬가지로 재수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퐁텐의 우화에서 숱하게 죽어나가는 주인공들(동물들)의 진정한 사인(死因)은 무엇인지, 춘희의 죽음이 진짜 자연사인지, 『제르미날』의 광산 참변의 진짜 흉수는 누구인지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는데 바야르는 실제로 다음 저작인 『햄릿 사건 수사』(아마 지금껏 나온 바야르의 책 중 가장 이론적인 저작일 것이다)에서 셰익스피어의 고전으로까지 ‘탐정 비평(critique policier)’의 영역을 넓혀 햄릿왕의 살인범이 동생 클로디어스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왜 햄릿이 그토록 복수를 미루고 망설였는지를 해명한다.

물론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바야르 자신이 애크로이드의 살인범이 셰퍼드 의사가 아니고 햄릿왕의 살인범이 클로디어스가 아니라고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광적 역설과 망상적 독서가 문학과 텍스트와 독서에 대해 가져다주는 이론적 함축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12/24 16:15

블로그 <후마니타스의 책 이야기(클릭)>에서 흥미로운 책 소개를 찾아서 옮겨 둔다. 책은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 1』. 얼마 전에 출간한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더불어 요즘 같은 정국에 반드시 읽어 둬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게 없으니 흥미로운 책이라도 읽으며 부지런히 도토리를 모아두자. 귀는 뉴스와 소식들에 열어두고, 눈과 손은 부지런히 텍스트를 살피며, 발을 떼어 몸을 옮길 수 있는 곳을 찾는 것, 날씨는 따뜻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추운 이번 겨울에 꼭 해야할 일이다.. 책이 잘 나가서 계속 연간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읽을 시간을 꼭 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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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의도

미국의 살아 있는 정치사상가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셸던 월린이다. 특히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사상이 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을 지배하게 되면서, 월린은 더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2004년에 개정 증보판으로 새롭게 출간된 월린의 『정치와 비전』은 원래 1950~60년대 정치철학에 대한 실증주의의 비판과 규범적 정치철학으로의 회귀라는 당대의 시대 분위기에 맞서 정치적인 것의 독특성과 자율성을 재확언하려는 정치사상가의 열정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40여 년이 지나 이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 셸던 월린은 2004년 원래 총 10장이었던 초판을 총 17장으로 수정‧증보했으며, 『정치와 비전』은 750여 쪽에 이르는 대작으로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4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민주주의의 후퇴와  맞물리면서 『정치와 비전』 내용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으며, 이런 흐름은 부시 정부하의 현 미국 민주주의를 “전도된 전체주의”로 그려내는 데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정치와 비전』은 출간된 이래 늘 여러 세대의 정치사상 연구자들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영감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활력 있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비전과 창조적 실천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있다. 미국에서 참여 민주주의 최고의 이론가로 셸던 월린을 주저없이 꼽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후마니타스는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을 총 3권으로 나누어 내년 상반기까지 완간할 계획이다. 이제 그 첫 출발로 『정치와 비전』제1권을 내놓는다.

『정치와 비전』의 출간은 국내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국내에는 그간 세바인, 버이키, 플라메나츠 등의 정치사상사 책이 번역,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기존의 책은 대개 ‘균형 잡힌 시각’과 ‘폭넓은 교양’을 강조하는 다소 교과서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나마 현재 시판되고 있는 것은 10년 전에 출간된 조지 세바인의 『정치와 비전』뿐 등 몇 권 되지 않는다. 월린의 이번 책이 ‘정치적인 것’, ‘공동체’, ‘시민됨’,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아래에서 서구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일관되게 되짚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사상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할 것이며, 정치사상사의 여러 쟁점과 관련해 다양한 논쟁이 촉발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정치와 비전』은 그 자체로 서구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정치와 비전』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정치사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다투는 하나의 방법으로 정치사상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정치사상의 오랜 주제들이 우리의 현실적 문제와 얼마나 깊이 맞닿아 있는지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1922년생인 월린은 ‘증보판’에서도 여전히 청년 못지않은 열정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가 민중적 활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과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월린은 중요한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간 후마니타스가 내놓은 책의 목록들과 잘 어울린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나 최장집의 『어떤 민주주의인가』가 대표적이다. 최장집 교수는 지난해 불거져 나온 개헌론을 비판하면서 월린을 자주 인용해 왔고 샹탈 무페는 월린이 늘 높이 평가하는 정치철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재미있는 차이도 있다.

월린은 정치적인 것의 복원을 중시하고 제도나 체제 밖의 운동적 참여를 강조한다. 이 점에서 무페와 같다. 하지만 무페는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노르베르토 보비오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끌어들이며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역할 역시 일정 정도 중시한다. 이 점에서 무페는 월린과 차이를 보인다. 반면,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에서 운동적 실천보다 제도적인 실천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월린과 대조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헌정주의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밖에도 대비되고 겹쳐지는 논점들이 많다. 월린의 이번 책을 통해 이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읽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논의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적 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월린이 정치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리고 이 책이 갖는 특별함에 대해서는 옮긴이인 강정인 교수가 쓴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국내에서 강정인 교수보다 이 책의 의미나 월린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여러 내용이 다 흥미를 끌지만, 미국 민주주의 현실에 대해 현재 월린이 일종의 “지적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내용은 우리의 정치 상황 또는 지식인 상황과 결부되어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당장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큰 희망을 품기 어렵다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실체에 대해서 더 깊이 침잠해 보길 권하고 싶다.



2. 이 책에서 주목되는 주제들


1) 정치적인 것 그리고 ‘전도된 전체주의’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사회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 참여와 시민권은 독특한 자기 완성적 활동으로 제시되었다(“인간은 정치적인 동물”). 하지만, 18세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개념화는 상실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것’은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것’을 표상하는 반면, 사회는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모임’을 상징한다는 믿음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공동체의 구성원됨의 의미는 주기적으로 투표하는 유권자로 축소되었으며, 정치 참여는 방어적인 활동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서,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실증주의적 정치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 정치를 윤리적 판단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규범적 정치학(예컨대, 레오 스트라우스와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 정치철학), 정치를 부정하고, 이를 이윤 극대화의 원칙과 효율성의 논리로 축소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접근들과 맞서,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논리를 보존하고, 이를 부단히 새롭게 재정의하고자 시도한다.

정치적인 것의 재활성화에 대한 월린의 강조는 미국에서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위험할 정도로 압도하는 ‘전도된 전체주의’(전도된 전체주의에 대한 내용은 첨부 자료 참조)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월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경쟁적이며, 불평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들, 즉 민주적 시민으로는 부적당한 인간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적인 것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임을 역설한다.


2) 정치와 ‘비전’

『정치와 비전』에서 ‘비전’은 사실적인 차원과 상상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 첫 번째, 비전은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적(記述的)인 보고의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 ‘비전’은 미적 비전이나 종교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상상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월린은 정치철학에서 첫 번째 의미의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의미, 곧 상상력이 개입된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훨씬 더 중시한다. 정치철학자가 정치 현상을 개념화할 때 활용하는 비전은 ‘이론가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이론적 활동에서 비전의 역할이 다음 세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정치철학자는 비전을 통해 공상, 과장, 심지어 기상천외한 환상을 통해 때로 우리에게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명백하지 않았을 사물들을 보게 해 준다. 곧 이와 같은 공상적인 상(像)을 통해 그는 일반 사람들이 정치 질서가 기초해 있는 근본적인 가정을 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예를 들어 홉스는 ‘사회계약’이라는 상상적 행위를 설정함으로써 정치질서가 궁극적으로 구성원들의 동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밝혔다. 둘째, 정치사상가는 정치현상을 지적으로 일관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 현상을 이른바 ‘정정된 온전함’(corrected fullness)으로 그려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상적 감수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또한 정치사상가는 정치적 삶에 대한 축소된 상, 사상가의 목표와 무관한 것들은 삭제된 상을 우리에게 제시해 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사상가 역시 직접적으로 모든 정치적 사물들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해 일정한 현상을 추상화하고 상호 연계성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요약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사상사에서 상상력, 곧 비전의 역할은 단지 방법론적 편의 또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모델 제공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전의 세 번째 기능은 사상가의 근본적인 가치━철학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를 표현하는 매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정치 이론가가 역사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3) 탈주하는 민주주의: 헌정주의 대 민주주의

월린은 현대 서구에서 민주주의로 이해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나 헌정적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적 정신을 질식시키고, 시민됨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 지극히 비판적인 급진 민주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의 민주주의 개념은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활기에 넘친 참여와 숙의를 중시하는 참여 민주주의이다. 이 점에서 월린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기 이전까지 실현된, 기원전 5세기 경의 아테네 민주정과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민주적 반란기의 경험, 19세기 미국 민중주의자들의 경험, 그리고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경험 등을 진정한 민주적 경험으로 중시한다. 월린에게는 아마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이 구성한 자치적 공동체, 곧 단명에 그친 ‘광주 공화국’의 경험 역시 1871년의 파리 코뮌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민주적 체험으로 이해될 법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월린의 비전은 제도화된 정치권 내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질서정연한 참여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민중들(빈민, 노동자, 농민, 흑인, 여성 등) 또는 시민들이 기성의 제도 밖에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생존을 타개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는 (단편적인?) 체험에 기초한 것이다. 즉 그 비전은 그들이 투쟁하면서 정치공동체에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것에 관해 숙의하고, 그 숙의의 결과를 다시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action)로 옮길 때 일어나는 탈제도적 경험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월린에게 미국은 물론 현대 서구의 선진국가에서 실천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따라서 고대부터 근대 정치사상까지를 주로 다룬 『정치와 비전』의 초판(1960년)에서는 당대의 정치에 관해 비교적 초연한 태도를 취하면서 비판적 언급을 삼갔던 반면, 2004년에 출간된 증보판의 16장과 17장에서는 현대 미국 민주주의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월린의 평가에 따르면 미국은 ‘초강대국 민주주의’(superpower democracy)라는 형용 모순적 실체로 변모하고 있으며, 신보수주의 정책 결정자들은 미국을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 국가━파시즘이 내포하는 많은 함의와 더불어━로 전환시키고 있다. 월린에게 전도된 전체주의는 상호 대조적인, 그러나 반드시 대립적이지 않은 두 가지 경향의 특이한 조합을 강조하기 위한 개념이다. 2차대전 이후 많은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시민들을 단속하고, 처벌하고, 측정하고, 지시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능력이 증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통제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자유민주적 변화들, 예를 들어 인종, 젠더, 종족 또는 성적 취향에 근거한 차별적인 관행을 폐지하고자 하는 조치들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들 및 다른 개혁들이 시민들의 권력 강화를 가져오는 데 이바지했다면, 그것들은 또한 민주적인 반대 진영을 분열시키고 파편화시키는 데도 이바지했고, 이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다수를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분할을 통해 통치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런 비판으로 인해 미국 정치학계에서 월린은 강경 좌파(hard-Left) 또는 좌파 자유주의자(left-liberal)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처럼 월린의 급진 민주주의적 비전은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의 형태로 개념화하는데, 그 정치적 판단은 우리의 판단이 자유주의적 거대 국가의 포획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정치제도 바깥에 소재하는 존재양식이며,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월린은 자신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탈주적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로 명명한다. 월린은 ’탈주적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재형성적 능력, 국지(지방)적이고 특수한 정치참여 양식을 고무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정치참여를 고무하는 탈주적 민주주의를 국가의 밖과 옆에서 활성화시킴으로써 국가주의적 권력의 전체주의적 경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본다.



3. 장별 주요 내용 소개


제1장 “정치철학과 철학”에서 월린은 정치철학을 다른 형태의 탐구 형식과 연결하고 구분하면서 정치철학의 특징을 조명한다. 아울러 정치철학의 일반적 특징을 철학에 대한 정치철학의 관계, 활동으로서의 정치철학이 갖는 속성, 그 주제와 언어, 관점 또는 비전의 각도, 그리고 전통이 작동하는 방식 등을 논하면서 밝히고 있다. 제1장은 정치철학이 무엇인가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읽어 보아야 할 장이다. 다만 이 장에 서술된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고 함축적이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주요 주제와 철학자들의 정치사상에 익숙해진 연후에야 비로소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사상을 전공하는 자라면 두고두고 여러 번 음미해 읽으면서 그 깊은 뜻을 헤아려 볼 만한 소중한 장이다.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을 정치철학의 발명자로 제시하면서 그리스에서 정치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정치철학의 출현 조건으로 정치 현상이 여타의 다른 현상들로부터 ‘분화’될 것, 독립된 사유의 형태로서 정치적 ‘설명’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정치철학을 ‘정치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의 산물’이라고 할 때,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정치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린은 플라톤에 이르러 정치가 ‘독자적’인 현상으로서 ‘체계적’으로 인식되었지만, 동시에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는 ‘선의 이데아’라고 하는 철학적 비전이 정치를 조형하게 됨에 따라 정치(현상)의 자율성이 현저히 위축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로부터 월린은 다양한 관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월린의 비판은 서구 정치철학사에서 플라톤 정치철학에 내연(內燃)하는 정치와 철학의 원초적인 갈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붕괴시키고 등장한 로마제국 시대를 ‘정치적인 것’의 위기로 개념화하면서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의 정치사상을 다루고 있다. 월린은 정치적 삶의 새로운 구현체이자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광대한 영토로 구성된 로마제국과, 소수의 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도시국가를 바탕으로 하여 출현한 그리스 사상의 정치적 기준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가 ‘정치적인 것’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가 기독교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해석한다. 이와 함께 월린은 로마 공화정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추적하면서 정치 공동체에서 용인될 수 있는 갈등의 한계, 이런 갈등을 봉합하고 규제하는 데 있어서 정치 제도가 수행하는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익에 근거하여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지닌 함의를 분석하고 있다. 이 장에서 월린은 스토아학파의 정치철학을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앞장의 논의를 이어받아 로마 제정 시기가 서구 정치사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빈곤한 시기였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이 정치사상을 재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찾는다. 대신 그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사안에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가 정치사상의 새로운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치사상을 재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원천은 기독교가 그 구성원들에게, 충만한 참여적 삶을 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새롭고 강력한 이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 데서 기인한다. 월린은 또한 기독교의 괄목할 만한 확산과 복잡한 제도적 형태로의 진화가 행동과 언어의 양 측면에서 ‘교회의 정치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런 사태 전개가 기독교 본래의 의도와 달리 서구에서 정치에 관한 교육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정치화를 통해 정치적 사유와 행동 양식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월린이 해석하건대, 중세 기독교 시대가 남긴 아이러니한 유산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대체로 정치사상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독특한 기독교적 목표를 위해 봉사하도록 사용하는 데 만족하고 그 개념들 자체의 내용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기독교 및 교회의 정치화와 함께 정치사상의 주요 개념과 범주들이 오히려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월린은 자신의 이런 논점을 초기 기독교 사상, 교회제도의 발전과 정치화 과정,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과정 및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새롭게 주장하고 주조함으로써 근대 정치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7장에서 검토하기에 앞서, 월린은 5장과 6장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고 마무리한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인 루터와 칼빈의 정치사상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월린의 해석에 따르면 루터는 종교적 사유를 탈정치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교회적 정체(政體), 곧 중세의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는데 반해, 역설적으로 칼빈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새롭게 정치적·제도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마무리지었다.

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서 월린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의 사상을 초기 교회의 순수함으로 돌아감으로써 종교적 체험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다. 이를 위해 루터는 조직화된 중세 교회의 권력 구조와 복잡하고 정교한 중세 신학, 곧 교회 중심주의와 스콜라 철학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종교의 탈정치화를 시도했다. 월린은 이런 루터의 사상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루터가 추구한 ‘교회의 탈정치화’가 결과적으로 세속 권력의 강화와 민족적 특수주의의 출현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에서 월린은 초기 종교개혁의 급진적인 종파들이 수많은 제도적 통제와 전통적 제약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를 계기로 분출된 원심적 에너지로 말미암아 서구 사회가 질서와 시민성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극단적인 종파들이 자신들의 종교 공동체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정치 질서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부정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아노미 상황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월린이 정교한 해석을 통해 보여 주는 칼빈의 사상적 공헌은 그처럼 점증하는 위기의 와중에서 그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시민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사상체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정치 질서에 대한 신망을 회복시키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인간 본성의 정치적인 면을 깨닫게 함으로써 정치적 교육의 기초를 가르치려고 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칼빈의 교회론은, 교회-사회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조절할 제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때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이라는 통찰을 체계적으로 정교화한 작업이었다. 칼빈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권력이라는 추가적인 요소가 그 집단의 단합과 연대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최선의 교회 정체(政體)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면서, 동시에 교회에 강력한 리더십과 지도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칼빈의 기독교 사상에서 개인은 종교적 질서와 정치적 질서라는 이중의 질서 속으로 재통합되었고, 그 질서들은 공동의 통일체 속에서 연결되었다.



차례

제1장 정치철학과 철학  

1. 탐구 형식으로서 정치철학
2. 형식과 실질
3. 정치적 사유와 정치적 제도
4. 정치철학과 정치적인 것
5. 정치철학의 용어
6. 비전과 정치적 상상력
7. 정치적 개념과 정치적 현상
8. 담론의 전통
9. 전통과 혁신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  

1. 정치철학의 발명
2. 철학과 사회
3. 정치와 지식 체계론
4. 사심 없는 도구를 찾아서
5. 권력의 문제
6. 정치적 지식과 정치 참여
7. 통일성의 한계
8. 플라톤의 모호성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

1. 정치적인 것의 위기
2. 공간의 새로운 차원
3. 시민됨과 이탈
4. 정치와 로마 공화정
5. 이익의 정치
6. 정치적 결사에서 권력 조직으로
7. 정치철학의 쇠퇴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

1. 초기 기독교에서 정치적 요소: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관념
2. 정체政體로서의 교회: 정치 질서에 대한 도전
3. 교회-사회에서 정치와 권력
4. 정치화된 종교의 당혹스러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과제
5. 재강조된 교회-사회의 정체성: 시간과 운명
6. 정치사회와 교회-사회
7. 종교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 중세 기독교 사상에 대한 보충 설명

제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1. 정치 신학
2. 루터 사상의 정치적 요소
3. 제도에 대한 불신
4. 정치적 질서의 지위
5. 균형추 없는 정치 질서
6. 단순 소박함의 열매

제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

1. 질서의 위기와 시민성의 위기
2. 칼빈 사상의 정치적 특성
3. 교회 정부의 정치 이론
4. 정치적 질서의 복원
5. 정치적 지식
6. 정치적 직분
7. 권력과 공동체

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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