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thecommentfactory.com/will-the-cat-above-the-precipice-fall-down-slavoj-zizek-on-iran-2259/comment-page-1

When an authoritarian regime approaches its final crisis, its dissolution as a rule follows two steps. Before its actual collapse, a mysterious rupture takes place: all of a sudden people know that the game is over, they are simply no longer afraid. It is not only that the regime loses its legitimacy, its exercise of power itself is perceived as an impotent panic reaction. We all know the classic scene from cartoons: the cat reaches a precipice, but it goes on walking, ignoring the fact that there is no ground under its feet; it starts to fall only when it looks down and notices the abyss. When it loses its authority, the regime is like a cat above the precipice: in order to fall, it only has to be reminded to look down…

권위주의 정권이 마지막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정권의 붕괴는 대개 2개의 절차를 따른다. 실제로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균열이 시작된다. 갑자기 사람들이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다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정권이 단지 정당성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집행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공포에 입각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화의 고전적인 장면을 알고 있다. 고양이는 절벽에 다다른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발 밑에 땅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해서 걷는다. 고양이가 밑을 바라보고 심연을 발견했을 때가 되어서야 고양이는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정권이 권위를 잃으면 정권은 이렇게 절벽 위의 고양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붕괴하기 위해서는, 밑을 내려다 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이 정권에 대한 분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분석들에는(그 분석을 집행하고 널리 알릴 채널이 없으니) 당연히 힘이 없고 그만큼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런 냉소주의 중에 가장 악질이 '국개론'일 것이고, 가장 평이한 것으로는 다음 총선(혹은 다음 보궐선거) 내지는 대선을 기약하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 공통적인게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정권은 무능하다" 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찰이나 검찰이 휘두르는 무기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눈앞에 어른대는 서슬퍼런 흉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그 반작용은 두려움, 공포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복종도 있을리 없다.

그러니까,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극단 사이 어디엔가  (0) 2010/01/14
담배를 처음 피운 날  (0) 2009/07/05
얼마 안 갈거야  (0) 2009/06/28
내가 결국 서울에 살아야만 하는 이유  (0) 2009/06/24
'정치적'인 스토리텔링?  (2) 2008/12/16
Posted by 비앙

Use Your Illusions

번역 2009/04/07 20:43

오바마의 당선에 대한 지젝의 글을 번역해 옮겨 둔다. 나름대로 의역과 직역의 중간 쯤으로 해봤다. 이희재씨의 <번역의 탄생>을 보고 번역 방식 자체를 조금씩 저울질해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습이랄까... 어쨌든 작년 11월 쯤에 올라온 글인걸로 아는데, 이제야 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찾아서 보고 있다. 원문은 인터넷에 워낙 많이 돌아다니므로 패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버틀러의 글도 있던데, 뒤늦게 발견하였기에 조만간 번역을 해둘까 하고^^ (번역을 해둬야 기억에도 오래 남고 나중에 들춰보기도 좋은 것 같다!) 언뜻 봤지만 버틀러의 글은 역시 너무나 버틀러스럽게도 해체적이고 일반적인 희망과 믿음에 의문을 강하게 제기한다. 나로서는 다소 의외지만 오바마의 승리에서 약간이나마 희망을 읽어내는 지젝의 글과는 묘하게 상충한달까. 지금으로서는 지젝의 글에서 힘을 얻고 있지만, 버틀러의 글, 독해가 기대된다!


**

환상을 이용하라 _슬라보예 지젝

_translated by 비앙



노엄 촘스키는 사람들에게 ‘환상 없이’ 오바마에게 투표하자고 요청했다. 나는 오바마의 승리가 낳은 진정한 결과에 대한 촘스키의 의심에 심히 공감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오바마의 승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부시’로 밝혀질 아주 작은 개선만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그는 기본적으로 부시와 같은 정책을 좀 더 매력적인 방식으로 추구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부시의 재임 시절에 겪은 재앙으로 손상을 입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효과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에는 무엇인가 심히 잘못된 점이 있다. 아주 중요한 차원이 빠져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단지 다수자를 위한 끊임없는 의회에서의 투쟁과 그 투쟁이 포함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계산과 조작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는 더 많은 무엇인가의 징후이다. 이것이 그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은 나의 완고한 좌파 미국인 친구가 오바마의 승리 소식을 들었을 때 울었던 이유이다. 우리들이 의심이 어찌했든 간에, 바로 그 순간에는 우리들 각각은 모두 자유로웠고,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에 참여하고 있었다.

<학부간의 논쟁(The Contest of Faculties)>에서 칸트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역사에서 진정한 진보는 존재하는가? (그는 윤리적인 질문을 의미했지, 단지 물질적인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보란 증명될 수 없지만, 진보가 가능하다는 점을 가리키는 징후는 식별해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바로 그러한 징후였다.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 일어났고,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자유의 평등을 주장했다. 칸트가 보기에 파리의 거리에서 벌어진 (자주 피가 흘렀던) 현실보다 더 중요한 점은, 유럽 전역의 공감적인 관찰자들의 눈에 보였던 프랑스 혁명의 열정이었다. 그리고 이는 서인도 제도의 공화국인 아이티(Haiti)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세계사적인 사건이 촉발되었다. 최초의 흑인 노예 반란 말이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프랑스 혁명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아이티에서 온 투쌩 루베르뛰르(Toussaint l'Ouverture)가 이끄는 대표단이 파리를 방문한 뒤, 인민 의회가 그들을 열광적으로 평등한 자들 중에 평등한 자로 환영했을 때 일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signum rememorativum, demonstrativum, prognosticum이라는 3중의 칸트적 의미에서 역사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각주:1] 오래된 과거를 가진 노예제에 대한 기억과 노예제의 폐지를 위한 투쟁이 울려 퍼지는 징후이자 오늘날의 변화를 증명하는 사건이며 미래의 성취를 향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에 대해 걱정하는 진보주의자들이 꽉 닫힌 문 뒤에서 보여주었던 회의주의("만약 공식석상에서는 부인되어온 인종주의가 투표소라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다시 등장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근본적인 냉소주의적 현실주의 정치가인 헨리 키신저에게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가 말한 예측의 대부분이 완전히 틀렸다는 점이다. 예컨대 1991년 반 고르바초프 군이 불시의 일격을 가했다는 소식이 서구에 전달되었을 때, 키신저는 즉각 그 새로운 정치체제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군사조직은 3일 뒤에 불명예스럽게 몰락해버렸다. 그 전형적인 냉소주의자는 아주 자신감있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돈과 권력과 섹스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원칙이나 가치에 대한 언명은 실상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말 뿐이고, 그 말들은 실상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죠..." 그러한 냉소주의자들은 환상의 힘을 무시하는 그들 스스로의 순진무구한 분별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오바마의 승리가 그러한 열정적인 반응들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모든 역경을 딛고 실제로 오바마가 승리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 오바마의 승리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같은 위대한 역사적인 균열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공산주의 정권의 썩어빠진 비효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공산주의 정권이 실제로 무너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키신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냉소적인 실용주의의 희생자였다. 최소한 투표 2주 전에는 오바마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었지만, 그의 승리는 여전히 놀라운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한 전투는 오바마의 승리 뒤인 지금 시작하고 있다. 그의 승리가 사실상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전투 말이다. 특히 9/11과 최근의 금융 대폭락이라는 더 불길한 사건의 맥락에서는 말이다. 역사는 처음엔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반복된다. 부시 대통령은 각각 9/11 이후와 금융 대폭락 이후에 똑같은 내용의 연설을 다른 형식으로 발표했다. 두 경우 모두 부시는 미국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이 있다는 점, 그리고 즉각적이고 확고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또한 부시는 개인들의 자유와 시장 자본주의를 보증하는 미국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잠시동안 그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유예시키자고 요청했다. 이러한 유사점은 어디에서 오는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행복한 90년대'의 시작이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에 따르면 자유자본주의가 원칙적으로 승리했었던 그 시대는, 일반적으로 9/11 이후에 끝났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두 번 죽었어야만 했다. 9/11 이후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 유토피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종말로 치닫고 있는 전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의 경제 유토피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금융 대폭락 이후 이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난잡한 불합리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에이즈, 기아, 물 부족, 지구 온난화와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이 아주 시급한 문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숙고하고 결정을 미룰 수 있는 시간들도 충분히 가졌다. 세계적인 리더들은 발리에 모여 기후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회합은 성공적이었다며 환영받았지만, 그 모임의 중요한 결과가 있다면 2년 뒤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이어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융 대폭락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무조건적으로 문제의 시급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돈도 순식간에 마련되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보호하고 지구 온난화로부터 지구를 지키며 에이즈 치료제를 찾고 굶주리는 아이들을 지키는 일은 어떻게 하고? 그 모든 일들은 잠시 기다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은행을 지켜라!'라는 말은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또 즉각적인 행동을 낳은 무조건적인 명령문이다. 공포는 절대적이었다. 초국가적이고 초당파적인 조직이 즉각 만들어졌고, 세계적인 리더들 사이에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지금은 이 재앙을 피해가야 한다는 이유로 잠시 동안 잊혀졌다. (말이 나온김에 말하자면, 꽤나 절찬을 받고 있는 '초당파성(bi-partisanship)'이라는 말은 민주적인 과정이 사실상 유예되었다는 뜻이다.) 숭고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진짜' 일을 해결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시장의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자본이 우리의 삶의 실재, 즉 우리의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보다도 더 절대적인 실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미국에서만 7000억 달러가 단지 은행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다는 점과 가난한 국가의 식량 부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부유한 국가들이 220억 달러(실제로는 22억 달러만 쓸 수 있었다)를 투입하기로 했었다는 점을 비교해 보자. 식량 부족 위기에 대한 책임을 부패나 비효율성, 혹은 국가 개입주의에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빌 클린턴 마저도 곡물을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중대한 권리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일상적인 상품으로만 취급했다며 "나를 포함한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망쳐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클린턴은 자신이 한 개별적인 국가나 정부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연합 또한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그밖의 다른 국제 기구들이 추진했던 서구의 정책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은 농부에게 지급되는 정부 보조금을 삭감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가장 기름진 땅을 돈 벌이가 되는 수출 작물을 기르는데 사용했다. 그러한 '구조 조정'의 결과로 전지구적 경제로 지역 농업이 통합되었다. 작물은 수출되었고, 농부들은 땅을 빼앗기고 노동 착취 공장으로 끌려 들어갔으며, 가난한 국가들은 점점 더 수입 작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난한 국가들은 탈식민주의적인 종속 상태에 빠져들었고, 시장의 성쇠흥망에 취약하게 되었다. 즉 (부분적으로는 생물 연료(biofuels)에 사용되는 곡물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는) 곡물 가격의 상승은 곧 아이티로부터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국가의 기아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음식은 다른 것들과 달리 일상적인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식량 정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자급자족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은 채로 전 세계의 국가들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믿었다니 미친게 틀림없다"고 말했던 클린턴은 옳다. 허나 최소한 2가지가 덧붙여져야 한다. 먼저 서구의 선진국들은 그들의 농부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식량 자급자족을 유지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농장 보조금은 유럽 연합의 전체 재정의 거의 반이나 된다. 두 번째로 "다른 것들과 달리 일상적인 상품"이 아닌 것은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음식 외에도 모든 애국자들이 알고 있는 방어라든지, 물, 에너지, 환경, 문화, 교육, 건강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만약 그것들이 시장에 맡겨질 수 없다면, 누가 그것들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것인가? 바로 여기서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2006년 6월 5일 타임지의 커버 스토리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쟁'이었다. 그 기획은 지난 10년간 콩고에서 4백만명의 사람을 죽인 정치적인 폭력에 대해서 자세히 다뤘다. 허나 통상적인 인도주의 시위도 없었고, 단지 2개의 독자 편지가 반응의 전부였다. 타임지는 희생자를 잘못 골랐던 셈이다. 타임지는 무슬림 여성이나 티베트의 승려들을 선택했어야 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 아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팔레스타인 아이의 죽음이야말로 이름 없는 콩고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사보다 몇 배는 많은 분량으로 다뤄질 가치가 있다. 왜 그런가? 10월 30일에 AP통신은 콩고의 동부지역 수도인 고마(Goma)를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의 장군인 로렌 은쿤다(Laurent Nkunda)가 정부와 직접 대화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고속도로와 철도에 대한 보상으로 중국에게 수십억 달러 어치나 되는 풍부한 콩고 천연광물의 채광권을 제공하겠다는 조약을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신식민주의적인 문제는 잠시 제쳐 놓고 보더라도, 이 협상은 콩고 민주공화국이 통일된 국가로 기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할 것이었기에, 지역 군벌의 이해관계에는 치명적인 위협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2001년 UN은 콩고 천연자원의 불법 착취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콩고의 주요 갈등 원인이 콜탄(contan), 다이아몬드, 구리, 코발트, 금이라는 다섯 개의 주요 광물 채광권과 관리권, 그리고 무역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지역 군벌과 외국 군대의 콩고 천연자원 착취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르완다 군은 휴대폰과 노트북에 쓰이는 콜탄의 판매로 18개월 동안 최소 2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UN의 보고서는 콩고의 영원한 내전과 분열은 "모든 수혜자들에게는 '윈-윈'이었다. 이 거대한 비즈니스 벤처의 유일한 패배자는 콩고 사람들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 종족 전쟁이라는 탈을 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윤곽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극심한 착취 세력은 14년전 제노사이드의 희생자였던 르완다의 투치족들이다. 올해 초, 르완다 정부는 제노사이드에 대한 미테랑 행정부의 공모 관계를 보여주는 문서를 발행했다. 프랑스는 영어를 사용하는 투치족을 희생시키고 르완다 내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심지어 무기까지 제공하면서 후투족의 계획이 실행되도록 도왔다. 프랑스는 근거가 전혀 없다며 철저하게 그 고발을 기각했지만, 암만 좋게 봐도 그러한 행동이야 말로 근거가 전혀 없다. 아마도 미테랑을 그의 사후에라도 헤이그 국제 형사 재판소로 데려가는 일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의 보호자로 활동한다고 사칭했던 일류 서구 정치가를 최초로 재판에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선을 넘는 일이 될 것이다.

최근의 질서에 대한 위협과 맞서 싸우기 위해 최근 몇 주 동안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기 소르만(Guy Sorman)은 최근 아르헨티나에서의 인터뷰에서 "이 위기는 충분히 짧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소르만은 이 금융 대폭락을 다루기 위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즉, 상황을 다시 정상화하는 것 말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기술 혁신과 그 자체로 좋은 경제 정책의 힘을 받는 기업가 정신에 의해 추동되는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끊임없이 바꾸는 과정은 부유함을 낳는다. 비록 충분히 이해할만하게도 자신들의 직업이 잉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 과정에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재정상화 작업은 그 반대와도 공존한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 제시한 분명 불공평한 것이 틀림없는 해결책들을 대중이 불가피한 것인양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 공황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소르만은 시장이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가득차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재빨리 "과도한 정부 규제를 복원시키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행동주의 경제학을 사용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다. 결국 국가는 개인보다도 합리적이지 않게 될 것이며, 그러한 국가는 결국엔 거대한 파괴적인 결말로 치닫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 사이클과 정치적인 압력의 위기에 직면한 민주주의 정부와 지도층들의 주요한 임무는, 인류에게 훌륭히 봉사해 온 바로 그 체제를 방비하고 보호하는 것이지, 그 체제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구실로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이러한 훈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기 가장 어려운 것들 중 하나다. 이 세계에서 가능한 경제 체계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사실 불완전하다. 경제 과학에서 발견되지 않은 진실이 무엇이든, 자유 시장이야 말로 인간 본능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반영이며, 그 자체로 거의 완벽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더 명징한 용어로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심각하게 제기되는 비판에 대항하여 현존하는 체계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자유 시장을 인간 본능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2008년의 금융 대폭락이 외면상 불행해 보이는 행복이 된다거나,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 된다거나, 우리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일에 대한 분별력있는 암시가 된다거나 할 가망은 없는 것 같다. 이는 금융 대폭락이 어떻게 상징화되며, 어떤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나 이야기가 그 위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물의 일반적인 운영이 외상적일 정도로 중단되면, 그 장(field)은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경쟁에 활짝 열리게 된다. 1920년대 후반 독일에서 히틀러는 어떤 내러티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에 대한 이유와 그 위기를 탈출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경쟁에서 승리했다. 1940년 프랑스에서 마레샬 페텡은 2차 세계대전 초 프랑스의 패전 이유를 찾는 컨테스트에서 우승했다. 따라서, 오래된 맑스주의적 용어로 말하자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요 전략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에 대한 책임을 그 자체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탈(느슨한 규제, 큰 금융 조직의 부패 등)로 책임을 돌리는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면서 누군가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즉, 이 자본주의 체계 그 자체의 어떤 '약점'이 그러한 위기와 붕괴의 가능성을 열어 젖혔는가? 라는 질문 말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명심해야할 점은 이 위기의 기원이 '자비로운'일이었다는 점이다. 2001년 닷컴 거품이 무너진 뒤, 불경기를 막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촉진시키자는 결정이 당의 정책 노선을 휩쌓았다. 오늘날의 금융 대폭락은 7년전 피했던 불경기의 대가이다.

따라서 진짜 위험은 금융 대폭락에 대한 지배적인 내러티브가 우리를 꿈으로부터 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꿈꾸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우리는 걱정해야 한다. 금융 대폭락의 경제적 결과 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다시 활성화하고자 하는 명백한 유혹, 그리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주의에 대해서도 걱정하기 시작해야 한다. 오바마의 승리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오바마의 승리는 우리의 자유를 넓혀 놓았고, 그 결과로 우리들의 선택 폭도 넓혀 놓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오바마의 승리는 그의 승리가 없었더라면 어둠의 시대에 살았을 우리들에게 희망의 신호이며, 좌파든 우파든 현실주의적인 냉소주의자들에게 최후의 언어가 속해있지 않다는 신호이다. _끝

  1. 인터넷 검색을 조금 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원어로 옮겨 둔다. 혹시 아는 분들 있으면 좀 헬프 미ㅠ [본문으로]
Posted by 비앙
한겨레의 문화 일반 코너에서 연재했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기획을 옮겨온다. 나는 당연하게도, 박정수씨 보다는 이현우씨와 이성민씨에 가까운 편.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9298.html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헤겔과 라캉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르크스·대중문화 이론적 틀까지
매혹과 혐오의 시선 동시에 받는
21세기 세계철학계의 이단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시대 넘나드는 철학적 재담으로
오늘날 이념적 지형·돌파구 찾아
‘독창성·진정성 없다’ 비판 불구
열정과 광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이현우/서울대 강사

[namunnib] 뭐 일단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사회운동"이 "'혁명 없는 혁명'" 내지는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은 운동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가 신사회운동의 대표적 주자인 것인양 명명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모든 운동들에도 개별성을 넘어서 "사회적 총체성"을 고려하는, 혹은 '보편성'을 고려하는 움직임들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신사회운동"이라 칭해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속성'들은, 그 어떤 '-이즘'에도 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것과 싸우고 그것과 구별하려는 움직임은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에서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을 터. 또한 소위 '개별' 운동들이 총체성과 아무련 연관이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같지'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초월'하고 '총체성'을 고려하고 어떻게 '보편성'에 이를 것인가. 그렇게 하려는 건 누구의 욕망인가?)




* *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0673.html


현실 비판할 뿐 대안찾기엔 침묵

② 실천 없는 철학

이현우씨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 면에서 ‘괴물’ 같은 철학자라 해도 그의 사유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 기여의 실체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결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게 박정수씨의 생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성민씨가 지젝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안수찬 기자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한 문장 속에 지젝의 비판 철학이 지닌 가치와 한계가 담겨 있다.

지젝은 헤겔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 좌파이다. 헤겔 좌파로서 지젝은 물신주의적 믿음 위에 세워진 현실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지만 정작 어떻게 그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모든 철학이 일상의 현실은 생각만큼 확고하게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연기론은 만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가르치고,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의 물질적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젝은 신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믿는 주체(인간)의 상상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방법을 따른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

신경증 환자의 실재인 ‘외상’도 마찬가지다. 외상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을 객관적 실재로 믿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속에서 객체화된 외상을 주체 자신의 창조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객관성의 형식으로 환자를 괴롭히던 외상이 주체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환자는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외상의 환상성을 깨달아도 신경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비도의 체질을 바꾸거나 대안적인 인간관계를 찾지 못하는 한, 증상은 괴롭지만 살아갈 의미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면 신앙생활은 지속되고,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 의사와 능력이 없으면 민족주의는 지속된다. 화폐의 물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걸 알아도 대안적인 교환 방법을 찾지 못하면 화폐 물신주의는 계속되며,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도 자본 권력을 대체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할 욕망과 능력이 없으면 자본가에게 좀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은 자유로운 연합체를 구성하는 욕망들과 그 욕망들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가능하다. 신ㆍ민족ㆍ자본이라는 초월적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의 욕망이 구성하는 공통적(commune) 삶의 형식, 그것이 마르크스가 기획한 코뮨주의다. 그런 코뮨적 욕망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해 노예가 되는 사회를 당연하다거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환상 숭배자들에게만 안 보일 뿐 우리의 삶 속에 실재적으로 잠재해 있다.

현실의 비실재성 폭로하면서
어떻게 벗어날까 언급 적어
인간은 서로에 대한 ‘타자’일 뿐
코뮨적 삶 불가능하다 주장도


지젝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이런 코뮨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에게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는 인간을 자연(사물, 신체)과 분리시키고,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고, 낱낱이 떨어진 개별 인간들로 분리시킨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미지의 타자로 존재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형식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유롭다고 한다. 아무도 타자의 욕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타자의 욕망은 배려의 대상일 뿐 아니라 유일한 가치척도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참아라’거나 ‘즐겨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할 뿐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척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시장 민주주의적인 가치척도를 위해 딱 하나 금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을 배려하지도 않고, 타자의 욕망을 척도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수’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것,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 경제가 대중을 일반적 노예로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지젝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넘어선 세계 질서를 언급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이 기획은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을 승인하면서 시작된다. 홉스가 말한 ‘국가’라는 괴물. 지젝은 프로이트의 문명론에 내재한 홉스주의를 충실히 반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은 ‘법’과 ‘초자아’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욕망을 억압하는 법과 억압을 욕망하는 초자아가 없으면 인간 무리는 욕망의 충족을 향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젝 역시 상징적 질서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미지의 타자이며, 평화로운 이웃들의 이면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이 욕망의 시장 체제를 초극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 주체 형식으로서의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모든 작은 타자들을 하나의 총체적 집합으로 통합하는 예외적 큰타자, 곧 헤겔의 입헌군주와 모든 작은 괴물들의 욕망을 중화시키는 보편적 욕망의 괴물, 곧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솔직히, 지젝의 기획이 정말 이걸까 의심했는데, 이현우씨의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욕망의 자유민주주의 벗어난
헤겔·레닌 결합한 제국 기획
‘헤겔 좌파’인지 ‘우파’인지 모호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불투명


헤겔의 입헌군주가 정말 ‘텅 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남아 있을까?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의 관료집단들이 정말 ‘비계급’으로서의 보편계급을 대변할까? ‘지젝의’ 레닌주의에 따라붙을 이런 의문들은 사실 본질적인 게 아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젝의 말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실천은 가짜 행위다. 실천의 근거는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예견에서 찾을 수 없다. 혁명의 실천은 전대미답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근거는 그로 인해 창조되는 세계가 좋은 세계라는 자기 확신뿐이다. 지젝은 정말 그걸 확신하고 있을까?

지젝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타자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그래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물어보게 만들지만) 그런 만큼 자유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자유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그래서 텅 빈 상징으로 존재하는 주인에 의존할 때만 자유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의 상징적 주인 밑에서 보편적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때 지젝은 더는 지배적 현실의 환상성을 비판하는 헤겔 좌파가 아니라, 유일한 지배자의 환상으로 수립된 현실을 추구하는 헤겔 우파의 자리에 선다. 그것도 좋다. 좌파든 우파든 중요한 건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삶을 창안하고 싶은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가? 지젝의 흥미진진한 비판의 뒷맛으로 그가 욕망하는 삶을 느끼고 싶다. 무리인가?

박정수 / 수유+너머 연구원


* *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 안수찬 기자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정치·경제체제 변화보다
개인 향유 방식의 변화가 더 시급
“문명의 모든 것을 재발명하라”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 아닌
혁명 가능성의 조건 탐색할 뿐
지젝의 ‘정치적 기획’ 주장은 오독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Posted by 비앙

Slavoj Žižek, "Multiculturalism, or, the Cultural Logic of Multinational Capitalism", New Left Review(225: 1998), p. 42에서 일부를 대강 번역. 좀 어색한 번역이지만 ^^;

‘어메리칸 드림’의 점진적인 붕괴ㅡ아니 오히려 그 실체의 상실은ㅡ헤겔이 기술한 바 일차적인 정체성(primary identity)으로부터 이차적인 정체성(secondary identity)으로의 이행이, [오늘날]예기치 않게 전도(reverse)된다는 사실의 목격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들의 ‘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이차적 정체성이라는 ‘추상적’인 설정은 점차 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 주지 못하는, 현상적이자 순전히 형식적인 틀로 경험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점차 더 작은 정체성ㅡ종족적이고 종교적인ㅡ의 형식인 ‘근본적인premornial’것에서 지원받기를 원한다. 그러한 정체성의 형식이 심지어 민족 정체성보다 더 ‘인위적’일 때라도ㅡ게이 커뮤니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ㅡ그러한 정체성들은 특정한 ‘삶의 방식way of life’ 안에서 개인들을 보다 즉각적이고 압도적으로 붙들어 맨다는 점에서 더 ‘직접적immediate’이다. 이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시민이라는 자격 속에서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추상적’인 자유를 제한한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다루고 있는 것은 근대 초기의 민족/국가Nation 구성의 전도된 과정이다. 즉 ‘종족성의 민족화’ㅡ탈종족화de-ethnicization, 종족성의 민족성으로의 ‘지양(Aufhebung)’ㅡ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지금 ‘종족의 뿌리’에 대한 재탐구(혹은 재구성)와 함께 ‘민족성의 종족화’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차적인 정체성의 형식으로부터 ‘유기적인’ 커뮤니티를 가진 ‘근본적인(원시적인)’ 정체성으로의 ‘퇴행’은, 이미 [세계시장자본주의에 의해] ‘매개되어mediated’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그 배경background에 저항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출발 배경은 민족국가Nation-State] 그 지형terrain에서 발생하는 세계 시장의 보편적인 차원에 대한 반응(reaction)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이러한 현상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퇴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확히 정반대되는 것의 출현 형태이다. 즉, [헤겔이 말한]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on’의 한 종류로서, 이러한 ‘근본적인’ 정체성이 오늘날 거듭 언명된다는 점은, 유기적-실체적인 조화unity의 상실이 이제 완전히 완성되었다는 것을 지시한다.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



지젝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부정의 부정", 알듯 하면서도 알듯 말듯 =_= 역시 철학 공부를 시작하려면 딴 경로를 들르기 보다는 직접 칸트와 헤겔로 가야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 (가능하다면;)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을 훑다가  (2) 2008/09/19
"사랑의 은유"  (0) 2008/06/15
(다문화주의/사회에서) 전도되는 모더니즘  (2) 2008/05/01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어쨌다구  (4) 2008/04/25
100% 친밀함이라는 개념  (0) 2008/04/07
Posted by 비앙
Slavoj Zizek, "Censorship Today: Violence, or Ecology as a New Opium for the Masses"(원문)의 일부 번역

이탈리아의 좌파 저널리스트 Marco Cicala는, 내게 그가 최근에 겪은 이상한 경험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가 한 기사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을 썼을 때, 편집자는 그에게 이 용어가 진짜로 필요한지에 대해서 물었다. 즉 이 단어를 “경제”와 같은 동의어로 바꾸어 쓸 수 없냐는 것이다. 최근 20~30여 년 간 이 단어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그 무엇이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몇몇의 이른바 고전적인 맑시스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자본주의에 대해서 더 말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정치가들, 노동조합원들, 저자와 저널리스트들, 심지어는 사회과학자들로부터도 무턱대고 공격받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있었던 반세계화 운동의 격랑은 어떤가? 이것은 이 진단에 분명히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엄밀한 관찰은, 이러한 운동이 또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경제 메커니즘, 작업 조직의 형태들, 이익의 추출에 중심을 둔―으로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어떻게 굴복하고 있는지를 빠르게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통 통속적인 반미주의의 형태 속에서) 누군가가 “세계화와 그 행위자들(agents)”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적은 형체가 부여된다(객관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주요 과제가 “미 제국(the American Empire)”과의 싸움인 곳에서는, 만약 반미주의자라면 그 어떠한 동맹도 정당하다. 그래서 고삐 풀린 중국의 “공산주의적” 자본주의, 폭력적인 이슬람의 안티-모더니스트들 뿐만 아니라 벨라루스의 불쾌한 Lukaschenko 체제조차도 진보적인 반세계주의자이자 무장-한-동지(comrades-in-arms)들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썩 평판이 좋지 않은 “대안적인 근대성(modernity)”의 다른 판본을 갖는다: 즉 자본주의 그 나름으로서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의 기본적인 메커니즘과 대결하는 것 대신에, 우리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더 “진보적인” 프레임 속으로 동원하는 (조용한) 관념과 함께 제국주의자들의 “월권”에 대한 비판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개념을 비웃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류는 “후쿠야마주의자”이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가 최종적으로 발견된 공식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공식을 단지 조금 더 관용적으로라거나 하는 식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하고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자연화(naturalization)”를 승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오늘날의 세계적 자본주의가 그것의 무한한 재생산을 막을 수 있는 충분히 강력한 반대들을 포함하고 있는가?



지젝의 글은 최근에 영화 <300> 관련해서 쓴 것 이외에는 잘 보질 않았다. 예전엔 몇 개월 간 열심히 보려고 노력했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그의 글을 보자 어느 정도 반갑기는 하다. 나름대로 신선한 이야기를 계속 던지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한 번 영어 공부 삼아 번역하려고 한 시간 쯤 붙잡고 있다가 헤겔의 이성의 간계the Cunning of Reason등을 들먹거리는 지젝의 화려한 논변에 지쳐버려서 손을 놓아버렸다(트래픽 인 우먼이나 계속 봐야는데^^;). 그래서 그냥 번역한 일부분만 간단히 옮겨둠. 아, 그나저나 진짜 진정으로 정말로 참말로 헤겔을 읽어야 하나요? ;ㅁ; 그래도 내가 최근에 발견해서 종종 들어가고 있는 한 블로그에서 본 것인데, 5만원인가 하던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 생각보다 정말 재밌어서 자기 전에 읽고 잔다고 한다. 보면 한 없이 졸려져서 자기 전에 보면 좋은 책인지 뭔지는 아직 모르나(^^;)

어쨌든 나야 아직 학교에 머무르고 있으니까 그나마 '자본주의' 운운하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 '밖'은 아직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드니 말이다. 하긴 내가 들었던 그 어느 수업에서도 '자본주의' 운운했던 수업이 없었다. 정치경제학 수업을 들으면 좀 다를 일일지 모르지만.. 학내에서도 몇몇 학생운동 단위들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도 흔치 않다. 진정 자본주의의 자연화인가. 아니, 자연화라고 무턱대고 현상-기술적/관찰적으로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자연화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자연화되는 것처럼 생각될 뿐이라고 생각하는게 속 편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까운 진술일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 자본주의(여기서 사용되는 자본주의는 특정한 경제적 체제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에 봉사하는 정치적인 실천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즉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말.)에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대응하는 (다소 투박할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 비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셸던 월린은 '비전'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적인 보고"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이다(<정치와 비전>, p.51). 꼭 밀즈가 말했던 "사회학적 상상력"과 비슷하게.

오늘날 부족한 것은 후자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이외의, 혹은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정치경제학적 체계를 사고하는 것은 실상 어려운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일단 한번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상상력은 콜리지(Coleridge)가 말했던대로 "모든 것을 하나의 우아하고 지적인 전체로 형성하는" 유연한 "조형적"힘이 될 수 있다(Ibid.). 즉 우리는 우리의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혹은 우리가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체제의 질서를 볼 수 있으며, 그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원리와 가정을 총체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국지적일 수도 있고 전세계적일 수도 있다. 그러한 탐구를 기초로, 어떤 다른 정치(경제)학적 입장을 창조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월린도 지적하고 있는 바 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러한 정치적 상상력은 어떤 '음모론'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릴 수도 있다. 오늘날 세계를 총체적으로 그려보려는 하는 시도들은, 대부분 '음모론'이라고 일축되어 버리고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어떤 한 입장이 '비현실'이 되고 '음모론'이 되는 순간 그것은 즉각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열망, 과학에 대한 충동..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젝도 어디엔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허위 의식' 따위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한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월린은 상상력을 "친숙한 방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는 이론가의 수단"이라고 지칭한다. 즉 우리에게 '친숙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더 나아가 이 '친숙한' 방식을 폐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치적 상상력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상상력'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그것이 틀렸다는 점이 발견되었을 때 얼마든지 폐기하고 다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쓸데없이 주절주절 말이 길었네; 그나저나 여기 약간 번역해온 글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는 글이다. 제목이 상당히 선정적이지 않은가? 폭력이나 생태적 파국에 대한 비판들을 '검열(censorship)'이라고 부르다니-_- (물론 지젝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어떤 자본주의적 증상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게다가 무려 "대중들을 위한 아편" 운운한다. 이 할아버지 진짜 매드니스 드라이브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렇게 보면 지젝은 예나 지금이나 뭔가를 후벼파는데 '강박증'이 있지 않나 싶은 느낌이다. 그만큼 또 상당히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번역하는 건 힘들어도 꾹 참고 리딩은 한 번 더 시도해 볼만할 것 같음 ~_~

그나저나 존 벨라미 포스터의 책들을 읽어야하는데;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는 무척 재밌을 것 같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종주의적 충동  (0) 2008/01/16
"반대 의견은 수렴하겠지만 운하는 건설한다"  (0) 2008/01/06
자본주의의 자연화  (0) 2008/01/05
다시 또 미쳐;  (4) 2007/12/23
미쳐  (0) 2007/12/23
Posted by 비앙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고 있다. 3분의 2 정도를 봤는데, 사실 원문도 어려워서 번역도 어려웠다는 얘기를 보기는 했지만 본문도 지나치게 잘 안 읽힌다. 그래도 꾸역꾸역 읽었더니 머리 속에 남는 것은 별로 없는데 그래도 중간 중간 '뜨끔뜨끔'한게 있다. 그 중 베스트는 "정신의 원 스톱 쇼핑몰"이라는 말. 그 다음은 모뉴멘털리즘이라는 말이다. '정신'이 무슨 단어의 번역어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소위 '대륙 철학'에 관심이 가는 나로서는 참조해 둘만한 대목이다. 이 부분은 제 2장, '지식인과 철학자의 대화' 편에서 옮겨 두는 것이다.


훌륭한 철학자들은 공공의 지적 영역에서 상당한 여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글이 높이 평가 받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 보다는 그들의 글에서 풍기는 특이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87)

대륙 철학자들은 프랑스나 독일 태생의 어떤 '대가 급 사상가'의 보호막에 들어가 그의 말을 새로운 맥락에서 반복하면서 대가의 사상을 재활용하기를 좋아합니다. 대가 급 사상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하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말 전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몇몇 신조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제들을 감추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철학자들이 매력적인 까닭은 정신의 '원 스톱 쇼핑몰'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일단 당신이 미셸 푸코나 위르겐 하버마스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면 그 다음에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88)

푸코나 하버마스에 대해서는 아무 유감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아류들과 흉내쟁이들, 정신의 게으른 식객들이 문제입니다. [...] 이런 사태가 온 것은 추종자들이 스승의 언어만 모방하고 행동은 본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그들의(스승들-namunnib) 글은 강의 노트의 요약본이었습니다. 실제 강의를 할 때는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예시해주고 청중에게 깨우침을 주는 다양한 일화나 사례, 농담 등을 덧붙이면서 강의 노트보다 훨씬 풍부하고 생생한 내용을 전달했을 것입니다. [...] 당연하게도 그들은 인간의 위트를 매우 진지하게 취급한 철학자들이었습니다.(89-91)

"정신의 원 스톱 쇼핑몰"이라는 말을 들으면, (지젝의)라캉이나 지젝으로 레포트를 적지 않게 써왔던 나는 사실 일단 뜨끔해진다 -_-; 지젝의 끊임없이 늘어지는 장광설(그게 또 강력한 매력이지만)과 반복되는 예시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의 많은 저서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그의 분석들. 뭐만 나오면 턱턱턱 떨어지는 그의 분석은 사실 "원 스톱 쇼핑몰"이란 말이 적절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글들을 읽다 보면 '지젝스러움'이 분명히 있고, 그 지젝스러움은 적잖게 '원 스톱 쇼핑몰'에 맞아 떨어진다. 헤겔과 라캉이라는 원 스톱 쇼핑몰. 이 점은 <지식인>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기는 한데, (94-97) 이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좀 막나간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것들은 대개 중요한 분석이지만, 참을성 별로 없고 늘 새로운 걸 추구하고 싶어하는 (때로는 불성실하고 불만에 가득찬)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많고 어려운 경로를 거쳐왔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이론적 근거가 훨씬 탄탄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 스톱 쇼핑몰"로 취급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만큼 그도 현대에는 '대가 급'일 수 있다는 것 역시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쇼핑몰은 아무나 세우나...?) 사실 문제는 지젝이나 라캉이 아니라, 툭하면 "지젝대고 라캉대는" 사람들이겠지만.. (나 또 뜨끔- 그치만 요즘 이렇게 지젝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독자들은 적지 않은 것 같은데, 그에 비하면 확실히 생산량이 적다. 지젝의 벼룩시장화, 혹은 1000원 쇼핑몰화가 이루어진 듯한 느낌. 그러니까 결국 지젝은 '고상한' 철학자로 취급되지 않는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토대에는 아카데믹 편견이 적지 않게 개입되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또 이 가상 대담의 중간 중간에 버틀러가 등장하는데, 나의 팬심은 이 글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게 만든다. -_- 흥. 근데 확실히 '대가 급 사상가'들의 위트는, 그런 것 같다. 헤겔도 살아 생전에는 엄청난 위트를 자랑했다고 하지.. 버틀러도 대담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청중을 참 잘 웃긴다. 글과 사람은 역시 다를 수 있어. 정희진씨도 마찬가지고..

상당히 불편한 것들이 많은 책이기는 한데, 일단 끝까지 읽어 보아야 겠지. 가장 큰 불편함은 이것이다. 이 책에 사용된 표현을 조금 패러디 하면, "스티브 풀러의 주장에서 포장을 벗겨내면 다음과 같은 알맹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식인은 학자들이 못하는 곳 어디에든 맘대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임은 알아서 질테니 우릴 그냥 내버려 두세요." 불편하다는 것은 동의하지 못한다는게 아니라 약간 어딘가 께름찍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 서평(경향신문)에 따르면 그가 "지식인이 풀어야 할 가장 힘든 과제는 계급과 성, 인종의 구분을 초월해 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라고 언급한다는데, 어디에 나오는지 아직 모르겠다; 대충 읽고 넘어간 부분에 있을지도 모르겠고 뒤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가장 힘든 과제 운운하는게 참 골 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저게 진짜 저자의 말이라면, 저자한테 "계급 성 인종의 구분을 초월해 융합시키는 것"은 대체 어디의 어떤 작자가 하고 있는 미친 짓거리인지 묻고 싶기도 하고.. 어쨌든 '세대 간의 장벽'이 무척 힘든 과제일 수 있다는 것, 나도 절감하고 있다. 에휴 나이주의ageism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학문성과 인식론  (0) 2007/12/22
비평가의 기법에 대한 13가지 명제  (0) 2007/12/21
정신의 원 스톱 쇼핑몰  (0) 2007/12/18
스펙터클과 동물원  (3) 2007/12/08
오늘의 명언(?)  (0) 2007/12/04
Posted by 비앙

300(2007)

영화 2007/12/16 15:52
300(300, 2007)
2007년 12월 17일 | DVD 대여

한동안 논쟁이 되었던 <300>을 또 이제야 보았다 -_-; 확실히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읽었던 지젝의 <The True Hollywood Left(링크)>라는 글에 보다 더 동의하는 편이다.

내가 봤을 때도 스파르타 군은 절대 '미국'(으로 대표되는 경제군사개발국)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300명의 스파르타군은 탈레반에 가까이 해석할 수 있으며, 페르시아군이야 말로 현재의 경제군사개발국의 이데올로기를 압축하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중언부언 말 덧붙이는 건 무의미하고, 캐즘님의 블로그에 지젝의 이 글이 번역되어 있기에 허락없이 옮겨둔다.. 출처는 http://blog.jinbo.net/chasm/?pid=44


캐즘님의 번역문 보기


영어 원문 보기



확실히 지젝의 이 글 자체도 논쟁적일 수 있다. 그의 영화 내용에 대한 분석은 나도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바 이지만, 그가 덧붙이고 있는 이러한 말들은 확실히 동의하기엔 아직 석연찮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 방임론hedonist permissivity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 좌파가 규율과 희생정신을 (재)평가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루소에서 자코뱅에 이르는 근대의 평등주의적 급진파들이 스파르타를 동경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새로운 스파르타로 상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 규율이라는 스파르타의 정신 속에는,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제거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해방의 정수(core)가 존재한다.

스파르타인들의 가혹한 군대식 규율은 아테네인들의 “자유민주주의”와 단순히 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내적인 조건이자 기반을 이룬다.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는 오직 가혹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지젝의 이러한 진단은 물론 일정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 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현대적인 질문은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영화속에서 엿볼 수 있는 성정치적 이슈나 장애학적 이슈는?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혁명적인 "핵core"에 관한 것일 테다. 물론 그것은 내용 없는 순수한 형식이며, 따라서 지젝(을 통한 라캉)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윤리'적인 것에 보다 근접한 것일 테다. 그러나 그 "핵"을 추구함에 앞서, 그 핵을 둘러싼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감춰서는 안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짧은 글에서는 지젝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있지는 않았겠지만, 과연 그 질문들에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답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과연 현대적인 자아들의 해석틀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그 혁명적인 "핵"은 어떤 주체들에게 모종의 충격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어떤 '충격'만을 주기 위한다면, 그것은 쓸모도 별로 없을 뿐더러 위험하기 짝이 없다. 주체들이 실재적이고 외상적인 '충격'을 어떻게 흡수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홀로코스트는 물론 현대 한국에서 광주나 제주 혹은 곳곳에서 있었던 집단 학살 등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충격(특히 혁명적인)에 대해 가능한 '흡수'와 '망각' 그리고 '의미화'에 대한 가장 끔찍한 판형이다. 우리는 보다 더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최근 서구의 일부 아카데믹 스타들ㅡ랑시에르, 아감벤 등ㅡ에게서 회자되고 있는 '벌거벗은 삶'이라든가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해봐야할 테지만, 여전히 나는 기본적으로는 회의적이다. 회의적이라기 보다는, 사실 그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아직 별로 쌓이지 않았다. 인용한 글에 나온 바디우의 말을 다시 인용해 와보자. “우리는 민중적 규율이 필요하다. ···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오직 규율만 가지고 있다. 권력도, 돈도, 무기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가진 것은 규율, 즉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이 규율은 이미 조직의 한 형태이다.”  물론 타당한 진단이고, 여태까지 지배적인 정치학에서 보지 못했던 (아니, 일부러 보지 않았던) 어떤 형태들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학적 관심이, 랑시에르가 말한  "인간에서 휴머니티(humanity)로, 휴머니티에서 인도주의(Humanitarian)으로의 기이한 전이"와 어떻게 분리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날카롭게 진단했던 "인권의 종말" 역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인도주의'의 새로운 아카데믹적 판본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궁지에 몰린 아카데믹 지식인들의 탈출구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위의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기 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물론 이건 다 '혐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심판대에 올릴 권능도 이유도 별로 없다. 문제는 역시 그것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에도 있지만,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읽느냐"에도 역시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이 제 아무리 진정성을 갖춘다 해도 그들의 충실한 독자들이 진정성이 없으면 꽝이다. 선교를 해야하는 곳에서 교회만 세워서는 안되는 것처럼. 게다가 난 여전히 아카데믹 지식인이나 이론가들이 '혁명'을 말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위에서 나오는 '남성 아카데미 스타'들이 놓치거나 보지 않고 있는 부분도 내게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다. 또한 내게 있어서 그들은 (아직까지는) '상징자본'일 뿐이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된 정원(2007)  (0) 2007/12/26
빈집(2004)  (0) 2007/12/17
300(2007)  (0) 2007/12/16
브로크백 마운틴(2006)  (0) 2007/12/16
파라노이드 파크(2007)  (0) 2007/11/25
Posted by 비앙
TAG 영화, 지젝

Est-ce que vous croyez encore au progrès? 당신은 아직도 진보를 믿으세요?

<프랑스어 입문 1> 수업에 쓰이는 텍스트에서 이 예문을 보고 잠시 침울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악의가 느껴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물론 Oui! Non!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렇게 단순한 말로 대답을 시작할 수 있을까?

당연히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진보주의자 입니까? 라고 (맥락 없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물어 온다면 우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진보’라는 말에 들어있는 수없이 많은 의미들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진보’라는 말이 물신화 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게다가 저 질문들은 얼마나 악의에 가득 차 있는 말이던가? “(요즘 같은 세상에 설마) 아직도 진보를 믿으세요? (진짜 촌스럽다.. 뭘 모르는 사람이네)”

하지만 그게 ‘믿음’의 차원으로 가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즉 존재, 정체성, 아이덴티티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믿음’으로서의 진보가 되면 다른 맥락에 놓인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진보’를 믿는 편이다.

사실 ‘진보’라는 말 자체를 회의하는 것은 무지 쉽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라는 딱지, ‘좌파’라는 딱지를 부인하는 것도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다. 그저 ‘아니다’, 라고만 말하면 되니까. 그 유명한 말인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신드롬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냥 ‘나’는 그 ‘이름’이 아니라고(Am I that name?), 나는 당신이 칭하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고, 나를 그렇게 ‘꽉 막힌 본질주의자’ 따위로 보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호소하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 말들을 들어봤자 허망하기 짝이 없는 건, 다만 이러한 언사들은 아무런 저항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명’은 각 주체들을 특정 이데올로기의 주체로 생산한다. 여기서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원래 그 주체는 본질적인 어떤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지거나covered, 체현되거나embodied, 등등을 할 뿐이다. 혹은 이데올로기의 행위자―즉 대타자의 욕망을 수행하는―로 존재할 따름이다. 주체성은 그 자체로 주체의 ‘외부’와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다. 여기서 이 ‘외부’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의 한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무서운 것은, 단순히 ‘호명’을 거부한다고 하여 그 이데올로기가 붕괴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주체들의 거부까지도 자신의 계산에 넣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진정으로 완결된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항상 그 완결성에 거부하고 저항하는 objet a를 포함한다. 푸코가 권력은 항상 저항을 내포한다고 말했을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론은 푸코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위 주체들의 저항이 없다면, 권력은 존재 기반을 상실한다. 그렇기에 권력과 이데올로기는 항상 역설적인데, 그 개념들은 그 자체를 ‘완전한’ 체계인 것처럼 포장하고자 하지만 그 완전성이 ‘실제로’ 완결되는 순간 권력과 이데올로기는 붕괴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각 주체들도 그 ‘완결성’이―이데올로그들의 특성이 이것인데―실제로는 허구라는 점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인식하고 있지만, 그 ‘완결성’의 결핍을 폭로하고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히 저항한다.

앎으로서의 좌파, 행동으로서의 좌파 중에 행동으로서의 좌파가 보다 더 도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앎으로서의 좌파는 지나치게 쉽기 때문이다. 앎으로서의 좌파의 화법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나는 ~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I know ~, but ~”. 예컨대 나는 “나는 동성애 억압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들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나는 육류 섭취에 반대한다. 하지만 동물성 단백질은 꼭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백화점 쇼핑이 즐겁다.”, “나는 이성애 결혼 제도에 반대한다. 하지만 결혼 제도가 주는 특권을 포기하기는 싫다.” 등등. 몸 뚱아리는 얼마나 솔직한지!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실상 ‘앎’의 영역이 아니라 ‘행동’의 영역임을 지적한다. 이 앎으로서의 좌파는 좌파 지식/이론의 전복적인 정치적 핵심을 제거함으로서만 그 이론을 향유한다.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현금 없이 크레딧 카드로 결재하는 사람들처럼, 트랜스 지방 없는 튀김과 과자를 원하는 사람들처럼.

오늘날, 많은 이들은 거대 서사가 끝났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정치가 ‘죽은 것’은 아니다. 거대 서사가 물러난 바로 그 자리에서 개별 주체들의 ‘욕망과 위반의 정치학’이 새롭게 움트고 성장해 왔다. 이와 맞물려 거대 서사적 본질주의에 대한 신경증적 거부가 유행이 되었다. 마치 이 본질주의라는 녀석이 우리를 그동안 완전히 억압해 왔던 것처럼(신경증의 기저에는 이 억압이 깔려 있따), 우리는 늘 같은 것과 일관된 것을 거부하고 늘 ‘차이’와 ‘균열’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 욕망, 위반, 차이가 대체 어떤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실상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위반’, ‘욕망’,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거의 강박이 되었다. 이 세 가지 카테고리로 설명할 수 없는 담론은 사실 상 환영받지 못한다. 전통적인 맑시즘, 페미니즘, 그 어느 것 하나도 인정받지 못한다. 사실 그것들을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면서도, 어디서 들어본 ‘풍월’로 그것들에 냉소적인 거부를 보인다. 우리는 항상 그것들의 변형, 변종만을 요구할 뿐이다. 반대로 우리는 그러한 새로운 담론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생겨났는지, 어떠한 문제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담론들인지에 대해서는 질끈 눈감아 버리게 되었다. 실제로 그 담론들은, 그 담론들이 거부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기존의 ‘구식’ 담론들의 독해에서 나옴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 지배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초자아’라는 명명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게 그 담론들이 분석을 중단하는 지점에서 초자아가 음험하게 고개를 쳐 든다. 우리를 규제하는 것들에 대한 ‘위반’을 명령하는 ‘도착적인 초자아’. 갈수록 아브젝트(abject; 비체) 예술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초자아의 명령과 맞물려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처음에 그것들은 충분히 전복적이었다. 완결성을 위장하는 주체들이 폭력적으로 거부했던 것들―모체, 똥 등의 분비물, 피, 찢겨진 살점 등―을 상기시킴으로써 주체들의 불완전성과 결핍을 폭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위반이 흘러흘러 도착적인 초자아의 명령이 되자, 우리는 그것들에 고통스럽게 집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 도착적인 초자아의 성격은 어느 정도 자명할 것이다. 그것들은 확실히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의 핵심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착적이고 외설적인 초자아의 명령에 저항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은 ‘정통파’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다(이 포스팅의 제목도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 2장의 제목을 따온 것이다). “나는 (정통) 유물론자다”, “나는 (정통) 맑스주의자다.”, “나는 (정통) 페미니스트다.”, “나는 (정통) 평화주의자다.” 등등. 아마도 이러한 말들은 오늘날 위반과 욕망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외상적인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그 충격이 의도하는 것은, 그들이 무의식적/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대상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또 하나의 ‘본질주의’가 되었다는 그 흔한 말처럼, 상극에 있는 대상은 결국 이어진다는 그 흔한 말처럼, ‘위반’과 ‘차이’를 물신화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이름의 ‘본질주의자’다.

흔히 믿고 있듯이 ‘진정한’ 정통파ㅡ짝퉁이나 도착적인 정통파 말고ㅡ는 구식이거나 완고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건 덧씌워진 선입견에 불과하다. 정통파에도 당연히 위반과 욕망은 존재하며, 다만 그것이 중심에 드러난다거나 그것들을 자랑하고 떠벌리지 않을 따름이다. ‘사랑’은 흔히 믿듯 개인 대 개인의 이자 관계라기보다는 ‘혁명’ 속에서의 사랑, 즉 삼자 관계로 돌입했을 때 보다 사랑의 임무를 완수하지 않는가? 또한 ‘진정한’ 정통파야 말로 (흔히 믿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가장 차이에 너그러운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바디우가 ‘차이’는 실상 언제나 있었다고 이야기 할 때, 그리고 지극히 진부하고 평범한 것임을 이야기 할 때, 내가 그의 이야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늘 신중하게 검토해야 하는 그의 말이지만, 귀가 솔깃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보편성, 그가 말하는 철학, 그리고 그것들을 향한 욕망..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적인 혐오발화들  (9) 2007/11/09
차별금지법안?  (0) 2007/11/01
정통파의 가슴 설레는 로맨스  (0) 2007/11/01
"학생들의 의견을 배제했다"  (0) 2007/10/31
이중 관여(double engagement)  (0) 2007/10/14
Posted by 비앙

Agalma를 제거하기

생각 2007/10/02 11:14

(지젝의 독법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그가 생존하던 당시 한창 부흥해 올라오고 있던 반유대주의-나치즘에 맞서서, 자신들의 '위대한' 시조가 알고 보면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프로이트 전집, <종교의 기원>) 나치-반유대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믿음', 즉 그들(유대인)이 선택받은 '순수'하고 '고결'한 민족이라는 믿음에 더해 그들에 대한 격렬한 인종주의적 증오와 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프로이트 나름의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서 아마도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 자신들에 대해서 갖고 있었을 인종주의적 믿음, 즉 유대인들은 '알 수 없는' 그 무엇(objet a)를 갖고 있다는 신비로운 믿음을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agalma(라캉에게는 objet a 였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Agalma, 대상에게 신비롭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믿음.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자들 스스로는 유대인들의 '남다른' 쾌락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어버릴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신비화 한다. 그것이 인종주의적 증오와 폭력에 이용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들은 '우리'가 모르는 쾌락을 누리고 있다! 따라서 저들은 '우리'가 누릴 쾌락을 빼앗아 간 것이 틀림없다! 제거하라! 처단하라!
 
사실 이러한 구조는 "반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을 관찰했을 때, 즉 반유대주의적 관점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거쳤을 때만이 '반유대주의'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유대주의적 신념을 공유하던 유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그러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유된' 믿음에 의해서 인종주의적 편견은 유지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에 부여된 인종주의적 agalma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제거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종종 읽을 수 있는 '쿨'한 자유주의적 마이너리티 담론에 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종주의적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히려 그것의 확장에 봉사하는, 일종의 변종 기생 담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환원될 수 없는 '적대antagonism'를 드러내고 이론화 하는 것, 그것은 물론 중요한 작업이지만 그것이 '욕망'의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을 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자기 자신들에게 스스로 agalma를 만드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다. 물론 agalma를 제거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생들의 의견을 배제했다"  (0) 2007/10/31
이중 관여(double engagement)  (0) 2007/10/14
Agalma를 제거하기  (0) 2007/10/02
혐오 발화(hate speech)  (2) 2007/10/01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글쓰기  (0) 2007/09/26
Posted by 비앙

언어에 관한 '현대적 이해'(특히 서구 철학계의)는, 더 이상 언어를 합리적인 의사소통이나 정보교환의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화행speech act 이론은 물론이요, 라캉주의자들의 언어 이해, 그리고 수많은 현대 이론가들은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거부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언어는 권력 관계를 확인하고 확립하는 어떤 수단으로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언어는 세계 속에서 작용함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수단이자 논리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언어 사용과 용법, 유통, 그리고 의미의 고정과 변화 등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통적인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 세계관 내에서 타자로 기입된 동성애, 장애인, 여성, 환경, 동물 등의 '비-인간 주체'들에 대한 혐오 발화hate speech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혐오 발화는 단지 특정 개인이 특정 개인에게 향하는 '장난질' 정도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맥락에서 권력 관계를 구성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이 된다(물론 그것을 '탈정치화'하는 일종의 폭력gewalt를 수반하지만).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되거나 가정된 특정 집단에 봉사하는 지배 헤게모니 전술의 일상적인 실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혐오 발화에 대한 일차적인 대처 방식은,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PC)운동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방식이다. 각 개인들의 '도덕 의식'에 호소하면서, 보다 더 올바른 호칭, 보다 더 올바른 사고를 주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PC적 접근 방식은 '쿨'의 정서와 맞물리면 놀라운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특정 혐오 발화를 하는 것은 '쿨'하지 않은 구시대적인 구닥다리 같은 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자유주의적 담론의 힘이 증가하고 젊은 세대 특유의 '쿨'이 유래없이 커지면서 동성애가 대중 문화 속에서 쿨하게 소비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호모 포비아적 발언 또한 더 이상 '쿨'하지 않게 인식된다. 심지어 어떤 '쿨'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이섹슈얼bisexual'이 되는 것이 장려되기도 한다. 또한 여성 혐오적 발언은 더 이상 (적어도)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서는 유통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한 발언을 하는 주체는 이제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근데 땅박씨는 예외상태다; 젠장).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PC 운동의 궁극적인 성과는, 아마도 '법 체계'의 정비일 것이다(여기서부터는 자유도덕주의자들의 영역을 넘어선다). 오늘날 모든 개인의 도덕 수준을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혐오 발화를 하지 못하도록 법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혐오 발화를 차단함과 동시에 처벌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윤리 21>에서 읽을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윤리(도덕)적 접근 방식과는 전연 다른 접근 방식이다.

여기서 1942년에 있었던 "채플린스키chaplinsky" 사건을 중요하게 상기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모욕을 주는insulting 특정한 '표현'들을 금지하는 것이 그 유명한 미국 자유주의적 헌법의 "수정헌법 1조"에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다. 여기서 "fighting words"라는 말이 등장한다. 법원은 "fighting words"의 발화가, 이 말words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위'를 유도하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수많은 논란을 증폭시킨 판결이기도 했지만, 어떤 법적 접근에 대한 사고의 clue를 주는 것이기도 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법정 판결에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은 무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이러한 '법적 접근'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한다. 자꾸 미국의 예를 들어오게 되어서 난감하지만(미국 같이 갈등을 정치-투쟁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호소하는 '소송 사회'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도 마찬가지로 흘러가는 거 같거든),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1992년에 있었던 사건(통칭 R.A.V사건으로 알려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인종주의자가 한 '흑인' 가정의 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워버렸다. 이는 그 소도시의 조례 법규에 따르면 일종의 '혐오 범죄hate crime'으로 규정되어 '경범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소도시의 규칙 자체가 '인종', '종교', '민족' 등의 "특정한 영역"만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정치성향', '동성애' 등 다른 영역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중립성을 벗어나고 있기에 위헌이라는 무척이나 뻔뻔스러운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그 중립성을 위장해 또다른 혐오 발화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법' 자체의 특성상 얼마든 이러한 법적 접근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라캉주의적 독해 또한 이러한 '법 체계'의 정비 자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법'언어는 일종의 '금지'의 언어다. 이러한 금지는 또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만큼 더 강력한 숨겨진 법의 이면, 즉 '초자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금지는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강한 금지는 더 강한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법을 받아들이는 주체들은 법의 명령을 수용하지만, 은연 중에 법의 이면의 초자아까지도 인식하게 된다. 초자아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외설적으로 귀환한다. 법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 내에서도 결코 문제점들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는 더 교묘해짐과 동시에 법 체계가 지속적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는 이러한 문제점을 잘 예시한다(마치 법이 자기 증식을 위해 '사건'과 위반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살인에 대한 법의 과중한 처벌은 살인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이 과중해질수록, '살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외설적인 초자아적 위반의 욕망이 자라나기 마련이다. 혐오 발화에 대한 법적 접근도 마찬가지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까? 혐오 발화에 대한 금지는 오히려 인종주의자들 성차별주의자들 동성애혐오자들의 외설적인 초자아적 욕망을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혐오 발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objet a)"이 있다는(욕망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권력 구조를 유지함과 동시에 강건하게 만든다는) 주체들의 인식을 오히려 강화하지는 않을까?


----------

이렇듯 혐오 발화에 대한 PC적 접근, 법적 접근 모델은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나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혐오 발화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여기에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난점이 있을 수 있다. "주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 구조주의적 관점은 "그렇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개인은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은 구조의 꼭두각시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 개인을 그렇게 만든 구조의 잘못이지 그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구조주의적 접근이 무효한 것은 아니다만, 순전히 이렇게 접근해버리면 운동이고 정치고 뭐고 다 힘이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대개 논리적 난국 aporia에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쉽게 융합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 즉 개인의 순전한 잘못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개인이 '선택'한 것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이런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개인의 '선택'이라는 어휘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역사적 선험 historical a priori 으로 경험되는 조건들(누가 선택을 '선택'할 수 있고 누가 왜 불가능한가?)은 물론, 오늘날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수용성과 친화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Free Speech", 혹은 거의 신격화된 "언론과 출판의 자유"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자유'라는 말도 오늘날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중추가 아니던가?)

이러한 구조주의적 접근과 유사한 방식으로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화에 대한 이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버틀러는 유통되고 있는 혐오 발화들은, 각 개인들이 만들어 냈다기 보다는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는 인종주의적 표현의 코퍼스corpus에서 인용cite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즉 혐오 발화를 한 주체는 그러한 코퍼스의 인용의 효과이자 결과일 따름이며, 따라서 혐오 발화자는 그 말의 주체이자 저자author가 될 수 없다. 이러한 독해에서는 어떤 발화자를 '저자'로 가정하는 것은 단지 효과이자 결과에 불가능 한 것을 '실체화' 하는 일종의 위장이자 가정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렇게 끝내버리면 나의 사랑 버틀러가 '바보짓'한 것이 된다. 조금 뒤에 덧붙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혐오 발화와 동시에 구조주의적 난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중 하나는 가라타니 고진식의 칸트 윤리적 접근 방식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책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그에게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도덕성을 오직 '자유'(이 말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하겠지만)의 관점에서만 도덕을 찾았으며, 이 '자유'야 말로 유일한 의무 즉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이다. "자유를 의지(意志)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칸트 윤리적 의무이므로 따라서 이러한 자유를 누리지 않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않은 것이 된다. 여기서는 자유주의-구조주의적인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읽어낼 수 있다. (칸트가 아니라 고진의 칸트인듯?) 그러나 이러한 가라타니 고진식의 도덕-윤리적 접근 방식은 어딘가 김이 샌다. 다 줄이고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윤리를 고민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칸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혐오 발화를 했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위와 사고에 대해서 끊임없이 '개개인들이' 성찰하면 문제는 끝나는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의 혐오 발화에 대한 분석에 기반한 방법들을 개발해 내려고 한다. 물론 버틀러의 분석에 따르면 혐오 발화자들은 혐오 발화들의 '코퍼스corpus'에서 그 말들을 인용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은 "인용할 수 있는citable 발화이면서 동시에 인용을 초과하는 흥분하기 쉬운ex-citable 발화"이기 때문에 "모든 발화들은 화자의 통제를 벗어나"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버틀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적극적인 시도를 모색한다. 버틀러는 법적 접근을 매우 싫어하고 회의懷疑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모욕을 입힌 주체의 행위를 추적하고 사회적 모욕을 협상하는 장소로서의 특권을 법정에 부여하는 것은, 주체를 발화의 출발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론이 정확히 어떻게 모욕을 생산하는가에 대한 분석을 중단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버틀러의 질문에 요약되어 있다.
 
또한 버틀러는 윤리-도덕적인 접근 자체를 차라리 선호하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도 일종의 도덕적인 '검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회의를 보낸다. 검열은 단지 '권력'에 호소한다는 문제점을 야기할 뿐 아니라 복잡한 언어와 법, 그리고 담론의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버틀러는 오히려 어떤 '해체론적'인 입장에 기반해서 그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으로는 혐오 발화들에 대한 담론적인, 일종의 전복적인 '재인용', '재의미작용'으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혐오 발화들에는 일련의 취약성과 수정가능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만약 텍스트가 화행speech act적인 것이고 실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행할 수 있으며, 그 이전 행위에 반하게 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발화'는 외상적인 중핵(라캉적인 objet a)을 갖고 있으며(그러니까 excitable speech), 이 외상적 중핵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일종의 '반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여기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 다른 접근으로는 호사가들에 의해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 학파'로 분류되는 레나타 살레클의 것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6장). 살레클은 라캉주의적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혐오 발화와 인권의 문제를 함께 사고한다. 살레클은 버틀러와 일단 비슷한 분석틀을 갖고 있다. 살레클에게 혐오 발화들은 "통제될 수 있는 동시에 통제될 수 없"으며,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도 없다". 그러나 혐오 발화들은 일종의 외상적인 중핵을 건드리는 발화들이며, 그 외상적 중핵은 라캉적인 '실재'를 건드리는 것이다. '실재'를 건드리고 자극하는 것은 각 주체들의 고통과 공포를 자극하기에 일종의 '폭력'이 된다(성폭력sexual harassment에 관해 지젝을 포함한 몇몇 라캉주의자들의 독해도 이와 유사하다). 살레클은 일단 이 혐오 발화를 해결하기 위해 헤겔의 용어를 차용해서 윤리적인 접근을 검토한다.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륜성Sittlichkeit("습속들의 체계, 윤리적 삶의 체계")은 "공동체를 한 데 묶어주는" 것이자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칙이 된다. 이는 법률과의 관계에서도 "우연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독립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법률에 대한 대중들의 복종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레클이 보기에 이는 어떤 도덕적인 습속, 즉 헤겔적인 인륜성적 접근 방식으로는 '보편적인' 해결이 어렵다. 물론 법적 접근 또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법령', '인륜성' 모두 국가와 공동체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르게 체험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영역은 모두 투쟁의 영역이다. "누가 보편자를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그리고 또한 누가 모욕적인 말을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끊임없는 투쟁"인 것이다. 여기서 "인권"의 중요성(물론 통속적인 인권 독해와는 조금 다른) 이 대두된다. 살레클이 보기에 "전체주의적 체제조차도 폭력을 적법화하려는 의도에서일지언정 인권과 자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떤 인권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장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그리고 바라건대 민주적인 의미를 획득할 유일한 길"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즉 혐오 발화를 정신분석학적 윤리, 그리고 최근 대두되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인 독해에 기반해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뉴 레프트 리뷰>에 기고된 <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에서 보여준 지젝의 '인권'에 대한 독해와도 유사하다. 지젝은 랑시에르의 독해를 끌고 오면서, "인권을 정치투쟁의 우연적 영역과 별개의 비역사적인 '본질주의적' 피안으로, 역사로부터 면제된 보편적인 '천부적 인간권리'로 설정해서는 안되지만, 인권을 시민의 정치화라는 구체적인 역사과정에서 생겨난 사물화된 물신으로 간단히 도외시해서도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인권'은 전 정치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본래적인 정치화의 적실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언급하며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 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만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정치성의 정치학"과 협상 논리에 기반한 '행정-통치'로 정치를 환원하는 최근의 경향에 반대하는 지젝의 입장에 기반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언급할 기회가...)


물론 여기서 언급한 방식들은 나름의 적합성을 가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확신이 없다. 그래도 나에게 있어 혐오 발화는 끊임없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 문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있고. 어흑. 어려워..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 관여(double engagement)  (0) 2007/10/14
Agalma를 제거하기  (0) 2007/10/02
혐오 발화(hate speech)  (2) 2007/10/01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글쓰기  (0) 2007/09/26
Natural Woman  (0) 2007/08/29
Posted by 비앙

칸트에서 헤겔로 또는 초자아를 넘어 사랑으로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① 지젝이 해석하는 라깡  

민승기(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


시차(parallax)라는 간극

 
동일성과 차이의 ‘낯선’ 동거. 동일성으로서의 차이, 차이로서의 동일성. 동일성과 차이가 겹치는 곳. 동일성도 차이도 아닌 동일성-차이라는 괴물이 숨쉬는 공간에서 지젝은 철학사를 회집한다. 대립구조가 배제하고자했던 ‘낯선’ 괴물은 이미 구조 내부에 있는 ‘친밀한’ 이웃이었다. 낯설고도 친밀한 괴물-이웃.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이라고 답하는 오이디푸스는 이미 자신이 스핑크스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넷과 셋과 둘이 하나 속에 있는 혼합괴물. 차이는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다. 인간과 괴물을 구별하는 외재적 차이가 아닌 인간내부의 균열. 오이디푸스의 시선 이전에 이미 오이디푸스 속에서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스핑크스의 응시(gaze)가 있다. 봄과 보여짐이 ‘함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함께 있기 때문에 시선과 응시의 간극은 결코 메꾸어질 수 없다. 대립이나 모순으로 해소될 수 없는 내부적 분열. 바로 이것이 시차라는 간극이다.

차이의 철학은 시차라는 간극을 통해 동일성의 철학 한 가운데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다. 칸트의 부정판단과 무한판단의 간극은 정신분석이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죽었어’(I am dead)의 서술어를 부정하면 ‘나는 죽지 않았어’(I am not dead)라는 부정판단이 되지만 서술될 수 없음을 긍정하게 되면 무한판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죽은것도 산 것도 아니야’(I am  undead) ‘나는 죽었어’라고 말하는 살아있는 나. 긍정과 부정이 시차적 간극으로 존재하는(동시에 발생하는) 공간에서 칸트는 뱀파이어가 된다. 그는 유령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판단은 결국 대립구조가 사유할 수 없는 ‘사이공간’, 대립항들의 내부적 균열을 초래하는 불가능한 공간을 불러낸다. 라깡은 이 재현불가능한 공간을 실재(Real)라 부른다.

칸트의 이율배반은 라깡의 실재를 이미 선취함으로써 정신분석의 공간을 개시한다. 대칭이나 모순과는 달리 이율배반은 모두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인과론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와 ‘자유는 인과론을 넘어선다’의 이율배반은 둘 모두를 긍정함으로써 해소된다. 자유를 예외적인 공간으로 배제할 때 인과론적인 우주는 전체를 형성할 수 있다. 예외성을 통한 전체 또는 보편성의 확립. 라깡의 남성적 우주. 반면 칸트는 ‘세계는 유한하다’와 ‘세계는 무한하다’ 모두를 부정함으로써 유한/무한이라는 대립구조로 사유될 수 없는 기원적 사이공간을 불러낸다. ‘세계는 (전체로)존재할 수 있는가?’ 전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예외적 공간이 거세될 때 또는 예외적 초월성이 전체 속으로 들어와 내부적 균열을 일으킬때 세계는 비전체(Not-All)가 된다. 라깡의 여성적 우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예외를 통해 보편을 획득하는 남성의 우주와는 달리 여성의 우주는 보편/특수의 ‘사이공간’인 특이성들(singularities)의 집합이다. 실체화할 수 없는 빈공간인 코기토(cogito) 주체를 발견한 후 서둘러 그것을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로 바꾸는 데카르트처럼 칸트 역시 비전체를 지시하는 여성적 우주 앞에서 머뭇거린다.

지젝이 보기에 헤겔은 칸트를 전복하거나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반복(또는 완성)할 뿐이다. 그러나 헤겔의 칸트에 대한 충실성은 칸트의 결핍, 즉 칸트체계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으로 지시되는(이점에서 지젝은 데리다 역시 칸트의 한계내에 있다고 말한다) ‘대립물의 일치’를 끌어낸다.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와 ‘이미 발생하고 있다’의 차이가 지젝에게 칸트와 헤겔, 데리다와 라깡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시차적 간극이 갖는 타자성을 절대화시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으로 물신화할 때 칸트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미 와있는 메시아에게 언제 올 것인가라고 묻는 질문처럼 불가능성은 절대적 타자성으로 승화된다. 타자의 절대성이 타자의 결핍을 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칸트의 예지계 역시 무한판단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상계와 예지계의 ‘사이 공간’ 다시말해 초월적 대상을 현상계의 내부적 간극으로 읽어낼 때 칸트는 헤겔과 ‘함께’ 있다. 불가능한 초월성에서 초월성의 불가능성으로, 타자의 절대성에서 타자의 결핍으로, 칸트에서 헤겔로 이동할 때 정신분석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초자아에서 사랑으로

법은 비전체이다. 그것은 이미 기원적 폭력이라는 실재를 억압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상징적 방어물이다. 데리다가 미국독립선언문에 대한 분석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법의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그래서 법 이전에 존재해야하는 ‘우리, 미국의 인민’은 단지 법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결과물일 뿐이다. 죄의식의 기원을 설명하려던 프로이트가 아들들이 이미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기원적 아버지 살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원) 팬터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살해는 규정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법의 기원, 실재로서의 폭력을 상징적 행위로 환원시키는 방어일 뿐이다.

법의 내재적 분열을 초자아 논의에 한정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초자아는 상징적 금기를 넘어서는 향유, 외재적인 법을 보충하는 비합리적이고 가혹한 명령이다. 그것은 법의 전체성을 망가뜨리는 얼룩이지만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법이기도 하다. 라깡이 칸트와 사드를 ‘함께’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식인풍습이 없어요. 어제 남아있는 마지막 놈을 처치했거든요’라고 말하는 식인종처럼 칸트의 합리적인 법을 작동시키는, 그것을 강제적 명령으로 바꾸는 외설적 행위주체는 사드적인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그러나 위반이 초래하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옭아매는 법이다. 죄를 짓지 않을수록 죄의식이 증가하듯이 다양성의 담론을 통해 초자아는 오히려 자신의 단일성을 강화한다. 법의 결핍을 보여주어야 할 향유가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형태로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초자아적인 자본이 다양한 지식의 형태로 세계를 전체화하고 있는 지금 다양성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불가능한 윤리적 행위가 요구된다. 다양한 위반은 여전히 법과 위반의 초자아적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숨기고 있는 법의 불가능성, 불가능한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지젝은 바틀비적인 제스처를 위한다. 법과 위반의 악순환으로부터의 물러남.

아감벤은 명령의 형태로 설명될 수 없는 은총, 외부도 내부도 아닌 사이 공간에서 생겨나는 주권, 법의 중지와 법제정의 동시성을 주장함으로써 초자아적인 향유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사이공간, 유대인도 비유대인도 아닌(non-non-Jew)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다시 사랑을 초자아로 설명함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다. 냉소적 거리를 통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처럼 위반적 거리에 기초한 초자아를 중지시키기위해 필요한 것은 법과의 문자적 동일시이다. 윤리적 행위는 위반의 예외적 장소를 제거함으로써 초자아의 매개없이 사랑의 법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말처럼 사랑은 예외적 지식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결핍, 지식을 비전체로 만드는 시차적 간극이다. 전체를 알지 못해 사랑하지만 전체의 지식 역시 결핍되어 있다.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만나는 곳에서 사랑이 발생한다. 유대교가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숨기고자 하는 신의 결핍을 드러낼 때 기독교는 ‘사랑’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모든 상징적 의미나 광채가 사라진 육체, 배설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예수와의 불가능한 동일시, 결핍된 신과의 만남이 사랑인 것이다.

민승기 / 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 | 출처 / 학술저널 담비(www.dambee.net)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적인 것의 귀환"  (2) 2007/12/07
한나 아렌트와 세계 사랑  (0) 2007/11/30
(펌) 칸트에서 헤겔로 또는 초자아를 넘어 사랑으로  (0) 2007/09/22
(펌) 거울 속의 괴물들  (0) 2007/09/17
어느 편지글  (0) 2007/09/12
Posted by 비앙

오랜만에 지젝의 글을 읽으니 또 머리가 아파 온다(좋은 의미에서). <반 인권론>으로 번역된,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34호에 수록된 "Against Human Rights"라는 제목의 길지 않은 글이다. 예전에 읽었던 랑시에르의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와 한나 아렌트의 저서(<폭력의 세기On Violence>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는 듯 하다(물론 그의 목소리로 완전히 녹여내고 있지만). 지젝은 이 글에서 자신의 사유를 멋지게 이끌어 가다가, 마지막에는 글의 제목과는 상반되게도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 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 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마는 것이다"라면서 결국 '보편적 인권'에 대한 옹호로 끝을 맺고 있다. 그 사유의 과정이 참 재미있고 신선한 것들이 많은데, 오늘은 그 중에 한 장을 타이핑(-_-;)해서 옮겨 둔다. 어쩜 비슷하거나 같은 생각을 해도(사실 "내가 한 선택은 '진짜' 선택이 아니야!" 하는 주장은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다만) 이렇게 다른 표현/설명들이 가능한지-_-


선택의 비자유

이제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해보자. 다른 글에서 나는 아미시 공동체(* 미국에 이주해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의 청소년들 앞에 주어지는 사이비 선택을 거론한 바 있는데, 이들은 지극히 엄격하게 양육되다가 열일곱살이 되면 현대 자본주의문화의 모든 과잉들ㅡ질주하는 차, 분방한 성, 마약, 술 등의 소용돌이ㅡ를 겪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한두 해 지난 후 아미시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닌지 선택할 수 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젊은이들은 이런 자유방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대개의 경우 참을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절대다수가 자기 공동체의 격리된 생활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선택의 자유'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난점들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니, 아미시 아동들에게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선택으로 바뀐다.

사이비 선택의 문제를 보면,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자유주의적 태도의 한계도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이 개인적 선택의 결과 베일을 걸치는 순간 베일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니, 베일은 더이상 무슬림 공동체 소속이라는 표지가 아니라 특이한 개성의 표현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택이란 언제나 메타선택, 즉 선택이라는 양식 자체를 택하는 선택이며, 베일을 쓰지 않기로 선택하는 여성만이 실제로 선택을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세속사회에서 종교적 소속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예속적 위치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신앙은 개인적 선택으로 '관용'되지만, 그들이 자신들에게 신앙이 갖는 의미ㅡ실질적인 소속의 문제ㅡ를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순간 '근본주의'라는 비난이 가해진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 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사회 내부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갖는 물적 힘은 클린턴정부가 추진한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건강관리 개혁프로그램의 운명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악명 높은 군수산업 로비 세력의 두배 규모인) 의료계 로비세력은 국민개보험이 되면 의료 영역에서 선택의 자유가 어떻게든 위협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확신 앞에서는 아무리 '엄연한 사실'을 열거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다름아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추로, 곧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 주체'라는 개념에 입각한 '선택의 자유'인 것이다. 오늘날 '위험사회'의 시대에는 특히 그러해서, 지배이데올로기는 복지국가의 와해로 초래된 불안을 오히려 새로운 자유의 기회로 팔아먹으려고 애쓴다. 노동의 유연성이 해마다 직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평생직장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요, 스스로를 갱신하고 자기 개성의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라고 보면 되지 않는가? 표준 의료보험 및 은퇴 연금제도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추가보험을 들어야 한다면, 또 하나의 늘어난 선택의 기회로, 즉 지금 더 나은 생활을 할지 아니면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할지 택할 기회로 여기면 되지 않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곤경에 불안을 느낀다면 '2차 근대(second modernity)'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갈망하며, 안정된 낡은 형식에 매달리는 미성숙한 성향을 보인다고 진단할 것이다. 나아가 이런 곤경이 주체란 타고난 자연적인 능력들을 지닌 '심리학적'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될 때, 자동적으로 당신은 이 모든 변화가 당신 인물됨의 소산이지 시장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린 결과는 아니라고 해석하기 쉽다.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0) 2007/07/28
작은 해마  (0) 2007/07/22
선택의 비자유  (2) 2007/07/21
<우울증에 반대한다> -1-  (2) 2007/07/17
가상의 경험  (4) 2007/07/12
Posted by 비앙

가상의 경험

독서노트 2007/07/12 16:04
2003 다산 철학 강좌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 원고 中
김상환 역


만일 실재의 열망이 실재의 극적인(spectacular) 효과인 그 순수한 가상(semblance) 안에서 끝나고 어떤 정확한 전도지점에서 끝난다면, “마지막 인간들”(* 뭐지?)이 지닌 “포스트모던한” 가상의 열망은 실재의 열망으로 향하는 어떤 난폭한 복귀 안에서 끝나고 극적인 실재에 해당하는 그 순수한 가상 안에서 끝난다. 여기서 “면도칼 자해자들”(이들은 면도칼이나 다른 도구로 스스로 자해하고픈 강력한 충동을 경험한다)의 출현이 우리들의 환경이 나날이 가상화(virtualization) 되고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생각해보자. 이 현상은 실재의 신체로 되돌아가는 어떤 절망적인 전략을 대변한다. 그런 한에서 그 자해는 몸에 문신을 새기는 관행과 대조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문신은 주체가 (잠재적인) 상징적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보증한다. 하지만 면도칼 자해는 정반대의 문제, 즉 현실에 대한 주장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면도칼 자해는 자살행위도 아니고 자기 소멸의 욕망을 나태내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현실에 (다시) 뿌리를 박으려는 어떤 과격한 시도이다. 또는 (똑같은 현상의 또 다른 측면이지만) 자기 자신이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때 느끼는 견디기 어려운 불안에 맞서서 우리의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굳건히 정초하려는 어떤 과격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면도칼 자해가 어떤 병리적인 현상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특정한 종류의 정상성을 되찾고 정신병에 이르는 완전한 심리적 파멸을 모면해 보려는 어떤 병리적인 시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시장에서 해로운 속성이 제거된 온갖 상품들을 볼 수 있다. 가령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라든지, 지방을 뺀 크림이라든지, 알콜 없는 맥주 등등이 그것이다. 이런 목록은 또 계속 이어진다. 가령 가상 섹스는 어떤가? 이것은 섹스 없는 섹스에 해당한다. 아무런 사상자 없이(물론 아군 편만의 이야기지만)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콜린 파월(Colin Powell) 독트린, 이것은 교전(交戰) 없는 교전에 해당한다. 정치를 전문가에 의한 행정으로 보는 현대 정치학의 재정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재정의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에 해당한다. 이런 목록은 마침내 오늘날 자유와 관용을 내세우는 다(多)-문화주의에까지 이른다. 이 다-문화주의는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에 해당한다(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원문은 wife beating, 즉 아내 구타이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라니;;)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실체가 제거된 생산물을 낳는 이런 절차를 단순히 일반화하고 있을 뿐이다. 즉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실체가 제거된 현실이고 실재의 핵심적 저항이 죽어버린 현실이다.
카페인 없는 커피는 진짜 커피가 아니면서 진짜 커피와 똑같은 맛과 향기를 내는 것처럼, 가상현실은 현실이 아니면서 현실 같이 경험된다.
그렇지만 이런 가상화의 과정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진짜(=실제의) 현실” 그 자체를 어떤 가상적 사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택의 비자유  (2) 2007/07/21
<우울증에 반대한다> -1-  (2) 2007/07/17
가상의 경험  (4) 2007/07/12
아브젝시옹abjection  (0) 2007/07/10
tokenization  (0) 2007/07/06
Posted by 비앙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2007, pp.40~46

요즘 한 책만 줄곧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정신 없이 이 책 저 책 읽고 있다. 덕분에 머리 속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하다만. 어쨌든 봤던 책도 다시 봐야 기억에 남겠다 싶어 예전에 봤던 책들을 다시 훑어보고 있다. 그 중에 오래전부터 퍼오고 싶었던 부분을 여기에 옮겨 둔다. Special thanks, 용. 글의 강조는 Namunnib이.


(...) 이 이상한 기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널리 알려진 상호 작용(interactivity)이란 개념에 상호 수동(interpassivity)이라는 기이한 짝패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전자 미디어의 출현으로 텍스트나 예술 작품에 대한 수동적인 소비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상식이다. 나는 단순히 스크린을 응시할 수만은 없다. 나는 점차 스크린과 상호 작용하며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가상 공동체의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나 소위 '쌍방향 서사'의 플롯을 결정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것까지) 대화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뉴미디어의 민주주의적 잠재성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초점을 두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이버 공간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타자가 연출한 스펙터클을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 관람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스펙터클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스펙터클의 규칙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 상호 작용의 또다른 측면이 상호 수동성이다. 대상에 상호 작용하는 것의 이면은 (단지 수동적으로 쇼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수동성을 갖는 것, 내게서 수동성을 빼앗는 것, 그래서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쇼를 즐기고 자발적인 향략의 의무에서 해방시켜주는 상황이다. 꼬박꼬박 드라마를 녹화하는 녹화 비디오 애호가들(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이라면, 그렇게 녹화 비디오를 갖게 됨으로써 오히려 옛날의 단순한 TV 시청 때보다 실제적으로는 드라마를 덜 보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TV를 시청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소중한 저녁 시간을 TV 시청에 날려버리는 대신 간편하게 녹화를 해 두고 나중에 보려고 한다(물론 그걸 볼 시간도 없다). 실제로는 필름을 안 보지만 내가 좋아하는 필름이 내 비디오 수집함에 있다는 사실은 내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며 가끔씩 소박한 긴장 완화와 달콤한 무위의 예술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녹화 비디오가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 필름을 보고 있다는 듯이. 여기서 녹화 비디오는 상징적 등록의 매체로서 대타자의 역할을 한다. 오늘날 포르노그래피 역시 점차 이렇게 상호 수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X등급 영화는 더이상 그(혹은 그녀)의 은말한 자위행위를 돕는 수단이 아니다. 단지 '행위가 이뤄지는'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이 내 대신 즐기는 걸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more..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tokenization  (0) 2007/07/06
'난해한' 글쓰기  (8) 2007/07/04
상호 수동성과 가짜 행위  (0) 2007/06/28
파시즘의 징후  (0) 2007/06/25
Chantal Mouffe,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3) 2007/06/11
Posted by 비앙

사용자 삽입 이미지


권명아씨의 <역사적 파시즘ㅡ제국의 판타지와 젠더 정치>의 서문을 읽고 있던 도중에 이런 저런 말이 인상 깊어 옮겨둔다.

한국에서 파시즘은 집단주의의 일환으로만 논의되는 경향이 과도하다. 그러나 파시즘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집단주의적 경향 보다는 경쟁 체제, 증오심, 박탈된 자의 원한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특정한 면모와 더 관련이 있다. (…) 결국 파시즘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저항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것은 이처럼 욕망의 문제와 경쟁의 논리, 제도화의 그물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물론 이러한 '다중'의 자발적 집단화는 파시즘의 중요한 특질이기는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발적 집단화과 사회의 지배적 경향이 되는 내적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p.12)

증오 범죄라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출현한 그 시대는 파시즘의 증오의 정치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또한 이처럼 증오의 수위가 높아지는 현상이 일부 박탈된 집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집단에 편재하게 되는 것은 한 사회의 파시즘화의 뚜렷한 징후라고 나는 생각한다. 파시즘이 모순적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장이라고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역사적 파시즘 체제를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집단주의의 광기가 사회를 지배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고립감과 불행 의식에 산산이 찢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두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고립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막막함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이 집단주의로 채색된 파시즘 사회의 '내면'이다. 따라서 파시즘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집단주의의 광기, 집단화되어 있는 다중으로 드러나지만, 사실 상 그 '집단'들이란 개개의 인간들을 해소할 수 없는 '분열'과 적대감에 유폐시키는 시스템의 산물이다. (…) 이러한 고립감과 집단화는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논리로 이끌 수 있는 내적 동력이다. (p.13)

파시즘의 기본 동력은, 위에 인용한 권명아씨의 글에서 언급했던대로 자본주의적 체제ㅡ박탈된 자의 원한, 경쟁 체제 등ㅡ와 관련이 깊다. 파시즘이 '만들어진 내적 결핍'에서 유래하는 측면이 있다면, 결국 지젝의 인종주의에 대한 논의와 맞닿는 측면이 있다. 지젝에게 인종주의는 언제나 '환상'인데, 그는 이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로, 인종적 '타자'가 '우리'의 향락을 훔치려고 하며 우리의 향락을 항상 욕망한다는 환상이며, 둘째로 인종적 '타자'가 '우리'가 모르는 낯선 향락에 도달했다는 불쾌감이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환상은, '그들'만 없다면 우리 사회는 완전해지고 더 살기 좋아질 것이다, 라는 '우리들'의 내적인 믿음과 연결된다.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파편화되고 피폐해진 개인들이 분열적인 집단을 이루게 되고, 거기에 인종주의적 환상까지 맞물리고 간단한 동력이 가해지면, 결국 파시즘이 도래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본 파시즘도 이러한 인종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젝이 지적했던 대로 인종주의가 언제나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종에 관한 '사실fact'은 지젝이 말한 '환상 프레임'을 통해 구성된다. 인종주의자이자 파시즘에 매몰된 개인들은, 파시스트 정치가에 의해 잘못 인도된 불쌍한 대중들이며 또한 교육 받지 못해 '무식'한 개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교육을 못 받고 일상에 찌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때로 고도로 교육된 사람들일 수 있으며 신념과 이상으로 가득찬 열정적인 활동가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잘 교육하고 인도하면 파시즘과 인종주의는 사라질 것이라는 분석은, 역시나 이상주의적 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인종주의와 파시즘적 징후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론 주변 국가에도 퍼지고 있는 어떤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불행한' 사람들이 증가하고, 스스로를 더 이상 중산층이 아니라 하위 집단에 위치시키는 경향이 늘어났다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예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Made in China' 제품들은 대부분 경멸의 대상이다. 그들은 짝퉁을 만들어 내고, 위생 상태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식품들을 만들어 판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언제 우리를 따라잡을지 모른다는, 앞으로 10년 뒤면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이도저도 아니게 될 것이라는 신문 기사들도 사람들의 눈을 휘어 잡는다. 결국 한국인들은 불행하며,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갖지 못한(한국인이 가져야 할) 향락들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이고 '환상'적인 믿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이 일상에 만연한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경향은 결국 파시즘적 징후와 연결될 공산이 크다고 보는 것은 과장일까?

물론 이러한 징후가 과거 독일/이탈리아 등에서 볼 수 있던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파시즘으로 반드시 연결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것이 '일상적 파시즘'이 되고 '경향적 파시즘'이 되는 경우다. 사실 오늘날 일상적인 인종주의의 방식은, "저들은 우리보다 열등하고 역겨운 것들이야"라는 거친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들의 권리를 인정해. 하지만 저들이 밥먹는 꼴을 보면 짜증이나. 저들이 말하는 방식은 왜 저렇게 시끄럽기 짝이 없는지.."라는 식의 조금더 세련된, '성가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세련되고 쿨한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종주의자이며 파시스트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노골적이고 비합법적이며 국가적인 파시즘은 집단적 반발을 낳고 견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 권력 속의 파시즘은, 지적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거의 견제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해한' 글쓰기  (8) 2007/07/04
상호 수동성과 가짜 행위  (0) 2007/06/28
파시즘의 징후  (0) 2007/06/25
Chantal Mouffe,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3) 2007/06/11
인간의 4대 굴욕  (4) 2007/06/08
Posted by 비앙

우울증은 치료를 해야 하는 질병이며, 더 나아가 치료 '가능'한 대상인가? 아마도 미국을 위시한 의학계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굳이 정신 의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울증은 항우울제의 처방으로 간단히 '치료'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인다. 물론 그 항우울제의 부작용도 심각하다지마는, 나는 인간의 정신 활동이 이렇게 약빨로 좌지우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더 없이 위험해 보인다. 더 나아가 최근 보고되는 뇌에 관한 연구들은 인간의 정신 질환은 모두 뇌 작용의 산물로써, 뇌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많은 정신 질환은 치료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하는 듯 하다.

<How to Read Lacan>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세기 전 근대 유럽의 역사 속에 무의식의 발견을 끼워 넣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라고 부른 세 가지 연속적인 인간 모욕의 관념을 발전시켰다. 첫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서 우주의 중심 위치를 박탈했다. 둘째,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맹목적인 진화를 통해 인간의 기원을 설명함을써 인간에게서 특권적인 생명의 지위를 박탈했다. 셋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인간의 심리 활동에서 무의식이 차지하는 지배적인 역할을 가시화하면서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집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보다 급진적인 인간 모욕이 출현하고 있다. 최근의 과학적 성과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이미지에 하나의 모욕을 더 추가한다.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 과정인 연산 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 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p. 7)


최근의 뇌 연구는 이렇게 인간에 대한 굴욕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급진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나는 그런 성질을 넘어서 갑자기 이러한 흐름이 매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진중권씨가 최근 '사이보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이 아저씨가 갑자기 뒤늦게 공상과학영화나 소설에 빠져버렸나, 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나는 인간이라는 유기체에 기계를 덧대어 '진화'시키든, 기계에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덧대어 생산해내든, 그 결과는 3류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것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앞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디지털화 하려는 이 욕망이야 말로, 역시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최대의 굴욕을 선사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프로젝트가 완결되었을 때 인문학, 정신분석학, 교육학 뭐 이런게 무슨 소용이리. 쩝.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호 수동성과 가짜 행위  (0) 2007/06/28
파시즘의 징후  (0) 2007/06/25
Chantal Mouffe,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3) 2007/06/11
인간의 4대 굴욕  (4) 2007/06/08
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0) 2007/06/02
Posted by 비앙

이 블로그의 이름은 <Peter Pan Syndrome>이다. 아마도 이 말을 들었을 때 쉬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어른 아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유예하면서 계속 아이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기의 어렸을 적의 추억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나이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책임 회피 등등의 표현이 피터팬 신드롬에 중첩된다.

피터팬 신드롬이라는 말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보면(백과사전 링크), 어떤 임상 병리학자에 의해 일종의 ‘정신병’으로 정의 내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그 ‘병’으로 정의내린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군상들을 ‘병’이라고 명명하는, 그 정신 병리학이라는 의학 담론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고픈 마음이 있다(물론 이미 연구되어 있다). 결국 피터팬 신드롬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좋은 의미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내가 굳이 이 블로그의 이름을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한 일종의 변명이자 이유를 밝히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피터팬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한다.

피터팬이 사는 곳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네버랜드Neverland>이다. 여기서 네버랜드라는 말이 단순히 피터팬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후크선장이 사는 동화속의 특정한 가상의 공간을 지칭한다고 보면 이야기는 너무나 허무해 진다. 여기서는 다만 네버랜드가 그 단어의 구성에서부터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도록 하자. 예컨대 존재하지 않는never 곳land, 혹은 (‘어른’들의 상징계에는) 존재하고 싶지 않은never 곳land, 혹은 (언제나)아니라고 말하는never 곳land, 혹은 (모든 것을)부정하는never 곳 등등. 나는 여기서 특정한 한 의미만을 네버랜드를 규정하는 데 쓰고 싶지 않다. 네버랜드에는 오히려 이 모든 의미가 다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네버랜드는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화 해보면, ‘어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특수한 공간이다. 네버랜드는 다만 어른들의 상징계에 아직 포섭되지 않은 아이들만이 ‘인식’할 수 있는 특이한 상징계이다. 어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아이들에게는 실재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실재하는 네버랜드는, 어른들의 상징 질서와는 다른(현실세계) 상징질서를 온전히 갖고 있다. 그 자체로는 열등하다, 혹은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다른’ 공간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런 가치 판단을 하고 있었다면 당신은 이미 '어른들'의 상징 질서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그이다. 우물에 독타기.)

여기서 이 말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ㅡ그러나 그의 논의를 단순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ㅡ지젝Zizek의 논의를 참고해 보자. 흔히 상징계와 실재계의 관계를 논의함에 있어, 라캉을 접한 사람들은 실재계를 상징계에 선행하며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오해하고는 한다. 그러나 오히려 지젝에게 실재계는 상징계가 구성되고 남은, 일종의 ‘잉여’(적절치 않은 듯 하지만)다. 상징계가 하나의 세계를 완전하게 구성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항상 상징 질서에 포획되지 않은 어떤 잉여들은 반드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상징계의 완전한 질서를 ‘위협’하는 적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실재계는 영원히 변화한다! (더 발전되고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자)

어른들의 상징계는 결코 네버랜드를 설명할 수 없다. 거기다 네버랜드는 어른들의 상징 질서를 적극적으로 거부never한다. 게다가 아이들이 어른들의 지배를 벗어나서 날아가서 자신들의 어드벤쳐를 창조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현실 세계를 거부never하며, 그 자체로 체제 질서의 유지에 ‘적대적’이다. (설명할 수 없고, 심지어는 인식할 수조차 없는never 공간은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이는 이미 계몽 서사와 근대적 기획들의 온갖 ‘만행’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이미 상징계와 그 속의 대타자에게 포획된 어른들은 자신들의 상징계 밖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다. 그들은 다만 네버랜드를 말하는 대상들에게 ‘어리다’, 혹은 ‘미쳤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얄팍하고 허무하며 나약한 상징체계를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블로그의 이름 <Peter Pan Syndrome>은 이러한 이유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지배적인(소위 ‘어른들’, 그리고 ‘철든다’는 것 등) 상징체계에 아무렇지도 않게 포획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때로는 소극적인 저항의 노력이며, 그렇게 마구 포획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징 질서를 단순히 부정never하는 것이 아니라 네버랜드라는 공간의 실재하는 세계처럼, 생성의 힘을 믿고 싶다는 또 다른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상징 질서를 긍정하는 피터팬과 같은 적극적인 행위성을 담지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를 긍정한다면, 네버랜드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즉자적인 공간이 되며, 그 속의 대표적인 행위자 피터팬은 사르트르식의 주체성(subjectivité)을 갖고 있는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은 ‘주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의 중심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체성은 존재들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며, 따라서 엄청난 고뇌를 제공하는 어떤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주체성을 자유, 초월의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동화 <피터팬>에서도 피터팬 그 자신은 제인의 부정에 의해 힘을 잃는 팅커벨과는 달리, 그리고 조금은 ‘어른스러운’ 제인과는 달리 자유롭고 초월적인, 주체성을 유지하는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결코 흔히 오해하기 쉬운 ‘아이 같은’ 책임감의 결여 등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피터팬은 그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피터팬을 어리석고 아이같은 혹은 책임감이 없는 것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상징 질서에 포획되어 그 안에서 마리오네트 놀음을 하고 있는 '어른'들이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보이게끔 할 정도로.

그런데 여태까지 내가 긍정해온 피터팬 신드롬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주체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하나의 ‘욕망’에 불과하다(따라서 그 주체성이란 것은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영원한 '행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시해두자). 또한 네버랜드의 실재성은 어른들의 상징체계가 엄연히 실재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부정never하고 있기에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내가 부정하고 싶은 온갖 기의들이 가득한 ‘어른들’의 상징 질서의 ‘중력’의 영향권 안에 존재해 있는 나조차도, 그런 네버랜드의 실재성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never 곳land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들어낸 그러한 네버랜드의 ‘의미’를 추구한다. 실로 모순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여기서 내가 규정하는 네버랜드의 의미가 더욱 구체화 된다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이러한 행위들ㅡ상징질서를 거부하고 이에 저항하는(특히 ‘여성적’인)ㅡ이 취하는 형식들을 ‘히스테리’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것은 대타자에게 의문을 갖는 태도이다. 지젝이 말한 “Che Vuoi?”라는 질문은 영어로 번역하자면 “What do the great Other want me to do?”이다. 이 질문은 어른들(내가 정치적으로, 심정적으로 긍정할 수 없는 것들)의 상징 질서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요구를 통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런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나와 상징 질서와의 분리와 거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도 그 상징질서 자체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다는 허망한 믿음은 가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징후적일 따름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징 질서의 실패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질문하는 주체의 주체성의 순간을 지시하는 것이다. 네버랜드는 탈주적인 ‘공간으로서의 은유’를 보증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다른 의미들도 중요하게 포함하지만, 우선 그것은 상징 질서에 포획되는 것을 거부never하는 공간land의 의미를 띄게 된다. 그렇기에 피터팬 신드롬은 피터팬 히스테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구체적인 기표만 다를 뿐, 어떤 영역에서는 같은 기의를 갖는 것이다. 네버랜드 속의 피터팬은 훌륭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피터팬은 편안치 못하다. 그는 이곳에서는 결국 히스테리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