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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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2010/09/13 20:48
여기까지만 하고, 잠시 단행본 1권 발제가 끝날 때 까지 잠시 휴업 ㅠㅠ

Rey Chow, Ethics after Idealism―Theory-Culture-Ethnicity-Reading, Indiana Univ Press, 1998, pp.XIII~XVI

Introduction

대학원생이었던 이래로, 나는 비판이론에 열린 태도를 지닌 학과와 과정에 속해있었다. 이러한 사실의 이점이 있다면,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이론에 대한 저항”을 하면서 보는 눈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론”의 폭넓은 역사적 함의를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론”이라고 말할 때, 나는 지금도 대학원생들이 배우고 있는 플라톤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던 철학 그리고 해석학, 문예비평 및 해석의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나는 1960년대 이래로 영미권 학계를 급진적으로 만들어온 해석 방식을 대표하는, 일반적으로 “후기구조주의”나 “해체”라고 불리는 용어를 의미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러한 용어들에 특정한 뉘앙스나 정확한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지난 몇 십 년간의 지적작업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던 방식으로 축약해서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에서 이해되는 “이론”의 명백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지시성(referentiality)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화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1916)>에서 언어학적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를 상대화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의 전통을 따르면서 고정된 기원을 유보하고 불안정하게 만들어왔던 이러한 일반적인 추세는, 부분적으로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추세는 “실재”(언어, 텍스트, 이야기, 저자, 자아, 정체성, 커뮤니티 등 무엇으로 실재를 정의하든 상관없이)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내파했던 작업을 관통하며, 이 작업은 최근에도 여러 방식의 보편주의적 비평(젠더, 인종, 계급, 성적 선호 등등에 대한 탐구를 거쳐)으로부터 많은 반향을 얻었다. 지시성을 의미작용과 의미 사이의 투명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혹은 조금 더 잘 정의하자면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끈질기게 [투명한] 반영성(reflectionism)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지시성 문제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문제시되거나 중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는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증적인 것(the positivistic)의 뼈아픈 고역으로 채워진 이론적 거부반응으로서, 지시성은 대신 “문화연구”라 불리는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최근 들어 지식인 간의 논쟁에서 팽배한 “문화”라는 개념의 두 가지 유형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념은 인류학에서 유래했는데, 일반적으로 “생활세계” 혹은 “삶의 방식”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문명화된” 삶의 세련된 성취의 총합으로서 더 엄밀하게 정의되는데, 이는 주로 문예이론, 예술이론, 클래식 음악 등 이른바 “고급문화”를 구성하는 것과 흔히 연결된다. “문화” 개념의 첫 번째 정의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이 관점은 문화를 공통의 신념, 태도,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며, 또 모든 집단의 인류에게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 정의는, 자주 지적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적이고 배타적이며, 그 자체로 특정한 계급이해관계의 헤게모니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각각 다른 종류의 문화정치학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를 옮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이들이 “문화”를 소유한다고 간주하여 잠재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개념은, 모든 문화가 엄격하게 “특수성”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문화적 관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거꾸로 문화가 “고급문화”라는 개념은 엘리트주의적일 수는 있지만,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세련된 성취”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하여 “문화”는 역설적으로 지역적이라기보다는 비교 문화적 현상으로서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개념은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문화연구의 추진력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추진력은 “문화”를 미완성의 과정이자 끝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사회관계의 별자리―절대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라고 보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몇몇 비평가들은 문화연구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이기에 진지한 지적 관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는 연구대상에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문화 자체의 미완성적인 특성과 정확하게 관련된다. 끝없이 열린 역사를 “지금”이라는 말보다 더 잘 상징하는 시간의 순간이 있는가? 또 끝없이 열린 평가에 대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넘겨진 것들보다 더 잘 드러내는 대상이 있는가? 문화의 미완성이라는 특성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이거나 존재론적인 의미작용의 “모호성”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성은 국제 노동 분업에 내재한 엄청난 불평등의 지속적인 효과 때문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재현과 정치적 권력에 대한 접근의 문제, 또 문화자본의 소유와 교환 그리고 강화의 문제에도 내재해 있다. 탈식민주의 시대와 탈냉전 시대는, 부분적으로 후기구조주의의 유산에서 유래했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탐구를 사회주의적 가치의 외관에 천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취해야 하는 정치적 행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도 소실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해왔다.

그렇다면 문화연구는 문화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이해하면서, 기호의 해체와 함께 출발한 문화상대주의의 단순한 연속이고 확장에 지나지 않을까? 문화연구와 비판이론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고급문화” 대 “생활세계”라는 문화의 공식화를 따른다면, 최근 몇 십 년간 학계의 실천은 두 개의 학풍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문학(인문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언어의 주체로 간주하는)”과 “인류학(사회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문화적 환경의 대상이자 생산물로 간주하는)”으로 부르자. 또 최근에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 사이에 유사한 분화가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러한 최근의 분화는 내가 뒤에 자세히 설명할 측면에서 볼 때, 문화에 대한 연구의 잠재적인 인종주의화를 의미한다.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자. “비판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를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연구가 “이론적 엄격함”을 결여했다는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강력한 이유는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문화”를 물화(reify)한다는 것이다. 즉 문화연구는 문화를 유기적인 총체로 간주하면서, 오랜 전통의 연속주의적(continuist) 사유에 속해있는 역사주의와 경험주의, 실증주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다른 두 “가치체계(regimes of value)”, 즉 이론적으로 늘 깨어있음을 상징하는 한 쪽 체계와 문화적 물화(reification)를 상징하는 다른 한 쪽 체계의 통약불가능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만약 이론을 뺀 문화에 대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면, 문화를 뺀 이론에 대한 표현은 가능할까? 나는 “문화”가 무엇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은 언제나 문화연구에 대한 “이론적” 거부라는 측면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 작업이 “너무 이론적”이라고 비판받아온 이론가들이 영리하게 반박했던 것을 빌자면, “이론”에 대해서 가장 잔인한 비평가라 할지라도 이미 언제나 특정한 이론적 위치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말하는 비평가들 역시도 특정한 문화적 위치에서, 또 특정한 문화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문화는 “비판연구”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특정한 형식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이는 영미권이나 불어, 독어권의 정전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나는 그러한 특정 형식이 무엇인지 곧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오로지 비판이론에만 헌신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흔히 문화적 추상화의 정반대로 간주된다.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상스러운 것과 단순한 것들의 쓰레기장이자, 투명하고 이해가능하며 접근도 쉽게 가능한 현상들의 하수처리장이다. 게다가 문화연구의 대상이 자주 유색인종에 연관된다는 사실 때문에, 문화연구는 “우리”라기보다는 “그들”과 동일시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비판이론”이 사용될 때에도 연구주제가 비서구와 관련되거나 이론이 비서구의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면, 연구는 자동적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문화연구”의 자리로 “추락”하게 된다.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위계적 분화의 조건 위에 있기 때문에, “지시성”을 문제화했음에도 지시성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지시성”이 “문화”에 대한 연구로 추방당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의미적 투명성을 가졌으며 따라서 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현상이 내가 언급한 방식처럼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비판이론”으로 가는 노동력과 “문화이론”으로 가는 노동력을 구별하는 계급차이(class distinction)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은 사회계층의 전통적인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 프로우(John Frow)가 지식의 소유와 사용의 관점에서 기술했던 용법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우에 따르자면 지식인들은 곧 “지식 계급”이다. 지식의 습득을 통해, 특정한 사회화 과정이 시작된다. 예컨대 특정한 스타일로 쓰는 것이나 특정한 텍스트의 세부사항에 주목하는 것, 특정한 유형의 매력적인 문학적 비유를 찾는 것은 어떤 습관을 수양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또한 이는 전문적 공동체의 특정한 영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격증을 발급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식”계급에 대한 프로우의 개념에 더해 지식계급 자체에 계급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차이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의 관계에서 논쟁을 유발해왔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비판연구자들만큼이나 주의 깊게 읽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학계의 낮은 계급지층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이다. “문화자본”은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비판이론”에 유창한 상위계급의 감각과 실천, 습관의 문제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노동 종류의 분화 또 백인 문화와 비백인 문화 사이의 분화를 중첩시킬 때, “지식계급”에 내재한 계급차이의 공식화는 급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요컨대 비판이론과 문화계급의 분화는 지식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인종주의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종주의화는 귀족정치라는 결과와 “지식”의 생산과 배포의 관점에서 종속적인 계급을 낳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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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9/03/15 18:19

1. 과히 나쁘지 않다. 끄덕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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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잠깐 동안 했던 임고 준비를 또 접어두고(ㅋㅋ;;) 그냥 쉬자는 마음으로, 이것 저것 가능성들을 재점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좀 더 나한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초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삶의 불확실성, 그로 인한 불안, 불안 끝의 절망과 우울증, 긴 우울을 헤치고 나온 뒤의 허탈한 해방감과 평온함,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제대로 껴안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 어차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임고 준비로 '도피'한다고 하여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또 뭐든 이상적인 것(the ideal)의 잣대로 사물을 대하지 않으면 성미가 풀리지 않는 내가, 설령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교사가 된다고 해도 5년 이상 버틸리 만무하니까. 무엇보다 교육학은 물론이고 영어교육론 등등도 내 식성에 안 맞으니까. 아아.. 임고 준비하며 들여다 보는 책들의 내용 중 흥미가 가는 분야가 있다면 화용론(pragmatics)이나 담화 분석(discourse analysis) 정도가 될텐데(좀 더 '순수'하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다면 통사론syntax 정도?) 임고에 쓰이는 교과서들은 잘해야 개론 수준을 못 벗어 나기 때문에... 하긴 그래도 양이 많으니 어렵다.

어쨌든. 당분간 타이틀은 임고 준비생으로 걸어 두고 다니려고 한다. 난 공식적으로는 임용고사 준비생이다. 흔하디 흔한 고시생. 왜냐면, 대학원에 진학 한다고 또 말하면 예전처럼 굳이 막지는 않으실테지만 엄마 아빠가 과외를 하라는 압력을 또 넣을 게 분명하니까 말야. :p 요새는 민법 책을 보고 있다는 한 친구님이랑 잠깐 얘기했던건데, 과외하기 싫어서 고시생하는 것 같다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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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소설은 꼭 소장해 두어야 한다. 김형경씨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처음 만난 건 21세였는데, 그 때는 사실 '인구에 회자' 되던 소설이니까 읽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막연히, 아, 굉장히 정신 분석학적이군...이란 인상만 받았을 뿐. 소설 등을 읽으면 책 귀퉁이를 접어 두고 후에 그 부분만 다시 펴보는 습관이 있는 내가, 전혀 접어 놓지를 않았었다. 그 담에 만났을 때는 23세. 그 땐 내가 곧 세진이고 인혜였다. 그러니까, 인물과 적절히 거리를 두지 않고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그냥 몰입했달까.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최근에(25..ㅠㅠ) 다시 만났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하고 다시 읽었는데... 헉, 했다. 빌려와서 다시 읽다가, 책 귀퉁이를 꼭 접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라딘 마일리지로 주문(호호^.^)했다. 그 때 안 보였던 문구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젠 본격적으로 나를 분석할 수 있었다. 소설을 분석하면서, 특히 소설 속에 나오는 임상 상담하는 장면들을 보다 면밀히 읽으면서, 그리고 예전에 접했던 얇디 얇은 정신분석학 지식을 조금씩 동원해 가면서 말이다.

이제는 당분간 정신분석학도 다시 들여다 볼 요량이다. '정치적'인 독서 방식 말고(어떤 책이었던가에서 읽었는데. 정신분석학ㅡ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갖는 희한한 특징 중에 하나가, 자신이 해방적이고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학문을 한다고 믿는다고. 헐, 냉소적이구만~ 했다가 이내 끄덕끄덕) 철저히 자아를 탐색하는 도구로서 말이다. 이런 자아야 말로 근대의 산물이요 '개인의 발견' 이후에나 등장할 수 있는 신화적 대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무의식과 조금이라도 더 화해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대로 "사기 치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래서 요새 일상은 그리 나쁘진 않지만 엉망 진창이다. 기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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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푸코의 짧은 글을 읽었다.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어김없이 너무나 푸코스러운 글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의 글을 제대로 독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보편적 지식인>이나 <구체적(특수한) 지식인>이라는 일반적인 이분법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지적했듯, 최근 수 년간 학계에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똑똑한 척 할 수 있는 말' 베스트 10위안에 들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탈맥락적이지 않나요?", "유럽 중심적이군요." 혹은 "당신은 도대체 어떤 xx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가요?" 류의 말일 것이다. 그 말의 적확성과 정치적 유효성 내지는 효과에 대해 무한히 긍정하는 것을 떠나서, 확실히 요즘에는 구체적 지식인, 특수하게 위치 지어진 지식 등을 언급하는 것에 더 점수를 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친 자본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느냐하는 점도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도 좀 답답하고.

어쨌거나 푸코는 그러한 이분법을 치워두고, 너무나 푸코 본인 스럽게도 "진리"와 "권력"을 문제 삼는다. 푸코에게 지식인이 보편적이냐 구체적이냐는 별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의 특수성을 거론하는 것은 그에게는 현상 기술적인 말일 뿐이다. 그냥 원래 지식인은 어쩔 수 없이, 태생부터 특수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다. 진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다르다. 허나 진리라는 것은 권력 밖에 있지도 않으며 권력이 박탈된 순수한 상태도 아니다. 진리의 지위, 그리고 진리가 행하는 정치적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 분석하고, 진리의 권력(혹은, 진리는 권력 그 자체이므로, 진리를)을 진리를 작동케 하는 헤게모니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특수한ㅡ단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부구조적이지는 않고 덧붙여 유물론적이며 이에 기반해 진리를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하는ㅡ체계(regime) 속에서,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이다.

이 말에 여러 가지 의미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게, 보편이냐 특수냐하는 구분이 그 자체로 명백히 정치적인 구분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씨가 했던 말대로, "인간 해방"(보편)을 말하는 백인 남성 지식인&담론과, '잘해야' "여성 해방", "게이 해방" 등을 말하는 여러 지식인&담론이, 애초부터 게임이 되겠느냐 말이다. 특히 한국에서 말이다! 그것들은 애당초 잘못된 구도였고, 애당초 피했어야 할 시스템이었고, 따라서 애당초 공격했어야 했을 이분법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문제틀(problematic)이었던 것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다른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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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래, 임고 책이 아니라 이런 글, 소설을 읽고 블로그에나마 끄적거릴 수 있을 때, 나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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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 맞다 가장 중요한 것. 동생이 강하게 주장해서 강아지를 입양해 왔다. 아빠가 모처럼 듣는 자식의 부탁인지라 이곳 저곳에 강아지 입양 공고를 낸 터라 총 3'마리'(마리라는 말이 과히 됴티 아니하다)가 입양되어 왔는데... 원래 같이 살고 있던 '해피'(이제는 완전 할머니다~)에 새로 입양한 아이를 더하면 4'마리'나 되는터라... 2'마리'는 다른 곳에 입양시킬 것 같다. 남매라는데 하나는 흰 털에 까망 점이 찍혔거나 까망 털에 하얀 점이 찍혔거나 한 강아지고 다른 하나는 약간 누런 털을 가진,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한 강아지 남매다.

결국 남는 아이는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이라나; 뭐라더나; 난 순혈인지 혼혈인지는 관심 없는데, 동생 님이 순혈을 극구 주장하여 돈을 좀 많이 들여 데리고 왔다. 40일 밖에 안되서 그런지 먹고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그리고 좀 많이 귀엽다 ㅠㅠ

아, 더 중요한 것. 이름이 무려 "지용"이다 ㅋㅋ 내가 지었음. 나중에 공연도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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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8/07/28 16:47

그저께 이대에서 있었던 로지 브라이ㄷ티의 강연회에 갔었다. 해외 석학 초청 강연을 명목으로 진행하는 일련의 강연 중에 하나였다. "긍정 윤ㄹ학과 생ㅁ 정치Affirmative Ethics and Bio-politics"라는 제목의 강연. 사실 뭐 강연 내용이라고 해봐야 별 것 없었다. 사실 고작 1시간 30분 동안 하는 강연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잘 해봐야 지극히 당연한 강연으로 끝나거나, 그럴싸하고 화려한 말들의 향연이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걸 확인하거나, 뭐 그런 거지. 번역된 브라ㅇ도티의 책(<유목ㅈ 주체>)은 조금 읽다가 내 성정에 안 맞아서 던져 버렸지만, 그래도 어쨌든 유명한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강연자니까 강연을 듣다 보면 공감이라도 할만한게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책을 읽었을 때와 같이 공감도 거의 가질 않았다. 사실 지향하는 바나 생각하는 건 통하는 데가 있는데, 표현상의 문제랄까 태도상의 문제랄까? 요약하자면, 내가 앞으로 읽을 일은 없는 사람.

무엇보다 짜증스러웠던 건, 브라이ㄷ티의 강연 태도였다. 소위 해외 석학(distinguished professors)들이ㅡ특히 미국이나 유럽 출신의ㅡ한국 땅에 강연을 오면 많은 경우 느껴왔던 거지만, 이들은 정말 명성과는 달리(사실은 명성에 걸맞게) 불성실하거나 거만하거나 소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거나 뭐 그렇다(내가 경험한 최악의 강연자들은 울리ㅎ 벡과 요한 갈ㅌ). 한국이라는 '지식 불모지'에 자신이 '지식 선진지'에서 연구하고 주워 들은 결과물을 몇 방울 뿌려주시고 우리는 그 단물 몇 방울을 빨아마시려고 모여 들고... 겨우 맛봤더니 그냥 흔해 빠진 수돗물이고. 그런 점에서는 브ㄹ이도티도 마찬가지였다. 나한테는 약간의 충격이었달까. 안 이런 유명한 외국인 강연자는 정말이지 드문 것 같다.

그런데 내 경험상으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학자들은 대개 영어에 매우 능통했다. 언어가 주는 권력 탓일까(니들도 한 번 언어때문에 헤매어 봤음 좋겠다고! 왜 니들은 항상 자신감에 넘칠 수밖에 없는거지!)?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다른 몇개의 심포지움을 기웃기웃 했을 때 그곳에서 발표를 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연구자들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서는 뭔가 진정성 같은 게 느껴졌고 심포지엄에 온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노력 같은게 잘 보여서 듣는 도중에도 (비록 질문 같은 건 안해도)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왔다. 꼭 언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저런 학자들의 강연을 들으면 정말 답답하고 내가 죽어버린 느낌이다. 강연에서 좀 겸손해달라, 우리를 '배려'해달라, '언어'의 문제에 보다 민감해달라, 뭐 이런게 아니다. 지식 전달 잘 해주고 가면 나쁠게 뭐가 있나. 하지만 뭔가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다는 느낌이다. 만나면 안되는 사람들이 만나고 있는 느낌이다. 혹은, 아직 만날 때가 아닌 사람들이 만나고 있는 느낌이다.

어휴. 내 언어가 부족해서 느낌을 기술하기 어렵다. 아 암튼. 그냥 내가 가진 자격지심이면, 차라리 좋겠다. 우울해 흑...

어쨌거나 나는 또 내일 있을 비토리오 ㅎ슬레의 "Philosophy and Its Languages: A Philosopher's Reflections on the Rise of English as Universal Academic Language"라는 강연을 들으러 갈 예정이다. 제목은 되게 거창하고 끌리는데 결과는 어떨지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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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12/18 23:17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고 있다. 3분의 2 정도를 봤는데, 사실 원문도 어려워서 번역도 어려웠다는 얘기를 보기는 했지만 본문도 지나치게 잘 안 읽힌다. 그래도 꾸역꾸역 읽었더니 머리 속에 남는 것은 별로 없는데 그래도 중간 중간 '뜨끔뜨끔'한게 있다. 그 중 베스트는 "정신의 원 스톱 쇼핑몰"이라는 말. 그 다음은 모뉴멘털리즘이라는 말이다. '정신'이 무슨 단어의 번역어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소위 '대륙 철학'에 관심이 가는 나로서는 참조해 둘만한 대목이다. 이 부분은 제 2장, '지식인과 철학자의 대화' 편에서 옮겨 두는 것이다.


훌륭한 철학자들은 공공의 지적 영역에서 상당한 여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글이 높이 평가 받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 보다는 그들의 글에서 풍기는 특이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87)

대륙 철학자들은 프랑스나 독일 태생의 어떤 '대가 급 사상가'의 보호막에 들어가 그의 말을 새로운 맥락에서 반복하면서 대가의 사상을 재활용하기를 좋아합니다. 대가 급 사상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하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말 전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몇몇 신조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제들을 감추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철학자들이 매력적인 까닭은 정신의 '원 스톱 쇼핑몰'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일단 당신이 미셸 푸코나 위르겐 하버마스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면 그 다음에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88)

푸코나 하버마스에 대해서는 아무 유감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아류들과 흉내쟁이들, 정신의 게으른 식객들이 문제입니다. [...] 이런 사태가 온 것은 추종자들이 스승의 언어만 모방하고 행동은 본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그들의(스승들-namunnib) 글은 강의 노트의 요약본이었습니다. 실제 강의를 할 때는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예시해주고 청중에게 깨우침을 주는 다양한 일화나 사례, 농담 등을 덧붙이면서 강의 노트보다 훨씬 풍부하고 생생한 내용을 전달했을 것입니다. [...] 당연하게도 그들은 인간의 위트를 매우 진지하게 취급한 철학자들이었습니다.(89-91)

"정신의 원 스톱 쇼핑몰"이라는 말을 들으면, (지젝의)라캉이나 지젝으로 레포트를 적지 않게 써왔던 나는 사실 일단 뜨끔해진다 -_-; 지젝의 끊임없이 늘어지는 장광설(그게 또 강력한 매력이지만)과 반복되는 예시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의 많은 저서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그의 분석들. 뭐만 나오면 턱턱턱 떨어지는 그의 분석은 사실 "원 스톱 쇼핑몰"이란 말이 적절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글들을 읽다 보면 '지젝스러움'이 분명히 있고, 그 지젝스러움은 적잖게 '원 스톱 쇼핑몰'에 맞아 떨어진다. 헤겔과 라캉이라는 원 스톱 쇼핑몰. 이 점은 <지식인>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기는 한데, (94-97) 이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좀 막나간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것들은 대개 중요한 분석이지만, 참을성 별로 없고 늘 새로운 걸 추구하고 싶어하는 (때로는 불성실하고 불만에 가득찬)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많고 어려운 경로를 거쳐왔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이론적 근거가 훨씬 탄탄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 스톱 쇼핑몰"로 취급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만큼 그도 현대에는 '대가 급'일 수 있다는 것 역시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쇼핑몰은 아무나 세우나...?) 사실 문제는 지젝이나 라캉이 아니라, 툭하면 "지젝대고 라캉대는" 사람들이겠지만.. (나 또 뜨끔- 그치만 요즘 이렇게 지젝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독자들은 적지 않은 것 같은데, 그에 비하면 확실히 생산량이 적다. 지젝의 벼룩시장화, 혹은 1000원 쇼핑몰화가 이루어진 듯한 느낌. 그러니까 결국 지젝은 '고상한' 철학자로 취급되지 않는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토대에는 아카데믹 편견이 적지 않게 개입되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또 이 가상 대담의 중간 중간에 버틀러가 등장하는데, 나의 팬심은 이 글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게 만든다. -_- 흥. 근데 확실히 '대가 급 사상가'들의 위트는, 그런 것 같다. 헤겔도 살아 생전에는 엄청난 위트를 자랑했다고 하지.. 버틀러도 대담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청중을 참 잘 웃긴다. 글과 사람은 역시 다를 수 있어. 정희진씨도 마찬가지고..

상당히 불편한 것들이 많은 책이기는 한데, 일단 끝까지 읽어 보아야 겠지. 가장 큰 불편함은 이것이다. 이 책에 사용된 표현을 조금 패러디 하면, "스티브 풀러의 주장에서 포장을 벗겨내면 다음과 같은 알맹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식인은 학자들이 못하는 곳 어디에든 맘대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임은 알아서 질테니 우릴 그냥 내버려 두세요." 불편하다는 것은 동의하지 못한다는게 아니라 약간 어딘가 께름찍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 서평(경향신문)에 따르면 그가 "지식인이 풀어야 할 가장 힘든 과제는 계급과 성, 인종의 구분을 초월해 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라고 언급한다는데, 어디에 나오는지 아직 모르겠다; 대충 읽고 넘어간 부분에 있을지도 모르겠고 뒤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가장 힘든 과제 운운하는게 참 골 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저게 진짜 저자의 말이라면, 저자한테 "계급 성 인종의 구분을 초월해 융합시키는 것"은 대체 어디의 어떤 작자가 하고 있는 미친 짓거리인지 묻고 싶기도 하고.. 어쨌든 '세대 간의 장벽'이 무척 힘든 과제일 수 있다는 것, 나도 절감하고 있다. 에휴 나이주의ageism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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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10/31 00:02

1.

나는 "학생들의 의견을 배제했다"는 말이 쫌 많이 불편하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학생 사회"(물론 이 말에는 원하는대로 얼마든지 ""를 쳐 넣을 수 있을 것이다)는 학교 본부 측과 대립할 일이 생기게 되었을 때 이 말을 앵무새 마냥 반복하게 되었다. 다향만당 사건 때는 물론이고,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말과 짝패를 이루는 말들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 "학내 구성원의 의사소통 과정의 절차를 무시했다"는 말 등등일 것이다. 도대체 의견을 배제한 것이 무엇이고, 의견을 수렴한 것이 무엇이고, 의사소통 과정의 절차란 무엇이길래, 왜 '우리'는 이 말들을 반복하게 되었을까?


2.

사실 이것보다 더욱 불행한 사실은, 이 말들이 실제로 어떤 설득력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실제로 함의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든, 이 말이 어떠한 전제 위에 서 있든 간에, 이 말을 하는 것 자체로 어떤 권위나 자격 같은 것을 부여 받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본부는 이 말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고, "학생 사회"는 이 말이 가진 압력에 기대어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어쩌면 "학생 사회"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말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이 말들은 '학생들'이라는 집단 행위 주체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오늘날 누구도 이 '학생들'이란 집단이 단지 인간 '떼'로서가 아니라, 행위성agency를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섣부르게 생각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그렇게 가정하고 주장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종의 '선언문'에 가까운 말이기도 하다. 사실 주체는 일종의 '선언'을 통해서 희끄무레하게 등장한다. 나는 오늘날 '학생들'이라는 주체를 '선언'한다는 것은 사실상 혁명적인 일이라고 본다. '차이'라는 말이 거의 물신화되어서 숭배받고 있는 이 담론 구조 안에서는 이런 '보편 주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지 않겠는가? (물론 차이를 말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나는 차이를 이론화 하는 작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차이' 이론은 어딘가 빈곤하다는 느낌..)


3.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있다. 설령 이 집단이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학생들'의 "의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 또한 성립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은 과연 "의견"을 갖고 있는가? 스피박의 말을 잠깐 비틀어 표현한다면, (과연) '학생들'은 말할 수 있는가? 나는 "학생들의 의견"이라는 말이 가능하지도 않다고도 보고, 그러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하고 불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는 오늘날 거의 물신화되어 버린 '차이'라는 개념에 대한 숭배 때문만은 아니다. 즉 '학생 집단' 내에 무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말이 가능하지 않다, 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라"는 식의 이러한 말들은 자유주의적인 주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의견'을 갖고 '협상'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를 가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적인 '학생 주체'는 이 말이 절대적으로 가능하다고, 혹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누구나 나름 대로의 '생각'이 다 있으며, 그것을 '의견'으로 능력 껏 표출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다만 실제로 '학생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 집단들은 그 말을 하지 않을 뿐이거나 그것에 냉소적인 혐오를 보일 뿐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어느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늘날 뿐 아니라 최근 수 십 년간 이런 '말하기'를 당연한 권리(심지어는 모종의 의무)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은데, 이건 오랜 투쟁이나 훈련을 거친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일종의 보석같은 능력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주체 개념에서는, 말하지 않는/못 하는 개인들을 보면 거의 외상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누구나 천부적으로 누려야 하는 것이 이 '자유'일진대, 이 '자유'라는 권리를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면 한탄하고 개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ㅡ나를 포함한ㅡ'학생 운동'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흐름을 읽는다. 왜 '학생들'은 '정치'에 무관심할까? 라는 질문부터 시작하는 그 일련의 회의 섞인 질문들)


4.

물론 여기와는 상황적 맥락이 다르지만, 프리모 레비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에 대해 다소 불편한 마음을 표시한 적이 있다. 왜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곳에서는 집단적인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레비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자유를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대상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의 실제로 어떤 정치적인 행동(수용소에서는 '반란')은, 신체 상태나 정신 상태가 다른 포로들보다 훨씬 나은 포로들에 의해 계획되고 지휘되었다고 언급한다. 즉 고통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며, 특정한 정치적 '자원'을 가진 이들이 정치적 액션을 조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룸펜프롤레타리아'나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는 게 레비의 지적이다.

나는 레비의 이런 말에는 일정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말은 냉정하게 평가해 볼 가치가 있다. 도대체 누가 '말' 할 수 있는가? 그 '말'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자원'의 토대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오늘날 학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일종의 '특권층'이라고 본다. 담론적/이론적 자원, 그리고 그 말을 꺼내고 유통할 수 있는 '채널'이라는 자원ㅡ예컨대 자보라는 매체부터 해서 학생 언론까지도 포함하는ㅡ을 갖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논술 학원'을 '운동권'이 독점해 버렸다는 사실과도 깊게 연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리'를 개발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오랜 훈련과 경험으로 단련된 특권인 것이다.


5.

그래서 나는 이러한 '특권층'들이 '학생들'이라는 알 수 없는 모호한 집단에 호소하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이들은 자기 자신들을 '학생들'로 환원함으로써, 이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정치적 '특권'을 정확히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좌파들이(실은 우파들도) 흔히 하는 말인, "민중"이란 말 역시도 이와 마찬가지다. 좌파들이건 우파들이건, 과거로부터 '민중'은 서로가 전유해야 할 집단이었다(물론 좌파가 훨씬 '똑똑'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서로 편의에 맞추어 그 '민중'을 호명하고 담론 투쟁에 이용했다. 때로는 민주화 열사의 가족을, 때로는 죽은 전경의 가족을.

나는 학교 내에서 '학생들'이란 말이 좌파(우파)들이 흔히 말하는 '민중'이란 말과도 매우 유사하다고 본다. 이들은 '학생들'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가정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이면에서는 '학생들'은 말할 수 없다는 것으로 간주하는(그러나 이 점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역설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물신화 되고 '숭고한 대상'이 되어 버린 '민중' 혹은 '학생들'이라는 상상적 '집단'에 호소하는 행위가 얼마나 윤리적인지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을 감춤으로써 오히려 그 '특권'을 강화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른다.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당신은 절대로 그냥 단순히 '학생들'일 수 없다. (학교 밖 좌파라면, 스스로가 '민중'이고 '노동자' 그 자체 일 수는 없다. 제발 뻥 치지 마라..)


6.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궁극적으로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간에 모종의 '합의consensus'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쉽게 뒤 따라 나올 수 있는 말이, 학생 위원들을 '의사 결정 기구'에 참가 시켜 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들 성립하기 위한 전제는, 각 집단 간에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공론장'이 존재하며, 그와 동시에 모든 이해 관계를 가진 주체들이 같은 '발화 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가능한가?)

나는 이러한 요구가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인 권리를 구상하는 것은ㅡ역시 오래되고 해묵은 지적이지만ㅡ'정치'를 '행정'에 팔아먹는 행위인 것이다. 즉, 지젝의 말로 표현하자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 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마는 것이다. 이 말들은 각 주체 간에 무엇인가로 환원할 수 없는 '긴장'이나 '적대'를 감춘다. 그와 동시에 형식적인 '대의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된다. 그러나 언제나 '대의 민주주의' 자체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을 활용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필드를, 오늘날 숭고한 대상으로 숭배받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합법적으로 보장받고 싶어하는 욕망일 것이다. 타자성이 제거된 민주주의..


7.

이에 덧붙여 하고 싶은 말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혐오하는 말인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것이다. 바디우는 오늘날 "철학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 4가지의 큰 장애물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 상품의 지배, ⓑ 커뮤니케이션의 지배, ⓒ 기술적인 전문화 ⓓ 안보security에 관한 현실적 계산의 필요성이다. 사실 상 오늘날 우리들이 이 네 가지 조건(장애물)에 안착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상품을 소비하면서 쾌락을 느끼고, 커뮤니케이션의 순-능력을 믿으며 문제를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기술적인 전문화로 건강과 안전 그리고 온갖 편의를 도모하고, 안보를 사고해서 안전한 사회를 유지하는 등등. 어쨌건 이러한 조건들 중 커뮤니케이션은 위에서 언급한 흐름과도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 커뮤니케이션은 합의, 공론, 대중이라는 말들을 물신화 함으로써, 정치적인 문제를 탈정치화 하는데 성공한 개념이다. 바디우는, 커뮤니케이션이 각 주체들에게 세계를 분절화된 이미지로 경험하도록 하고, 주체들을 결착력이 없는 발화 속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 : http://www.lacan.com/badesire.html)


8.

필요한 것은, '학생들'이라는 집단에 호소할 것도 아니고, '의견을 수렴하라'는 말을 중요한 주장의 하나로 삼을 것도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 '행위성', '정치적 주체' 이런 말들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와 분석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순히 회전revolve한다는 의미에서ㅡ그리고 그 회전의 축을 바꾼다는 의미에서의ㅡ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좌표축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식인'으로 통칭될 수 있는 발화 권력을 가진 자들의 토대에 대한 끊임없는 분석은 물론이고, 그와 동시에 '반지성주의'로 흘러 가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반지성주의 역시도 충분히 '지식인'들에 의해 '발화'된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덧) 역시 결론은 지극히 당연하고 뻔한 말로... -,ㅡ

덧2) 위에 언급한 말들은, 현실적인 권력 차이를 무시한 말이기에 위험하다고 하겠다. 좌파와 우파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의 권력 관계. 좌파들은 '민중'을 호명함으로써 그 권력의 비대칭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좌파가 이렇게 '민중'에 호소하는 것이 결코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학생 단체'들이 '학생들'을 호명하는 것도. 좀 다른 정치를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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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4/04 20:16

요즘 들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상상하지 않았던 영역의 것이었겠지만ㅡ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ㅡ기왕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 ‘글쓰기’인 이상 상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삶을 택한 뒤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혹은 빛이 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일단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아니, 그보다 우선, 나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의 글이 어떤 사람에게든 읽힐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블로그도 열었고,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조금씩이나마 글들을 남기고 있고, 글 쓰는 집단에 계속해서 남아 있지 않던가.

내가 공부를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그래서 석사도 박사도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게다가 대학원 진로를 지금 전공과는 다른 전공ㅡ사회학ㅡ을 하고자 한 것도, 어쩌면 진짜 누구말대로 순수한 ‘학문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단지 ‘좋은 글’을 생산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년(?)이 흐른 뒤에 내가 강사가 되거나 연구원이 되거나, 혹은 일이 ‘잘’ 풀려서 교수가 되거나ㅡ아마도 이런 직종의 일이 나의 모든 일상적인 소비를 책임질 것들이 되겠지만ㅡ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아마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적어도 ‘지식인’ 혹은 ‘엘리트’라고 칭해질 법 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에 대한 응분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위 ‘사회참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학문적 탐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역시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갖게 될 어떤 ‘상징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들이 갖게 될 나름의 어떤 열매를 나누기 위한 거의 최소한의 노력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탕이 된 연후에야 각자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최근에 관찰할 수 있는 어떤 ‘니힐리즘’의 경향이다. 이 강대한 니힐리즘은 모든 것들에 ‘상대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이해관계를 ‘개인화’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탁월한 것들과 성취하는 것들에 대해서 ‘엘리트주의’라고 혐오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가치도 모두 동등하다, 어느 것 하나 나쁜 것 없이 모두 동전의 양면이 있다고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있는 그 니힐리즘 속에서, 어떤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거나, 특정한 입장을 명백히 취한 글들이 환영받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이 쓰인 책이나 블로그 따위를 독자들이 볼 이유가 없어진다. 다만 그것은 ‘잘난 체 하는 어떤 못난 지식인의 푸념’따위로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거리를 두고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만큼 어떤 자원을 갖고 특수한 환경에 자신을 포지셔닝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고민도 ‘자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통찰력과 반성이란 것도 결국, 자신의 삶에서 한 발자국 나와서 관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특수한 행위의 발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의 보수적인 학계에 몸을 담아야 한다는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그 ‘자원’이 반드시 공부를 오래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여유’를 비교적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그것을 ‘글’의 차원에서 소통하고 나눌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에의 거리두기는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특권’일 수도 있지만, 결코 ‘특권’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니힐리즘도 사실상 직접적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던 특권화 된 ‘지식인’들이 어줍잖게 침묵하지 못하고 주절주절 나서서 떠들어 대왔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무슨 ‘학술지’나 ‘KCI’ 등지에 끊임없이 논문을 올려대고, 좀 더 유명해지면 무슨 ‘학회’의 장을 맡고 교수가 되고, 더 유명해지면 무슨 시민단체의 대표를 맡고 하는 그런 전형적인 ‘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무리 ‘젊은’ 시절에 뛰어난 사람들도, 그렇게 무언가를 하나둘 맡기 시작하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조한혜정씨(신문의 악의적 보도라고 믿고 싶지만)도 그렇고, 홍세화씨도 그렇고, 손석춘씨도 그렇고 아무튼 나름대로 존경해왔던 모든 지식인들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결국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것도, 한편으로 고등 교육을 계속 받아 ‘지식인’층으로 취급될 나에게 계속해서 self-reflect를 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글이 나르시시즘적 무한 자기도취를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 그 자체를 직관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요즘의 대중 문화적 니힐리즘의 경향에 대항해서, 특정한 삶의 양식과 담론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기 위한 방법도 결국 ‘글’이라는 수단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은, ‘글’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해야만 한다. 읽기와 쓰기는 결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영감이나 에피퍼니를 받아서 순식간에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글’로써 표현하는 어떤 천재가 아닌 이상,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읽는 행위는 나에게 어떤 지적 쾌락 뿐 아니라 영감을 주고, 쓰기는 그것을 확인하고 더 강화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쓴 글을 또 읽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순환의 과정이며, 또한 그 순환을 통해서 더욱 좋은 글을 생산할 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글의 가장 좋은 독자는 결국 내가 되고, 내가 읽을 글이 가장 좋은 필자도 또한 결국 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글을 계속 접하고, 나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것 역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이 순환의 메커니즘은 어쩌면 계속해서 활기차게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덧) 오랜만에 희망적인 글을 써본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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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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