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y Chow, Ethics after Idealism―Theory-Culture-Ethnicity-Reading, Indiana Univ Press, 1998, pp.XIII~XVI
Introduction
대학원생이었던 이래로, 나는 비판이론에 열린 태도를 지닌 학과와 과정에 속해있었다. 이러한 사실의 이점이 있다면,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이론에 대한 저항”을 하면서 보는 눈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론”의 폭넓은 역사적 함의를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론”이라고 말할 때, 나는 지금도 대학원생들이 배우고 있는 플라톤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던 철학 그리고 해석학, 문예비평 및 해석의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나는 1960년대 이래로 영미권 학계를 급진적으로 만들어온 해석 방식을 대표하는, 일반적으로 “후기구조주의”나 “해체”라고 불리는 용어를 의미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러한 용어들에 특정한 뉘앙스나 정확한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지난 몇 십 년간의 지적작업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던 방식으로 축약해서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에서 이해되는 “이론”의 명백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지시성(referentiality)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화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1916)>에서 언어학적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를 상대화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의 전통을 따르면서 고정된 기원을 유보하고 불안정하게 만들어왔던 이러한 일반적인 추세는, 부분적으로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추세는 “실재”(언어, 텍스트, 이야기, 저자, 자아, 정체성, 커뮤니티 등 무엇으로 실재를 정의하든 상관없이)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내파했던 작업을 관통하며, 이 작업은 최근에도 여러 방식의 보편주의적 비평(젠더, 인종, 계급, 성적 선호 등등에 대한 탐구를 거쳐)으로부터 많은 반향을 얻었다. 지시성을 의미작용과 의미 사이의 투명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혹은 조금 더 잘 정의하자면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끈질기게 [투명한] 반영성(reflectionism)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지시성 문제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문제시되거나 중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는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증적인 것(the positivistic)의 뼈아픈 고역으로 채워진 이론적 거부반응으로서, 지시성은 대신 “문화연구”라 불리는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최근 들어 지식인 간의 논쟁에서 팽배한 “문화”라는 개념의 두 가지 유형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념은 인류학에서 유래했는데, 일반적으로 “생활세계” 혹은 “삶의 방식”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문명화된” 삶의 세련된 성취의 총합으로서 더 엄밀하게 정의되는데, 이는 주로 문예이론, 예술이론, 클래식 음악 등 이른바 “고급문화”를 구성하는 것과 흔히 연결된다. “문화” 개념의 첫 번째 정의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이 관점은 문화를 공통의 신념, 태도,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며, 또 모든 집단의 인류에게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 정의는, 자주 지적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적이고 배타적이며, 그 자체로 특정한 계급이해관계의 헤게모니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각각 다른 종류의 문화정치학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를 옮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이들이 “문화”를 소유한다고 간주하여 잠재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개념은, 모든 문화가 엄격하게 “특수성”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문화적 관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거꾸로 문화가 “고급문화”라는 개념은 엘리트주의적일 수는 있지만,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세련된 성취”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하여 “문화”는 역설적으로 지역적이라기보다는 비교 문화적 현상으로서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개념은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문화연구의 추진력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추진력은 “문화”를 미완성의 과정이자 끝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사회관계의 별자리―절대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라고 보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몇몇 비평가들은 문화연구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이기에 진지한 지적 관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는 연구대상에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문화 자체의 미완성적인 특성과 정확하게 관련된다. 끝없이 열린 역사를 “지금”이라는 말보다 더 잘 상징하는 시간의 순간이 있는가? 또 끝없이 열린 평가에 대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넘겨진 것들보다 더 잘 드러내는 대상이 있는가? 문화의 미완성이라는 특성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이거나 존재론적인 의미작용의 “모호성”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성은 국제 노동 분업에 내재한 엄청난 불평등의 지속적인 효과 때문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재현과 정치적 권력에 대한 접근의 문제, 또 문화자본의 소유와 교환 그리고 강화의 문제에도 내재해 있다. 탈식민주의 시대와 탈냉전 시대는, 부분적으로 후기구조주의의 유산에서 유래했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탐구를 사회주의적 가치의 외관에 천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취해야 하는 정치적 행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도 소실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해왔다.
그렇다면 문화연구는 문화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이해하면서, 기호의 해체와 함께 출발한 문화상대주의의 단순한 연속이고 확장에 지나지 않을까? 문화연구와 비판이론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고급문화” 대 “생활세계”라는 문화의 공식화를 따른다면, 최근 몇 십 년간 학계의 실천은 두 개의 학풍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문학(인문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언어의 주체로 간주하는)”과 “인류학(사회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문화적 환경의 대상이자 생산물로 간주하는)”으로 부르자. 또 최근에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 사이에 유사한 분화가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러한 최근의 분화는 내가 뒤에 자세히 설명할 측면에서 볼 때, 문화에 대한 연구의 잠재적인 인종주의화를 의미한다.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자. “비판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를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연구가 “이론적 엄격함”을 결여했다는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강력한 이유는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문화”를 물화(reify)한다는 것이다. 즉 문화연구는 문화를 유기적인 총체로 간주하면서, 오랜 전통의 연속주의적(continuist) 사유에 속해있는 역사주의와 경험주의, 실증주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다른 두 “가치체계(regimes of value)”, 즉 이론적으로 늘 깨어있음을 상징하는 한 쪽 체계와 문화적 물화(reification)를 상징하는 다른 한 쪽 체계의 통약불가능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만약 이론을 뺀 문화에 대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면, 문화를 뺀 이론에 대한 표현은 가능할까? 나는 “문화”가 무엇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은 언제나 문화연구에 대한 “이론적” 거부라는 측면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 작업이 “너무 이론적”이라고 비판받아온 이론가들이 영리하게 반박했던 것을 빌자면, “이론”에 대해서 가장 잔인한 비평가라 할지라도 이미 언제나 특정한 이론적 위치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말하는 비평가들 역시도 특정한 문화적 위치에서, 또 특정한 문화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문화는 “비판연구”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특정한 형식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이는 영미권이나 불어, 독어권의 정전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나는 그러한 특정 형식이 무엇인지 곧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오로지 비판이론에만 헌신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흔히 문화적 추상화의 정반대로 간주된다.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상스러운 것과 단순한 것들의 쓰레기장이자, 투명하고 이해가능하며 접근도 쉽게 가능한 현상들의 하수처리장이다. 게다가 문화연구의 대상이 자주 유색인종에 연관된다는 사실 때문에, 문화연구는 “우리”라기보다는 “그들”과 동일시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비판이론”이 사용될 때에도 연구주제가 비서구와 관련되거나 이론이 비서구의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면, 연구는 자동적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문화연구”의 자리로 “추락”하게 된다.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위계적 분화의 조건 위에 있기 때문에, “지시성”을 문제화했음에도 지시성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지시성”이 “문화”에 대한 연구로 추방당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의미적 투명성을 가졌으며 따라서 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현상이 내가 언급한 방식처럼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비판이론”으로 가는 노동력과 “문화이론”으로 가는 노동력을 구별하는 계급차이(class distinction)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은 사회계층의 전통적인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 프로우(John Frow)가 지식의 소유와 사용의 관점에서 기술했던 용법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우에 따르자면 지식인들은 곧 “지식 계급”이다. 지식의 습득을 통해, 특정한 사회화 과정이 시작된다. 예컨대 특정한 스타일로 쓰는 것이나 특정한 텍스트의 세부사항에 주목하는 것, 특정한 유형의 매력적인 문학적 비유를 찾는 것은 어떤 습관을 수양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또한 이는 전문적 공동체의 특정한 영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격증을 발급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식”계급에 대한 프로우의 개념에 더해 지식계급 자체에 계급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차이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의 관계에서 논쟁을 유발해왔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비판연구자들만큼이나 주의 깊게 읽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학계의 낮은 계급지층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이다. “문화자본”은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비판이론”에 유창한 상위계급의 감각과 실천, 습관의 문제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노동 종류의 분화 또 백인 문화와 비백인 문화 사이의 분화를 중첩시킬 때, “지식계급”에 내재한 계급차이의 공식화는 급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요컨대 비판이론과 문화계급의 분화는 지식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인종주의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종주의화는 귀족정치라는 결과와 “지식”의 생산과 배포의 관점에서 종속적인 계급을 낳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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