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미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기획을 이미 시작하고 또 실현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다는 것조차 배수아의 인물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는 노릇이다. 다만 나의 배수아 독서는 어느 시점 이후의 것이었기
때문에, 2002년에 쓰인 이 텍스트의 명시적인 서문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 뿐일지도. 비록 배수아 소설가의 최근 저작들은 이해가능한 영역을
초월해 있지만(ㅠㅠ) 여전히 그는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아흥
성-Gender(p. 5)
드물게도, 이 글은 분명하게 미리 생각되어진 면이 있었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별을 규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소극적인 면으로
본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녀)는 남자도 또한 여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개입한다면, 성 정체성의 의도적인
거세이다. 성별이 결정되지 않으면 주인공의 사회적 입장, 정서적인 상태,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 작가나 독자가 소설을 접할 때
느끼게 되는 무의식적인 동일시, 그런 점들이 방해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는 자의식이 확고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주인공의 전형에서 멀어질 것이다. 결정적으로 말해서 성별이 없는 인간이란, 지금 현재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그(녀)에게 성별을 규정하지 않은 이유는, 성적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모든
정서의 상태를 부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혹은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 대답은 다음
문장이다. 그 자체로서의 현실과 그 기준이란, 유행이나 다수결 혹은 파티에 초대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금박 글자의 명함처럼, 글을
쓰고 있을 때의 나에게는 가장 무시하고 경멸해야 할 대상이 된다.
보부아르는 '여자(woman)'라는 것은 역사적 관념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문화적 해석 혹은 생물학적 사실성의 의미작용으로서의 젠더는 구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한 구분법에 따르자면 여성이라는 것(to be a female)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실성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분법에서 여자라는 것(to be a woman)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것(to become a woman)이며, 신체를 '여자'라는 역사적 관념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제한된 가능성에 신체를 복종시키고 물질화하는 것이며, 신체적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급진적인 의지의 창조적인 힘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라는 개념보다는, 젠더 수행이 언제나 그리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일종의 감금 상태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젠더는 문화적 생존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 전략으로서의 젠더는 징벌적 성격의 결과를 낳는 수행이다. 젠더는 하나하나의 개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humanize)' 동시대 문화의 한 부분이다. 사실, 젠더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한 이들은 규칙적으로 처벌받는다. 젠더가 표현하거나 외재화하는 '본질'이란 것도 없고 젠더가 갈망하는 객관적인 이상이란 것도 없으며 그리고 젠더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젠더의 다양한 실천은 젠더에 대한 관념을 생산하며 그러한 실천 없이는 젠더는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젠더는 규칙적으로 그 기원을 은폐하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문화적 픽션으로서 분리되고 양극화된 젠더를 수행하고 생산하고 유지하는 암묵적인 집단적 동의는, 그것이 생산하는 신빙성에 의해 애매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젠더의 저자는 젠더의 구성과정이 개인의 신념을 필연성과 자연성으로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다양한 신체적 양식을 통해 물질화된 역사적 가능성은, 단지 감금된 상태에서 체현되고 위장된 징벌적 규제를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_주디스 버틀러, <수행적 행위와 젠더의 구성>의 일부분
사실 글 자체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내가 과문하여 한국어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고 있다. 공유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참 많은데... 내 언어 실력에 한숨만 나오는 요즘.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접하는 과거의 버틀러는 여전히 매혹적. 누군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비록 타 학과에 속해있지만, 어쨌든 나는 인류학 전공을 희망하는 대학원생이( 될 예정이)다. 전공은 anthropology of education 이지만 나는 근본적으로는 인류학 지향이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교육학이나 인류학은 모두 인간의 문화화와 사회화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사회화하는데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사회를 인간화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건 교육학이라기보다는 인류학이라는 생각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난 후자를 택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알려진 어떤 인류학자는, 페미니스트 인류학은 젠더의 구성에 대해 묻는 학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제도들이 어떻게 젠더라는 프리즘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면 타당한 주장이다. 모든 사회 제도와 문화적·언어적 실천들은 모두 젠더라는 프리즘 없이는 제대로 구성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페미니스트 인류학인가? 그냥 젠더 연구지. 그의 관점에 따를 경우에도 젠더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화된다. 그리하여 젠더는 아무런 질문 없이 실체이자 본질이 된다.
반대로 버틀러는 그러한 실체화와 본질화 과정에 대해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했던 얼마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때론 잊고 지내도 결국엔 다시 돌아와 참조하게 되는게 바로 그녀의 글이다. 가끔은 유일하게 신뢰하며 읽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릴지라도 말이다.
덧) 보부아르가 한 유명한 말인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표현의 영역본은 "One is not born, but, rather, becomes a woman"이다. 한글 번역에서 "만들어진다"는 표현은 실존주의자로서의 보부아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을 인용하는 버틀러의 맥락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역본에 따르면 여자가 "된다"는게 맞다. 현상학적 실천, 제한된 가능성 속에서 주체의 극화된(dramatized) 실천으로서, 스스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번역이 어디 없을까?
사적인 젠더 관계에는 좀더 큰 사회에서 맺어진 양성 간의 유력한 합의라는 밑바탕이 있다. 전체적으로 여성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부부는 감정 교환의 기본적인 차원에서 이미 동등해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여성 변호사가 남편만큼 많은 돈을 벌고 존경을 받으며서 일하고 있고 남편도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여성 변호사는 여전히 남편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집안일에 동등하게 참여한다는 사실에 자신이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여성 변호사의 발언권은 남들이 보기에 눈에 띄게 센 것이고, 남편의 발언권은 눈에 띄게 약하다. 시장 상황 속에서 다른 배우자를 만난다면 남편은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좀더 큰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때, 이 여성 변호사는 남편을 잘 만난 것이다.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현실에 화가 나더라도 그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그 여성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Emotional Labor)>, 이매진, p. 116의 각주에서. 강조는 내가
이 각주를 읽고 나니 일전에 여성학 협동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접했던 여러모로 당혹스러웠던 발언들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가 될 것 같다. 당시 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기혼' 여성학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고 어색했었다. 그 태도를 요약하자면, 당신은 어떻게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런 일반적인 질문을 '기혼' 여성학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겼다. 왜냐면 대체로 '기혼' 여성학자들은 그런 질문 앞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을 얼버무리거나,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잘 모를 때 멋모르고 결혼을 했다고 말하거나, 아이 때문에 코가 꿰였다고 말하거나. 결혼 생활은 어떤 모종의 규범에 어긋난 것이므로, 감추고 '변명'해야하는, 어떤 수치였다. 물론 결혼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의 대립, 결혼의 제도성과 폭력성, 배타성 등에 대해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규범이 있다는 것도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걸 개인의 삶에 갖다 대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좀 미워하기도 했다.
사실 그걸 '공격'으로 이해했던 건,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주관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이 진짜로 인신 공격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이 위에 인용한 부분과 관련이 있는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기혼' + 여성학자라는 조합이 그만큼 예외적이고 눈에 띄는 공식이라는 것이며, 이는 비단 여성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전문적이라고 간주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해당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 말이다. 우리 사회의 부박한 성별 구조를 다시금 드러내고 증명하는.. (분절되어 따로 놀던 경험과 지식이 통합되는구나 ㅎㅎ)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구성된 세계를 창조하는, 그러니까, 불평등한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로 입힌 옷을 벗어버리고,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판타지일 것이다. 여전히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판타지. 물론 판타지라고 해서 나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게 아니다. 왜냐면 판타지는 낭만의 언어이자 비판과 가능성의 언어이며, 개인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형식이자, 하나의 유기체가 대중무리가 아닌 다른 개인 유기체를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도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성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어제는 어떤 대학원생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실천>에 대해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입학하는 대학원이다. 실제 시민사회운동을 하면서, 혹은 활동가 정체성을 강하게 지향하는 이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곳이다. 활동가에게도 학위가 요구되는 사회니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학위가 계급이 되는 사회니까. 어쨌든 그 블로그를 2시간이 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왠지 좀 초조해졌다.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보다는, 불평등이란게 무엇인지 그리고 불평등이 가능한 조건부터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오늘해서 유명한 두 남자사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이고, 다른 하나는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이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분명 아름다웠다. 소설가로서 인문사회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소설도 분석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나는 존 쿳시의 책처럼 다소 분석적이고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이 '나쁜'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석적이고 도식적이면 또 어떤가. 여하튼 쿳시의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타자에 연루'되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 타자에게 연루되는지, 그 장면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우연한 계기라고 표현했지만, 한번 타자에게 연루된 후에는 타자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쿳시는 인간성이 차례로 박탈 당하는 과정(어떤 의례와 절차를 거쳐서 인간성은 박탈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성이 박탈되었을 때(그리하여 비로소 '비체'가 되었을 때)에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인간성은 어떻게 회복될 가능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아름답게 다룬다. 그리고 쿳시는 '적'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즉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적-타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가 얼마나 무용하며 위험한 일인지를ㅡ그리하여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상 식민지(약자)가 제국(강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강자)이 식민지(약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ㅡ아주 섬세한 문체로 폭로한다.
쿳시의 소설은 제국주의 (지식인) 남성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제국주의 남성 정체성과 젠더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쿳시는 일견 도덕적이고 범인간애적으로 보이는 제국주의 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상당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타자'에게서 인간(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들,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고 한들 그는 제국주의의 자장에서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보편-제국주의 주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타자-야만인'에게도 보편의 빛을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 보편의 빛은 상황 논리에 따라 얼마든 철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쿳시의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시선에서 '야만인-여성'은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이다. '야만인-여성'은 유독 '(제국의) 언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성적으로 분방하고 자유롭지만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국주의자-남성이라는 두개의 항에 의해 이중으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만인-여성'은 어느 때는 의존하고 복종하는 것 처럼 묘사되지만, (특히 성행위를 할 때에는) 종속되지 않는 이중적인 존재처럼 묘사된다. 쿳시의 남성 주체가 '타자에게 연루'되었고 또한 일견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윤리적으로 연루되는 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를 향할 때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남성 주체가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은, 오로지 성애화된 사랑 혹은 섹스가 걸려 있을 때 뿐인가? 남성 주체의 도덕적인 실천은 성애화된 타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가? (그 많던 '운동권 남자애'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도 종종 이런 징후를 읽는다.) 이에 관해서는 재미소설가 이창래 작가의 <제스처 라이프>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
물론 쿳시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 기꺼이 인식하고 분석한다.
덧) 이 소설을 읽고서 '50대 이상 남자'들의 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대다수 남성들의 정체성에서 남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많은 소설에서 50대 이상의 남자가 자신을 수컷으로 드러낼 때는 어김없이 이 남근 문제가 등장한다. 성적으로 문제를 겪음과 동시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몸의 근육과 피부의 탄력에 대한 인식 등이 어우러진다. 그 탓에 쿳시의 남성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50대 남성 인물들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갖 복잡함으로 뒤섞여 있다. 자기 몸이 더럽다는 인식(<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책을 보라), 자신의 성적 능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erection문제이지만)에 대한 자의식, 과거에 대한 향수 등등. 술자리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성적 소수자는 "4-50대, 대머리, 배 나온 화이트 칼라 남성"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다른 책,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학부 때 교육 쪽을 전공한 나로서는(나는 교육 자체보다는 내 전공을 무지 싫어했으니까), 가끔 교육관련 서적을 펴볼일이 있었다. 한국의 주류 교육학자들에게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ㅡ보통은 "학교 없는 사회"라고 번역하지만 오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리치는 그 스스로가 강조했듯 학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ㅡ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는 대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곤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일리치를 그저 그런 과격한 낭만적 급진주의 사상가로 생각했는데, 이번 대화집을 읽고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오히려 과격한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욕이 될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들 보다는 오히려 '정통파'에서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제도는 적당한 타협을 요구할 뿐, 과격한 근본주의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탓에 일리치는 온갖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범위와 폭이 놀라워 본받아야 할 정도다. 그를 문명 비평가라고 간주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국가 주도 공교육제도,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 조건, 건강의 '의료화', 표준 언어, '개발' 담론 등등 온갖 사회 체계에 내재한 복잡한 권력체계와 폭력을 일관되게 반대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제도로부터 미움 받기 딱 좋은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일리치는 세속적이며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내적 신념에 충실하고 경건한 신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그가 낭만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사상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사상의 가치체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폭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엔 평온하게 공생하는 자연스러운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는데, 국가 권력-자본주의-의료담론-공교육제도 등등이 일상을 폭력적으로 침탈했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식이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책인데도 여전히 "여권주의"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거 아직도 이렇게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고. 이와 관련해서 일리치에게 특별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역시 그의 젠더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에게 성별은 사회적으로 발명된 그 어떤 현상이라기 보다는,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획하는 근원이자 철학이다. 그렇기에 이쪽은 저쪽을 감히 넘보거나 이해할 수도 없고, 오직 은유와 상상으로만 연결될 수 있다. 이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다(이해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놀랍게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곳에서만 성차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성역할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에서는 차별 논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경건한' 상호의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좀 오버해서 말하면 자꾸 여자들이 남자 세계를 욕심내고 남자들이 여자 세계를 넘보려고 하니까 (자연질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이거 참 ^^;; 정말 일관적인 사람이야.
<몰락의 에티카>를 뒤적뒤적. 좋아하는 소설책의 뒤 해설에 보면 자주 나오는 이름이고 글도 썩 마음에 들고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예전부터 누군가 궁금했었는데... 아무튼 반가운 평론집이다. 평론집이니 심심할 때 아무데나 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저께 도착한 <로쟈의 인문학 서재> 같은 다소 인터넷스러운 '산만한' 구성ㅡ블로그blog+북book=블룩blook이란다ㅡ보다는, 여전히 이런 어느 정도는 전통적인 글묶음이 좋다. <로쟈>의 경우엔 이현우씨보다도 편집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가 더 많이 보인다.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출판하는 마음은 아직 잘 이해가 안된다. 발표한 글을 모으는 블로그라면 모를까. 아예 물적 기반이 다르다보니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과 출판된 글은 호환이 잘 안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하는 잡지 프로젝트도 사실 많이 걱정 된다. 웹진 기반의 글쓰기와 실제 출판하는 글 사이의 크레바스는 어떻게 건널 수 있을지.
난 여전히 이런 평론가들의 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는 애증에 가깝다. 그들의 글이 좋은 이유는, 그러면서 한편에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들의 세련된 보편성 때문이다. (신형철의 경우엔 보편성을 거부하고 압도적인 특수성 내지는 매력적인 주관성을 추구하고 싶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이러한 보편성은 그들의 문체나 정치적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젠더) 포지션 혹은 그들이 택한 장르적 형식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그들의 글에서는 매일 마주하지만 종종 피하고 싶기만 한 일상의 비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요리책을 뒤적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엘레강스하고 스타일리쉬한 셰프들은 대개 남자들이다. 그들의 파스타, 피자, 와인은 보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일상의 비루함을 덮는다. 그들의 요리는 '라이프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리연구가라고 알려진 여자들의 책은 다른 느낌을 준다. 콕 집어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하간 읽어보면 매우 다르다. 요리연구가들의 책은 요리가 누군가를 위한 노동이라는 점을 미리 가정한다. 사진, 글, 모든 것에서 그 냄새가 난다. 그건 말하자면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이러한 젠더 차이는 여행책에서도 드러난다. 여행은 보편이 아니라 특수를 지향한다. 개별적인 장소와 시간에서 개별적인 관계를 맺고 개별적인 경험을 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이를테면 인류애나 에티카, 혹은 여행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여행을 가지는 않는 것이다(물론 서경식씨 같은 경우나, 알랭 드 보통 같은 경우는 예외가 되겠다). 남자 저자들이 실용적이고 감성적인 여행책에서 죽을 쑤는 건 이런 것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본다.
하나, 언어의 문제(first language. 흔히 쓰는 모x어라는 말이 싫어서). 같은 first language를 공유하면 서로를 오해 없이 잘 알 수 있을까? 같은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걸까? 물론 오해와 군더더기 없는 커뮤니케이션은 군대 같은 위계 질서와 명령을 통한 지배 체계에서나 지향하는거고, 그렇지 않은 체계에서는 언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잔여물들을 생산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 잔여물들이 쌓이고 쌓였을 때 나타나는 파괴적인 결과들을 생각한다면 언어의 유통에서 나타나는 gap을 좁히고자 하는 욕망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둘, 젠더의 문제(현재의 sexual regime이 구성하는). 젠더란 것이 관계맺음에 있어서 '+' 일까 '-'일까? 물론 대차대조표적으로 장/단을 냉정하게 평가해서 궁극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기에 '+', '-'를 고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현재의 sexual regime이 구성하는 '젠더'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사랑은 국경도 뛰어넘는다"라는 말도 있지만, 이 사랑마저 못 뛰어 넘는게 젠더다. 현재의 sexual regime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젠더를 못 뛰어 넘는다. 나도 못 뛰어 넘겠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절망스럽다.
교ㅅ을 하면서, 대체 이 학교라는 사회 제도가 젠더, 섹슈얼리티 규범을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생긴다. 예전에 내가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닐 때에도, 학교는 분명 강력한 이성애 중심적 젠더 체계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 제도-공간이었다. 모든 것이 남/여로 구분되어 있고, 그것은 선생님들 사이에서의 인식은 물론, 학생들 사이에서의 인식에서도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규범으로서, 학교 제도의 모든 인식-해석틀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언어게임과 의사소통 체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다. 학교 내에 존재하는 모든 규칙들도 성별화된 규범들을 따른다. 그렇게 각각의 성을 타자화하는 전략으로, 젠더를 생산해낸다. 다시 말해, 젠더/섹슈얼리티 없이 학교 제도는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이 학교의 아이들은 그냥 부정해버리고 싶으리만치 성적으로 activate 되어 있다. 매일 같이 porn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sexy girl"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영어 시간에 하는 아이들은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의 뜻을 질문한다(다소 짓궂은 얼굴로). 여전히 궁금한 건, 이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n명의 아이들의 n개의 성적 실천들이, 왜 지배적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지이다. 무슨 섹슈얼리티는 왜 말해지고, 무슨 섹슈얼리티는 왜 말해지지 않는가. 즉, 왜,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어떤 특정한 섹슈얼리티가 하나의 규범으로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섹슈얼리티는 분명 하나의 담론이자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규범은 분명 일종의 교육적 효과를 갖는다. 다시 말해, 많은 아이들에게 이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교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일상 속에서 아이들이 갖는 수 없이 다양한 수행들과는 별개로, 이 교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서사적인 권위를 갖는다. 아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섹슈얼리티는, 이 서사적 권위를 차지하는 섹슈얼리티의 해석틀을 벗어나서 소통될 수 없다. 그래서 사실 아이들이 갖는 성적 관심은 모두 한결같고 뻔하고 재미 없다. 아이들이 자기의 섹슈얼리티를 설명할 수 있는 방식도 이런 규범적인 것에 의해 제한되고 한계 지어지기 마련이다. 소위 '어른'들도 자기 섹슈얼리티를 표현하기 힘들어 하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중학교 교육 현장에서 (재)생산되는 규범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갈수록 호기심이 생기는 이유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성적으로 activate되는 시기가 이쯤이기 때문이다. 이 굳건한 한국 사회의 젠더 위계와 섹슈얼리티 정상성-규범들이 아이들에게서 최초로 나타나는 방식들을 부지런히 살펴보면,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기대감에서.
덧) 한국 사회가 언제부터 LGBTQ에 대해서 이렇게 '쿨하게' 말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교ㅅ들 사이에서 3학년 어떤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다. 그 아이가 말하는 방식, 말하는 내용, 행동들을 이야기하면서 "아무래도 걔 gay 같아"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자기들이 게이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좀 웃긴데, 그걸 또 대놓고 이야기하곤 하는 것도 좀 많이 그렇다. what is 'gay'? why does it matter(왜 이것이 중요한가/문제가 되는가?) how does it operate? 사실 그 말을 하는 본인들은 짐짓 성소수자에 대해 쿨한 척 하고 있지만, 그 쿨함이야 말로 사실은 LGBTQ에 대한 heterosexual적 혐오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은 왜 하지 않을까.
덧2) 이런 글을 끄적끄적 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런 고민을 하면 할수록 나의 섹슈얼리티는 불분명해지고 불투명해지는 것 같다. 어떻게 자기들을 heterosexual이다, homosexual이다, bisexual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알 수 없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고, 때에 따라 다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대상에 따라 다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Women Are Never Front-Runners (여성들은 절대로 선두주자가 아니다)
_Gloria Steinem
THE woman in question became a lawyer after some years as a community organizer, married a corporate lawyer and is the mother of two little girls, ages 9 and 6. Herself the daughter of a white American mother and a black African father ? in this race-conscious country, she is considered black ? she served as a state legislator for eight years, and became an inspirational voice for national unity.
If you answered no to either question, you’re not alone. Gender is probably the most restricting force in American life, whether the question is who must be in the kitchen or who could be in the White House. This country is way down the list of countries electing women and, according to one study, it polarizes gender roles more than the average democracy.
That’s why the Iowa primary was following our historical pattern of making change. Black men were given the vote a half-century before women of any race were allowed to mark a ballot, and generally have ascended to positions of power, from the military to the boardroom, before any women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obedient family members in the latter).
If the lawyer described above had been just as charismatic but named, say, Achola Obama instead of Barack Obama, her goose would have been cooked long ago. Indeed, neither she nor Hillary Clinton could have used Mr. Obama’s public style? or Bill Clinton’s either? without being considered too emotional by Washington pundits.
So why is the sex barrier not taken as seriously as the racial one? The reasons are as pervasive as the air we breathe: because sexism is still confused with nature as racism once was; because anything that affects males is seen as more serious than anything that affects “only” the female half of the human race; because children are still raised mostly by women (to put it mildly) so men especially tend to feel they are regressing to childhood when dealing with a powerful woman; because racism stereotyped black men as more “masculine” for so long that some white men find their presence to be masculinity-affirming (as long as there aren’t too many of them); and because there is still no “right” way to be a woman in public power without being considered a you-know-what.
I’m not advocating a competition for who has it toughest. The caste systems of sex and race are interdependent and can only be uprooted together. That’s why Senators Clinton and Obama have to be careful not to let a healthy debate turn into the kind of hostility that the news media love. Both will need a coalition of outsiders to win a general election. The abolition and suffrage movements progressed when united and were damaged by division; we should remember that.
I’m supporting Senator Clinton because like Senator Obama she has community organizing experience, but she also has more years in the Senate, an unprecedented eight years of on-the-job training in the White House, no masculinity to prove, the potential to tap a huge reservoir of this country’s talent by her example, and now even the courage to break the no-tears rule. I’m not opposing Mr. Obama; if he’s the nominee, I’ll volunteer. Indeed, if you look at votes during their two-year overlap in the Senate, they were the same more than 90 percent of the time. Besides, to clean up the mess left by President Bush, we may need two terms of President Clinton and two of President Obama.
But what worries me is that he is seen as unifying by his race while she is seen as divisive by her sex.
What worries me is that she is accused of “playing the gender card” when citing the old boys’ club, while he is seen as unifying by citing civil rights confrontations.
What worries me is that male Iowa voters were seen as gender-free when supporting their own, while female voters were seen as biased if they did and disloyal if they didn’t.
What worries me is that reporters ignore Mr. Obama’s dependence on the old? for instance, the frequent campaign comparisons to John F. Kennedy? while not challenging the slander that her progressive policies are part of the Washington status quo.
What worries me is that some women, perhaps especially younger ones, hope to deny or escape the sexual caste system; thus Iowa women over 50 and 60, who disproportionately supported Senator Clinton, proved once again that women are the one group that grows more radical with age.
This country can no longer afford to choose our leaders from a talent pool limited by sex, race, money, powerful fathers and paper degrees. It’s time to take equal pride in breaking all the barriers. We have to be able to say: “I’m supporting her because she’ll be a great president and because she’s a woman.”
Gloria Steinem is a co-founder of the Women’s Media Center.
Correction: January 9, 2008
An Op-Ed article yesterday about Hillary Rodham Clinton misstated Senator Edward M. Kennedy’s position on the presidential race. He has not endorsed Mrs. Clinton or any candidate.
미국 민주당 경선 소식을 좀 찾아보다가, 이 기사를 대충 읽고(잘 번역이 안 되어서 번역은 좀 하다가 포기했다^^* 매끄럽게 잘 안되길래) 마음이 무거워져서 옮겨 둔다. 오바마는 흑인이고, 힐러리는 여성인ㅡ세상에, 무려 백인 남성이 없다!ㅡ이런 후보 구도란 게 사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사실은 어떤 나라에서도) 흔하게 일어나긴 힘들 것이다. 물론 이렇게 두 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하여 구분짓는 것은 때론 위험하고 바보 같은 일(Stupid!)이다. 오바마의 사회적 스탠스가 흑인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힐러리의 사회적 스탠스가 여성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투명하게 나누어서 재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그리고 또 어떤 흑인이며 여성인가?ㅡ그리고 그 구분법은 누구에게, 어떤 권력에게 봉사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야 뭐 그래도 은근 힐러리가 되길 바라고 있었지만(;) 최근의 동향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ㅅ;
게다가 언론에 보도되는 선거 이미지도 이 꼴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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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오바마가 어떤 인물이며 힐러리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일단 패스를 해보자. 그 중요한 것을 패스하더라도, 역시 젠더의 더블 스탠더드(이중 규범)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중 규범이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여성-힐러리가 너무 '독'하게 말하면 입담 좋고 여유 있으며 유머 감각 있는 남성-오바마에 비해 너무 공격적이고 강하고 독단적인 후보처럼 비춰질 것이다. 또 너무 '유'하게 말하면 너무 감정적이고 연약한 후보처럼 비춰질 것이다. 힐러리는 오바마에 비하면 정치인으로서 짊어지고 갈 짐이 무거운 것이다. 인종과 젠더는 어느 지점에서는 연결 되어 있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정말이지 다음 대선에는 심상정 의원이 좀 돌풍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있는데, 그때 까지 갈 길이 먼 것 같다. 이번 민노당 비대위원장 맡으셨던데, 비대위 결과가 좋아야 할텐데... 대선 결과도 너무 안 좋았고, 또 한 동안 "주사파 대 평등파" 운운하는 논쟁 때문에 나쁜 쪽으로만 주목 받았던 것 같아서 아무래도 총선 때가 걱정된다. 솔직히 말하면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좀 불편했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관심, 그리고 토론(혹은 격투;)가 있었다는 사실은 솔직히 놀라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당찮은 오버도 좀 있었던 것 같다. 트집 잡을 거 생겼다고 막 벌떼처럼 일어난 사람들도 그닥 좋게 보이진 않았고... 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민노당에 기대를 했었다는 의미도 있겠고, 나도 민노당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덧) 힐러리와 오바마가 각각 '여성'을 대표한다거나 '흑인'을 대표한다거나 하는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은 아닌걸로 알고 있다. 이처럼 '투쟁적인' 이미지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특히 백인) 유권자들이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나중에 백래쉬가 일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덧2) 글을 읽으면서 부분 부분 스타이넘이 꽤 나이브한 측면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글쓰는 사람에게 '모든 영역'의 '전문가'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은 물론 오버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좀 세심해졌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 예컨대, 젠더 문제가 "가장most" 심하다고...? 문제의 우위나 경중을 따지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의문을 차치하더라도, 저런 표현은 좀 자제했으면 싶다; 너무 투박하지 않나?;
어제 버틀러 세미나에서 <모방과 젠더 비순종Imitation and Gender Insubordination>을 읽었는데, 버틀러는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Aretha Franklin의 히트곡인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을 언급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사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Feel Like"라는 글자일 것이다. '심적 동일시psychic identification'의 기제를 설명하면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In my view, the self only becomes a self on the condition that it has suffered a separation (grammar fails us here, for the "it" only becomes differentiated through that seperation), a loss which is suspended and provisionally resolved through a melancholic incorporation of some "Other." That "Other" installed in the self thus establishes the permanent incapacity of that "self" to achieve self-identity; it is as it were always already disrupted by that Other; the disruption of the Other at the heart of the self is the very condition of that self's possibility.
내가 보기에 자아the self는 오직 분리seperation("it ; 대문자 I"은 오직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구별화될 수 있기 때문에 문법은 여기서 우리를 저버리게 된다)와, "타자"의 멜랑콜릭한 통합을 통해서 보류되고 또 잠정적으로 해소된 상실loss로부터 고통 받았다는 조건 하에서만 자아a self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아 안에 정착한installed 그 "타자"는, 자기 동일성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그 "자아"의 영구적인 무능성을 확립한다; 말하자면 자아는 이미 항상 그 "타자"에 의해 분열disruption되어 있다; 자아 심장부에서의 타자의 분열은, 자아의 가능성의 바로 그 조건이다.
(...)
If incorporation in Freud's sense in 1914 is an effort to preserve a lost and loved obect and to refuse or postpone the recognition of loss and, hense, of grief, then to become like one's mother or father or sibling or other early "lovers" may be an act of love and/or a hateful effort to replace or displace. How would we "typologize" the ambivalance at the heart of mimetic incorporations such as these?
만일 1914년의 프로이트적 관점에서의 통합incorporation이, 상실된 사랑했던 대상을 보존preserve하려는 노력이고, 상실과, 따라서 애도의 인정을 거부하거나 연기하려는 노력이라면,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나 형제자매 혹은 이른 날의 "연인들"과 같은like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자(또는) 대체하거나 전치하려는 증오에 찬 노력일 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와 같은 모방적인 통합의 심장부에 있는 양가성(이중 의식;애증)을 "유형화"할 수 있을 것인가?
버틀러에게 "Feel like"라는 말은 이미 어떤 '모순'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그 자체로는 natural woman이 아니며, 누군가의(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럴 때에만 자신은 "마치" natural woman인 것 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항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인정의 '순간'에만 Aretha 자신은 '자연적인' 여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Aretha의 노래의 '그녀'는 이미 타자의 담론 속으로 들어와 있는 분열된 주체이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일종의 사랑 행위의 방식으로도 드러날 수 있고, 혹은 이미 증오를 함축한 행위일 수도 있다. 자기 동일성은 언젠가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담론 속에서 이미-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natural wo/man(남성과 여성의 메커니즘이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은 존재할 수 없고 온전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일종의 phantasm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려는, 버틀러도 말하고 있지만 정체성과 심적 동일시에 대한 "안정된stable" 유형화를 훼손시킬수 있는 정치적인 기획이다. 유형화하고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관찰은, 그것의 훨씬 많은 모순점들과 어려움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화'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유형화란 것은 "단순화simplification"인 것이며, 따라서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쉽게with alarming ease" 규제적인 요구조건들에 순응하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젠더와 섹스의 실체화에 저항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한 버틀러의 언급을 조금만 더 보자.
When Aretha Franklin sings,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she seems at first to suggest that some natural potential of her biological sex is actualized by her participation in the cultural position of "woman" as object of heterosexual recognition. Something in her "sex" is thus expressed by her "gender" which is then fully known and consecrated within the heterosexual scene. There is no breakage, no discontinuity between "sex" as biological facticity and essence, or between gender and sexuality. Although Aretha appears to be all too glad to have her naturalness confirmed, she also seems fully and paradoxically mindful that that confirmation is never guaranteed, that the effect of naturalness is only achieved as a consequence of that moment of heterosexual recognition. After all, Aretha sings,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suggesting that this is a kind of metaphorical substitution, an act of imposture, a kind of sublime and momentary participation in an ontological illusion produced by the mundane operation of heterosexual drag.
아레사 프랭클린이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고 노래할 때, 그녀는 우선 그녀의 생물학적 섹스의 자연적인 잠재성은, 이성애적 인정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문화적 위치에 참여함으로써 현실화actualized 된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녀의 "섹스"안의 무엇인가가, 이성애적인 장면scene 속에서 완전히 알려지고 성화(聖化; consecrate)된 그녀의 "젠더"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녀에게는)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실체essence 사이, 혹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이에는 어떠한 손상breakage도, 어떠한 불연속성도 없다. 아레사는 자신의 자연성이 확증되었다는 것에 매우 기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확증이 결코 보증된 것은 아니라는 것, 자연성의 효과란 오직 이성애적 인정의 그 순간의 결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에, 전적으로나 역설적으로나 신중을 기하는 것 같다. 결국 아레사는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고 노래하면서, 그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대체substitution이자 사기imposture 행위, 또한 이성애적 드랙drag의 세속적인 작동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론적 환상에의 숭고하고 일시적인 참여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버틀러도 잘 지적하고 있지만, 아레사는 자신이 natural woman이라는 점을 유보하고 있다(natural이라는 수식어도 섬찟하다. 자연적인 여성이 있다면, 비자연적인 여성을 은연중 또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이성애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식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는 가사는, 어쩌면 우리 시대에 일반적인 이성애 '연애'가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 인정이 비록 '순간'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natural woman이 되는 것도 한 순간의 '빛'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조건들과 규제들을 인정하고 들어갈 때 비로소 이성애 연애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강간 수준의 성폭력을 행하는 남성들의 오래된 대사 중에 "오늘 밤, 내가 널 여자로 만들어 줄게"라는 섬뜩한 말이 있지 않던가? 따라서 이성애적 연애와 성폭력은 완전히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종의 정도와 맥락 속의 차이이지, 결코 완전히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레사의 노래는 그러한 이성애 메커니즘에 대한 훌륭하고 직관적인 관찰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에게 있어 드랙drag이란 우리가 버틀러에 대해 흔히 생각하고 오해하는 드랙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즉, 드랙이란 말을 들을 때 즉각 드랙 퀸이나 드랙 킹과 같은 (버틀러가 저항하는) '유형화'된 대상을 떠올리게 될 때와 같은 바로 그 드랙이 '아니라는' 것이다. 버틀러에게는 이성애 역시도 드랙drag의 한 효과에 불과한 것이며(다시 말하자면 드랙 그 자체가 아니라 '효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수행적performative으로 '구성되어' 가는 것이다. 어떤 내적 본질이나 기원도 아닌 것이며, 오히려 자신이 기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드랙이란, 기원이고 내적이고 참이고 실재적으로 간주되는 (실체화된) 모든 젠더의 "섹스"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 나가는 행위act가 된다.
물론 버틀러의 기획에 의문을 제시할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버틀러 자체는 푸코 식의 권력 담론ㅡ권력은 그 내부에 저항을 내포한다는ㅡ을 자신의 논의에 중요하게 끌어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의 해결책이자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도, 언뜻 보면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근본적이거나 혁명적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에는 버틀러의 주장에 심히 공감하는 편이다. 내가 보기엔 버틀러의 기획은 결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버틀러식의 기획이야 말로 체제 '밖에서' 사고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체제를 닫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유형화 된) 새로운 젠더, 새로운 섹슈얼리티를 백날 수백날 들고 와봐야 상징계는 그것을 또 다시 상징화하고 내부로 포섭해 들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윤리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상징계 내에서 유통되고 타자의 담론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이미 윤리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사라져버리게 된다. 예수의 죽음, 그것도 타자의 담론 속에 유통되는 순간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체 게바라가 요즘 유통되는 방식도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라는 상징계는 저항 마저도 내부로 포섭하고 있지 않던가. '인용 가능성citablity'이란 그만큼 무섭고, 또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유혹에 또 빠져들기 쉬운 것이다.
덧) 번역은 양모 쌤의 번역을 기본으로, 원문과 대조해서 내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약간 수정했음. 이 자리를 빌어서, 양 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_* 덧2) 버틀러는 확실히 영문을 보아야(물론 한글 번역본이 있어야 훨씬 편하다) 이해가 더 빠르고 명료한 것 같다. 흑.. <안티고네의 주장>은 읽을만 하던데, 정말 조현순씨는 '능력자' 인 것 같다;
Aretha Franklin 노래가 아니라 Celine Dion의 노래이지만, 한번 들어보실 분은 밑에 열어서 클릭.
more..
Lookin' out on the mornin' rain I used to feel uninspired And when I knew I had to face another day Oh it made me feel so tired Before the day I met you Life was so unkind But your love was the key to my peace of mind
Cause You make me feel x 3 Like a natural woman
When my soul was in the lost and found You came along to claim it And didn't know just what was wrong with me Oh till your kiss helped me name it Now I'm no longer doubtful Of what I'm livin' for Cause if I make you happy I don't need to do more Cause You make me feel x 3 Like a natural woman
Oh baby what you've done to me You make me feel so good inside Good inside And I, I just wanna be close to you Because you make me feel so alive Oh what you've done to me Close to you because you make me feel so alive You make me feel x 3 Like a natural woman Woman You make me feel x 3 Like a natural woman You make me feel Oh baby what you do to me Can make me feel so good inside I just wanna be, I just wanna be Oh what you've done Natural wo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