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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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0/06/26 23:31

잊혀진 역사를 현재에 소환하는 영화적 시도는 언제나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영화의 작품성이나 완결성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 항쟁을 모티프로 한 <꽃비>는 충분히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꽃비>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현장을, 제주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교실과 학생들의 관계로 축소해 놓는다. 영화가 시작하고 곧 쫓기듯 섬을 떠나는 형석은 <일본>을, 형석이 떠난 자리에서 급장이 되기 위해 싸우는 도진과 민구는 각각 <남한>과 <북한>을,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문득 찾아와 '투표'를 제안하며 포르노와 초콜릿으로 아이들을 포섭하는 동일은 <미국>을 상징한다. 그리고 도진과 민구가 마음을 빼앗기 위해 노력하는 서연은 훨씬 더 복잡한데, 아마도 한반도(혹은 민족, 혹은 역사)를 상징할 것이다. 각각의 국가(정체)를 상징하는 인물들은 (감독이 해석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눈에 도식적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영화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체스 경기를 녹화해서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이 진부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의 디테일과 영화적인 암시와 비유들을 직시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하고, 해석해야 할 것은 해석해야 하며, 아픈 것은 부정하지 말고 제대로 아파하고, 애도해야 할 것은 끝까지 애도해야 한다. 또한 <꽃비>는 제주 4.3 항쟁이라는 사건을 단지 현대사의 한 비극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만 4.3 항쟁의 아픈 기억을 훼손하지 않고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그러나 영화는 인물간의 관계와 서사의 진행을 모두 남성 정치의 맥락으로 치환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서사는 노골적으로 젠더화된다. 다소 어설픈 남성 학원물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3 항쟁을 직접 겪어 실어증에 걸린 서연의 어머니와 서연은 영화 내내 침묵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행위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단지 남성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받을 뿐이다. 특히 서연은 중요한 순간에 하얀 옷을 입고 '청순한'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서연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대신 노래를 흥얼거린다(사이렌의 경우처럼, 여성의 노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공포 아니면 매혹, 혹은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연은 늘 도진과 민구에게 다투지 않을 것을 주문하지만, 민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도진과 동일은 서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례로 성폭행한다.

이렇게 정치적 폭력을 <성애화eroticize>해서 성폭력의 문제로 치환하는 건, 언제나 남성 정치의 몫이었다. 예컨대 탈식민시대에 제국주의에게 강탈당한 민족-국가의 영토는 '어머니 영토'로 재현되고, 소위 민족-국민의 수난은 제국주의 남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한 남성적 복수의 판본은 (상대방 남성에 대한 직접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 대한 성애화된 폭력이다. ('fucking USA' 같은 노래를 생각해보자.) <꽃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성화된 범주에 대한 남성 주체의 맹목적인 사랑은 곧 성폭력으로 연결된다. 사랑-증오-(성)폭력은 같은 스펙트럼 위에 있다.

이런 식의 비유는 남성만이 진정한 역사적/세계적 행위자라고 간주하며, 남성 범주에 대응하는 여성이라는 타자 범주를 '생산'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의미화한다(물론 이는 남성 정치의 맥락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또한 이는 남성 정치를 <성애화>하고 사적인 욕망으로 축소시키며, 이를 <낭만화>한다. 이는 실재하는 폭력을 은폐하며, 그 결과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역사와 정치를 그런 케케묵은 위험한 비유를 동원해서 기억할 것인가. 우리는 영화의 포스터에 쓰인 "너 때문에 싸우는 거야"라는 말의 무서운 폭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당신들이, 당신들의 욕망으로 싸우는 거다. "너 때문에" 싸운 거라면, '사랑'의 스펙트럼 위에서 발생한 성폭력의 원인도 "너" 때문인가? 당신들의 싸움에 타자를 동원하지 말고, 또한 폭력을 낭만화하지 말라. (그러나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처럼, 타자가 없다면 싸움이 있을수나 있을까. 입이나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민주주의자이자 문명인을 자처하는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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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9/06/28 17:57

출처 : http://www.thecommentfactory.com/will-the-cat-above-the-precipice-fall-down-slavoj-zizek-on-iran-2259/comment-page-1

When an authoritarian regime approaches its final crisis, its dissolution as a rule follows two steps. Before its actual collapse, a mysterious rupture takes place: all of a sudden people know that the game is over, they are simply no longer afraid. It is not only that the regime loses its legitimacy, its exercise of power itself is perceived as an impotent panic reaction. We all know the classic scene from cartoons: the cat reaches a precipice, but it goes on walking, ignoring the fact that there is no ground under its feet; it starts to fall only when it looks down and notices the abyss. When it loses its authority, the regime is like a cat above the precipice: in order to fall, it only has to be reminded to look down…

권위주의 정권이 마지막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정권의 붕괴는 대개 2개의 절차를 따른다. 실제로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균열이 시작된다. 갑자기 사람들이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다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정권이 단지 정당성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집행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공포에 입각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화의 고전적인 장면을 알고 있다. 고양이는 절벽에 다다른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발 밑에 땅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해서 걷는다. 고양이가 밑을 바라보고 심연을 발견했을 때가 되어서야 고양이는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정권이 권위를 잃으면 정권은 이렇게 절벽 위의 고양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붕괴하기 위해서는, 밑을 내려다 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이 정권에 대한 분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분석들에는(그 분석을 집행하고 널리 알릴 채널이 없으니) 당연히 힘이 없고 그만큼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런 냉소주의 중에 가장 악질이 '국개론'일 것이고, 가장 평이한 것으로는 다음 총선(혹은 다음 보궐선거) 내지는 대선을 기약하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 공통적인게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정권은 무능하다" 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찰이나 검찰이 휘두르는 무기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눈앞에 어른대는 서슬퍼런 흉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그 반작용은 두려움, 공포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복종도 있을리 없다.

그러니까,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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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9/06/0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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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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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9/05/25 23:27

내가 '당비를 안내는 당원(당원이 아니란 얘기다)'인 한 당게에서는 '논쟁'이 한창이다. 말이 좋아 논쟁이지 제 손에서 주물주물한 똥을 이리 저리 던지는 꼴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내가 당원이 아닌 입장에서 이런 말들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화가 몹시 나므로 글이라도 써야지 싶다.


전 노무현 대통령을 무작정 미화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지금은 때가 때니 만큼 최소한 죽은 이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 하는 상황이므로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말들을 쉽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전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절에 있었던 수없이 많은 일들을 상기시키면서 그를 애도하는 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람들은 대체 뭐하자는 건지?

전 노무현 대통령이야 말로 시카고 發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 도입의 첨병이었으며, '제국주의적' 이라크 파병의 주역이었고, 수없이 많은 노동탄압의 기수였으며, 대표적으로 '대추리'에 가해진 국가 폭력의 최종 심급이라도 된다는건지? 아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물론 이런 저런 조건들, 이런 저런 사건들이 전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절에 도입되었고 또 일어났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전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직격탄으로 이어질 수 있는건지? 그의 죽음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아도 될만한 이유가 되는건지?

분석적이고 '혁명가적 풍모를 지닌' 어휘를 평소에 즐겨 쓰는 이들이 어찌나 이렇게 권력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도 역시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위치한 인물이라는 점을. 한국이 어디 왕정국가라도 되는가(심지어 가장 폭력적인 왕들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니, 뭐 신정국가라도 되는건가? 그는 독재자도, 홀로 선 주체도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포진한 수없이 많은 이들과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임기 내내 조중동과 한나라당과 싸워야 했으며 심지어는 중간에 어이없게 탄핵까지 당해야 했다.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한은 (그의 계급 정치의 한계 내에서) '부르주아' 정치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었다. 그의 권위는 쉴 새 없이 공격받았고 뭉개졌다. 게다가 어디 신자유주의 논리가 5년 임기에 불과한 한 국가의 원수가 혁명 일으킨다 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 그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쨌든 많은 기대를 받았고 또 그 기대를 저버렸다. 수없이 많은 인명을 희생한 시대에 '노무현 정권'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중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다. 왜 그를 이제와 실패한 신으로, 따라서 마땅히 추방되어야 하고 죽어 마땅한 신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민주주의와 경제평등을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왜 이제와 신을 소환하는건지? 그는 모두가 환멸하고 진흙탕이라 생각하는(그래서 모두가 꺼리는데다 한 번 발을 들이면 오염된 인간 취급하는) 판에 발을 깊숙히 담그고야 말았던 정치 주체이자 '실정법'이 부여한 이름인 바 대통령이지, 신이 아니다. 지금 상황이 엉망이라고 해서,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분노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권력에 대한 환상은 걷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조금씩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진부한 권력 이론을 갖다 들먹이지 않더라도, 권력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언어와 분석이 끊임없이 향해야 하는 지점이다. 2mb 2년차 시점에 지금 대통령은 어렵고 말도 안 통하니 접어두고, 그래도 듣는 귀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하려면, '노무현과 아이들'에서 노무현만 보지말고, '아이들'에 하나하나 구별하고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미리 했었어야 한다. 그러나 놀랍지 않게도 '아이들'은 아예 생략되어 버리거나, 그냥 '386 민주화 운동 세대'라는 이름 정도로만 불리고 땡!이다. 이런 분석 과정 없이는 분풀이용 희생양만 계속 만들어낼 뿐이다. 정치에 '절대권력'이라는 신을 소환하려드는 말 많은 사제들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2mb 대통령 한 명 희화화하고 놀리는 건 지긋지긋하다. 어떤 에세이스트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가 2mb"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 물론 정작 그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짝도 몰수 했으니 대통령직 그만두고도 천수의 곱절을 누리며 살겠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의 사진 앞에서 흐느끼는 모든 이들의 눈물에, 부질없이 한 방울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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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9/04/10 01:02

어젠가 그제에 포스팅 했던 대로 오바마의 당선에 부치는 버틀러의 글, "Uncritical Exuberance?"를 옮겨 둔다. 역시 인터넷에 원문은 많이 돌아다니니 원문 링크는 일단 패스^^; 이 글은 앞서 올린 지젝 글보다 훨씬 더 번역하기 어려웠다 헥헥; 전체적인 양은 지젝의 글이 한글 기준 2000자 정도가 많지만 버틀러의 글이 단어나 문법 선택이 역시 beyond me이기 때문에 -_-; 이번 뉴레프트리뷰에 올라온 마이크 데이비스의 글도 흥미로울 것 같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번역은 포기했다. 어쨌거나 비록 퇴고도 못한채 출근을 위해 일단 잠을 자야하기에 초고를 올려두지만, 어쨌거나 무려 4시간이나 걸려서 사랑스러은 셸든이 나오는 빅뱅이론 봐도 될 시간에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지만) 독자를 고려한 번역을 끝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글에 엄청나게 지적 자극을 받으면서 그녀에 대한 바보같은 애정이 한층 깊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어졌다. 덧붙여 약간의 행복감마저 느끼며, 그렇기에 오역은,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들 하세요, 하는 무책임한 말을 던지며, 나는 이만 총총... 수정은 천천히...
 

무비판적인 열광(Uncritical Exuberance)?

by Judith Butler
translated by 비앙


이 순간, 이 흥분 상태에 무감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내 좌파 친구들은 나에게 “구원”같은 느낌을 받는다고도 말했고, “이 나라가 우리에게 돌아왔어!”라고도 말했고, “마침내 백악관에 동지가 생겼군!”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나 역시도 오바마의 승리가 확인된 날, 부시 정권이 마침내 끝장나버렸다는 생각이 엄청난 위안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이 흥분 상태에 빠져있었다. 생각이 깊고 진보적인 흑인인 오바마의 생각들은 역사의 토대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만들어 낸 새로운 지형들을 따라 대변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뀐 지형들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이 지형의 윤곽을 완전히 그려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이제부터 평가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구원이 아닐뿐더러 구원일 수도 없다. 만약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오바마가 제안했던 과장스런 동일시 상태나 “그는 우리 동지야”라는 우리들의 제안에 찬성해버린다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특히 오늘날의 정치적인 삶을 구성하는 적대 관계(antagonism)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국가적 연합”을 이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좋은 이유는 항상 있었으며, 정치 지도자를 향한 절대적이면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를 의심하는 생각을 키워야 하는 좋은 이유들 역시도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부분적으로는 지도자를 향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 상태에 의존한다. 공화당은 정치 감정을 조직하기 위해 파시즘과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컨대 엘리자베스 돌(Elizabeth Dole)은 그녀의 청중들을 쳐다보며 “나는 당신들 각각을 사랑하고, 당신들 모두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바마의 당선에 대한 열의 넘치는 동일시의 정치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오바마에 대한 지지가 보수적인 대의에 대한 지지에 부합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자면 말이다. 이는 그가 “지지 정당을 바꾸는 투표(cross-over)”로 성공했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는 60%의 득표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서는 52%의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명백한 괴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오바마가 동성 결혼권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지한 바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더 나아가, 웬디 브라운이 주장했듯이 공화당원들은 최근에 있었던 선거들과는 달리 유권자들이 “도덕적인” 이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오바마에게 투표한 이유는 분명히 경제 때문인 것처럼 보이며, 그것은 종교 문제 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에 의해 완전히 구조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권자 다수가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던 공화당 소속 알래스카 주지사인 페일린(Palin)의 정치 회합이 결국 실패했다는 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총기 규제나 낙태권 그리고 게이의 권리 같은 “도덕”적인 이슈가 예전과는 달리 더 이상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이는 이 도덕적인 이슈들이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의 다른 칸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정치적 신념의 새로운 형상화(configuration)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상화 안에서는 명백히 모순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는 오바마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오바마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그들의 인종주의를 명백히 드러내면서 어쨌든 간에 오바마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고, 투표장에서는 백인 후보에게 투표하면서 여론조사나 출구조사에서는 비백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하는 브래들리 효과(Bradley-effect)의 반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 아마도 그가 경제에는 더 낫겠죠.” 이러한 유권자들은 그들의 조각난 신념을 해결하지 못하고 감춰둔 채 인종주의를 지키면서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다.

강력한 경제적 동기 외에 경험적으로 조금 더 분별하기 쉽지 않은 요소들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이 선거에서 있었던 탈동일시의 힘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즉 조지 부시가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했다는 점에 대한 불쾌감, 미국이 저지른 고문과 불법 구금에 대한 부끄러움, 엉뚱한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적 관점을 유포했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 과도한 탈규제 경제가 전 지구적 경제 위기를 낳았다는 점에 대한 경각심과 공포심 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오바마가 그의 인종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의 인종 덕분에 이 국가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대표자가 된 이유 아닐까? 그러한 대의제적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오바마는 흑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흑인이 아니기도 하였으며(누군가는 “충분히 흑인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너무 흑인스럽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오바마는 인종문제에 대해 양의적인 관점을 해소하지 못하는 유권자들 뿐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원치 않는 유권자들에게도 호소할 수 있었다. 대중들이 대중들 스스로의 양의성을 견뎌내고 감출 수 있도록 해주는 공적인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의 인물로 나타난다. 이는 당연히 이데올로기의 기능이다. 그러한 요소는 강렬한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인 힘을 잃는 것은 아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오바마 개인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관심들이 쏠렸다. 즉, 진중하고 신중한 그의 성격, 언제 어디서든 성미를 놓아 버리지 않는 능력, 상처를 주는 공격들과 야비한 정치적 수사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방식,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부끄러운 상황을 회복할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약속 말이다. 물론 그러한 약속은 매혹적이지만, 오바마를 선택하면 이 모든 불협화음을 일거에 해소하고 통합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믿음을 낳는다면 어쩔 것인가? 이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자신의 과오점을 보여주고 자발적으로 다른 세력과 타협하며, 심지어 소수자들을 팔아치울 때에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실망에 고통 받는 결과로 끝나 버릴만한 가능성은 또 어떤가? 사실 그는 분명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점들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이들은 이 순간 극단적으로 모호하지 않은(extremely un-ambivalence) 상황을 즐기기 위해 이러한 우려를 “미뤄두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더 잘 알게 되었을 때에도 무비판적으로 즐거워하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뭐니 뭐니 해도 오바마는 거의 좌파가 아니다. 보수주의 반대세력이 오바마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칭을 붙여줬다지만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의 행동들이 정당 정치와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해 제한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미 타협되었는가? 만약 우리들이 현재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기 위해 오바마를 지지할 것이라면, 우리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비판적인 정치학을 떨궈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덧없는 것일지에 대해서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라고 공공연하게 자백한 인종주의자가 한 켠에 있다면, “오바마가 게이의 권리와 팔레스타인을 팔아 치웠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아. 하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의 구원이야”라고 말하는 좌파들도 분명히 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I know very well, but still)’라는 말은 부인(disavowal)의 고전적인 형식이다. 우리는 어떤 수단을 통해 이렇게 충돌하는 신념을 유지하고 감추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

오바마의 성공이 미국의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유럽의 사민주의를 닮은 경제 접근법이 도입되면서 경제 규제에 있어서 새로운 원리를 보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도 논리적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부시 행정부가 국가 간의 조화를 파괴해 온 치명적인 흐름을 뒤바꿔 놓을 다변적인 관계로 재편되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서도 더 자유주의적인 흐름이 있게 되리라는 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오바마가 전 국민 의료혜택 보장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동성 결혼권을 명백하게 지지하는데도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가 중동에서 정당한 정책을 펴리라고 희망할만한 이유가 많지도 않다. 물론 그가 컬럼비아대 중동문제연구소 소장으로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오던 라시드 칼리디를 알고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오바마의 당선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요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성공에 암묵적으로 강제된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하고만 관련이 있다. 이 사실은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격려할 것이며 또 압도할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미국의 자기 정의(self-definition)의 변화를 촉진할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이 투표자들 다수가 오바마에 의해 “대표되기”를 원한다는 의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즉, 우리는 많은 인종으로, 각양각색의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가(nation)다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오바마는 우리가 누구로 되어왔으며, 또 앞으로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지를 인지해야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대통령직의 대의제적 기능과 대중을 대표하는 것, 둘 사이의 불화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거의 메시아에 거는 것만큼 이 남자에게 쏟아진 기대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오바마의 재임기간이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실망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또 실망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 분(the man)은 한낱 인간이 될 것이며,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정치는 모호함이나 신중함 없는 찬양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사실 정치는 소란스러운 토론과 공중의 비평, 필수적인 적대의 장이지 메시아적 경험은 아니다. 오바마의 당선은 토론과 투쟁의 장이 이동했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지리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의 당선을 잠정적이나마 투쟁의 끝으로 생각한 우리들은 어리석었지만, 오바마의 당선은 투쟁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오바마가 시도할 많은 행동들과 시도하지 못할 일들에 의심할 여지없이 동의하고 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오바마가 그 자체로 “구원”이며 “구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때 우리는 그를 무자비하게 처벌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통합되었다는 느낌과 모호한 점 하나 없는 사랑의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실망을 거부하거나 억누를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따라 붙을 드라마틱한 실망감을 피해가려면 오바마는 빠르고 자알~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충돌”ㅡ그에게 반대하는 정치 의지를 불러일으킬 심각한 실망ㅡ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 재임기간의 첫 두 달 안에 중대한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아마도 관타나모 기지를 폐쇄하고 수용자들의 재판을 합법적인 재판정으로 이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이라크에서 병력을 철수할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셋째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그의 호전적인 언급을 철회하고, 그 지역에서 외교적이고 다변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단계를 밟아가는 데 실패한다면, 오바마에 대한 좌파들의 지지는 악화될 것이며, 우리는 자유주의적 주전론자들과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들 사이의 균열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또 만약 오바마가 시오니스트인 로렌스 서머스 같은 이들을 주요 내각에 지명하거나, 클린턴과 부시가 이미 실패한 경제 정책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우리의 메시아는 엉뚱한 예언자로 판명되어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불가능한 약속의 지점에서, 우리는 부시 정권이 저지른 정의(justice)의 끔찍한 폐기를 뒤집기 위해 확실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환멸(disillusionment)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비판적인 정치학을 되찾으려면 얼마만큼의 각성(dis-illusion)이 필요하며, 극적인 각성을 얼마나 해야 지난날의 정치적 견유주의(cynicism)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정치란 오바마가 보여줬던바 인간에 대한 것이나 불가능하고 아름답기만 한 약속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러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더 큰 정의의 여건을 만들어줄 확실한 정책 변화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_끝.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9/04/07 20:43

오바마의 당선에 대한 지젝의 글을 번역해 옮겨 둔다. 나름대로 의역과 직역의 중간 쯤으로 해봤다. 이희재씨의 <번역의 탄생>을 보고 번역 방식 자체를 조금씩 저울질해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습이랄까... 어쨌든 작년 11월 쯤에 올라온 글인걸로 아는데, 이제야 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찾아서 보고 있다. 원문은 인터넷에 워낙 많이 돌아다니므로 패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버틀러의 글도 있던데, 뒤늦게 발견하였기에 조만간 번역을 해둘까 하고^^ (번역을 해둬야 기억에도 오래 남고 나중에 들춰보기도 좋은 것 같다!) 언뜻 봤지만 버틀러의 글은 역시 너무나 버틀러스럽게도 해체적이고 일반적인 희망과 믿음에 의문을 강하게 제기한다. 나로서는 다소 의외지만 오바마의 승리에서 약간이나마 희망을 읽어내는 지젝의 글과는 묘하게 상충한달까. 지금으로서는 지젝의 글에서 힘을 얻고 있지만, 버틀러의 글, 독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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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을 이용하라 _슬라보예 지젝

_translated by 비앙



노엄 촘스키는 사람들에게 ‘환상 없이’ 오바마에게 투표하자고 요청했다. 나는 오바마의 승리가 낳은 진정한 결과에 대한 촘스키의 의심에 심히 공감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오바마의 승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부시’로 밝혀질 아주 작은 개선만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그는 기본적으로 부시와 같은 정책을 좀 더 매력적인 방식으로 추구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부시의 재임 시절에 겪은 재앙으로 손상을 입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효과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에는 무엇인가 심히 잘못된 점이 있다. 아주 중요한 차원이 빠져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단지 다수자를 위한 끊임없는 의회에서의 투쟁과 그 투쟁이 포함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계산과 조작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는 더 많은 무엇인가의 징후이다. 이것이 그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은 나의 완고한 좌파 미국인 친구가 오바마의 승리 소식을 들었을 때 울었던 이유이다. 우리들이 의심이 어찌했든 간에, 바로 그 순간에는 우리들 각각은 모두 자유로웠고,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에 참여하고 있었다.

<학부간의 논쟁(The Contest of Faculties)>에서 칸트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역사에서 진정한 진보는 존재하는가? (그는 윤리적인 질문을 의미했지, 단지 물질적인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보란 증명될 수 없지만, 진보가 가능하다는 점을 가리키는 징후는 식별해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바로 그러한 징후였다.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 일어났고,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자유의 평등을 주장했다. 칸트가 보기에 파리의 거리에서 벌어진 (자주 피가 흘렀던) 현실보다 더 중요한 점은, 유럽 전역의 공감적인 관찰자들의 눈에 보였던 프랑스 혁명의 열정이었다. 그리고 이는 서인도 제도의 공화국인 아이티(Haiti)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세계사적인 사건이 촉발되었다. 최초의 흑인 노예 반란 말이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프랑스 혁명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아이티에서 온 투쌩 루베르뛰르(Toussaint l'Ouverture)가 이끄는 대표단이 파리를 방문한 뒤, 인민 의회가 그들을 열광적으로 평등한 자들 중에 평등한 자로 환영했을 때 일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signum rememorativum, demonstrativum, prognosticum이라는 3중의 칸트적 의미에서 역사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각주:1] 오래된 과거를 가진 노예제에 대한 기억과 노예제의 폐지를 위한 투쟁이 울려 퍼지는 징후이자 오늘날의 변화를 증명하는 사건이며 미래의 성취를 향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에 대해 걱정하는 진보주의자들이 꽉 닫힌 문 뒤에서 보여주었던 회의주의("만약 공식석상에서는 부인되어온 인종주의가 투표소라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다시 등장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근본적인 냉소주의적 현실주의 정치가인 헨리 키신저에게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가 말한 예측의 대부분이 완전히 틀렸다는 점이다. 예컨대 1991년 반 고르바초프 군이 불시의 일격을 가했다는 소식이 서구에 전달되었을 때, 키신저는 즉각 그 새로운 정치체제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군사조직은 3일 뒤에 불명예스럽게 몰락해버렸다. 그 전형적인 냉소주의자는 아주 자신감있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돈과 권력과 섹스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원칙이나 가치에 대한 언명은 실상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말 뿐이고, 그 말들은 실상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죠..." 그러한 냉소주의자들은 환상의 힘을 무시하는 그들 스스로의 순진무구한 분별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오바마의 승리가 그러한 열정적인 반응들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모든 역경을 딛고 실제로 오바마가 승리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 오바마의 승리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같은 위대한 역사적인 균열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공산주의 정권의 썩어빠진 비효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공산주의 정권이 실제로 무너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키신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냉소적인 실용주의의 희생자였다. 최소한 투표 2주 전에는 오바마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었지만, 그의 승리는 여전히 놀라운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한 전투는 오바마의 승리 뒤인 지금 시작하고 있다. 그의 승리가 사실상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전투 말이다. 특히 9/11과 최근의 금융 대폭락이라는 더 불길한 사건의 맥락에서는 말이다. 역사는 처음엔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반복된다. 부시 대통령은 각각 9/11 이후와 금융 대폭락 이후에 똑같은 내용의 연설을 다른 형식으로 발표했다. 두 경우 모두 부시는 미국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이 있다는 점, 그리고 즉각적이고 확고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또한 부시는 개인들의 자유와 시장 자본주의를 보증하는 미국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잠시동안 그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유예시키자고 요청했다. 이러한 유사점은 어디에서 오는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행복한 90년대'의 시작이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에 따르면 자유자본주의가 원칙적으로 승리했었던 그 시대는, 일반적으로 9/11 이후에 끝났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두 번 죽었어야만 했다. 9/11 이후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 유토피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종말로 치닫고 있는 전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의 경제 유토피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금융 대폭락 이후 이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난잡한 불합리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에이즈, 기아, 물 부족, 지구 온난화와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이 아주 시급한 문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숙고하고 결정을 미룰 수 있는 시간들도 충분히 가졌다. 세계적인 리더들은 발리에 모여 기후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회합은 성공적이었다며 환영받았지만, 그 모임의 중요한 결과가 있다면 2년 뒤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이어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융 대폭락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무조건적으로 문제의 시급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돈도 순식간에 마련되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보호하고 지구 온난화로부터 지구를 지키며 에이즈 치료제를 찾고 굶주리는 아이들을 지키는 일은 어떻게 하고? 그 모든 일들은 잠시 기다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은행을 지켜라!'라는 말은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또 즉각적인 행동을 낳은 무조건적인 명령문이다. 공포는 절대적이었다. 초국가적이고 초당파적인 조직이 즉각 만들어졌고, 세계적인 리더들 사이에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지금은 이 재앙을 피해가야 한다는 이유로 잠시 동안 잊혀졌다. (말이 나온김에 말하자면, 꽤나 절찬을 받고 있는 '초당파성(bi-partisanship)'이라는 말은 민주적인 과정이 사실상 유예되었다는 뜻이다.) 숭고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진짜' 일을 해결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시장의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자본이 우리의 삶의 실재, 즉 우리의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보다도 더 절대적인 실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미국에서만 7000억 달러가 단지 은행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다는 점과 가난한 국가의 식량 부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부유한 국가들이 220억 달러(실제로는 22억 달러만 쓸 수 있었다)를 투입하기로 했었다는 점을 비교해 보자. 식량 부족 위기에 대한 책임을 부패나 비효율성, 혹은 국가 개입주의에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빌 클린턴 마저도 곡물을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중대한 권리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일상적인 상품으로만 취급했다며 "나를 포함한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망쳐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클린턴은 자신이 한 개별적인 국가나 정부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연합 또한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그밖의 다른 국제 기구들이 추진했던 서구의 정책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은 농부에게 지급되는 정부 보조금을 삭감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가장 기름진 땅을 돈 벌이가 되는 수출 작물을 기르는데 사용했다. 그러한 '구조 조정'의 결과로 전지구적 경제로 지역 농업이 통합되었다. 작물은 수출되었고, 농부들은 땅을 빼앗기고 노동 착취 공장으로 끌려 들어갔으며, 가난한 국가들은 점점 더 수입 작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난한 국가들은 탈식민주의적인 종속 상태에 빠져들었고, 시장의 성쇠흥망에 취약하게 되었다. 즉 (부분적으로는 생물 연료(biofuels)에 사용되는 곡물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는) 곡물 가격의 상승은 곧 아이티로부터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국가의 기아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음식은 다른 것들과 달리 일상적인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식량 정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자급자족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은 채로 전 세계의 국가들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믿었다니 미친게 틀림없다"고 말했던 클린턴은 옳다. 허나 최소한 2가지가 덧붙여져야 한다. 먼저 서구의 선진국들은 그들의 농부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식량 자급자족을 유지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농장 보조금은 유럽 연합의 전체 재정의 거의 반이나 된다. 두 번째로 "다른 것들과 달리 일상적인 상품"이 아닌 것은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음식 외에도 모든 애국자들이 알고 있는 방어라든지, 물, 에너지, 환경, 문화, 교육, 건강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만약 그것들이 시장에 맡겨질 수 없다면, 누가 그것들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것인가? 바로 여기서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2006년 6월 5일 타임지의 커버 스토리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쟁'이었다. 그 기획은 지난 10년간 콩고에서 4백만명의 사람을 죽인 정치적인 폭력에 대해서 자세히 다뤘다. 허나 통상적인 인도주의 시위도 없었고, 단지 2개의 독자 편지가 반응의 전부였다. 타임지는 희생자를 잘못 골랐던 셈이다. 타임지는 무슬림 여성이나 티베트의 승려들을 선택했어야 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 아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팔레스타인 아이의 죽음이야말로 이름 없는 콩고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사보다 몇 배는 많은 분량으로 다뤄질 가치가 있다. 왜 그런가? 10월 30일에 AP통신은 콩고의 동부지역 수도인 고마(Goma)를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의 장군인 로렌 은쿤다(Laurent Nkunda)가 정부와 직접 대화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고속도로와 철도에 대한 보상으로 중국에게 수십억 달러 어치나 되는 풍부한 콩고 천연광물의 채광권을 제공하겠다는 조약을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신식민주의적인 문제는 잠시 제쳐 놓고 보더라도, 이 협상은 콩고 민주공화국이 통일된 국가로 기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할 것이었기에, 지역 군벌의 이해관계에는 치명적인 위협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2001년 UN은 콩고 천연자원의 불법 착취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콩고의 주요 갈등 원인이 콜탄(contan), 다이아몬드, 구리, 코발트, 금이라는 다섯 개의 주요 광물 채광권과 관리권, 그리고 무역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지역 군벌과 외국 군대의 콩고 천연자원 착취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르완다 군은 휴대폰과 노트북에 쓰이는 콜탄의 판매로 18개월 동안 최소 2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UN의 보고서는 콩고의 영원한 내전과 분열은 "모든 수혜자들에게는 '윈-윈'이었다. 이 거대한 비즈니스 벤처의 유일한 패배자는 콩고 사람들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 종족 전쟁이라는 탈을 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윤곽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극심한 착취 세력은 14년전 제노사이드의 희생자였던 르완다의 투치족들이다. 올해 초, 르완다 정부는 제노사이드에 대한 미테랑 행정부의 공모 관계를 보여주는 문서를 발행했다. 프랑스는 영어를 사용하는 투치족을 희생시키고 르완다 내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심지어 무기까지 제공하면서 후투족의 계획이 실행되도록 도왔다. 프랑스는 근거가 전혀 없다며 철저하게 그 고발을 기각했지만, 암만 좋게 봐도 그러한 행동이야 말로 근거가 전혀 없다. 아마도 미테랑을 그의 사후에라도 헤이그 국제 형사 재판소로 데려가는 일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의 보호자로 활동한다고 사칭했던 일류 서구 정치가를 최초로 재판에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선을 넘는 일이 될 것이다.

최근의 질서에 대한 위협과 맞서 싸우기 위해 최근 몇 주 동안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기 소르만(Guy Sorman)은 최근 아르헨티나에서의 인터뷰에서 "이 위기는 충분히 짧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소르만은 이 금융 대폭락을 다루기 위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즉, 상황을 다시 정상화하는 것 말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기술 혁신과 그 자체로 좋은 경제 정책의 힘을 받는 기업가 정신에 의해 추동되는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끊임없이 바꾸는 과정은 부유함을 낳는다. 비록 충분히 이해할만하게도 자신들의 직업이 잉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 과정에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재정상화 작업은 그 반대와도 공존한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 제시한 분명 불공평한 것이 틀림없는 해결책들을 대중이 불가피한 것인양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 공황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소르만은 시장이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가득차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재빨리 "과도한 정부 규제를 복원시키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행동주의 경제학을 사용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다. 결국 국가는 개인보다도 합리적이지 않게 될 것이며, 그러한 국가는 결국엔 거대한 파괴적인 결말로 치닫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 사이클과 정치적인 압력의 위기에 직면한 민주주의 정부와 지도층들의 주요한 임무는, 인류에게 훌륭히 봉사해 온 바로 그 체제를 방비하고 보호하는 것이지, 그 체제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구실로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이러한 훈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기 가장 어려운 것들 중 하나다. 이 세계에서 가능한 경제 체계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사실 불완전하다. 경제 과학에서 발견되지 않은 진실이 무엇이든, 자유 시장이야 말로 인간 본능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반영이며, 그 자체로 거의 완벽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더 명징한 용어로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심각하게 제기되는 비판에 대항하여 현존하는 체계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자유 시장을 인간 본능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2008년의 금융 대폭락이 외면상 불행해 보이는 행복이 된다거나,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 된다거나, 우리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일에 대한 분별력있는 암시가 된다거나 할 가망은 없는 것 같다. 이는 금융 대폭락이 어떻게 상징화되며, 어떤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나 이야기가 그 위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물의 일반적인 운영이 외상적일 정도로 중단되면, 그 장(field)은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경쟁에 활짝 열리게 된다. 1920년대 후반 독일에서 히틀러는 어떤 내러티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에 대한 이유와 그 위기를 탈출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경쟁에서 승리했다. 1940년 프랑스에서 마레샬 페텡은 2차 세계대전 초 프랑스의 패전 이유를 찾는 컨테스트에서 우승했다. 따라서, 오래된 맑스주의적 용어로 말하자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요 전략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에 대한 책임을 그 자체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탈(느슨한 규제, 큰 금융 조직의 부패 등)로 책임을 돌리는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면서 누군가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즉, 이 자본주의 체계 그 자체의 어떤 '약점'이 그러한 위기와 붕괴의 가능성을 열어 젖혔는가? 라는 질문 말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명심해야할 점은 이 위기의 기원이 '자비로운'일이었다는 점이다. 2001년 닷컴 거품이 무너진 뒤, 불경기를 막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촉진시키자는 결정이 당의 정책 노선을 휩쌓았다. 오늘날의 금융 대폭락은 7년전 피했던 불경기의 대가이다.

따라서 진짜 위험은 금융 대폭락에 대한 지배적인 내러티브가 우리를 꿈으로부터 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꿈꾸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우리는 걱정해야 한다. 금융 대폭락의 경제적 결과 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다시 활성화하고자 하는 명백한 유혹, 그리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주의에 대해서도 걱정하기 시작해야 한다. 오바마의 승리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오바마의 승리는 우리의 자유를 넓혀 놓았고, 그 결과로 우리들의 선택 폭도 넓혀 놓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오바마의 승리는 그의 승리가 없었더라면 어둠의 시대에 살았을 우리들에게 희망의 신호이며, 좌파든 우파든 현실주의적인 냉소주의자들에게 최후의 언어가 속해있지 않다는 신호이다. _끝

  1. 인터넷 검색을 조금 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원어로 옮겨 둔다. 혹시 아는 분들 있으면 좀 헬프 미ㅠ [본문으로]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2/16 00:17

오늘 루틀리지에서 나온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개론서를 읽다가, 나로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던 접근 방식을 읽었다. 한나 아렌트는 특히 (정치)철학, 그리고 그녀의 삶의 맥락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서양)현대사, 홀로코스트 연구(Holocaust studies), 유대인 연구(Jewish studies) 등에서 알려진 인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거의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 같은 경우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을 포함한 몇 권의 국역본을 갖고 있지만, 꽤나 많이 알려진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의 마지막 장 정도와 <정치의 약속> 일부를 읽고는 너무나 읽기 뻑뻑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주목 받고 있는 (독특한(?)) '아렌트'에 대해서는, 랑시에르 같이 한국에서 '최신 유행'인 이들의 글을 읽어서, 대략적으로만, 아주 간략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우파'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안티-페미니스트'로서 평가받던 아렌트가 최근 들어서 왜 이렇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만(이에 대해 다룬 글을 읽은 적 있다)... 이는 오늘 끄적이고 싶은 주제가 아니므로 패스.

어쨌든 이 개론서의 저자는 정치철학자로서의 아렌트가 아닌, 문학 연구의 맥락에서 아렌트를 읽자고 제안한다. 아렌트가 문학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서사(literary narrative)를 말이다. 심지어 아렌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어떠한 철학도, 의미의 강렬함과 풍족함이라는 측면에서, 잘 서술된 이야기(properly narrated story)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기존의 고전적인 정치 개념으로는 당시에 새로이 등장하던 유례없는 전체주의ㅡ나는 이를 어떤 현대 철학자가 그랬듯 '절대 악'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ㅡ를 이해할 수도 없으며 심각한 왜곡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그녀의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듯, 예술과 서사, 그리고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는, '이론(theory)'에 대한 불신, 내지는 '이론'의 '몰락'이라는 특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 있다. 조금 현대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테리 이글턴이 지적했듯(그러나 약간은 새삼스럽게도), 특히 21세기 초의 엄청나게 급격한 변화를 겪는 전지구적 상황의 맥락에서, 이론과 이론가들은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춰가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미국적인 상황에서 이론은 쉽게 낡은 것이 되거나 현실과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 역시도 당시 현실에 도래하고 있었으며 이미 도래했던 전체주의와 근본주의를 목격하면서, 이론과 서구 철학의 죽음을 읽었다. 간단히 말해 서구 문화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정적인(static) 이해 모델인 반면ㅡ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ㅡ, 스토리텔링은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모델이다. 특히 아렌트는 그녀의 선생이자 연인이기도 했던 모 철학자가 1930년을 즈음하여 나치에 가입했던 유명한 사건을 두고도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토록 철학적 명민함(subtlety)을 가진 사람이, 나치 정권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들을 갖지 못했다는, 그 놀랍지만 놀랍지 않은 선명한 대조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 2000년을 내려온 서구 철학 전통의 추상적 이론화 경향이 어떻게 공적 세계와 사유행위 그 자체에 폭력을 가해왔는지 의문을 쏟아 놓는다.

그에 반해 스토리텔링은 전통적인 이론들이 읽어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젖힌다. 아렌트에게 스토리텔링은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비극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스토리텔링은, "정의의 오류(the error of defining)"를 저지르지 않고 다른 의미들을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은 지식인의 '독백'에 가깝고 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언제나 편집증적일 수밖에 없는 '이론'과는 달리, '커뮤니티community'를 가정한다는 점에 아렌트는 주목했다(커뮤니티를 흔히 하듯 '공동체'로 번역하는 것은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를 심각하게 제한한다는 생각이다. community는 commune이라는 동사에서 볼 수 있듯, 친교와 교제와 우정과 공감의 의미도 함께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동체는 '하나의 신체'라는 뜻이다. 너무나 낡고 진부한 유기체적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온갖 위계질서와 기능주의적인 설명이 덧붙여진다. 심지어는 '한 솥 밥을 먹고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식의 가족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이해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즉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the teller of the story)", "(이야기 속) 행동의 행위자(the hero of action)", "그 이야기를 심판하고 이야기에 반응하는 청자 혹은 독자"를 늘 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론으로 설명되면 이해될 수 없는 사건들이,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형상으로 묘사되면 더 넓은 청중과 커뮤니티에 의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 즉, '인지가능한(intelligible)' 사건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를 참조하여, 그녀의 정치적 이상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문학적인 방법들에 주목한다..



아렌트의 책을 제대로 읽은 바 없는 나로서도,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아렌트의 사유 체계를 부분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쉽게 지우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아렌트의 이러한 접근은 '정치적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스토리텔링 행위는 '현실' 자체의 문제에 개입하고, 그 지평을 이해함과 동시에 확장(내지는 그 지평 자체의 붕괴)을 시도하려는 끈질긴 노력의 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지배적인 상징 체계에 저항함으로써ㅡ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공포를 증언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우파적인 수정주의적 입장은 얼마나 끔찍한가?ㅡ잊혀져 가는 오랜 기억들을 잊혀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스토리텔링과는 전연 다른 차원의 스토리텔링일 것이며, 김연수가 얘기한 바 있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스토리텔링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와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은 나로서는 매력적이었다. '이론'이냐 '현장'이냐 하는 식의 이분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이론'에 많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말이다. 또한 나는,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문학적 글쓰기'라고 믿고 있다. 또한, 피에르 마슈레 식으로 말하면, 한 작품 혹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 뿐 아니라, 작품 내지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고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이, 주위의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면서 평생 공부하는 사람들의 임무라면 임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서사, 내지는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러한 내 믿음과 연결되는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우기 힘든 고민들이 남는다.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정치적인 실천이 될 것인가? 어떤 스토리텔링이 '정치적'인가? '정치적' 스토리텔링을 규정하는 속성을 우리는 정의할 수 있는가? 만약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쉽게 정의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이라고 '느끼는가'? '정치'란, 바디우같은 이들이 말하듯, '메시아적'이고 '섬광'과도 같은, 그런 급진적인 단절/도약의 순간, 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윤리적 명령을 가진 어떤 '사건에 충실'하면 되는 것인가? 거기에서 스토리텔링의 위상은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많이 필요할 것 같으므로 패스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어떠한가. 어떻게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이미지화되거나 스펙터클화되지 않고 그 자체의 유효성과 독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을 정도로 홀로코스트 역시도 자본주의의 엄청난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 만화 등은,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고유한 사건 특유의 정서적 소통 능력을 갖지 못하고, 하나의 끔찍한 사건, 혹은 구경거리로 전락해서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저 먼 곳에서 일어난 어떤 비극'이라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했듯, 드보르로부터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사람들이 늘 말해온 바대로 어떤 사건이 이미지화되고 스펙터클화되는 과정에서, '지시체referent'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70년대 흑인 혁명노동자 연맹(the League of Black Revolutionary Workers)의 디트로이트에서의 일시적/부분적 승리와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짤막하게 분석하면서 이야기했듯 말이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은, 애초에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결국엔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 외에 몇 가지는 생략... ;ㅅ;



덧) 만약 정말 아렌트가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를 참조했다면... 나로서는 웃음만 나올 일이다 ㅋㅋ 왜냐면 내가 학부 시절에 가장 읽고 싶었지만 가장 읽을 수 없었던 책의 주인공들이 바로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이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은 단어와 문법 양면에서 모두(바다와 어선에 관련된 '끔찍한' 어휘들을 보면 알 것이다. 심지어 허먼 멜빌 작품용 딕셔너리도 있다-_-;;), 콘라드는 문법의 측면에서 읽기 너무 힘들고 뻑뻑했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는, 지금 내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탐색하고 조사하고 해부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기에... 결국 다 포기하고 국역본만 읽었다네~ㅎㅎ 아렌트의 책들이 뻑뻑한 이유도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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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12/10 18:59

출처 : 씨네21 [070330]

약자의 테러, 강자의 전쟁

사랑이나 전쟁은 상대방의 존재가 자기 인식과 깊이 연결해 있어서 본래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모순된 행위다. 우리-속국-동맹-적은 나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지 배타적 범주가 아니다. 나-연인-연적도 마찬가지다. 자타 경계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저런 인간에게 목을 맸단 말인가”라며 사랑이 끝난 뒤 자기 모멸감으로 괴로워하고, “겨우 계집애랑 붙으란 말이냐”, “세계 최강을 상대로…” 식으로 모든 싸움에서 상대의 ‘체급’을 확인한다.

군수산업체나 안보 국가처럼 전쟁이 존재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정체(政體??)들은 언제나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파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모순어법이 등장한다. 대개 전쟁사는 “몹쓸 놈들(적)이 우리를 침략했지만, 우리는 용감하게 맞서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화’시에는 적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만, ‘전시’에는 전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일부 보수층이 북한에 대해 절대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도 (공격자는 방어자보다 최소 3배 이상 전력의 우위가 있어야 하는데도) 남침 가능성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나,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으스대면서도 파괴할 건물조차 남아 있지 않은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그런 예이다. 그래서 전쟁은 히스테리일 수밖에 없다.

동양의 선현들은 ‘지혜’가 있었는지, 아예 처음부터 이러한 모순을 간파하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침략 행위에 등급을 매겼다. 수직적 불평등 문화인 유교권에서 전쟁은 정(征), 토(討), 취(取), 침(侵), 습(襲), 벌(伐), 전(戰) 등으로 나뉜다. ‘전’(戰), ‘적국’(敵國)은 동등한 정치집단간의 무력 충돌에만 사용하며, ‘찌질한 오랑캐들’에 대한 무력 행위는 나머지 용어로 지칭했다. 강자의 폭력은 침략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벌(罰)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남의 것을 훔치기 위해 폭력을 쓰면서, 약자를 치는 자기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다” 표현하지 않고 “너를 혼내고 취(取)했다”는 언설의 정치학은, 강자의 전쟁론에 저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가정폭력 가해 남편이 아내 구타 행위를 “때려서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모두, 강자가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사망한 고 윤장호 하사를 추모하는 거의 모든 언론 보도와 여론에서, 텔레반의 자살 폭탄 “테러”와 이에 맞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폭력 자체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미국 정부의 공격은 ‘정의의 전쟁’이고, 텔레반의 공격은 ‘악당들의 테러’란 말인가? 텔레반도 그들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 중이다. ‘테러’와 ‘전쟁’은 이미 위계적이다. 전쟁은 정당하고 떳떳하며 심지어 영웅적 혹은 자기희생적인 어감마저 풍기지만, 게릴라전이나 테러라는 표현은 뭔가 도발적이고 비겁하며 뒤통수친다는 느낌을 준다. 약자는 전면전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약자는 상대방을 히트 앤드 런(치고 ‘도망가는’)할 수밖에 없지만, 강자는 어디서나 치고 점령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도망갈 필요가 없다(미국은 현재 전세계 144국에 46만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강자의 폭력과 탐욕을 정상화하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도 문제지만, 윤장호 하사를 추모한다는 일부 여론이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면서 미국의 시선에서 아프간 ‘테러 세력과의 전쟁’을 독려하는 것은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도 “미국의 치어걸”, “부시의 애완견”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판에 국제사회에서 한·미 동맹을 평등한 ‘동맹’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게다가 군수자본이 주물럭거리는 현대전에서 동맹(同盟), ‘하나의 맹세’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난센스다. 연인 사이에서든 국제정치에서든 이해관계가 다른데, 어떻게 사랑의, 동맹의 맹세가 성립하겠는가. 한국이 스스로를 제국의 일부로 착각하는 이러한 부풀린 자아는, ‘국익’도 ‘평화수호’도 ‘안보’도 아닌 보기 민망한 식민성일 뿐이다. 우리의 자발적인 식민주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적으로 상상된 누군가를 살상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윤 하사는 이러한 우리를 대신한 희생자였다. (정희진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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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2008/12/10 18:52

출처 : 씨네 21 [06.09.29]

자주국방 대 한미동맹?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한국사회 내부의 성별, 계급, 지역 등 권력관계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성희롱은 ‘sexual harassment’의 번역인데, 여성의 시각에서는 오역에 가깝다. ‘harass’는 의도를 갖고 반복적으로 괴롭힌다는 뜻이지만, 장난과 비슷한 ‘희롱’으로 번역되면서 의미가 사소화되었다. 말 자체가 특정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데다, 한국 실정과 안 맞는 경우도 많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대표적이다. 노사관계 선진국과 달리 한국처럼 사회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유연성은 “사용자 맘대로 해고”를 미화할 우려가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시장이 ‘경직’된 것이 나은데, 경직성은 유연성보다 어감이 나빠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97년 대선 때 이인제 후보는 노동시장을 “딱딱하게” 하겠다고 공약한 적 있다).

부시 대통령은 2000년 당선되자마자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을 추진했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다. 유연성의 핵심은 자유롭고 빠른 이동이다. 미군을 특정한 국가에 붙박이로 주둔시키지 않고, 언제든 출동 태세를 갖춰 세계 곳곳에 신속하게 파견해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駐日)미군은 극동 지역을 넘어 중동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주한미군은 더이상 북한 대비용이 아니라 중국과 대만 갈등에 개입하는 등 동북아시아를 분쟁지역화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부시 행정부의 관점에서 유연한 것이지, ‘침략을 받는’ 지역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그만큼 신속하게, ‘저항없이 유연하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폭력과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라면, 늦게 도착할수록 아니,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닌가?

전시 군 작전권 환수를 자주국방이냐 한미동맹이냐로 논하는 것은 현실 왜곡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자주국방’도 ‘한미동맹’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전권 환수=한미동맹 약화=안보 공백”이라고 아우성치는 보수 세력의 무지와 시대착오는 비판하기에도 기운 빠지는 일이다. 이들을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주한미군 주둔 이유가 북의 남침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북침 계획을 억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현재 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9배가 넘어 북한의 GNP에 근접할 지경이다. 방위비 외에도 남한은 북한보다 국민소득 33배, 무역 규모 155배이다. 1994∼98년 무기 수입은 남한 세계 4위, 북한 70위 밖이었다. 지난 10년간 남한의 무기수입비는 북한의 37배였다.

평화네트워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등 많은 전문가 집단이 지적했듯이, 군 작전권 이양은 군사주권 문제라기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국의 필요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탈냉전의 도래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원래 미국의 안보 세력과 군수 자본가에게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 체제의 목적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라는 가상/‘실제’의 위협을 강조하여 전세계에 군사적 긴장을 창출하고 억압적인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 것, 그래서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전쟁 국가의 목표는 승리(전쟁의 끝)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련이라는 공식적인 ‘적’이 사라진 뒤,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 같은 새로운 적을 지목했다. ‘적’이 없다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팍스 아메리카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러와의 전쟁은 적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하고 싶어서’ 하는 임의적인 전쟁이다. 미국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영구 전쟁(permanent war)이다. 미국이 영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맹국’의 협조, 즉, 비용 분담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비용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한국이 제시한 2012년보다 빠른 2009년경에 작전권을 이양하겠다는 등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 작전권을 “빨리 가져가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뭐가 ‘자주국방’이란 말인가?

작전권 환수가 국방비 증가로 이어진다면, 이는 한국이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계획대로 “주변국(북한)을 위협하는” 지역 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자주국방은 주권국가의 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군대를 통한 국민국가 완성 의지가 아니길 바란다. 부국강병 욕망은 (‘자주’를 위해 극복해야 하는) 미국 모방일 뿐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전쟁 위협에 시달리는 국가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의 선제공격을 두려워하는 북한이다. 지난해 참여정부가 주장한 대로, 한국이 미국과 동등한 ‘동북아 균형자’가 되는 길은 군사비 증강이 아니라 외교력과 민주화, 문화 역량 같은 소프트 파워를 통해서 가능하다. 더이상의 강병은 침략 행위다. (정희진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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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1/25 00:42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홍성흡 옮김, 이학사, 2005)를 보고 있다.. 첫 장은 나름대로 흥미진진 했는데... 4장 쯤 가니까 갑자기 흥미가 조금은, 아주 조금 뚝, 했지만 일단 끝까지 봐야지 싶다는. (사실 흥미만 뚝, 하면 괜찮은데, '이게 뭥미?' 싶은 구절들도 눈에 띄어서... 그치만, 60년대에 쓴 글이니 pass, pass!)

재밌는 얘기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냥 짧은 '의문'이 든 것 중에 하나만.

[...]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 없는 사회이고 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적인 사회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다. 이러한 배열은 역사 없는 사회들을 권력 없는 사회로 취급하는 권력에 대한 현재의 사고와는 매우 다르다. [...] (p. 32) [강조는 원문.]


뭐, 일단 여기에 쓰인 '역사적'이라는 개념(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무엇인지?)과 '비/강제적'이라는 개념, 그리고 '정치''권력'이라는 개념에 대한 보다 명료한 정의(definition)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혼동이 되어서 말야.

어쨌든, 만약 여기서 쓰인 '강제적 정치권력'이라는 말을, '(군)주권 권력(sovereign power)'정도로 이해해도 좋다면, 결국 클라스트르가 '역사'와 '(군)주권'의 깊은ㅡ어쩌면, 필연적이자 불가분의ㅡ유대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고 읽힌다. 그렇다면 '역사'란, 결국 주권의, 주권에 의한, 주권에 대한 담론일 뿐이란 이야기일까? 다시 말해, 주권 권력을 (새로이) 쓰면서 그 근원과 정초foundation를 (탐색 및) 창조해 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주권 권력의 정통성legitimacy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정당화하는, 그저 그렇게 이러쿵저러쿵한 담론이란 이야기? 

과연 '역사'라는 담론은, 이러한 의미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비강제적"인 사회는 역사를 쓰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가졌다고 말해질 수 있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여기서 푸코를 좀 불러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지만(사실은 어느 정도 불러온 것 같지만), 깊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므로 일단 접어두자.

그런데 "역사 없는 사회"와 "역사적인 사회"라는 말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한 걸까? 그러니까, "역사적인"이란 말은 정확히 "역사 있는"이라는 의미인건지? (그럴 경우 '있는'이라는 말도 상당히 문제적이겠군) "역사적인"이라는 것은ㅡ어떤 집단, 혹은 어떤 형태의 권력에 의해서ㅡ문자로 꼼꼼하게 기록되고 영구토록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것에 붙이는 말인지? 혹은 어떤 형태든지 기록이 남을 경우에ㅡ우연이든 혹은 특정한 노력의 산물이든ㅡ붙이는 말인지? 아니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암튼 의문 가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라니까; 그냥 읽자면 그냥 읽겠지만, 궁금해지잖아..)

지저분한 의문, 하나만 더. "역사적인"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상관없이 여기서 과학적 사실 진술을 하듯 말하고 있는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혁신', '변화', '동인'이라는 말들이 어우러지면서 너무나 진보주의적(개량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냄새가 나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도 하고..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과 "역사적인"ㅡ어쩌면 인터넷을 하고 있는 우리는 '역사적인' 사회에 이미 살고 있는 셈 아닐까?ㅡ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부분에서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주권 권력을 구성하는 '정초적 폭력'이니, '성스러운 테러'니 하는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말들은 종종 들을 수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 (정치) 권력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괜찮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설득력 있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이런 경향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영 찜찜하기만 해서 말야.

물론 현재까지 '생존'해 있고 또 널리 기록되고 보존되어온 '역사'를 가진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와 현재엔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볼수도 없고 기록도 보존도 되지 못한 '역사'를 가진 역시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단절, 차이, 균열이 분명히 있겠지. 근데 그러한 단절이나 차이점들을 설명할 때, '폭력'과 '강제'라는 말을 넣어서 코딩하는 것에는 여전히 거부감을 느낀다. '폭력'과 '강제'라는 말의 뜻도 엄청 애매하거니와, 그 말들이 애매한 채로(사실은 애매하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특권화 되고, 재생산되고, 특정한 정치 권력의 모델을 옹호하는 것만 같아서 말야.


결론 : ... 아 모르겠다. -_- (무책임한 주인장은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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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9/10 13:28

'고전'ㅡ다들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의미에서ㅡ인 폴 윌ㄹ스의 <학교와 ㄱ급 재ㅅ산>을 보다가 문득 이 책의 분석(자체라기 보다는 방법 및 방법적 주의)을 '학생 운동'에도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는 학생 운동 집단이 늘어나고 있기에(아 진짜... ㅠㅠ),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이 책에서 분석한 바ㅡ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ㅡ영국 노동자 계급 아이들의 ("해머 타운"이라는 특수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편재성을 갖고 있다. 이는 데리다가 말했던 바,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이라는, 일종의 '환유'로서 읽어야 한다.) 소위 "반학교문화"는, 학교 외부의 권력 관계 그리고 계급 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 자체의 규범, 논리, 작동 기제를 갖고 있는 소문화다. 그런데 "반학교문화"는 절대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이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외부와 관계를 맺지만, 그럼에도 나름대로 고유한 내적인 일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총화 그 이상의 것이다. 구성원 개인의 내적인 독특한(실제로 독특한 특성이란게 있다면) 속성과는 별로 큰 관련이 없는, 말 그대로 '문화'(구성원 간에 공유된 지식, 내지는 감정 등의 체계)다ㅡ따라서 이 "반학교문화"는 문화가 작동하는 그 자체의 맥락에 들어가 있을 때에만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한 인터뷰 등의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학교의 '공식 문화'와 갈등 관계를 맺으면서, "반학교문화"는 '비공식 문화'로서 자리잡으며, 학교에, 아이에, 교사들에게, 지역 커뮤니티에 뿌리 내린다.

또한 "반학교문화"는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에 대한(그리고 학교 제도에 대한) 일련의 직관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ㅇ리스는 이를 "간파penetration"이라 개념화한다. 물론 그것이 체계화된 지식이 되어 외부로 개념화 해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훌륭한 분석이다. 그 간파는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 "간파"만으로 노동자 계급이 훌륭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 사회주의의 선봉이 되거나 혁명적/정치적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 일련의 문화적/정치경제학적 제한, 윌ㄹ스의 개념으로는 "제약limitation"으로 인해 "간파"는 왜곡되고 교란당하고 흔들린다. 이는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잠재적 가능성은 곧 실패하고 "공식 (지배) 문화"의 하부 구조로 편입된다...

이렇게 요약을 해놓으니 변변찮아 보이기도 하는데, 책을 막상 한 번 정독하면 그 이상의 통찰을 주는 구절들이 있다(그러니 한 번 쯤 읽어도 손해볼 책은 아니라는 이야기^^). 특히 지젝과 푸코의 인상 깊은 통찰 내지는 분석과 연관되는 부분이 읽히기도 하는데, 이쯤 되면 무척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문화기술지/민족지ethnography'라는 형식인데도 불구하고(사실은 현실감 없게 느껴지고 미덥지 않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이 책에 수록된 부분은 상당히 현실감 있게 읽히기 때문에(라포rapport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케 한다)...


어쨌든, 소위 '학생 운동'과 윌리ㅅ가 "반학교문화"라고 보는 것 사이에는 일련의 공유하는 지반 내지는 매커니즘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싸나이lads'와 소위 '운동권'이 공유하는 문화적 매커니즘(집단 정체성의 획득 과정, 하위 문화로서의 문화적 생성 과정, 또한 (대)학교의 '비공식 문화'로 자리 잡는 위치성, 그리고 "간파" 등등등)이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학생 운동'이 (또 얘기하기도 민망하지만) 하향길에 접어 들다 못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전에 문화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번성'할 때 조차도 갖고 있던 내적인 가능성 내지는 한계 등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살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도식적으로, 그리고 표면적으로 "반학교문화"에 대한 분석을 그대로 '학생 운동'에 때려 맞추고 들이미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어떤 충동들을 느낀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안 될까. 하는 탄식도 좋고 이미 사라진/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필요하다. 그러나 '왜'에 대한 보다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이,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ㅇ리스의 책에서 그 분석의 기초가 될만한 것들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또한 푸코가 말했듯, 정치권력에 대한 분석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가장 낮은 곳에서 권력의 현상과 기술 및 과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이 과정들이 어떻게 자리를 이동 및 확장하며 스스로를 변형시키는지, 그리고 특히 어떻게 이 과정이 전체적 현상들에 의해 포위되고 병합되었는지 . . . 를 보여주어야 할 것",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p. 49)) 윌ㄹ스의 책은 어느 정도의 키key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기초해서, '학생 운동'에 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들 때마다 포스팅을 하도록 해봐야 겠다. 물론 그것은 윌리ㅅ가 말한 것과 상이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래도 (누구의 표현을 빌어쓰자면) '운동권 경계인'이라서 이런 충동/느낌을 갖는 건지도 모른다. 발을 뺐다 넣었다 할 수 있는, 그럼에도 말만 디따 많은. 요즘 들어서 나의 '무책임'함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ㅡ서점 '그날'과 관련된 일들도 그렇고... 아마 이렇게 포스팅 해놓고는 또 딴짓하고 팡팡 놀겠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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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8/09/07 17:59

제 아무리 하 수상하고, 그로테스크가 일상이 되고, 매일 경악을 하다 못해 왠만한 것에는 경악하지 않게 되어 버린 세상이고 요즘이라지만(우리는 강해지고(=둔감해지고) 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웹상의 풍경 하나.

링크 : http://agora.media.daum.net/event/idea2008/index.html


다음의 아고라에 뜬,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국내의 한 단체의 웹 사이트(ㅇㄴ네)에 배너 광고로 떴던, 바로 그 웹 페이지다. 웹 페이지의 일부를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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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상쩍은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단체를 보면, <서울특별시>, <행정안전부>, 그리고 생뚱맞게도(혹은 그럴싸하게도) <기아 현대 자동차 그룹>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세안들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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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눈물 난다 ;ㅁ;

터져나오는 사회적 '불만'을 그냥 잠재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거리 시위를 허용하자니 윗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운 마당에 궁여지책으로 나온 프로젝트인지, 아니면 정말 생각하는 게 이 수준에 그치고 마는건지 알 수 없는 정말 수상스러운 프로젝트다. 안 그래도 듣기 싫고 귀 따가운 '불만'들이니, 차라리 노래로 승화시키라는 건감? '디자인도시'에 걸맞는 '예술도시' 프로젝트라도 하자는 건지 뭔지.

정말이지 '정치'란게 실종된 요즘이다. 요새 유행하는 '본연의 정치(proper politics)'와 관련된 개념들, 그러니까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le politique/the political)'개념이라든지, 바디우의 '진리/사건'개념이라든지,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개념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끌고 오지는 않더라도(아직 끌고 올만큼 공부도 하지 않았고 그 개념들이 사실은 좀 미심쩍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건 정말 아닌데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저런 철학자들 중 한 사람 식으로 표현하자면, "본연의 정치가 실종되는" 현상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정치를 행정의 영역으로 끌고오는 것, 그럼으로써 치안을(<행정안전부>라는 이름은 얼마나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지! 당신들, 천재야!)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번 행정부의 빼어난 정치적 몸짓들. 너무나 빼어나서 무섭기만 한 그런 몸짓들...

그 밑에 "사회창안대회"라는 것도 클릭해서 대충 내용을 살펴 보아도 슬퍼지는 건 마찬가지다. 이어폰 잭을 통일 시켜 달라, 공공장소에 쓰레기통을 설치 해달라, 하는 것이 "사회창안(social invention)"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하에서 요구된다(물론 그러한 요구들도 정당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창안이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 보면 "어떤 방안,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생각하여 냄. 또는 그런 생각이나 방안"이라 되어 있다. 중요한 건 창안이 '처음으로' 하는 생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회를 '창안한다'는 건, 이 사회를 근본적인 층위에서 부터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내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기 싫다!"라는 외침으로 수렴되는 혁명적인 히스테리에 의해 발생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창의적인 상상력을 동반해야 하는 거다. 따라서 이건 개념적으로 봤을 때 <행정안전부>가,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가 전유할 수 없는 말이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전유할 수 없는 말들을 전유할 수 있게 되려면, 모종의 상징적인ㅡ라클라우 식으로 표현하자면 헤게모니적ㅡ접합(articulation)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엄청난(?!) 상징 투쟁과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는 걸까. 국가 기구가 이런 '혁명적'인 어휘("사회창안")를 전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랑시에르가 지적했던 바, 정치에 대한 부인의 몸짓들 중 '초-정치(para-politics)'ㅡ정치를 행정의 논리로 번역하고, 모든 정치적 주체들의 요구들을 대의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합리적인) 경쟁으로 환원하고 마는 정치체제ㅡ의 (물론, 임시적일테지만)승리를 암시하는걸까? (게다가 이게 무려 '아고라'에 게시되어 있는 웹페이지다...)


덧) 혹시 "사회창안(social invention)"이라는 말이, "사회를 창안" 한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창안"이라는 걸까? 그렇다면 아, 뭐 말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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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06/15 16:38
변방에서 중심으로
― 지방대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 ―

양새슬
삼류대에서 학생운동에 기웃거리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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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접속을 환영합니다."

독자가 이 글에 접속하여 필자와 본격적으로 소통하기에 앞서 에피소드 하나 풀어 보겠다. 이 원고를 처음 청탁 받고는 서울대 <학회평론>에서 청탁 받았다고 주위에 자랑했다. 동료들은 '서울대'가 주는 '경이로운 무게' 만큼의 부러움과 질시를 보냈다. 그리고 이 유치한 자랑에 유치하게 대꾸했다. '지방대를 다니는 것은 맞지만 니가 학생운동을 하고 있긴 하느냐'고. 동료들의 말뜻은 필자가 열심히 운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글 쓸 자격이 없다는 얘기였지만, '너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그렇게 청탁 받을 만큼의 가치를 갖는 일일까?'라는 자괴감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학생운동을 하긴 하나 하는 의문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우리의 운동이 수준 낮다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청탁자가 요구하는 글의 형식이 지역 학생운동의 현황을 담은 주간, 월간지의 '르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한겨레신문 지방면만 꼼꼼히 수합하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청탁자의 요구는 지방대의 운동 조건과 차별성에 대한 얘기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지방대에서의 운동'의 외연은 '서울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운동이지만 그것은 지리상의 위치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에 있어서 상이한 질과 수위를 갖는 변방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그 지역의 특수한 조건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문제겠지만 먼저 변방 일반이 갖는 조건부터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초두에서 꺼냈던 동료들과의 유치한 대화만큼이나 너절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멋드러지게 써보려고 시높시스를 짜 봐도 토로와 배설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이유는 필자의 능력 부족에도 기인하겠지만 이 글의 테마, 즉 '지방대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이란 테마 자체가 지방대생이 갖는 의식과 살아가는 삶을 자기 고백적으로 쓸 수밖에 없는 테마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써 가면서 청탁한 이를 맘속으로 '이 따위 주제를 나한테 주다니, 나쁜 놈!'이라고 욕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공부 못해서 지방대 다니는 것도 서러운데 그걸 얼굴도 모르는 독자 앞에 드러내 놓으라는 요구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래서 글은 거의 열 받았던 기억을 반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지금이라도 이 글이 무가치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독자들은 즉각 다음 글로 뛰어넘길 바란다.


go margin 

아무도 우리의 입학을 축하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모님의 기대와 성적, 가정형편 등과의 불만족스러운 타협에 불과했다. 엄청난 양의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고서 들어온 학교는 기대에 비해 형편없었지만, 재수, 삼수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나마 다행스러워 했을 뿐이었다. 지방대가 한국 자본의 교육-노동시장에서 하위 관리자를 생산하는 부위라는 사실을 우린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후진 학교일 뿐이야', '열심히 살면 뭔가 되겠지'라고 위안하면서 계층상승의 욕망을 요체로 하는 향학열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대학은 이미 수직서열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대학의 서열은 큰 이변이 없는 한 평생에 걸쳐 내 삶에 확대재생산되어 투영될 것이었다. 이 사실이 너무 끔찍스러워 재수를 하거나 편입학을 감행해 보지만, 이는 결국 계층상승 욕망을 더욱 깊숙이 내면화시키고 자본의 질서가 갖는 힘을 절대화시키는 데로 귀착된다.

그러다가 우리 삶에 큰 이변이 생겼다. 재수 없게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 큰 이변은 서열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국 CIA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의 제6계층인 직업적 운동권 계층으로 추락할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한국 학생운동은 직업적 운동가를 양산하는 주요 시스템이다. 80년대 그 치열했던 운동의 역사 속에서 배출된 무수한 학생운동가들이 생을 바쳐 지금의 대중운동을 일구어냈다. 그런데 이 대중운동의 시대에도 '공부도 못하는 게 데모질이야!'라는 말로 대변되는 의식이 우리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지방대 학생운동가들에게 열등감을 갖게 만드는 첫 번째 계기는 운동 바깥에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대학의 서열이다. 운동의 깊이가 더해갈수록 열등감의 계기와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지방대 학생운동가는 학생운동사를 읽으며 비애를 느낀다. 70년대와 80년대의 학생운동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울대운동사였고 90년대 운동은 전대협-한총련 운동의 역사였다. 무림-학림 논쟁이, MT-MC 논쟁이 과연 지방의 대학들에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다. 아니 영향받을 학생운동의 주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겠다. 학생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던 87년 이후라고 하더라도 전대협-한총련을 주도하는 학교는 서울의 학교들과 지방의 메이저 캠퍼스들이었다. 마치 구한말에 족보 산 집안이 그렇듯이 자기 학교의 학생운동사를 공부해 보려고 해도 어느 시기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는다. 전국적 흐름에서 영향을 받아 발생했을 뿐, 자기 운동의 역사가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있었다손 치더라도 전국적 흐름을 선도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심화되는 열등감은 캠퍼스 바깥으로 나가 지역 연대질서를 일구어가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결정타를 맞는다. 필자의 지역 연대운동체 회의에서 우리 지역 메이저 캠퍼스는 지역 학생운동에 소극적으로 임하면서도 헤게모니를 잃을 것 같으면 매우 분파적인 발언을 해가면서 '메이저 캠에 걸맞게 대우해줄 것을 은근히 그러나 강력하게' 주장하곤 한다. 그렇다고 그 학교 대오가 수가 많다거나 주도적으로 일을 펼쳐왔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함께 집회를 치러 내고선 갑자기 분담금을 못내겠다는 등 땡깡을 피우기도 하고, 연대운동체의 일정에 함께 할 수 없다면서 공연히 어깃장을 놓는 등의 힘빼기 전술을 구사하며 은근히 자기 캠퍼스의 서열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방대 집단 안에까지 존재하는 운동의 서열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운동은 그 모든 억압적 질서로부터의 해방되는 과정이다'라는 진술을 의심케 만든다. 필자에게 쌓이는 스트레스의 정체는 기실 운동 가운데에조차 일, 이, 삼류대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도 캠퍼스로 돌아오면 우린 여전히 캠 운동을 담당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활동가이고, 후배들에게는 절대적 존경을 받는 선배이기에 죽으나 사나 당면한 사안에 대처하기 위해 골머리 싸안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역과 캠운동이 갖는 협소함과 일천함은 또 한 번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수공업적이고 부실한 학습풍토를 개선해 보려고 연세대에서 제기됐던 제2대학 자료를 뒤적여보기도 하고, 고려대 생활도서관 회보를 펴보기도 하지만 입맛만 다시다가 덮곤 한다. 그런 사업을 꾸릴 주체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용도가 낮을 것이 뻔하기에 '냉면 개시' 깃발을 내걸고 싶은 맘은 굴뚝 같지만 채산성 때문에 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답답함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단대신문들도 발행되고 교지도 여러 개인 학교나 총학생회 기관지가 우리 학교 교지보다 더 화려하게 나오는 학교를 볼 때, 또 한 학교 학생들이 돈 받고 파는 책을 만드는 『학회평론』을 볼 때도 '없는 자궁'과 '없는 아가미'가 답답한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지방대 학생운동 출신들은 또 어떻게 살아갈까? 가끔씩 찾아오는 선배들을 만나면 지방대 출신이 살아가는 모습과 운동권 출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심하게 비틀린 채 결합된 군상들을 보게 된다. 운동권의 덕목에 전문성이란 것이 추가된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 캠에서 자질과 적성, 전공을 살리는 선배를 본 적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30세가 넘기 전에 자리잡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의 운동적 전망을 사회에 나가서 선명하게 주도적으로 풀어내는 서울대 출신을 볼 때 왠지 그 이면에 우리 캠 선배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가끔 운동을 하다가 변절했다는 서울대 사람 얘기를 들을 때면, '서울대 놈들이 다 그렇지'라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냉소적인 말들을 뱉어 버리곤 한다. 사실, 변절의 기회조차 지방대생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난 직업적 운동이나 삶의 현장에서의 운동을 포기하고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에 취직해 소시민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우리 선배들이 과연 변절했는가 의문을 품곤 한다. 적어도 변절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포기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출세를 의미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 '변절'이라는 주홍글씨가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특별히 비운동권에 대하여

'특별히' 비운동권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이유는 97년 학생회선거를 통해 전국적으로 30여 개 대학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의 엄청난 약진 앞에서 경악하기보다는 '96년 연세대사태로 인한 학우들의 일시적 이반'이라고 위안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다만 96년 학생운동탄압(특히 NL에 대한)이 전면화되었던 정세 속에서 비운동권 집단이 효율적으로 정세대응을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들이 운동세력에 비해 조직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무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지방대에서의 비운동권 집단의 양태를 보면, 이들 집단이 8∼90년대를 지나면서 끈질기게 살아 남아 성장한 유일한 세력임을 입증한다. 따라서 97년 한 해만의 현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더구나 학생운동세력과 학생대중의 적대적 관계가 조장되고 안착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비운동권은 기존 운동세력에게 혁신에의 과제를 더 이상 방기할 수 없음을 '실천적으로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97년 4월, 광주 전남대에서 열린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호남대학교 교지편집위는 총학생회가 앞장서서 교지편집위를 탄압한 사실을 폭로했다. 한총련 대의원들은 그 대자보 앞에서 모두 공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학생회장이 교지편집위 편집장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며 해산을 명령하는 일이 어디 있을 법한 일인가? 또 올해 어느 지방대에서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앞장서서 대학노조 사무실에 쳐들어가 테러와 폭력을 행사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 이러한 사건들은 지방대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주 드문 사례들은 아니다. 90년대를 지나면서 지방대에서 비운동권이 당선되는 경우가 점차 빈도를 더하더니 급기야 97년에는 한총련 탈퇴 선언이 줄을 이었다. 이런 학교에서 운동권 세력과 비운동권 집단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지방대에서 비운동권이 광범위하게 당선될 수 있는 조건은 지방대 학생대중의 의식의 후진성에 있지 않다. 대학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이나 광역시와는 달리, 학우대중의 상당수가 그 지역 출신인 시, 군 지역 학교는 동문회를 중심으로 지역세가 발호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된다. 한, 두 고등학교 출신 동문세력 또는 연합동문 형식으로 묶여 있는 이들은 비운동권을 넘어서 반(反)운동권으로서의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단대 및 자치기구, 총학생회에 후보를 조직적으로 출마시킨다. 이들은 거의 모든 과에 골고루 흩어져 있어 선거에서는 위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또한 나름의 재생산구조를 갖추고 끊임없이 '활동가'(!)들을 충원 받는다. 이들은 학생운동이 대중화되었던 87년 이후에는 학생운동세력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학생운동과 학생들의 관계가 유리되는 것을 넘어서 적대적 관계로까지 악화되고 있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자신들의 이념적 입장을 반운동권으로 선명하게 표방했다.

그러나 이들이 반운동권 깃발을 일관성 있게 내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백색 세력의 주동력은 학생회비와 졸업 이후의 진로 보장이다. 따라서 캠퍼스 내에서의 역관계에 따라서는 운동권 세력과 일정 지분의 양보를 전제로 한시적으로 연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독자적으로 또는 비운동권 집단들의 연합 형식으로 출마한다. 이들의 학생회 사업 작풍은 막대한 학생회비를 갖고서도 제대로 된 사업 하나 추진하지 않은 채 1년을 넘겨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며, 각종 비리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또 1년 사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합으로 학생회를 잡은 각 블럭간의 내부갈등으로 집행부가 분열되어 쪼개지기도 한다. 이들의 행태가 폭로되어 탄핵, 사퇴까지 이어지더라도 다시 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비운동권 구도로 쟁점을 형성하면서 학우들의 표를 긁어간다. 또 선거 운동은 1년 동안 축적된 학생회비를 갖고 과학생회장 등을 술판으로 몰아 가는 조직선거 전술을 구사한다. 이들 중 수뇌부는 졸업 이후 학교측에 의해 취직을 보장 받거나, 일부 종교집단이나 지역 관공서에서 '모셔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지역세력은 또한 학교 밖의 조직폭력배와 연계하기도 한다. 강원도 지방이 타 지역보다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생회 선거에 지역의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협박, 테러 등을 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 가두시위 등의 계획이 있을 때에는 이들과 경찰이나 지역의 조직폭력배들과 함께 미리 입수한 가두시위 장소에 진을 치고 있어 시위 계획을 수포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비운동권 집단이 광범위하게 지방대 캠퍼스를 장악할 수 있는 이유는 대학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90년대 끝물의 대학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금의 대학은 과연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까지 다닐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만큼 그 사회적 위상이 추락했고, 대학인의 '교육'은 고사하고 '관리'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대학은 개인을 훈련시켜 노동시장으로 배출하는 '양성소'에도 못미치는 '대기소'로서 밖에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은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국한지어지고 그 책임 또한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진다.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이들에게 그 어떤 울타리가 공통의 질서와 이념적 지향을 갖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학생회는 관성화된 사업 사이클과 폐쇄적 구조로 대중과 점점 유리되면서 결합 고리를 잃어가고 있으며, 게다가 학생 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테마도, 정책도 부재한 상태이다. 정치조직에서는 저항의 주체를 형성하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저항주체 형성의 프로젝트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제출된 생활도서관이나 제2대학, 반대학 같은 사업들은 이벤트화되면서 학생회의 반짝 사업, 공약으로 변질되었다.

대중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슬로건이 민망할 만큼 대중을 전취해내지 못하는 현 지방대 학생운동의 널럴한 정세대응력은 학생대중으로 하여금 학생운동을 공격의 제1대상으로 지목하는 비운동권 집단에게 표를 몰아주게 하는 요인이 된다. 어쩌면 지방대 학생대중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한 테마는 비운동권, 반운동권이라는 자기 선언일 지도 모른다. 더구나 96년 연세대사태처럼 정권의 물리적-이데올로기적 탄압이 가중된 시기에는 더욱더 수월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운동의 대중적 외연의 상실과 지방 중소도시의 동문회 집단의 존재, 그것이 비운동권 이익집단이 독버섯처럼 피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go center

97년 한총련 대의원대회 의장선거에는 좌파에서 두 정파가 후보를 냈다. 그 논의 과정에서 한 후보자는 전국 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한 지역의 좌파 학생운동을 무당파적이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여 회의 분위기를 격렬하게 만들었다. 결국 휴회 끝에 후보자가 사과를 하고, 지역 수임자가 사과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회의는 속개되었다. 그렇지만 그 얘기를 들은 지역 활동가들은 모두 씁쓸해 하였다. 지역 활동가들이 씁쓸해 했던 이유는 '정파적 목마름'에 있었다.

원전 속의 당파성은 적대적 계급 가운데 편들기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후보자가 말했던 당파성은 정파적 실천을 갖느냐 안 갖느냐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한다. 보다 세밀하게는 정파운동의 부재 가운데 대중추수적이고 다만 현실에의 안티적 조응으로 일관하는 그 지역 학생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씁쓸해했던 그 지역 운동가들은 캠 운동에서 정파적 관점에 매우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지역 활동가들 상당수는 정파적 실천에 목말라 한다. 한 활동가는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전제하면서 서울의 운동이 그 지역의 운동보다 10년은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지역 수준으로만 상승되어도 지역의 분위기는 일신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활동가가 말하는 '수준' 역시도 거의 지역의 정파적 활동에 있어 10년 뒤쳐져 있다는 것일 뿐이다. 운동 수준의 이러한 단순비교는, 특히나 정파적 활동을 기준으로 일괄적으로 운동을 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매우 싱거운 결론이겠지만 지역 학생운동은 자기 캠퍼스 현실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 긍정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령 그 자기 긍정성이란 이런 거다. 서울의 정파운동은 자신이 갖고 있는 분파적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상당수 개방했지만 그 정치조직 중앙이 보이고 있는 극심한 파벌싸움을 보면 그와는 일정한 간극을 유지하고 있는 지방대 풍토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건강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상대적 건강성은 자기 대오를 유지해가는 기풍의 문제이다. 한국 학생운동을 학생회운동, 나아가 한총련운동으로 치환해서 사고하는 우파 운동도, 은연중에 학생운동을 정파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좌파운동의 시각도 문제다. 지리한 조직, 사상논쟁의 과정에서 깨져 나가고 있는 운동 대오의 문제를 일정 정도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학생운동의 대중적 외연을 어떤 관점을 갖고 어떤 조직과 저항의 방식으로 전취해낼 것인가이다. 대중의 표정을 읽어내야 한다는 상투적인 결론밖에 얘기 못하는 것은 필자의 한계겠지만, 그 대중의 표정을 연상하는데 있어 도움을 주고자 몇몇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6,000명이 넘는 학우들이 참여한 학생총회를 성사시켜 내고 대학교육개혁투쟁에 힘있게 들어간 97년 4월의 인하대학교 사례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대학 사회에서 아직도 학생회라는 기구를 통한 대중적 결집이 가능하다는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회를 뛰어넘는 대중자치기구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인하대의 학생회들이 어떻게 대중을 그렇게 조직할 수 있었을까? 엉뚱하지만 굴업도 핵 폐기물처리장 문제로 인천지역 학생운동의 대중동원력과 결합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한다. 인천지역 학생운동은 서울 출신 학우들이 많은 관계로 지역의 사안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어려운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처럼 전국적 이슈가 되는 사안을 갖고 대중과 적절하게 결합했던 결과 캠 내 운동의 지반과 대중적 외연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각 캠퍼스의 현실에 천착하고 대중의 표정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은 상투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여전히 거머쥐어야 하는 원칙인 것이다. 92년 경부고속전철의 경주통과안에 반대해 벌어진 동국대 경주캠퍼스의 대중적 투쟁, 96년 대구 승당마을 철거투쟁에의 지역 학생운동의 결합, 96년 합천 해인사 골프장 건설문제에서의 불교학생회의 투쟁 등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총련 주류가 캠별, 지역별로 총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96년 8월 연세대사태에서 입었던 타격을 딛고 실천동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또 한편, 96년 시화호 무단방류사건, 여천공단 환경오염 문제 등에 대한 학생운동 진영의 무감성은 안타까운 사례에 속할 것이다.

97년, 서울의 도심개발 계획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시작된 빈민주택가의 철거와 서울 재정비는 일단락 지어지고 이제 광범위한 개발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선진복지통일한국이라는 목표 하에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중심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문제는 대부분 빈민주택가 재개발, 철도, 원자력 발전소, 도시개발계획 등이 이슈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개발은 민중생존권을 철저히 유린하면서 모든 민중에게 환경 오염으로 인한 고통과 비용을 떠 안기게 된다. 또한 이것은 비단 해당 주민들만의 문제로 국한되지도 않는다.

지방대 학생운동은 이러한 이슈와의 광범위한 연대를 구축하는 가운데, 학생대중의 참여와 결집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그 가운데 반자본의 관점으로 각이한 사안들을 정세적으로 바라보고, 학생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할 때 최대한으로 대중과의 접촉 지형이 확장될 것이다.


Log out  ; 모든 변방은 중심이다.

대학을 입학하면서부터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지방대 학생운동가들. 그들이 운동을 해나가면서 '단지 지방대를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절망하고 체념해 버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필자 자신도 혹여나 그러하지 않는가 반문하면서 우리의 희망은 어디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현실의 문제로부터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임하는 것, 그것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는 길이라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싶다. 아니 '모든 변방은 중심이다'라고 말해두고 싶다. 이러한 언급이 힘을 가진 언설이기 위하여 보다 각론화된 검토가 풍성하게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 일반적인 풀이법만을 제시하는 건 힘빼기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 글에서 누락되어 있는 서울 소재 대학의 제2캠퍼스 문제가 그런 경우다. 학생들은 독립채산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립학교법이 걸림돌이 된다. 제2캠퍼스 간의 연계를 통해 법적 소송까지 불사하지 않는 한 이들 학교의 문제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제2캠퍼스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지방대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들과 싸워나가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이곳, 변방을 중심으로 가져갈 수 있는 길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변방인가? 중심인가? 아니 이 우문을 폐기하자. 그저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을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고만 얘기해 두자. 'X'  또는 'bye' 를 치기 이전에 접속 종료 직후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구상하라.

"안녕히 가십시오.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학 / 회 / 평 / 론 /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06/07 20:25
한겨레의 문화 일반 코너에서 연재했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기획을 옮겨온다. 나는 당연하게도, 박정수씨 보다는 이현우씨와 이성민씨에 가까운 편.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9298.html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헤겔과 라캉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르크스·대중문화 이론적 틀까지
매혹과 혐오의 시선 동시에 받는
21세기 세계철학계의 이단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시대 넘나드는 철학적 재담으로
오늘날 이념적 지형·돌파구 찾아
‘독창성·진정성 없다’ 비판 불구
열정과 광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이현우/서울대 강사

[namunnib] 뭐 일단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사회운동"이 "'혁명 없는 혁명'" 내지는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은 운동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가 신사회운동의 대표적 주자인 것인양 명명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모든 운동들에도 개별성을 넘어서 "사회적 총체성"을 고려하는, 혹은 '보편성'을 고려하는 움직임들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신사회운동"이라 칭해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속성'들은, 그 어떤 '-이즘'에도 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것과 싸우고 그것과 구별하려는 움직임은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에서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을 터. 또한 소위 '개별' 운동들이 총체성과 아무련 연관이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같지'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초월'하고 '총체성'을 고려하고 어떻게 '보편성'에 이를 것인가. 그렇게 하려는 건 누구의 욕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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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0673.html


현실 비판할 뿐 대안찾기엔 침묵

② 실천 없는 철학

이현우씨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 면에서 ‘괴물’ 같은 철학자라 해도 그의 사유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 기여의 실체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결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게 박정수씨의 생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성민씨가 지젝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안수찬 기자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한 문장 속에 지젝의 비판 철학이 지닌 가치와 한계가 담겨 있다.

지젝은 헤겔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 좌파이다. 헤겔 좌파로서 지젝은 물신주의적 믿음 위에 세워진 현실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지만 정작 어떻게 그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모든 철학이 일상의 현실은 생각만큼 확고하게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연기론은 만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가르치고,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의 물질적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젝은 신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믿는 주체(인간)의 상상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방법을 따른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

신경증 환자의 실재인 ‘외상’도 마찬가지다. 외상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을 객관적 실재로 믿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속에서 객체화된 외상을 주체 자신의 창조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객관성의 형식으로 환자를 괴롭히던 외상이 주체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환자는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외상의 환상성을 깨달아도 신경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비도의 체질을 바꾸거나 대안적인 인간관계를 찾지 못하는 한, 증상은 괴롭지만 살아갈 의미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면 신앙생활은 지속되고,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 의사와 능력이 없으면 민족주의는 지속된다. 화폐의 물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걸 알아도 대안적인 교환 방법을 찾지 못하면 화폐 물신주의는 계속되며,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도 자본 권력을 대체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할 욕망과 능력이 없으면 자본가에게 좀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은 자유로운 연합체를 구성하는 욕망들과 그 욕망들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가능하다. 신ㆍ민족ㆍ자본이라는 초월적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의 욕망이 구성하는 공통적(commune) 삶의 형식, 그것이 마르크스가 기획한 코뮨주의다. 그런 코뮨적 욕망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해 노예가 되는 사회를 당연하다거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환상 숭배자들에게만 안 보일 뿐 우리의 삶 속에 실재적으로 잠재해 있다.

현실의 비실재성 폭로하면서
어떻게 벗어날까 언급 적어
인간은 서로에 대한 ‘타자’일 뿐
코뮨적 삶 불가능하다 주장도


지젝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이런 코뮨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에게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는 인간을 자연(사물, 신체)과 분리시키고,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고, 낱낱이 떨어진 개별 인간들로 분리시킨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미지의 타자로 존재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형식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유롭다고 한다. 아무도 타자의 욕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타자의 욕망은 배려의 대상일 뿐 아니라 유일한 가치척도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참아라’거나 ‘즐겨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할 뿐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척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시장 민주주의적인 가치척도를 위해 딱 하나 금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을 배려하지도 않고, 타자의 욕망을 척도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수’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것,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 경제가 대중을 일반적 노예로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지젝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넘어선 세계 질서를 언급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이 기획은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을 승인하면서 시작된다. 홉스가 말한 ‘국가’라는 괴물. 지젝은 프로이트의 문명론에 내재한 홉스주의를 충실히 반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은 ‘법’과 ‘초자아’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욕망을 억압하는 법과 억압을 욕망하는 초자아가 없으면 인간 무리는 욕망의 충족을 향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젝 역시 상징적 질서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미지의 타자이며, 평화로운 이웃들의 이면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이 욕망의 시장 체제를 초극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 주체 형식으로서의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모든 작은 타자들을 하나의 총체적 집합으로 통합하는 예외적 큰타자, 곧 헤겔의 입헌군주와 모든 작은 괴물들의 욕망을 중화시키는 보편적 욕망의 괴물, 곧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솔직히, 지젝의 기획이 정말 이걸까 의심했는데, 이현우씨의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욕망의 자유민주주의 벗어난
헤겔·레닌 결합한 제국 기획
‘헤겔 좌파’인지 ‘우파’인지 모호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불투명


헤겔의 입헌군주가 정말 ‘텅 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남아 있을까?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의 관료집단들이 정말 ‘비계급’으로서의 보편계급을 대변할까? ‘지젝의’ 레닌주의에 따라붙을 이런 의문들은 사실 본질적인 게 아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젝의 말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실천은 가짜 행위다. 실천의 근거는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예견에서 찾을 수 없다. 혁명의 실천은 전대미답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근거는 그로 인해 창조되는 세계가 좋은 세계라는 자기 확신뿐이다. 지젝은 정말 그걸 확신하고 있을까?

지젝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타자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그래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물어보게 만들지만) 그런 만큼 자유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자유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그래서 텅 빈 상징으로 존재하는 주인에 의존할 때만 자유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의 상징적 주인 밑에서 보편적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때 지젝은 더는 지배적 현실의 환상성을 비판하는 헤겔 좌파가 아니라, 유일한 지배자의 환상으로 수립된 현실을 추구하는 헤겔 우파의 자리에 선다. 그것도 좋다. 좌파든 우파든 중요한 건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삶을 창안하고 싶은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가? 지젝의 흥미진진한 비판의 뒷맛으로 그가 욕망하는 삶을 느끼고 싶다. 무리인가?

박정수 / 수유+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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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 안수찬 기자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정치·경제체제 변화보다
개인 향유 방식의 변화가 더 시급
“문명의 모든 것을 재발명하라”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 아닌
혁명 가능성의 조건 탐색할 뿐
지젝의 ‘정치적 기획’ 주장은 오독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6/04 12:06

어제 이런 저런 일로 지하철을 오고 가면서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그로테스크한 글귀를 보았다. <2010년 세계 디자인수도 서울>이라고 최근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게 있는데, 거기 앞에 붙어 있는 글귀였다
 
"시민고객과 함께 만들어가겠습니다."
시민고객... 시민고객... 시민고객... 시민고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최근 오픈한 상담 콜센터 <다산120>인지 뭔지 앞에도 역시 시민'고객'이라는 말이 붙어있다. -_-;

신자유주의의 승리와 자본주의적 마인드의 '자연화'와 '일상화'가, 학계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전 영역에 뻗쳐나가고 있다는 점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나, 이렇게 공공 기관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틀을 가져다 쓸 줄은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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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늘날의 '시민'이, 민주주의적 주체로서 권리를 가진 시민 내지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니라, 정말 '시민고객'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이제 '시민고객'으로서의 권리란 전통적인 정치 담론이 늘 가정해 왔던 추상적인 담론, 즉 인권 등의 자연법적 원리에 의해서 구성될 틈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아주 '명시적'인 '계약'에 의해서('사회계약론'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권리와 의무가 구성되고 실천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명시적인 계약은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다. 추상적인 '법'이라기 보다는 현실에 아주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법'은 추상과 공백의 위치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서로 다른 가치와 입장들의 헤게모니 투쟁에 의해 결정되고 생산되고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곁에 있지만 한편으로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 영속적으로 소속된 것이 아니다. 즉, '법'은 '정치'의 영역이다. 하지만 '법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이미 지키기로 계약을 맺었음을 전제한다. '법률'은 오직 적용과 집행의 영역일 뿐이다. 즉, '법률'은 '행정'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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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흐름의 하나는 바로 한국 사회가 미국적인, 너무나도 미국적인 '소송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회적 갈등은 <법원>을 통해서 '해결'된다. 또한 한국 사회의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주체는 (마치 중세의 최고위 종교 재판소와 흡사한) <헌법재판소>가 되었다. 예전의 탄핵정국과 이번의 쇠고기 정국도 그런 흐름이고.

이제 사람들은 '소송'을 통해 옮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정치와 윤리의 문제를 '법률'에 위탁하게 된다. 아주 일상적인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서로가 합의와 토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들의 '계약'에 따라, '합리적'으로, '법률'의 말씀에 의거하여 또한 '판사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판단'하는'게 아니라) 판단 '되'어야 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만 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시민고객'이라는 말이 가능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국가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아 그것에 항의할 수밖에 없을때, '시민고객'들은 거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행정소송을 통해 그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만약 '법률'에 '구제책'이 없다면? 그냥 무력하게 계약을 지키며 '고객'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 '법률'을 강행돌파 하려는 순간 계약 위반이 되고, '불법'이 되며, '준법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전경의 검은 몽둥이와 방패가 내리 꽂힐 테니 말이다. 그 대신 '시민고객'들은 <소비자보호원>같은 기관에 하소연하고 자비와 관심을 베풀어 줄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꼭 <인권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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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고객'들의 세상은 얼마나 비참하고 처연한가. '68혁명 정신'이, 68 이후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이 되었다는 분석은 역시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86년 정신'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정신의 핵심이 되었다는 분석도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역시 유효하다. 탈중심과 탈권위 정신은 기존 자본주의의 맹점을 완벽히 메이크-업 해주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재 '소송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한 것 같다.

여전히 전문가적 권위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여전히 우리는 전문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법률전문가, 경제전문가, 의학전문가 등등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 전문가들은 기존의 '권위'를 갖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상품을 제공하는 충실한 '상인'들이 되었고, 우리는 그들의 충실한 '고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과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있다. 늘 미소짓고 서로를 대한다.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한, 우리는 서로 얼굴 붉힐일도 없다. 복잡하지도 않다. 그냥 돈을 지불한다음 모든 권리를 위임해서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비참함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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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촛불 집회가 한창이다. 그런데 집회를 자꾸 나가면서, 과연 이것이 '시민'들의 '정치적'인 집회인지, 아니면 '시민고객(내지는 소비자)'들이 '뿔'나서 뛰쳐나온 것에 불과한지 확신을 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명 정치적 집회라고 생각했건만,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면서 과연 내가 처음에 생각한게 맞기는 한건지 의심하게 되었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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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울시가 '시민고객'을 내세운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지방 도시들이 자기 지역을 상품화하고 '고객'들을 유치하려고 노력했던 건 비교적 오래된 일이다. 특히 제주도가 두드러지는데, 뭐 다른 지역들이라고 크게 다를게 없다. 서울시에서는 군수 내지는 시장들이 양복을 입고 나와서 지역 특산품을 배경으로 깔고 광고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사회적인 것'이 점차 붕괴하고 새로운 논리가 그것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비스'제공자. 고객. 자본. 사용료. 투자와 이익. 미소. 원칙. 합리성.


덧)

본인 매스컴 탔음-_- (한겨레) 진짜 불쌍한 표정이다 ㅋㅋㅋㅋ (ㅠ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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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8/05/25 17:01
지난 밤을 잊지 않기 위한 사진들. 젠장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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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한겨레 영상.



민중의소리 영상 링크

http://www.voiceofpeople.org/A00000207435.html

이건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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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4/25 21:56

Terry Eagleton. The Idea of Culture. Oxford: Blackwell, 2002. 14-5. 의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삶의 모든 형식들은, 그것이 반대하는 사람들(dissident)[*]이나 소수자 그룹의 것일 경우에는 찬미할 만한 것이 되지만, 반면 다수의 것일 경우에는 응징되어야만 할 것이 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의 정치학'은 레즈비어니즘은 포함하지만 내셔널리즘은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포스트모던한 급진주의자들에 반대되는 낭만주의적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완전히(wholly) 비논리적인 운동이다. [이글턴은 앞에서 낭만주의 혁명기와 20세기 혁명기를 비교 했음] 정치적 혁명기를 살아왔던 낭만주의적 급진주의자 진영은, 다수의 운동이나 합의가 언제나 무지몽매하다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반면, 나중에 번창하였으며 같은 역사 속에서 덜 행복했던 국면을 거친 포스트모던한 급진주의자 진영은 급진적인 대중 운동의 신념을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소중한 운동들을 거의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이론적으로 봤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위대한 20세기 중반의 국가 독립 운동의 이후에 나타났으며, 이는 마치 지진처럼 터져나왔던 정치적인 대 격변을 기억하기에는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너무나도 어리다/미숙하다.

[*] dissident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에 강하게 동의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 특히 이러한 종류의 행동이 이 사람을 위험으로 몰고갈 수 있는 나라에서."이다.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하지^^;


가끔씩 이글턴의 책을 읽을 때 "교양주의자"라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렇게 글을 쓸 줄은 몰랐는걸(번역 안된 원서로는 처음 접하는데). 사실 그의 책을 보면 단어도 쉬운 단어를 쓰지 않는 편이라, 단어의 수준만 보면 정말 '교육 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될 때가 많다.. 어쨌거나 사실 이 부분을 읽고서는 좀 불쾌해 졌다. 특히 "미숙하다(young)"는 표현에서는. 정말 "교양주의자" + "어르신"스럽다.

정말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어쨌다는걸까? 사실 정체성의 정치학에 관심을 보이거나 하는 사람이, 테리 이글턴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할 듯한 '계급 투쟁'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에 관심을 갖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물론 실제적인 행위나 운동의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될텐데. 또한 '이론적인' 정체성의 정치학들은 사실상 맑스주의에도 큰 빚을 지고 있다. 이글턴은 상당히 LGBTQ 운동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알고(만) 있는 LGBTQ 액티비스트들은 반전 집회에도 나가고, 대운하 반대도 하고, 자본주의에도 열심히 반대하더라(물론 다 그런 건 아니야...). 게다가 고기를 잘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흥, 전통 맑시스트들 보다는 훨씬 아름답지 않은감?

대체 이글턴은 누굴 보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마 구체적인 대상이 없을 것 같다.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러고보니, 며칠 전 대강 훑어보았던 Geraldine Harris의 Beyond Representation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생각을 본 적이 있다. Harris는 포스트모던 정치학을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정치학, 혹은 친-자본주의적 정치학으로 박음질 한다. 확실히 포스트모던이 '욕'이긴 '욕'으로 취급되는구나...;


덧) 확실히 나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런 논의들을 보면 갈수록 혼란만 더해간다. 며칠 전에 Oxford 대학에서 나오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총서 중에 <Racism>, <Postmodernism>, <Poststructualism>, <Ideology>, <Postcolonialism> 5권을 주문 했는데, 요 책들이 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기본 어휘들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 시리즈는, 조나단 컬러의 <Literary Theory>가 괜찮게 읽히길래(이건 동문선에서 나온 번역본으로 구했음) 다른 책들도 주문했는데, 제법 괜찮은 총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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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2/14 22:37

얼마 전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저서 <대처리즘의 문화정치(원판은 Stuart Hall, The Hard Road to Renewal: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 London: Verso)>가 출간되었다기에 리뷰를 옮겨 두고 짤막한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일단 리뷰부터.


한국일보(08.02.11) 이왕구 기자(원본) [강조는 namunnib]

노동자·농민·88만원 세대는 왜 좌파를 등졌을까
좌파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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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중소자영업자, 노동자와 농민, 88만원 세대들…. 좌파진영에 표를 던져야 할 이들은 왜 보수정권의 등장을 염원했을까?

이명박 후보의 압승으로 귀결된 지난 대선은 좌파진영에 심각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성별, 지역, 세대를 가리지 않고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투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 노동당 정권의 경제실정을 비판하며 장기집권(1979~1990)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의 출현을 연상하게 한다. 대처의 성공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경제드라이브의 성공 때문이었을까?

최근 발간된 영국의 좌파 문화 이론가인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서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발행)는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대처리즘의 성공요인을 들여다본다.

경제정책의 성공 뿐 아니라 대중의 도덕적 복고주의를 자극함으로써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전통적 계급장벽을 뛰어넘은 이 같은 성공을 저자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대처는 탈학교화, 관용적 교육 등이 떠받들여지던 학교현장에 높은 교육수준의 회복과 권위의 수호 같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했고, 권위와 사회적 가치의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필요하다면 도덕적, 법적 무력을 정상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부과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대중들에게 전파시켰다.

좌파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헤픈 국가가 벌지도 못하는 부를 함부로 써버리고 일반인들의 자립을 해친다”는 담론으로 대항했다.

또한 복지정책의 수혜자를 사회가 주는 혜택으로 살아가며 제 몫의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자신들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치환해 인종주의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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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런 도덕적 리더십을 포기한 좌파정당은 정책의 유효성과는 별개로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더 타임스> <선> <이코노미스트> 같은 대중매체들의 도덕주의 전파도 대처리즘의 성공에 한몫을 했다.

그렇다면 좌파들이 대처리즘의 성공에서 배워야 할 점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계급정치에서 탈피해 문화적 주제에 주목해 대중을 블록화하는 방식으로 지지를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역자인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홀은 1980년대의 영국사회라는 특수한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분석은 시공간차이를 넘어서 문화의 정치성을 주목하게 한다”며 “진보 역시 전통적 지지자를 결집하기 보다는 이른바 전통적인 진보세력 속에 내재한 보수적 요소(인종주의, 가부장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성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정체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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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가 집권하던 1980년 이후 약 11년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왠지 귀가 솔깃해지는 분석이란 생각이다.

기사에서 기자가 말하고도 있는, 지난 대선 때 많은 이들이 "제 계급을 배반했다"는 식의 분석은 정말이지, 온당치 않다. 즉 한 유명한 '어르신'의 말마따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으로 분석하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88만원 세대, 노동자, 농민은 반드시 민노당이나 사회당에 투표를 해야 했나? 대체 무슨 근거로? 만약 그 당들에 투표를 했으면 제 '계급'에 알맞은 투표를 한 것인가? 이 두 당이 언제부터 그들을 대표했는가? 홀의 신랄한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오, 500만 실업자가 모두 민노당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대는 지금 어디있는가?"

영어 단어 <representation>은, <재현>이란 뜻과 <대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국 말로 번역했을 때 굉장히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두 말은, 실상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다. 맑스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참조하면(강조는 namunnib),


이들은[* 소농계급]은 거대한 대중을 이루는데, 그 성원들은 삶의 조건이 비슷하지만 서로간에 다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들의 생산방식은 이들을 상호교분하는 게 아니라 서로 고립되도록 만든다. [...] 이들은 따라서 의회를 통해서든 대표자 회의를 통해서든 자기 이름을 내걸고 자기 계급의 이해를 집행할 능력이 없다. 이들은 스스로 대변하지 못하며 대변되어야만 한다. 이들의 대표는 또한 이들의 주인, 이들 위에 군림하는 당국, 다른 계급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며 저 위에서 비와 햇빛을 내려주는 무한한 통치권력의 모습을 띠어야 한다.


무릎이 절로 쳐지는 구절이다. 맑스는 <재현>과 <대표> 사이의 어떤 균열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젝은 자신의 글 Against Human Rights에서 맑스의 글에서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도 대표와 재현 사이의 차이를 깊게 인식하지는 못하나, 스피박은 Can the Subaltern Speak? 에서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깊게 분석한다. 스피박의 분석을 참조하고 나의 해석을 곁들여 말하면, 누군가가(정치인이) 대통령이 된다고ㅡ즉 누군가가 국민의 투표를 통한 합의의 결과 국민들의 <대변자> 혹은 <대표자>가 되겠다고ㅡ나섰을 때, 그/녀는 이미 순수한 의미에서 <대표자>가 아니다. 이미 그/녀는 스스로를 <대표자>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재현>체계는 그 <대표자>를 둘러싼 의미화 과정을 좌우하는, 정치적 투쟁의 장소이다. 꼭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정당>은 물론 <대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대표>와 <재현>이 완전히 제도화 된 것 아니던가.

바로 이 순간 <representation>이 가진 두 뜻, 즉 <대표>와 <재현> 사이의 균열이 잘 나타난다. 스피박은 이를 "The complicity of Vertreten[대표] and Darstellen[재현], their identity-in-difference as the place of practiceㅡsince this complicity is precisely what Marxists must expose, as Marx does in The Eighteenth Brumaireㅡcan only be appreciated if they are not conflated by a sleight of word."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복잡한 문장을 대충 발로 한글로 옮겨 보면(어려워서 -_-;), "대표와 재현의 공모성complicity, 그리고 실천의 장소로서 대표와 재현의 차이-속의-동일성은, 단어의 속임수[representation의 애매모호함]에 의해 혼합되지 않아야만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맑스가 <브뤼메르 18일>에서 하고 있듯이 이 공모성은 정확히 맑시스트들이 반드시 폭로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와 <재현>은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또한 이 둘은 분명히 공모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이 공모성에 대해서 좌파는 폭로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서 스피박의 분석은 홀의 분석과 만날 수 있다. 홀이 보기에 대처와 보수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떤 <정치적 요인>이나 <정책적 요인>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문화적 요인>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화적 요인>이 진짜 어떤 문화 컨텐츠적 요인ㅡ즉 연극, 공연, 영화, 소설 등ㅡ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사에서도 "문화적 주제"니 어쩌고 하고 있지만, 이는 방송이나 신문 같은 언론 매체, 특히 어떤 이미지(재현)를 전파하는 데에 있어 '권위'가 있는 사회문화적 장치들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에 더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떻게 이 담론들이 유통되고 있는가, 누가 그 담론들을 유통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도 이해해야 한다. 즉 대처리즘의 집권은, '이미지'의 문제,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재현>의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라 보아야 한다. 대처와 보수당의 장기 집권은, 당시 영국의 현실을 둘러싼 재현 투쟁에서 노동당을 압승했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홀의 말을 좀 더 들어보면(제임스 프록터, <지금, 스튜어트 홀>의 책에서 재인용, 강조는 namunnib)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대처가 내세운] 각종 세목들을 믿으면서 대처주의에 표를 던진 것이 아니다. [...] 이데올로기로서 대처주의가 한 일은, 사람들의 공포, 불안, 정체성 상실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이다. 그것은 정치를 이미지로 생각하게끔 만든다. 대처주의는 우리의 집단적 환상,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영국, 사회적 상상력에 호소한다. 좌파가 '자신들의 정책'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대처 여사는 이러한 이슈들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물론 선거에서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난 대선 기간 동안 정말이지 아무런 특색도 없어 뵈고 존재감 없던 정동영 후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민노당 권영길,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역시 재현 투쟁에 있어서 2MB에게 밀려 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지난 선거 기간 동안 2MB이 이미지 게임(재현 투쟁)에서 승승장구 하는 동안, 좌파 진영은 어떠한 재현 투쟁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정책'을 공격하고 얼핏 정책 상의 우위에 선다고 해서, 대선을 둘러싼 재현 투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무심했달까. 혹은 너무 능력이 없었달까. 이를 '위대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이미지 선거"가 되었다고 개/한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60년 전 한국 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언제나 이미지의 문제와 재현의 문제는 선거와 그리고 대표의 문제와 함께 있었다. 그걸 캐치하지 못한 건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과오이다. 오바마와 힐러리 역시도 이 재현의 문제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고 있는가.

위에서 스피박은 <대표>와 <재현> 사이의 공모성을 폭로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폭로 만으로는 사실 부족할 것이다.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폭로> 되었는가. 그 <폭로>역시도 재현 투쟁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폭로 역시도 의미 체계(재현 체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신중하게 관찰하면서 수행해야하는 것이 앞으로의 정치적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재현 체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투쟁도 해야 할 것이고...

또한 지금까지의 과정을 쭉 지켜보건대, 2MB는 완전히 이슈 메이커로 잘 자리잡은 것 같다. 모든 의미들이 통용되는 그 장소를 2MB이 아주 적절히 선취해버린 것이다. 모든 이슈와 의제들은 2MB가 설정한대로 움직인다. 대운하, 영어 논쟁, 부동산 등등. 그런 논쟁들에서 국지적으로 승리한다고 해서, 앞으로 뭐가 잘 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재현의 주도권은 2MB이 쥐고 있는 거니까. 우왕좌왕 하다가 앞으로 5년이 파국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대처리즘의 사례에서 좀 더 배울 수 있는 것은, <포클랜드 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대처 정부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언하여 당선이 된 직후 약 2~3년 간 전혀 맥을 못췄다. 경제 성장율은 늘지 않았고, 경제 침체는 계속 이어졌다. 대처리즘이 이러한 정권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건, 다름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였다. 포클랜드라는 대서양에 있는 매우 조그마한 섬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없었지만, 대처 정부는 아르헨티나와 이 영토의 소유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에 따라 대처 정부는 정권을 궤도에 안정적으로 올려 놓을 수 있었다.

대처는 이 전쟁에 대해서 <경제적 이익>이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처는 이를 <도덕적 명분>으로 정당화 했다(제임스 프록터, <지금 스튜어트 홀>, p.190). 즉 사라져가는 영국성englishness, 갈수록 위기 의식이 감도는 경제 등으로 인한 대중들의 공포를 전쟁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이시키고, 자신의 도덕적 명분으로 이를 정당화하면서 대처리즘은 더욱 강력한 권위를 쥐고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지워져가는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것을 현재에 이룩할 수 있다며 달콤한 이데올로기적 미끼를 던짐으로써 대처리즘은 (부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는 위의 기사에도 등장하는 말인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도 맞물린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대중의 공포, 불안, 잃어버린 정체성"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소함으로써 대중을 움직이는 정치를 일컫는다(Ibid, p.191). 곧 출범할 2MB 정권은 어떨까? 경제위기 이데올로기가 한국을 휘어 잡은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실업 문제로 빈곤문제가 대두된지도 한참이나 흘렀다. 이미 한국 사회를 바라볼 때 불안감 없이 설명하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어딘가 대처리즘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횡행하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든다. 게다가 전문가주의, 추진력, 실용주의 등등으로 스스로를 재현하고 주류 언론 매체들이 그 재현을 뒷받침 하고 있는 2MB 인수위와 2MB은, 홀이 언급하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새롭지만 전형적인 판본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대운하>는 어떨까? 대처리즘의 <포클랜드 전쟁>과 어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대운하는 포클랜드 전쟁과 매우 다른 맥락에 있는 문제임엔 틀림없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대운하는 한국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방심해서는 안 된다. 대운하는 기필코 막아야 하지만, 동시에 2MB 정부의 포퓰리즘에도 대항할 방법들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그건 단지 정책 싸움이라거나 거리의 정치만으로 포괄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이미 그것은 기존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가 이데올로기적 <재현>의 문제의 주도권을 전혀 쥐지 못하면 어떻게 대운하는 막을 수 있더라도, 다른 중요한 일들을 막아 내기란 힘들 것이다..


덧1) 물론 대처리즘의 10여년 간의 성공의 원인을 '재현 투쟁'에서 승리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분명 당시의 어떤 정치경제학적 맥락이 있었을 것이고, 언제나 내재해 있던 자본주의의 위기 아닌 위기가(자본주의는 위기와 불안을 중요한 매개로 작동하므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수한 영국 내의 상황을 알아야겠지만, 지금 내가 알 방도는 없으니..

덧2) 최근 <숭례문 전소 사건>을 둘러싸고 (애도하는 것과는 별개로) 새롭게 민족주의가 시끄럽게 떠오르는 것 같다. 무언가에 의해, 무언가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너무 흉흉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 한데...

덧3)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썼던 좀 부끄러운 포스팅 2008/01/06 - [생각] - "반대 의견은 수렴하겠지만 운하는 건설한다"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있는 듯 하다... 좀 더 생각을 이어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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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2/09 23:43

문득 문득 생각이 나던 것인데, 어쨌든 한국에서 최근 몇 년간 증가하고 있는 '깨끗한 것'에 대한 집단 강박은 소름끼치는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핸드워시 제품 같은 항균제품의 판매량 증가, 혹은 흡연에 대한 신경증적인 거부 같은 현상들, 정리하자면 세균, 냄새, 박테리아, 추한 것, 이 모든 것들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려는 최근의 현상은, 어떤 무엇의 알레고리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깨끗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호오(好惡)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깨끗한 것에 대해 강박을 가진 사람들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더러운 것에 대해서 잠재적으로나마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세균이 득실득실하고 비위생적이며 거리의 '미관'을 해친다고 선전함으로써 노점상 철거를 정당화하는 논리도 이와 연결될 수 있다. 또한 '노인 냄새' 난다고 노인들을 실버타운 따위의 '미화된' 장소로 게토화하는 것이라든지, 심지어는 이주자들에 대해서도 더럽다는(잠재적 범죄자 취급, 피부색에 대한 혐오, 다른 냄새에 대한 거부 등)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의 차별을 다른 의미로 정당화 할 수 있게 된다ㅡ외국인에 대한 전통적인 편견을 정당화해주는 기제는 냄새였다. 더러운 것에 대한 의미망이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존재한다면, 무엇이 더러운 것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결국 사회적 의미-투쟁으로 연결될 것이다. 거기서 정치가 발생하는 것이고.

이런게 더 무서운 것은, 그냥 각 개인-자아들이 그냥 싫으면 싫다는, 아주 평범할 수 있고 사소할 수 있는 그런 이유로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엔 논리적이라거나 이성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법칙인가. 싫다는 데 뭐 어떻게 할 것인가. 더럽다는 데 뭘 어쩔 것인가. 혐오스럽다는 데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도 잘 컨트롤 할 수 없는) '신체'가 거부한다는데. 참 뻔뻔한 변명들로 느껴지지만, 이런 말들 속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차라리 예전에 "~가 정상적이잖아", "~가 당연하잖아" 하는 식으로 정당화되는 차별 의식은 공박할 수나 있었지...

게다가 오늘날엔 개인의 취향에 대해서 거의 신격화된 존중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싫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식이든 접근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제는 그런 접근들을 '폭력'이라고 의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사람들이 자아의 경계벽을 강하게 쌓여 간다는 점,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나누는 이 구분법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점, 깨끗한 것에 대한 강박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앞으로도 국민-민족국가는 이어질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파국의 시나리오 밖에 쓸 수 없다...


덧) 막상 써 놓고 나니 좀 오버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어쨌거나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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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8/02/05 10:55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 (p. 103)

전 지구적, 이데올로기적 전망들의 투쟁은 계몽된 기술관료들(경제학자들, 여론 전문가들...)과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자들의 협력에 의해 대체된다; 이익에 대한 협상 과정을 통해서, 어떤 공모가 다소간의 보편적 합의를 가장하여 이루어진다.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폐제[* foreclosing?]되어, 정치적인 것(배제된 자들이 그들에게 행해진 잘못/불공평에 항의할 수 있는 소송의 공간)은 그 후에 인종주의의 형태로 실재 속에서 되돌아온다. 어떻게 '포스트모던적 인종주의'가, 시장의 권력들과 다문화주의적 관용적 인도주의의 (합의하에 정립되는) 필요들을 공급하는 단순한 치안 대행자로의 국가의 환원에서 정치적인 것의 정치-이후적 중지의 궁극적 결과로서 나타나는가를 지각하는 것은 어렵다: 그 지위가 결코 올바르게 규제되지 않는 '외국인'은 민주주의적 정치적 투쟁의, 협상과 다문화주의적 치안 행위의 정치-이후적 절차로의 변형의 불가분의 잔여다. 제 보편적 권리를 요구하는 정치적 주체인 '노동 계급' 대신에, 한편으로는, 각자 제 문제들(수공업자들에 대한 필요의 감소 등)을 지닌 다양한 특수 사회 계급들 또는 집단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배제라는 자신의 곤경을 정치화하는데 있어 더더욱 가로막혀 있는 이주자가 있다.


아침부터 가슴을 치는 구절이어서 옮겨 둔다. 어제 읽었던 한 페미니즘 책을 보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확실히 어떤 모종의 '보편성'은 '정치적인 것'이 적실하게 가능해지는 어떤 공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여러 가지 다른 정치적 주체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물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정치를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메타-정치적'인 그 무엇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물론 어떤 '본질성'을 가정하는 것일테고, 그렇다면 "본질주의"라는 비난과 불만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억압"하려 든다는 주장이나 "파쇼"적이라는 낙인을 피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는 일정 부분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어떨까? 한국에서 비정규직, 이주자 등이 자신의 제 권리를 위해 "항의할 수 있는 소송의 공간(공간이라 해도 A시 B구 C동을 떠올리는 건 잘못일 것이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국에는 <국가인권위원회>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한가? <인권위>야말로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이 국민 국가적 행정-치안업무로 대체되는 police의 '모범사례'는 아닐까? 제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며 거리를 전유appropriation하는 것 대신에, 이제 <인권위>에 찾아가서 이제는 더더욱 불투명해진 '인권'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권위>가 '인권'을 독점적 지위에서 전유함으로써, 우리는 외려 보편적인 모종의 권리에 호소하는 기회를ㅡ다시 말해 '메타-정치'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일정 부분 박탈당한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두겠다는, 여러 가지로 갈수록 진상 부리고 있는 (뇌메모리) 용량 2mb 인수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

새벽 3시에 보호소 직원이 잠을 깨웁니다. 눈을 떴더니 건장한 사람들 서너 명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습니다. 10여 년 만에 가는 고향 땅인데, 옷도 갈아 입고 세수도 말끔하게 하고 싶은데 저자들은 우리를 이곳에 가둘 때처럼 한시라도 빨리 이 땅에서 쫓아내기 위해 우르르 달려듭니다. 아무래도 오늘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중략)

한국인들은 우리를 불쌍한 사람으로 보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정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 따뜻했던 손들을 저희는 평생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불쌍한 우리들을 서툰 한국말 속에 가두고 늘 불쌍한 이주노동자로 남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도움은 들어줘도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말들은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략)

동등한 권리를 외쳤다는 이유로, 우리도 인간으로 인권이 있다고 인간 사냥에 맞섰다는 이유로 우리는 지금 개처럼 끌려 이 땅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수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이 우리처럼 재갈이 물리고 수갑이 채워져 이 땅에서 쫓겨나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우리가 쫓겨가는 우리 빈자리를 채우겠지요. 참담한 시간입니다. 법무부 직원들은 표적으로 삼았던 우리를 보낸 것을 자축하며 히죽거립니다. 힘들 때 함께했던 많은 사람의 따뜻한 손기운과 냉혹한 수갑의 기억으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고단했던 한국에서의 노동이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애증으로 북받치는 대신 행복한 내일을 상상하며 귀향길에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까지만(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위원장, 12월 31일 강제추방당했음), 작은책 2월호, <애증의 땅, 대한민국>


가슴이 미어지는 말이다.. '까지만'씨의 말만 보더라도, 우리가 어떤 정치적 현실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발흥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종주의들에 저항하면서, 이주자의 권리와 정치(또한 '메타-정치')를 구상하는 게 절실한 시점이다. 이는 Seyla Benhabib가 말하는 "정치적 멤버쉽political membership"ㅡ즉 "외국인과 이방인, 이주자와 새로오는 사람newcomer, 난민과 망명희망자를 현존하는 정체(政體)들 속으로 편입시키는 원리와 관습"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드러낼 뿐더러, 굉장히 세심한 (집단)심리학적인 분석과 실천을 요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덧붙여, 새롭게 등장하는 인종주의는 '관용적'인 형태를 띠는 게 일반적이지만, 대체로 묵음으로 발음되는 어떤 예외 조항들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주자는 (한국 노동자들의 이익을 빼앗지 않는 한에서) 한국에서 일할 수 있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주자는 (무섭지만ㅡ따라서 특별히 감시되고 규제될 필요가 있지만) 한국인들과 동등한 인권을 지녔다". 겉으로 발화되는 것과는 달리 그 말과 동시에 묵음으로 발음되는 그 무엇이, 새로운 인종주의를 구성하는 중핵일 것이다. 심지어는 내가 봤던 글 중에는 이런 형태의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도 있었다. "인권은 가장 소중한 가치임이 맞지만, 국민들의 정서가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이주자의 수는 조절되어야 한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제대로 (모욕적인 의미에서) 파시스트 아닌가? 그럼에도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를 '좌파'라고 주장하던데, 이런 사람이야 말로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정치적으로 급박하다고 하더라도, '이주자'를 물신적인 어떤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몽주의의 유산ㅡ다시 말해 합리적인 절차와 운동을 통해 어떤 특정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절차와 운동의 대상을 마음껏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ㅡ을 경계해야 한다. '이주자'는 투명한 '이주자'가 아니다. '이주자'를 단순히 국제-정치경제학적 이슈나 지정학적 이슈로 환원해서 사고해서도 안된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하게도 젠더 문제가 끼여들며,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젠더 이해관계(gender-interest)와는 다른 법칙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한국의 여성 노동자가 이주자-여성 노동자가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할리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남성노동자가 이주자-남성 노동자와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할리 없다. 때론 한국의 여성 노동자의 젠더-이해관계 실현(도 너무나 어렵고 지난한 문제이지만...)이 이주자의 이해관계를 침해할 수 있음을 있는 힘껏 조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디아스포라'적 맥락까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언어, 정체성, 장소애(topophilia), 기억의 문제들...

또한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지금 블로그에서 이주자의 권리 운운하는 나, 는 이 사회에서 무엇인가? 하는 식의 질문들... 정치를 구상하고 새로운 주체성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투명한' 주체나 상황을 가정해서는 안된다. 모든 정치적인 것은 젠더, 인종, 장애, 지역, 언어, 종교 등 수없이 많은 규범들(결정소들)이 씨실(ㅡ)과 날실(|)로 겹쳐지는 좌표안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정치를 구성함과 동시에, 우리는 말을 건네는 법을 배우는 것, 관계를 구성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와 동시에 나를 탈구시키고 재구성하는 법을 배우는 것ㅡ다시 말해 내가 배워왔고 내가 모종에 무의식적으로 습득해온 여러 가지 것들을 적극적으로 폐기하는(unlearn) 것도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덧) 이렇게 거창한 포스팅 제목을 해놓고, 써놓은 말들은 뜬구름 잡는 말들 뿐이다. 또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들만 늘어 놓았다. 아, 모르겠다 ㅠ.ㅠ...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01/18 21:14
NY Times[20080108] 강조는 namunnib

Women Are Never Front-Runners (여성들은 절대로 선두주자가 아니다)

_Gloria Steinem


THE woman in question became a lawyer after some years as a community organizer, married a corporate lawyer and is the mother of two little girls, ages 9 and 6. Herself the daughter of a white American mother and a black African father ? in this race-conscious country, she is considered black ? she served as a state legislator for eight years, and became an inspirational voice for national unity.

If you answered no to either question, you’re not alone. Gender is probably the most restricting force in American life, whether the question is who must be in the kitchen or who could be in the White House. This country is way down the list of countries electing women and, according to one study, it polarizes gender roles more than the average democracy.

That’s why the Iowa primary was following our historical pattern of making change. Black men were given the vote a half-century before women of any race were allowed to mark a ballot, and generally have ascended to positions of power, from the military to the boardroom, before any women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obedient family members in the latter).

If the lawyer described above had been just as charismatic but named, say, Achola Obama instead of Barack Obama, her goose would have been cooked long ago. Indeed, neither she nor Hillary Clinton could have used Mr. Obama’s public style? or Bill Clinton’s either? without being considered too emotional by Washington pundits.

So why is the sex barrier not taken as seriously as the racial one? The reasons are as pervasive as the air we breathe: because sexism is still confused with nature as racism once was; because anything that affects males is seen as more serious than anything that affects “only” the female half of the human race; because children are still raised mostly by women (to put it mildly) so men especially tend to feel they are regressing to childhood when dealing with a powerful woman; because racism stereotyped black men as more “masculine” for so long that some white men find their presence to be masculinity-affirming (as long as there aren’t too many of them); and because there is still no “right” way to be a woman in public power without being considered a you-know-what.

I’m not advocating a competition for who has it toughest. The caste systems of sex and race are interdependent and can only be uprooted together. That’s why Senators Clinton and Obama have to be careful not to let a healthy debate turn into the kind of hostility that the news media love. Both will need a coalition of outsiders to win a general election. The abolition and suffrage movements progressed when united and were damaged by division; we should remember that.

I’m supporting Senator Clinton because like Senator Obama she has community organizing experience, but she also has more years in the Senate, an unprecedented eight years of on-the-job training in the White House, no masculinity to prove, the potential to tap a huge reservoir of this country’s talent by her example, and now even the courage to break the no-tears rule. I’m not opposing Mr. Obama; if he’s the nominee, I’ll volunteer. Indeed, if you look at votes during their two-year overlap in the Senate, they were the same more than 90 percent of the time. Besides, to clean up the mess left by President Bush, we may need two terms of President Clinton and two of President Obama.

But what worries me is that he is seen as unifying by his race while she is seen as divisive by her sex.

What worries me is that she is accused of “playing the gender card” when citing the old boys’ club, while he is seen as unifying by citing civil rights confrontations.

What worries me is that male Iowa voters were seen as gender-free when supporting their own, while female voters were seen as biased if they did and disloyal if they didn’t.

What worries me is that reporters ignore Mr. Obama’s dependence on the old? for instance, the frequent campaign comparisons to John F. Kennedy? while not challenging the slander that her progressive policies are part of the Washington status quo.

What worries me is that some women, perhaps especially younger ones, hope to deny or escape the sexual caste system; thus Iowa women over 50 and 60, who disproportionately supported Senator Clinton, proved once again that women are the one group that grows more radical with age.

This country can no longer afford to choose our leaders from a talent pool limited by sex, race, money, powerful fathers and paper degrees. It’s time to take equal pride in breaking all the barriers. We have to be able to say: “I’m supporting her because she’ll be a great president and because she’s a woman.”

Gloria Steinem is a co-founder of the Women’s Media Center.


Correction: January 9, 2008

An Op-Ed article yesterday about Hillary Rodham Clinton misstated Senator Edward M. Kennedy’s position on the presidential race. He has not endorsed Mrs. Clinton or any candidate.


미국 민주당 경선 소식을 좀 찾아보다가, 이 기사를 대충 읽고(잘 번역이 안 되어서 번역은 좀 하다가 포기했다^^* 매끄럽게 잘 안되길래) 마음이 무거워져서 옮겨 둔다. 오바마는 흑인이고, 힐러리는 여성인ㅡ세상에, 무려 백인 남성이 없다!ㅡ이런 후보 구도란 게 사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사실은 어떤 나라에서도) 흔하게 일어나긴 힘들 것이다. 물론 이렇게 두 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하여 구분짓는 것은 때론 위험하고 바보 같은 일(Stupid!)이다. 오바마의 사회적 스탠스가 흑인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힐러리의 사회적 스탠스가 여성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투명하게 나누어서 재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그리고 또 어떤 흑인이며 여성인가?ㅡ그리고 그 구분법은 누구에게, 어떤 권력에게 봉사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야 뭐 그래도 은근 힐러리가 되길 바라고 있었지만(;) 최근의 동향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ㅅ;

게다가 언론에 보도되는 선거 이미지도 이 꼴이다 -_-;

이미지 보기



나야 오바마가 어떤 인물이며 힐러리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일단 패스를 해보자. 그 중요한 것을 패스하더라도, 역시 젠더의 더블 스탠더드(이중 규범)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중 규범이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여성-힐러리가 너무 '독'하게 말하면 입담 좋고 여유 있으며 유머 감각 있는 남성-오바마에 비해 너무 공격적이고 강하고 독단적인 후보처럼 비춰질 것이다. 또 너무 '유'하게 말하면 너무 감정적이고 연약한 후보처럼 비춰질 것이다. 힐러리는 오바마에 비하면 정치인으로서 짊어지고 갈 짐이 무거운 것이다. 인종과 젠더는 어느 지점에서는 연결 되어 있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정말이지 다음 대선에는 심상정 의원이 좀 돌풍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있는데, 그때 까지 갈 길이 먼 것 같다. 이번 민노당 비대위원장 맡으셨던데, 비대위 결과가 좋아야 할텐데... 대선 결과도 너무 안 좋았고, 또 한 동안 "주사파 대 평등파" 운운하는 논쟁 때문에 나쁜 쪽으로만 주목 받았던 것 같아서 아무래도 총선 때가 걱정된다. 솔직히 말하면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좀 불편했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관심, 그리고 토론(혹은 격투;)가 있었다는 사실은 솔직히 놀라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당찮은 오버도 좀 있었던 것 같다. 트집 잡을 거 생겼다고 막 벌떼처럼 일어난 사람들도 그닥 좋게 보이진 않았고... 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민노당에 기대를 했었다는 의미도 있겠고, 나도 민노당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덧) 힐러리와 오바마가 각각 '여성'을 대표한다거나 '흑인'을 대표한다거나 하는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은 아닌걸로 알고 있다. 이처럼 '투쟁적인' 이미지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특히 백인) 유권자들이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나중에 백래쉬가 일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덧2) 글을 읽으면서 부분 부분 스타이넘이 꽤 나이브한 측면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글쓰는 사람에게 '모든 영역'의 '전문가'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은 물론 오버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좀 세심해졌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 예컨대, 젠더 문제가 "가장most" 심하다고...? 문제의 우위나 경중을 따지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의문을 차치하더라도, 저런 표현은 좀 자제했으면 싶다; 너무 투박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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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1/06 16:47

나야 TV나 라디오를 잘 들을 수 없는 환경에 있으니 늘 뉴스를 참조할 수밖에 없지만, 얼마전 운하 관련 뉴스에 이재오 의원이 "반대 의견은 수렴하겠지만 운하는 건설한다"라는 말을 했다는 글을 읽고 푸하하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인 모양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상당히 증상적이고 상징적인 말들이라서 '자료' 삼아 대충이라도 모아둘 참이다. 이 말들은 단지 '운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말이라고 보기엔 너무 함의하는 바가 많은 말들인 것 같다.

원체 한나라당은 말이 많은 정당이라서 이제는 많은 경우에(특히 나의 경우;) 한탄하거나 비웃으면서 제대로 주목하고 넘어가지는 않는데, 이러한 무관심 아닌 무관심이야 말로 문제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특히 비대한 그들의 정당을 감안하건대) 나름의 반성 끝에 좀 끄적여 본다.여기 인용한 말들은 이재오씨가 한나라당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하면 더더욱 재미있는 말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이재오씨는 예전에 박근혜씨랑 갈등으로 한나라당 최고의원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아는데, 완전 이건 권토중래로구만.. -_-


그의 말 중에서 몇 가지 재밌는 말들만 추려내면,

"반대 의견은 수렴하겠지만 운하는 건설한다"
"반대의견도 충분히 수렴하면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운하는 건설한다"
"국운을 융성하는 계기로 만들고 뭔가 나라에 큰 흐름을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하는 사업에 반대 여론이야 당연히 있는 것"
"중국 국민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건설했던 자금성이 지금 중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
"반대하는 사람들이 현장에 가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하니 정말 반대하는 분들은 운하 길을 따라 가 봤으면 좋겠다"
"찬성하는 사람도 있는데 밀어붙인다고 여론이 호도되니 난감하다"
"국민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한다고 하는 것은 ‘운하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여론 수렴이 아니라 운하 공약에 대해서 보완해야 될 점이나 더 검토해야 할 점을 여론과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서 하겠다는 이야기"

진정 화려한 언변이다 =_=; 운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퀄리티 높은 분석들을 내어놓고 있으니 내가 거기에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은 무용할 것 같고, 나는 일단 그의 말을 밑에서 조금 더 검토해보겠다. 물론 여기 인용한 그의 말들이 그가 했던 담화의 맥락에서 상당히 떨어진 측면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전도된 민주주의적 이상과 도착증

일단, 식상한 지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의 말들은 '국익' 담론의 전형적 판본에 가깝다. 하지만 일단 그가 내세우고 있는 국익 담론을 비웃는 것은 좀 미뤄두고 보면, 여기서 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가 '민주주의적' 이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 의견은 수렴하겠지만, 운하는 건설한다"라는 그의 말에 이러한 점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 사업에 반대 여론이야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반대' 의견이야 당연히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모든 사안에 여러 입장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자세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민주주의자' 일까? 물론 당연히 아닐 것이다.

누구나 느끼고 있듯이, 오늘날엔 전체주의적 체제조차도 인권과 자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자면 그 어떠한 국가도 '反 민주주의'국가로 규정되는 순간, 사나운 눈초리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한 번 낙인 찍히면 정말 곤란한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물론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함이고 체제regime의 권능을 유지하고자 함일지라도, 적어도 "파쇼"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야만 체제가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오늘날 권력의 작용을 보증하는 가치는 '인권', '자유', '민주성'따위의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제 아무리 물신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가치들을 보증하지 않는 체제는 정당성을 보장받기 힘들다. 광주에서 엄청난 국가 폭력을 자행했던 전두환체제 조차도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전체주의적 욕망을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을 상기해봐도 될 것이다. 그들이 호소하는 것은 결국 '민주국가'의 보존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보편자'의 권능이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제 아무리 어딘가에서든 보편이 죽었다 어쩌고 그래도, 보편성에 대한 열망과 보편성을 향한 충동은 앞으로도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특성상 '보편자'의 권능은 텅 빈 것이며, 따라서 그것의 의미화를 위한 투쟁(들)은 끊이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이상이다. 이재오 의원 역시도 이렇게 보편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보편자를 위한 투쟁에 그 역시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보편자에 대한 의미화 투쟁에 참여하는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역시 문제는 그가 '반대 세력'을 임의적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반대 세력의 정체성에 색깔을 입히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이상한 전이가 일어난다. "국운을 융성하는 계기로 만들고 뭔가 나라에 큰 흐름을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하는 사업에 반대 여론이야 당연히 있는 것" 이라는 말을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운하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국민들의 희망'을 박탈하는 사람들이며 '국운을 쇠퇴시키'는 사람들이 된다. 별 다른 이상이나 비전이 제시되지 않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소위 "희망"을 박탈하는 사람들이란 얼마나 끔찍하고 나쁜 사람들이겠는가.

이는 그가 민주주의에 호소하는 방식이 상당히 도착적임을 드러낸다. 조금만 살펴봐도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겠지만) 민주적 자세를 자임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그 자세는, 실상 전체주의적 권력을 원하는 그의 충동에 의해 <도착된pervertie> 태도이다. 대개 도착증자들은 자신이 도착증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더불어 라캉은 도착증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대타자의 쾌락에 기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재오 의원 역시도 마찬가지다. '국민'이라는 대타자의 쾌락에 운하 건설이 충분히 기여하리라는 그의 한끝 의심도 없는 깔끔한 태도.. 헐. 이건 치료 대상이다. 한번 상담 받아보세요.


포퓰리즘과 열정적 애착

그의 도착증적 증상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자. 라캉은 도착증자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대타자'의 의지인 "쾌락의지(volonté-de-jouissance)"에 지배된다고 본다. 즉 그가 보기에 도착증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함이 아니라 대타자의 쾌락을 위해서 활동한다. 여기서 대타자를 오늘날 '국민'으로 바꾸어도 말이 성립할 것 같다. 그가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욕망이라기 보다는 '국민'들의 쾌락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은 결국엔 '경제적'인 것이며, 이는 오늘날에는 쾌락 담론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이재오 의원 그 스스로의 것이라기 보다는 실체가 모호한 '국민'이라는 타자의 것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포퓰리스트'로서의 정치가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재오 의원처럼 많은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은 대개 도착증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예컨대 그가 호소하고 있는 것은 "국운", "먹여 살리는 것", "희망" 등인데, 이러한 말들은 지극히 모호하지만 또 대중들의 강력한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고 자극하는 말들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 말들은 포퓰리즘이 먹혀들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자원이 된다. 게다가(그리고 이게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의 '선의'가 동시에 강력하게 떠오른다. 그는 "반대 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소신' 껏 추진하겠다는 강한 열정과 애착을 지닌 것처럼 스스로를 묘사한다.

이러한 그의 포지션은 그가 "반대 세력"을 강하게 규정지을수록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이는 요즘 이명박 당선자, 그리고 한나라당과 그의 동료 언론들이 자꾸만 "참여 정부"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있는 것보다 크게 그려내려고 하고 있다는 점과 유사할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 인수위는 "참여 정부"가 자꾸만 일을 추진하기 힘들게 못을 박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비난하며 투덜대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반대 세력"이 자신들과 더 먼 거리에 있을수록, 그리고 그들이 더욱 강력하게 묘사될수록 그들의 잘못된 열정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싸울 만한 상대가 있어야 결집이 강해지고 그에 따라 의지와 열정이 강력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그것이 '상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상상적 도식은 그의 열정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열정적인 애착이 가진 난점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역사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가들이 특정한 집단이 아닌, '국가'와 '국민' 대한 자신들의 사랑과 열정을 호소할 때에는 언제나 염려해야 한다. 레나타 살레클이 지적하듯, 그들의 사랑은 지극히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살레클에 따르면 구 동독이 붕괴할 때, 동독 체제 속에서 수많은 파괴를 자행하고 폭력을 행사한 국가보안국 총수인 에리히 밀케는 수많은 반대파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나는 당신들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러한 정치가들도 자신의 상상적 영역에서 나름의 현실과 이상을 구성하고 있다. 허나 현실과 이상의 믿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그가 바라는 이상과 그가 상상하는 현재의 현실이 크게 차이가 날 경우, 그는 그 갭(gap)을 메우기 위해 지나친 열정을 발휘하기 쉽다. 그 열정은 어떻게 발휘될지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엄청난 파괴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들이 한국 땅과 환경을 파괴할 것이 뻔한 운하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 역시도, (실제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지만) 그들 스스로도 "반대 세력"들을 '강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이제 '집권 세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특징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떤 비극의 형태로 나타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ㄷㄷ


뭐 이외에도 몇 가지 지적이 가능할테지만(예컨대 오늘날의 여론과 커뮤니케이션의 위치라든지..), 이제는 이만 줄이고... 쩝 쓰고 나니 상당히 어설프구나; 현실 제도권 정치에 대한 깜을 잡기란 너무나 어려워서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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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1/05 16:19
Slavoj Zizek, "Censorship Today: Violence, or Ecology as a New Opium for the Masses"(원문)의 일부 번역

이탈리아의 좌파 저널리스트 Marco Cicala는, 내게 그가 최근에 겪은 이상한 경험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가 한 기사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을 썼을 때, 편집자는 그에게 이 용어가 진짜로 필요한지에 대해서 물었다. 즉 이 단어를 “경제”와 같은 동의어로 바꾸어 쓸 수 없냐는 것이다. 최근 20~30여 년 간 이 단어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그 무엇이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몇몇의 이른바 고전적인 맑시스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자본주의에 대해서 더 말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정치가들, 노동조합원들, 저자와 저널리스트들, 심지어는 사회과학자들로부터도 무턱대고 공격받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있었던 반세계화 운동의 격랑은 어떤가? 이것은 이 진단에 분명히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엄밀한 관찰은, 이러한 운동이 또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경제 메커니즘, 작업 조직의 형태들, 이익의 추출에 중심을 둔―으로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어떻게 굴복하고 있는지를 빠르게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통 통속적인 반미주의의 형태 속에서) 누군가가 “세계화와 그 행위자들(agents)”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적은 형체가 부여된다(객관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주요 과제가 “미 제국(the American Empire)”과의 싸움인 곳에서는, 만약 반미주의자라면 그 어떠한 동맹도 정당하다. 그래서 고삐 풀린 중국의 “공산주의적” 자본주의, 폭력적인 이슬람의 안티-모더니스트들 뿐만 아니라 벨라루스의 불쾌한 Lukaschenko 체제조차도 진보적인 반세계주의자이자 무장-한-동지(comrades-in-arms)들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썩 평판이 좋지 않은 “대안적인 근대성(modernity)”의 다른 판본을 갖는다: 즉 자본주의 그 나름으로서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의 기본적인 메커니즘과 대결하는 것 대신에, 우리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더 “진보적인” 프레임 속으로 동원하는 (조용한) 관념과 함께 제국주의자들의 “월권”에 대한 비판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개념을 비웃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류는 “후쿠야마주의자”이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가 최종적으로 발견된 공식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공식을 단지 조금 더 관용적으로라거나 하는 식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하고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자연화(naturalization)”를 승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오늘날의 세계적 자본주의가 그것의 무한한 재생산을 막을 수 있는 충분히 강력한 반대들을 포함하고 있는가?



지젝의 글은 최근에 영화 <300> 관련해서 쓴 것 이외에는 잘 보질 않았다. 예전엔 몇 개월 간 열심히 보려고 노력했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그의 글을 보자 어느 정도 반갑기는 하다. 나름대로 신선한 이야기를 계속 던지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한 번 영어 공부 삼아 번역하려고 한 시간 쯤 붙잡고 있다가 헤겔의 이성의 간계the Cunning of Reason등을 들먹거리는 지젝의 화려한 논변에 지쳐버려서 손을 놓아버렸다(트래픽 인 우먼이나 계속 봐야는데^^;). 그래서 그냥 번역한 일부분만 간단히 옮겨둠. 아, 그나저나 진짜 진정으로 정말로 참말로 헤겔을 읽어야 하나요? ;ㅁ; 그래도 내가 최근에 발견해서 종종 들어가고 있는 한 블로그에서 본 것인데, 5만원인가 하던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 생각보다 정말 재밌어서 자기 전에 읽고 잔다고 한다. 보면 한 없이 졸려져서 자기 전에 보면 좋은 책인지 뭔지는 아직 모르나(^^;)

어쨌든 나야 아직 학교에 머무르고 있으니까 그나마 '자본주의' 운운하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 '밖'은 아직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드니 말이다. 하긴 내가 들었던 그 어느 수업에서도 '자본주의' 운운했던 수업이 없었다. 정치경제학 수업을 들으면 좀 다를 일일지 모르지만.. 학내에서도 몇몇 학생운동 단위들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도 흔치 않다. 진정 자본주의의 자연화인가. 아니, 자연화라고 무턱대고 현상-기술적/관찰적으로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자연화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자연화되는 것처럼 생각될 뿐이라고 생각하는게 속 편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까운 진술일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 자본주의(여기서 사용되는 자본주의는 특정한 경제적 체제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에 봉사하는 정치적인 실천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즉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말.)에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대응하는 (다소 투박할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 비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셸던 월린은 '비전'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적인 보고"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이다(<정치와 비전>, p.51). 꼭 밀즈가 말했던 "사회학적 상상력"과 비슷하게.

오늘날 부족한 것은 후자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이외의, 혹은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정치경제학적 체계를 사고하는 것은 실상 어려운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일단 한번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상상력은 콜리지(Coleridge)가 말했던대로 "모든 것을 하나의 우아하고 지적인 전체로 형성하는" 유연한 "조형적"힘이 될 수 있다(Ibid.). 즉 우리는 우리의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혹은 우리가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체제의 질서를 볼 수 있으며, 그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원리와 가정을 총체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국지적일 수도 있고 전세계적일 수도 있다. 그러한 탐구를 기초로, 어떤 다른 정치(경제)학적 입장을 창조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월린도 지적하고 있는 바 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러한 정치적 상상력은 어떤 '음모론'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릴 수도 있다. 오늘날 세계를 총체적으로 그려보려는 하는 시도들은, 대부분 '음모론'이라고 일축되어 버리고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어떤 한 입장이 '비현실'이 되고 '음모론'이 되는 순간 그것은 즉각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열망, 과학에 대한 충동..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젝도 어디엔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허위 의식' 따위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한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월린은 상상력을 "친숙한 방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는 이론가의 수단"이라고 지칭한다. 즉 우리에게 '친숙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더 나아가 이 '친숙한' 방식을 폐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치적 상상력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상상력'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그것이 틀렸다는 점이 발견되었을 때 얼마든지 폐기하고 다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쓸데없이 주절주절 말이 길었네; 그나저나 여기 약간 번역해온 글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는 글이다. 제목이 상당히 선정적이지 않은가? 폭력이나 생태적 파국에 대한 비판들을 '검열(censorship)'이라고 부르다니-_- (물론 지젝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어떤 자본주의적 증상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게다가 무려 "대중들을 위한 아편" 운운한다. 이 할아버지 진짜 매드니스 드라이브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렇게 보면 지젝은 예나 지금이나 뭔가를 후벼파는데 '강박증'이 있지 않나 싶은 느낌이다. 그만큼 또 상당히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번역하는 건 힘들어도 꾹 참고 리딩은 한 번 더 시도해 볼만할 것 같음 ~_~

그나저나 존 벨라미 포스터의 책들을 읽어야하는데;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는 무척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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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12/31 20:44

실로 급진 민주주의의 과제가 민주주의 혁명을 심화하고 상이한 민주주의적 투쟁들을 이어 주는 데 있다면, 이런 과제는 이를테면 반인종주의와 반성차별주의와 반자본주의 간의 공통 접합을 허용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 위치들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이 투쟁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수렴되는 법은 없으며, 민주적 등가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새로운 '상식'이 필연적이다. 이 새로운 '상식'은 서로 다른 집단들의 정체성을 변형하여, 각 집단의 요구들이 민주적 등가성의 원칙에 따라 다른 집단의 요구들과 접합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주어진 이익들 간의 단순한 동맹의 설정이 아니라 이 힘들의 정체성을 현실에서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이익의 옹호가 여성이나 이주자나 소비자의 권리를 희생하는 대가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려면, 이 서로 다른 투쟁 간의 등가성이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들은 오직 이런 환경들에서만 진정 민주적이 된다.
-Chantal Mouffe, <정치적인 것의 귀환>, p. 38


몇 가지 기사들을 읽으며 멍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며칠 전 읽고 충격을 받았던 이 구절이 갑자기 생각나서 부랴부랴 찾아서 옮겨 둔다. '상식'이 common sense의 번역어인지 아닌지는 찾아봐야 알겠지만.. 물론 무페가 말한 이 '상식'이 일반적인 분별력이라는 의미에서의 상식은 아닐 것이다.

상당히 이상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민주주의의 비전'을 찾아보기 힘든 현대 한국에서는 의미가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정체성의 정치학들이 제대로 의제화 시켜서 실천하고 있지 않는 것은, 무페가 말하고 있는 바로 이런 "급진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생각이다. '상식'을 새로 쓰고 그 상식에 입각하여 나 스스로와 나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다른 정체성들과 접합하기. 그것은 단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의미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상식'을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것 보다는, 그 상식을 통해 "정체성을 변형"한다는 말일 것이다. 정체성 간의 단순한 동맹이나, 폭력적인 접합 과정을 통해 목적론적 운동관에 다른 모든 정체성들을 봉사시키는 것이 아니라(민노당의 '주사파' vs '평등파' 논쟁은 이런 의미에서 참 씁쓸하게 다가온다)..

한 가지 더. 무페가 "주체 위치들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다양한 "위치"에서의 다양한 정체성과 다양한 담론들은 민주주의의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체 위치"라는 말이 묘하게 싫다. 이를 "주체 위치"라기보다는, '주체성'이란 말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주체가 어떤 새롭게 창조된 위치에 기입되고 위치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창조하고 옹호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에 대한 요청이라는 맥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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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12/28 13:52

"전통은 항상 자유와 역사 그 자체를 이루는 한 요소다. 가장 견고하고 진정한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현존했던 것이 지닌 관성 때문에 자연적으로 지속한다는 법은 없다. 전통은 긍정되고 포용되고 양성되어야 한다. 모든 역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본래 보존이다. 하지만 보존은 이성의 한 작용이지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오직 새로운 것 혹은 계획된 것만이 이성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가상이다. 심지어 혁명의 시대처럼 삶이 격렬하게 변화할때조차도, 모든 것이 변형된다고 전제는 해야겠지만 그 변형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오래된 것들이 보존되며 새로운 것과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게 된다." -Gadamer [Chantal Mouffe, <정치적인 것의 귀환>, p. 36]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 게임은 언어 규칙과 객관적 상황과 삶의 형식간의 분리 불가능한 결합이기에, 전통은 우리를 주체로 형성하는 담론들과 관행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를 친숙성들의 추구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치는 주어진 전통의 핵심 용어들에 대한 새로운 용법들을 창출하는 것이며, 또 새로운 삶의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 게임 속에서 이 용법들의 사용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Ibid.]



바로 이것이다! 답답했던 것들에 대한 텍스트적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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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12/28 11:58

출처 : 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834

이현우│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고 시인 김수영은 적었다. 어디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랑뿐이겠는가.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욕망의 입을 뒤지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이라면, 사랑의 밑자리에는 언제나 폭력이 가로놓여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건 보편적 폭력이다.

러시아 시인 푸슈킨은 시 ‘예언자’에서 예언자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마치 세라핌(천사)이 ‘외과적 수술’을 시행하는 것처럼 묘사한 바 있다(실상 ‘세라핌’이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높은 존재’ 혹은 ‘수호천사’를 의미하는 ‘셀’과 ‘치유하는 자’, 혹은 ‘외과의’를 의미하는 ‘라파’의 합성어이다).

시에서 세라핌은 ‘나’의 죄 많은 혀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지혜로운 뱀의 혀를 다시 심는다. 그리고 또 가슴을 칼로 가르고 심장을 뽑아낸 다음에 불타오르는 숯 덩어리를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내’가 황야에서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 신의 음성을 듣는다. “일어나라, 예언자여, 보라, 들으라,/ 나의 의지로 가득 차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며/ 말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우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라핌에 의해 ‘나’는 강제적으로 시체가 되고 그런 이후에야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의 ‘성스러운’ 폭력은 모든 (재)탄생이 수반하거나 요구하는 폭력이기에 보편적이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의 탄생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 아닌가. 다만 그는 ‘말’이 아닌 ‘폭탄’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울 것이다.


기원으로서의 폭력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동문선)에서 지적한 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폭력이 사라지는 유일한 순간은 다만 일곱째 날인 ‘안식일’뿐이다(비폭력의 윤리는 이러한 신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가 낳은 형제 중에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다(인류는 모두 ‘카인의 후예’이다!). 카인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신(여호와)은 그를 보호한다. 카인에게 표를 주며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복수를 당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서에 따를 때,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신)가 공모한 역사, 곧 ‘폭력의 역사’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이러한 인류사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톰 스톨은 평범한 중년 가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식당에 이유 없이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두 남자가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그는 여종업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 악당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이 사건으로 매스컴의 ‘영웅’이 된 톰에게 마피아 일당이 찾아와 그가 20년 전 조직의 일원이자 유명한 킬러 ‘조이’였음을 상기시키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한다. 톰은 자신이 조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결국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당과 맞선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그를 제거하려는 형 리치 일당 또한 모두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은 두 가지다. 먼저 톰이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던 조이의 폭력,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가정과 아버지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지르게 되는 폭력. 그 폭력은 톰의 것인가 조이의 것인가. 과거의 조이는 현재의 톰이 부인하지만 제거할 수 없는 그의 또 다른 자아이자 그림자이다. 역설적인 것은 조이의 킬러 본능이 위험의 순간에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영웅적인 능력이 된다는 점. 때문에 이 가장의 폭력은 가정을 위협하면서도 동시에 보호하는 양면적인 것이다.

문학비평가이자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말하자면 이러한 초석적 폭력, 정초적 폭력이다(톰/조이의 경우에는 ‘가정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말해야겠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폭력이 제어·제한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을 속이는 수밖에 없다(톰은 학교에서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들을 크게 야단치고 훈계한다).

그렇게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 제의적 희생에서의 폭력이며, 이때 요구되는 믿음이 ‘좋은 폭력’(정당한 폭력)과 ‘나쁜 폭력’(부당한 폭력),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믿음이다.

가령,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이후)에서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자체가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초적 폭력’이라고 부른 것은 자기 이전에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물론 벤야민의 ‘폭력비판’에서 ‘폭력’이란 말의 원어는 ‘게발트(Gewalt)’이고 이것은 ‘지배/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가제’란 뜻을 갖기 때문에 권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의회/대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폭력의 두 계기를 분리하고 신적 폭력으로서의 정초적 폭력을 옹호한다. 

데리다가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서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즉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때문에 법은 그 정초의 순간에 불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표상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이러한 정초적 폭력이 보존적 폭력에 의해 언제나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법의 구조는 언제나 해체가능하며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은 서로 의존적이다.


폭력에 대한 사유 - 이분법을 넘어서

아렌트나 벤야민의 경우에서 알 수 있지만 폭력에 대한 사유나 성찰은 폭력을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혹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규정된다. 아렌트에 의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좌파 사회주의자로 비판을 받기도 했던 조르주 소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 아렌트와 달리 그가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분법은 무력(force)과 폭력(violence)이다.

전자가 지배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 등의 억압적 폭력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에 대한 탈법적 항거나 저항 같은 해방적 폭력을 뜻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무력이 소수 지배자의 통치 질서를 강제하는 힘이라면, 폭력은 기존 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힘이다.” 소렐은 그런 의미에서의 폭력, 보다 구체적으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무기로서의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리고 이때의 폭력은 그 라틴어 어원인 ‘비스(vis)’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비스’는 ‘힘의 발휘’ ‘폭력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 호모 비오랑스, 곧 ‘폭력적 인간’이란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그리고 이 ‘폭력적 인간’은 니체적인 명명에 따르자면 ‘디오니소스적 인간’이 될 것이다.

이때의 디오니소스는 테리 이글턴이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에서 다시 읽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에서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이다. 즉 “포도주와 가무, 환희와 연극, 풍요와 과잉, 영감의 신”이면서 동시에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며 차이를 적대하는 획일성의 지지자”로서의 디오니소스. 디오니스소의 이러한 양면성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폭력성은 인간의 부정적이거나 부수적인 자질이 아니라 그 본성이다.

<바쿠스>에 등장하는 테바이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 숭배에 적개심을 품고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고 아예 신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물론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지진을 일으켜 감옥을 나온 뒤에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디오니소스성이 우리가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존중이다.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펜테우스의 타자가 아니라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이다. <폭력의 역사>에서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마치 톰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조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폭력’과 ‘비폭력’이란 개념쌍의 상투적인 이해도 이러한 맥락에서 교정될 필요가 있다. 사카이 다카시가 <폭력의 철학>(산눈)에서 정리하는 바에 따르면, ‘비폭력’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말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의 목적은 대화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사회에 어떻게든 우리가 제시한 쟁점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위기감과 긴장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중략) 저는 지금까지 폭력적 긴장에는 진실로 반대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건설적인 비폭력적 긴장은 사태의 진전에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1960년 정치운동으로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사회의 적대성을 폭로하거나 구축하는 수단이었다. 때문에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무저항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에 있어서는 킹과 다른 노선을 걸었던 맬컴 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은폐되고 억압된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에게서도 일차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맬컴이 주장한 것은 흑인들이 자기 혹은 타자에게 갖고 있는 증오를 분노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 근본 원인 대신 결과를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에 투사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하는 데 반해, 분노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태도를 함축한다. 

맬컴 엑스의 동시대인이었던 알제리의 정신과의사 프란츠 파농 역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을 통해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대항적 폭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그 자체 속에 이미 폭력이 편재해 있으며, 이러한 폭력은 굴절적인 형태(정신병)로 피식민 주체들에게 들러붙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력은 이러한 내향성을 중단시키고 식민주의 자체로 방향을 돌리게끔 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된다. “폭력은 취기를 깨우는 해독작용이다. 원주민의 열등 콤플렉스나 방관 내지 절망적인 태도를 없애준다. 폭력은 그들을 대담하
게 만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폭력을 넘어서기 -  ‘정치적인 것’의 도입

사카이 다카시는 이렇듯 폭력의 다양한 양상과 양태, 그리고 의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며 거기에 ‘반폭력(anti-violence)’이란 범주를 추가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반폭력은 테러에도 반대하고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police)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politics)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이고,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폴리스의 논리와 평등주의의 논리가 만나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랑시에르가 들고 있는 사례로는 “너의 직업은?”이라는 폴리스적 논리의 질문에 “프롤레타리아”라고 폴리틱스적 논리로 대답하는 대목이 정치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해방적 주체, 혁명적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슬라보예 지젝이 <혁명이 다가온다>(길)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을 예로 들면서 말해주는바, 자기 구타(폭력)를 통해서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은 내놓아야 한다고 상사를 협박하면서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 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한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주인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자기주장이며 “이러한 구타의 진정한 목표는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들뢰즈는 <매저키즘>(인간사랑)에서 가학주의가 지배의 관계를 포괄하는 반면, 피학주의는 해방을 위해 필요한 첫 과정이라고 적었다.

요컨대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기 폭력으로 또 주체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폭력적인 재형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파이트클럽>의 교훈이다.” 여기서 ‘순수한 폭력’은 곧 ‘순수한 사랑’과도 만난다. 사랑은 모든 맥락에서 사랑의 대상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고양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김수영의 시구를 빌자면,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이렇듯 미쳐 날뛰는 것이 사랑의 광기이고 폭력의 광기일 테다. 모든 현상을 ‘좋은’ 면과 ‘나쁜’ 면으로 구별하고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웰빙적 태도!)는 맑스가 지적한바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적 태도이다. 이것은 사랑과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12/24 16:15

블로그 <후마니타스의 책 이야기(클릭)>에서 흥미로운 책 소개를 찾아서 옮겨 둔다. 책은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 1』. 얼마 전에 출간한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더불어 요즘 같은 정국에 반드시 읽어 둬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게 없으니 흥미로운 책이라도 읽으며 부지런히 도토리를 모아두자. 귀는 뉴스와 소식들에 열어두고, 눈과 손은 부지런히 텍스트를 살피며, 발을 떼어 몸을 옮길 수 있는 곳을 찾는 것, 날씨는 따뜻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추운 이번 겨울에 꼭 해야할 일이다.. 책이 잘 나가서 계속 연간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읽을 시간을 꼭 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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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의도

미국의 살아 있는 정치사상가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셸던 월린이다. 특히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사상이 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을 지배하게 되면서, 월린은 더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2004년에 개정 증보판으로 새롭게 출간된 월린의 『정치와 비전』은 원래 1950~60년대 정치철학에 대한 실증주의의 비판과 규범적 정치철학으로의 회귀라는 당대의 시대 분위기에 맞서 정치적인 것의 독특성과 자율성을 재확언하려는 정치사상가의 열정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40여 년이 지나 이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 셸던 월린은 2004년 원래 총 10장이었던 초판을 총 17장으로 수정‧증보했으며, 『정치와 비전』은 750여 쪽에 이르는 대작으로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4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민주주의의 후퇴와  맞물리면서 『정치와 비전』 내용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으며, 이런 흐름은 부시 정부하의 현 미국 민주주의를 “전도된 전체주의”로 그려내는 데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정치와 비전』은 출간된 이래 늘 여러 세대의 정치사상 연구자들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영감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활력 있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비전과 창조적 실천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있다. 미국에서 참여 민주주의 최고의 이론가로 셸던 월린을 주저없이 꼽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후마니타스는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을 총 3권으로 나누어 내년 상반기까지 완간할 계획이다. 이제 그 첫 출발로 『정치와 비전』제1권을 내놓는다.

『정치와 비전』의 출간은 국내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국내에는 그간 세바인, 버이키, 플라메나츠 등의 정치사상사 책이 번역,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기존의 책은 대개 ‘균형 잡힌 시각’과 ‘폭넓은 교양’을 강조하는 다소 교과서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나마 현재 시판되고 있는 것은 10년 전에 출간된 조지 세바인의 『정치와 비전』뿐 등 몇 권 되지 않는다. 월린의 이번 책이 ‘정치적인 것’, ‘공동체’, ‘시민됨’,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아래에서 서구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일관되게 되짚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사상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할 것이며, 정치사상사의 여러 쟁점과 관련해 다양한 논쟁이 촉발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정치와 비전』은 그 자체로 서구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정치와 비전』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정치사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다투는 하나의 방법으로 정치사상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정치사상의 오랜 주제들이 우리의 현실적 문제와 얼마나 깊이 맞닿아 있는지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1922년생인 월린은 ‘증보판’에서도 여전히 청년 못지않은 열정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가 민중적 활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과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월린은 중요한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간 후마니타스가 내놓은 책의 목록들과 잘 어울린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나 최장집의 『어떤 민주주의인가』가 대표적이다. 최장집 교수는 지난해 불거져 나온 개헌론을 비판하면서 월린을 자주 인용해 왔고 샹탈 무페는 월린이 늘 높이 평가하는 정치철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재미있는 차이도 있다.

월린은 정치적인 것의 복원을 중시하고 제도나 체제 밖의 운동적 참여를 강조한다. 이 점에서 무페와 같다. 하지만 무페는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노르베르토 보비오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끌어들이며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역할 역시 일정 정도 중시한다. 이 점에서 무페는 월린과 차이를 보인다. 반면,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에서 운동적 실천보다 제도적인 실천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월린과 대조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헌정주의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밖에도 대비되고 겹쳐지는 논점들이 많다. 월린의 이번 책을 통해 이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읽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논의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적 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월린이 정치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리고 이 책이 갖는 특별함에 대해서는 옮긴이인 강정인 교수가 쓴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국내에서 강정인 교수보다 이 책의 의미나 월린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여러 내용이 다 흥미를 끌지만, 미국 민주주의 현실에 대해 현재 월린이 일종의 “지적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내용은 우리의 정치 상황 또는 지식인 상황과 결부되어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당장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큰 희망을 품기 어렵다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실체에 대해서 더 깊이 침잠해 보길 권하고 싶다.



2. 이 책에서 주목되는 주제들


1) 정치적인 것 그리고 ‘전도된 전체주의’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사회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 참여와 시민권은 독특한 자기 완성적 활동으로 제시되었다(“인간은 정치적인 동물”). 하지만, 18세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개념화는 상실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것’은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것’을 표상하는 반면, 사회는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모임’을 상징한다는 믿음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공동체의 구성원됨의 의미는 주기적으로 투표하는 유권자로 축소되었으며, 정치 참여는 방어적인 활동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서,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실증주의적 정치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 정치를 윤리적 판단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규범적 정치학(예컨대, 레오 스트라우스와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 정치철학), 정치를 부정하고, 이를 이윤 극대화의 원칙과 효율성의 논리로 축소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접근들과 맞서,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논리를 보존하고, 이를 부단히 새롭게 재정의하고자 시도한다.

정치적인 것의 재활성화에 대한 월린의 강조는 미국에서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위험할 정도로 압도하는 ‘전도된 전체주의’(전도된 전체주의에 대한 내용은 첨부 자료 참조)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월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경쟁적이며, 불평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들, 즉 민주적 시민으로는 부적당한 인간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적인 것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임을 역설한다.


2) 정치와 ‘비전’

『정치와 비전』에서 ‘비전’은 사실적인 차원과 상상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 첫 번째, 비전은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적(記述的)인 보고의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 ‘비전’은 미적 비전이나 종교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상상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월린은 정치철학에서 첫 번째 의미의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의미, 곧 상상력이 개입된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훨씬 더 중시한다. 정치철학자가 정치 현상을 개념화할 때 활용하는 비전은 ‘이론가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이론적 활동에서 비전의 역할이 다음 세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정치철학자는 비전을 통해 공상, 과장, 심지어 기상천외한 환상을 통해 때로 우리에게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명백하지 않았을 사물들을 보게 해 준다. 곧 이와 같은 공상적인 상(像)을 통해 그는 일반 사람들이 정치 질서가 기초해 있는 근본적인 가정을 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예를 들어 홉스는 ‘사회계약’이라는 상상적 행위를 설정함으로써 정치질서가 궁극적으로 구성원들의 동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밝혔다. 둘째, 정치사상가는 정치현상을 지적으로 일관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 현상을 이른바 ‘정정된 온전함’(corrected fullness)으로 그려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상적 감수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또한 정치사상가는 정치적 삶에 대한 축소된 상, 사상가의 목표와 무관한 것들은 삭제된 상을 우리에게 제시해 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사상가 역시 직접적으로 모든 정치적 사물들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해 일정한 현상을 추상화하고 상호 연계성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요약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사상사에서 상상력, 곧 비전의 역할은 단지 방법론적 편의 또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모델 제공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전의 세 번째 기능은 사상가의 근본적인 가치━철학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를 표현하는 매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정치 이론가가 역사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3) 탈주하는 민주주의: 헌정주의 대 민주주의

월린은 현대 서구에서 민주주의로 이해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나 헌정적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적 정신을 질식시키고, 시민됨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 지극히 비판적인 급진 민주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의 민주주의 개념은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활기에 넘친 참여와 숙의를 중시하는 참여 민주주의이다. 이 점에서 월린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기 이전까지 실현된, 기원전 5세기 경의 아테네 민주정과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민주적 반란기의 경험, 19세기 미국 민중주의자들의 경험, 그리고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경험 등을 진정한 민주적 경험으로 중시한다. 월린에게는 아마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이 구성한 자치적 공동체, 곧 단명에 그친 ‘광주 공화국’의 경험 역시 1871년의 파리 코뮌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민주적 체험으로 이해될 법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월린의 비전은 제도화된 정치권 내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질서정연한 참여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민중들(빈민, 노동자, 농민, 흑인, 여성 등) 또는 시민들이 기성의 제도 밖에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생존을 타개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는 (단편적인?) 체험에 기초한 것이다. 즉 그 비전은 그들이 투쟁하면서 정치공동체에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것에 관해 숙의하고, 그 숙의의 결과를 다시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action)로 옮길 때 일어나는 탈제도적 경험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월린에게 미국은 물론 현대 서구의 선진국가에서 실천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따라서 고대부터 근대 정치사상까지를 주로 다룬 『정치와 비전』의 초판(1960년)에서는 당대의 정치에 관해 비교적 초연한 태도를 취하면서 비판적 언급을 삼갔던 반면, 2004년에 출간된 증보판의 16장과 17장에서는 현대 미국 민주주의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월린의 평가에 따르면 미국은 ‘초강대국 민주주의’(superpower democracy)라는 형용 모순적 실체로 변모하고 있으며, 신보수주의 정책 결정자들은 미국을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 국가━파시즘이 내포하는 많은 함의와 더불어━로 전환시키고 있다. 월린에게 전도된 전체주의는 상호 대조적인, 그러나 반드시 대립적이지 않은 두 가지 경향의 특이한 조합을 강조하기 위한 개념이다. 2차대전 이후 많은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시민들을 단속하고, 처벌하고, 측정하고, 지시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능력이 증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통제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자유민주적 변화들, 예를 들어 인종, 젠더, 종족 또는 성적 취향에 근거한 차별적인 관행을 폐지하고자 하는 조치들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들 및 다른 개혁들이 시민들의 권력 강화를 가져오는 데 이바지했다면, 그것들은 또한 민주적인 반대 진영을 분열시키고 파편화시키는 데도 이바지했고, 이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다수를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분할을 통해 통치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런 비판으로 인해 미국 정치학계에서 월린은 강경 좌파(hard-Left) 또는 좌파 자유주의자(left-liberal)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처럼 월린의 급진 민주주의적 비전은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의 형태로 개념화하는데, 그 정치적 판단은 우리의 판단이 자유주의적 거대 국가의 포획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정치제도 바깥에 소재하는 존재양식이며,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월린은 자신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탈주적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로 명명한다. 월린은 ’탈주적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재형성적 능력, 국지(지방)적이고 특수한 정치참여 양식을 고무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정치참여를 고무하는 탈주적 민주주의를 국가의 밖과 옆에서 활성화시킴으로써 국가주의적 권력의 전체주의적 경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본다.



3. 장별 주요 내용 소개


제1장 “정치철학과 철학”에서 월린은 정치철학을 다른 형태의 탐구 형식과 연결하고 구분하면서 정치철학의 특징을 조명한다. 아울러 정치철학의 일반적 특징을 철학에 대한 정치철학의 관계, 활동으로서의 정치철학이 갖는 속성, 그 주제와 언어, 관점 또는 비전의 각도, 그리고 전통이 작동하는 방식 등을 논하면서 밝히고 있다. 제1장은 정치철학이 무엇인가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읽어 보아야 할 장이다. 다만 이 장에 서술된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고 함축적이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주요 주제와 철학자들의 정치사상에 익숙해진 연후에야 비로소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사상을 전공하는 자라면 두고두고 여러 번 음미해 읽으면서 그 깊은 뜻을 헤아려 볼 만한 소중한 장이다.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을 정치철학의 발명자로 제시하면서 그리스에서 정치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정치철학의 출현 조건으로 정치 현상이 여타의 다른 현상들로부터 ‘분화’될 것, 독립된 사유의 형태로서 정치적 ‘설명’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정치철학을 ‘정치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의 산물’이라고 할 때,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정치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린은 플라톤에 이르러 정치가 ‘독자적’인 현상으로서 ‘체계적’으로 인식되었지만, 동시에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는 ‘선의 이데아’라고 하는 철학적 비전이 정치를 조형하게 됨에 따라 정치(현상)의 자율성이 현저히 위축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로부터 월린은 다양한 관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월린의 비판은 서구 정치철학사에서 플라톤 정치철학에 내연(內燃)하는 정치와 철학의 원초적인 갈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붕괴시키고 등장한 로마제국 시대를 ‘정치적인 것’의 위기로 개념화하면서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의 정치사상을 다루고 있다. 월린은 정치적 삶의 새로운 구현체이자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광대한 영토로 구성된 로마제국과, 소수의 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도시국가를 바탕으로 하여 출현한 그리스 사상의 정치적 기준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가 ‘정치적인 것’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가 기독교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해석한다. 이와 함께 월린은 로마 공화정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추적하면서 정치 공동체에서 용인될 수 있는 갈등의 한계, 이런 갈등을 봉합하고 규제하는 데 있어서 정치 제도가 수행하는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익에 근거하여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지닌 함의를 분석하고 있다. 이 장에서 월린은 스토아학파의 정치철학을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앞장의 논의를 이어받아 로마 제정 시기가 서구 정치사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빈곤한 시기였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이 정치사상을 재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찾는다. 대신 그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사안에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가 정치사상의 새로운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치사상을 재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원천은 기독교가 그 구성원들에게, 충만한 참여적 삶을 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새롭고 강력한 이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 데서 기인한다. 월린은 또한 기독교의 괄목할 만한 확산과 복잡한 제도적 형태로의 진화가 행동과 언어의 양 측면에서 ‘교회의 정치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런 사태 전개가 기독교 본래의 의도와 달리 서구에서 정치에 관한 교육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정치화를 통해 정치적 사유와 행동 양식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월린이 해석하건대, 중세 기독교 시대가 남긴 아이러니한 유산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대체로 정치사상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독특한 기독교적 목표를 위해 봉사하도록 사용하는 데 만족하고 그 개념들 자체의 내용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기독교 및 교회의 정치화와 함께 정치사상의 주요 개념과 범주들이 오히려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월린은 자신의 이런 논점을 초기 기독교 사상, 교회제도의 발전과 정치화 과정,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과정 및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새롭게 주장하고 주조함으로써 근대 정치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7장에서 검토하기에 앞서, 월린은 5장과 6장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고 마무리한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인 루터와 칼빈의 정치사상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월린의 해석에 따르면 루터는 종교적 사유를 탈정치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교회적 정체(政體), 곧 중세의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는데 반해, 역설적으로 칼빈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새롭게 정치적·제도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마무리지었다.

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서 월린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의 사상을 초기 교회의 순수함으로 돌아감으로써 종교적 체험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다. 이를 위해 루터는 조직화된 중세 교회의 권력 구조와 복잡하고 정교한 중세 신학, 곧 교회 중심주의와 스콜라 철학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종교의 탈정치화를 시도했다. 월린은 이런 루터의 사상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루터가 추구한 ‘교회의 탈정치화’가 결과적으로 세속 권력의 강화와 민족적 특수주의의 출현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에서 월린은 초기 종교개혁의 급진적인 종파들이 수많은 제도적 통제와 전통적 제약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를 계기로 분출된 원심적 에너지로 말미암아 서구 사회가 질서와 시민성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극단적인 종파들이 자신들의 종교 공동체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정치 질서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부정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아노미 상황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월린이 정교한 해석을 통해 보여 주는 칼빈의 사상적 공헌은 그처럼 점증하는 위기의 와중에서 그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시민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사상체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정치 질서에 대한 신망을 회복시키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인간 본성의 정치적인 면을 깨닫게 함으로써 정치적 교육의 기초를 가르치려고 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칼빈의 교회론은, 교회-사회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조절할 제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때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이라는 통찰을 체계적으로 정교화한 작업이었다. 칼빈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권력이라는 추가적인 요소가 그 집단의 단합과 연대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최선의 교회 정체(政體)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면서, 동시에 교회에 강력한 리더십과 지도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칼빈의 기독교 사상에서 개인은 종교적 질서와 정치적 질서라는 이중의 질서 속으로 재통합되었고, 그 질서들은 공동의 통일체 속에서 연결되었다.



차례

제1장 정치철학과 철학  

1. 탐구 형식으로서 정치철학
2. 형식과 실질
3. 정치적 사유와 정치적 제도
4. 정치철학과 정치적인 것
5. 정치철학의 용어
6. 비전과 정치적 상상력
7. 정치적 개념과 정치적 현상
8. 담론의 전통
9. 전통과 혁신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  

1. 정치철학의 발명
2. 철학과 사회
3. 정치와 지식 체계론
4. 사심 없는 도구를 찾아서
5. 권력의 문제
6. 정치적 지식과 정치 참여
7. 통일성의 한계
8. 플라톤의 모호성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

1. 정치적인 것의 위기
2. 공간의 새로운 차원
3. 시민됨과 이탈
4. 정치와 로마 공화정
5. 이익의 정치
6. 정치적 결사에서 권력 조직으로
7. 정치철학의 쇠퇴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

1. 초기 기독교에서 정치적 요소: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관념
2. 정체政體로서의 교회: 정치 질서에 대한 도전
3. 교회-사회에서 정치와 권력
4. 정치화된 종교의 당혹스러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과제
5. 재강조된 교회-사회의 정체성: 시간과 운명
6. 정치사회와 교회-사회
7. 종교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 중세 기독교 사상에 대한 보충 설명

제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1. 정치 신학
2. 루터 사상의 정치적 요소
3. 제도에 대한 불신
4. 정치적 질서의 지위
5. 균형추 없는 정치 질서
6. 단순 소박함의 열매

제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

1. 질서의 위기와 시민성의 위기
2. 칼빈 사상의 정치적 특성
3. 교회 정부의 정치 이론
4. 정치적 질서의 복원
5. 정치적 지식
6. 정치적 직분
7. 권력과 공동체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12/23 22:39
출처 :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0760202&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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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god..


이젠 진짜 하나하나 착착착 진행되는구나. 얼마 전엔 의료보험제도도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란 괴담 아닌 괴담까지 나돌더니, 이제 행정부처도 착착 개편이 예정되고 있다. 물론 아직 MB 정부가 출범하지 않았으니 두고 볼 일이겠지만, 너무 그럴싸해서 무서워 죽겠다. 한나라당과 MB의 야심찬 계획들. 게다가 대선때는 조용하더니 다시 땅판다고 지ral이고!!

이게 단지 괴담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아마 의료보험제도가 민영화 되면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50913135327 에 나온 것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진짜 삼성은 어디에나 개입하고 있다. 너무 거대해서 인식에 잘 들어오지를 않는다. 무섭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는거야. 인터넷 블로그그 뉴스 사이트 등지에 민영화 관련 글들은 많지만, 일단 간단히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403702 를 참조할 수 있겠다. 언론 기사로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96753 를 참조할 수 있겠고.. 진짜 어떡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여성부는 제 아무리 욕을 많이 먹어도 '제도화'된 이상 확실히 없느니 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한 번 제도화되어 자리를 잡게 되면 그 이전으로 퇴행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결국 없어지는군. 지난 수 십년간의 운동의 나름의 '성과'가 대통령 하나 바뀌니 그냥 와르르;다. 한나라당 쪽은 성매매특별법 강화 등을 부르짖고 있다던데, 이것도 미친 짓이다. 성폭력으로 유명한 한나라당께서, 성노동에 대한 기초적인 관점도 없이 완전 madness drive하는 셈이니.

게다가 이제 노동부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게 생겼다. "노동의 유연성"을 공공연하게 추진하던 MB가 결국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이다. 노동부의 업무가 완전 정부로부터 분리되어 폐지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엄연한 하나의 정부 부서로서의 위치가 강탈되면 얼마나 입지가 좁아질지 뻔하게 짐작 가지 않겠는가. 교육부 축소 계획도 호러다. 자사고 100개 세운다던 MB의 야심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는구나; 아아악#@$&@#^@$


아마 또 총선 개표 방송은 파란 깃발로 뒤덮일 것이다. 한나라당보다는 그나마 나은 대통합민주신당은 총선에서 또 우왕좌왕 하겠지. 하지만 기필코 내년 총선에서는, 반드시, 결단코 다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민노당은 이번 대선에 받은 3%의 성적표를 바탕으로, 무엇을 쳐내고 무엇을 취해야 할지 확실히 결정해야 할 것이다. 빌어먹을 선거 두 방에 완전 나가떨어지게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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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12/09 20:17
출처 : 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493 
(동국대 대학원 신문)

저항 전략으로서의 세속화는 가능한가?
[In The ORIGINAL] Giorgio Agamben, Profanazioni, Roma: Nottetempo, 2005『세속화』


이재원│출판기획자·번역가


지난 2005년 5월 1일, 독일의 출판사 주어캄프는 지오르지오 아감벤의 신간 『세속화』의 독일어본 출간을 기념해 유서 깊은 베를린인민극장을 빌려 출간 기념회를 연 바 있다. 이에 독일의 언론들은 “오늘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상가”, “유럽 전역의 젊은 지성인 세대 전체의 횃불”이라고 그를 추켜올리며, ‘사상가’ 아감벤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준 이 에피소드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정작 『세속화』의 내용, 특히 10편의 논문 중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세속화 예찬』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에서 아감벤이 기존 질서에 맞서는 “도래할 세대의 정치적 과제”라고 주장한 세속화(profanation) 전략의 몇몇 사례, 가령 어린 고양이처럼 실 뭉치를 가지고 놀기, 배설(특히 배변)하기의 새로운 사용, 퍼포먼스로서의 포르노그래피 등은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평자는 다음과 같은 촌평을 날렸다. “비판이론계가 드디어 자신의 존 워터스를 발견했다!”(참고로 워터스는 미국의 컬트영화감독으로서 주로 R등급이나 X등급의 전위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감벤이 말하는 세속화란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감벤의 또 다른 책 『장치란 무엇인가?』(2006)와 이 책을 겹쳐 읽어야만 한다. 『장치란 무엇인가?』에서 아감벤은 “생명체들의 몸짓들, 행동들, 의견들, 담론들을 포획하고, 유도하고, 결정하고, 차단하고, 만들고, 통제하고,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장치(dispositif)라고 부른 뒤, 이 개념의 ‘신학적 기원’(‘장치’를 뜻하는 라틴어 Dispositio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으로 거슬러 올라간 바 있다.

아감벤이 ‘장치’의 신학적 기원인 오이코노미아를 강조하는 이유는 장치의 ‘신성한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한편으로 장치는 신이 자신의 피조물들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방법(즉, 신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며, 또 한편으로 장치에 유도되는 인간들이 그 장치 안에 스스로 붙들린다는 점(즉, 장치가 인간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자연’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신성하다. 아감벤이 장치의 주요 사례로 국가, 주권, 특히 법을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좋은 시민’이 되도록 유도당한 ‘시민’으로서의 주체는 국가, 주권, 법 등을 초역사적인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세속화’란 신에게 속해 있기(또는 그렇게 생각되기) 때문에 신성하거나 종교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물들(장치들)을 다시 인간들의 사용과 소유로 변환시킴으로써 그것을 다시 ‘역사화’하고 ‘탈자연화’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신에게 속한 것을 어떻게 세속화할 수 있는가? 우선 아감벤은 어떤 사물들이 신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무시’란 신에게 속한 것을 “특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을 뜻하는데, 그런 점에서 세속화는 “신성한 것을 완전히 엉뚱하게 사용하는 것(혹은 재사용하는 것) …… 그것은 놀이와 관련된다”

그러나 아감벤은 세속화를 속세화(seularisation)와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속세화는 신성한 것의 힘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데 그칠 뿐(예를 들어 ‘하늘의 군주’를 ‘땅의 군주’로 변형시킨 근대 주권론을 보라), 그 힘에 별 타격을 주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세속화는 신성한 것에게서 그 아우라를 박탈해 그 힘을 비활성화함으로써 그것이 차지했던 공간을 “공통의 사용”을 위해 복원한다.

사실 놀이(유희)로서의 저항 전략은 아감벤 이전에도, 특히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휩쓴 68년 혁명 이후 많은 사상가들과 활동가들이 언급한 바 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20세기 초부터 등장한 정치적 아방가르드(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등)의 주요 저항 전략 중 하나도 놀이였다. 그렇지만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아감벤은 자신의 선배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첫째, 아감벤이 놀이를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놀이의 대상이 된 사물(신성한 것)의 (재)전유이다. 즉, 신성한 사물을 “공통의 사용”을 위해서 세속화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놀이(유희)는 부르주아 문화에 가하는 일종의 ‘단기’ 충격효과에 가까운 것이었을 뿐, 자신들의 공격 대상을 “공통의 사용”을 위한 것으로 전환시킨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아감벤은 자신이 말한 놀이에 스스로 괄호를 쳐둔다. 짧게 잡아도 거의 1백 년 동안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싸우면서 자본주의 역시 배운 것이 있었으니, 저항 전략으로서의 놀이를 그들 나름대로 ‘포획’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떻게? 자본은 놀이 자체에 ‘전시가치’(Ausstellungswert)를 부여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전시가치란 전시되는 것(즉, 자본에 의해 포획된 놀이)이 그 자체로 사용 영역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사용가치가 아니며, 그것으로 노동력을 측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교환가치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본은 놀이를 ‘스펙터클’로 변모시킨다. 따라서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놀이 자체도 에피소드라고, 그 에피소드가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삶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따라서 아감벤에게 저항 전략으로서의 세속화란, 세속화의 대상뿐만 아니라 세속화하는 행위(놀이) 자체를 매번 포획함으로써 세속화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려고 하는 자본의 장치들에 맞서, 그 모든 장치들이 포획한 “공통의 사용” 가능성을 다시 뽑아내 와야 하는 일종의 내기이자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이다. 그러니 이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가 가능할지 안 할지를 판단하려면 이 내기에 직접 동참할 수밖에. 아니면 아예 다른 방법을 모색하든가.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12/07 22:50



▲ ⓒ프레시안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 된다"
 
서경식 : 한국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소위 진보세력이 집권하게 됐는데 오히려 폐쇄적인 민족주의 국가로 바뀐 것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또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이어진 과거 개방적인 성격의, 또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주의가 지금도 한국에 남아 있는지 묻고 싶다.
 
김상봉 : 민족주의가 자기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형성된다고 할 때, 저항적 민족주의는 상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자기의식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소위 '월드컵 민족주의'는 더 이상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민족주의다. 지금 우리시대 많은 한국인이 더 이상 역사의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서경식 : 갖고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김상봉 : 그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인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역사의식은 영광스러운, 자랑스러운 역사로 흘러버린다. 정신적인 허영과 소수자 및 타자에 대한 배제는 늘 짝을 이룬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엷어지는 게 문제다. 일본에서는 과거 전쟁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엷어지면서 침략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 남았다.
 
요즘 한국 사회의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가를 잊을 수 있다면 모든 역사는 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식민지 개발론'이 나오는 것도 일제시대에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개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잊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시대를 기억한다고 할 때, 그 시대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였는지를 알려준 사건이 서승 선생의 '난로 사건'(편집자 주: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서승.서준식 형제가 간접 혐의로 보안사에 검거된 뒤, 서승 씨는 심문과정 중 심한 고문으로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짓 자백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경유 난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기도한 바 있다)이었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으면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죽음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잊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고통을 잊는 한 역사의식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박제화된 것만 남는다. 수치화된 박정희 정권, 그의 치적만 남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도 똑같다. 최근 경남 통영을 방문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온통 작곡가 윤이상 선생으로 도배를 했다. 윤 선생은 한국 정부로부터 끝끝내 거부됐지만 그가 죽고 나서 한국 정부에게 더 이상 무해하게 됐을 때, 그의 수난을 그런 식으로 박제화, 상업화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최고의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한국 지식인들이 동아시아인의 공통성을 쉽게 얘기하나"
 
서경식 : 동감한다. '이 나라 사람들이 고통의 기억을 잊어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은 일반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최근 창비에서 주최한 한 포럼의 주제가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공통성을 갖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은 과거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할 때 내세웠던 논리다.
  
▲ ⓒ프레시안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계속 배신당했다. 어떻게 한국에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공통성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얘기를 그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가. 언제, 어느 시점에서부터 일본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가. 최근 <한겨레>에 서강대의 한 중국전문가가 '동아시아인의 건배'라는 글을 썼다. 벌써 건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한국인들이 역사의 고통을 다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든다. 일본 시민들의 역사망각증, 즉 역사의 기억을 지우고 자기를 긍정하고 싶은 욕망을 보면서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는데, 한국에 와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다. 어떻게 이 나라 사람들은 식민지 경험이 있으면서도 일제 식민지 시절의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김상봉 : 완전히 망각했다 보지는 않는다. 또 외적 조건이 완전히 망각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기보다는 즉자적이다. 광주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도 그런 부분인데, 역사에서 언제라도 다시 침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 있는 한 방어적 무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다만 역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매번 즉자적으로 부딪힐 때만 환기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면, 그 슬픔은 힘이 되지 못한다. 수동적인 의미의 고통의 감수성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방어적이 되고 자기 보전 본능만 강해진다. 이럴 경우 고통의 기억은 인간을 용렬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고통의 기억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고통의 기억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과 타자와 연대를 위해 자기 고통에 대한 성실한 성찰을 요구한다.
 
서경식 : 일본은 전쟁의 가해자인데도 히로시마, 오키나와 등 피해자로서의 기억만 보존해 왔다. 학생들을 데리고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 가보면, 전부 피해의 기억이며 다 기호화돼 있다.
 
반면 한국은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다 잊은 듯하다. 한국의 시를 보면 김수영 시인도 그렇고 신경림의 '농무'도 패자의 역사, 패자의 아픔을 담고 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도 같은 범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패자의 아픔을 통해 자기 인식으로 형성된 감수성이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걸 잘 기억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다 잃어버린 것 같다.
 
김상봉 : 더 늦게 전에 우리 시대의 지성사를 성찰해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수난의 역사를 살아 왔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참여, 또는 연대로 확장되지 못했다. 오히려 단순한 자부심과 긍지, 이를 통해 왜곡된 민족주의로만 나타나는 게 대단히 위험스럽고 걱정된다.
 
이전 세대는 고통이 가까이 있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다. 거꾸로 지금 세대는 그런 고통의 기억은 없다. 우리 세대가 6.25를 기억 못 하듯 지금 세대는 5.18을 기억 못한다. 이들이 아는 것은 그 이후에 누린 상대적인 경제적 풍요고, 이런 경제 풍요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다 희석시킬 뿐 아니라 막연한 자부심, 자신감을 주기까지 한다. 이런 자신감과 자부심이 그 이전까지 민족적 열등감과 묘하게 맞물려 별로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과도하게 표출된 게 '월드컵 민족주의' 등 '과도한 운동장 민족의식'이 아닐까.
 
서경식 : 지금 세대적 단절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 젊은 세대의 경우 상상을 못 하니까 당시의 고통의 의미가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젊은 세대보다 기존 세대의 책임이 무겁다. 프리모 레비 (편집자 주: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했던 유태계 이탈리아인으로 2차대전 말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뒤, 40여 년 동안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홀에서 투신자살해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같은 전쟁 생존자가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을 젊은 세대에 전달하려고 할 때 느껴지는 어려움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윤동주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이부끼 사토(伊吹鄕)라는 일본 사람이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일어로 번역했다. 이부끼는 윤동주는 기독교인으로 그의 시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표출이다, 미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가 윤동주의 시에 대해 "그는 일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 것을 자신의 번역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윤동주가 표현한 '죽어가는 것들'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적인 것, 사라져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반면 이부끼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라고 번역한 것은 일본의 애니미즘(animism :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여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깊은 미움과 동의적 의미다. 미움이 있으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설사 윤동주가 일본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사랑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일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
 
김상봉 : 일본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학대했는데 그 학대받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주기까지 바라는 것은 어린애 같은 기대 아닌가.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허약함을 보는 것 같다.
 
서경식 : 이런 게 일본의 허약한 제국주의적 인식의 전형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들에게 '상상 못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해보자', '바깥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안 보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해보자'고 얘기한다.
 
민족이 타자, 침략하는 사람에 대한 반동을 통해 형성된다면 그 관계성과 운동성을 제고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윤동주가 민족 시인이라고 할 때 어떤 의미인가. 모순적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난 디아스포라이므로 민족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가 왜 조선말로 시를 썼는가. 조선말밖에 못 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간도에서 자랐기에 초중등 교육을 조선말로 받았다. 그래서 자기 진심을 조선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미 조선의 문학가들은 일본어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일본말을 쓴다는 것을 일본 문화를 배우는 의미도 있다.
 
김상봉 : 윤동주는 연희전문 출신이다. 연전이 당시 우리말에 대한 자의식이 상당히 강했다. 조선어학회 사건(편집자 주 : 1942년 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대거 투옥한 사건. 최현배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은 1년 동안 일본 경찰의 갖은 야만적인 고문에 시달린 끝에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國體)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단체'라는 죄명으로 기소돼, 6년에서 2년까지 징역을 받았다) 으로 정인보, 김윤경 등이 잡혀가기도 했다.
 
난 윤동주 같은 이가 역사에 있어 '목격자'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강건함이 없는 상황에서는 순수함이 없다. 인간을 감동시키는 순수함은 여린 감수성으로 나타난다.
 
우리 역사를 보면 저항운동에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전통이다. 동학, 항일 의병, 서승과 서준식 선생이 바로 이들이다. 1970~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감옥을 들락날락 했던 이들도 이 전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프레시안

반면 함석헌, 윤동주, 한용운은 '목격자'들이다. 하지만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다. 시인, 철학자들은 증언자가 돼야 하고, 이 증언은 언어에 대한 치열함, 몰입이 필요하다. 이들은 저항의 역사 속에 같이 존재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증언자의 전통은 별로 진지하게 반추된 적이 없다. 이제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미 부여해야 한다.
 
끝끝내 할 수 없는 일을 안 했을 때 순교자가 된다. 수난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해서 순교자가 된 게 아니다. 악한 사람들이 나의 악에 동참하라고 할 때 거기에 동참하지 못해서 순교자가 된다. 그래서 윤동주는 죽었고 함석헌은 죽지 않았지만 똑같다고 생각한다.
 
삶의 알량한 안락함, 명예, 지위 등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려면 타협해야 한다. 같은 시인으로서 서정주와 윤동주의 차이는 사소한 것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절대적인 것이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단순히 소극적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서경식 :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보면 자기 운명을 아주 냉담하게 예측한다. 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런 것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김상봉 : 그런 전통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고 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내 경우를 보면, 무엇이 살아있게 했는가? 내 인생에 각인된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서승선생의 '난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일방직사건(편집자 주 : 1978년 인천의 동일방직이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을 부수고 인분을 투척한 사건)이다. 내게는 이 두 사건이 하나이자 전부로 삶을 이끌어 왔다. 내가 당한 상처였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고통이 한 사람의 삶에 지울 수 없이 각인돼 삶의 에너지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들의 고통은 혼자만의 무익한 고통이나 수난으로 끝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수 많은 다른 타인들의 응답 속에서 역사가 발전한다. 내가 마음속으로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얘기는 그 고통을 누가 대신해줄 수 없었지만, 그분들이 품었던 이상주의적 열정이 절대로 역사 속에서 속절없이 배신당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때"
 
서경식 : 윤동주의 시 '별을 헤는 밤'을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온다. 윤동주는 이를 통해 열린 형태의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본다. 민족의식이 형성되는데 타자와의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타자와 만나지 않을 때 국수주의적 민족의식이 우선한다.
 
윤동주의 모어(母語)는 조선어였다. 나는 일본어가 모어다.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는 35년 만에 끝났지만 아프리카처럼 1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면 모어가 없어지고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들에게 모어가 절대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자기가 쓰고 있는 모어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면 나도 운동주의 '서시'를 보고 이부키 같이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내 사고엔 일본적인 사고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 좋다는 느낌 자체가 일본어로 구성된다.
 
일본어라는 모어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아기일 때 투입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원초적인 폭력이다. 이 과정이 폭력으로 인식되면 근원적인 것도 의심하게 된다. 애국심이나 가장 깊은 수준까지 생각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말에 대한 의심까지 든다.
 
김상봉 :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이 '실체'냐 '무(無)'냐 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빠질 수 있다. 민족은 '실체'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집단적 주체다. 그것은 '우리'라는 공유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그것이 없으면 사라진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자와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언제나 타자와 만남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성이 형성되고 그게 '서로 주체성'이다.
 
나는 이전에 민족을 가리켜 역사와 언어라고 하는 어떤 전제, 조건 위에서 수립되는 '공동 주체성'이라고 풀이했는데, 서경식 선생을 만나면서 내 안에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타인과 만남에 전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역사나 언어라는 전제를 버려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에 들어온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민들과의 '공동 주체성'의 형성이란 과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만남의 공동체' 정도로 느슨하게 개념 지어져야 한다.
 
윤동주 시인이 패, 경, 옥 등 이국 소녀 이름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개방성에 대해 개념적인 말로 형상화시켜야 하는 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디아스포라적인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지금까지의 민족 개념이 아닌 다른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혼자서 곱씹으면서 도달한 결론이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개념은 만남의 지평 그 자체를 민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 : 5·18에서 '서로 공동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다 나서서 싸운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 일상적인 지역적 억압에 대한 분노 등이 근간이 됐다. 한국 사람이니까, 광주니까,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5·18을 생각하면 정치적 이념에 앞서야 하는 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의 문제다. 그것 없이 정치적 이념이 먼저 갈 때 인간은 수단화된다.
 
서경식 : 1960년대에 일본에 재일조선인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을 때 일본 내에서 조선 문화를 얘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장은 일본이 고대와 중세 때 백제, 고려 등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있다, 없다는 문제와 지배, 피지배는 다른 얘기다. '문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천대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배당해도 되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인들이 인디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 보면 식민지 지식인의 인식의 세 단계가 나온다. 처음에는 백인에 동일화하려고 노력하고, 두 번째 자기들이 고대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문화가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아프리카에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백인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문화를 시발점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 있는 싸움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바로 디아스포라인 내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파농도 디아스포라다. 알제리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위해 싸웠다.
 
김상봉 :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이 한국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
 
서경식 : 디아스포라적인 객관성이 있다. 디아스포라야 말로 자신의 존재조건, 즉 언어조차 의심하면서 그래도 남는 자신을 근거로 타자와 서로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 노동자를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그들과 만남을 바탕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삶의 의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이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끈들을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디아스포라 기행> 46~49쪽)
 
김상봉 :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제일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낯선 도시 호텔방에서 내가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나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한 인간이 놓여 있는 측량할 수 없는 뿌리 없음, 허무함 등에 대해, 이 절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응답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허무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교양인이 아니라는 식의, 우리 시대의 가벼운 허무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로서 아주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허무의 체험과 또 정반대로 보통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말로 서경식 선생이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만 더 정면으로 선생이 그 지점을 대면해줄 수 있겠나.
 
서경식 : 아주 근본적인 문제다. 민족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허무주의라고 할 때는 두 가지가 생각난다. 가네코 후미코(편집자 주: 조선인 남편 박열과 함께 1923년 히로히토 당시 일본 왕세자와 고관들을 폭살하려다가 붙잡힌 일본인. 1926년 3월 이들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가네코는 석달 후 감옥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무정부주의자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주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사생아라서 호적이 없었고, 그래서 소학교도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미코는 가부장제와 국가 제도에 대해 아주 철저한 증오를 갖고 이를 끝까지 관철했던 사람이다. 그는 죽음으로 자기를 관철했다.
 
이봉창(편집자 주: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로 일왕 히로히토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 그해 10월 사형을 당했다)도 마찬가지다. 과자점 직공, 철공소 직공 등을 전전하던 그는 유가다를 입고 게다를 신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죽고 싶다. 죽을 명분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봉창이 마지막에 히로히토를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갈 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평생 집착이 없었다. 이봉창도 다이스포라였고 그래서 그런 허무주의자의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삶에 집착하는 한 누구도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걸 수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 근원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 때문에 병든다.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냉소에 빠지면 모든 게 다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 정반대로 그 허무주의를 참을 수 없을 때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유토피아도, 절대자도 오지 않는 시대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로 그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서경식 : 진부한 말이 될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정의'다.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다. 중국의 루쉰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길이 있다고 해서 걸어가는 게 아니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건 싸움이 아니다. 근거가 없더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전부 다 없어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뭐냐고 물으셨는데, 그럼 전부 다 없으면 죽는 것이냐. 개개인의 허무주의와의 싸움이다. 19세기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은 다 귀족이었다. 사치스럽게 살 수 있었는데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나눠줬다. 이런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변화가 있었다.
 
김상봉 : 수백년 전 사람이 경험했을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동력 같은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다.
 
서경식 : 나는 유한이다. 국가나 국민은 무한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죽으면 불사가 된다. 새로운 우리라는 걸 구성할 때는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해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 한 국가나 국민이 재생되고, 국가주의나 국민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
 
진짜 자유인이 되려면 이것부터 거부해야 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는 길이다. 마음 아프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만든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 삶의 끈을 잡는 행위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를 놓는 게 패배라고 생각해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내일 여기에서 몸을 던지고 죽었다고 해도 놀랄 필요나 가슴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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