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학기에 교지에 쓴 글. 나름 거창한 계획을 갖고 시작한 기획이었는데 뜻대로 아니되어 슬프오... ;ㅅ;
우리들의 우울한 시간
-우울의 문화정치경제학
시대의 기분, ‘우울’
우리는 어디서든 우울을 본다. 아침에 사람들로 꽉 들어찬 지하철에서도 볼 수 있고, 강의실에서 내 옆에 앉은 이름 모를 학우의 얼굴에서도 읽을 수 있고, 하다못해 친구의 미니홈피와 수백만 개의 블로그에서도 우울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우울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우울을 말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우울의 원인은 제각기 갖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제각기 저마다의 역사와 서사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개인마다 우울을 경험하는 수준과 방식도 다르다. 그러니 어쩌면 우울에 대해서 ‘시대의 기분’이라고 칭하는 것은 안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90년대 1044건, 2000년대 2318건이라는 숫자를 보자. 검색어 ‘우울’로 C일보 아카이브에서 검색어 ‘우울’로 노출되는 기사의 숫자다.1) 좀 더 흥미로운 건 1980년대엔 고작 65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뚜렷하게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은 2000년대 들어서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7년간 키워드 ‘우울’로 서울 시내 주요 일간지 10개를 대상으로 검색해보면 2000년 1271건, 2004년 2084건, 2007년 현재(11월 17일)까지 2206건으로 거의 순증가추세를 보여주고 있다.2)
이러한 숫자는 갈수록 수다스럽게 우울을 말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하나의 지표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제 우울은 어느 특정한 곳에서 생산되고 있다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도처에서 이야기되며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각 개인들은 우울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고, 의사와 상담자등의 전문가들도 그것에 대해 수다스럽게 떠들어댄다. 교육학, 심리학, 언론 등의 제도가 이러한 담론의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실체 없는 우울 앞에 짓눌리고 있는 (집단적 의미에서) ‘개인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울을 오롯이 개인의 것으로 환원하는 것은3) ‘심리학적 개인’을 우울의 출발지점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 바라보게 됨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가 어떻게 우울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우울을 어떻게 의미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석을 중단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닌) ‘우리’는 왜 우울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 내려가는 일일테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왜 이렇게 더 우울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되었는지, 왜 우울을 더 많이 말하게 되었는지, 그렇게 더 많이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은 과연 무엇인지, 그렇게 더 많이 말함으로써 드러나는 것들은 무엇인지, 그렇게 더 많이 말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 글은 ‘우리들’이 우울하게 ‘된’, 그리고 시대적 기분이 우울하게 ‘된’ 원인에 대한 필자 나름의 분석을 담아내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개괄적이고 포괄적일 수 있는 분석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101가지의 오류는 오롯이 필자의 몫일 것이다.
자기애적 우울-주체, ‘나me’의 등장
우리는 사회·정치·경제·문화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등장은 서구의 근대 이후부터라고 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러니 지금 이제서 ‘나’의 등장을 들먹이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은 이미 우리들 사이에 이미-항상 존재해왔고, 우리들 역시 항상 정치적 실천적 주체로서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서구의 ‘근대적 개인’이 이제야 새삼스럽게 등장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나’를 굉장히 존중하고 추구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단어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나’가 되었다.4)
오늘날 미니홈피와 블로그 숫자의 폭발적인 증가는 이러한 맥락과 함께 생각한다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개인 미디어의 특징은 ‘나me’-미디어라는 데 있다. 나만의 욕망, 나만의 일기, 나만의 글, 나만의 사진첩, 나만의 UCC, 나만의 창조물,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리고 비밀스러운 나만의 세계. 그것들을 자랑스레 표현하고 게시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이런 미니홈피와 블로그라는 ‘나’-미디어다. 모 블로그 사이트5)는 “나를 표현하는 블로그 ○○○○!” “The Real Identity”라는 말을 로그인 화면에 덧붙인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모든 자기계발 행위들은 (자기애적인) ‘나’를 위해서라고 해석되지 않는가? 우리는 다이어트건 헬스건 나 보기에 좋기 위해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행동으로 의미화한다.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들이는 뼈를 깎는 노력들도 나 살기에 편하고 더 잘 살기 위해서라고 의미화 한다. 또한 ‘내’가 좋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싫으면 뭐든지 ‘미련 없이’ 내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말하고 추구하는 ‘쿨’의 자세다. 유명한 광고에서는 모델이 “난 소중하니까요”를, 그리고 “당신은 소중하니까요”를 외친다. 소중한 ‘나’는 나를 알아봐주는 제품을 써야 한다. 오늘날 대인관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프라이버시’의 존중이라는 특이한 매너가 요청된다. 각각의 소중한 ‘나’는 프라이버시의 존중이라는 이름하에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C. Baudelaire)는 『근대적 삶의 영웅주의』에서, 일상적인 삶의 태도의 한 양식으로 댄디즘dandyism을 제시한다. 이런 식의 삶의 자세란 “다양한 세계에 뛰어드는 것, 홀로 통속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 것, 독특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일상적 차원에서 일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는 고독한 삶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6) 물론 이런 보들레르식의 태도는 근대적 개인을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은 투명한 주체로 놓고 보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개인을 ‘나’라는 특정한 의미로 의미화 함으로써, 스스로를 세련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며 자신을 고안하고 발명하려는 자세다.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기애적 ‘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라는 개념과 ‘나’라는 개념을 구분하고 전자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일상에 대한 경계”라는 말을 쓰고, 이를 “고독한 삶의 태도”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보들레르 시집의 제목인 『파리의 우울』에서 볼 수 있듯 우울한 태도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최근 등장한 신조어 중에 “글루미 제너레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우울한 일상적 삶과 그에 따른 특이한 생활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예전엔 으레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가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식당, 극장, 전시회 등의 문화적 소비 공간에 ‘혼자’ 오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는 사실과 깊게 맞물려 있다. 실로 “서울의 우울”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이렇게 자기애적이고 우울한 ‘나’라는 주체가 등장했다고 언급하는 것8)은, 그 자체로는 물론 아무런 의미를 띠지 않는다. 주체성은 영원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상황적 맥락에 따라 언제나 항상 따로 있었으며, 오늘날의 ‘나’라는 주체 역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다. 푸코(M. Foucault)가 지적했듯이, 주체는 담론 장치와 그것의 권력 작용에 따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석을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우울한 ‘나’라는 주체성은 보다 의문시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나’라는 주체가 등장한 맥락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떠한 것들과 맞물려 있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계급성감각, 우울, 그리고 ‘나I/me’‘나I/me’라는 새로운 주체성은 각 개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까지도 변화시킨다. 세계관도 ‘나’라는 주체 개념과 함께 재구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인권 선언’에 따라 평등하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든 계급class이 철폐되었으므로 실제로 계급에 의해서 삶이 좌우되거나 삶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배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일종의 ‘지향’―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허나 자본주의는 ‘누구나’ 노력하면 다 잘살 수 있을 거라는 신화myth를 자신의 주요한 원리로 채택한다. 즉 자본주의는 ‘실제로’ 모두가 평등한 사람이라는 다소 무리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화폐는 누구 한 사람이 전부 다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특정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행위를 했을 경우 일정한 분량의 화폐가 분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과 맞물려 오늘날 새롭게 탄생한 ‘나’들은 그 어떤 ‘계급성’도 띠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우리는 한국 사회 어디에서나 ‘성공 신화’를 접할 수 있다. 그것이 사업의 성공 끝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 졸업과 동시에 샘숭(Samsung)에 덜컥 취업을 하는 것이든, 혹은 고시 등의 ‘공부’를 통한 성공이든, 우리는 ‘나’의 노력을 통해서 얼마든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인식하기 쉽다. 속칭 엄친딸, 엄친아의 성공 신화는 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계급)나 상황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잘난’ 속성 때문이라고 쉽게 생각된다. ‘나’는 사회의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하지만 실체는 불분명한―엄친딸, 엄친아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경험을 맛본다.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단지 ‘나’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이를 무계급성감각(a sense of classlessness)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바 있다. 홀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은 새로운 소비문화가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여기서 효과라고 언급한 까닭은, 우리 사회에 계급성이 실제로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 개인들이 계급성을 ‘마치 없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즉 상품과 문화적 코드에 대한 증대된 접근성 때문에, 그리고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것을 향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사회에 실재하는 ‘계급성’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소비문화’의 고도의 발달은 전근대적 사회의 특징이었던 계급에 따른 ‘부’의 차등 분배와 빈궁 상태에서 해방된 것 같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 부(富)의 주요 축적 수단인 주식, 부동산 투자 같은 것은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그 누구에게나 제약없이 열려 있다. 물론 로또 복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유령같이 떠도는 성공 신화 속에 우리를 위치 지으며 절로 우울해지는 수밖에 없다. 주어진 이상(ideal)과 자신의 현실 사이의 엄청난 괴리는 외상적인(traumatic) 무력감의 상황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이 강할수록 각 개인들은 그 이상에 지나치게 민감해진 나머지 열등감과 자기 멸시에 시달려 자신을 가혹하게 비난하기 쉽다. 이러한 자기를 향한 비난은 곧 자기 존중감의 약화와 우울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오늘날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성공 신화’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이상(cultural ideal)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S. Freud)가 지적했듯 문화적 이상은 각 개인들에게 자기애적 만족을 제공한다. 이 자기애적 만족은 사회의 특권층 뿐 아니라 억압받는 계층 역시도 적당히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환상’에 가까운데, 이것이 유지되는 까닭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환상이 굳이 현실과 모순되지도 않으며 아예 실현 불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환상은 실현 가능성의 입증도 불가능하지만 반박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심형래 감독의 성공 신화 역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사회에서 고깝잖은 시선을 받았던 심형래 감독은 성공 신화 속에서 짓눌리던 수많은 우울한 ‘나’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닐까? 마치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심형래 감독은 그야말로 ‘나’들이 추구하는 오늘날의 성공 신화를 체현한(embodied) 인물은 아닐까? 프로이트는 조울증(躁鬱症)9)에서 ‘조증(mania)’와 ‘울증(melancholia)’를 구분하면서 울증은 이상(ideal)이 자아를 억누를 때 발생하는 것이며, 조증은 자아가 이상을 억누를 수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심형래 감독의 성공 신화를 향한 대중들의 동일시적 반응은 실로 프로이트가 말한 조증에 가까운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지적했듯, 조증에 걸린 개인의 특징은 승리감과 자족감에 빠져 어떤 자기비판에도 시달리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나 양심의 가책이 사라진 상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10)
탈근대 자본주의11) 이데올로기의 존재적 불안과 우울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명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울을 ‘노동’에 대해서도 적용 시켜 봐도 마찬가지로 성립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물론 개개의 노동(work)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노동(Work)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개인인 ‘나’가 불안하고 우울하다기 보다는, 탈근대 자본주의에서 노동하고자 하는 주체들이 반드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양식이 곧 불안과 우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안과 우울은 하나의 단순한 정서라기보다는 곧 탈근대 자본주의의 노동하는(하려는) 주체의 또 다른 이름이자 초상이다.
대학을 졸업할 우리들은 곧 ‘노동 시장’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장 안에 들어가기 위한 ‘취업’이라는 관문 앞에서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오늘날 노동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자격(qualification)에서 역량(quality/capacity)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적당히 하나의 시험을 통과하거나 학벌을 취득하면 노동 시장에서 특정한 위치가 보장되었지만, 이제는 끊임없이―죽을 때까지, 평생―자기의 능력을 검증하고 설명해야만 노동 시장에서의 적절한 위치가 보장된다.12) 오늘날의 노동 시장은 보다 ‘경쟁력’있고 능력 있는 삶을 요구하고, 늘 새로운 것과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생애 전체에 걸친 ‘평생 교육’을 통해 지속적인 훈련과 능력의 습득을 권장한다. 심지어 ‘남들이 쉴 시간’에 오히려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서 자기의 지속적인 능력 향상을 꾀하는 삶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기업의 취업 모집 광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13)
이러한 탈근대 자본주의적 노동-주체성으로 주체화 된 개인들은 일상적으로 불안과 우울을 체험하게 된다. 당장 오늘 내일이 불투명한데 어찌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오늘날의 탈근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불안이라는 주체성을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팔아먹으려고 시도한다. 마치 이런 방식으로 말이다: 광역화는 답답한 분과학문 체제를 벗어 던짐과 동시에 전공 선택의 기회를 넓히고 보다 열심히 공부할 기회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노동의 유연성과 비정규직화를 평생직장이라는 낡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자 스스로를 갱신하고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취업을 위해 외국어를 회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도 전 세계의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자신의 프로페셔널한 능력을 자랑할 기회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방식으로 ‘문화적 이상’을 조성한다. 더욱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과 그에 따른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결과들이라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나’의 노력과 능력이 투입된 만큼의 보상을, 혹은 그 이상의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각 주체들에게 자기애적 만족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오늘날 그 이데올로기를 체험하는 ‘나’들의 또 다른 실재하는 초상은 불안과 우울이다.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불안과 우울이라는 ‘나’들의 주체성을 팔아가며 굴러가는 체제이며, 그에 따라 얼핏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일 수 있는 자본주의적 이상의 이면에는 항상 우울한 개인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우울한 주체들을 소환함과 동시에 어딘가에 감추고 통제한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타고났다고 가정된 현대적인 주체성인 ‘나’와 맞물리게 되면 우리들은 이 모든 불안과 우울함이 곧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게 된다. 즉 능력이 모자란 ‘나’야 말로 자신이 체험하는 불안과 우울함의 근원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안과 우울을 타파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모자란 나’를 탓하며 더 열심히 노력하는 방법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모자란 나’라는 열등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우울에서 한 발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모든 변화들이 ‘나’의 탓이지 자본주의 시장 세력과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 결과는 아니라고 해석하기 쉽게 된다.14)
만약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탈근대 자본주의는 그들을 일컬어 지루하고 낡은 형식에 매달리는 미숙한 사람들이라고 진단을 내릴 것이다. 당신들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갈망하며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자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오늘날 ‘히키코모리’15)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과 우려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그 집단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낼 이유는 하등 없지만, 항상 자본주의적 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개인들과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있어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충격감을 주기 때문이다. 탈근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체제 속에서‘만’, 히키코모리는 사회의 ‘낙오자’로 의미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우울’의 관리, 탈근대 자본주의적 재생산 메커니즘한 사회의 일반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질서에 적합한 ‘정상적’인 주체를 생산해내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된다. 마찬가지로 탈근대 자본주의는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단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질서를 운용하는데 적합한 신체들 그리고 그 질서에 적합한 특정한 정신 상태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 사회 속의 각 개인들에게 따르고 추구해야 할 일종의 ‘규범’으로서 제시한다.
이렇게 탈근대 자본주의적 개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프로젝트가 요구된다. 하나는 개개인의 신체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명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에 대한 사회적인 대규모 조치와 개입이다. 이러한 사회적 명령과 개입을 통해서 탈근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정치경제학적 질서와 배치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탈근대 자본주의적 주체들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방식이 불안과 우울이라면, 우리는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불안과 우울한 주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재현하고 개입하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울을 둘러싼 가장 흔한 담론은 아마도 ‘우울증’이라는 특이한 형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안에는 ‘불안 장애’라는 말이 어울리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울에 대해서 ‘정신병리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16) 즉 의학 담론을 통해서, 그리고 상담가라는 전문가를 통해서 우울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체제에 의해서 우울이 ‘관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울은 일종의 ‘비정상적 상태’로 규정되고, 국가-권력의 관리를 받으며 교육받은 전문가들을 통해 예방 혹은 ‘치료’하도록 유도된다.17) 또한 현대의 ‘우울증’ 담론은 우울을 온전히 심리학적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즉 개개인들에게 우울의 원인을 돌림으로써, 우울을 생산하는 사회의 결핍과 결함을 감추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이는 최근 들어 ㅇㅇ대학교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기숙사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정신 진단을 받아야 한다. 개인의 정신 상태가 ‘관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학내 <대학생활상담문화원>에서도 우울과 관련한 상담 프로그램을 연이어 개설하기 시작했다. 언론 매체에서도 한국 사회의 ‘우울증’이 위험수위에 달했다며, 고작 10여 문제에 달하는 어설픈 자가 진단 테스트를 제시한 뒤에, 그 결과를 통해 조금만 우울증의 기미가 보이면 장차 위험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라고 수다스럽게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새로운 전 사회적으로 명명되고 이야기 되는 ‘우울증’은 각 주체들을 통제하고 조직하는 수단이 된다.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교정’된 주체들이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질서에 안정적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현대적인 우울은 탈근대 자본주의가 작동하면서 생산해내는 전반적인 ‘효과’이기도 했다.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우울을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장시간에 걸친 육체노동에 따른 ‘피로(fatigue)’를 관리하기 위해 갖가지 여가 제도를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의 신체를 보다 잘 관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도록 하는 등의 각종 사회적 장치들을 만들어 낸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육체노동에 한했던 당시의 자본주의 노동체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신체에 축적된 ‘피로’였기 때문이다. 즉 ‘피로’는 근대 자본주의의 담론적 산물인 것이고, 동시에 그 산물을 적절히 조절하고 관리할 필요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에서 노쇠하고 피로한 신체가 ‘비천한 몸’―비체(卑體;abject)가 되었듯, 현대의 탈근대 자본주의에서 ‘우울증’에 걸린 신체도 차츰 비체화 된다. 그에 따라 이제 우울도 차츰 관리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등장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장치들은 순수하게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를 보다 더 잘 굴러가도록 하고 유지하기 위한 ‘재생산 장치’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다스럽게 이야기되고 생산되고 있는 ‘우울증’이라는 특이한 담론은 탈근대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새로운 재생산 형태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많은 한계점을 남긴 채 이대로 끝 맺는게 아쉽지만 몇 마디 덧붙이려 한다. 우울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었고, 또한 지금도 역시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역사속의 개인들은 개개의 독특한 우울을 경험했다. 오늘날의 개인들에게도 분명히 우울한 상태는 유쾌한 경험만은 아닐 것이며, 때로 심각한 수준에서 경험되기도 한다. 게다가 우울의 원인을 살펴봄에 있어서 사회문화적으로 생산되고 역사 속에 항상 존재했던 우울에 관한 선망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 탈근대 자본주의가 우울을 새로운 형식으로 재현하고 재창조하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우울을 반드시 ‘치료’하거나 거부할 대상으로 볼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울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또한 우울을 어떻게 탈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는 조금은 다른 맥락에서 의미화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는 것일 테다.
그리고 한편으로 점차 사회적으로 우울한 개인들이 증가한다는 것은, 점차 증가하는 사회적 불만과 절박한 욕구들의 투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개인이 아닌) ‘우리’가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우울은 현대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한 근원적인 실망을, 그리고 한국에서는 어떠한 욕망도 충족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지표일 수도 있다. 이는 곧 현대의 지배 권력(들)에 대한 잠재적 ‘저항’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각주)-----------------
1)
http://kiss.kstudy.com의 신문 아카이브에서 검색
2) 한국언론정보재단
http://www.kinds.or.kr에서 검색
3) 이것은 최근 한국 사회가 우울을 재현하는 대표적 방식이다.
4) 이것은 ‘나’라는 ‘실체’에 대해 언급하기 보다는, 일종의 개인적이고 심리적 ‘추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심리학적 개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5)
http://www.tistory.com6) 양운덕, 『미셸 푸코』, 살림, 2006, p. 83
7) 이는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을 찾으라는 사회적 요구와도 맞물려 있다. 대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는가? 오늘날 자기 정체성을 찾으라는 말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나’라는 개인을 고안하고 발명하라는 초자아적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8)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적 자아와 조울증과의 연관성을 지적한 바 있다. 자세한 것은 S. 프로이트, 「나르시시즘 서론」,『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3을 참고.
9) 조울증은 병적인 흥분 상태를 나타내는 조증과 그 어떤 이유도 알 수 없는 슬픔과 불안 같은 감정을 동반하는 울증이 순환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말한다. 보통 울증의 상태가 보다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그에 비하면 일반적인 ‘평론가’들의 자세는 ‘울증’에 보다 가까운 것이었다(윤경과의 대화에서). 조증과 울증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S. 프로이트,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03을 참조.
11) 이 글에서는 “탈근대 자본주의”라는 논쟁적인 말에 대해서 별다른 성찰 없이 넘어가려고 한다. 여기서는 일단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운운하는, 그런 특정한 경제 환원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12) 여기서 전자의 경우를 긍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후자로의 이행이 과연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3) 어떤 기업은 “당신의 주말이 궁금합니다.”라며 취업 지원자들의 주말까지 관리하려는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14) 보다 자세한 내용은 Slavoj Zizek, "Against Human Rights", New Left Review(vol. 34, 2005)를 참조.
15) 한국말로는 소위 ‘은둔형 외톨이’를 말한다. 소위 ‘오타쿠’나 ‘동인녀’와 같은 개념은 아니다.
16) 신문 아카이브를 검색해보면 80~90년대에는 우울증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우울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이는 90년대 후반 이후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특이한 현상이다.
17) 현대의 ‘의학 권력’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언급은 이 기획의 두 번째 글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