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누군가들은 자기의 정체성 자체로 자기 언어를 정당화 할 수 있다. 애써서 존재를 포지셔닝 할 필요 없이, 정체성의 세계에 존재를 등록하고 발언권을 얻은 이들이, 이 사회에는 대다수다. 자신은 남성이니까 남성의 언어로 말하고, 이성애자니까 이성애자의 언어로 말하고, 백인이니까 백인의 언어로 말하고, 비장애인이니까 비장애인의 언어로 말하고, 자본가니까 자본가의 언어로 말한다. 이들의 정체성은 언어에 반영되고, 언어는 정체성을 수행적으로 강화한다. 거기에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정상적이며, 따라서 아무런 흠집이 없다. 자연스럽기에 애써 정당화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정당성을 얻는 언어들. 존재와 정체성을 반영하는, 투명한 언어들.
반면 아주 드문 경우 정체성 범주의 주민등록증을 거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있었다. 그들은 정체성이라는 늪을 거부했으나 차츰 늪에 빠져드는 이들이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언어에 질식해 버리는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섶을 지고도 불가항력에 불로 뛰어드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건, 오로지 포지셔닝 뿐이었다. 자기에게 사회적으로 할당된 정체성이 자신을 전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의존해야 하는 건 오로지 유동적인 포지션 뿐이었다. 포지션이 없으면 언어도 없으므로, 언어가 없으면 곧 죽을 것 같았으므로.
나는 그런 이들에게 매력을 느꼈고, 어쩌면 매력을 느끼는 걸 넘어 동족으로 인식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이 땅 어딘가에서 트위터나 블로그 같이 작은 창 하나로 숨통을 트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지금은 비로소 어딘가에 소속되어 정체성의 영주권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영악하게도 그때의 고민과 고통을 단지 한때의 성장통으로 치부해버리며 어디선가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다들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다른 이들이야 날 어떻게 보든, 지금 내게 남은 것 혹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포지셔닝 뿐이다. 여전히도 내게 있어서 정체성은 온안하고 온당하며 온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에 가까우므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애매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유랑하는 포지셔닝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며, 공격과 적의와 의심 앞에 깨어지고 바스라지기 쉽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뿌리 내리지 못한 언어는 성장이 없고, 안정되게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수척하고 강퍅하며, 비바람 폭풍 앞에서는 쉽게 토대를 잃고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지금껏 나는 오로지 타인들의 환대에만 의존해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소속될 수 없는 세계에서 일부 할당된 환대의 공간에, 환대의 언어에, 환대의 시간에, 잠시 머물며 흡혈하고 기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환대를 먹고 산다. 그러나 갈수록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신감, 수치심, 죄책감, 무력감, 무능감, 이런 나쁜 것들이 요즘의 내 일상을 사로 잡는다. 만성적인 편두통이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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