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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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01 늘 발목잡는, 애매한 포지션
  2. 2008/05/01 (다문화주의/사회에서) 전도되는 모더니즘 (6)
조각들 / 2010/06/01 00:23

분명 누군가들은 자기의 정체성 자체로 자기 언어를 정당화 할 수 있다. 애써서 존재를 포지셔닝 할 필요 없이, 정체성의 세계에 존재를 등록하고 발언권을 얻은 이들이, 이 사회에는 대다수다. 자신은 남성이니까 남성의 언어로 말하고, 이성애자니까 이성애자의 언어로 말하고, 백인이니까 백인의 언어로 말하고, 비장애인이니까 비장애인의 언어로 말하고, 자본가니까 자본가의 언어로 말한다. 이들의 정체성은 언어에 반영되고, 언어는 정체성을 수행적으로 강화한다. 거기에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정상적이며, 따라서 아무런 흠집이 없다. 자연스럽기에 애써 정당화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정당성을 얻는 언어들. 존재와 정체성을 반영하는, 투명한 언어들.

반면 아주 드문 경우 정체성 범주의 주민등록증을 거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있었다. 그들은 정체성이라는 늪을 거부했으나 차츰 늪에 빠져드는 이들이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언어에 질식해 버리는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섶을 지고도 불가항력에 불로 뛰어드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건, 오로지 포지셔닝 뿐이었다. 자기에게 사회적으로 할당된 정체성이 자신을 전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의존해야 하는 건 오로지 유동적인 포지션 뿐이었다. 포지션이 없으면 언어도 없으므로, 언어가 없으면 곧 죽을 것 같았으므로.

나는 그런 이들에게 매력을 느꼈고, 어쩌면 매력을 느끼는 걸 넘어 동족으로 인식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이 땅 어딘가에서 트위터나 블로그 같이 작은 창 하나로 숨통을 트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지금은 비로소 어딘가에 소속되어 정체성의 영주권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영악하게도 그때의 고민과 고통을 단지 한때의 성장통으로 치부해버리며 어디선가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다들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다른 이들이야 날 어떻게 보든, 지금 내게 남은 것 혹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포지셔닝 뿐이다. 여전히도 내게 있어서 정체성은 온안하고 온당하며 온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에 가까우므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애매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유랑하는 포지셔닝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며, 공격과 적의와 의심 앞에 깨어지고 바스라지기 쉽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뿌리 내리지 못한 언어는 성장이 없고, 안정되게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수척하고 강퍅하며, 비바람 폭풍 앞에서는 쉽게 토대를 잃고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지금껏 나는 오로지 타인들의 환대에만 의존해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소속될 수 없는 세계에서 일부 할당된 환대의 공간에, 환대의 언어에, 환대의 시간에, 잠시 머물며 흡혈하고 기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환대를 먹고 산다. 그러나 갈수록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신감, 수치심, 죄책감, 무력감, 무능감, 이런 나쁜 것들이 요즘의 내 일상을 사로 잡는다. 만성적인 편두통이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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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5/01 15:29

Slavoj Žižek, "Multiculturalism, or, the Cultural Logic of Multinational Capitalism", New Left Review(225: 1998), p. 42에서 일부를 대강 번역. 좀 어색한 번역이지만 ^^;

‘어메리칸 드림’의 점진적인 붕괴ㅡ아니 오히려 그 실체의 상실은ㅡ헤겔이 기술한 바 일차적인 정체성(primary identity)으로부터 이차적인 정체성(secondary identity)으로의 이행이, [오늘날]예기치 않게 전도(reverse)된다는 사실의 목격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들의 ‘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이차적 정체성이라는 ‘추상적’인 설정은 점차 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 주지 못하는, 현상적이자 순전히 형식적인 틀로 경험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점차 더 작은 정체성ㅡ종족적이고 종교적인ㅡ의 형식인 ‘근본적인premornial’것에서 지원받기를 원한다. 그러한 정체성의 형식이 심지어 민족 정체성보다 더 ‘인위적’일 때라도ㅡ게이 커뮤니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ㅡ그러한 정체성들은 특정한 ‘삶의 방식way of life’ 안에서 개인들을 보다 즉각적이고 압도적으로 붙들어 맨다는 점에서 더 ‘직접적immediate’이다. 이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시민이라는 자격 속에서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추상적’인 자유를 제한한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다루고 있는 것은 근대 초기의 민족/국가Nation 구성의 전도된 과정이다. 즉 ‘종족성의 민족화’ㅡ탈종족화de-ethnicization, 종족성의 민족성으로의 ‘지양(Aufhebung)’ㅡ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지금 ‘종족의 뿌리’에 대한 재탐구(혹은 재구성)와 함께 ‘민족성의 종족화’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차적인 정체성의 형식으로부터 ‘유기적인’ 커뮤니티를 가진 ‘근본적인(원시적인)’ 정체성으로의 ‘퇴행’은, 이미 [세계시장자본주의에 의해] ‘매개되어mediated’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그 배경background에 저항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출발 배경은 민족국가Nation-State] 그 지형terrain에서 발생하는 세계 시장의 보편적인 차원에 대한 반응(reaction)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이러한 현상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퇴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확히 정반대되는 것의 출현 형태이다. 즉, [헤겔이 말한]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on’의 한 종류로서, 이러한 ‘근본적인’ 정체성이 오늘날 거듭 언명된다는 점은, 유기적-실체적인 조화unity의 상실이 이제 완전히 완성되었다는 것을 지시한다.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



지젝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부정의 부정", 알듯 하면서도 알듯 말듯 =_= 역시 철학 공부를 시작하려면 딴 경로를 들르기 보다는 직접 칸트와 헤겔로 가야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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