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정신분석학'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12/28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2)
  2. 2010/05/30 정서의 학습, 학습하는 몸, 무의식
  3. 2009/05/05 박쥐
  4. 2009/03/15 나쁘지 않은 일상 (2)
  5. 2008/06/15 "사랑의 은유"
  6. 2007/07/15 나르시시즘 (1)
독서노트 / 2010/12/28 12:06

마지막 남은 기말 요약과제. 계속 수정중인 글이긴 한데... 이렇게라도 올려버려야 끝날 것 같아서.
사실 이 장의 요지는 세속적인 문장 딱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난 떨지 말고 겸손해지라. =_=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Chapter 2. 'Against Ethical Violence'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버틀러는 그가 이전부터 계속 보여 왔던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버틀러는 모든 근대적 인식론의 폭력성, 즉 제대로만 한다면 모든 사물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한다. 근대적 인식론은 타자를 지식으로 다루지만 버틀러에게 오면 타자는 포획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타자는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들 삶의 근저를 뒤흔들고, 또한 시공간적으로도 여기에 이미 항상 도래해 있는 존재다. 2장의 초입에서 읽을 수 있는 버틀러의 단어는 불투명성, 비일관성, 자기동일성의 폐기, 무한히 열린 질문, 앎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이해, 필연적인 인정의 실패, 의무, 윤리적인 실패, 윤리적인 기획 등이다. 이제는 묵은 먼지 날리는 서고에서나 볼 수 있는 기투, 헌신, 책임, 앙가주망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버틀러의 글은, 어쩌면 버틀러야말로 이 시대에 유일한 실존주의의 상속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도 한다.

  버틀러는 2장에서 포스트-헤겔적인 인정(recognition)을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 가져가려고 한다. 이를 위해 버틀러는 우선 ‘투명한’ 인정을 일종의 윤리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투명한 인정의 장면은 우리들은 물론 우리와 인정을 주고받는 타자들의 일관성과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타자는 인정을 수여하는 우리들의 일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삭제될 뿐이다. 그 대신 버틀러는 인정 장면의 근본적인 불투명성에서부터 윤리적인 가능성을 읽어낸다. 1장에서 버틀러가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나와 너를 초과하는 어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의 영역이 인정의 장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들 주체의 능력은 이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에 의해 불투명해지고 제한되고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기획은 너와 나는 물론, 인정의 장면 자체도 근본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정초되어야 한다. 우리가 입주해 있지만 우리를 초과하는 영역의 불투명성 때문에 우리들은 지식과 앎의 과정에서 영원히 투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조건 덕에, 인정의 장면에서 타자에게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고, 또 질문에서 최종적인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방향을 상실하고 자기 동일성을 “실패”하는 조건에서만 지속적으로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너는 누구인가?”라는 인정의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정은 한 번 성취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상태로 영원히 개정되는 과정이자 운동이다. 그리고 이렇듯 끝끝내 완결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인정의 장면은, 불가지론적인 회의주의가 아니라 ‘너’와 ‘나’가 인정의 장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해준다. 그래서 버틀러에게 이러한 불투명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차라리 일종의 윤리적인 의무이다. 사회적 인정을 윤리적인 기획으로 구성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칙적인 불만족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의 한계(Limits of Judgment)

  그런데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는 때로 ‘판단’을 수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든 윤리적인 기획 속에서든 무엇인가를 긴급하게 선택하고 판단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인정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수도 없고, 행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앞서 살펴본 바, 인정의 장면에서 나타나는 영원한 불만족이야말로 일종의 윤리적인 기획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판단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판단은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는 자를 각각의 영역에 격리해버리고 인정의 과정을 종결해 버리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윤리적인 기획에서 판단의 중요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면 어떤 유형의 판단이 작동해야 할까? 다시 말해, 판단은 윤리화 될 수 있을까? 만약 판단이 윤리화 될 수 있다면 윤리적인 기획과 판단은 어떤 방식의 말 걸기 형식에서, 또 어떤 관계 속에서 작동해야 할까? ‘판단의 한계’라는 장에서 버틀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과 예화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장에서 버틀러는 인정, 관계, 윤리, 말 걸기 장면의 복잡한 함수를 펼쳐 놓기 시작한다. 

  버틀러는 비난(condemnation), 탄핵(denunciation) 같은 특정한 유형의 말 걸기 장면을 종합하는 단어로서, ‘판단’이라는 특정 행위를 우선 심문에 올리고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필연적으로 윤리적이지도 않고, 사회적 인정을 작동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판단은 사회적인 인정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있어서,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과 판단 받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도덕적인 거리(distance)를 설정하고 둘 사이의 공통 지반을 부인하는 말 걸기 형식이다. 판단은 이로써 판단하는 사람의 불투명성을 추방하고, 또한 판단 받는 사람의 비판적이며 윤리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다시 말해,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사회적 인정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단호하게 인정이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인정은 언제든지 판단을 중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정에 기초하지 않은 판단은 곧 윤리적인 실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판단은 언제나 판단하는 우리와 판단 받는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고려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정이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영원히 개정되어야 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인정에 기초한 윤리적 판단 역시도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장에서 흥미롭게도 버틀러는 카프카의 우화 <심판>을 들고 와서 분석하고 있다. 게오르그빠져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몸을 던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게오르그 아버지의 선언에 내몰릴 뿐 아니라 스스로도 기꺼이 몸을 내던진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게오르그는 투신을 요구한 아버지의 말에 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버지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여 투신한다. 이렇듯 능동과 수동이 묘하게 얽힌 게오르그의 도착적인 투신 장면에서, 우리는 판단이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애착 관계와 인정의 함수를 읽을 수 있다. 

  <심판>의 서사에서 이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서로에게 관계로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와 게오르그는 모두 상호간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판단의 ‘거리’를 두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행위하고 있다. 이는 도착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스스로에게 내리는 ‘도덕’적이지만 파괴적인 판단이다. 버틀러가 말하듯 이러한 모럴리스트들은 살인자로 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상호간의 인정은 언제나 상호 주체들의 자율성, 자기반성, 자기성찰, 비판적 능력을 지킬 수 있는 윤리적 관계의 장을 열어두고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말 걸기 장면은 이러한 인정과 관계맺음의 과정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말 걸기 장면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말 걸기 장면을 윤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을 원용한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버틀러는 이 장에서 정신분석학의 ‘전이(transference)’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전이의 윤리적인 가능성에 대해 모색한다. 또한 버틀러는 전이 개념을 기반으로 말 걸기 장면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정이 작동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전유하고 있는 전이 개념은 그 자체로 타자와의 관계성이다. 이 논의의 과정에서 버틀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정신분석학에서 전이가 주체형성을 조건 짓는 ‘일차적 관계성(primary relationality)’의 출현을 추적할 수 있는 통로가 되듯이, 말 걸기 장면을 정초하고 기초하는 근본적인 관계성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말 걸기 장면에서 메시지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말 걸기 장면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며, 말 걸기 장면의 전제조건과 실행의 양상 자체를 바꾸어낼 수 있는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는 불투명한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며,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말 걸기 장면은 우리들의 관계에 일차적으로 기초해 있으며, 우리는 말 걸기의 장면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장면 자체에도 개입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바꾸어 나간다는 점이다. 

  우선 말 걸기 장면의 관계성은 우리가 말하고 서사화하는 것들은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한(예컨대 ‘이성’의 광기), 결코 일관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관적으로 구성되고 파편화된 기억과 경험을 연결하고 지배하는 소유격 ‘나의(my)’ 서사는 일종의 심리적 위안이자 환상, 혹은 편집증적 고립일 뿐이다. 이럴 때 ‘나’는 ‘나의’ 서사를 독백하고 강요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인정의 법칙에 따라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말을 전달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다. 또한 말 걸기 장면에서 ‘나’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짜기에 필요한 구조와 규범은 1장에서 살펴보았듯 타자에게 속해있고 너와 나를 초과해 있으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범의 영토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말 걸기 장면에서 서사와 설명은 아무리 비판적으로 개정되고 재구성되더라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 즉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말 걸기의 장면은 전이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나에게 속할 수 없는 무의식을 실연하고 또 무의식이 현재에서 다시 살게 하는 말 걸기의 구조이다. ‘나’는 전이 장면에서 타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말 걸기 장면의 구조 속에서 ‘나’와 ‘나의’ 서사는 타자에게 탈취당하고 압도당하고 휘말려 든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나를 탈취하고 압도하는 “‘너’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의 전이와 역-전이의 특징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전이는 그 자체로 주체와 타자의 근본적인 관계를 현재의 맥락에서 편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주체의 발생적 조건인 ‘일차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또한 자아들이 출현하는 다양한 말 걸기의 장면을 접합한다. 그리고 전이와 역-전이는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작동하지만, 언제나 ‘나’가 타자에게 근본적으로 연루된 상태에서, 결코 일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한다.

  따라서 전이 장면에서 “‘너’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되고 있는가?”라는, 최후의 답변이 있을 수 없는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 ‘너’에 대해 물으면서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것, 이는 곧 ‘너’와 ‘나’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며, 따라서 ‘너’와 ‘나’가 속한 말 걸기 장면에 대한 심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너’와 ‘나’에 대해 동시에 묻는 이 짝패 질문은 말 걸기 장면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전이와 역-전이 장면에서 ‘너’와 ‘나’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관계가 아닐 것이다. 이제 ‘너’와 ‘나’는 전이와 역-전이를 통해 불가피하게 연결된 채 서로에 대한 영향력 속에서 새로운 관계로 돌입할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말 걸기 장면에서는 무시간적이며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서사, 즉 말하는 주체 ‘나’의 투명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에 대해 닫혀 있는 지배적인 ‘나’의 서사는 거부될 수밖에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서사의 불투명성을 긍정하고 일관된 서사화 전략에 저항할 것이다. 반복하지만, 여기서 서사가 비일관적이라는 것은 모호함과 모순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뜻할 뿐이다. 일관성이 없다고, 투명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해서 ‘너’와 ‘나’가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해 설명하고 서사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서사화는 윤리적 기획의 전부도 아니고,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버틀러에게는 완전히 서사화할 수 없는 근본적인 관계성의 장이 분명히 존재하는 탓이다. 버틀러에게 ‘나’는 ‘너’에게 말을 걸면서 ‘너’와 연결되고, ‘나’와 ‘너’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나’와 ‘너’가 연결되는 방식(말 걸기 장면)에 개입한다. 전이가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 공간이 바로 이 개입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말 걸기 장면은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관계와 상호 인정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나’가 타자들과의 관계에 불가피하게 연루된 채로도 생존할 수 있으며, 반대로 타자들도 말 걸기 장면에서 생존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를 인정하는 것은 환상의 죽음이자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의 상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불가피한 윤리적인 의무이다. 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슬픔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를 배려하지 않는 말 걸기는 쉽게 폭력에 경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The “I” and the “You”)

  그러나 버틀러는 ‘상호인정’이라는 균형적이고 양비적인 ‘착한’ 관점으로는 긴급한 윤리적 기획에 필수적인 어떠한 불가피성이나 절박성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성의 장에 연루되고, 또 연루될 수밖에 없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이 장에서 “나(the “I”)”와 “너(the “You”)”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등장하는 주체의 포지션,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어떤 ‘장소(locus)’이자 구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시도한다. 또한 버틀러는 “나”의 불투명성, 불가능성, 부분성, 유한성을 어떤 사회성과 관계의 장에 연결하고, 또한 이를 “너”라는 타자와의 이자적 관계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장에서 타자(“너”)는 말 걸기 장면과 “나”에게 근본적인 층위에서 도입된다. 이렇게 버틀러는 “너”를 관계와 윤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버틀러가 보기에 서사적인 목소리 “나”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 언제나 “나”가 묘사하는 자아도 상연(enact)한다. “나”는 반복적으로 재등록된다. 그러나 “나”라는 서사적 목소리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지금 말하고 있는 “나”가 어떻게 구성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서사적인 “나”는 서사 자체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모든 순간에 재구성 될 뿐이다. 이는 서사화 될 수 없는 수행적이고 비서사적인 행위이다. 요컨대, “나”가 어떻게 이 말 걸기 장면에 출연하고 소환되고 있는지, “나”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나”를 설명하고 “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설명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 최선을 다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망친다. 이는 설명 자체의 ‘내용’보다는 설명이 발생하고 있는 말 걸기 장면의 수사적 차원, 즉 ‘형식’적 차원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실천이 신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국 서사는 일차적인 관계성을 추적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최선의 경로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메시지를 수신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말 걸기 장면에서 이 누군가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누군가는 말 걸기 장면에서 나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는 어떤 상황,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수신자의 장소(locus)나 구조(‘너’)라는 어떤 환영적인 관계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것이 설령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수신 구조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조금 달리 풀어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단수의 타자-수신자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언제나 변화하는 복수의 타자, 또한 복수의 말 걸기의 장면이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말 걸기의 장면에서 천의 얼굴을 한 채 언제나 서로 다르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달받고 있는 타자들의 얼굴 앞에서, 다시 말해 이 복수의 타자들의 목소리, 얼굴, 침묵 속의 현존 앞에서, 타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는 일관적이고 단단한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이 얼굴들을 나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폭력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의 이야기는 풀리게 된다.

  여기서 버틀러는 라플랑슈를 인용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타자라는 ‘얼굴’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라플랑슈는 타자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어떤 단일하고 절대적인 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다양한 타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라플랑슈는 이러한 타자들이 유년 아이에게 남기는 압도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과 자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이들은 성인들이 던지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에 압도당한 채 반응한다. 메시지가 전달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타자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라는 정신분석학의 고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은 타자의 인지/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또한 타자에 반응한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질문이자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아이의 세계를 초과해서 성인의 세계에도 깊숙이 내삽(內揷)해 있다. 라플랑슈의 이론은 주체형성의 조건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라플랑슈의 이론에 따르면 ‘나’의 욕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조차도, 타자의 욕망이라는 ‘나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욕망에 기초해서, 또 이러한 이질적인 욕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주체들의 조건인 일차적 억압에 정초한 ‘일차적 관계성’의 탄생을 설명해준다. 이는 주체 형성을 조건 짓고 또한 말 걸기 구조를 조건 짓는 근본적인 관계성이다. 또한 이는 ‘나’가 벗어날 수 없는 ‘사회성’이라는 조건의 일부이다. 그리고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관계성의 차원은 앞서 살펴보았듯 완전한 서술이 불가능하며, 단지 메타-인지적으로 재구성되어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조건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서술 불가능한 ‘나’의 조건을 대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철학적 사변이나 픽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버틀러가 강조하고 경고하는 점은, ‘나’와 ‘타자들’이 상호적으로 평등하게 무엇인가를 등가교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만큼, 버틀러에게 ‘나’는 타자에 의해 ‘탈중심화’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나’가 위치한 조건을 구성하는 어떤 “수동성”의 이름, 혹은 “수동성에 선행하는 수동성”을 의미한다. 즉 ‘나’는 라플랑슈가 말하던 압도적인 일차적인 인상/자국(impression) 같이 ‘나’의 이전에 존재하던,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의해 탈취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소 불균형하게 느껴지는 관계성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점은, ‘나’가 비록 어떤 수동성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가 존재할 수 없다거나 ‘나’의 기획이 완전히 무용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나’가 최선을 다해 설명할 때조차도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이 개입하여 ‘나’의 설명을 부분적이고 불투명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주체는 존재할 수 있고 또 행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윤리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재구성의 토대는 ‘나’라는 주체를 형성해온 조건들은 궁극적으로 ‘나’가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나”라는 기획에서 탈구되어 ‘너’에게 연결되어야 한다. 결국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너와 나의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나’가 ‘너’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삶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나’의 욕망과 충동을 기원적으로 구성하는 대상이다. ‘나’는 ‘나’의 타동사적인 수동성을 인정하는 토대와 근본적인 관계성 위에서, 그리고 오직 ‘너’에게 말을 거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어떤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는 ‘당신’에 대한 ‘나’의 양도이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윤리적인 겸손함, 반성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반드시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이어야 한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울 뒤로  (2) 2011/02/16
책 구입할 때 몇 가지 기본 조건들  (4) 2011/01/29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2) 2010/12/28
젠장  (0) 2010/10/26
오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0) 2010/10/25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5/30 23:03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즉각 느끼는 정서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조건화된 행동ㅡ정신분석학에서 관심을 두는 내면 세계의 역동과는 관계없이, 오로지 겉으로 관찰 가능한ㅡ에 가깝다. 특히 행동주의의 고전적 조건화 모델에서 설명하는 정서의 학습은, 특정한 자극에 유기체의 반응이 연합을 일으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관계에서 심각하게 배신당하거나 좌절한 사람은, 이후 비슷한 관계를 마주 했을 때 이전 관계에서 느꼈던 정서를 상기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여러 가지 포비아도 마찬가지다. 몸은 정서를 학습하고, 또 삶의 어느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것을 재생한다.

의식-(전의식)-무의식을 도식적으로 나누면서 정신분석학은 대체로 몸 보다는 정신세계의 역동에 관심을 두고 정신세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신뢰하는데서 출발하지만, 그 정신세계의 역동과 가능성이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온갖 모호하고 난해한 개념들이 암시하듯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정신세계는 원래부터 왜곡하고 과장하고 축소하는데다 온갖 방어기제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로든 심상으로든 정신세계를 끄집어 내야 분석을 할 수 있을진대, 그 매개가 되는 언어와 이미지라는 매체 자체도 한 차례 왜곡(재현)되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의 반응은 매우 적실하고 정직하게 무의식을 재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학습된 몸의 반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의식이 아닌가 할때가 있다. 권위자와 폭력 앞에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식은 땀이 나는 것, 특정한 자극에 성적인 욕구든 연민이든 느끼는 것,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면 이유없이 분노하거나 공포나 사랑을 느끼는 것 같은 그 모든 것들은, 과거의 흔적이자 퇴적이자 무의식이다. 과거에 경험한 사건, 사건에서 느꼈던 정서는 정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몸이 학습하게 되고, 그것이야말로 곧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무의식이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에 남은 흔적들의 정신적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ㅡ설령 그것이 상상된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도움이 된다기만 한다면야ㅡ혼란스러운 언어와 이미지의 쓰레기장에서 분투하겠지만, 그러한 분투는 때로 자기파괴적인 충동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인 관심을 오로지 몸의 반응에 대한ㅡ그래서 관찰이 가능한ㅡ관심으로만 돌린다면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잘못된 연합의 고리를 끊으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몇 가지 프로그램을 돌려서 일정 기간 몸을 훈련시키면 된다. 몸은 그것도 학습할 수 있다. 우울증의 치료를 위해 기나긴 상담을 받으며 고통을 연장할 필요 없이 그냥 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근원적이지는 않겠지만 즉각 결과를 주니까. 부작용을 견디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일에 중독되든, 가족에게 헌신하든, 알콜과 니코틴과 카페인에 의존하든.

무의식이라는 심연은 너무나 진지하기에 차라리 우스꽝스러운 진실인 것 같다. 개인에게는 진정하고 진실된 것이라고 해도, 그 개인과 가장 가까운 이에게조차도 믿기 어려운 거짓이자 심지어 수치이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는 이들에게, 그러면서도 사회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심연은 부담스러운 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소이연
영화 / 2009/05/05 20:46

오늘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 봤음~ 아침에 요 인근 도시로 가서(내가 사는 데는 영화관이 없기 때문에;) <인ㅅ동 스캔ㄷ>이랑 <박쥐>를 연달아서 보고 왔다. <인사ㄷ 스ㅋ들>에 대해서는 뭐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다. 그냥 김ㄹ원 역시 별루다 엄정ㅎ 역시 킹왕짱 뭐 이 정도? ^^; 최근 들어 미술품이 유망한 투기나 투자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ㅡ물론 거래량 세계 1위 미술 경매회사의 사장이 지적하듯 미술품이 대세라거나 새로이 등장한 안정적인 투자 시장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섣불리 얘기할 시점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신경제New Economy'의 메커니즘과 미술 경매에 쏠리는 투자/투기적 관심의 특수성과 상관관계를 생각한다면ㅡ이런 꽤나 볼만한 범죄 스릴러 물이 나오는 것은(그리고 서사적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테다.


<박쥐>를 보면서 내내 이거 라캉주의자들에게는 좋은 '떡밥'이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정신분석학에서 나오는 개념들로 짚을 수 있는 부분들이 정말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이 요새 지젝의 책이나 정신분석학 책이라도 심취해서 읽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자체가 정신분석학 영화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쾌락과 판타지의 관계, 남성적 쾌락과 여성적 쾌락, 이어서 '쥬이쌍스'와 팜므 파탈, 또 상징계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실재의 귀환, 정신분열(정신병), '아버지'의 법과 도덕(윤리) 그리고 죄책감, '남성적' 주체와 '여성적' 주체,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프로이트의 말, 응시(gaze), 증상의 지속 등등. 이러한 단어들에 영화 장면 가지고 살을 덕지덕지 붙이면 꽤나 재밌게 짧은 라캉주의 정신분석학 개론 에세이 하나 쓸 수도 있겠다(물론 내 능력 밖이다). 물론 여기에 참신한 것은 하나도 없고, 단지 라캉 '어르신'을 비롯한 정신분석학 텍스트에서 이러콩 저러콩 말했네 하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 관련한 책은 다신 읽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던 터에 영화를 보면서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었으니 보고 나와서도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_-... 하아. 내가 지젝을 비롯하여 라캉 정신분석학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건, 그들이 더 이상 영감을 주지 않는다거나 진부해져서도 아니고 어려워서도 아니다. 어려운 만큼이나 영감을 주는 것도 많았고 읽고 나서 재미도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 표현이나 개념 상에 불편한 부분이 많아서 그것들을 견뎌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명하는 말을 많이 접해도 정신분석학이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어려웠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예전에 어떤 포스팅에서도 얘기 했었던 바지만 어떤 철학자가 지적했듯 라캉을 읽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를 들자면, 라캉을 읽고 라캉적으로 글을 쓰는 그 자체로 자신이 혁명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 때문이다. 나 스스로도 그런 식으로 글을 썼고. 황석ㅇ의 소설 <개밥바ㄹ기 별>에서 유일하게 건질만 했던 얘기인 '(정작) 별은 보지도 않구 별에 대해 쓰는'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달까... 잡소리는 이만.


어쨌든, 진짜 <박쥐>는 볼만한 영화였다. 박찬욱 감독이 어떤 인터뷰에서였나 이 영화에 대해 후한 만족감을 표한걸 읽은 적 있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 나야 영화 전문가도 아니고 뱀파이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장르적 특성이 빼어난 건지 알 도리가 없지만 예전에 <놈, 놈, 놈>더러 '김치 웨스턴'이니 하고 비꼬는 이들이 많았던 걸 떠올리면 '김치 뱀파이어' 운운하는 말이 (별로) 없는 것만 봐도 꽤나 뱀파이어라는 소재의 특성을 나름 잘 살려서 만들었다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적어도 뻔한 뱀파이어 물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캐릭터만 보더라도 송강호 자체가 미끈하고 길쭉하게 빠진 몸매에 창백한 얼굴을 가진 백인도 아니고, 또 흡혈할 때 이빨을 목에 쿡 꽂은 다음 쪽쪽 빨지도 않고.

사지절단, 피, 뾰족한 걸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두 눈 퍼렇게 뜨고는 못 볼 장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진짜 아름답다고 섹시하다고 느꼈던 부분도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흐으;). 가끔 소름끼치기도 했으니까. 또 중간 중간 등장하는 블랙 유머들은 좀 많이 웃겼다. 나름 심각한 장면에서 인터넷과 자살 커뮤니티(?), 고해성사에 대한 송강호(상현 역)의 대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 마지막 장면도 꽤 맘에 들었다. 대체 마지막을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했는데, 좀 길다 싶었지만 적당한 유머 감각으로 지루하지 않게 잘 끌고 가서 예쁘게(?) 끝낸 것 같아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았다.

송강호는 예전 작품에 비해 조금 만족도가 (-)였지만 김옥빈(태주 역)이 예상 외로 너무 (+)여서 연기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초반에 약간 어색하다 싶은 부분이 있었지만, 중반 쯤 진척된 후 감정 연기가 힘들었겠다 싶은 부분이 많았는데 그런 쪽에서 굉장히 놀라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모르지만 김옥빈 나온다면 꼭 챙겨 보리라! 그런데 강우 역을 맡은 신하균은 아쉽게도 좀 튀는 느낌이었다. 강우 역은 시원찮아야 하는데, 신하균이 나와서 연기를 하니 비중이 높은 캐릭터처럼 보였다. 존재감이랑 느낌이 강한 배우이기 때문에 이런 조연 역할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나저나 신하균님하는 진짜 왜 이런 역할만 ㅠㅠ 이것도 전문 분야인가요.. 오달수라든지 박인환이라든지 다른 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만족 +_+

이건 번외 이야기이지만, 상현의 기도(독백)는 꽤나 맘에 들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고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씨네 21 기사에서 긁음) 나야 개신교 신자도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난 누구(;;) 말마따나 무신론자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_-...



덧말 1. 송강호의 곧휴가 나온다고 호들갑 떨었던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본 건지 진짜 이해할수가 없다. 난 대체 어떤 장면에서 나오나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암튼 같이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그 장면에서 탄성 아닌 탄성을 내지르는 것으로 보아 어떤 이들에게는 '혐오'를 유발하기는 하나 보다. 때론 공포나 혐오를 불러 일으키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파워'를 상징하는 그것은 여전히 흥미로운 분석 대상이다 진짜-_-..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연장선 위에 있으니 뭐.

덧말 2. 이 포스팅하면서 잠깐 찾을 게 있어서 검색하던 중에 '융드옥정'이랑 강우와 태주의 엄마로 나온 배우가 닮았다는 기사를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ㅎㅎ

덧말 3. 가장 궁금했던 것 하나. 송강호는 어디에서 온 어떤 피를 수혈 받았기에 뱀파이어가 된 것일까; 그 뱀파이어는 왜 헌혈한 것인가; 아님 어디에 뱀파이어 확산 위원회라도 있는 건가;

덧말 4. 어떤 작품이 원작이라는데, 그거랑 비교해서 보고 싶다. 초반에 등장하는 바이러스가 '백인과 아시아인만 걸린다'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그리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설정은 아니지마는, 그 원작에서는 어떻게 이 설정이 그려지고 있는지. 어떤 인종주의적인 정치적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0) 2009/05/10
우아한 세계  (0) 2009/05/05
박쥐  (0) 2009/05/05
번 애프터 리딩  (0) 2009/05/02
<키친>, Life. After. Romance  (2) 2009/02/23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9/03/15 18:19

1. 과히 나쁘지 않다. 끄덕 끄덕

-

2. 잠깐 동안 했던 임고 준비를 또 접어두고(ㅋㅋ;;) 그냥 쉬자는 마음으로, 이것 저것 가능성들을 재점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좀 더 나한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초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삶의 불확실성, 그로 인한 불안, 불안 끝의 절망과 우울증, 긴 우울을 헤치고 나온 뒤의 허탈한 해방감과 평온함,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제대로 껴안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 어차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임고 준비로 '도피'한다고 하여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또 뭐든 이상적인 것(the ideal)의 잣대로 사물을 대하지 않으면 성미가 풀리지 않는 내가, 설령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교사가 된다고 해도 5년 이상 버틸리 만무하니까. 무엇보다 교육학은 물론이고 영어교육론 등등도 내 식성에 안 맞으니까. 아아.. 임고 준비하며 들여다 보는 책들의 내용 중 흥미가 가는 분야가 있다면 화용론(pragmatics)이나 담화 분석(discourse analysis) 정도가 될텐데(좀 더 '순수'하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다면 통사론syntax 정도?) 임고에 쓰이는 교과서들은 잘해야 개론 수준을 못 벗어 나기 때문에... 하긴 그래도 양이 많으니 어렵다.

어쨌든. 당분간 타이틀은 임고 준비생으로 걸어 두고 다니려고 한다. 난 공식적으로는 임용고사 준비생이다. 흔하디 흔한 고시생. 왜냐면, 대학원에 진학 한다고 또 말하면 예전처럼 굳이 막지는 않으실테지만 엄마 아빠가 과외를 하라는 압력을 또 넣을 게 분명하니까 말야. :p 요새는 민법 책을 보고 있다는 한 친구님이랑 잠깐 얘기했던건데, 과외하기 싫어서 고시생하는 것 같다고-_-...;

-

3.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소설은 꼭 소장해 두어야 한다. 김형경씨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처음 만난 건 21세였는데, 그 때는 사실 '인구에 회자' 되던 소설이니까 읽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막연히, 아, 굉장히 정신 분석학적이군...이란 인상만 받았을 뿐. 소설 등을 읽으면 책 귀퉁이를 접어 두고 후에 그 부분만 다시 펴보는 습관이 있는 내가, 전혀 접어 놓지를 않았었다. 그 담에 만났을 때는 23세. 그 땐 내가 곧 세진이고 인혜였다. 그러니까, 인물과 적절히 거리를 두지 않고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그냥 몰입했달까.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최근에(25..ㅠㅠ) 다시 만났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하고 다시 읽었는데... 헉, 했다. 빌려와서 다시 읽다가, 책 귀퉁이를 꼭 접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라딘 마일리지로 주문(호호^.^)했다. 그 때 안 보였던 문구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젠 본격적으로 나를 분석할 수 있었다. 소설을 분석하면서, 특히 소설 속에 나오는 임상 상담하는 장면들을 보다 면밀히 읽으면서, 그리고 예전에 접했던 얇디 얇은 정신분석학 지식을 조금씩 동원해 가면서 말이다.

이제는 당분간 정신분석학도 다시 들여다 볼 요량이다. '정치적'인 독서 방식 말고(어떤 책이었던가에서 읽었는데. 정신분석학ㅡ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갖는 희한한 특징 중에 하나가, 자신이 해방적이고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학문을 한다고 믿는다고. 헐, 냉소적이구만~ 했다가 이내 끄덕끄덕) 철저히 자아를 탐색하는 도구로서 말이다. 이런 자아야 말로 근대의 산물이요 '개인의 발견' 이후에나 등장할 수 있는 신화적 대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무의식과 조금이라도 더 화해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대로 "사기 치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래서 요새 일상은 그리 나쁘진 않지만 엉망 진창이다. 기반이 없다.

-

4. 푸코의 짧은 글을 읽었다.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어김없이 너무나 푸코스러운 글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의 글을 제대로 독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보편적 지식인>이나 <구체적(특수한) 지식인>이라는 일반적인 이분법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지적했듯, 최근 수 년간 학계에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똑똑한 척 할 수 있는 말' 베스트 10위안에 들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탈맥락적이지 않나요?", "유럽 중심적이군요." 혹은 "당신은 도대체 어떤 xx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가요?" 류의 말일 것이다. 그 말의 적확성과 정치적 유효성 내지는 효과에 대해 무한히 긍정하는 것을 떠나서, 확실히 요즘에는 구체적 지식인, 특수하게 위치 지어진 지식 등을 언급하는 것에 더 점수를 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친 자본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느냐하는 점도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도 좀 답답하고.

어쨌거나 푸코는 그러한 이분법을 치워두고, 너무나 푸코 본인 스럽게도 "진리"와 "권력"을 문제 삼는다. 푸코에게 지식인이 보편적이냐 구체적이냐는 별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의 특수성을 거론하는 것은 그에게는 현상 기술적인 말일 뿐이다. 그냥 원래 지식인은 어쩔 수 없이, 태생부터 특수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다. 진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다르다. 허나 진리라는 것은 권력 밖에 있지도 않으며 권력이 박탈된 순수한 상태도 아니다. 진리의 지위, 그리고 진리가 행하는 정치적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 분석하고, 진리의 권력(혹은, 진리는 권력 그 자체이므로, 진리를)을 진리를 작동케 하는 헤게모니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특수한ㅡ단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부구조적이지는 않고 덧붙여 유물론적이며 이에 기반해 진리를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하는ㅡ체계(regime) 속에서,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이다.

이 말에 여러 가지 의미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게, 보편이냐 특수냐하는 구분이 그 자체로 명백히 정치적인 구분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씨가 했던 말대로, "인간 해방"(보편)을 말하는 백인 남성 지식인&담론과, '잘해야' "여성 해방", "게이 해방" 등을 말하는 여러 지식인&담론이, 애초부터 게임이 되겠느냐 말이다. 특히 한국에서 말이다! 그것들은 애당초 잘못된 구도였고, 애당초 피했어야 할 시스템이었고, 따라서 애당초 공격했어야 했을 이분법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문제틀(problematic)이었던 것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다른데 있다.

-

5. 그래, 임고 책이 아니라 이런 글, 소설을 읽고 블로그에나마 끄적거릴 수 있을 때, 나는 기쁘다.

-

6. 아, 맞다 가장 중요한 것. 동생이 강하게 주장해서 강아지를 입양해 왔다. 아빠가 모처럼 듣는 자식의 부탁인지라 이곳 저곳에 강아지 입양 공고를 낸 터라 총 3'마리'(마리라는 말이 과히 됴티 아니하다)가 입양되어 왔는데... 원래 같이 살고 있던 '해피'(이제는 완전 할머니다~)에 새로 입양한 아이를 더하면 4'마리'나 되는터라... 2'마리'는 다른 곳에 입양시킬 것 같다. 남매라는데 하나는 흰 털에 까망 점이 찍혔거나 까망 털에 하얀 점이 찍혔거나 한 강아지고 다른 하나는 약간 누런 털을 가진,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한 강아지 남매다.

결국 남는 아이는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이라나; 뭐라더나; 난 순혈인지 혼혈인지는 관심 없는데, 동생 님이 순혈을 극구 주장하여 돈을 좀 많이 들여 데리고 왔다. 40일 밖에 안되서 그런지 먹고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그리고 좀 많이 귀엽다 ㅠㅠ

아, 더 중요한 것. 이름이 무려 "지용"이다 ㅋㅋ 내가 지었음. 나중에 공연도 할지도 모른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견 해피  (2) 2009/04/12
오늘의 타로카드  (0) 2009/04/05
나쁘지 않은 일상  (2) 2009/03/15
맘에 드는 음악  (2) 2009/03/04
왠지 억울해  (2) 2009/02/23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6/15 01:57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gritte, <Les Amants>


한 손이 어떤 열매, 꽃 또는 갑자기 타오르는 꽃잎을 향해 내뻗친다.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그 시도는 열매의 무르익음, 꽃의 아름다움, 꽃잎의 불타오름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에서 그 손이 대상을 향해 충분히 움직였을 때, 또 다른 손이 열매로부터, 꽃으로부터, 꽃잎으로부터 튀어나와, 우리의 손을 맞잡기 위해 내뻗친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의 손은 열매의 닫힌 충만함 속에서, 꽃의 열린 충만함 속에서, 작열하는 손의 폭발 속에서 응결된다. 이 순간 발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구멍 뚫린 시트의 사례」(김영찬 외 역, 『성관계는 없다』, 211-2).



주판치치의 이 말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으로는...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컨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 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donner ce qu'on n'a pas,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l'aiment, 즉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l'aimé , 즉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 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55-6.



일전에 넬 4집 앨범인가 나왔을 때, <어떻게 생각해>라는 노래를 들으며 꽤나 슬퍼했던 적이 있었다. 그 가사는 이렇게 된다.

당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내 몸을 맡기고
믿음으로 무장한 관계인것처럼.
하지만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나의 마음 속에 날 가득 채우곤
마치 나는 없고 온통 당신 뿐인것 처럼.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설명해.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
열리지 않는 마음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주판치치와 보조비치의 언급들은, 오히려 이런 불일치와 결여야 말로 사랑의 필수 (구성)요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더 이상 이런 노래의 가사를 보면서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앙가주망'인 셈이다. 다시 말해 관계의 지속은 섣부른 '이해'와 '앎'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관계는 죽어버린다(그러고보면 내가 가장 싫어하고 상처를 많이 받는 말 중 하나는 "너는 ~이다."라는 식의 말이다. 나는 그게 아닌데... 그 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그 결여가 칼날이 되기도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잘 안다고(자식이 부모를 잘 안다고) 너무나 쉽게 착각하고 있듯. 그러면 서로에 대한 '앙가주망'은 철회된다. 그 대신 남는건 더 극심한 허무, 고통, 허울 좋은 의무들 뿐(오히려 이게 신파와 상처의 근원이겠지). 그 대신 나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구속,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의지와 참여와 책임.. 그리고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처와 결여와 공백에 나를 열어두기, 그러면 그 상처와 결여와 공백은 오히려 무한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상처없이 관계는 열릴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는 것...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짧은 의문  (1) 2008/11/25
책을 훑다가  (2) 2008/09/19
"사랑의 은유"  (0) 2008/06/15
(다문화주의/사회에서) 전도되는 모더니즘  (6) 2008/05/01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어쨌다구  (4) 2008/04/25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7/15 19:10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란 무엇일까? 나의 경우 "나르시시즘"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일단 부정적인 것과 연결된다고 보아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 '공주/왕자병'같은, 자아도취 정도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일상 용법에서도, 어떤 사람을 일컬어 나르시시스트라고 할 경우, 대체로 욕설이나 비난의 의미를 띄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를 나르시시스트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 나르시시즘은 그 사람의 어떤 '태도' 따위를 일컫는 말로 들린다. 한 마디로 '잘난체 하는 (외적인)태도' 랄까? 그 사람 내면의 성격이나 성향 따위는, 사실상 '나르시시즘'의 일상 용법에서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내면이 실제로 나르시시스트이든 아니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큰 상관이 없는 노릇이다(깊이 알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의 내면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할지라도 겉 모습이나 행동 따위가 나르시시즘적이면, 그 사람은 나르시시스트로 명명되는 것 같다. 이제 나르시시즘은 어떤 분류체계에 사람을 밀어넣고 그에게 낙인을 찍는 어떤 표현이 되었지,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신병리학적psychiatristic 개념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일단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한 번 정리해보고 싶었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역시 프로이트S. Freud로 되어 있다(우리 일상에 정신분석학적 개념이 얼마나 침투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무의식'과 같은).

그러나 프로이트 전집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에 게재되어 있는 <나르시시즘 서론>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스스로 "나르시시즘"은 네케Paul Nacke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추후에 그는 엘리스Ellis가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수정한다. 그러나 엘리스 본인은 네케에게도 공헌을 돌린다.) 네케는 나르시시즘을 "자신의 몸을 마치 성적 대상을 대하듯 하는 사람들의 태도, 말하자면 스스로 성적 만족을 느낄 때까지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쓰다듬고 애무하는 사람들의 태도(<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p.45)"를 지칭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소위 '정상적인' 성 범주를 탈주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 시대의 성 담론은, 대체로 대상애/이성애/동 세대/동일 인종 따위의 여러 가지 판단 범주를 '정상적'인 것으로 확립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런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 "인간의 정상적인 성적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태도일 수 있다(Ibid., p.46)"며, 또한 "성도착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가 어느 정도 당연히 보유하고 있는 자기 보존 본능이라는 이기주의를 리비도가 보완해주는 것(Ibid.)"으로 이해한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그에게는 중요한 이야기를(즉, 프로이트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거치고 가야할 듯한) 수없이 늘어놓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 논문을 완성하고 나서도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다 한다. 어쨌든 여기서는 짤막하게 몇 개만 더 이야기 해보록 하겠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나르시시즘(우리가 흔히 쓰는 '자존심'이란 표현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자존심은 자아의 크기이자, 일종의 유아적인 나르시시즘의 잔재이다.)이란 '정상적인' 성 발달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어린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이다. 물론 나르시시즘은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발달 과정상의 특징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원초적primal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 아이 시절, 아이들은 나르시시즘의 전지전능한 환상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을 과대평가하고, 그로 인해 자아이상을 지나치게 높게 갖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발달 과정에서 원초적(근원적)인 나르시시즘에서 이탈해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이기 때문이다(일종의 법Law이다). 그것을 적절하게 극복할 때만이 '리비도의 대상을 향한 투사', 즉 타인을 사랑하는 행위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설명하는 그 이탈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근원적 나르시시즘에서의 이탈은 외부에서 강요된 자아 이상Ichideal으로 리비도가 재배치되어야 가능하며, 만족은 그 이상적 자아의 실현을 통해서야 얻을 수 있는 것(Ibid., pp.82-83)"이다. 그와 동시에, "자아는 대상을 향해 리비도를 집중시킨다. 자아는 자아 이상 때문에 빈곤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대상으로의 리비도 발현으로 빈곤해지게 된다(Ibid.)" 따라서 프로이트의 이론체계에서는, 나르시시즘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좀 더 흥미를 가진 것은, "이상적 자아"와 "자아 이상"이라는 개념이다(프로이트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라캉은 이 두 가지 개념을 분명히 구분지어 다룬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상적 자아는 상상계적이고, 자아 이상은 상징계적이다. 병리학적인 나르시시즘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아 이상에 보다 호소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자아 이상이란 유아적 나르시시즘이 자신에게 투영된 리비도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만들어낸 어떤 대체물로써 이해한다. 그것은 유아적(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모든 가치와 완벽함을 부여받은(Ibid., p.74)" 것이다.

'자아 이상'은 자기 자신이 완전히 독자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체로 부모(프로이트는 부모의 영향이라고 말하고 있지만)로 상징되는 일종의 '목소리'들ㅡ명령과 통제, 발화로 인한 의미의 한정 등ㅡ로 인해 결정 된다. 그렇기에 위에서 언급 했듯, 자아 이상이란 것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라고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따라서 일종의 금지와 억압이 프로이트식 자아/주체를 형성하는 주요 요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서 그러한 자아 이상을 발달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리비도 본능의 승화를 적절히 조절한다(프로이트는 이 둘 사이의 간극이 크면, 일종의 신경증 환자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한 개개인은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발달 범주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리비도 투사는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기 각성 등에 의해 장애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아 이상'이라는 형태에서 그 상실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그런 이상적인 회복의 공간(원초적이지만 완벽한)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자기가 한때 누렸던 그 충만한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대상으로의 리비도 투사에서 발생하기 쉬운 어떤 '빈곤'을 상상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든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으로 회귀하기 쉽다(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자아 이상을 '억압적'이고 금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프로이트에게 이상적 자아는, "검열 기능을 통해 어떤 대상을 거부하는 식으로 대상을 통한 리비도의 만족에 강력한 전제 조건을 부여하는(Ibid.)" 것이다. 즉 "억압은 자아에서 시작(Ibid., p.73)"하는 것이며, 더 엄밀히 말하면 "억압은 자아를 스스로 존중하는 데서 비롯(Ibid.)"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벗어난 우리들은(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 자아 이상이므로), 언제나 일종의 억압 상태에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나르시시즘은, 발달 과정 상의 억압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억압이든 어쨌든, 프로이트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란 한 개개인에게는 매혹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듯 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아이에게 우리들이 느끼는 매력의 이유도 "그 아이의 나르시시즘(Ibid., p.66)"으로 설명한다. 그보다 더 나아가, "고양이나 커다란 맹수같이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몇몇 동물들이 지닌 매력(Ibid.)"도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내가 고양이에 한참 버닝했을 때에는, 자멸감과 자괴감으로 괴로워했을 때였다.). 자신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포기한 사람들은, 다른 개체가 지닌(듯 하게 보이는) 나르시시즘을 매력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아 이상은, 자신의 성적 에너지의 투사물인 대상에 대한 어떤 '성적 이상' 과도 연결된다. 프로이트는 '사랑'과도 연결시킨다.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성적 대상을 '성적 이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Ibid., p.83)." 성적 이상은 자아 이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그것은 "나르시시즘적 만족이 현실적인 난관에 부딪혔을 때, 성적 이상은 그 만족을 대신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Ibid.)" 그리고 진정 행복한 사랑이란, "대상 리비도와 자아 리비도가 구분되지 않는 원초적 상태에 있을 때"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이 딱히 구분되지 않을 때 사랑의 만족감의 최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만 더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자아 이상은 집단 심리학으로도 연결시키는데, 즉 "한 계급이나 민족의 공통 이상(Ibid., p.85)"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정신 분석학이 정치학적 분석 개념으로 전이되는 지점으로 보인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그냥 책을 펴들고 정리하다보니 산만하기 짝이 없다. 결국 나르시시즘에 대한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는 않았다..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이 이렇다, 저렇다 말했다고 하여, 우리 시대의 나르시시즘의 용법이 엄밀하게 프로이트 식으로 바뀔 필요는 저언~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할까요? (글쎄;) 뭐, <How to Read 프로이트>에서 조시 코언은, 이를 프로이트의 논문 <애도와 우울증Mourning and Melancholia>에 등장하는 멜랑꼴리, 즉 우울증depression을 설명하는데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은 <애도와 우울증>을 보기 위해 산 책이니, <나르시시즘 서론>도 중요하게 참조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버틀러로 가는 길이다 후후..)

그냥 더 첨언하자면,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사람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체계 속에서의 자아 개념이나 주체 개념의 설명이 썩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며, 그의 일종의 남성 중심성(예컨대 남근 선망이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등은 물론, 여성을 '검은 대륙'이라 묘사한 것이라든지, 히스테리아 연구에서 보여준 그의 한계점 등등까지 포함한다. 버틀러나 이리가라이 식으로 말하면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은 나에게도 역시 반감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식의 주체 개념은 라캉의 그것과 유사한데, 이들에게 주체란 억압과 금지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푸코식의 개념틀(단지 금지하고 억압할 뿐 아니라, 생산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을 따르고 있는 버틀러에게도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라캉을 전유하고 있는 지젝 등의 슬로베니아 학파는 물론 브루스 핑크 등의 글을 읽을 때마다 더 우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물론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각 주체가 욕망의 좌표를 직면하도록 돕는다고, 좌표 축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들 말을 하지만..).

그러나 프로이트는 가끔 보면 '재밌다'. 전체적으로 그의 글은 쉽기 때문이기도 하며, 때때로 자아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때는 유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인터넷에 흔히 떠도는 심리 분석들 보다는 좀 더 세련되고 권위가 있다는 정도랄까-_-; (이거 어떤 선생님이 들으면 싫어하겠군. 요즘도 프로이트로 연구하시는 것 같던데) 뭐 나야, 재밌으면 됐지 뭐, 에에;; (응? 된건가;)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판  (2) 2007/07/27
자연스러운 가사노동 분담?  (0) 2007/07/19
나르시시즘 (1)  (0) 2007/07/15
버틀러 '읽기'의 어려움  (3) 2007/07/11
내가 Judith Butler를 좋아하는 이유?  (2) 2007/07/06
Posted by 소이연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2.0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