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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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6 거울 뒤로 (2)
  2. 2009/06/09 6. 9 작가 선언 (2)
  3. 2007/04/04 작가-되기
독서노트 / 2011/02/16 11:42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옥수수 뜯어 먹듯 조금씩 씹어 몇 알씩 삼키고 있다. 그 중에 뭐라도 글을 쓴 뒤에 딱 자책하기 좋게 만드는 글이 있어 옮겨둠 ^ㅅ^ (벌써 자책 중ㅋ 젠장...) 물론 이 글이 자책하기 좋게 만든다는 건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이고,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이 글이 사실 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내 나름의 맥락을 덧대어 일반적 지침으로 삼을만 하다는 얘기다. 아도르노의 짧은 에세이들이 연속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보면, 그도 무슨 사건이나 사람이 동기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곳 저곳에서 때로 모순되고 갈라지는 틈이 느껴지거든(즉,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얘기). 물론 전체적으로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글 다운 글'을 써보고 싶다. 블로그에 쓰는 것 말고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열흘 간 어디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여하간 3월부터는. 물론 지금은, 그리고 당분간은 내게 허락된 지면이 없(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지면을 만들고자 한다면...


51. 거울 뒤로

문필가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유의사항은, 모든 텍스트와 모든 절, 모든 문단에서 중심 모티브가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쓰인 것에 대한 별다른 반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내버려두려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생각 속에서는' 자신의 의도에 밀착되어 있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어떤 결함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무방할 정도로 너무나 작고 사소하지는 않다. 수백 번의 교정 중 하나하나의 작업은 사소하고 고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체가 합쳐지면 새로운 차원의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길이는 아무래도 좋다. 분량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유치하다. 일단 존재하게 되고 씌었다는 이유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단지 변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종종 저자가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그 무엇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이 경우 최상의 표현을 골라내어 이것을 가지고 계속 작업해나가야 한다. 구성상 필요할 경우 버리기 아까운 사유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문필가의 테크닉이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버려진 사유들이 힘있고 꽉 찬 구성에 도움이 된다. 식탁에서처럼 마지막 한 입을 먹지 않아야 하며 술잔의 바닥을 비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바닥이 보인다는 의심을 받는다.

상투어를 피하려는 사람이 속된 아양떨기에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개개의 단어 선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훌륭한 산문들은 그런 것에 특히 민감했다. 하나의 단어도 진부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음악에서 또한 개개의 음조는 진부함에 저항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상투어는 카를 크라우스가 비판했던 유형의 단어 결합ㅡ예를 들어 '남김 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번영으로 그리고 파멸로', '확장시키고 심화시켜' 같은ㅡ이다. 왜냐하면 이런 단어 결합에서는, 말이 절실히 요청되는 곳에서 필요한 저항이 정교한 표현을 통해 가동되는 대신 김빠진 언어의 한가한 물결만이 철썩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은 단어 결합뿐만 아니라 전체 형식의 구성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어떤 변증법론자가 휴지부마다 '그러나'라는 표현으로 시작함으로써 사유 진행의 전환을 표시하려 든다면, 그러한 구성 틀은 그의 사유가 체계 없는 거짓말이라는 판결을 받게 만든다.

덤불은 정성스럽게 보살핀 신성한 숲이 아니다. 자기는 최선을 이해한다는 편안함에서 나오는 난해성을 해소하는 것이 의무이다. 대상의 깊이를 충실히 감당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쓰려는 의지와, 독특하고 난해하며 자만에 찬 날림 글에 대한 유혹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전한 인간 오성'이라는 우둔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진부한 사유를 화려한 문체로 치장하려 들지 않난 조심해야 한다. 로크의 진부한 문체가 하만의 모호한 문체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길이와 상관없이 완성된 글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이의라도 제기된다면 그러한 이의가 적절한가와 관계없이 이의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텍스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적 개입이나 허영심은 모든 의심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의심이라고 흘려버린 것은 텍스트 전체가 객관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징표일 수 있다.

에히터나흐의 부활절 댄스 행진[이 댄스 행진은 세 발짝 앞으로, 두 발짝 뒤로 간다ㅡ역주]이 세계정신의 행진은 아니다. 일정한 부분에 국한시키거나 유보시키는 것은 변증법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변증법은 극단을 통해 나아가며, 사유를 한정시켜 거기에 일정한 특성을 부여하기보다는 그 논리의 극단까지 몰고가 반전을 시도한다. 일거에 너무 멀리 나가는 모험을 금하는 '신중함'이란 대개 사회적 통제의 대리인, 나아가 우민화의 도구이다.

어떤 텍스트나 담론이 '너무 아름답다'는, 종종 제기되는 이의는 의심해볼 만한다. 표현된 사물, 심지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너무 쉽게, 인간이 겪은 치욕의 흔적을 무로하한 언어 형태로는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저자에 대한 앙심만을 합리화시킨다. 치욕 없는 존재자에 대한 꿈ㅡ그런 꿈을 내용으로 그려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런 꿈에 대한 언어적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데ㅡ은 악의적으로 교살된다. 문필가는 아름다운 표현과 객관적 표현을 구별하려 드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문필가는, 성실한 비평가에게는 그런 구별이 가능하리라 믿어서도 안되며 자기 스스로에게도 그런 구별을 용인하면 안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완전하게 말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된 표현의 아름다움이란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추잡한 허식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사물에 봉사한다는 핑계로 표현의 순수성을 등한시하는 사람 또한 항상 '사물'을 배반하게 된다.

고귀한 텍스트는 거미줄 같다. 촘촘하고 집중되어 있으며 투명하고 탄력있고 견고하다. 이것들은 날고, 기는 것들을 모두 자신 안으로 잡아챈다. 거미줄 같은 텍스트를 재빨리 통과해 빠져나가 보려는 메타포들은 거미줄의 제물이 되어 텍스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거기에는 재료들이 날아든다. 어떤 관념이 견실한가는 인용이 적절한가의 여부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 사유가 현실의 세포를 열어준 바로 그곳에서 사유는 주체의 폭력 행위 없이 다음 세포로 파고들어야 한다. 이런 사유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유지하며, 금방 다른 대상들이 그런 사유의 주변에 결정체를 이루면서 모여든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한 그의 시선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문필가는 자신의 텍스트 속에 집을 짓는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고 다니는 종이, 책, 연필, 서류들로 방을 어지럽히듯, 그는 사유 속에 비슷한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사유는, 그가 기분 좋게 느끼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가구이다. 그는 이것들을 다정스럽게 문지르기도 하고 혹사시키기도 하며, 뒤범벅을 만들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이제는 고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거주가 된다. 글쓰기에서 그는 예전에 가족들이 그랬듯이 어쩔 수 없이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배출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창고가 없기 떄문에 이 찌꺼기들과 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을 자기 앞에 밀어놓기 때문에 결국 자기 주변을 쓰레기로 둘러싸이게 할 위험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에는 가혹하라는 요구에는 기술적 필요도 들어 있는데, 이것은 지적 긴장을 늦추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다음의 모든 것, 즉 작업 중에 나온 부스러기, 괜히 얼쩡거리는 것들, 처음 단계에서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가십이었지만 점점 가면서 이제는 초라하고 곰팡내나 피우게 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 속에서 거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미니마 모랄리아>, 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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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9/06/0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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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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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4/04 20:16

요즘 들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상상하지 않았던 영역의 것이었겠지만ㅡ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ㅡ기왕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 ‘글쓰기’인 이상 상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삶을 택한 뒤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혹은 빛이 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일단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아니, 그보다 우선, 나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의 글이 어떤 사람에게든 읽힐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블로그도 열었고,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조금씩이나마 글들을 남기고 있고, 글 쓰는 집단에 계속해서 남아 있지 않던가.

내가 공부를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그래서 석사도 박사도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게다가 대학원 진로를 지금 전공과는 다른 전공ㅡ사회학ㅡ을 하고자 한 것도, 어쩌면 진짜 누구말대로 순수한 ‘학문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단지 ‘좋은 글’을 생산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년(?)이 흐른 뒤에 내가 강사가 되거나 연구원이 되거나, 혹은 일이 ‘잘’ 풀려서 교수가 되거나ㅡ아마도 이런 직종의 일이 나의 모든 일상적인 소비를 책임질 것들이 되겠지만ㅡ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아마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적어도 ‘지식인’ 혹은 ‘엘리트’라고 칭해질 법 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에 대한 응분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위 ‘사회참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학문적 탐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역시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갖게 될 어떤 ‘상징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들이 갖게 될 나름의 어떤 열매를 나누기 위한 거의 최소한의 노력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탕이 된 연후에야 각자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최근에 관찰할 수 있는 어떤 ‘니힐리즘’의 경향이다. 이 강대한 니힐리즘은 모든 것들에 ‘상대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이해관계를 ‘개인화’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탁월한 것들과 성취하는 것들에 대해서 ‘엘리트주의’라고 혐오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가치도 모두 동등하다, 어느 것 하나 나쁜 것 없이 모두 동전의 양면이 있다고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있는 그 니힐리즘 속에서, 어떤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거나, 특정한 입장을 명백히 취한 글들이 환영받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이 쓰인 책이나 블로그 따위를 독자들이 볼 이유가 없어진다. 다만 그것은 ‘잘난 체 하는 어떤 못난 지식인의 푸념’따위로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거리를 두고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만큼 어떤 자원을 갖고 특수한 환경에 자신을 포지셔닝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고민도 ‘자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통찰력과 반성이란 것도 결국, 자신의 삶에서 한 발자국 나와서 관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특수한 행위의 발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의 보수적인 학계에 몸을 담아야 한다는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그 ‘자원’이 반드시 공부를 오래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여유’를 비교적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그것을 ‘글’의 차원에서 소통하고 나눌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에의 거리두기는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특권’일 수도 있지만, 결코 ‘특권’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니힐리즘도 사실상 직접적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던 특권화 된 ‘지식인’들이 어줍잖게 침묵하지 못하고 주절주절 나서서 떠들어 대왔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무슨 ‘학술지’나 ‘KCI’ 등지에 끊임없이 논문을 올려대고, 좀 더 유명해지면 무슨 ‘학회’의 장을 맡고 교수가 되고, 더 유명해지면 무슨 시민단체의 대표를 맡고 하는 그런 전형적인 ‘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무리 ‘젊은’ 시절에 뛰어난 사람들도, 그렇게 무언가를 하나둘 맡기 시작하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조한혜정씨(신문의 악의적 보도라고 믿고 싶지만)도 그렇고, 홍세화씨도 그렇고, 손석춘씨도 그렇고 아무튼 나름대로 존경해왔던 모든 지식인들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결국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것도, 한편으로 고등 교육을 계속 받아 ‘지식인’층으로 취급될 나에게 계속해서 self-reflect를 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글이 나르시시즘적 무한 자기도취를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 그 자체를 직관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요즘의 대중 문화적 니힐리즘의 경향에 대항해서, 특정한 삶의 양식과 담론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기 위한 방법도 결국 ‘글’이라는 수단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은, ‘글’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해야만 한다. 읽기와 쓰기는 결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영감이나 에피퍼니를 받아서 순식간에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글’로써 표현하는 어떤 천재가 아닌 이상,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읽는 행위는 나에게 어떤 지적 쾌락 뿐 아니라 영감을 주고, 쓰기는 그것을 확인하고 더 강화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쓴 글을 또 읽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순환의 과정이며, 또한 그 순환을 통해서 더욱 좋은 글을 생산할 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글의 가장 좋은 독자는 결국 내가 되고, 내가 읽을 글이 가장 좋은 필자도 또한 결국 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글을 계속 접하고, 나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것 역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이 순환의 메커니즘은 어쩌면 계속해서 활기차게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덧) 오랜만에 희망적인 글을 써본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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