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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4/04 작가-되기

6. 9 작가 선언

스크랩 2009/06/0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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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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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작가-되기

생각 2007/04/04 20:16

요즘 들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상상하지 않았던 영역의 것이었겠지만ㅡ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ㅡ기왕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 ‘글쓰기’인 이상 상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삶을 택한 뒤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혹은 빛이 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일단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아니, 그보다 우선, 나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의 글이 어떤 사람에게든 읽힐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블로그도 열었고,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조금씩이나마 글들을 남기고 있고, 글 쓰는 집단에 계속해서 남아 있지 않던가.

내가 공부를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그래서 석사도 박사도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게다가 대학원 진로를 지금 전공과는 다른 전공ㅡ사회학ㅡ을 하고자 한 것도, 어쩌면 진짜 누구말대로 순수한 ‘학문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단지 ‘좋은 글’을 생산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년(?)이 흐른 뒤에 내가 강사가 되거나 연구원이 되거나, 혹은 일이 ‘잘’ 풀려서 교수가 되거나ㅡ아마도 이런 직종의 일이 나의 모든 일상적인 소비를 책임질 것들이 되겠지만ㅡ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아마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적어도 ‘지식인’ 혹은 ‘엘리트’라고 칭해질 법 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에 대한 응분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위 ‘사회참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학문적 탐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역시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갖게 될 어떤 ‘상징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들이 갖게 될 나름의 어떤 열매를 나누기 위한 거의 최소한의 노력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탕이 된 연후에야 각자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최근에 관찰할 수 있는 어떤 ‘니힐리즘’의 경향이다. 이 강대한 니힐리즘은 모든 것들에 ‘상대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이해관계를 ‘개인화’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탁월한 것들과 성취하는 것들에 대해서 ‘엘리트주의’라고 혐오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가치도 모두 동등하다, 어느 것 하나 나쁜 것 없이 모두 동전의 양면이 있다고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있는 그 니힐리즘 속에서, 어떤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거나, 특정한 입장을 명백히 취한 글들이 환영받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이 쓰인 책이나 블로그 따위를 독자들이 볼 이유가 없어진다. 다만 그것은 ‘잘난 체 하는 어떤 못난 지식인의 푸념’따위로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거리를 두고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만큼 어떤 자원을 갖고 특수한 환경에 자신을 포지셔닝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고민도 ‘자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통찰력과 반성이란 것도 결국, 자신의 삶에서 한 발자국 나와서 관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특수한 행위의 발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의 보수적인 학계에 몸을 담아야 한다는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그 ‘자원’이 반드시 공부를 오래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여유’를 비교적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그것을 ‘글’의 차원에서 소통하고 나눌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에의 거리두기는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특권’일 수도 있지만, 결코 ‘특권’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니힐리즘도 사실상 직접적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던 특권화 된 ‘지식인’들이 어줍잖게 침묵하지 못하고 주절주절 나서서 떠들어 대왔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무슨 ‘학술지’나 ‘KCI’ 등지에 끊임없이 논문을 올려대고, 좀 더 유명해지면 무슨 ‘학회’의 장을 맡고 교수가 되고, 더 유명해지면 무슨 시민단체의 대표를 맡고 하는 그런 전형적인 ‘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무리 ‘젊은’ 시절에 뛰어난 사람들도, 그렇게 무언가를 하나둘 맡기 시작하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조한혜정씨(신문의 악의적 보도라고 믿고 싶지만)도 그렇고, 홍세화씨도 그렇고, 손석춘씨도 그렇고 아무튼 나름대로 존경해왔던 모든 지식인들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결국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것도, 한편으로 고등 교육을 계속 받아 ‘지식인’층으로 취급될 나에게 계속해서 self-reflect를 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글이 나르시시즘적 무한 자기도취를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 그 자체를 직관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요즘의 대중 문화적 니힐리즘의 경향에 대항해서, 특정한 삶의 양식과 담론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기 위한 방법도 결국 ‘글’이라는 수단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은, ‘글’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해야만 한다. 읽기와 쓰기는 결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영감이나 에피퍼니를 받아서 순식간에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글’로써 표현하는 어떤 천재가 아닌 이상,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읽는 행위는 나에게 어떤 지적 쾌락 뿐 아니라 영감을 주고, 쓰기는 그것을 확인하고 더 강화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쓴 글을 또 읽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순환의 과정이며, 또한 그 순환을 통해서 더욱 좋은 글을 생산할 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글의 가장 좋은 독자는 결국 내가 되고, 내가 읽을 글이 가장 좋은 필자도 또한 결국 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글을 계속 접하고, 나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것 역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이 순환의 메커니즘은 어쩌면 계속해서 활기차게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덧) 오랜만에 희망적인 글을 써본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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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