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글 다운 글'을 써보고 싶다. 블로그에 쓰는 것 말고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열흘 간 어디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여하간 3월부터는. 물론 지금은, 그리고 당분간은 내게 허락된 지면이 없(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지면을 만들고자 한다면...
51. 거울 뒤로
문필가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유의사항은, 모든 텍스트와 모든 절, 모든 문단에서 중심 모티브가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쓰인 것에 대한 별다른 반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내버려두려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생각 속에서는' 자신의 의도에 밀착되어 있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어떤 결함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무방할 정도로 너무나 작고 사소하지는 않다. 수백 번의 교정 중 하나하나의 작업은 사소하고 고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체가 합쳐지면 새로운 차원의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길이는 아무래도 좋다. 분량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유치하다. 일단 존재하게 되고 씌었다는 이유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단지 변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종종 저자가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그 무엇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이 경우 최상의 표현을 골라내어 이것을 가지고 계속 작업해나가야 한다. 구성상 필요할 경우 버리기 아까운 사유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문필가의 테크닉이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버려진 사유들이 힘있고 꽉 찬 구성에 도움이 된다. 식탁에서처럼 마지막 한 입을 먹지 않아야 하며 술잔의 바닥을 비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바닥이 보인다는 의심을 받는다.
상투어를 피하려는 사람이 속된 아양떨기에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개개의 단어 선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훌륭한 산문들은 그런 것에 특히 민감했다. 하나의 단어도 진부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음악에서 또한 개개의 음조는 진부함에 저항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상투어는 카를 크라우스가 비판했던 유형의 단어 결합ㅡ예를 들어 '남김 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번영으로 그리고 파멸로', '확장시키고 심화시켜' 같은ㅡ이다. 왜냐하면 이런 단어 결합에서는, 말이 절실히 요청되는 곳에서 필요한 저항이 정교한 표현을 통해 가동되는 대신 김빠진 언어의 한가한 물결만이 철썩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은 단어 결합뿐만 아니라 전체 형식의 구성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어떤 변증법론자가 휴지부마다 '그러나'라는 표현으로 시작함으로써 사유 진행의 전환을 표시하려 든다면, 그러한 구성 틀은 그의 사유가 체계 없는 거짓말이라는 판결을 받게 만든다.
덤불은 정성스럽게 보살핀 신성한 숲이 아니다. 자기는 최선을 이해한다는 편안함에서 나오는 난해성을 해소하는 것이 의무이다. 대상의 깊이를 충실히 감당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쓰려는 의지와, 독특하고 난해하며 자만에 찬 날림 글에 대한 유혹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전한 인간 오성'이라는 우둔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진부한 사유를 화려한 문체로 치장하려 들지 않난 조심해야 한다. 로크의 진부한 문체가 하만의 모호한 문체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길이와 상관없이 완성된 글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이의라도 제기된다면 그러한 이의가 적절한가와 관계없이 이의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텍스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적 개입이나 허영심은 모든 의심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의심이라고 흘려버린 것은 텍스트 전체가 객관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징표일 수 있다.
에히터나흐의 부활절 댄스 행진[이 댄스 행진은 세 발짝 앞으로, 두 발짝 뒤로 간다ㅡ역주]이 세계정신의 행진은 아니다. 일정한 부분에 국한시키거나 유보시키는 것은 변증법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변증법은 극단을 통해 나아가며, 사유를 한정시켜 거기에 일정한 특성을 부여하기보다는 그 논리의 극단까지 몰고가 반전을 시도한다. 일거에 너무 멀리 나가는 모험을 금하는 '신중함'이란 대개 사회적 통제의 대리인, 나아가 우민화의 도구이다.
어떤 텍스트나 담론이 '너무 아름답다'는, 종종 제기되는 이의는 의심해볼 만한다. 표현된 사물, 심지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너무 쉽게, 인간이 겪은 치욕의 흔적을 무로하한 언어 형태로는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저자에 대한 앙심만을 합리화시킨다. 치욕 없는 존재자에 대한 꿈ㅡ그런 꿈을 내용으로 그려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런 꿈에 대한 언어적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데ㅡ은 악의적으로 교살된다. 문필가는 아름다운 표현과 객관적 표현을 구별하려 드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문필가는, 성실한 비평가에게는 그런 구별이 가능하리라 믿어서도 안되며 자기 스스로에게도 그런 구별을 용인하면 안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완전하게 말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된 표현의 아름다움이란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추잡한 허식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사물에 봉사한다는 핑계로 표현의 순수성을 등한시하는 사람 또한 항상 '사물'을 배반하게 된다.
고귀한 텍스트는 거미줄 같다. 촘촘하고 집중되어 있으며 투명하고 탄력있고 견고하다. 이것들은 날고, 기는 것들을 모두 자신 안으로 잡아챈다. 거미줄 같은 텍스트를 재빨리 통과해 빠져나가 보려는 메타포들은 거미줄의 제물이 되어 텍스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거기에는 재료들이 날아든다. 어떤 관념이 견실한가는 인용이 적절한가의 여부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 사유가 현실의 세포를 열어준 바로 그곳에서 사유는 주체의 폭력 행위 없이 다음 세포로 파고들어야 한다. 이런 사유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유지하며, 금방 다른 대상들이 그런 사유의 주변에 결정체를 이루면서 모여든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한 그의 시선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문필가는 자신의 텍스트 속에 집을 짓는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고 다니는 종이, 책, 연필, 서류들로 방을 어지럽히듯, 그는 사유 속에 비슷한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사유는, 그가 기분 좋게 느끼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가구이다. 그는 이것들을 다정스럽게 문지르기도 하고 혹사시키기도 하며, 뒤범벅을 만들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이제는 고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거주가 된다. 글쓰기에서 그는 예전에 가족들이 그랬듯이 어쩔 수 없이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배출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창고가 없기 떄문에 이 찌꺼기들과 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을 자기 앞에 밀어놓기 때문에 결국 자기 주변을 쓰레기로 둘러싸이게 할 위험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에는 가혹하라는 요구에는 기술적 필요도 들어 있는데, 이것은 지적 긴장을 늦추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다음의 모든 것, 즉 작업 중에 나온 부스러기, 괜히 얼쩡거리는 것들, 처음 단계에서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가십이었지만 점점 가면서 이제는 초라하고 곰팡내나 피우게 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 속에서 거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미니마 모랄리아>, 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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