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영화 / 2011/02/19 17:21
혜화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한수와의 행복했던 연애 시절은 혜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힘(주변 관계, 임신 등)에 의해 파경에 이르고, 한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잠적해 버리며, 힘들게 낳은 아기는 태어난 지 하루만에 죽어 버린다(혜화는 출산 과정에서 어쩐지 아기의 출생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무서움", 공포 탓이다.). 그러나 혜화는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래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혜화의 엄마를 포함해 누구도 더 이상 진정으로 혜화를 보살피지 않는다. 혜화는 세상으로 순식간에 버려진다. 혜화의 삶-서사는 갑작스럽게 붕괴하고 삶은 몰락한다. 삶에 대한 감각이 모두 증발하고 산화해버린다. 삶은, 관계는, 혜화가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타격을 받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혜화는 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가?

이러한 일에 대해 나이 어린 혜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사산 후 겨우 몸이 회복된 혜화는 집에 멀쩡히 살아 가던 혜화의 동생 혜수(어미 개)와 강아지들을 모두 누군가에게 팔아 버린다. 그러나 혜수는 팔려나가길 거부하며 집에 틀어 박히고, 혜수를 끌고 가려는 사람들과 혜수 사이에 일단의 소동이 벌어진다. 자기가 팔아버리고도 방 구석에 눌러 앉아 차마 헤어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던 혜화의 귀에 죄의식이 불가피한 소음으로 들이닥친다. 결국 혜수는 혜화의 손에 억세게 붙들려 목줄을 매인 채 질질 끌려 사라져야만 했다. 압도적인 상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혜화에게 모든 따뜻한 것들은 제거되어야 했으며, 관계들은 소멸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당시 혜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저질러져야만 했다. 그것은 제 삶의 몰락에 대한 복수, 제 삶의 감각을 찾기 위한 절박한 발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혜화의 복수와 발악은 결국 혜화 스스로를 다시 한 번 타격한다. 시간이 흘러 홀로 남은 그날 밤, 혜화는 손톱을 자르다가 손톱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버리고, 찢겨진 피부 사이로 붉은 피가 스미어 나오는 걸 슬픈 눈으로 지켜 본다. 우연히 팔려 나가지 못한 흰색 강아지는 갑자기 짐 더미 사이에서 기어나와, 그런 혜화에게 와서 낑낑대며 몸을 부빈다(그리고 또 버려진다).

이렇게 혜화가 당해버린 일, 그리고 혜화가 저질러야만 했던 일들은 시간이 몇 년이 흘러도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 억압되지만, 그런 억압은 제 사슬을 끊고 일상에 불쑥불쑥 출현하고 혜화의 삶을 끌어가는 미지의 힘, 곧 증상(symptom)이 된다. 그렇게 수 년 간 혜화는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애도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제의적인 삶을 산다. 제의적인 삶은 그 삶의 원인이 된 상처를 반복하지만, 제의만으로는 그 원본은 결코 재생되지 않은 채 억압된다(그러므로 이 영화를 '모성'으로 이해하는 독법은 그야말로 엉터리다). 억압된 삶의 상흔은 증상이 되고, 증상은 곧 삶이 된다(영화는 왜 혜화가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우리는 혜화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네일 아티스트로 살고 싶었던 혜화는 그 대신 동물 병원에서 애견을 돌보고, 재개발 촌에 버려진 개들을 병원에 데려와 치료하며, 사별한 싱글 수의사의 유난히 가슴에 집착하고 엄마를 원하는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본다. 혜화는 손톱을 자르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 둔다(그리고 한수는 그런 혜화의 손톱 중에 피가 묻은 손톱을 발견한다). 혜화는 낡고 허름한 집에서 어딘가 일그러져 있고 망가져 있는 강아지들과 함께 산다. 과거의 영향력, 상처의 그림자, 몰락 이후의 삶에 대한 희미한 스포트라이트, 희박한 삶의 감각들. 혜화는 제 살을 자르면서, 또 저에게 다가와 몸을 부비는 것들을 지켜보면서 삶에 대한 (가짜)감각을 획득한다. 실로 창상(創傷) 같은 삶이다.

그러나 혜화의 삶은 또 다른 타격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한다.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믿었던 한수가 '다리를 절며' 등장해서는, 죽었다고 믿었던 자신들의 아기가 입양되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혜수의 아이였(다고 믿었)던 강아지는 철거촌을 유유히 떠도는 다 큰 흰색 개가 되었고, 무슨 일인지 탈장이 되었으며, 이를 치료하려는 혜화의 앞에 등장해서는 언제나 혜화를 놀리듯 미끄러지며 사라진다. 잠깐 동안 마음을 품었던 싱글 수의사는 옛 첫 사랑과 결혼하기로 한다. 혜화의 엄마는 치매에 걸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내려야만 했던 몇 가지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 말을 한풀이 하듯 되풀이 한다(마치 그 일이 증상으로 남아 그 이후 당신의 삶을 모두 결정해버렸던 것인양). 게다가 한수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이건 차라리 유령이 아닌가?) 혜화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등장해서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끈질기게 따라 붙어 아기의 생존과 생활을 전한다. 혜화가 찾아 헤매던 혜수의 아이였(다고 믿었)던 강아지는, 혜화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인물인 개장수에게 붙들려 사라진다(고 믿어진다). 혜화는 이렇게 닥친 일들 앞에서 또 다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혜화의 삶은 또 다시 흔들리고 또 다시 붕괴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거부할 수 있던 단순한 조짐이었던 것들이 혜화를 이끌어서 차츰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억압해두었던 증상의 기원들이 차례차례 혜화의 삶 전면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런 타격들을 혜화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혜화는 이런 (재)타격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혜화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영화 엔딩 스포일러 때문에 급 진행) 모든 성장드라마는 언제나 타격 이후의 삶을 다룬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들이 가한 타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타격 이후의 삶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곧 성장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것은 사랑의 붕괴일수도 있고 소중한 타자의 상실일수도 있으며 갑작스러운 대재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타격 때문에 만들어진 증상은 자신의 삶 자체도 성장도 아니(어야 한)다. 증상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를 통해 깨져야 하고, 삶은 한 번 더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성장해야만 한다. 성장은 곧 이후-의 삶이다. 타격을 거듭 입은 혜화는 거칠게 차오르는 삶의 기억과 숨결들을 누르면서 차츰 진실과 타격들을 끌어 안아간다. 영화는 마치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듯이, 혹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일종의 필연성으로서 혜화가 해야만 했던 또한 할 수밖에 없었던 행위의 과정을 그려낸다. 혜화는 서사의 플롯을 통해 스스로가 압도되어야만 했던 현실들을 받아들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증상을 타격하고 진실을 선택한다. 마침내 최종적인 진실을 선택한 혜화는 한수를 지나쳐 운전해 가다가 순간 멈춰서서 거울에 비친 한수를 바라보고는, 후진으로 기어를 바꾸어 넣는다. 그리고 엔딩곡,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가 흘러 나온다(<앵콜요청금지>의 재배치, 재해석, 새로운 의미).

그렇게 <혜화, 동>은 (한수가 아니라) 혜화의 성장 드라마로 끝이 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삶은 압도적인 힘에 의한 상실과 타격을 조우하면서(encounter) 붕괴하고 몰락한다. 조우 이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삶은 어디까지나 증상으로서의 삶이다. 증상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삶-이후를 방해한다. 그러나 증상은 과거의 조우를 다시 만나면서 그 조우를 다시 끌어 안을때(re-encounter) 비로소 타격을 입고 진실이 될 수 있다. 진실은 곧 조우의 조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진실을 받아들인 삶, 그러므로 진실 이후의 삶. 그것은 곧 윤리이며 따라서 <혜화, 동>은 곧 한편의 잘 만든 서사-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성장이다. <혜화, 동>의 영어 제목이 're-encounter'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할 것이다.


덧) 정말이지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행복했다. 한동안 영화에 회의를 많이 느끼고 오직 친구가 만든 영화만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여전한 가능성을 보아서 다시 한 번 행복했다.

덧2) 이 영화를 감각이 예민한 '남성'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촌방향>  (0) 2011/09/11
혜화, 동: 혜화의 성장, 혹은 서사-윤리  (2) 2011/02/19
꽃비  (0) 2010/06/26
하하하  (0) 2010/05/12
언 에듀케이션  (2) 2010/04/17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12/28 12:06

마지막 남은 기말 요약과제. 계속 수정중인 글이긴 한데... 이렇게라도 올려버려야 끝날 것 같아서.
사실 이 장의 요지는 세속적인 문장 딱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난 떨지 말고 겸손해지라. =_=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Chapter 2. 'Against Ethical Violence'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버틀러는 그가 이전부터 계속 보여 왔던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버틀러는 모든 근대적 인식론의 폭력성, 즉 제대로만 한다면 모든 사물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한다. 근대적 인식론은 타자를 지식으로 다루지만 버틀러에게 오면 타자는 포획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타자는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들 삶의 근저를 뒤흔들고, 또한 시공간적으로도 여기에 이미 항상 도래해 있는 존재다. 2장의 초입에서 읽을 수 있는 버틀러의 단어는 불투명성, 비일관성, 자기동일성의 폐기, 무한히 열린 질문, 앎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이해, 필연적인 인정의 실패, 의무, 윤리적인 실패, 윤리적인 기획 등이다. 이제는 묵은 먼지 날리는 서고에서나 볼 수 있는 기투, 헌신, 책임, 앙가주망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버틀러의 글은, 어쩌면 버틀러야말로 이 시대에 유일한 실존주의의 상속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도 한다.

  버틀러는 2장에서 포스트-헤겔적인 인정(recognition)을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 가져가려고 한다. 이를 위해 버틀러는 우선 ‘투명한’ 인정을 일종의 윤리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투명한 인정의 장면은 우리들은 물론 우리와 인정을 주고받는 타자들의 일관성과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타자는 인정을 수여하는 우리들의 일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삭제될 뿐이다. 그 대신 버틀러는 인정 장면의 근본적인 불투명성에서부터 윤리적인 가능성을 읽어낸다. 1장에서 버틀러가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나와 너를 초과하는 어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의 영역이 인정의 장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들 주체의 능력은 이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에 의해 불투명해지고 제한되고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기획은 너와 나는 물론, 인정의 장면 자체도 근본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정초되어야 한다. 우리가 입주해 있지만 우리를 초과하는 영역의 불투명성 때문에 우리들은 지식과 앎의 과정에서 영원히 투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조건 덕에, 인정의 장면에서 타자에게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고, 또 질문에서 최종적인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방향을 상실하고 자기 동일성을 “실패”하는 조건에서만 지속적으로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너는 누구인가?”라는 인정의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정은 한 번 성취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상태로 영원히 개정되는 과정이자 운동이다. 그리고 이렇듯 끝끝내 완결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인정의 장면은, 불가지론적인 회의주의가 아니라 ‘너’와 ‘나’가 인정의 장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해준다. 그래서 버틀러에게 이러한 불투명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차라리 일종의 윤리적인 의무이다. 사회적 인정을 윤리적인 기획으로 구성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칙적인 불만족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의 한계(Limits of Judgment)

  그런데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는 때로 ‘판단’을 수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든 윤리적인 기획 속에서든 무엇인가를 긴급하게 선택하고 판단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인정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수도 없고, 행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앞서 살펴본 바, 인정의 장면에서 나타나는 영원한 불만족이야말로 일종의 윤리적인 기획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판단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판단은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는 자를 각각의 영역에 격리해버리고 인정의 과정을 종결해 버리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윤리적인 기획에서 판단의 중요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면 어떤 유형의 판단이 작동해야 할까? 다시 말해, 판단은 윤리화 될 수 있을까? 만약 판단이 윤리화 될 수 있다면 윤리적인 기획과 판단은 어떤 방식의 말 걸기 형식에서, 또 어떤 관계 속에서 작동해야 할까? ‘판단의 한계’라는 장에서 버틀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과 예화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장에서 버틀러는 인정, 관계, 윤리, 말 걸기 장면의 복잡한 함수를 펼쳐 놓기 시작한다. 

  버틀러는 비난(condemnation), 탄핵(denunciation) 같은 특정한 유형의 말 걸기 장면을 종합하는 단어로서, ‘판단’이라는 특정 행위를 우선 심문에 올리고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필연적으로 윤리적이지도 않고, 사회적 인정을 작동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판단은 사회적인 인정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있어서,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과 판단 받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도덕적인 거리(distance)를 설정하고 둘 사이의 공통 지반을 부인하는 말 걸기 형식이다. 판단은 이로써 판단하는 사람의 불투명성을 추방하고, 또한 판단 받는 사람의 비판적이며 윤리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다시 말해,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사회적 인정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단호하게 인정이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인정은 언제든지 판단을 중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정에 기초하지 않은 판단은 곧 윤리적인 실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판단은 언제나 판단하는 우리와 판단 받는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고려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정이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영원히 개정되어야 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인정에 기초한 윤리적 판단 역시도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장에서 흥미롭게도 버틀러는 카프카의 우화 <심판>을 들고 와서 분석하고 있다. 게오르그빠져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몸을 던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게오르그 아버지의 선언에 내몰릴 뿐 아니라 스스로도 기꺼이 몸을 내던진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게오르그는 투신을 요구한 아버지의 말에 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버지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여 투신한다. 이렇듯 능동과 수동이 묘하게 얽힌 게오르그의 도착적인 투신 장면에서, 우리는 판단이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애착 관계와 인정의 함수를 읽을 수 있다. 

  <심판>의 서사에서 이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서로에게 관계로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와 게오르그는 모두 상호간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판단의 ‘거리’를 두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행위하고 있다. 이는 도착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스스로에게 내리는 ‘도덕’적이지만 파괴적인 판단이다. 버틀러가 말하듯 이러한 모럴리스트들은 살인자로 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상호간의 인정은 언제나 상호 주체들의 자율성, 자기반성, 자기성찰, 비판적 능력을 지킬 수 있는 윤리적 관계의 장을 열어두고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말 걸기 장면은 이러한 인정과 관계맺음의 과정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말 걸기 장면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말 걸기 장면을 윤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을 원용한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버틀러는 이 장에서 정신분석학의 ‘전이(transference)’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전이의 윤리적인 가능성에 대해 모색한다. 또한 버틀러는 전이 개념을 기반으로 말 걸기 장면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정이 작동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전유하고 있는 전이 개념은 그 자체로 타자와의 관계성이다. 이 논의의 과정에서 버틀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정신분석학에서 전이가 주체형성을 조건 짓는 ‘일차적 관계성(primary relationality)’의 출현을 추적할 수 있는 통로가 되듯이, 말 걸기 장면을 정초하고 기초하는 근본적인 관계성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말 걸기 장면에서 메시지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말 걸기 장면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며, 말 걸기 장면의 전제조건과 실행의 양상 자체를 바꾸어낼 수 있는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는 불투명한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며,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말 걸기 장면은 우리들의 관계에 일차적으로 기초해 있으며, 우리는 말 걸기의 장면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장면 자체에도 개입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바꾸어 나간다는 점이다. 

  우선 말 걸기 장면의 관계성은 우리가 말하고 서사화하는 것들은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한(예컨대 ‘이성’의 광기), 결코 일관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관적으로 구성되고 파편화된 기억과 경험을 연결하고 지배하는 소유격 ‘나의(my)’ 서사는 일종의 심리적 위안이자 환상, 혹은 편집증적 고립일 뿐이다. 이럴 때 ‘나’는 ‘나의’ 서사를 독백하고 강요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인정의 법칙에 따라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말을 전달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다. 또한 말 걸기 장면에서 ‘나’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짜기에 필요한 구조와 규범은 1장에서 살펴보았듯 타자에게 속해있고 너와 나를 초과해 있으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범의 영토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말 걸기 장면에서 서사와 설명은 아무리 비판적으로 개정되고 재구성되더라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 즉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말 걸기의 장면은 전이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나에게 속할 수 없는 무의식을 실연하고 또 무의식이 현재에서 다시 살게 하는 말 걸기의 구조이다. ‘나’는 전이 장면에서 타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말 걸기 장면의 구조 속에서 ‘나’와 ‘나의’ 서사는 타자에게 탈취당하고 압도당하고 휘말려 든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나를 탈취하고 압도하는 “‘너’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의 전이와 역-전이의 특징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전이는 그 자체로 주체와 타자의 근본적인 관계를 현재의 맥락에서 편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주체의 발생적 조건인 ‘일차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또한 자아들이 출현하는 다양한 말 걸기의 장면을 접합한다. 그리고 전이와 역-전이는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작동하지만, 언제나 ‘나’가 타자에게 근본적으로 연루된 상태에서, 결코 일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한다.

  따라서 전이 장면에서 “‘너’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되고 있는가?”라는, 최후의 답변이 있을 수 없는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 ‘너’에 대해 물으면서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것, 이는 곧 ‘너’와 ‘나’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며, 따라서 ‘너’와 ‘나’가 속한 말 걸기 장면에 대한 심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너’와 ‘나’에 대해 동시에 묻는 이 짝패 질문은 말 걸기 장면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전이와 역-전이 장면에서 ‘너’와 ‘나’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관계가 아닐 것이다. 이제 ‘너’와 ‘나’는 전이와 역-전이를 통해 불가피하게 연결된 채 서로에 대한 영향력 속에서 새로운 관계로 돌입할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말 걸기 장면에서는 무시간적이며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서사, 즉 말하는 주체 ‘나’의 투명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에 대해 닫혀 있는 지배적인 ‘나’의 서사는 거부될 수밖에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서사의 불투명성을 긍정하고 일관된 서사화 전략에 저항할 것이다. 반복하지만, 여기서 서사가 비일관적이라는 것은 모호함과 모순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뜻할 뿐이다. 일관성이 없다고, 투명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해서 ‘너’와 ‘나’가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해 설명하고 서사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서사화는 윤리적 기획의 전부도 아니고,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버틀러에게는 완전히 서사화할 수 없는 근본적인 관계성의 장이 분명히 존재하는 탓이다. 버틀러에게 ‘나’는 ‘너’에게 말을 걸면서 ‘너’와 연결되고, ‘나’와 ‘너’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나’와 ‘너’가 연결되는 방식(말 걸기 장면)에 개입한다. 전이가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 공간이 바로 이 개입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말 걸기 장면은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관계와 상호 인정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나’가 타자들과의 관계에 불가피하게 연루된 채로도 생존할 수 있으며, 반대로 타자들도 말 걸기 장면에서 생존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를 인정하는 것은 환상의 죽음이자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의 상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불가피한 윤리적인 의무이다. 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슬픔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를 배려하지 않는 말 걸기는 쉽게 폭력에 경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The “I” and the “You”)

  그러나 버틀러는 ‘상호인정’이라는 균형적이고 양비적인 ‘착한’ 관점으로는 긴급한 윤리적 기획에 필수적인 어떠한 불가피성이나 절박성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성의 장에 연루되고, 또 연루될 수밖에 없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이 장에서 “나(the “I”)”와 “너(the “You”)”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등장하는 주체의 포지션,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어떤 ‘장소(locus)’이자 구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시도한다. 또한 버틀러는 “나”의 불투명성, 불가능성, 부분성, 유한성을 어떤 사회성과 관계의 장에 연결하고, 또한 이를 “너”라는 타자와의 이자적 관계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장에서 타자(“너”)는 말 걸기 장면과 “나”에게 근본적인 층위에서 도입된다. 이렇게 버틀러는 “너”를 관계와 윤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버틀러가 보기에 서사적인 목소리 “나”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 언제나 “나”가 묘사하는 자아도 상연(enact)한다. “나”는 반복적으로 재등록된다. 그러나 “나”라는 서사적 목소리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지금 말하고 있는 “나”가 어떻게 구성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서사적인 “나”는 서사 자체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모든 순간에 재구성 될 뿐이다. 이는 서사화 될 수 없는 수행적이고 비서사적인 행위이다. 요컨대, “나”가 어떻게 이 말 걸기 장면에 출연하고 소환되고 있는지, “나”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나”를 설명하고 “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설명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 최선을 다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망친다. 이는 설명 자체의 ‘내용’보다는 설명이 발생하고 있는 말 걸기 장면의 수사적 차원, 즉 ‘형식’적 차원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실천이 신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국 서사는 일차적인 관계성을 추적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최선의 경로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메시지를 수신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말 걸기 장면에서 이 누군가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누군가는 말 걸기 장면에서 나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는 어떤 상황,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수신자의 장소(locus)나 구조(‘너’)라는 어떤 환영적인 관계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것이 설령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수신 구조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조금 달리 풀어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단수의 타자-수신자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언제나 변화하는 복수의 타자, 또한 복수의 말 걸기의 장면이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말 걸기의 장면에서 천의 얼굴을 한 채 언제나 서로 다르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달받고 있는 타자들의 얼굴 앞에서, 다시 말해 이 복수의 타자들의 목소리, 얼굴, 침묵 속의 현존 앞에서, 타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는 일관적이고 단단한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이 얼굴들을 나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폭력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의 이야기는 풀리게 된다.

  여기서 버틀러는 라플랑슈를 인용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타자라는 ‘얼굴’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라플랑슈는 타자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어떤 단일하고 절대적인 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다양한 타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라플랑슈는 이러한 타자들이 유년 아이에게 남기는 압도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과 자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이들은 성인들이 던지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에 압도당한 채 반응한다. 메시지가 전달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타자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라는 정신분석학의 고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은 타자의 인지/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또한 타자에 반응한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질문이자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아이의 세계를 초과해서 성인의 세계에도 깊숙이 내삽(內揷)해 있다. 라플랑슈의 이론은 주체형성의 조건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라플랑슈의 이론에 따르면 ‘나’의 욕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조차도, 타자의 욕망이라는 ‘나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욕망에 기초해서, 또 이러한 이질적인 욕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주체들의 조건인 일차적 억압에 정초한 ‘일차적 관계성’의 탄생을 설명해준다. 이는 주체 형성을 조건 짓고 또한 말 걸기 구조를 조건 짓는 근본적인 관계성이다. 또한 이는 ‘나’가 벗어날 수 없는 ‘사회성’이라는 조건의 일부이다. 그리고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관계성의 차원은 앞서 살펴보았듯 완전한 서술이 불가능하며, 단지 메타-인지적으로 재구성되어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조건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서술 불가능한 ‘나’의 조건을 대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철학적 사변이나 픽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버틀러가 강조하고 경고하는 점은, ‘나’와 ‘타자들’이 상호적으로 평등하게 무엇인가를 등가교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만큼, 버틀러에게 ‘나’는 타자에 의해 ‘탈중심화’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나’가 위치한 조건을 구성하는 어떤 “수동성”의 이름, 혹은 “수동성에 선행하는 수동성”을 의미한다. 즉 ‘나’는 라플랑슈가 말하던 압도적인 일차적인 인상/자국(impression) 같이 ‘나’의 이전에 존재하던,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의해 탈취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소 불균형하게 느껴지는 관계성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점은, ‘나’가 비록 어떤 수동성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가 존재할 수 없다거나 ‘나’의 기획이 완전히 무용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나’가 최선을 다해 설명할 때조차도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이 개입하여 ‘나’의 설명을 부분적이고 불투명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주체는 존재할 수 있고 또 행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윤리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재구성의 토대는 ‘나’라는 주체를 형성해온 조건들은 궁극적으로 ‘나’가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나”라는 기획에서 탈구되어 ‘너’에게 연결되어야 한다. 결국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너와 나의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나’가 ‘너’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삶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나’의 욕망과 충동을 기원적으로 구성하는 대상이다. ‘나’는 ‘나’의 타동사적인 수동성을 인정하는 토대와 근본적인 관계성 위에서, 그리고 오직 ‘너’에게 말을 거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어떤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는 ‘당신’에 대한 ‘나’의 양도이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윤리적인 겸손함, 반성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반드시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이어야 한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울 뒤로  (2) 2011/02/16
책 구입할 때 몇 가지 기본 조건들  (4) 2011/01/29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2) 2010/12/28
젠장  (0) 2010/10/26
오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0) 2010/10/25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10/25 19:51
1.

내가 인문대 친화적인 구석이 있으면서도 인문대에 진학하지 않은 건, 인문대 사람들이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무슨무슨 전공자라는 호칭이 따라 붙는 사람들이 태반인 공간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자유가 없다. 나는 뭐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내 독해 방식에 대해, 예컨대 그것은 버틀러가 아니다, 그것은 라캉이 아니다, 그것은 헤겔이 아니다, 그것은 푸코가 아니다, 그것은 데리다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틀렸다,라고 말하면 나는 아무 할말이 없다. 나는 버틀러와 라캉, 헤겔, 푸코, 데리다의 자손도, 후계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여기에 같이 앉아 있지 말고 각자가 숭배하는 저자가 쓴 성스러운 텍스트 속으로 침잠해야 한다. 저자가 권위있을수록 그 이름은 제 주변의 정신교통을 더 심각하게 통제한다. 저자의 신호가 불균등하고 불투명하면 할수록 정신교통은 더 쉽게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왜 거기서 이전투구해야 하는지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다만 심각한 오해나 오역만 아니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는 현상을 읽고 글을 쓸때와는 달리, 책을 읽을 때 노동(혹은 일)하듯 하고 싶지는 않다. 왜 텍스트를 읽으면서 무슨무슨 전문가, 전공자라는 호칭을 통해 서로를 분할하고 제약하고 견제해야 하는가. 왜 담론시장과 학계에 유행이란 것이 생기는가. 왜 최신의 그럴싸한 담론을 수입해와야 유명해지고 밥 숟가락이나 뜰 수 있는가. 이건 서로의 지적 능력과 대화 능력을 의심하는 각자의 자만심, 레퍼런스 없이는 할말을 못찾는 무능함(마치 레퍼런스가 없으면 자신의 비루함이 폭로라도 되는 것처럼), 저자와 텍스트를 대하는 교조적 방식 때문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독해에 대해 제대로 읽지 않았다, 정통의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동시에 자기에 대한 속박이자 비난이라는 것은 왜 생각하지 않을까?


2.

이미 내가 윤리적이라면, 또는 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그냥 이대로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나는 윤리적이지도 윤리적인 삶을 살지도 않기 때문에 윤리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얼마 전 나는 어떤 한 '고통'과 만났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 고통에 응답하여 연루되기로 결심했었다. 왜냐면 그러한 태도가 내가 생각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윤리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윤리는 인식론적이거나 기술적인 윤리였다.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방식으로서, 판단하기 이전에 반응하고 연루되는 삶의 기획투사로서 윤리를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거창한 생각이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신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인 나, 몸을 가진 나,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구체적인 개인을 대면하고 있는 나는 지금은 어느새 지쳐버렸고, 이야기를 듣는게 지겹고 부담스럽다. 그 고통은 나의 삶과 시공간에 속하지도 않고,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냥 그곳에 존재하며 내 어깨에 들러 붙을 뿐이다. 나는 윤리가 아니라 오로지 죄책감으로만 반응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고통에 처방과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다. 도처에 존재하는 다른 고통과 비교 우위를 정하게 된다.

이 기획은 완전히 실패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월 29일  (0) 2010/10/30
10월 28일  (0) 2010/10/28
10월 25일  (4) 2010/10/25
10월 13일  (2) 2010/10/13
10월 10일  (0) 2010/10/10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10/24 19:19

며칠 간 피똥싸면서 한 요약과제 =_= 사실 매일 붙잡고 있진 않았고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만... 원문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하기 부담스러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제출 전날 피토하며 겨우 끝 마치게 되었다. 요약의 질이 높다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일단 텍스트를 내가 풀어서 한 번 써봄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해 안되는 소리는 거의 다 뺐으니... 흑. 어서 번역본이나 나와라.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by Judith Butler
1장 ‘An Account of Oneself’의 요약


  행동하는 것에 대한 탐구, 즉 도덕 철학은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는가? 오늘날 도덕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도덕적인 탐구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아도르노는 “도덕적 탐구는 언제나 공동체의 삶에서 도덕의 행동 규범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의문에 부쳐질 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집단에토스는 언제나 보수적이며, 여러 난관과 불연속적인 것들을 억압하는 허위의 통일성을 강제한다. 그렇기에 집단에토스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을 때에만(이때 집단에토스는 인용부호 “”를 달고 등장한다) 그래서 이 보수적인 에토스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 때에만, 도덕적인 질문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부호를 단 “집단에토스”는 이제 자신의 집단성 혹은 공통성이라는 가상(假想)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도구화한다. 또한 “집단에토스”는 일단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하면 폭력이 되어버린다. 폭력으로서 “집단에토스”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현재에 강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빛을 가리운다. 여기서 도덕성은 폭력적인 “에토스”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출현한다.

  아도르노는 폭력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이 출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정식화도 제공한다. 즉, 폭력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에 대한 요청에 대한 맥락에서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이란 것이 개인을 포함하지 못하기에 “보편”에 대한 요청이 곧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게 되는 경우, “보편”은 곧 폭력이자 개인과 상관없이 단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현존하는 사회 조건을 무시하는 “에토스”는 폭력이 된다. 이런 “에토스”가 특수성에 반응하지 못하고,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개인들에게 전유될 수 없을 때, “에토스”는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개정하기 위한 경합의 장소가 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보편적인 것(예컨대 사회적 조건, 도덕규범 등)과 특수한 것(예컨대 ‘나’) 사이의 어긋남과 불일치는 언제나 도덕적 질문을 위한 장소이다. 아도르노에게 도덕성은 어디까지나 경합에 열려 있는 일련의 보편 규칙을 개인들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렇게 개인의 자리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시켜 초연한 존재로 다루는 실수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점을 잊지 않는다. 물론 ‘나’ 없이는 도덕성이 존재할 수 없지만, ‘나’는 자신을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도덕규범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 혹은 도덕규범은, ‘나’를 인과적으로 생산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나’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는 ‘나’를 초과하고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에 이미 항상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가 도덕규범에 순응해야한다거나, 도덕규범과 궁극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나’를 이해함에 있어 그러한 도덕규범 혹은 “에토스”의 발생적 근원과 사회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에토스”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사회이론은 언제나 ‘나’가 생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할 때, ‘나’는 언제나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히 인식론적 질문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체가 규범들을 전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주체의 존재론적 장을 제공할 수 있는 규범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과연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주체가 될 수 없는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규범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까? 사회적 존재론의 영역에서 주체가 스스로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과정에 규범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을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Scenes of Address)

  여기서는 주체가 도덕성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주체의 생산에 있어 도덕성이 갖는 힘에 대해서 고려해볼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반추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상처 받고 고통 받을 때에만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나 고통 겪는 사람들의 옹호자들은,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를 질문한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은 기억을 만든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양식은 자아가 곧 고통의 원인이므로 특정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특정한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다름 아닌 어떤 기성의 권위이다. 정의와 처벌의 체계로서 권위는 우리를 호명하며, 우리는 그 권위에게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써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 행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게 된다. 요컨대, 니체에게 설명가능성/책임성(accountability)은 기성 권위의 위협과 비난을 받은 뒤에야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니체식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는 아니다. “너”를 알고 이해하려는 욕망과 처벌이 아닌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고 서술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마주할 때에만 설명을 시작한다.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해 나에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 즉 “그게 너였어?”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만, 우리는 설명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자아를 설명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서사(narrative)의 형식을 취하며, 말이 되도록 사건의 이행과정을 설명할 능력 뿐 아니라 서사의 목소리와 권위에도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침묵할 수도 있다. 침묵은 나에게 던져진 질문의 형식과 또 질문을 던진 사람에 대해 그리고 질문자가 호소하는 권위의 정당성을 의문에 던지거나, 혹은 침묵 속에서 질문자가 끼어들 수 없는 자율성의 영역을 보존함으로써 장면 안에 존재하던 관계를 바꾸어 낸다. 이렇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에 대해 진술을 거부하는 행위가 갖는 여러 차원의 의미는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scenes of address)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니체는 이러한 ‘대화’의 장면, 즉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을 완전히 고려하지는 않았다. 니체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사법적 체계의 처벌 위협에서만 도덕적 질문이 만들어지고 설명이 시작될 뿐이다. 이러한 위협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도덕 뿐 아니라 영혼의 국면까지 생산한다. 니체는 이러한 사법적 체계와 처벌 위협의 도덕체계에 귀속되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구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공격과 같은 범위에 걸쳐 있고, 삶의 근원으로서 공격을 금지하면 삶 자체도 금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고통을 입히더라도, 니체에게 이러한 공격과 고통은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분이며 심지어 일종의 생명력을 구성하기도 하므로 쉽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덕성은 차라리 부정적인 의미까지 갖는다.

  푸코는 감옥의 훈육 권력에 대해 설명한 바 있지만, 반성적 주체의 출현에 있어서 처벌 장면을 일반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푸코는 도덕과 ‘양심의 가책’이 어떻게 니체 식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말년의 푸코에게 주체란 일군의 코드와 규정, 혹은 규범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는데, 주체는 (1) 자기의 구성을 제작(poiesis)의 종류로 드러낼 뿐 아니라, (2) 자기제작(self-making)을 더 넓은 비판의 맥락에서 움직이도록 한다. 즉 푸코의 자기제작은 무로부터(ex nihilo) 급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떤 규범에 대한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의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는 늘 자기 자신의 형성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늘 윤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과정을 지지하는 “주체화의 양식”과 “자아의 금욕주의” 같은 자기활동성의 형식들이 도덕적 행위를 구성한다. 또한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실천 과정에 있어서 ‘비판’은 주체가 속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지평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아의 미학에 관여함으로써 “진리의 정치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의 과정 안에서 주체의 탈종속화를 보장”한다.

  푸코는 도덕을 니체처럼 창조적인 충동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니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도덕이 창안적(inventive)이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푸코에게도 주체화/종속화라는 푸코의 설명에서 보듯이 “나”는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생성될 수 있지만, 이러한 생성 과정은 니체처럼 자신을 꾸짖고 자책하는 심리적인 행위성의 결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아가 어떤 외부의 질문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만들고 형성하는가하는 문제는 열린 질문까지는 아니어도 또 하나의 도전이다. 요컨대, 도덕규범이 필연적으로 주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주체가 이러한 규범을 자유로이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방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택할 수 없었던 조건들과 갈등하고 투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만 도덕/윤리적인 주체는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형성과 행위의 구성 맥락이 완전히 자기에 정초해 있지 않다면, 그래서 주체가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하고 자기 스스로도 완전하게 인식해낼 수 없다면, 이러한 주체에게 행위에 따른 개인적·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주체는 윤리적 고려와 인간의 행위성 자체를 훼손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을 불가능한 기획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불투명성은 어쩌면 주체가 관계적 존재, 즉 관계성의 근본적인 형태를 요구하며 관계의 맥락에서 형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불투명하다면, 또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가 윤리적 책임감의 현장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에 대해 불투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주체는 윤리적으로 속박되고 이 속박을 유지한다고 말이다.


푸코적 주체(Foucaultian Subjects)

  푸코에게 자아구성의 문제에서 자기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진리체제(regime of truth)이다. 진리체제의 용어는 어떤 존재의 형식을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의 여부를 사전에 결정하면서, 주체의 본 모습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진리체제가 제공하는 규범은 자기제작에 따르는 일군의 결정에 틀과 참조점을 제공하면서 협상에 열려 있을 뿐, 우리를 결정론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코의 핵심은 우리와 진리체제의 규범이 언제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 외에도, 진리체제와 맺는 모든 관계가 곧 나와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다. 따라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자기 반성적 차원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진리체제는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를 실현하고 통치하지만, 이 통치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제작의 과정 속에서 항상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체제에 대한 의문은 진리체제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즉 진리체제를 문제 삼는 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이며, 이는 곧 나 자신에 대해 설명(account)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가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은 때로 자신의 존재조건과 관련을 맺는 진리체제와 자신을 동시에 의문에 던지면서 주체로서 인정불가능성을 감행하는 것이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인정가능한 주체인지에 대해 의문에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와 타인들이 진리체제 내부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규범은 나-너(타자)라는 이자 관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규범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총체성이나 불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정의 실천 속에서, 타자의, 혹은 타자라고 하는 인정불가능성이 발생시키는 인정의 붕괴와 파열이 진리체제의 규범적 지평을 문제 삼는 경우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보지 못한 점이지만) 다른 이를 인정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 즉 현존하는 진리체제에서는 언제나 충족될 수 없고 실패하는 상호 인정에 대한 욕망과 투쟁은, 진리체제의 규범들을 비판적으로 심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진리체제를 열어놓는 것은 진리체제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정욕망 속에서 진리체제 속의 나를 문제 삼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곧 미덕의 신호이자 윤리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진리체제에 대한 논의를 일인칭 관점을 택한 윤리적인 질문의 맥락에서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이자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을 단순한 형태로 직접 던지게 되면, 나는 사회적인 규범성의 영역 뿐 아니라 권력의 문제 틀에도 즉각 포획된다. 장면 속에 “나”와 “너”가 존재하더라도, 규범적인 프레임이 이 출현과 조우에 필수적이라면 규범은 나의 행위를 규제할 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만나는 장면의 출현도 좌우하게 된다. 또한 윤리의 영역은 사회적인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은 방향을 쉽게 상실한다. 이런 경우 만약 “나”가 “너”에게 인정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는 나 자신의 사적 근거에서 인정을 제공하지 않게 된다. “나”는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규범에 종속되며, 따라서 “나”는 어디까지나 규범의 행위성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가 규범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정도만큼 “나”는 규범에게 사용된다. “나”는 “너”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결국 내가 규범과의 싸움에 휘말려들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규범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포스트 헤겔적인 질문(Post-Hegelian Queries)

  헤겔이 지적하듯 인정은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동시에 나는 인정을 받게 되며, 또한 내가 인정을 제공한 형식도 잠재적으로 나에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두 주체 사이에서 인정이 가능해질 때 암묵적인 상호성의 조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정(recognition)은 헤겔이 지적하듯이 나와 타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호적인 행동에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구조적 동일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alterity)과의 만남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타자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헤겔적인 타자는 언제나 외부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탈-아적(ecstatic)이며, 따라서 나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에서 나 자신을 나의 밖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를 말하고 “나”를 알고 또한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일인칭 관점이 탈구되는 일인칭 너머의 관점에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나도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이며, 따라서 나 자신으로 귀환하는 여정의 최후의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겪는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되며, 따라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에는 과연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이 존재한다. 이렇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조건은 우리가 우리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 밖의 외부적 매개, 즉 규범이나 관습의 힘에 의해서만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헤겔적인 인정의 주체는 이렇듯 불가피하게 상실과 엑스타시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교환은 교환에 참여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규범의 언어와 관습, 그리고 침전에 의해 조건화되고 매개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묘사하는 인정투쟁은 다름 아니라 이자 관계가 사회적 삶을 이해하기 위한 참조점이 되기엔 부적합하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이자 관계에 대한 천착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그 무엇, 예컨대 ‘인륜성(Sittlichkeit)’이다. 다시 말해, 이자 관계의 교환은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어떤 규범을 향한다. 또한 인정의 무대에 서기 전에 서로를 인지하고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로를 독해할 수 있는 시각적 틀, 즉 이자 관계를 초월하는 규범 안에 들어갔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타자는 시각 장의 규범성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나의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내적 능력’을 통해서 나에게 인정을 수여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반응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시각 장의 규범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시각 장의 규범성은 타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인식론적인 장일 뿐 아니라 또한 권력의 작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개인의 얼굴은 쉽게 읽히고 다른 이들은 쉽게 읽히지 못하게 되는 걸까?


“너는 누구인가?”("Who Are You?")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정에 대한 사회이론은 주체의 인지가능성에 있어 비개인적인 규범이 작동한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실제 일상에서 우리는 주로 가까운 이들과의 생생한 교환 속에서 규범과 접촉하고 타자를 만나며, 우리가 누구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카바레로는 이러한 인정의 질문이 마치 사람됨의 그릇에 특정한 내용을 채워야 되는 것인 양 우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카바레로가 보기엔 질문을 던질 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 자체가 이 질문의 함의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한다.

  상호 인정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질문은 직접적인 질문으로, 이는 타자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타자관은 타자의 독특함과 대체불가능성을 가정하면서, 헤겔식의 상호 인정 모델이나 타인에 대해 더 일반적으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제한한다. 또한 이 질문에 함의된 ‘누구’라는 것은 이타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누구’냐는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처럼 도덕적 책임의 귀속과 설명가능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알려질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카바레로는 타자에 노출되는 존재로서, 그리고 취약한 존재로서, 또한 서로의 독특성(singularity) 안에서, 어떻게 이 필연적이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만남을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살핀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갇혀서 오직 나에게만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너”를 위해, 그리고 “너”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 속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나”가 말을 걸 “너”가 없다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너”와 연관해서만 “나”를 지칭할 수 있고, “너”가 없다면 “나”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성을 삭제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헤겔이 논의하는 바 이자 관계에서 사회적 인정이론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논의이다. 카바레로는 오히려 사회적인 것을 이자 관계에 정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카바레로는 그래서 “너”를 무시하고 “나”의 권리만을 칭송하는 모든 개인주의적 유파는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타락과 “너”의 우연성을 회피하는 대신 “우리”라는 집단적인 대명사를 특권화하면서 내부의 도덕에 천착하는 유파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쓴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너희들은 가능한 우리 편이며, 그들은 적대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나는 꼴사납고 너는 물론 불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너”라는 타자를 만날 때 “나” 자신을 드러냄으로써만 나 스스로의 독특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신체성에서 나온 삶의 특질이므로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적 영역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독특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카바레로가 보기에 자신의 사회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공성의 일부분이다. 또한 카바레로는 “나”의 독특함도 타자에게 드러나지만, 타자의 독특함도 “나”에게 드러난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것 때문에, 즉 우리의 독특성 때문에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독특성을, 나 스스로가 만남의 장면에서 드러났음을, “나”와 “너”가 서로의 독특성 때문에 묶여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가능하게 만들고자 할 때 사용하는 규범은 완전히 내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규범이 출현하는 시간은 내 삶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규범은 나의 생과 나의 죽음에 무관심하며, 나와 다른 시간에 존재하기에 나의 시간을 가로막기도 한다. 푸코는 이렇게 적는다. “담론은 삶이 아니며, 담론의 시간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담론으로서 제시하는 “나”에 대한 설명은 살아 있는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의 말은 내가 그 말을 할 때 탈취되어, 내 삶의 시간과 같지 않은 담론의 시간에 차단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규범의 무관심이나 방향상실 같은 것이 나의 생존을 추동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은 담론을 통해 회복되거나 확장될 수 없지만, 이는 불가지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불가피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나”의 것으로서의 “나”의 관점이 차단되고 탈취되는 것은 무엇이 인정할만한 설명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규범의 작동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규범에 어느 정도 순응하거나 협상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에서 설명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것에서 몰수되는 경우에만 완성될 수 있다. 오직 탈취 속에서만 “나”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을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서사는 “나”의 것이 아닌 무엇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만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를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의 독특함과 서사적 권위는 이렇게 규범의 관점과 시간에 어느 정도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다만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태를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그것은 지시체의 회복 불가능성과 폐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불가능성은 서사를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라캉이 얘기하듯, “허구적 방향”에서 서사를 생산한다. 이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차 반복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개연성 있는 판형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 여러 판형 중에 어느 것만이 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또한 내 서사의 조건, 내 서사의 주제에 종속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에 몸이라는 지시체가 있다. 몸은 내가 가리키고 지시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다시 말해 심지어 내 몸이 어디에 갔었고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함에도 완전히 서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몸이 있다. 따라서 몸이 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온전한 회상이 박탈당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을 정리하자면, 나의 독특성을 설립하는 서술 불가능한 (1)드러남(exposure)이 있으며, 내 삶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거듭하여 인상/자국을 형성하는 회복 불가능한 (2)일차적 관계(primary relations)들이 있다. 따라서 나의 (3)부분적인 불투명성(partial opacity)을 확립하는 역사가 존재한다. 여기서 (4)규범(norms)의 존재를 고려해야하는데, 규범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촉진하지만, 내가 지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독특성의 역사를 확립하려는 순간 나를 대체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탈취 현상은 내가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설명함으로써 내 설명의 서사구조가 (5)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structure of address)에 의해 대치된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구성적 통약불가능성(constitutive incommensurability)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나의 이야기가 뒤늦게야 도착하도록 만들고, 내가 서술하려고 하는 삶의 구성적 출발점과 전제조건의 어느 정도를 놓쳐버리는 방식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서사가 갑작스러운 사건 가운데(in media res)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의 손실을 회복하고 재구성한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기원을 픽션으로 만들고 우화로 만든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내고, 이 새로운 형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과거의 삶을 가진 “나”에 서사적인 “나”를 덧붙인다. 이러한 서사적인 “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계속 이야기에 효과적으로 더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서사적 관점에서 다시 나타나고, 또한 이렇게 더해지는 서사적 “나”는 문제가 되는 서사에 관점을 정박할 수 있는 순간에도 완전히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나에 대한 설명은 내가 정확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종속되어 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사적 재구성에 대한 나의 노력은 영원한 개정의 과정이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언제나 나에게 있으며, 또 나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윤리적인 실패로 간주해야 할까? 내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완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윤리가 소멸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투명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언어와 ‘너’에게 더욱 단단하게 묶어줄 관계성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윤리는 “자아”의 조건이 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눈멀게 하는 어떤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젠장  (0) 2010/10/26
오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0) 2010/10/25
자아에 대한 설명  (0) 2010/10/24
아 재밌겠다  (0) 2010/10/20
윤리, 단독성, 소설, 나  (4) 2010/10/13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10/13 22:32
나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단편집부터 접했다. 그리고 최근 웹진 문지에서 지난 달 웹진문학상을 수상한 <옹기전>까지. 단편을 읽고 나니 <백의 그림자>라는 경장편을 읽기가 두려웠다. 언제나 좋아 뵈는 글은 최대한 미루고 아껴서 보게 된다. 가장 적확한 순간에 만나게 될 때까지. 내가 읽어 치우는 것들과 동급에 두기를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그 좋은 것들을 끝까지 보존해두기 위해서. 영화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다. 최상의 것들은 최상의 순간에 만나야 하고, 절실할 때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삶의 어느 순간엔, 언젠간, 꼭, 온다. 내가 책을 사 모은 채 보지 않고, '굿 다운로더'가 되어 영화를 다운 받아 둔 채 보지 않고, 한달에 돈 얼마 내면서 150곡을 다운 받고도 안 듣는 음악들이 있는 이유다. 여하튼 몇번이고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늘 실패했다. 부분적인 인용조차 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특히 무재와 은교 사이에 오고가는 짧은 대화가 무척 마음에 드나, 그 대화가 이 작고 하얀 책 밖으로 나오면 황량한 여백에 쉽게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이 소설을 근래 보기 드문 최상급의 사랑소설로 읽었고(연애소설이 아니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별로 겹칠게 없는 다른 범주라고 생각한다. 또 난 연애엔 도통 젬병이므로), 또한 윤리적 탐문으로 읽었다. 사랑과 윤리의 불가분적 관계. 사랑하지 않고 윤리가 어찌 있을 수 있으며, 윤리적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 어찌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혹은 이 소설을 마음에 품고 있는 한, 만났을 땐 손쉽게 서로 인지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라는 착란마저 들게 한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소설을 언젠가 쓰게 된다면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까 싶은,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공이 생긴다면 써보고 싶게 만드는 좋은 소설.

소설 자체에 대해 어쭙잖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과제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부분이 있어 옮겨두려고 한다. 소설에서 인용한 건 아니고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한 부분이다.


이 작가에 대한 기왕의 비평적 논평들을 존중하기 위해 '환상'이라는 용어를 고수했지만 사실 적절한 단어라고 하기 어렵다. 복잡한 문학 이론의 문제들은 제쳐 두고라도, 도대체가 이 소설에서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 주체가 어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발생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인' 환각을 뜻하는 환상이라는 용어로 그 현상을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간 비윤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차라리 '극(極)현실'에 가깝지 않은가.

황정은이 (이 소설뿐만 아니라 기왕의 작품들에서도) 환상을 동원하는 까닭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방금 짚어 본대로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수단으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종류의 것일 때, 소설가는 그 극한의 불행을 어떻게 소설화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학(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자세)의 문제다. 벤야민이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한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178-9)

원래는 문학이론을 가장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너무 붙어 있어서는 데일 수밖에 없으니 '취미'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언제나 스스로 환상 구조ㅡ행위자성, 혹은 주체를 탄생시키는ㅡ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결국엔 자신감 부족일테지) 그것은 잠시 미뤄둔 채 인류학 관련 전공, 더 넓게는 '질적 연구'를 하는 전공에 들어 갔다. 왜냐면, 나는 더 이상 "정보들"을 생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독성"을 밝히고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질적 연구방법론이 할 수 있는 것에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공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때때로 나는 오가는 이야기와 그 결과물에서 "단독성"에 대한 열망을 조금씩 읽을 수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그 열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아직 석사 1학기라 왜 그 전공을 택했냐는 말엔 상대방이 가장 원할 것 같은 말, 혹은 주변 상황에 따라 적당히 조절해서 말하곤 했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단독성"의 문제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블로그에라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요즘 수업에서 강독하는 버틀러 책의 일부분은 마침 이 단독성(singularity)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단수성인가, 단독성인가, 특이성인가, 혹은 독특성인가. 그 무엇으로 번역하든 universal-particular라는 이분항이 아닌 third term으로서 singularity 개념이 적확하게 한국어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지금 당장은 산적한 과제를 해치우고.. 방학 때 조금 더 몰입해 볼 주제.


부록 : http://webzine.moonji.com/?p=2910
나 이렇게 조금 수줍은 인터뷰가 완전 좋아 *-_-* 다음 작품 이야기에서 완전 기다리게 된다. 이 인터뷰도 한참 전에 봤는데 블로그에 올려서 나눌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아에 대한 설명  (0) 2010/10/24
아 재밌겠다  (0) 2010/10/20
윤리, 단독성, 소설, 나  (4) 2010/10/13
  (0) 2010/09/05
글을 잘 쓴다는 것(벤야민)  (2) 2010/08/20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10/09/13 20:48
여기까지만 하고, 잠시 단행본 1권 발제가 끝날 때 까지 잠시 휴업 ㅠㅠ

Rey Chow, Ethics after Idealism―Theory-Culture-Ethnicity-Reading, Indiana Univ Press, 1998, pp.XIII~XVI

Introduction

대학원생이었던 이래로, 나는 비판이론에 열린 태도를 지닌 학과와 과정에 속해있었다. 이러한 사실의 이점이 있다면,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이론에 대한 저항”을 하면서 보는 눈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론”의 폭넓은 역사적 함의를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론”이라고 말할 때, 나는 지금도 대학원생들이 배우고 있는 플라톤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던 철학 그리고 해석학, 문예비평 및 해석의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나는 1960년대 이래로 영미권 학계를 급진적으로 만들어온 해석 방식을 대표하는, 일반적으로 “후기구조주의”나 “해체”라고 불리는 용어를 의미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러한 용어들에 특정한 뉘앙스나 정확한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지난 몇 십 년간의 지적작업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던 방식으로 축약해서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에서 이해되는 “이론”의 명백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지시성(referentiality)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화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1916)>에서 언어학적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를 상대화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의 전통을 따르면서 고정된 기원을 유보하고 불안정하게 만들어왔던 이러한 일반적인 추세는, 부분적으로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추세는 “실재”(언어, 텍스트, 이야기, 저자, 자아, 정체성, 커뮤니티 등 무엇으로 실재를 정의하든 상관없이)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내파했던 작업을 관통하며, 이 작업은 최근에도 여러 방식의 보편주의적 비평(젠더, 인종, 계급, 성적 선호 등등에 대한 탐구를 거쳐)으로부터 많은 반향을 얻었다. 지시성을 의미작용과 의미 사이의 투명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혹은 조금 더 잘 정의하자면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끈질기게 [투명한] 반영성(reflectionism)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지시성 문제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문제시되거나 중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는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증적인 것(the positivistic)의 뼈아픈 고역으로 채워진 이론적 거부반응으로서, 지시성은 대신 “문화연구”라 불리는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최근 들어 지식인 간의 논쟁에서 팽배한 “문화”라는 개념의 두 가지 유형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념은 인류학에서 유래했는데, 일반적으로 “생활세계” 혹은 “삶의 방식”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문명화된” 삶의 세련된 성취의 총합으로서 더 엄밀하게 정의되는데, 이는 주로 문예이론, 예술이론, 클래식 음악 등 이른바 “고급문화”를 구성하는 것과 흔히 연결된다. “문화” 개념의 첫 번째 정의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이 관점은 문화를 공통의 신념, 태도,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며, 또 모든 집단의 인류에게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 정의는, 자주 지적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적이고 배타적이며, 그 자체로 특정한 계급이해관계의 헤게모니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각각 다른 종류의 문화정치학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를 옮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이들이 “문화”를 소유한다고 간주하여 잠재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개념은, 모든 문화가 엄격하게 “특수성”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문화적 관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거꾸로 문화가 “고급문화”라는 개념은 엘리트주의적일 수는 있지만,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세련된 성취”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하여 “문화”는 역설적으로 지역적이라기보다는 비교 문화적 현상으로서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개념은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문화연구의 추진력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추진력은 “문화”를 미완성의 과정이자 끝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사회관계의 별자리―절대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라고 보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몇몇 비평가들은 문화연구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이기에 진지한 지적 관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는 연구대상에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문화 자체의 미완성적인 특성과 정확하게 관련된다. 끝없이 열린 역사를 “지금”이라는 말보다 더 잘 상징하는 시간의 순간이 있는가? 또 끝없이 열린 평가에 대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넘겨진 것들보다 더 잘 드러내는 대상이 있는가? 문화의 미완성이라는 특성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이거나 존재론적인 의미작용의 “모호성”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성은 국제 노동 분업에 내재한 엄청난 불평등의 지속적인 효과 때문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재현과 정치적 권력에 대한 접근의 문제, 또 문화자본의 소유와 교환 그리고 강화의 문제에도 내재해 있다. 탈식민주의 시대와 탈냉전 시대는, 부분적으로 후기구조주의의 유산에서 유래했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탐구를 사회주의적 가치의 외관에 천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취해야 하는 정치적 행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도 소실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해왔다.

그렇다면 문화연구는 문화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이해하면서, 기호의 해체와 함께 출발한 문화상대주의의 단순한 연속이고 확장에 지나지 않을까? 문화연구와 비판이론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고급문화” 대 “생활세계”라는 문화의 공식화를 따른다면, 최근 몇 십 년간 학계의 실천은 두 개의 학풍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문학(인문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언어의 주체로 간주하는)”과 “인류학(사회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문화적 환경의 대상이자 생산물로 간주하는)”으로 부르자. 또 최근에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 사이에 유사한 분화가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러한 최근의 분화는 내가 뒤에 자세히 설명할 측면에서 볼 때, 문화에 대한 연구의 잠재적인 인종주의화를 의미한다.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자. “비판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를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연구가 “이론적 엄격함”을 결여했다는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강력한 이유는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문화”를 물화(reify)한다는 것이다. 즉 문화연구는 문화를 유기적인 총체로 간주하면서, 오랜 전통의 연속주의적(continuist) 사유에 속해있는 역사주의와 경험주의, 실증주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다른 두 “가치체계(regimes of value)”, 즉 이론적으로 늘 깨어있음을 상징하는 한 쪽 체계와 문화적 물화(reification)를 상징하는 다른 한 쪽 체계의 통약불가능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만약 이론을 뺀 문화에 대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면, 문화를 뺀 이론에 대한 표현은 가능할까? 나는 “문화”가 무엇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은 언제나 문화연구에 대한 “이론적” 거부라는 측면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 작업이 “너무 이론적”이라고 비판받아온 이론가들이 영리하게 반박했던 것을 빌자면, “이론”에 대해서 가장 잔인한 비평가라 할지라도 이미 언제나 특정한 이론적 위치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말하는 비평가들 역시도 특정한 문화적 위치에서, 또 특정한 문화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문화는 “비판연구”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특정한 형식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이는 영미권이나 불어, 독어권의 정전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나는 그러한 특정 형식이 무엇인지 곧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오로지 비판이론에만 헌신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흔히 문화적 추상화의 정반대로 간주된다.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상스러운 것과 단순한 것들의 쓰레기장이자, 투명하고 이해가능하며 접근도 쉽게 가능한 현상들의 하수처리장이다. 게다가 문화연구의 대상이 자주 유색인종에 연관된다는 사실 때문에, 문화연구는 “우리”라기보다는 “그들”과 동일시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비판이론”이 사용될 때에도 연구주제가 비서구와 관련되거나 이론이 비서구의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면, 연구는 자동적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문화연구”의 자리로 “추락”하게 된다.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위계적 분화의 조건 위에 있기 때문에, “지시성”을 문제화했음에도 지시성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지시성”이 “문화”에 대한 연구로 추방당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의미적 투명성을 가졌으며 따라서 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현상이 내가 언급한 방식처럼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비판이론”으로 가는 노동력과 “문화이론”으로 가는 노동력을 구별하는 계급차이(class distinction)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은 사회계층의 전통적인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 프로우(John Frow)가 지식의 소유와 사용의 관점에서 기술했던 용법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우에 따르자면 지식인들은 곧 “지식 계급”이다. 지식의 습득을 통해, 특정한 사회화 과정이 시작된다. 예컨대 특정한 스타일로 쓰는 것이나 특정한 텍스트의 세부사항에 주목하는 것, 특정한 유형의 매력적인 문학적 비유를 찾는 것은 어떤 습관을 수양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또한 이는 전문적 공동체의 특정한 영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격증을 발급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식”계급에 대한 프로우의 개념에 더해 지식계급 자체에 계급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차이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의 관계에서 논쟁을 유발해왔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비판연구자들만큼이나 주의 깊게 읽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학계의 낮은 계급지층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이다. “문화자본”은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비판이론”에 유창한 상위계급의 감각과 실천, 습관의 문제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노동 종류의 분화 또 백인 문화와 비백인 문화 사이의 분화를 중첩시킬 때, “지식계급”에 내재한 계급차이의 공식화는 급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요컨대 비판이론과 문화계급의 분화는 지식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인종주의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종주의화는 귀족정치라는 결과와 “지식”의 생산과 배포의 관점에서 종속적인 계급을 낳게 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10 23:26
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1/10 00:21
"우리가 속한 위치와 역사는 모두 다르지만, 나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갖고서 희박한 '우리'를 만들어 왔다. 만약 우리가 상실했다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하게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 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에서
 
 
뉴스공급사들은 전 세계 어딘가에서 발생한 뉴스를 신속하고 재빠르게 타전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언론사들은 그것을 받아 보통 '국제 이슈'의 한 단면으로 다룬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서 본다. 보고 또 봐도 끝이 안나는 뉴스들.
 
어제 버스 안에서 멍하게 바라봤던 TV에는 ㅌㄱ 축구팀이 총격을 받아 10여명이 사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앵커가 있었다. 물론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ㅌㄱ 축구팀은 어떤 나라에 갔다가, 어떤 사람들에게 우연히 총격을 받은 것이다. 소위 "아프리카"에 있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지난 수십년간 "아프리카" 지역은 늘 총성과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다.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끝나서는 안될 노릇이다. 왜 폭력, 질병, 죽음, 빈곤이 "아프리카"에 만연한지ㅡ사실 이 말도 틀렸다. 국가도 수없이 많으며 경제 상황도 다르다. 계급별 젠더별 조건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로 '그들을' 이해한다ㅡ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으레 그러려니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 위에서 ㅌㄱ 축구팀이 당해야 했는지, 또 축구팀이 상징하는 바, 혹은 더 나아가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 어떻게 이 폭력 사태에 연관되었는지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안다고 해도 그 앎이 진실된 것인지 보장할수도 없거니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당히 여유 있는 중간 계급의 도덕주의적 감상주의 아니냐는 내면의 힐난에 침묵해 버린다. 결국엔 냉소주의와 만난다. 어딜가도 냉소 뿐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냉소주의 앞에서 좌절할 때 가장 좋은 치유책은, 버틀러의 윤리학 관련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고, 밑줄치고, paraphrase도 하고, 옮겨 적는다. 복잡한 문장과 꼬인 번역문을 읽는데도 짜증이 일기 보다는 겨울철 때이른 어둠이 어느샌가 세상을 온통 적셔 오듯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드는 걸 느낀다.
 
버틀러는 가장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저 위에 적어놓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 사고 방식을 깨트린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사유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버틀러의 방식은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도 윤리를 포기해 가는 마당에, 한국에 이렇게 감동을 주는 윤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정말이지 불행한 일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서운 할아버지들  (2) 2010/03/16
글쓰기, 호흡  (0) 2010/01/28
냉소주의, 윤리, 버틀러  (0) 2010/01/10
그게 뭐 심각한 일인가요?  (0) 2010/01/05
30세가 되는 날이면  (0) 2009/12/26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3/24 13:40
Gloria Anzaldua. Borderlands/La Frontera : The New Mestiza. San Francisco: Aunt Lute Books. 100-1

반대편 강둑에 서서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지고 가부장제와 백인들의 관습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대하는 자세(counterstance)는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의 결투 안으로 우리를 가둔다. 경찰과 범죄자처럼 사투를 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는 폭력의 공통 분모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하는 자세는 지배적인 문화의 관점과 신념을 반박하며, 이로 인해 반대하는 자세는 자랑스럽게 도전적인 것이 된다. 모든 반항(reaction)은, 그것이 저항하고 있는 것에 의해 한정지어지며, 또 그것에 의존한다. 반대하는 자세는 외부와 내부 모두에 있는 권위의 문제로부터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방식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새로운 의식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길 위에서, 우리는 반대편의 강둑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 사투하는 두 전투원들 사이의 분열이 어떻게든 해소될(healed)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쪽 강기슭에 한 번 그리고 다른 쪽 강기슭에 한 번 서서 큰 뱀과 독수리의 눈을 통해서 보게 될 것이다. 혹은, 아마도 우리는 지배 문화를 벗어 던지고, 그 지배 문화 모두를 잃어 버린 목적인 양 청산해버리고, 경계를 건너서 완전히 새롭고 분리된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반항(react)하지 않고 행동(act)하려고만 결심한다면 가능성은 수도 없이 많다.


아, 좋다 :). 비슷한 말로는, "적을 공략하기 보다는 낙후시켜라"라는 말이 있겠지. 조이여울씨가 한 말이던가? 물론 이런 생각과 말은, 사실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되고야 만다. (물론 안잘두아의 글과는 상관이 없지만) 어느 사범대의 남자 교수가 한국의 페미니즘은 너무 적대적이라며 좀 더 온화하고 조화 지향적인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척하지만 결국 비난하고야 말 때, 하지만 어떤 학생이 그런 발언을 비판하자 솔직히 자기는 5년 동안 여성학 책을 안봐서 잘 모르겠다고 뻔뻔하게 변명하고야 말 때, 그 남자 교수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은 그야말로 당장 태워없애 버려야하는 쓰레기가 될 것이다(귀가 썩는다;). 또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관망자의 위치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만하는(나도 이럴때가 많은데;)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때도 진정성이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치만 적어도 안잘두아의 손을 통해 나온 글이라면 신뢰할 수 있겠지.

나는 지배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 깨어질지 몰라 (주제넘게) 걱정스러워 할 때도 있다. 저렇게 하다가 무너져 버리진 않을까. 너무 힘들지 않을까. 나같이 어디에도 잘 끼지 않으며 자의식도 세고 말도 많은 회의적인 개인주의자들 때문에 힘이 더 빠져버리지는 않을까... 그런데 때로 어떤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불편해서 피하고야 말 경우도 있다. 자기는 다 안다는(Know-It-All)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볼 때, 뭐든 다 알 수 있으며 알고 있다고 여기는 '아는 주체(knowing subject)'들을 볼 때. 혹은 그 "자랑스럽게 도전적인" 표정과 태도들이 진정성으로 느껴지지 않고, 왠지 겉도는 자존심으로 보이거나 이 사람이 가진 인정 투쟁의 무기로만 되었구나 싶을 때. 그리고 그 자존심과 무기가 나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물론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그 어떤 것을, 남들 눈엔 뵈지 않는 품 안에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와 아스카가 가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잠재된, 그러나 틈만 나면 튀어 나와 자의식 강한 자기 자신마저 당혹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제발) 나를 봐 줘"라는, 그 절박한 인정에의 욕구.

이는 "우리는 깨끗한 척 해봐야 누구나 다 더러워", 라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던 누군가의 인식과 같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반/행위(re/act)하지 않는 자에게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기분이 한 없이 "더러워"진다. 설령 누구나 다 더럽다고 할지라도, 그 차이가 오십 보 백 보라고 할지라도, 그 차이에는 오십 보 만큼의 차이가 있으며 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죽어도 오십 보는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채식을 선언한 사람이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볼 때 역시 정치고 선언이고 실천이고 뭐고 다 소용없구만 하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은 물론 본인의 자유다. 비정규직과 노동 운동을 말하고 마이너리티의 권리를 말하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껌을 내미는 사람들을 냉혹하게 내치는 것을 보고 역시 너도 똑같은 놈이구만 하고 비웃는 것도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러한 관찰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차이인 오십 보가 그 사이에 있으니까.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1/19 17:51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gritte, <Les Amants>



우선 라캉의 테제(?) 중 하나인 "사랑은 하나의 희극적인 느낌이다"를 기억해두자.

희극 예술과 관련하여,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사물[das Ding]이 대상 층위로 강하하는 것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희극들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숭고한 대상이 결국 그것의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실추된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실추가 (웃음은 대상의 숭고한 측면을 지탱하기 위해 이전에 투여되었던 리비도적 에너지를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프로이트적 정의와 부합하게도) 우리를 웃게 할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는 훌륭한 희극이 작동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헤겔이 매우 잘 알고 있었듯이, 진정한 희극적 웃음은 조소어린 웃음이 아니며, 남의 불행에 즐거워함Schaden-freude의 웃음이 아니다. 희극에는 한갓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는 진술의 변주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참된 희극들은 외관들 배후의 나체성이나 공허함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보다는 공허함(또는 나체성)을 구성하는 데 종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희극들은 이 벌거벗음이 상이한 여러 각도에서 탐색되고, 그것을 내보이는 바로 그 과정에서 그것이 구성되는 환경들이나 상황들의 전체적 설정을 편성한다. 그러한 희극들은 사물을 옷벗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의 옷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음, 이것은 면이고 이것은 나일론이고, 여기엔 예쁜 신발이 있네ㅡ이것들을 다 한 데 모으면, 우리는 너에게 사물을 보여주게 될 거야." [하략]

알렌카 주판치치, 이성민 역, <정오의 그림자>, p. 248


오오... 음, 인식적인 '충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용한 부분은 "희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이다.

인용한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사랑-대상선택은 대개 승화sublimation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파악하면, 사랑-대상을 숭고하고sublime 고상한 위치로 격상시킴으로써, 대상에 초월적인 지위와 접근불가능성을 상상 속에서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그 대상은 "비인간적인 파트너"가 되고, '숭배'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이상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타입의 사랑-대상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승화를 거친 사랑-대상선택은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승화' 방식과 맞물린 사랑 양식을 대상에 대한 폭력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대상을 '승화'하지 않고서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승화 과정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특수한 승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이 보기에 이 특수한 승화는 "향유를 인간화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전개하는 주판치치의 모든 논의는 저기 인용한 부분에 압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승화 : 정신분석학에서 승화란, 리비도(충동의 심리적 측면)가 단지 성(性)적인 대상에게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비도의 투사 대상에 어떤 변화를 주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즉, 승화란 "사회적 평가가 참작되는 일종의 목표 수정과 대상의 변경(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이다. 우리는 리비도가 asexual하고 사회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을 향하고 있으면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그만 두고 다음에 더 얘기하고 싶지만, 그냥 한 가지만 더 언급해보자. 오늘날 사랑에 대한 표상체계를 굳이 구분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그야말로 전통을 물려받아 상징들과 기표들의 그물망 속에서 노니는 사랑에 대한 표상이고(예컨대 완전히 통속적인 이성애 연애와 결혼 등의 사회제도 장치들 속에서의 사랑), 다른 하나는 그런 것들을 싹 치워버리고 '이자-관계'(혹은 '삼자-관계' 속에서) '순수한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표상이다. (물론 각 개인들이 하고 있는 개개별의 '사랑'은 이 표상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들은 그냥 '있는' 것들이고, 단지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표상 체계가 이러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전자의 것일테고,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오는 사회생물학적 서적들의 설명은 후자에 가까운 것일테다(혹은 섞여 있다. 사실 후자의 것은 어느 표상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퇴행적 나르시시즘에 기반해 있으니). 하지만 이러한 표상체계에서 잊혀지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 사랑이란 행위 그 자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의미인지에 대한 의문들이다. 다들 알겠지만 사랑은 제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욕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랑은 그 자체로 욕망 체계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욕망을 초과하거나 혹은 심지어 욕망의 순환을 중단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주판치치의 글은 이러한 생각을 진척시키는 데 힌트를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ㅠ.ㅠ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Left 1848~2000  (0) 2008/02/01
'죄의식'에 대하여  (0) 2008/01/21
'참된' 희극과 사랑, 序  (0) 2008/01/19
민주주의의 증오(인간사랑, 2007)  (0) 2008/01/13
아름다움에 대하여 中  (0) 2008/01/12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1/10 17:50

환대란 도래자를 심문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가? 환대는 오는 사람에게 건넨 질문으로 시작하는가(이 점은 환대를 사랑에 연관시켜야 한다고 가정할 때ㅡ우리가 현재로서는 보류해두고자 하는 수수께끼ㅡ매우 인간적이고 때로 사랑스러운 일로 보이기조차 한다) : 이름은 무엇인가? 그대를 부르는 내가, 그대를 이름으로 부르고 싶은 내가 그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대를 뭐라고 부를까요? 이 물음은 사람들이 때로 다정하게 어린이들이나 사랑하는 이들에게 묻는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 환대는 물음 없는 맞이하기로, 이중의 말소 즉 물음의 말소 이름의 말소에 의해 시작하는가? 더욱 정당하고 더욱 사랑하는 것은 묻는 것인가, 묻지 않는 것인가? 이름을 부르는 것인가, 이름 없이 부르는 것인가? 이미 주어진 이름을 주는 것인가, 또는 배우는 것인가? 우리는 환대를 주는가? 주체에게? 신분 증명이 가능한 주체에게? 이름으로 신분 증명이 가능한 주체에게? 법적인 주체에게? 그렇지 않으면 환대는 스스로 가는가, 환대는 스스로 자신을 타자에게 주는가? 타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전에, 타자가 주체이기(주체로서 조정되기, 또는 상정되기) 전에 벌써, 요컨대 타자가 법적인 주체이기 이전에, 가족의 이름[姓] 등으로 불려질 수 있는 주체 등이기 이전에 벌써 자신을 주는가?

- Jacques Derrida, <환대에 대하여>, 동문선, p. 72


오늘은(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즘은) 상당히 피곤하기 때문에ㅡ아마도 근원없는 불안감이 원인이겠지만ㅡ'읽어야 하는' 책들은 보기가 싫어진다. 이런 기분 상태로 집에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치유'를 해주는 텍스트를 찾게 된다. 그렇게 찾게 되는ㅡ오히려 그렇기에 제대로 다 읽은 적이 없는ㅡ책들 중에, 데리다의 이 책이 있다. 번역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들도 있지만, 내 경우엔 그냥 적당히 읽히는 편이고, 또 책 자체도 얇은 편이기에, 별 생각 없이 종종 펴놓고 조금씩 읽곤 한다.

데리다는 인용한 저 글귀 다음에 이렇게 적고 있다: "환대의 문제는 결국 물음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주체에 대한 문제이고, 세대의 가정(假定)으로서의 이름에 대한 문제이다."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주의의 증오(인간사랑, 2007)  (0) 2008/01/13
아름다움에 대하여 中  (0) 2008/01/12
환대의 문제  (2) 2008/01/10
'상식' 투쟁  (0) 2007/12/31
전통과 변혁  (3) 2007/12/28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7/12/29 12:0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올해의 영화를 꼽자면 단연 이창동 감독의 <밀양 Secret Sunshine>이다. 예전에 포스팅(클릭)한 적 있는데ㅡ물론 그 때와 생각이 좀 바뀌기는 했지만ㅡ여전히 2007년(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 중에서는 최고인 듯 하다. 방에서 본 영화까지 합치면 좀 순위가 달라지지만..

P가 '종교적인 것'이란 제목으로 포스팅한 것에서 볼 수 있지만, 정확히 올해 <밀양>을 보고나서부터 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물론 '정치적인 것'이란 단어를 접하기 이전에는 '종교적인 것'이라는 개념도 없었지만.. '종교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샹탈 무페의 언급을 조금만 바꾸면 충분히 도출될 수 있다. "우리는 종교적인 것을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으로 생각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이 그렇듯이, '종교적인 것'은 '제도적인 것'에 종속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제도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과의 화합불가능한 지점을 포착하고, 그 틈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필요할 정도로. 제도로서의 종교가 종교적인 것을 선택가능한 아이템으로 도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우리 속으로 깊이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종교적인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한계 의식", 무한히 열려 있는 심원한 것에 대한 인정, 성(聖)과 속(俗)을 구분할 수 있는 역량,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감내하고 수렴할 수 있는 자아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것은 '윤리(혹은 윤리적인 것)'와 깊이 맞물려 있다. 윤리(혹은 윤리적인 것)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인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0  (0) 2007/12/31
2007 연말정산 (3)  (2) 2007/12/31
2007 연말정산 (1) - 올해의 영화  (0) 2007/12/29
연말이 되니까  (0) 2007/12/24
우울하구나;  (0) 2007/12/21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10/20 23:53

알렌카 주판치치, 『정오의 그림자』, 조창호 역, pp. 172~174


중심에 남아 있는 것은 기의가 결국 동일한 의미(sens)를 보유하게 해주는 정교한 루틴이다. 그 의미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기 세계의 일부라는 감각, 즉 자기의 작은 가족과 그것을 둘러싸고 회전하고 있는 모든 것의 일부라는 감각에 의해 제공된다. 심지어 좌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이 알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것에 부착되어 있으며 여러분의 부착의 깊이를 재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일정한 만큼의 편견들은 여러분이 매일 치루는 요금이며 여러분의 모반들의 취지를 가장 짧은 기간으로, 매우 정확히 여러분에게 그 어떤 불편을 주지 않는 기간으로, 제한한다ㅡ그것들은 확실히 여러분의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구형球形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의는 여러분이 그것을 취하는 어디에서나 그것의 중심을 발견한다. 그리고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무엇인가를 여하간 전복할 수 있는 것은 분석적 담론ㅡ그것은 탈중심화 상태에서 그토록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며 아직 공통 의식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ㅡ이 아니다. (강조는 namunnib)

-Jacque Lacan, On feminine Sexuality: The Limits of Love and Knowledge (New York: W. W. Norton, 1998), p. 42.



이에 대해서 알렌카 주판치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것은 충격적인 구절이다. [...] 전복은 (단순히 우리의 세계가 그 둘레를 회전하는 중심을 바꾼다는 의미에서의) 혁명revolution을 통해서도 또는 우리의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우리가 "부재하는 중심" 또는 어떤 중심도 부재함이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것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없다. 라캉의 관점으로는, 전복적인 지점은 자신의 탈중심화에서 존속하는 중심에 있지 않은 중심이다. [...] 라캉이 쓰기를, 기의는 여러분이 그것을 취하는 어디에서나 그것의 중심을 발견한다. 이것이 우리의 세계가 구형인 까닭이다. 모든 문제는 어떻게 기의의 탈중심화를 산출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탈중심화를 유지할 것인가이다. [...] 그것은 또한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라캉 이론을 두드러지게 하고 그것에 그 정치적 차원을 부여하는 결정적 특징들 중 하나인데) 바로 이 탈중심화의 버팀목이자 형식이 되는 담론ㅡ기의의 탈중심화가 단순히 (기의의) 새로운 중심에 이르지 않고 대신에 "탈중심화"라는 용어에 함축된 바로 그 틈을 유지할 수 있는 담론ㅡ을 개념화하고 구성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성민씨 블로그에서 힐끗 보고서, 주판치치가 왜 라캉의 저 말을 '충격적'이라고 적었을까가 궁금하여 구입한 책인데(- -;) 앞 뒤 맥락을 읽고나니 어떤 느낌인지 대강이라도 알겠다.

어쨌든 충격적인 글귀다. 어떤 글을, 어떤 담론을 생산해야 하는지, 언제나 어떤 관점에서 읽고/쓰고해야 하는가에 대한 힌트를 주는 글귀다.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어떻게 열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냉정한 관점. 그러나 과연? 주판치치가 말한대로 이러한 것이 과연 개념화되고 구성될 수 있을까? 이건 말 그대로 언제나 '노력'만 해야하는 건 아닐지? 물론 저 '중심에 있지 않은 중심'이란 말에는 공감한다. 저 말과 유사한 아이디어는 도처에서 볼 수 있지만, 또 그만큼 '가볍게' 소비되고 있는 아이디어기도 하니까. 그니까 이 말은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 개념 등의 오독(인지 아닌지)과 남용과 더불어, 본질주의의 함정과 무게감을 가볍게 낼름 피해가려는 수사로 쓰이기도 한다는 말.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에 간편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 (물론 라캉의 저 말과는 다른 차원)

이 말은, 지젝이 언급하는, 사도 바울의 "마치-아닌-듯한(as-if-not)"의 태도와는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까?  즉, "사회적 의무의 세계에서 도피하지도 말고, 하나의 의무 집합을 또 다른 의무 집합으로 교체하는 단순한 사회적 혁명을 달성하지도 말며, 다만 사회적 의무의 세계에 계속해서 참여하되 유보의 태도를 가지"는 태도, "법을 지키지 않는 듯이 법을 지켜라"는 태도, "법에 외설적 리비도를 투여하기를 유보해야 한다(이러한 투여로 인해서 법은 법의 위반을 생성/유인한다)"는 태도와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문. (여기 인용한 것은,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180~182쪽에서)

주판치치의 다른 책 『실재의 윤리』는 쉽지 않은 책이어서 결국 몇 장chapter만 읽고 쟁여두고 있지만 상당한 충격과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일단 <주홍글자> 리포트만 해결하면(- -;), 이와 관련해서 더 읽을 수 있을 듯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아 Hawthorne 싫어!!!!! 미국문학 싫어!!! 아니, 이게 싫다기 보다는, Take-Home Exam이 더 싫어!! 그냥 리포트를 쓰라고 하라고요 엉엉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명언(?)  (0) 2007/12/04
정치에 대한 편견  (2) 2007/12/01
중심에 있지 않은 중심  (0) 2007/10/20
철학자의 가면과 철학의 퇴화  (0) 2007/10/20
경계 위에서의 삶  (0) 2007/10/15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10/01 00:43

언어에 관한 '현대적 이해'(특히 서구 철학계의)는, 더 이상 언어를 합리적인 의사소통이나 정보교환의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화행speech act 이론은 물론이요, 라캉주의자들의 언어 이해, 그리고 수많은 현대 이론가들은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거부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언어는 권력 관계를 확인하고 확립하는 어떤 수단으로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언어는 세계 속에서 작용함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수단이자 논리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언어 사용과 용법, 유통, 그리고 의미의 고정과 변화 등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통적인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 세계관 내에서 타자로 기입된 동성애, 장애인, 여성, 환경, 동물 등의 '비-인간 주체'들에 대한 혐오 발화hate speech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혐오 발화는 단지 특정 개인이 특정 개인에게 향하는 '장난질' 정도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맥락에서 권력 관계를 구성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이 된다(물론 그것을 '탈정치화'하는 일종의 폭력gewalt를 수반하지만).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되거나 가정된 특정 집단에 봉사하는 지배 헤게모니 전술의 일상적인 실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혐오 발화에 대한 일차적인 대처 방식은,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PC)운동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방식이다. 각 개인들의 '도덕 의식'에 호소하면서, 보다 더 올바른 호칭, 보다 더 올바른 사고를 주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PC적 접근 방식은 '쿨'의 정서와 맞물리면 놀라운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특정 혐오 발화를 하는 것은 '쿨'하지 않은 구시대적인 구닥다리 같은 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자유주의적 담론의 힘이 증가하고 젊은 세대 특유의 '쿨'이 유래없이 커지면서 동성애가 대중 문화 속에서 쿨하게 소비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호모 포비아적 발언 또한 더 이상 '쿨'하지 않게 인식된다. 심지어 어떤 '쿨'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이섹슈얼bisexual'이 되는 것이 장려되기도 한다. 또한 여성 혐오적 발언은 더 이상 (적어도)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서는 유통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한 발언을 하는 주체는 이제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근데 땅박씨는 예외상태다; 젠장).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PC 운동의 궁극적인 성과는, 아마도 '법 체계'의 정비일 것이다(여기서부터는 자유도덕주의자들의 영역을 넘어선다). 오늘날 모든 개인의 도덕 수준을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혐오 발화를 하지 못하도록 법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혐오 발화를 차단함과 동시에 처벌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윤리 21>에서 읽을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윤리(도덕)적 접근 방식과는 전연 다른 접근 방식이다.

여기서 1942년에 있었던 "채플린스키chaplinsky" 사건을 중요하게 상기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모욕을 주는insulting 특정한 '표현'들을 금지하는 것이 그 유명한 미국 자유주의적 헌법의 "수정헌법 1조"에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다. 여기서 "fighting words"라는 말이 등장한다. 법원은 "fighting words"의 발화가, 이 말words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위'를 유도하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수많은 논란을 증폭시킨 판결이기도 했지만, 어떤 법적 접근에 대한 사고의 clue를 주는 것이기도 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법정 판결에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은 무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이러한 '법적 접근'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한다. 자꾸 미국의 예를 들어오게 되어서 난감하지만(미국 같이 갈등을 정치-투쟁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호소하는 '소송 사회'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도 마찬가지로 흘러가는 거 같거든),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1992년에 있었던 사건(통칭 R.A.V사건으로 알려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인종주의자가 한 '흑인' 가정의 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워버렸다. 이는 그 소도시의 조례 법규에 따르면 일종의 '혐오 범죄hate crime'으로 규정되어 '경범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소도시의 규칙 자체가 '인종', '종교', '민족' 등의 "특정한 영역"만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정치성향', '동성애' 등 다른 영역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중립성을 벗어나고 있기에 위헌이라는 무척이나 뻔뻔스러운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그 중립성을 위장해 또다른 혐오 발화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법' 자체의 특성상 얼마든 이러한 법적 접근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라캉주의적 독해 또한 이러한 '법 체계'의 정비 자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법'언어는 일종의 '금지'의 언어다. 이러한 금지는 또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만큼 더 강력한 숨겨진 법의 이면, 즉 '초자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금지는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강한 금지는 더 강한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법을 받아들이는 주체들은 법의 명령을 수용하지만, 은연 중에 법의 이면의 초자아까지도 인식하게 된다. 초자아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외설적으로 귀환한다. 법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 내에서도 결코 문제점들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는 더 교묘해짐과 동시에 법 체계가 지속적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는 이러한 문제점을 잘 예시한다(마치 법이 자기 증식을 위해 '사건'과 위반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살인에 대한 법의 과중한 처벌은 살인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이 과중해질수록, '살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외설적인 초자아적 위반의 욕망이 자라나기 마련이다. 혐오 발화에 대한 법적 접근도 마찬가지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까? 혐오 발화에 대한 금지는 오히려 인종주의자들 성차별주의자들 동성애혐오자들의 외설적인 초자아적 욕망을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혐오 발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objet a)"이 있다는(욕망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권력 구조를 유지함과 동시에 강건하게 만든다는) 주체들의 인식을 오히려 강화하지는 않을까?


----------

이렇듯 혐오 발화에 대한 PC적 접근, 법적 접근 모델은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나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혐오 발화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여기에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난점이 있을 수 있다. "주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 구조주의적 관점은 "그렇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개인은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은 구조의 꼭두각시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 개인을 그렇게 만든 구조의 잘못이지 그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구조주의적 접근이 무효한 것은 아니다만, 순전히 이렇게 접근해버리면 운동이고 정치고 뭐고 다 힘이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대개 논리적 난국 aporia에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쉽게 융합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 즉 개인의 순전한 잘못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개인이 '선택'한 것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이런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개인의 '선택'이라는 어휘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역사적 선험 historical a priori 으로 경험되는 조건들(누가 선택을 '선택'할 수 있고 누가 왜 불가능한가?)은 물론, 오늘날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수용성과 친화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Free Speech", 혹은 거의 신격화된 "언론과 출판의 자유"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자유'라는 말도 오늘날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중추가 아니던가?)

이러한 구조주의적 접근과 유사한 방식으로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화에 대한 이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버틀러는 유통되고 있는 혐오 발화들은, 각 개인들이 만들어 냈다기 보다는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는 인종주의적 표현의 코퍼스corpus에서 인용cite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즉 혐오 발화를 한 주체는 그러한 코퍼스의 인용의 효과이자 결과일 따름이며, 따라서 혐오 발화자는 그 말의 주체이자 저자author가 될 수 없다. 이러한 독해에서는 어떤 발화자를 '저자'로 가정하는 것은 단지 효과이자 결과에 불가능 한 것을 '실체화' 하는 일종의 위장이자 가정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렇게 끝내버리면 나의 사랑 버틀러가 '바보짓'한 것이 된다. 조금 뒤에 덧붙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혐오 발화와 동시에 구조주의적 난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중 하나는 가라타니 고진식의 칸트 윤리적 접근 방식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책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그에게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도덕성을 오직 '자유'(이 말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하겠지만)의 관점에서만 도덕을 찾았으며, 이 '자유'야 말로 유일한 의무 즉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이다. "자유를 의지(意志)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칸트 윤리적 의무이므로 따라서 이러한 자유를 누리지 않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않은 것이 된다. 여기서는 자유주의-구조주의적인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읽어낼 수 있다. (칸트가 아니라 고진의 칸트인듯?) 그러나 이러한 가라타니 고진식의 도덕-윤리적 접근 방식은 어딘가 김이 샌다. 다 줄이고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윤리를 고민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칸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혐오 발화를 했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위와 사고에 대해서 끊임없이 '개개인들이' 성찰하면 문제는 끝나는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의 혐오 발화에 대한 분석에 기반한 방법들을 개발해 내려고 한다. 물론 버틀러의 분석에 따르면 혐오 발화자들은 혐오 발화들의 '코퍼스corpus'에서 그 말들을 인용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은 "인용할 수 있는citable 발화이면서 동시에 인용을 초과하는 흥분하기 쉬운ex-citable 발화"이기 때문에 "모든 발화들은 화자의 통제를 벗어나"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버틀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적극적인 시도를 모색한다. 버틀러는 법적 접근을 매우 싫어하고 회의懷疑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모욕을 입힌 주체의 행위를 추적하고 사회적 모욕을 협상하는 장소로서의 특권을 법정에 부여하는 것은, 주체를 발화의 출발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론이 정확히 어떻게 모욕을 생산하는가에 대한 분석을 중단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버틀러의 질문에 요약되어 있다.
 
또한 버틀러는 윤리-도덕적인 접근 자체를 차라리 선호하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도 일종의 도덕적인 '검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회의를 보낸다. 검열은 단지 '권력'에 호소한다는 문제점을 야기할 뿐 아니라 복잡한 언어와 법, 그리고 담론의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버틀러는 오히려 어떤 '해체론적'인 입장에 기반해서 그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으로는 혐오 발화들에 대한 담론적인, 일종의 전복적인 '재인용', '재의미작용'으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혐오 발화들에는 일련의 취약성과 수정가능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만약 텍스트가 화행speech act적인 것이고 실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행할 수 있으며, 그 이전 행위에 반하게 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발화'는 외상적인 중핵(라캉적인 objet a)을 갖고 있으며(그러니까 excitable speech), 이 외상적 중핵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일종의 '반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여기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 다른 접근으로는 호사가들에 의해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 학파'로 분류되는 레나타 살레클의 것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6장). 살레클은 라캉주의적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혐오 발화와 인권의 문제를 함께 사고한다. 살레클은 버틀러와 일단 비슷한 분석틀을 갖고 있다. 살레클에게 혐오 발화들은 "통제될 수 있는 동시에 통제될 수 없"으며,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도 없다". 그러나 혐오 발화들은 일종의 외상적인 중핵을 건드리는 발화들이며, 그 외상적 중핵은 라캉적인 '실재'를 건드리는 것이다. '실재'를 건드리고 자극하는 것은 각 주체들의 고통과 공포를 자극하기에 일종의 '폭력'이 된다(성폭력sexual harassment에 관해 지젝을 포함한 몇몇 라캉주의자들의 독해도 이와 유사하다). 살레클은 일단 이 혐오 발화를 해결하기 위해 헤겔의 용어를 차용해서 윤리적인 접근을 검토한다.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륜성Sittlichkeit("습속들의 체계, 윤리적 삶의 체계")은 "공동체를 한 데 묶어주는" 것이자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칙이 된다. 이는 법률과의 관계에서도 "우연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독립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법률에 대한 대중들의 복종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레클이 보기에 이는 어떤 도덕적인 습속, 즉 헤겔적인 인륜성적 접근 방식으로는 '보편적인' 해결이 어렵다. 물론 법적 접근 또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법령', '인륜성' 모두 국가와 공동체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르게 체험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영역은 모두 투쟁의 영역이다. "누가 보편자를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그리고 또한 누가 모욕적인 말을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끊임없는 투쟁"인 것이다. 여기서 "인권"의 중요성(물론 통속적인 인권 독해와는 조금 다른) 이 대두된다. 살레클이 보기에 "전체주의적 체제조차도 폭력을 적법화하려는 의도에서일지언정 인권과 자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떤 인권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장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그리고 바라건대 민주적인 의미를 획득할 유일한 길"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즉 혐오 발화를 정신분석학적 윤리, 그리고 최근 대두되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인 독해에 기반해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뉴 레프트 리뷰>에 기고된 <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에서 보여준 지젝의 '인권'에 대한 독해와도 유사하다. 지젝은 랑시에르의 독해를 끌고 오면서, "인권을 정치투쟁의 우연적 영역과 별개의 비역사적인 '본질주의적' 피안으로, 역사로부터 면제된 보편적인 '천부적 인간권리'로 설정해서는 안되지만, 인권을 시민의 정치화라는 구체적인 역사과정에서 생겨난 사물화된 물신으로 간단히 도외시해서도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인권'은 전 정치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본래적인 정치화의 적실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언급하며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 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만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정치성의 정치학"과 협상 논리에 기반한 '행정-통치'로 정치를 환원하는 최근의 경향에 반대하는 지젝의 입장에 기반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언급할 기회가...)


물론 여기서 언급한 방식들은 나름의 적합성을 가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확신이 없다. 그래도 나에게 있어 혐오 발화는 끊임없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 문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있고. 어흑. 어려워..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 관여(double engagement)  (0) 2007/10/14
Agalma를 제거하기  (0) 2007/10/02
혐오 발화(hate speech)  (2) 2007/10/01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글쓰기  (0) 2007/09/26
Natural Woman  (0) 2007/08/29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08/15 00:49

서동진씨의 글을 오랜만에 여기에 옮겨 둔다(이렇게 옮겨 둬도 될까..). 블로그에 누가 들어오는지 궁금해 하시길래 리플이라도 달까 했다만 역시나 버름하여 -_-. 이 글을 옮겨 오는 이유는 서동진씨의 글이 역시나 반갑고 마음에 들고 좋아서. 그리고 이 주제에 있어서 만큼은 평소 생각하던 바와 유사한 점이 많아서(그냥 읽은 글이 마음에 들면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출처는 www.homopop.org...


 
|사랑의 진정한 능력은 사랑의 윤리란 데 있다. 내게 닥칠 모든 불리를 감수하고 기존의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뜻에서의 윤리, 즉 세상의 규범과 의견이 무어라 말하든 당신을 사랑한 것이 옳으므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고집하는 것으로서의 윤리. 사랑은 그런 윤리적 행위이다. 그 윤리에서 벗어난 사랑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흔한 연애이야기가 아니라 망각될 수 없는 사랑의 증언이 필요하다면? 이 글을 반드시 답파해야 한다.|

나는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을 흔한 레즈비언 연애담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즈비언의 사랑이란 넌센스이다. 사랑은 정체성을 가진 두 명의 사회적 신분의 주체가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분적 속성을 삭제하고, 일체의 사회적 정체성을 소거하고, 속된 말로 이런저런 계급장을 모두 떼고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그래야, 우리는 왜 그토록 수많은 로망스 혹은 연애소설에서 신분이 다른 두 명의 인물들이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그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이란 식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요즘 판치는 논리, 이를테면 <우리의 사랑도 사랑이다>는 식의 주장, 나아가 동성 간의 사랑도 사랑으로서 받아들여달라는 항간의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다>가 아니라, <모든 사랑은 그, 그녀가 누구였는가를 개의치 않는다>가 맞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정체성, 성의 신분끼리의 사랑이므로 허용될 수 있고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에 위배된다.

사랑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 사이의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역으로 그 모든 속성을 지우고 자신을 완벽하게 개인화하는 것이다. 즉 당신과 내가 어떤 배경, 신분, 속성을 가졌건 상관없이 당신과 나는 이제 그 모두를 지운 채 순전히 백지상태의 주체로 만난다. 나는 그것을 사회화된 개인과 다른 뜻에서의 개인, 즉 <사랑하는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근대 사회에서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와 다른 희귀한 개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희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것은 흔해빠져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얼마나 흔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희귀하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빠졌을 때 거의 제 정신이 아니다. 사랑하면서 제 정신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만 그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벗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태에 있는 비규정적인 개인이 감당해야하는 숨 막히는 자유 혹은 무한한 결정의 상태에서 벗어나 곧 안전하고 고요한 상징적인 질서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사랑하는 너와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탈출하여 누구의 남편과 아내, 누구의 아빠와 엄마가 된다. 그래서 결혼은 감옥이란 말이 맞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또한 아늑하고 달콤하다. 나는 내가 맺는 이 관계를 더 이상 나의 개인적 책임과 판단의 세계로 상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연애는 아빠 노릇, 엄마 역할, 부부의 도의 등의 규칙에 의해 관리될 수 있는 세계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끝내고 “성숙”한 커플이 되거나 지금 나의 고집대로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거의 모든 인간에게 고루 분배되어있는, 가장 충격적인 윤리적 우주로부터 탈출한다.

나는 그 점에서 게이, 레즈비언들이 주는 (윤리적) 충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로 그런 상징적으로 위임된 역할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여전히 사랑하는 당신과 나라는 개인성의 위치에 머물러 있도록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런 윤리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잔꾀가 동성결혼의 합법화, 법률화의 의지 가운데 하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줄 수 있는 사회경제적 편익과 이득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진하는 의지 속에는 바로 그런 자유에 대한 저항감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호모콘(Homocon)이라 불리는 호모 콘서버티브(Homo Conservative)의 주장 속에 콘서버티브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과는 전연 다른 뜻에서의)>에 있지 않을까.  

나는 늙은 게이 영감들이 혀끝을 차며, “우리는 안 돼, 자식을 못 낳아서 우리는 안 돼, 발정나면 그것을 말려주는 책임의 세계가 없으니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울고 웃어야 하는 나비떼야”라고 탄식할 때, 그 말을 반쯤만 옳다고 받아들인다. 욕망을 자제한다는 것, 의리와 유대, 찰나적인 욕망에 굴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내 등은 아름답고 기특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와 같은, 나의 또 다른 체현이라고 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타인 앞에서 왜 나는 이렇게 허둥거리고 왜 나는 그간의 나로부터 벗어나는가라고 말하는 나, 즉 나의 분신과 다른 너, 전적으로 나에게 낯선 그/그녀와 해후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사랑의 윤리라면 나는 그 사랑의 윤리를 악착같이 관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계약 결혼이니 자유연애니 하는 말에 심지어 공산주의적인 붉은 사랑이니 하는 말에 심드렁해 한다. 사랑이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충격과 공포에서 비롯된 반성이라고 이런 생각들을 헤아려본다면, 그러나 그런 생각과 주장은 위대해진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손쉽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법에 관한 잡다한 카운슬러의 조언과 이른바 연애를 성사시켜주는 수많은 중개업자들의 장사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게서 무언가 우리에게 잡히지 않는,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규칙을 상회하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하고, 사랑을 끝없이 재발명해야 한다는 충동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을 믿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기형도의 멋진 시제(詩題)처럼 나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같은 말을 뇌일 생각이 없다. 나는 차라리 <사랑을 잃고, 나는 사라졌네>라고 말해야 옳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없는 나 속에서 다시 무슨 낯을 한지 알지 모를 그 다른 나를 두렵게 기대하여, 사랑을 시도하는 것. 사랑에 실패하였으므로 쓰러지지 않고, 또 다시 그 어떤 낯선 타인을 만남으로써 전에 없던 나와 대면하는 그 기적, 또 한 번의 사랑이 당도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다시 시작하는 사랑이든 아니면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이든, 그것을 집요하게 갈구하는 것. 그것은 탐욕일까, 호기심일까.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편지글  (0) 2007/09/12
(펌) 모스크바의 데리다  (0) 2007/09/01
(펌) 사랑에 대하여  (0) 2007/08/15
고통을 말하고 듣는다는 것  (0) 2007/08/08
경계선을 신경쓰면서 말하는 법에 대한 통찰  (0) 2007/07/25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07/20 14:53

서동진씨의 블로그에서 살짝 글을 옮겨둔다(괜찮은걸까?;). 글의 내용에 대한 나의 동의 수준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벌써 3년 전의 글이지만 생각할 구석이 많은 글 같아 종종 읽어두기 위해서이다(뒤에 가서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다=_=). 그나저나 생명과 자연, 환경 담론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얼마나 될까?

출처 :
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72&ct1=7
모든 강조는 Namunnib.


제발 도롱뇽이 되지 말자- 생명의 윤리학 비판


아마 우리 시대에 가장 거룩한 성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며칠 전 58일간의 단식을 끝낸 지율 스님이 아닐까. 이름 없는 미물, 작은 짐승 한 마리에도 생명의 고결함을 발견한 사람, 도롱뇽의 삶을 파괴하고 살해하는 "막개발"을 고발한 외롭고 거룩한 영혼. 그는 천성산을 관통하는 공사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결행하였고 마침내 문재인이라는 청와대 청지기의 방문으로 단식은 해제되었다. 6조원을 투입한 국가의 대 역사(役事)에 맞서 외롭게 분투하는 스님의 고집과 결의는 충분히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한 마리의 도롱뇽에게서 문명의 잔인한 폭력, 죽음에의 위협을 발견하고 생명의 위엄을 방어하려는 이, 그가 던져주는 깊은 울림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자꾸 짓궂은 그러나 이유 있는 물음을 던지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전신이 마비될 듯한 숭고한 윤리적 장면 앞에서 불경한 의구가 자꾸 꼼지락거린다.

괘씸한 일이겠지만 나는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떼를 쓰는 프랑스의 어느 여배우의 이유 있는 "윤리적인" 주장과 천성산 도롱뇽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지율 스님의 "윤리적인" 주장 사이에서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개고기를 먹는 타자의 풍속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서구 숙녀의 신경질적인 무례와 무지를, 우리는 매우 손쉽게 비난한다. 그렇지만 도롱뇽 사건(?)은 그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이는 그런 시시한 문화적 사안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22분 빨리 가겠다고 누억년 동안 이뤄진 장엄한 자연의 업적을 간단히 파괴하는 문명의 힘에 대항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단식을 해제한 후에 지율 스님이 천성산 닷 컴에 올린 글처럼 이미 이긴 게임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긴다. 왜냐면 우리는 바로 그 생명의 위대함이란 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 비슷한 글을 지율 스님은 게시판에 올렸다.

그렇지만 개에게서도 역시 삶의 위엄을 발견하는 브리짓 바르도는 왜 성스러우면 안 되는가. 물론 여기에는 윤리적이고 뭐고를 떠나 우리는 개의 생명의 위엄이란 것이 서구의 우아한 숙녀의 허영스런 삶을 치장하는 장식으로 전락한 것 때문에 불쾌하고 분개했을 것이다. 번지르한 서구 부르주아적 라이프스타일의 편에 서있음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났기에 그녀는 결국 진 게임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개발 문명을 향한 비판이든 타자의 야만적 풍속에 대한 비판이든 두 입장은 자신의 근거로 생명의 존엄을 끌어들이는데 있어 일치한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공명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문제삼고 싶어진다. 그래야 우리는 천성산 막개발에 맞선 지율 스님의 결단을 제대로 도울 윤리적인 입장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부안"에서 벌어졌던 투쟁에 제대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혹은 현자가 되어버린 전직 혁명 시인의 말을 빌자면 "살림"의 세계관.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윤리-정치적인 지상명령이 되어있다. 그러나 생명 혹은 삶의 존엄이라는 명령이 근대사회의 핵심적인 권력의 윤리였음을 즉 자본주의적 삶의 일차적인 원리였음을 망각해선 안될 것이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타인을 직접적인 인격적 예속 상태에 두었던 봉건 사회는 근대인에게 언제나 죽음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반면 모든 인격적인 예속에서 벗어난 채, 신민,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난 근대의 자유인에게서 우리가 떠올리는 근본적인 형상은 삶의 이미지이다. 이를 두고 푸코같은 이는 말년에 전근대 사회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라면 근대 사회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이런 그의 생각을 압축하는 유명한 도식이 바로 지금은 거의 우리 시대의 상투적인 현학적 용어가 되다시피한 "생권력(bio-power)"이다.

푸코의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민들을 살게끔 한다(살게 하는 권력). 잘 먹고 잘 사는 것,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 국민의 장수와 건강을 목표로 삼는 것, 이것이 근대의 생권력의 목표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즉 죽음과 분리된 삶의 시간을 극대화하는 사회, 삶의 가치와 행복을 정점으로 밀어 올리는 사회, 포드주의적 복지국가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이 사회는 생권력을 통해 지탱되는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으로 대표되는 시대, 생물학의 시대인 후기 자본주의가 생권력 자체로 움직이는 사회라고 달리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푸코가 결코 미완의 유산으로 남겨놓은 후기의 모든 작업은 바로 이런 생권력의 비판에 할애되어 있었다. 말년의 푸코가 저항은 권력에 내재적이라는 절망적인 결론에서 탈출하기 위해 "존재의 미학"을 꿈꾸는 하찮은 자유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항간의 비난은 옳지 않다. 그에게 붙여준 권력의 미시물리학의 해부학자라는 명칭은 생명의 존엄이라는 윤리에 따라 행사되는 권력을 비판하는 기획을 인식할 때 오직 온당한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박정희 체제는 생권력의 화신이다. 박정희는 국민이 따뜻한 쌀밥을 배불리 먹게 하는 꿈을 꾸었던 도착적인 모습의 근대 군주였다. 그가 도착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의 핵심적인 특성이 그렇듯이 살리기 위해 마음껏 죽였다는 점에 있다. 아리아 인종의 삶, 독일 국민의 생명을 위해 생식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논리(우생학과 사회위생학 등)를 동원했던 나치즘은 생명, 삶에 미친 권력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체제도 역시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안녕을 위해 마음껏 죽일 수 있었다. 긴급조치와 반공법이라는 죽일 수 있는 군주적 권력은 번영과 행복이라는 근대적 생권력과 함께 회전하였다. 우리가 박정희 체제를 그토록 오랜 동안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애꿎은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살해하고 고문한 독재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는가. 그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왜 불충분하고 불가능한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장식된 추상적인 민주주의와 삶의 권리란 내용으로 충만한 "한국적 민주주의" 사이에서 엉거주춤 서있다. 그래서 박정희 체제의 유령은 죽지 않고 살아 날뛴다.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권력이 삶의 권력, 생명의 권력이라는 이 기묘한 역설을 깨트릴 때 진정 나치즘을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우리 역시 생권력으로서의 박정희 체제를 비판할 수 있을 때 지금 문제가 되는 "현대사 바로잡기"에 역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죽인 권력이란 점에서 좌익과 우익은 다를 바 없다! 그래 친일부역자, 민족의 삶을 팔아먹은 반역자를 고발하라! 그러나 동시에 역시 생명을 죽인 또 다른 악인 좌익도 고발하라! 우리는 지금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갈에 맞닥뜨려 있다(최근 한나라 당은 이런 협박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물러나선 안 된다. 전체주의와 살육, 전쟁이라는 모든 역사적인 악의 기원에는 생명을 향한 위협이라는 악의 윤리가 있다는 협박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래 그들도 삶에 대한 존중, 인간의 얼굴이 없었다고 뇌아림으로써 둘을 은근슬쩍 뒤섞어선 안 된다. 인간적인 모습을 덧붙임으로써 더 나은 해방의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패배적인 것은 없다. 한 포기의 풀에서도 지고한 생명의 향기를 느낀다는 윤리적인 농담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생명의 존엄이란 이름으로 파업할 권리를 가까스로 방어하고, 인권이란 이름으로 정치적 항변을 가까스로 보호하는 이 지긋지긋한 생명의 사회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존엄은 초월적인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의 논리이다.

지율 스님에게 우리는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 도롱뇽에게서 불성을 발견하기에 앞서 해방자 붓다의 모습을 발견하자고. 삶의 덧없음을 알려주며 자유를 추구하기를 설법하는 캘리포니아 선사들의 붓다가 아닌 붓다, 도롱뇽에게서 인간과 다름없는 생명의 위대함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생태철학의 붓다가 아닌 붓다. 지상 최대의 인도주의자에 불과했다면 붓다는 어느 사회에서나 흔하디 흔한 생명지상주의의 도덕군자에 불과하다. 동물학대반대운동론자를 우리 시대의 성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살고 죽는 생명의 차원으로 전락한 인간, 즉 죽는 존재로서의 동물-인간이 아니라 불사(不死)의 존재, 억겁을 거쳐도 결코 죽지 않는 인간, 자연의 흐름을 교란하며 분리되어 있는 예외적인 존재를 옹호한 붓다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도롱뇽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는 이미 삶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회,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사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천성산의 도롱뇽, 시화호의 지네, 서해 갯벌의 지렁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당연히 천성산의 막개발을 막아야 한다. 설악산의 산양을 지켜야 한다. 나아가 이라크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 이주노동자의 착취를 막아야 한다. 생계형 자살을 막아야 한다. 이에 맞서 투쟁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생명의 위엄, 삶의 존엄이란 이름으로 막을 수는 없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도모하는 사회적 권력의 윤리와 악착같이 웰빙에 매달리고 무병장수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소비자본주의적 개인의 윤리, 그 모두와 같은 차원으로 변화의 윤리를 내동댕이칠 수 없다. 알다시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윤리를 저버리기 시작했는가. 스웨덴형인지 네덜란드형인지 노사정 대타협을 향한 꿈이 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유일한 꿈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더욱 악착같이 고용유연화를 하여 노동하는 삶의 질을 제고하고 (물론 그것은 대량실업과 고용불안정이라는 삶의 위협을 낳을 수 있으므로)
부디 죽지 말라고 덧 얹어주는 약간의 "사회안전망", 그런 것이 우리의 윤리가 될 수는 없다. 빈사상태의 윤리를 소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진과 수양이 아닐 것다. 오히려 죽음을 무릅쓴 인간되기,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덧붙여 리플의 '논쟁' 또한 옮겨둔다. '객'이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비판(내가 보기엔 이 사람의 비판도 역시ㅡ그 사람 표현을 빌리자면ㅡ"의식과잉이 빚어낸 비논리적 언설"인데다 오독에 근거하고 있지만)은, 이 글에 대한 항간의 일반적인 관점과도 맞물려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와 함께 서동진씨의 답변까지. 이건 <more..>밑에다 둔다. 그냥 showing하기엔 많기도 하고, 내용이 좀 격해서 =_=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서동진씨의 본문보다는 리플에 오히려 동의 수준이 높은 것 같다.

more..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06/24 11:06
방학 때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던 주제를 다루는 책의 서평이 있어 옮겨둔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윤리는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나의 근본적(?)인 입장을 정리하는 것에 대해 라캉은 약간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듯 하다.  물론 라캉이 아니라 지젝, 스타브라카키스, 무페 등의 저자이지만. 스타브라카키스의『라캉과 정치』는 구입을 해두고 한동안 엄두가 나지 않아 펴지도 못했는데, 이제 슬슬 펴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라클라우도 모르면서 이 책을 읽는게 어폐긴 하다). 예전에 올렸던 무페의 책과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약간 지젝과 친화성이 더 높아 걱정스럽기도 하다만.

또한 행동과 공부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윤리와 정치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좀 이상하긴 하지만)버틀러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는데, 아직 공부할 부분이 많아 좀 답답하기도 하다. 버틀러의 글은 일단 난해하다. 국역본으로 나왔다는 것들은 정말 죄다 최악이고, 원문으로 읽어도 결코 쉽지 않은 문장을 보여준다(그래도 국역본으로 읽는것보다는 이해가 빠르다). 지금 한창 번역 중이라는 랑시에르의 책들이 출간되면(2월 쯤에 번역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것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이 글을 퍼오면서 '급진적'이라는 제목이 걸렸다. 나는 '급진적'이란 말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래디컬 에콜로지, 래디컬 페미니즘 등도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사상과 담론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순전히 '수사적'차원에서 그러하다. '급진'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또 불편하다. 문제제기가 근본적이라는 이야기인가? 별다른 중간 과정 없이 결론으로 질주한다는 이야기인가? 어이없는 소리라는 이야기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지금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인가?  사실 큰 위험은 그것이 정말 '수사적' 차원의 것만은 아니라는데 있다. 우리는 이런 수사적 전략으로 특정 담론을 담론계에서 추방해버리는 일은 손쉬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때론 그 수사는 '물질화'되며, 신체에 각인되고, 그 신체까지 부정해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따라서 '급진'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느냐,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느냐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급진'이라는 딱지를 '누가' '어떻게' 붙이느냐에 있을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생각에 '급진'이라고 붙이는 것은 (지젝이 지적했던 것과 비슷하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좌파적 특권을 유지하고, 윤리적 고매함과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대체로 '급진'이 붙은 담론들은 가능해 보이지는 않아도(소위 '현실적이지 않은') '올바른'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누군가가 어떤 담론에 대해 '급진'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면 그건 좀 심각한 법이다. 예컨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에 붙은 온갖 수사들이 그랬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동시대의 '극렬 페미' 등에 붙은 수사들이 그러하다.

글의 출처는 학술저널 담비(
www.dambee.net). 강조는 namunnib.

↓ 클릭

more..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06/11 18:23
Chantal Mouffe, <민주주의의 역설>, 인간사랑, 2006


강조는 Namunnib.

p. 194

(…) 중립성과 합리적 합의에 관한 강조와 함께 심의민주주의자들이 민주주의적 정치의 목적을 칸트적인 도덕적 사유의 언어로서 구성하는 경향이 있음에 반해, 포스트모던적 이론가들은 보편적 도덕성의 언어를 회피하고 민주주의를 의무론적 사업이 아닌 "윤리적" 사업, 즉 타자의 인정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서 이해한다. 조금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도덕적-보편적 접근법과 윤리적-특수적 접근법 사이의 대립을 말하고 있다. "윤리적"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용어는 레비나스, 하이데거, 혹은 니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철학자들로부터 온 것이며,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ㅡ심의적 접근법에서와 마찬가지로ㅡ정치의 영역을 특징지우는 "결정"의 순간에 대한 적절한 숙고이다. 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것은 패권적 관계를 구조화하는 것은 언제나 결정이 가능하지 않은 지형에서 만들어지는 결정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정에는 결코 제거될 수 없는 힘과 폭력이 수반되고, 그것은 윤리나 도덕의 언어로서는 충분히 파악될 수 없다. (…)


p. 196

(…)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형태의 행태는 모두 적의의 표출인데, 그것은 교환의 진보와 사회성의 발전에 힘입어 제거될 수 있었다. 그들의 견해는 모방의 다이내믹스를 구성하는 오직 한 측면만을 이해하는 사회성에 관한 이상화된 견해이다. P.세인트-아만드는 <백과사전>에서 어떻게 인간의 상호 보상이 배타적으로 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는가를 예시한다. 이것은 감정이입에 연관된 모방적인 정서의 오직 한부분만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지라드의 중요성은 그가 모방의 갈등적 성격을 드러냈다는 점이고, 같은 목적에 대한 인간의 공통된 욕구에서 그들을 함께 묶어놓는 동일한 움직임이 동시에 그들의 적대의 원천이 되는 이중의 구속이라는 점을 밝혔다는 것이다. 경쟁과 폭력은 교환에 대해 외적인 것이기는커녕 교환에 언제나 같이 존재하는 가능성이다. 상호 보상과 적대는 따로 떼어질 수 없으며, 사회적 질서는 언제나 폭력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


p. 201

(…) 그들이 찬양하는 다원주의의 형태는 적대가 없는 다원성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적이 없는 친구 사이의 다원주의, 적대가 없는 경쟁주의의 다원주의를 내포한다.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고 차이에 관여할 수 있다면 폭력과 배제가 사라질 것 같다. 이것은 윤리와 정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회성에 내재하는 폭력을 삭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폭력이 바로 그 자체들을 구성하기 때문에 계약이나 대화가 제거할 수 없는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내가 거부하는 점이다. 그러한 부인을 통해서 민주주의적 정치가 보장되고 확대되지는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


pp. 206~207

(…) Y. 스타프라카키스는 어떻게 프로이트가 행한 결정적인 전략이 라캉에게는 윤리의 영역에서 철학자들의 탐구의 영원한 대상이었던 "선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그가 드러내는 것은 "선"에 대한 일련의 개념화를 넘어서, 전통적인 윤리적 사고의 방식을 넘어서 남아 있는 것은 그것들의 궁극적 실패, 중심적인 불가능성을 정복할 수 없는 무능, 그리고 인간의 경험이 그것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구성물의 결핍이다. 이러한 불가능성을 그는 "실재하는 것(the Real)"이라고 부르고, 정신분석의 윤리적 전략은 "실재하는 것"의 비환원성에 대한 상징적 인식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전통적인 윤리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선에 대한 또 다른 개념화에 힘입어 조화에 다다를 수 있음을 주장하는 대신에 선에 대한 생각 그 자체를 탈구시키는 데 달려있다. (…)


pp. 209~210

(…) 우리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유대를, 즉 우리 스스로를 나뉘어진 주체로서 인식하는 유대,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윤리로서 "실재하는 것의 정신분석적인 윤리"는 (지젝)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 특히 적합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은 선에 대한 생각의 복수성이 환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대와 폭력이 뿌리뽑힐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화해에 대한 꿈을 꾸지 않는다. 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적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는 다원주의적-민주주의의 정치가 영구히 직면하는 문제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은 존재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윤리와 정치 사이의 필연적 충돌을 환원시킬 것을 거부하고 평등과 자유 사이의 경계에 내포되는 폭력과 함께 경계의 설정을 수반하는 정치적 논리와 인권의 윤리 사이의 환원될 수 없는 긴장을 인정하는 것은 정치의 장이 언제나 결정을 요구하는 합리적·도덕적 계산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윤리와 정치 사이의 가능한 화해에 대한 환상을 파기하고 윤리적인 것으로 정치적인 것을 끊임없이 심문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실로 민주주의적 역설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문을 읽고는 "아 뭐야 젠장.." 싶었는데, 좀 참고 결론을 읽으니 생각보다는 친화성이 훨씬 높았다.(그리고 절대 수치로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사실 이런 부분만 읽어서는 딱히 '새롭고' '신선한' 것은 아니다만, 시험과 리포트가 모두 끝나면 서문부터 다시 천천히 정독해봐야 겠다. 결론에 지젝과 라캉 등의 이름이 나와서 괜히 그런건지. 여튼 최근에 했던 "윤리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고민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사두고 아직 읽지 않은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와 함께 읽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호 수동성과 가짜 행위  (0) 2007/06/28
파시즘의 징후  (0) 2007/06/25
Chantal Mouffe,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3) 2007/06/11
인간의 4대 굴욕  (4) 2007/06/08
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0) 2007/06/02
Posted by 소이연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2.0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