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학업계획서를 쓰다 보니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앞으로의 계획을 최대한 '젊은이'스럽게 말하고 있는데도 우울하다니 말이다. 그나마도 짧게 쓰지도 못해서 표준 서식의 5배를 초과해서 써버렸다. 짧게 쓰지 못한 건, 결코 이 정도로는 내 원대한(ㅋㅋ) 계획을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5배를 넘게 쓰고 여러 번 줄이기 위해서 잘라내고 수정했지만, 실제로 구상하고 있는 것은 반도 못담았다. 그러나 계획서의 단순 길이는 애초부터 문제가 아니었다. 이보다 더 길게 썼으면 더 좌절했을 것이다. 그건 과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처음 생각난건 계획서에서 내가 젊은이인 것처럼 열정을 가장했다는 점이었다. 즉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별로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학과 커리큘럼이 정말 재미있을 것처럼, 정말 내가 학과에 흥미있는 것처럼 글을 써야만 했고 그렇게 썼다. 학기강의계획서를 하나하나 열어보면, 몇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좀 시시하던데. 그러나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고, 또 일상에서 거짓말에 죄책감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거짓말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산담? 게다가 거짓말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다보면, 그 수행은 어느 새 나와 내 주변의 상황을 규정하는 힘이 된다. 그럼 거짓말은 하나의 진실이 된다. 그러니 이건 문제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난 건, 아직 유예기간인 내가, 내 인생에서 실제로 뭔가가 '되는' 걸 거부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학교 3~4학년들이 흔히 겪는 병이 아직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대학원에 간다는 건 사실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교육학과에 가는 건 교육학자가 되겠다는 것이고, 특히 하위 분야에서 질적 연구를 다루는 전공에 지원하는 건 그 중에서도 마이너리티로 가는 걸 의미한다. 물론 나는 진짜로 '그 쪽'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학위는 거쳐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최대한 재빨리 처리하고, 기나긴 '본 게임'에 들어가야할 하나의 예비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갈수록 구조화, 고도화, 폐쇄화 되어가는 이 제도적 몸짓의 장에 들어가야 하는게 못내 씁쓸하지만.
그러니 학위 과정, 학과에 대한 환상은 거의 없다. 다만 어딜 가든 좋은 동료, 선후배, 세미나 메이트, 교수자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래도 교육학과 교수들은 타과 교수들에 비해 낫다는 평판을 들었다. 그들은 어쨌든 교육학과에 다니니까 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 단순한 생각도 든다. 학과에서 케어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나는 알아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쨌든 지금 거기에서 버티고 있는 친구도 있으니, 내가 가서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싫다. 지금의 나는 하루바삐 무엇인가가 되고 싶고, 그 무엇인가가 75%만 마음에 들고 25% 남은 내 공간을 옥죄지만 않는다면 뭐든 상관없다. 또 나 같은 사람은 100%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도 않고, 100% 만족하는 순간엔 아마도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문제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가 오늘에서야 그 끝없는 우울에 대한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읽던 책의 끝을 넘기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가 고학력자가 되어가는 모든 과정은 믿음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석박사급 고학력 실업자, 학자금 빚더미와 바꾼 졸업장/학위증명서, 낮은 사회적 지위, 뭐 이런 것 때문에 학위과정에 대해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에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을 잃다니, 그것만큼 진부한 대학원생이 어딨어? 하지만 그 안에서의 관계가 문제였다. 이를테면 교수자와 학생의 일방적인 착취 관계, 열정과 흥 따위는 없는 강의실, 서로를 믿지 않는 학생과 교수자들, 뭐 이런 것들이었다. 더 추가하자면, 더럽고 치사하고 비루한 교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영원히 모를 것이라는, 그럼에도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 결국 사람에 대해, 관계에 대해, 내 신념에 대해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그 모든 과정이 믿음을 잃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는 두려움. 결국 그게 깊은 우울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어떤 책을 보는데, 저자는 페미니스트 운동/관점(movement/perspective)과 페미니스트 관심(feminist concern)을 구분하고 있었다. 페미니스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참 많아졌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페미니스트 관점을 가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관심은, 오랜 기간에 걸친 운동과 관점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진 연구 주제다. 페미니즘의 주제와 방법론을 전유했기 때문에 언뜻 보면 페미니즘 연구 같지만, 그 연구자를 실제로 만나보거나 그의 행보를 보면 페미니스트라고 할수는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이나 삶의 윤리를 성찰하지 않고도 페미니스트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도 수학계획서에는 페미니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젠더 연구, 젠더에 민감한 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이것조차도 어떤 징후를 감지하게 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오늘 펴본 어떤 책의 저자는 페미니즘의 죽음을 누가 두려워하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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