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우울'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4/24 믿음을 상실하는 과정
  2. 2010/01/10 참으로 슬픈일 아닙니까
  3. 2009/05/18 생애(lifetime) 서사에 대한 감각 (4)
  4. 2008/05/17 5월 17일
  5. 2008/04/21 4월 20일
  6. 2008/02/13 2008. 2. 13
  7. 2008/01/29 삼성SDI 부산공장 하이비트 노동자 강제해고 (2)
조각들 / 2010/04/24 00:20

수학/학업계획서를 쓰다 보니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앞으로의 계획을 최대한 '젊은이'스럽게 말하고 있는데도 우울하다니 말이다. 그나마도 짧게 쓰지도 못해서 표준 서식의 5배를 초과해서 써버렸다. 짧게 쓰지 못한 건, 결코 이 정도로는 내 원대한(ㅋㅋ) 계획을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5배를 넘게 쓰고 여러 번 줄이기 위해서 잘라내고 수정했지만, 실제로 구상하고 있는 것은 반도 못담았다. 그러나 계획서의 단순 길이는 애초부터 문제가 아니었다. 이보다 더 길게 썼으면 더 좌절했을 것이다. 그건 과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처음 생각난건 계획서에서 내가 젊은이인 것처럼 열정을 가장했다는 점이었다. 즉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별로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학과 커리큘럼이 정말 재미있을 것처럼, 정말 내가 학과에 흥미있는 것처럼 글을 써야만 했고 그렇게 썼다. 학기강의계획서를 하나하나 열어보면, 몇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좀 시시하던데. 그러나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고, 또 일상에서 거짓말에 죄책감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거짓말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산담? 게다가 거짓말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다보면, 그 수행은 어느 새 나와 내 주변의 상황을 규정하는 힘이 된다. 그럼 거짓말은 하나의 진실이 된다. 그러니 이건 문제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난 건, 아직 유예기간인 내가, 내 인생에서 실제로 뭔가가 '되는' 걸 거부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학교 3~4학년들이 흔히 겪는 병이 아직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대학원에 간다는 건 사실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교육학과에 가는 건 교육학자가 되겠다는 것이고, 특히 하위 분야에서 질적 연구를 다루는 전공에 지원하는 건 그 중에서도 마이너리티로 가는 걸 의미한다. 물론 나는 진짜로 '그 쪽'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학위는 거쳐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최대한 재빨리 처리하고, 기나긴 '본 게임'에 들어가야할 하나의 예비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갈수록 구조화, 고도화, 폐쇄화 되어가는 이 제도적 몸짓의 장에 들어가야 하는게 못내 씁쓸하지만.

그러니 학위 과정, 학과에 대한 환상은 거의 없다. 다만 어딜 가든 좋은 동료, 선후배, 세미나 메이트, 교수자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래도 교육학과 교수들은 타과 교수들에 비해 낫다는 평판을 들었다. 그들은 어쨌든 교육학과에 다니니까 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 단순한 생각도 든다. 학과에서 케어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나는 알아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쨌든 지금 거기에서 버티고 있는 친구도 있으니, 내가 가서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싫다. 지금의 나는 하루바삐 무엇인가가 되고 싶고, 그 무엇인가가 75%만 마음에 들고 25% 남은 내 공간을 옥죄지만 않는다면 뭐든 상관없다. 또 나 같은 사람은 100%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도 않고, 100% 만족하는 순간엔 아마도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문제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가 오늘에서야 그 끝없는 우울에 대한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읽던 책의 끝을 넘기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가 고학력자가 되어가는 모든 과정은 믿음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석박사급 고학력 실업자, 학자금 빚더미와 바꾼 졸업장/학위증명서, 낮은 사회적 지위, 뭐 이런 것 때문에 학위과정에 대해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에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을 잃다니, 그것만큼 진부한 대학원생이 어딨어? 하지만 그 안에서의 관계가 문제였다. 이를테면 교수자와 학생의 일방적인 착취 관계, 열정과 흥 따위는 없는 강의실, 서로를 믿지 않는 학생과 교수자들, 뭐 이런 것들이었다. 더 추가하자면, 더럽고 치사하고 비루한 교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영원히 모를 것이라는, 그럼에도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 결국 사람에 대해, 관계에 대해, 내 신념에 대해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그 모든 과정이 믿음을 잃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는 두려움. 결국 그게 깊은 우울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어떤 책을 보는데, 저자는 페미니스트 운동/관점(movement/perspective)과 페미니스트 관심(feminist concern)을 구분하고 있었다. 페미니스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참 많아졌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페미니스트 관점을 가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관심은, 오랜 기간에 걸친 운동과 관점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진 연구 주제다. 페미니즘의 주제와 방법론을 전유했기 때문에 언뜻 보면 페미니즘 연구 같지만, 그 연구자를 실제로 만나보거나 그의 행보를 보면 페미니스트라고 할수는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이나 삶의 윤리를 성찰하지 않고도 페미니스트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도 수학계획서에는 페미니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젠더 연구, 젠더에 민감한 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이것조차도 어떤 징후를 감지하게 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오늘 펴본 어떤 책의 저자는 페미니즘의 죽음을 누가 두려워하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서의 학습, 학습하는 몸, 무의식  (0) 2010/05/30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 된다."  (1) 2010/05/26
믿음을 상실하는 과정  (0) 2010/04/24
50대 남자사람  (0) 2010/04/23
이론 공부  (0) 2010/04/13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1/10 00:21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사실 뭔지를 몰랐거든요. 정말 원했던 것이 있다면 오로지 관계, 다시 말해 매력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싶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옮길 수는 없었지요)
 
내가 거기서 잘 할 수 있을지, 거기에 잘 어울릴 수 있을지, 내가 거기에 어울리는지 하는 문제는 응당 나의 응답책임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었습니다. 일단 부딪혀 보면 되는 문제라 생각했죠. 가보면 알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회의가 듭니다. 내가 가진 '조건'들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주관의 의지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다만 주변의 상황에 따라 얼마간 유동적일수는 있는, 그런 조건들 말입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최대의 억압입니다. 평생을 싸워나가고 싶은, 그래서 공부(혹은 글쓰는 이)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그런 억압입니다. 그래요, 나는 평소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간에 본질적으로는 낭만주의자 입니다.
 
경계는 어떤 경우 최상의 자유와 보호막이 되지만, 어떤 경우엔 최악의 억압입니다. 나는 그 어떤 경계와 싸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계는 평생의 숙제이자 적입니다. 또 그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그래서 억압인 것입니다). 어떻게 싸워야할지도 몰라 발만 동동구르는 처지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억압이 거기서도, 여러분 사이에서도, 나를 억압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불행한 것은 그 억압이란 것이,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강요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저는 그들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결국 그 경계를 만든 것도, 싸우겠다고 드는 것도, 사실 저 자신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경계선을 느꼈던 것도 저 자신입니다. 그 세계는 얼마간은 사회적 진실이 만들어 냈지만, 실은 주관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왜 나는 그 경계를 유연하게 넘지 못할까요. 어떤 숲에 사는 주민들은 작물과 인명에 해를 끼치는 야생 늑대를 잡을 때,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가 풍부한 지역을 중심으로 줄을 친다고 합니다. 야생 늑대들은 그 줄을 인지한 뒤로는 그 너머로 가지 못한다죠. 그 따위 줄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지나가면 그만인데도, 그 너머에 먹을 게 있는데도, 늑대들은 결국에 굶어 죽고야 만답니다. 참으로 슬픈일 아닙니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월 31일  (0) 2010/01/31
철든 아이, 착한 아이  (0) 2010/01/21
참으로 슬픈일 아닙니까  (0) 2010/01/10
친밀한 타인  (2) 2009/11/11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들  (0) 2009/07/08
Posted by 소이연
TAG 우울, 일기
일기 / 2009/05/18 11:08

소위 '세대 담론'은 아마도 향후 100년간은 사라지지 않을, 아니 적어도 '재생산'이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한 영구히 반복될 담론일 것이다. '세대 담론'은 때때로 정치에 대한 공통 감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끌어 안아야 할 담론이다. 서구 역사에서 저 유명한 "신구 논쟁"에서도 고전 문화를 옹호하던 세대에 맞서 젊은 세대들은 수없이 많은 언어와 실천으로 새로운 문화적 장을 열어 제끼지 않았던가. 때로 이렇게 세대 관념은 변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비록 이전 세대를 비판하던 젊은 세대들 중, 이전 세대가 갖고 있던 각종 지식들에는 완전 무지한, 다시 말해 '함량 미달'이던 이들도 많았지만. 그리고 '세대 담론'이 사회에 존재하는 적대들과 정치들을 단지 '세대'라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적대의 전선을 무력화시키고 정치를 탈정치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온당한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세대 담론'은 때로 삶, 생애에 대한 공통 감각을 제공하기도 한다. 앞 세대의 생애를 통해, 앞 세대가 겪은 삶의 사건들을 통해 뒷 세대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들의 삶에 대해서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뒷 세대의 생애에 대한 감각과 비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특히 일종의 생애주기(life cycle)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지에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강력한 문화적 자원이 된다는 점에서 '세대 담론'이 제공하는 것들을 쉽게 무시할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세대를 믿지 않는다. 아마도 '세대 담론'의 기본 요소인 세대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클리셰를 동원하자면 한국의 '격동적인 현대 정치사'를 거쳐온 세대, 예컨대 '386세대'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세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게 나의 믿음이다. 단지 사람들이 있었고, 집단이 만들어졌고, 이념이 있었고, 사건이 일어났고, 정치가 있었고, (아마도 가장 중요할 것인데) 선택을 했고, 행동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 무게감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했었던 것이다.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보면 어떤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소설 속의 그는 결단코 '투사'였던 적이 없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서 만나 자신을 도와주며 같이 살았던 이가 그가 보기엔 갑작스럽게 분신을 했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수감이 되었고, 감옥에서 나오자 그는 갑자기 지역의 민주화 투사가 된다. 그리고는 대학에 자리를 잡고 '대학생 친구'들을 여럿 만난다. 대학생 친구들에게 영웅이었던 그는 자신의 위치를 활용하여 연애를 하고, 또 대학생 친구들에게 성폭력을 하기도 한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을 비롯한 것들과 상당히 유사하게 읽히는 이 소설에서, 나는 상당히 불쾌함과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떤 통찰이나 반성을 담고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즉, 본질적인 운동가가 있지도, 또 고유한 정치가 있지도, 이념에 완전히 봉사하는 개인들이 있지도 않았다. 단지 시대적 사건이 있었고, 그이들은 일종의 시대적 기분에 어느 정도는 젖어 있었고, 그에 따라 시대적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것에 '세대'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어디까지나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전히 허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한갖 개념일 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네 삶에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세대 담론'이 제공할 수 있는 각종 이점들이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세대를 받아들일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세대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렵기 짝이 없다. 현대사를 포함해 역사에 상당히 무지한 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세대는 나에게 아무런 영감도, 자극도, 동기도 된적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생한 이들과 어떤 공통 감각을 형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 스스로 개인적인 감각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생애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건 '세대'에 대한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어떤 삶을 거쳐간(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선배들, 혹은 스승들에게서 어떠한 감정적 정치적 링크도 느낄 수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링크들에 대개는 부정적인 입장 밖에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생애에 대한 감각은, 곧 '삶의 서사에 대한 감각'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나는 내 삶의 서사를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다. 생애 서사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내가 보고 배우고 또 내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도저히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러다 그냥 아무거나 선택한 뒤 끊임없이 단어들을 동원해가며 그 선택을 정당화하기 바쁠지 모른다. 심리학 개론에 보면 나오는 '인지 부조화'이론이 설명해 주듯이. 물론 그런 서사를 아예 제공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란한 (자기 계발) 성공담의 시대, 무한히 다양한 전문직의 만신전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서점에만 가면 성공담을 다룬 책, 또 전문직 리포트를 수없이 만날 수 있다. 누구누구의 고만고만하고 시시껄렁한 인생 성공담을 목격하고, 겉은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막상 하면 나름의 고충과 애환이 있다고 고백하는 전문직들의 삶을 읽으며, 때로는 이를 강요받기까지 하는 분위기 속에서, 삶의 서사를 그려내지 못(안)하겠다고 투덜대는 건, 전적으로 이 세계에 들러 붙지 못하고 혼자 고고한 척 구는 '재수의 밀도가 떨어지는' 일일 수 있다. 그리고 나만 이런 것도 아니다. 그렇다. 이는 어디까지나 '브로콜리 너마저'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덧) 5. 18을 맞아 맞이하는 뉴스는 풍작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5.18 행사에 참석치 않았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지만, 관계자의 말은 충격을 더한다. "작년에 가셨으니까 올해는 총리가 대신 갔다." "올해 4·19 기념식에도 가셨고, 첫해 가셨는데 매년 가서 대통령이 하실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아 젠장. 그리고 김지하 시인의 말. "황석영 나쁜 놈 아니다." "작가는 좌로 갔다 우로 갔다 할 수 있어야" 진중권을 일컬어 "진씨는 예술이나 문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치로 작가는 매일 아침마다 변해야 하는 것". 아놔 진짜 이 사람들-_-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력에 대한 환상  (0) 2009/05/25
哀悼  (0) 2009/05/24
생애(lifetime) 서사에 대한 감각  (4) 2009/05/18
비 많이 오는 날  (0) 2009/05/16
싫은 남자애들 유형  (0) 2009/04/30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8/05/17 22:20

- 가슴이 뻥 뚫려 버린 듯한 기분이 하루 종일 계속 된다... 사실 주말에 수업 준비도 미리 해둬야 하는데- 재미 있을 사진도 찾아야 하고, 음성 파일도 만들어서 리스닝 시간에 들려줘야 하는데- 이 모든게 귀찮고 짜증스럽다. 아이들을 보는 것은 좋지만...

- 교생 생활에서도 누군가를 짝사랑할 때 처럼, 사람(들)의 뒷 모습만 보며 끙끙대야 했던 시기는 조금 지났다. 학교에서 나름대로 호의를 표시해 주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외부로 투사된 에너지가 이번 주 후반부가 되어서야 조금씩 보상을 받기 시작한 셈인데, 모르겠다. 사실 이러는 와중에 나는 또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전에 다시 한 번 상실했던, 바로 그 무엇을, 오랜만에 다시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 무엇을, 또 한 번 방출해버리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또 다시 무감無感에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그 길에 들어서면, 그 어떤 감동도 느낄 수 없고, 무한한 상실감에 시달려야만 한다. 상실한 대상 없는 무한 상실. 얻은 것도 없고, 가진 것 중에서 빠져나간 것도 없으니, 사실 상실한 것은 전연 찾아볼 수 없는데도ㅡ 사실 대상이 바로 눈 앞에 있어 손 뻗으면 닿을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남는 것은 극한의 결핍 뿐이다. 그리고 그 흔적으로 차가움이 남는, 그런 무감에의 길. 너무 끔찍스럽다.

- 자꾸 과거를 돌이켜 본다는 것은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다 보면, 기억들에도 맥락이 있는 것인데도 그 맥락은 기억하지 못하고 매우 단편적인 장면만이 기억된다. 이야기 한 두 마디, 음악 약간, 장면 몇 가지로 모든 맥락과 느낌들은 간단히 재단되고 사라져버리게 된다. 게다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들까지 미화되어 버리고, 그에 따라 온갖 기억들이 재구성된다. 나의 과거는 진정한 과거가 아닌 셈이고, 이 기억들은 모두 현재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현재의 불만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과거로 그 시선을 쉽사리 돌린다. 그래서 나는 <경성 스캔들>이 재밌다. 으하하하 =_=... 또 보고 싶네 흑.

- 지금은 이렇게 나 하나 단속하는 것도 너무나 힘이 든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피곤하다. 모든 것에 만성피로. 풀어 낼 방법이 없다. 술이나 먹어야 하나 -,ㅡ

- 나는 패악을 부리는 것에 익숙지 못하다. 아마 평생 패악질을 하지 못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솔직히, 조금은 하고 싶어지는지도.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 제도와 젠더/섹슈얼리티  (3) 2008/05/26
지난 밤 동안의 사진 몇 개  (0) 2008/05/25
5월 17일  (0) 2008/05/17
5월 16일  (0) 2008/05/17
5월 8일  (2) 2008/05/08
Posted by 소이연
TAG 우울, 일기
일기 / 2008/04/21 02:22

-

때때로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만나게 되면 힘이 쭉 빠져 버리고 만다. 과장 안하고, 살아갈 의욕까지 싹 없어진달까. 그 사람들이 나랑 관련이 없는 사람이어도, 혹은 평생 말 섞을 기회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어도, 괜히 나까지 기운이 쏙 빠져버리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편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서 힘이 빠지고 우울해지는 건 아니다. 다만 "뭐 저런 인간이 세상에 다 있어?" 혹은 "대체 왜 저래?"로 시작한 경악이, "아, 알고 보면 널려 있지..." 라는 포기로 끝나버릴 때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실 솔직히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그 사람들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내가 신경 쓸 이유도 거의 없는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너무 많고 한편으로 너무 시끄럽다는 점에 있다. 자기 존재감을 끊임없이 확인 받거나, 존재감을 팽창시키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들인 것마냥... 자기 존재감을 부정하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을성 싶으면, 그 무슨 짓거리를 해서라도ㅡ언어폭력 부터 시작해서 너무 티나는 행동 거지까지ㅡ자기 존재감을 각인시키려는, 외로움을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들. 잊을만 하면 어디선가 툭 튀어 나오고... 친구들로부터 이 사람들 얘기만 들어도 무척 피곤해진다. 차라리 나처럼 블로그에 투덜대면서 해결하든가.


-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첫 인상에 강렬하게 좌우되는 편이다. 그러니까, 첫 인상이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나 이후의 감정들에 90%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첫 인상이 안 좋았던 사람들 중 '굳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첫 인상이 좋았다고 이후까지 계속 좋은 관계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내가 지금껏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100% 내가 첫 인상을 좋게 가졌던 걸로 기억한다(그 역은 성립하지 않지만).

사실 이거 나름대로 지금까지 나한테는 스트레스 였다. 내가 가진 (그럼에도 나도 잘 모르는) 어떤 선입견으로 모든 사람들을 재단하고 있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이제는 나의 편견이라면 편견이고, 예감이라면 예감을 믿기로 했다. 인식이 경험을 구성한다는 점을 알고는 있지만(즉, 콩깍지), 그 작은 경험들이 관계의 전부가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 물론 적은 확률이겠지만, 첫 인상이 안 좋으면서도 좋은 인연이 될 사람들이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적은 확률에 기대하고 노력하기엔, 요즘 같아선 너무 피곤한 것 같다.


-

요즘엔 악몽도 많이 꾸지만, 또 한편으로 소망-충족적인 꿈도 많이 꾸는 것 같다. 물론 악몽도 소망-충족적일 수 있겠지만... 어쨌건 요즘엔 이렇게 꿈 자리도 뒤숭숭하고... 그러다보니 자꾸 어딘가에 절박하게 매달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게 지금 상당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뭐 어떡하겠어. 확신이 안 선다. 좀 이러다가 말지 싶기도 하고... 언제나 그래왔듯.


-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하루하루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하루하루가 '끝'인 것만 같아서.
나 사실 한가한 사람만은 아니라구요.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심풀이로 해보는, '나도 덩달아' 영화 베스트10(1995-2008)  (5) 2008/04/25
글 쓰는 습관  (4) 2008/04/23
4월 20일  (0) 2008/04/21
4월 18일  (2) 2008/04/18
4월 14일  (5) 2008/04/14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8/02/13 23:53

왜 이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갈까. 해 놓은 것도 없이 방학이 보름 남짓밖에 남질 않았다. 나름대로 대학에서는 마지막 방학인데 이렇게 멍청히 흘려보내도 될까나. 그걸 생각하니 어쩐지 자꾸만 기운이 빠진다. 뭘 읽든 뭘 보든 뭘 듣든 금방 새나가버리고, 그걸로 그치는게 아니라 새나가는 것 이상으로 뭔가가 빠져나간다. 며칠 이러다보니 이젠 좀 무서워졌달까; 멍 때리는 표정으로 보내는 시간도 늘어난다. 견디다 못해 책을 읽겠다고 발버둥쳐도, 머리 속에는 하나도 안 들어와... 어떤 다른 계기가 필요하려나.

그래도 듣고 있는 강좌엔 참 멋있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그건 참 좋아. 수강하는 사람들 중엔 내가 제일 막내 축에 속하는 것 같은데(또 모른다; 내가 나이 눈이 좀 어두워서.. 하긴 이제 어디 가서든 막내 취급 받을 나이는 좀 지나가고 있기는 하다^^;), 사람들한테 이래저래 배우고 싶은게 참 많다. 친구나 지인들 개개인한테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이렇게 어떤 목적을 가진 집단 전체에서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느낀 건 참 오랜만이다. :)

그나저나 강좌를 듣다 보면 귀가 솔깃해지는 새로운 이야기들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귀에 솔깃한 만큼이나 반대로 답답해질 때도 참 많다. 귀에 솔깃하고 반짝일수록, 역으로 강좌를 듣는 공간 너머에 있는 <현실이라는 벽>이 무겁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멍청하게 지내게 된 이유도, 그 벽 같은 것을 자꾸 마주하게 되서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걸 느낄 때마다 자꾸만 어디로 도망가고 싶다. <익숙한> 곳으로. 나한테 <안전한> 공간으로. 이런 것도 피터팬 컴플렉스인가? 뭐 그렇다면, 그런 것 같다. =_=

이렇게 답답할 때는 음악이라도 팡팡 켜놓고 들어야는데, 사실 요즘엔 전자 음악에는 좀 질려 버렸다. 특히 일렉 기타 씨들의 지잉징대는 소리가 듣기 싫다. 담백함은 생각하지도 않은 멋쟁이 보컬 씨들에도 질려버렸다. 베이스씨들의 둥둥 대는 소리는 아직은 좋지만..


그리고 화재 소식...이 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이 되어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심지어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와 비교하면서 한국인들의 소위 냄비근성을 걱정하는 <얼빠진> 사람들도 있다! 뭐 그 이유를 약간 알긴 알겠는데, 말하자니 정말 무섭다. 사실 그 건축물에 어느 정도의 손상이 있더라도, 소위 "국보 1호"라는 권위나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얼마나 많은 한국 국민들이 과연 그걸 미적인 가치나 정신적 가치의 대들보나 지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국보1호"의 기능은 다른데 있지 않을까). 오히려 지금 계속 시끄럽게 벌어지고 있는 의미화 실천(들)을 통해서, 그 권위가 더 끔찍하게 강화되면 강화되지, "국보"에 합당한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거나 할리 없다. 타버려서 문화재 가치가 일정 부분 상실된 것은 맞지만, 혹여 "국보"에서 제외한다 그러면 세상이 뒤집힐테니. "상처입은 한국(국민)의 자존심"이라는 키워드면, 한국에서 강렬한 집단 정서를 동원할 수 있을테니까 앞으로 불탄 "국보 1호"는 제구실 톡톡히 하겠다. "국보 1호"는 행복하겠네. "2호"나 "3호"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했을텐데. 참, 이걸 교과서에도 싣자 그러고 진짜 무섭다. 이 와중에 "노숙자"나 "거리의 노인들"같은, 상대적으로 죄를 덧씌우기 좋은 사람들에게 대한 집단 혐오 감정이나 늘지 않을지 걱정이다. 그나저나 이 "국보"라는 특이한 분류 체계가 한국하고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물론 요 몇 달 사이에 일어났던 엄청난 일들과 함께ㅡ이천 참사, 허베이 스피릿 호 기름 유출 사건, 2mb 인수위의 출범과 오만가지 뻘타들 등등ㅡ"국보 1호" 전소(全燒) 소식도 엄청난 일이다. 도심에 있던 얼마 안되는 문화재가 타버린 것이니.. 하지만 이 와중에 잊혀져 가는 것들도 너무 많다.. 크게 취급 "되는" 사건들이 신문 지면을 많이 잡아 먹을수록 더더욱 비가시화될 문제들.. 특히 운하도 계속 문제제기 되어야는데. 총선 이후엔 어떤 발광을 해댈지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이 이야기들을 쌓아두어야 할텐데.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라는 이름  (0) 2008/02/20
2008. 2. 15  (0) 2008/02/15
2008. 2. 13  (0) 2008/02/13
2008. 2. 12  (5) 2008/02/12
2008. 2. 9. 이런저런 잡담  (6) 2008/02/09
Posted by 소이연
TAG 우울, 일기
일기 / 2008/01/29 23:59


싸이월드 쪽지로 왔었어요.. 혹시 이걸 보신 분들은, 자기 블로그에 퍼가시거나 널리 널리 알려주시길 바래요...



쪽지 전문 :

저희는 삼성SDI 부산공장 하이비트 17명의 해고 여성노동자들입니다.
저희는 2007년 3월 31일일자로 회사측의 일방적인 강제해고되었습니다.
이를받아들일 수 없어 10개월이 넘게 삼성과 싸우고 있습니다.
삼성이기에 결코 쉽지많은 않습니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것도 모자라 태안에 기름유출을 해놓고서는
아예 모른체 하고 있는게 삼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정말 최고의 대접을 해줄거라 생각하것입니다.
저희들도 7년동안 그런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삼성은 정말 노동자들을 다 죽이고 있습니다.
동영상은 저희가 예전 200일때 만들었던 영상입니다 .. 꼭 봐주시고 .. 작은 관심하나가 저희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월 30일  (0) 2008/01/30
까마득한 10년 후  (0) 2008/01/30
삼성SDI 부산공장 하이비트 노동자 강제해고  (2) 2008/01/29
책 읽기 모임  (8) 2008/01/29
1월 26일  (0) 2008/01/27
Posted by 소이연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2.0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