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가 그제에 포스팅 했던 대로 오바마의 당선에 부치는 버틀러의 글, "Uncritical Exuberance?"를 옮겨 둔다. 역시 인터넷에 원문은 많이 돌아다니니 원문 링크는 일단 패스^^; 이 글은 앞서 올린 지젝 글보다 훨씬 더 번역하기 어려웠다 헥헥; 전체적인 양은 지젝의 글이 한글 기준 2000자 정도가 많지만 버틀러의 글이 단어나 문법 선택이 역시 beyond me이기 때문에 -_-; 이번 뉴레프트리뷰에 올라온 마이크 데이비스의 글도 흥미로울 것 같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번역은 포기했다. 어쨌거나 비록 퇴고도 못한채 출근을 위해 일단 잠을 자야하기에 초고를 올려두지만, 어쨌거나 무려 4시간이나 걸려서 사랑스러은 셸든이 나오는 빅뱅이론 봐도 될 시간에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지만) 독자를 고려한 번역을 끝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글에 엄청나게 지적 자극을 받으면서 그녀에 대한 바보같은 애정이 한층 깊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어졌다. 덧붙여 약간의 행복감마저 느끼며, 그렇기에 오역은,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들 하세요, 하는 무책임한 말을 던지며, 나는 이만 총총... 수정은 천천히...
무비판적인 열광(Uncritical Exuberance)?
by Judith Butler
translated by 비앙
이 순간, 이 흥분 상태에 무감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내 좌파 친구들은 나에게 “구원”같은 느낌을 받는다고도 말했고, “이 나라가 우리에게 돌아왔어!”라고도 말했고, “마침내 백악관에 동지가 생겼군!”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나 역시도 오바마의 승리가 확인된 날, 부시 정권이 마침내 끝장나버렸다는 생각이 엄청난 위안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이 흥분 상태에 빠져있었다. 생각이 깊고 진보적인 흑인인 오바마의 생각들은 역사의 토대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만들어 낸 새로운 지형들을 따라 대변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뀐 지형들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이 지형의 윤곽을 완전히 그려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이제부터 평가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구원이 아닐뿐더러 구원일 수도 없다. 만약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오바마가 제안했던 과장스런 동일시 상태나 “그는 우리 동지야”라는 우리들의 제안에 찬성해버린다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특히 오늘날의 정치적인 삶을 구성하는 적대 관계(antagonism)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국가적 연합”을 이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좋은 이유는 항상 있었으며, 정치 지도자를 향한 절대적이면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를 의심하는 생각을 키워야 하는 좋은 이유들 역시도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부분적으로는 지도자를 향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 상태에 의존한다. 공화당은 정치 감정을 조직하기 위해 파시즘과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컨대 엘리자베스 돌(Elizabeth Dole)은 그녀의 청중들을 쳐다보며 “나는 당신들 각각을 사랑하고, 당신들 모두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바마의 당선에 대한 열의 넘치는 동일시의 정치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오바마에 대한 지지가 보수적인 대의에 대한 지지에 부합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자면 말이다. 이는 그가 “지지 정당을 바꾸는 투표(cross-over)”로 성공했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는 60%의 득표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서는 52%의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명백한 괴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오바마가 동성 결혼권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지한 바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더 나아가, 웬디 브라운이 주장했듯이 공화당원들은 최근에 있었던 선거들과는 달리 유권자들이 “도덕적인” 이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오바마에게 투표한 이유는 분명히 경제 때문인 것처럼 보이며, 그것은 종교 문제 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에 의해 완전히 구조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권자 다수가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던 공화당 소속 알래스카 주지사인 페일린(Palin)의 정치 회합이 결국 실패했다는 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총기 규제나 낙태권 그리고 게이의 권리 같은 “도덕”적인 이슈가 예전과는 달리 더 이상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이는 이 도덕적인 이슈들이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의 다른 칸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정치적 신념의 새로운 형상화(configuration)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상화 안에서는 명백히 모순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는 오바마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오바마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그들의 인종주의를 명백히 드러내면서 어쨌든 간에 오바마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고, 투표장에서는 백인 후보에게 투표하면서 여론조사나 출구조사에서는 비백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하는 브래들리 효과(Bradley-effect)의 반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 아마도 그가 경제에는 더 낫겠죠.” 이러한 유권자들은 그들의 조각난 신념을 해결하지 못하고 감춰둔 채 인종주의를 지키면서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다.
강력한 경제적 동기 외에 경험적으로 조금 더 분별하기 쉽지 않은 요소들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이 선거에서 있었던 탈동일시의 힘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즉 조지 부시가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했다는 점에 대한 불쾌감, 미국이 저지른 고문과 불법 구금에 대한 부끄러움, 엉뚱한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적 관점을 유포했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 과도한 탈규제 경제가 전 지구적 경제 위기를 낳았다는 점에 대한 경각심과 공포심 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오바마가 그의 인종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의 인종 덕분에 이 국가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대표자가 된 이유 아닐까? 그러한 대의제적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오바마는 흑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흑인이 아니기도 하였으며(누군가는 “충분히 흑인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너무 흑인스럽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오바마는 인종문제에 대해 양의적인 관점을 해소하지 못하는 유권자들 뿐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원치 않는 유권자들에게도 호소할 수 있었다. 대중들이 대중들 스스로의 양의성을 견뎌내고 감출 수 있도록 해주는 공적인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의 인물로 나타난다. 이는 당연히 이데올로기의 기능이다. 그러한 요소는 강렬한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인 힘을 잃는 것은 아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오바마 개인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관심들이 쏠렸다. 즉, 진중하고 신중한 그의 성격, 언제 어디서든 성미를 놓아 버리지 않는 능력, 상처를 주는 공격들과 야비한 정치적 수사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방식,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부끄러운 상황을 회복할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약속 말이다. 물론 그러한 약속은 매혹적이지만, 오바마를 선택하면 이 모든 불협화음을 일거에 해소하고 통합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믿음을 낳는다면 어쩔 것인가? 이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자신의 과오점을 보여주고 자발적으로 다른 세력과 타협하며, 심지어 소수자들을 팔아치울 때에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실망에 고통 받는 결과로 끝나 버릴만한 가능성은 또 어떤가? 사실 그는 분명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점들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이들은 이 순간 극단적으로 모호하지 않은(extremely un-ambivalence) 상황을 즐기기 위해 이러한 우려를 “미뤄두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더 잘 알게 되었을 때에도 무비판적으로 즐거워하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뭐니 뭐니 해도 오바마는 거의 좌파가 아니다. 보수주의 반대세력이 오바마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칭을 붙여줬다지만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의 행동들이 정당 정치와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해 제한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미 타협되었는가? 만약 우리들이 현재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기 위해 오바마를 지지할 것이라면, 우리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비판적인 정치학을 떨궈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덧없는 것일지에 대해서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라고 공공연하게 자백한 인종주의자가 한 켠에 있다면, “오바마가 게이의 권리와 팔레스타인을 팔아 치웠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아. 하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의 구원이야”라고 말하는 좌파들도 분명히 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I know very well, but still)’라는 말은 부인(disavowal)의 고전적인 형식이다. 우리는 어떤 수단을 통해 이렇게 충돌하는 신념을 유지하고 감추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
오바마의 성공이 미국의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유럽의 사민주의를 닮은 경제 접근법이 도입되면서 경제 규제에 있어서 새로운 원리를 보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도 논리적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부시 행정부가 국가 간의 조화를 파괴해 온 치명적인 흐름을 뒤바꿔 놓을 다변적인 관계로 재편되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서도 더 자유주의적인 흐름이 있게 되리라는 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오바마가 전 국민 의료혜택 보장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동성 결혼권을 명백하게 지지하는데도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가 중동에서 정당한 정책을 펴리라고 희망할만한 이유가 많지도 않다. 물론 그가 컬럼비아대 중동문제연구소 소장으로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오던 라시드 칼리디를 알고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오바마의 당선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요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성공에 암묵적으로 강제된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하고만 관련이 있다. 이 사실은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격려할 것이며 또 압도할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미국의 자기 정의(self-definition)의 변화를 촉진할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이 투표자들 다수가 오바마에 의해 “대표되기”를 원한다는 의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즉, 우리는 많은 인종으로, 각양각색의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가(nation)다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오바마는 우리가 누구로 되어왔으며, 또 앞으로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지를 인지해야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대통령직의 대의제적 기능과 대중을 대표하는 것, 둘 사이의 불화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거의 메시아에 거는 것만큼 이 남자에게 쏟아진 기대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오바마의 재임기간이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실망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또 실망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 분(the man)은 한낱 인간이 될 것이며,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정치는 모호함이나 신중함 없는 찬양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사실 정치는 소란스러운 토론과 공중의 비평, 필수적인 적대의 장이지 메시아적 경험은 아니다. 오바마의 당선은 토론과 투쟁의 장이 이동했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지리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의 당선을 잠정적이나마 투쟁의 끝으로 생각한 우리들은 어리석었지만, 오바마의 당선은 투쟁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오바마가 시도할 많은 행동들과 시도하지 못할 일들에 의심할 여지없이 동의하고 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오바마가 그 자체로 “구원”이며 “구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때 우리는 그를 무자비하게 처벌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통합되었다는 느낌과 모호한 점 하나 없는 사랑의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실망을 거부하거나 억누를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따라 붙을 드라마틱한 실망감을 피해가려면 오바마는 빠르고 자알~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충돌”ㅡ그에게 반대하는 정치 의지를 불러일으킬 심각한 실망ㅡ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 재임기간의 첫 두 달 안에 중대한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아마도 관타나모 기지를 폐쇄하고 수용자들의 재판을 합법적인 재판정으로 이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이라크에서 병력을 철수할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셋째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그의 호전적인 언급을 철회하고, 그 지역에서 외교적이고 다변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단계를 밟아가는 데 실패한다면, 오바마에 대한 좌파들의 지지는 악화될 것이며, 우리는 자유주의적 주전론자들과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들 사이의 균열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또 만약 오바마가 시오니스트인 로렌스 서머스 같은 이들을 주요 내각에 지명하거나, 클린턴과 부시가 이미 실패한 경제 정책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우리의 메시아는 엉뚱한 예언자로 판명되어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불가능한 약속의 지점에서, 우리는 부시 정권이 저지른 정의(justice)의 끔찍한 폐기를 뒤집기 위해 확실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환멸(disillusionment)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비판적인 정치학을 되찾으려면 얼마만큼의 각성(dis-illusion)이 필요하며, 극적인 각성을 얼마나 해야 지난날의 정치적 견유주의(cynicism)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정치란 오바마가 보여줬던바 인간에 대한 것이나 불가능하고 아름답기만 한 약속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러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더 큰 정의의 여건을 만들어줄 확실한 정책 변화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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