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일에 대해 나이 어린 혜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사산 후 겨우 몸이 회복된 혜화는 집에 멀쩡히 살아 가던 혜화의 동생 혜수(어미 개)와 강아지들을 모두 누군가에게 팔아 버린다. 그러나 혜수는 팔려나가길 거부하며 집에 틀어 박히고, 혜수를 끌고 가려는 사람들과 혜수 사이에 일단의 소동이 벌어진다. 자기가 팔아버리고도 방 구석에 눌러 앉아 차마 헤어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던 혜화의 귀에 죄의식이 불가피한 소음으로 들이닥친다. 결국 혜수는 혜화의 손에 억세게 붙들려 목줄을 매인 채 질질 끌려 사라져야만 했다. 압도적인 상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혜화에게 모든 따뜻한 것들은 제거되어야 했으며, 관계들은 소멸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당시 혜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저질러져야만 했다. 그것은 제 삶의 몰락에 대한 복수, 제 삶의 감각을 찾기 위한 절박한 발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혜화의 복수와 발악은 결국 혜화 스스로를 다시 한 번 타격한다. 시간이 흘러 홀로 남은 그날 밤, 혜화는 손톱을 자르다가 손톱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버리고, 찢겨진 피부 사이로 붉은 피가 스미어 나오는 걸 슬픈 눈으로 지켜 본다. 우연히 팔려 나가지 못한 흰색 강아지는 갑자기 짐 더미 사이에서 기어나와, 그런 혜화에게 와서 낑낑대며 몸을 부빈다(그리고 또 버려진다).
이렇게 혜화가 당해버린 일, 그리고 혜화가 저질러야만 했던 일들은 시간이 몇 년이 흘러도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 억압되지만, 그런 억압은 제 사슬을 끊고 일상에 불쑥불쑥 출현하고 혜화의 삶을 끌어가는 미지의 힘, 곧 증상(symptom)이 된다. 그렇게 수 년 간 혜화는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애도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제의적인 삶을 산다. 제의적인 삶은 그 삶의 원인이 된 상처를 반복하지만, 제의만으로는 그 원본은 결코 재생되지 않은 채 억압된다(그러므로 이 영화를 '모성'으로 이해하는 독법은 그야말로 엉터리다). 억압된 삶의 상흔은 증상이 되고, 증상은 곧 삶이 된다(영화는 왜 혜화가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우리는 혜화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네일 아티스트로 살고 싶었던 혜화는 그 대신 동물 병원에서 애견을 돌보고, 재개발 촌에 버려진 개들을 병원에 데려와 치료하며, 사별한 싱글 수의사의 유난히 가슴에 집착하고 엄마를 원하는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본다. 혜화는 손톱을 자르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 둔다(그리고 한수는 그런 혜화의 손톱 중에 피가 묻은 손톱을 발견한다). 혜화는 낡고 허름한 집에서 어딘가 일그러져 있고 망가져 있는 강아지들과 함께 산다. 과거의 영향력, 상처의 그림자, 몰락 이후의 삶에 대한 희미한 스포트라이트, 희박한 삶의 감각들. 혜화는 제 살을 자르면서, 또 저에게 다가와 몸을 부비는 것들을 지켜보면서 삶에 대한 (가짜)감각을 획득한다. 실로 창상(創傷) 같은 삶이다.
그러나 혜화의 삶은 또 다른 타격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한다.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믿었던 한수가 '다리를 절며' 등장해서는, 죽었다고 믿었던 자신들의 아기가 입양되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혜수의 아이였(다고 믿었)던 강아지는 철거촌을 유유히 떠도는 다 큰 흰색 개가 되었고, 무슨 일인지 탈장이 되었으며, 이를 치료하려는 혜화의 앞에 등장해서는 언제나 혜화를 놀리듯 미끄러지며 사라진다. 잠깐 동안 마음을 품었던 싱글 수의사는 옛 첫 사랑과 결혼하기로 한다. 혜화의 엄마는 치매에 걸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내려야만 했던 몇 가지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 말을 한풀이 하듯 되풀이 한다(마치 그 일이 증상으로 남아 그 이후 당신의 삶을 모두 결정해버렸던 것인양). 게다가 한수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이건 차라리 유령이 아닌가?) 혜화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등장해서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끈질기게 따라 붙어 아기의 생존과 생활을 전한다. 혜화가 찾아 헤매던 혜수의 아이였(다고 믿었)던 강아지는, 혜화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인물인 개장수에게 붙들려 사라진다(고 믿어진다). 혜화는 이렇게 닥친 일들 앞에서 또 다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혜화의 삶은 또 다시 흔들리고 또 다시 붕괴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거부할 수 있던 단순한 조짐이었던 것들이 혜화를 이끌어서 차츰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억압해두었던 증상의 기원들이 차례차례 혜화의 삶 전면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런 타격들을 혜화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혜화는 이런 (재)타격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혜화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영화 엔딩 스포일러 때문에 급 진행) 모든 성장드라마는 언제나 타격 이후의 삶을 다룬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들이 가한 타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타격 이후의 삶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곧 성장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것은 사랑의 붕괴일수도 있고 소중한 타자의 상실일수도 있으며 갑작스러운 대재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타격 때문에 만들어진 증상은 자신의 삶 자체도 성장도 아니(어야 한)다. 증상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를 통해 깨져야 하고, 삶은 한 번 더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성장해야만 한다. 성장은 곧 이후-의 삶이다. 타격을 거듭 입은 혜화는 거칠게 차오르는 삶의 기억과 숨결들을 누르면서 차츰 진실과 타격들을 끌어 안아간다. 영화는 마치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듯이, 혹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일종의 필연성으로서 혜화가 해야만 했던 또한 할 수밖에 없었던 행위의 과정을 그려낸다. 혜화는 서사의 플롯을 통해 스스로가 압도되어야만 했던 현실들을 받아들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증상을 타격하고 진실을 선택한다. 마침내 최종적인 진실을 선택한 혜화는 한수를 지나쳐 운전해 가다가 순간 멈춰서서 거울에 비친 한수를 바라보고는, 후진으로 기어를 바꾸어 넣는다. 그리고 엔딩곡,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가 흘러 나온다(<앵콜요청금지>의 재배치, 재해석, 새로운 의미).
그렇게 <혜화, 동>은 (한수가 아니라) 혜화의 성장 드라마로 끝이 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삶은 압도적인 힘에 의한 상실과 타격을 조우하면서(encounter) 붕괴하고 몰락한다. 조우 이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삶은 어디까지나 증상으로서의 삶이다. 증상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삶-이후를 방해한다. 그러나 증상은 과거의 조우를 다시 만나면서 그 조우를 다시 끌어 안을때(re-encounter) 비로소 타격을 입고 진실이 될 수 있다. 진실은 곧 조우의 조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진실을 받아들인 삶, 그러므로 진실 이후의 삶. 그것은 곧 윤리이며 따라서 <혜화, 동>은 곧 한편의 잘 만든 서사-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성장이다. <혜화, 동>의 영어 제목이 're-encounter'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할 것이다.
덧) 정말이지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행복했다. 한동안 영화에 회의를 많이 느끼고 오직 친구가 만든 영화만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여전한 가능성을 보아서 다시 한 번 행복했다.
덧2) 이 영화를 감각이 예민한 '남성'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