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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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6/26 꽃비
  2. 2010/03/08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에게
  3. 2008/11/25 그냥 짧은 의문 (1)
영화 / 2010/06/26 23:31

잊혀진 역사를 현재에 소환하는 영화적 시도는 언제나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영화의 작품성이나 완결성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 항쟁을 모티프로 한 <꽃비>는 충분히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꽃비>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현장을, 제주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교실과 학생들의 관계로 축소해 놓는다. 영화가 시작하고 곧 쫓기듯 섬을 떠나는 형석은 <일본>을, 형석이 떠난 자리에서 급장이 되기 위해 싸우는 도진과 민구는 각각 <남한>과 <북한>을,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문득 찾아와 '투표'를 제안하며 포르노와 초콜릿으로 아이들을 포섭하는 동일은 <미국>을 상징한다. 그리고 도진과 민구가 마음을 빼앗기 위해 노력하는 서연은 훨씬 더 복잡한데, 아마도 한반도(혹은 민족, 혹은 역사)를 상징할 것이다. 각각의 국가(정체)를 상징하는 인물들은 (감독이 해석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눈에 도식적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영화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체스 경기를 녹화해서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이 진부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의 디테일과 영화적인 암시와 비유들을 직시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하고, 해석해야 할 것은 해석해야 하며, 아픈 것은 부정하지 말고 제대로 아파하고, 애도해야 할 것은 끝까지 애도해야 한다. 또한 <꽃비>는 제주 4.3 항쟁이라는 사건을 단지 현대사의 한 비극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만 4.3 항쟁의 아픈 기억을 훼손하지 않고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그러나 영화는 인물간의 관계와 서사의 진행을 모두 남성 정치의 맥락으로 치환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서사는 노골적으로 젠더화된다. 다소 어설픈 남성 학원물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3 항쟁을 직접 겪어 실어증에 걸린 서연의 어머니와 서연은 영화 내내 침묵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행위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단지 남성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받을 뿐이다. 특히 서연은 중요한 순간에 하얀 옷을 입고 '청순한'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서연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대신 노래를 흥얼거린다(사이렌의 경우처럼, 여성의 노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공포 아니면 매혹, 혹은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연은 늘 도진과 민구에게 다투지 않을 것을 주문하지만, 민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도진과 동일은 서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례로 성폭행한다.

이렇게 정치적 폭력을 <성애화eroticize>해서 성폭력의 문제로 치환하는 건, 언제나 남성 정치의 몫이었다. 예컨대 탈식민시대에 제국주의에게 강탈당한 민족-국가의 영토는 '어머니 영토'로 재현되고, 소위 민족-국민의 수난은 제국주의 남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한 남성적 복수의 판본은 (상대방 남성에 대한 직접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 대한 성애화된 폭력이다. ('fucking USA' 같은 노래를 생각해보자.) <꽃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성화된 범주에 대한 남성 주체의 맹목적인 사랑은 곧 성폭력으로 연결된다. 사랑-증오-(성)폭력은 같은 스펙트럼 위에 있다.

이런 식의 비유는 남성만이 진정한 역사적/세계적 행위자라고 간주하며, 남성 범주에 대응하는 여성이라는 타자 범주를 '생산'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의미화한다(물론 이는 남성 정치의 맥락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또한 이는 남성 정치를 <성애화>하고 사적인 욕망으로 축소시키며, 이를 <낭만화>한다. 이는 실재하는 폭력을 은폐하며, 그 결과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역사와 정치를 그런 케케묵은 위험한 비유를 동원해서 기억할 것인가. 우리는 영화의 포스터에 쓰인 "너 때문에 싸우는 거야"라는 말의 무서운 폭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당신들이, 당신들의 욕망으로 싸우는 거다. "너 때문에" 싸운 거라면, '사랑'의 스펙트럼 위에서 발생한 성폭력의 원인도 "너" 때문인가? 당신들의 싸움에 타자를 동원하지 말고, 또한 폭력을 낭만화하지 말라. (그러나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처럼, 타자가 없다면 싸움이 있을수나 있을까. 입이나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민주주의자이자 문명인을 자처하는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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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문학 / 2010/03/08 22:54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_백석,「북방에서-정현웅에게」中
 
이 부분을 두고 백석 연구자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했다고 했다. '민족주의' 국문학자들은 3행, 즉 "숭가리를"에 마침표를 찍어서 1행의 "떠났다"를 서술어로 간주했다. 시의 화자는 비록 떠났지만, 숙신이나 여진, 요, 금 같은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민족사'의 일부인 부여와 발해를 "배반하지"는 않았으니 백석을 '민족문학사'의 일부로 넣으려는 학자들로서는 그게 훨씬 편이로웠을테다. 화자가 "배반"한 것은 고작 "범과 사슴과 너구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지금 읽고 있는 백석 연구자의 해석은 이보다 더 한걸음 나아간다. 단지 추정되었을 뿐인 유사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나'를 무려 고구려와 동일시한다. 잠시 아연해지고.. 아 어떻게 이 시를 그런식으로.. 부여까진 그렇다 쳐도 발해, 여진, 요, 금은 어쩌고? 그런 역사학적 해석을 뛰어 넘는 훨씬 아름다운 시인데.. 책 전반이 다 재밌다가 마지막 장에서 삐끗해버렸다.
 
한국을 무려 반만년 역사로 보려는 국가민족주의적 국사학의 움직임탓에, 한국에서 근대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말하는 건 과장해서 말하면 바보가 되어버리는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모든 역사 서술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국에서, 아니 동북아에 있어 통용되는 상식은 그렇지 않나?
 
물론 이건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고작 스물 세살에 걸출한 논문을 썼지만, 네이션의 산물인 '사적 언어학'이 태동하던 프랑스에서의 교수자리를 고사해버리고, '중립국'인 스위스의 작은 대학교에서 평생 책 한권 제대로 내지 않았던 소쉬르를 생각해보면. 소쉬르가 남긴 강의에는 네이션 언어학에 대한 경계심이 녹아 들어있다고 했다.

백석이 지금 한국에 살았다면 진작에 "배반하고" "떠났"을거라고. 백석의 저 시는 단지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노래로 바쳐져야 해.

시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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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백석, , 역사
독서노트 / 2008/11/25 00:42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홍성흡 옮김, 이학사, 2005)를 보고 있다.. 첫 장은 나름대로 흥미진진 했는데... 4장 쯤 가니까 갑자기 흥미가 조금은, 아주 조금 뚝, 했지만 일단 끝까지 봐야지 싶다는. (사실 흥미만 뚝, 하면 괜찮은데, '이게 뭥미?' 싶은 구절들도 눈에 띄어서... 그치만, 60년대에 쓴 글이니 pass, pass!)

재밌는 얘기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냥 짧은 '의문'이 든 것 중에 하나만.

[...]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 없는 사회이고 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적인 사회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다. 이러한 배열은 역사 없는 사회들을 권력 없는 사회로 취급하는 권력에 대한 현재의 사고와는 매우 다르다. [...] (p. 32) [강조는 원문.]


뭐, 일단 여기에 쓰인 '역사적'이라는 개념(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무엇인지?)과 '비/강제적'이라는 개념, 그리고 '정치''권력'이라는 개념에 대한 보다 명료한 정의(definition)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혼동이 되어서 말야.

어쨌든, 만약 여기서 쓰인 '강제적 정치권력'이라는 말을, '(군)주권 권력(sovereign power)'정도로 이해해도 좋다면, 결국 클라스트르가 '역사'와 '(군)주권'의 깊은ㅡ어쩌면, 필연적이자 불가분의ㅡ유대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고 읽힌다. 그렇다면 '역사'란, 결국 주권의, 주권에 의한, 주권에 대한 담론일 뿐이란 이야기일까? 다시 말해, 주권 권력을 (새로이) 쓰면서 그 근원과 정초foundation를 (탐색 및) 창조해 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주권 권력의 정통성legitimacy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정당화하는, 그저 그렇게 이러쿵저러쿵한 담론이란 이야기? 

과연 '역사'라는 담론은, 이러한 의미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비강제적"인 사회는 역사를 쓰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가졌다고 말해질 수 있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여기서 푸코를 좀 불러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지만(사실은 어느 정도 불러온 것 같지만), 깊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므로 일단 접어두자.

그런데 "역사 없는 사회"와 "역사적인 사회"라는 말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한 걸까? 그러니까, "역사적인"이란 말은 정확히 "역사 있는"이라는 의미인건지? (그럴 경우 '있는'이라는 말도 상당히 문제적이겠군) "역사적인"이라는 것은ㅡ어떤 집단, 혹은 어떤 형태의 권력에 의해서ㅡ문자로 꼼꼼하게 기록되고 영구토록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것에 붙이는 말인지? 혹은 어떤 형태든지 기록이 남을 경우에ㅡ우연이든 혹은 특정한 노력의 산물이든ㅡ붙이는 말인지? 아니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암튼 의문 가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라니까; 그냥 읽자면 그냥 읽겠지만, 궁금해지잖아..)

지저분한 의문, 하나만 더. "역사적인"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상관없이 여기서 과학적 사실 진술을 하듯 말하고 있는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혁신', '변화', '동인'이라는 말들이 어우러지면서 너무나 진보주의적(개량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냄새가 나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도 하고..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과 "역사적인"ㅡ어쩌면 인터넷을 하고 있는 우리는 '역사적인' 사회에 이미 살고 있는 셈 아닐까?ㅡ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부분에서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주권 권력을 구성하는 '정초적 폭력'이니, '성스러운 테러'니 하는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말들은 종종 들을 수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 (정치) 권력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괜찮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설득력 있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이런 경향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영 찜찜하기만 해서 말야.

물론 현재까지 '생존'해 있고 또 널리 기록되고 보존되어온 '역사'를 가진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와 현재엔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볼수도 없고 기록도 보존도 되지 못한 '역사'를 가진 역시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단절, 차이, 균열이 분명히 있겠지. 근데 그러한 단절이나 차이점들을 설명할 때, '폭력'과 '강제'라는 말을 넣어서 코딩하는 것에는 여전히 거부감을 느낀다. '폭력'과 '강제'라는 말의 뜻도 엄청 애매하거니와, 그 말들이 애매한 채로(사실은 애매하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특권화 되고, 재생산되고, 특정한 정치 권력의 모델을 옹호하는 것만 같아서 말야.


결론 : ... 아 모르겠다. -_- (무책임한 주인장은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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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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