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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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7 11월 7일
  2. 2010/03/29 조의
  3. 2009/05/25 권력에 대한 환상
  4. 2009/05/24 哀悼
일기 / 2010/11/07 12:01
어제 매달 있는 행사를 치르고 우울하고 무거워진 몸을 질질 이끌며 새벽에 집에 들어와보니 트위터에 달빛요정의 부고 소식이 들렸다. 그가 뇌졸중이라는 이야기도 트위터로 들었고, 그가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사실도 트위터로 들었다. 소식은 이렇게 더 빠르고 직접적으로 전해진다. 소식은 먼 곳에서 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앞에 문자 조각으로 현현한다. 그만큼 충격도 매개나 여과 없이 전달된다. 그가 만든 음원의 판매고가 일정량에 미달하여 '도토리'로 수익을 받았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소식들을 듣는다. 조금 더 어렸던 시절, 노래방을 좋아했던 나는 <절룩거리네>나 <스끼다시 내인생>을 부르며 혀 밑으로 씁쓸한 무엇을 느끼면서도 깔깔 웃으며 그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는데, <361 타고 집에 간다>를 들으며 그가 361의 어느 곳에 살고 있을까를 궁금해하기도 했는데, 분명히 어떤 시절을 견뎌내던 힘이 되었던 그의 노래였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버린 것이 믿기지 않아서 자기 직전까지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1집 다음으로는 듣지 않았군)

그러나 이렇게 전해진 충격이 얼마나 갈 것인가, 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회의적이다. 우리는 슬퍼하고 애도하는 방법 따위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가기 때문이다. 일상의 공포와 충격, 고통, 슬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감해진 채,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일상에서 우는 법을 잊고는 영화관에 가서 우는 법을 학습하는 관객들처럼, 우리는 트위터나 블로그 따위에 애도의 말을 조금 남긴 채 그의 죽음을 잠깐 애도하고는 그를 쉽게 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과 고통에 기초한 윤리, 상실을 부정하지 않는 윤리, 애도를 애도답게 할 수 있는 윤리, 그런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당분간은 버틀러를 조금 더 따라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 아니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황정은 소설가 같은 방식이라면 어떨까?


꿈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 가능성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 언제나 꿈꾸는 것들이지만, 이런 것들은 충분히 인큐베이팅 되기도 전에 쉽게 사람들의 비판에 노출되고 꺾이고 좌절된다. 사람들은 아직 싹틔우지도 못한 것들을 비난하고 짓밟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들었고 짓밟았고 승리했노라. 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결국 대문자 '나(I)'의 이야기. '나'의 자족성, '나'의 폐쇄성, '나'의 권위.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 혹은 자기가 택한 것들만 바라보고 사는 이들과 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들에게 대화란 것이 과연 있을까? 그들은 과연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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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3/29 18:34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용산 참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같은 큰 사건은 우리들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발생시키고, 우리는 거기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떤 감정을 느낀다고. 그리고 그 어떤 감정은 가치의 판단(누가 옳으냐 그르냐, 무엇을 지키거나 버려야하느냐)과는 거리가 있고, 대신 찌꺼기 같이 남은 그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은 슬퍼한다고. 그러나 이내 사람들은 그 감정을 말끔하게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된다고.

나는 이런 그의 말이 그 어떤 고만고만한 논객들의 말보다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그것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정치적/도덕적 진정성을 물었던 사람들은, 사실상 모두 틀렸다. 적어도 번지를 잘못 짚었다. 이는 어떤 감정에 대한 문제이며, 그 감정은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에 어떻게 자국을 남기며 한편으로는 그 감정이 사람들을 어떻게 묶여주는가ㅡ그로스버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정동적 연합(affective alliance)을 어떻게 이루는가ㅡ라는 문제와 관련이 된 것이다. 그것은 언어화될 수 없거나 지독하게 어려운 그 무엇이다. 행위로서, 혹은 의례로서 애도해야하는 그 무엇이다.

주말에는 풀리지 않을 의혹을 남기고 있는 큰 서해 참사도 있었다. 3월 바다는 몹시 찬데. 그리고 오늘은, 최진실씨의 동생 최진영씨가 자살했다고 한다. 하루종일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찰랑대는 이 낯익은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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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9/05/25 23:27

내가 '당비를 안내는 당원(당원이 아니란 얘기다)'인 한 당게에서는 '논쟁'이 한창이다. 말이 좋아 논쟁이지 제 손에서 주물주물한 똥을 이리 저리 던지는 꼴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내가 당원이 아닌 입장에서 이런 말들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화가 몹시 나므로 글이라도 써야지 싶다.


전 노무현 대통령을 무작정 미화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지금은 때가 때니 만큼 최소한 죽은 이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 하는 상황이므로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말들을 쉽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전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절에 있었던 수없이 많은 일들을 상기시키면서 그를 애도하는 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람들은 대체 뭐하자는 건지?

전 노무현 대통령이야 말로 시카고 發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 도입의 첨병이었으며, '제국주의적' 이라크 파병의 주역이었고, 수없이 많은 노동탄압의 기수였으며, 대표적으로 '대추리'에 가해진 국가 폭력의 최종 심급이라도 된다는건지? 아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물론 이런 저런 조건들, 이런 저런 사건들이 전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절에 도입되었고 또 일어났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전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직격탄으로 이어질 수 있는건지? 그의 죽음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아도 될만한 이유가 되는건지?

분석적이고 '혁명가적 풍모를 지닌' 어휘를 평소에 즐겨 쓰는 이들이 어찌나 이렇게 권력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도 역시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위치한 인물이라는 점을. 한국이 어디 왕정국가라도 되는가(심지어 가장 폭력적인 왕들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니, 뭐 신정국가라도 되는건가? 그는 독재자도, 홀로 선 주체도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포진한 수없이 많은 이들과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임기 내내 조중동과 한나라당과 싸워야 했으며 심지어는 중간에 어이없게 탄핵까지 당해야 했다.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한은 (그의 계급 정치의 한계 내에서) '부르주아' 정치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었다. 그의 권위는 쉴 새 없이 공격받았고 뭉개졌다. 게다가 어디 신자유주의 논리가 5년 임기에 불과한 한 국가의 원수가 혁명 일으킨다 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 그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쨌든 많은 기대를 받았고 또 그 기대를 저버렸다. 수없이 많은 인명을 희생한 시대에 '노무현 정권'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중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다. 왜 그를 이제와 실패한 신으로, 따라서 마땅히 추방되어야 하고 죽어 마땅한 신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민주주의와 경제평등을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왜 이제와 신을 소환하는건지? 그는 모두가 환멸하고 진흙탕이라 생각하는(그래서 모두가 꺼리는데다 한 번 발을 들이면 오염된 인간 취급하는) 판에 발을 깊숙히 담그고야 말았던 정치 주체이자 '실정법'이 부여한 이름인 바 대통령이지, 신이 아니다. 지금 상황이 엉망이라고 해서,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분노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권력에 대한 환상은 걷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조금씩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진부한 권력 이론을 갖다 들먹이지 않더라도, 권력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언어와 분석이 끊임없이 향해야 하는 지점이다. 2mb 2년차 시점에 지금 대통령은 어렵고 말도 안 통하니 접어두고, 그래도 듣는 귀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하려면, '노무현과 아이들'에서 노무현만 보지말고, '아이들'에 하나하나 구별하고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미리 했었어야 한다. 그러나 놀랍지 않게도 '아이들'은 아예 생략되어 버리거나, 그냥 '386 민주화 운동 세대'라는 이름 정도로만 불리고 땡!이다. 이런 분석 과정 없이는 분풀이용 희생양만 계속 만들어낼 뿐이다. 정치에 '절대권력'이라는 신을 소환하려드는 말 많은 사제들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2mb 대통령 한 명 희화화하고 놀리는 건 지긋지긋하다. 어떤 에세이스트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가 2mb"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 물론 정작 그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짝도 몰수 했으니 대통령직 그만두고도 천수의 곱절을 누리며 살겠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의 사진 앞에서 흐느끼는 모든 이들의 눈물에, 부질없이 한 방울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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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9/05/24 22:34

나의 20대 초반을 같이 했던, 그리고 내게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일깨워 주었던 그의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목 근육이 뻐근하다. 부끄러움(shame)을 알고 역사를 믿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죽음을 택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차가운 분석이나 하나마나한 냉소 따위는 집어 치우자. 평온하기 짝이 없었던 이 일상과 주말에 저주를. 그의 죽음 앞에 평생 끝나지 않을 哀悼를. 지금은 맘 뿐이지만, 그의 사진 앞에 꽃 한 송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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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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