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렇게 전해진 충격이 얼마나 갈 것인가, 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회의적이다. 우리는 슬퍼하고 애도하는 방법 따위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가기 때문이다. 일상의 공포와 충격, 고통, 슬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감해진 채,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일상에서 우는 법을 잊고는 영화관에 가서 우는 법을 학습하는 관객들처럼, 우리는 트위터나 블로그 따위에 애도의 말을 조금 남긴 채 그의 죽음을 잠깐 애도하고는 그를 쉽게 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과 고통에 기초한 윤리, 상실을 부정하지 않는 윤리, 애도를 애도답게 할 수 있는 윤리, 그런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당분간은 버틀러를 조금 더 따라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 아니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황정은 소설가 같은 방식이라면 어떨까?
꿈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 가능성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 언제나 꿈꾸는 것들이지만, 이런 것들은 충분히 인큐베이팅 되기도 전에 쉽게 사람들의 비판에 노출되고 꺾이고 좌절된다. 사람들은 아직 싹틔우지도 못한 것들을 비난하고 짓밟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들었고 짓밟았고 승리했노라. 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결국 대문자 '나(I)'의 이야기. '나'의 자족성, '나'의 폐쇄성, '나'의 권위.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 혹은 자기가 택한 것들만 바라보고 사는 이들과 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들에게 대화란 것이 과연 있을까? 그들은 과연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