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녚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생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1. 요즘엔 읽고 있는 책은 많은데, 뭔가를 쓰고 싶도록 하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재미있는 책들도 많기는 한데 이상한 일이다. 책을 읽고 정리해보는 습관은 갖게된 것 같은데, 쓸 욕심은 아무래도 안난다. 쓰고 나면 늘 바보 같아 보인다. 그냥 지금은 input이 더욱 필요한 시기일 뿐이려나? 예전엔 인풋도 없으면서 미친척하고 아무거나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샌 일기 밖에 못쓰겠어. 예전에도 이런 내용으로 포스팅 했던게 기억나는 것 보면, 아무래도 순환과 리듬의 문제인 것 같다.
2. 요즘엔 막연한 덩어리들 사이에 실마리가 이어지면서, 옛날에 ㅅㄷㅈ 샘과 했던 세미나의 문제 의식과 연결되는 부분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 언어학/사적 언어학 분석, (세미나에서 읽었던) 푸코의 근대국가/권력 형성 분석, 얼마 전 다시 한 번 일독한 <지도의 상상력>의 주제, 제국과 제국주의 국가의 구분, 그리고 최근에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있는 책에서 본 어떤 구절이 뒤섞이면서 어떤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오랜만에 탈식민주의 텍스트를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몇 달만의 경험이라 상당히 소중함 ㅎㅎ (그러나 별 다른게 아니네)
3. 요즘엔 생물학에 대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것 같다. 옛날에는 젠더를 다룰 때 생물학 이야기만 나오면 근본주의/본질주의라고 바로 욕했던 것 같은데. 요즘 같아선 생물학과 관련해서 생리학, 실험심리학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검지와 약지 길이의 비율 계산으로 성격과 젠더를 짐작할 수 있다니 뭐 이런 엉뚱생뚱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이다. 아동의 행동과 인지에 대한 최근 실험들도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다. 뭔가 나름의 통찰은 준다. 물론 지금처럼 잠깐 흥미는 가더라도, 오래가는 재미는 못느낄 주제들이기는 하지만... nature vs. nurture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신념과 실천의 문제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난 무조건, 일관되게 후자 지향.
4. 요즘엔 내가 가진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은 아니고, 좀 더 질투와 갈망이 세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빼앗고 싶거나 흡수하고 싶다. 꼭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못사는 책을 서점의 서가에서 몇 분이고 서서 바라볼 때 같은 느낌. 상당히 오랜 기간 마음 속에 누적되어 폭발할 듯 말듯 무언가가 있는데, 계기를 아직 못만난 것 같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 탓이라면 상황 탓일테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줄 관계를 못만난 탓이라면 그것 탓일테다. 여하튼 아슬아슬하게 찰랑찰랑대고 있다는 것. 위험한 충동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이럴 때는 "Protect me from what I want."를 주문처럼 되새김질 하는 수밖에.
5. 요즘엔 자꾸만 내가 예전에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 말에 따르면 예전에 나는 신념에 찬 '애정분배주의자'였다.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해서다. 연애 관계든 아니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집약적인 심적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주변 관계에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연애 관계에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면서, 다른 관계나 일상 생활 자체가 뒤흔들리는 걸 사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올바르지 않다'고까지 여긴 적이 있다. 특히 여이연 강좌 들으면서 바이섹슈얼리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는 말이다(이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살았는지).
그러나 사실 이는 생존전략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대학 시절에만 하더라도 내가 하기 싫거나 귀찮은 일을 해야할 때가 많았고, 그때만 되면 늘 소진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만 하더라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일이 가능했다(이게 생각대로 하면 되고~도 아니고. 이제와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근근히 '일상'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그리고 이는 성적표에 반영 되기도 했다; 애정을 철회해야 할 때면 급락하는 성적표 숫자...;). 하기 싫은 일, 그리고 주변 관계에, 그 에너지를 공평하게 분배해서 말이다.
지독히 나르시시스틱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도 이도저도 아닌 선택이었는데다, 어쩌면 천성에 반하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는 탓에,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방어기제였다는 생각도 들고. 요즘엔 좀 바뀐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6. 요즘엔 어떤 다른 글쓰기 양식에 대한 욕심도 부쩍 커지고 있다. 앞서 3번에서 말한 게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영화 <시>를 보고 나서 정말 크게 느꼈던 부분이었다. 내가 자주 썼떤 글은, 기껏해야 의미(meaning)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려들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고 의미있는 글쓰기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러한 글쓰기는, 이를테면 'sense'를 전달해야 한다. '센스'는 감각과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 그러므로 태생부터 결핍으로 시작하는 논문식 문체 같은 걸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일전에 영화 <시>를 보고 여기에 썼던, 그리고 이내 지웠던 글이 한없이 부족하고 한심해 보였다면, <시>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어떤 '의미'를 설명하고 재현represent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시>는 'sense'를 내 앞에 '제시present'ㅡ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이밀어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ㅡ했다. 그러므로 내가 택했던 글쓰기 방식은 완전히 틀렸던 셈이다. <시>에 대해 쓰려면, 완전히 다른 글쓰기를 택해야 한다. 내가 갖지 못한 어떤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차라리 문학적인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말 줄임표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구나 싶은 시. 말 줄임표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는 듯 혹은 망치가 되는 듯. 이런 시는 처음. 나, 킥킥.
"당신"이라는 단어를 보면 왜 이렇게 일상이 흔들리는지. 이게 다 3월의 봄바람 탓일 뿐일지. 이인칭 중에 "너"나 "그대"라는 단어보다도, 역시 "당신"이란 단어가 훨씬 좋게 들린다. "너", "그대", "당신"이란 단어는 각각 다른 거리감을 주는 탓에.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당신"은 굳이 말하자면 "너"나 "그대" 사이 어딘가에 놓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너"는 너무 직접적이고(일상 대화체 느낌), "그대"는 너무 먼 느낌이면서 추상적인 느낌을 주지만(철학이나 인생관 내-음새, 그래서 언제든 대체할 수 있다는), "당신"은, 바로 내 눈앞에, 혹은 내 근처,에 있다는, 그런 강한 존재감과 구체적인 감각을 주는 듯, 그러나 입을 열고 말하는 순간 한편으로는 어딘가 쓸쓸해지는 느낌.
나는 이인칭이 너무 좋아서, 이인칭이 없으면 삼인칭의 세계로 나가지 못 하겠다. 이건 어찌보면 비극.
이 부분을 두고 백석 연구자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했다고 했다. '민족주의' 국문학자들은 3행, 즉 "숭가리를"에 마침표를 찍어서 1행의 "떠났다"를 서술어로 간주했다. 시의 화자는 비록 떠났지만, 숙신이나 여진, 요, 금 같은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민족사'의 일부인 부여와 발해를 "배반하지"는 않았으니 백석을 '민족문학사'의 일부로 넣으려는 학자들로서는 그게 훨씬 편이로웠을테다. 화자가 "배반"한 것은 고작 "범과 사슴과 너구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지금 읽고 있는 백석 연구자의 해석은 이보다 더 한걸음 나아간다. 단지 추정되었을 뿐인 유사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나'를 무려 고구려와 동일시한다. 잠시 아연해지고.. 아 어떻게 이 시를 그런식으로.. 부여까진 그렇다 쳐도 발해, 여진, 요, 금은 어쩌고? 그런 역사학적 해석을 뛰어 넘는 훨씬 아름다운 시인데.. 책 전반이 다 재밌다가 마지막 장에서 삐끗해버렸다.
한국을 무려 반만년 역사로 보려는 국가민족주의적 국사학의 움직임탓에, 한국에서 근대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말하는 건 과장해서 말하면 바보가 되어버리는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모든 역사 서술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국에서, 아니 동북아에 있어 통용되는 상식은 그렇지 않나?
물론 이건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고작 스물 세살에 걸출한 논문을 썼지만, 네이션의 산물인 '사적 언어학'이 태동하던 프랑스에서의 교수자리를 고사해버리고, '중립국'인 스위스의 작은 대학교에서 평생 책 한권 제대로 내지 않았던 소쉬르를 생각해보면. 소쉬르가 남긴 강의에는 네이션 언어학에 대한 경계심이 녹아 들어있다고 했다.
백석이 지금 한국에 살았다면 진작에 "배반하고" "떠났"을거라고. 백석의 저 시는 단지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노래로 바쳐져야 해.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흥안령 : 중국 동북지방의 산맥, 음산 : 중국 몽골고원 남쪽의 산맥, 아무우르 : 흑룡강, 숭가리 : 송화강, 이깔나무 : 잎갈나무. 전나무과의 침엽 교목, 장풍 : 창포, 오로촌 : 중국 동북 지방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멧돌 : 멧돼지, 쏠론 : 쏠론족, 앞대 : 평안도에서 보아 남쪽 지방, 햇귀 : 햇발, 돌비 : 돌로 만든 비석, 보래구름 : 보랏빛 구름 (『백석의 맛』)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의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1967. 2. 15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 의심할 거다! / 복사씨와 살구씨가 /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위에서 김수영 시인이 말한, '그 날'이 올까?, 했던 의구심을 접어두고, '그 날'이 지금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던, 지난 날.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불란서 혁명의 기술 /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지난 날..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그러나 강가에 함께 서서는 손을 꼭 잡고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몰라 허전하지만 또 덤덤하게 시간을 보내며, 편히 대하고 싶으나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며, 나의 거짓부렁이들을 모두 믿어버리는 사람을 떠올리며, 내가 한 때 거부했지만 그리워진 사람을 떠올리며, 거리를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 사람을 떠올리며, 나에 대한 친절과 보살핌에 감사를 표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신뢰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게해 준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어느 덧 마음 속 깊이 아끼게 된 사람을 떠올리며, 아직 부치지 않았지만 너에게 수신되었을 나의 메시지를 생각하며, 내게는 수신되지 않을 너의 진정된 이야기를 상상하며, 당장이라도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은 불안을 느끼고, 절망과 슬픔으로 위장한 닳디 닳은 도피의 공간으로 나를 몰아 세우고, 날 선 감정을 감추지 못했던 얼굴이 부끄러움에 벌겋게 타오름을 느끼고, 질투와 시기로 얼룩지고 헤져버린 마음을 다시 추스리며, 그렇게 여느 때와 똑같이 8월 어느 날의 무더운 밤을 보내는, 그 집요하고 또 지겨운 하루, 그리고 8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