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루틀리지에서 나온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개론서를 읽다가, 나로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던 접근 방식을 읽었다. 한나 아렌트는 특히 (정치)철학, 그리고 그녀의 삶의 맥락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서양)현대사, 홀로코스트 연구(Holocaust studies), 유대인 연구(Jewish studies) 등에서 알려진 인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거의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 같은 경우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을 포함한 몇 권의 국역본을 갖고 있지만, 꽤나 많이 알려진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의 마지막 장 정도와 <정치의 약속> 일부를 읽고는 너무나 읽기 뻑뻑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주목 받고 있는 (독특한(?)) '아렌트'에 대해서는, 랑시에르 같이 한국에서 '최신 유행'인 이들의 글을 읽어서, 대략적으로만, 아주 간략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우파'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안티-페미니스트'로서 평가받던 아렌트가 최근 들어서 왜 이렇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만(이에 대해 다룬 글을 읽은 적 있다)... 이는 오늘 끄적이고 싶은 주제가 아니므로 패스.
어쨌든 이 개론서의 저자는 정치철학자로서의 아렌트가 아닌, 문학 연구의 맥락에서 아렌트를 읽자고 제안한다. 아렌트가 문학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서사(literary narrative)를 말이다. 심지어 아렌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어떠한 철학도, 의미의 강렬함과 풍족함이라는 측면에서, 잘 서술된 이야기(properly narrated story)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기존의 고전적인 정치 개념으로는 당시에 새로이 등장하던 유례없는 전체주의ㅡ나는 이를 어떤 현대 철학자가 그랬듯 '절대 악'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ㅡ를 이해할 수도 없으며 심각한 왜곡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그녀의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듯, 예술과 서사, 그리고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는, '이론(theory)'에 대한 불신, 내지는 '이론'의 '몰락'이라는 특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 있다. 조금 현대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테리 이글턴이 지적했듯(그러나 약간은 새삼스럽게도), 특히 21세기 초의 엄청나게 급격한 변화를 겪는 전지구적 상황의 맥락에서, 이론과 이론가들은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춰가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미국적인 상황에서 이론은 쉽게 낡은 것이 되거나 현실과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 역시도 당시 현실에 도래하고 있었으며 이미 도래했던 전체주의와 근본주의를 목격하면서, 이론과 서구 철학의 죽음을 읽었다. 간단히 말해 서구 문화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정적인(static) 이해 모델인 반면ㅡ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ㅡ, 스토리텔링은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모델이다. 특히 아렌트는 그녀의 선생이자 연인이기도 했던 모 철학자가 1930년을 즈음하여 나치에 가입했던 유명한 사건을 두고도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토록 철학적 명민함(subtlety)을 가진 사람이, 나치 정권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들을 갖지 못했다는, 그 놀랍지만 놀랍지 않은 선명한 대조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 2000년을 내려온 서구 철학 전통의 추상적 이론화 경향이 어떻게 공적 세계와 사유행위 그 자체에 폭력을 가해왔는지 의문을 쏟아 놓는다.
그에 반해 스토리텔링은 전통적인 이론들이 읽어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젖힌다. 아렌트에게 스토리텔링은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비극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스토리텔링은, "정의의 오류(the error of defining)"를 저지르지 않고 다른 의미들을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은 지식인의 '독백'에 가깝고 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언제나 편집증적일 수밖에 없는 '이론'과는 달리, '커뮤니티community'를 가정한다는 점에 아렌트는 주목했다(커뮤니티를 흔히 하듯 '공동체'로 번역하는 것은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를 심각하게 제한한다는 생각이다. community는 commune이라는 동사에서 볼 수 있듯, 친교와 교제와 우정과 공감의 의미도 함께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동체는 '하나의 신체'라는 뜻이다. 너무나 낡고 진부한 유기체적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온갖 위계질서와 기능주의적인 설명이 덧붙여진다. 심지어는 '한 솥 밥을 먹고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식의 가족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이해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즉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the teller of the story)", "(이야기 속) 행동의 행위자(the hero of action)", "그 이야기를 심판하고 이야기에 반응하는 청자 혹은 독자"를 늘 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론으로 설명되면 이해될 수 없는 사건들이,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형상으로 묘사되면 더 넓은 청중과 커뮤니티에 의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 즉, '인지가능한(intelligible)' 사건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를 참조하여, 그녀의 정치적 이상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문학적인 방법들에 주목한다..
아렌트의 책을 제대로 읽은 바 없는 나로서도,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아렌트의 사유 체계를 부분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쉽게 지우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아렌트의 이러한 접근은 '정치적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스토리텔링 행위는 '현실' 자체의 문제에 개입하고, 그 지평을 이해함과 동시에 확장(내지는 그 지평 자체의 붕괴)을 시도하려는 끈질긴 노력의 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지배적인 상징 체계에 저항함으로써ㅡ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공포를 증언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우파적인 수정주의적 입장은 얼마나 끔찍한가?ㅡ잊혀져 가는 오랜 기억들을 잊혀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스토리텔링과는 전연 다른 차원의 스토리텔링일 것이며, 김연수가 얘기한 바 있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스토리텔링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와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은 나로서는 매력적이었다. '이론'이냐 '현장'이냐 하는 식의 이분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이론'에 많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말이다. 또한 나는,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문학적 글쓰기'라고 믿고 있다. 또한, 피에르 마슈레 식으로 말하면, 한 작품 혹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 뿐 아니라, 작품 내지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고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이, 주위의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면서 평생 공부하는 사람들의 임무라면 임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서사, 내지는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러한 내 믿음과 연결되는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우기 힘든 고민들이 남는다.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정치적인 실천이 될 것인가? 어떤 스토리텔링이 '정치적'인가? '정치적' 스토리텔링을 규정하는 속성을 우리는 정의할 수 있는가? 만약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쉽게 정의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이라고 '느끼는가'? '정치'란, 바디우같은 이들이 말하듯, '메시아적'이고 '섬광'과도 같은, 그런 급진적인 단절/도약의 순간, 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윤리적 명령을 가진 어떤 '사건에 충실'하면 되는 것인가? 거기에서 스토리텔링의 위상은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많이 필요할 것 같으므로 패스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어떠한가. 어떻게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이미지화되거나 스펙터클화되지 않고 그 자체의 유효성과 독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을 정도로 홀로코스트 역시도 자본주의의 엄청난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 만화 등은,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고유한 사건 특유의 정서적 소통 능력을 갖지 못하고, 하나의 끔찍한 사건, 혹은 구경거리로 전락해서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저 먼 곳에서 일어난 어떤 비극'이라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했듯, 드보르로부터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사람들이 늘 말해온 바대로 어떤 사건이 이미지화되고 스펙터클화되는 과정에서, '지시체referent'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70년대 흑인 혁명노동자 연맹(the League of Black Revolutionary Workers)의 디트로이트에서의 일시적/부분적 승리와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짤막하게 분석하면서 이야기했듯 말이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은, 애초에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결국엔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 외에 몇 가지는 생략... ;ㅅ;
덧) 만약 정말 아렌트가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를 참조했다면... 나로서는 웃음만 나올 일이다 ㅋㅋ 왜냐면 내가 학부 시절에 가장 읽고 싶었지만 가장 읽을 수 없었던 책의 주인공들이 바로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이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은 단어와 문법 양면에서 모두(바다와 어선에 관련된 '끔찍한' 어휘들을 보면 알 것이다. 심지어 허먼 멜빌 작품용 딕셔너리도 있다-_-;;), 콘라드는 문법의 측면에서 읽기 너무 힘들고 뻑뻑했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는, 지금 내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탐색하고 조사하고 해부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기에... 결국 다 포기하고 국역본만 읽었다네~ㅎㅎ 아렌트의 책들이 뻑뻑한 이유도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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