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서 온기가 빠져나간다.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낸다. 우리는 공공연한 저항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저 은밀한 저항을 극복하는 엄청난 일을 행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이 말은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것과 맞물려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우라는ㅡ조악하게 구분하자면ㅡ 주관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만약 아우라가 사회역사적인 조건위에서 가능하다면, '아우라의 상실'은 특정한 물적 기반이나 생산 기반, 혹은 여러 제도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조건 위에서 아우라의 상실은 불가항력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 선택지가 남는다. 아우라가 살아 있던 과거ㅡ아우라의 상실 이전ㅡ를 동경하거나, 혹은 아예 아우라라는 경험 자체를 포기하거나. 이런 세계에서 아우라의 상실을 거부하는 행위는, 어디선가 니체가 구분한 3개의 역사관 중에 '기념비적 역사관'(영화로운 과거가 현재에도 재생될 수 있다는, 혹은 재생되어야 한다는 회고적/복고적인 관점)이나 '골동품적 역사관'(과거는 단지 과거의 냄새를 풍기는 문화재와 다름 없는 그 무엇이다)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영성주의 운동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탁월한 수집가 혹은 미술관/박물관의 열정적인 관람객이 되거나.

그렇다면 우리는 아우라의 상실을 기어코 인정해야 할까? 무한한 복제가능성, 무한한 생산과 소비의 연쇄 속에서,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내"는 과정을 인내해야 할까? 상실된 아우라를 애도하고 한줌짜리 체험을 하기 위해 한가람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지에서 개최하는 12,000원짜리 전시회에 가야할까?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우라는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혹은 주관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앞서 언급한대로 사회역사적인 조건이 아우라의 상실을 결과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겐 얼마간 주관적인 조건으로 돌아와 볼 수 있다. 너무 많이 읽혀 말하기도 민망한 시지만 김춘수의 시 <꽃>은 이를 잘 예시하지 않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이런 명명(naming)작업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퇴근길에(아 5개월만 더 참으면 돼) 소가 살고 있는 외양간을 지나야 한다. 얼마 전엔 귀여운 송아지까지 낳았다. 지금까지 소 가족은 단지 껌뻑이는 그 큰 눈들이 예뻤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소 두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를 본다면 어떨까? 수컷은 얼럭소고 암컷은 누렁소다. 얼럭소는 새앙뿔이다. 새끼는 아직 엇송아지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언어가 점점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간주되는 상황에서 다채로운 명사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오죽하면 (이를테면) 300개 표현만 알면 70% 정도의 일상 회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책까지 나올 정도일까. 한국어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많은 명사가 있다. 정말 찾아보기 전엔 몰랐을 뿐이다. 명사를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는 건 아우라를 경험하고 사물에 온기를 보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아닐까 싶어진다. 사물의 빛은 사물을 지칭하는 적확한 언어를 찾을 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사회역사적인 아우라의 상실과는 관련없이 주관적으로 그러나 상호주관적으로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 흐이... 소설가들이 좀 더 분발해줬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한글 단어 모음 스크랩을 위한 뻘글이었고 그렇다면 이쯤에서 역시 ctrl +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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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예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스크랩 했던 건데, 우연히 발견해서.. 예전엔 참 재밌게 읽었는데. 언젠가 다시 읽고 싶어지지 않을까해서 여기에도 옮겨둠 +_+


마초이즘은 현재 한국 남성(+일정 나이 이상의 여성)의 정신구조에서 끈질긴 고착성과 감염율을 보이는 문화(文化) 유전인자(遺傳因子)이다. 이 인자(因子)는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점유하지 못한 모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이 인자의 영향력 바깥의 사유를 구경하지 못하고 산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대학시절의 일부 기간 동안 페미니즘이라는 반마초적인 문화 유전인자의 세례를 받는다. 이것의 고착성과 감염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흘러야 논의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이 안티-마초 유전인자는 마초 인자의 세례로부터 사람들을 막아낼 만큼 많은 시간동안 사람들을 점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자(文字) 유전인자로의 페미니즘은 마초이즘 보다 수만 배의 성공적인 증식(增殖)을 이루고 있으나, 문화 유전인자로서의 페미니즘은 아직 마초이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여하튼 중요한 건 일반적인 사람들은 마초이즘이 뇌수 하나하나를 다 끄집어내서 축축하게 담글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그것의 영향력 안에서 보내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초이즘이라는 인자가 항구적인 존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다른 문화 유전인자에 편승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마초이즘의 강력한 고착성과 감염율 덕에 이것은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변종(變種)을 만들고 있기에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지금부터 이것을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마초이즘의 다양한 양상들을 "계통 발생"이라고 부르자. 아래의 예시는 필자의 경험에서 나온 실례이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께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다른 표류물들을 덧붙여 주면 감사하겠다.

* 해악도는 무한소를 0, 무한대를 100으로 지정, 상대성을 숫자화했다.
* 계산은 일반적인 평균치를 기본으로 했으며, 편차가 너무 클 경우 계산을 포기했다.
*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편의상 계통이 아닌 개체로 표류물들을 분류했다.
* 이 고찰은 문화적 표류물들에 초점을 맞춰 그 숙주(=마초)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 이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증상을 알고 싶은 분은 타인에게 부탁해 주시길 바란다. 자기진단은 짜가다.


A 부류
온순한 마초 (비교적 독성이 적은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0-20

1. 마초 메저키스트(피학성 변태) 자기억압형
"나는 마초가 아니양....."
해악도 5.
자신의 마초이즘을 부정하면서 발병을 억누르고 있다. 가끔 자신의 마초성이 드러날 경우 "술취해서" "흥분해서" "화나서" 그랬다고 깨끗이 사과한다. 이 말을 대충 믿어주는 것이 인간관계를 위해 편리하다. 본인 스스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다른 이들에게 나쁘지는 않다. 다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2. 마초 커밍아웃 자기억압형
"저 마초 맞습니다...."
해악도 10.
내면의 마초이즘을 인정한 후 치유 혹은 확산금지를 위해 노력하는 주의. 가장 건전하고 발전가능성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다수는 현 상태에 체념을 하는 동시에, 다른 마초들에게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기에 발전이 정체된다. 낙제점 조금 넘는 점수로 학급 1등이라고 기뻐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소심하다고 판단되면 "마초 커밍아웃 자기발산형"으로 진전할 가능성이 있다.

3. 마초 의무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조건 없이."
해악도 15.
순수 마초 부류 중에서 해악도가 가장 낮다. 마초의 덕목 중에서 권리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의무에만 "싸나이"의 근성을 걸고 정진하는 부류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죄"로 스트레스를 주긴 하지만, 그 이상의 혜택이 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나, 아쉽게도 숫자가 많지 않다.

4. 마초 커밍아웃 자기발산형
"나 마초 맞다. 그래서? 죄만 안 짓고 살면 되지."
해악도 20.
1번 2번 3번 유형에 비해 좀더 많은 숙주를 보유하고 있는 인자이다. '죄만 안 지으면 되지'라고 말은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나쁜 짓 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에 다른 인자만 덧대어 가지고 있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말도 통하고 잘 지낼 수 있다.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사람이다.) 만약 친구가 대단히 섬세하다면, "무의식적인 나쁜 짓"을 지적해서 이 부류에게 정신적 혼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2번에서 발전해온 부류는 이제 그런 공격에 끄떡하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적 기준이 있어서 이 이상 수준으로 발전 안 하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B 부류
: 짜증나는 마초 (어느 순간 대화의 단절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21-50

5.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표현형
"글쎄, 그냥 편견없이 생각해도 여자애들이 별로 안 잘났더라구."
해악도 25.
사회적 요건 쏙 빼놓고 판단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자기들이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부류다. "지금 현실"의 상황을 분석하며, 가능한 상황을 상정해 보지 않는다. (가령 문화적 편견 없이, 똑같이 교육시키면 그래도 "여자애"들이 별로 안 잘났을까라는 문제.) 실제로 얼마나 잘난 놈이냐에 따라서 내공 수위가 결정된다. 별로 안 잘난 놈은 잘난 여자에게 초전박살나고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방어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더 품위 있는 축은 잘난 여자를 발견하면 이 유형에서 깨어난다. (명탐정 셜록 홈즈를 생각해 보길.)

6.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방어형
"너와 내가 불평등한 건 성(性) 문제가 아니고, 개체의 능력 문제야."
해악도 30.
4번 유형이었다가 잘난 여자에게 박살난 후 원한을 품고 온 부류와, 성결정론을 옹호하기를 포기하고 개인적으로 체화한 부류의 연합이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객관적으로 "잘남"을 평가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잘남"을 확인하려 들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여성들의 발언권과 자기 표현기회를 교묘하게 억압한다. 자기 말 다 외치고 마이크를 끄는 건 이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앞에서 폼잡고 뒤에 가서 사정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아줌마"의 오일권을 상기할 것.) 자기표현형은 가끔 하는 짓이 귀여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 부류로 넘어가면 주위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상승한다.

7. 마초 로맨티스트
"아, 수컷의 섹시함이여, 영원하라!"
해악도 35.
상당히 자생적인 부류이다. 이들은 주로 문화예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난 남자다"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거나, 영화 "친구"를 보며 의리를 다짐한다든지. 일부는 락 매니아Rock Mania와도 결합되어 있다. 개인주의적인 마초 로맨티스트의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그닥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깊숙한 대화를 나누다가 어긋나는 부분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8. 마초 논리주의자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다 해결되지 않겠어?"
해악도 40.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는 의지는 있는데, 그 능력이 수반되지 않는 부류의 증상이다. 이들은 동태 상황과 정태 상황을 구별 못하며 (이 점에선 나르시스트들과 같다. 그런데 나르시스트들이 개인적인 면에서 이 분석을 중지하는데 비해, 이들은 그것을 사회수준에까지 끌어들인다. 가끔 일부 나르시스트들이 이 부류로 "진화"한다.) 가능하는 논리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논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마초 다위니스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9. 마초 순수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대신 넌 요리해."
해악도 45.
마초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 모범적인(?) 마초 부류이다. 그래도 능력있는 녀석들의 경우 바깥일은 신경 안 써도 확실하고 화끈하게 처리해준다. 단순반복노동에 취미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면 큰 해악을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이들은 설득이 힘들다. 그러나 딸을 낳은 후 딸이 이뻐서 부엌에 들어가는 경우는 있다. 딸이 조금 잘났을 경우 극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평균값쳐서 해악도를 45로 계산했다.

10. 마초 중심주의자
"나는 마초도 싫지만, 극렬 페미니스트들도 싫어."
해악도 50.
이들의 중심을 잡으려는 의지를 고려하여, 딱 중심에 위치하는 해악도를 선정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 것이다. 이들은 보통 자신들이 대립하는 두 사물이 있을 때 딱 중간에 위치한다고 야무지게 착각한다. 실제로도 이들이 대립하는 두 사물의 중간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통 만유인력의 법칙을 받아들여 질량이 큰 쪽에 가까이 있다. (간단한 수학계산을 해보면 이들의 입장이 어디쯤 위치해 있을 지 알 수 있다.)


상편을 서술한 후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몇몇 독자 분들로부터 제보를 받을 수 있었다. 성원에 감사드린다. 또 몇몇 분들은 상편을 보고 상심했다고 하는데, 상편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분들은 대단히 건전한 분들이기 때문에 안심해도 되겠다. 이제 해악도 높은 마초들을 다룰 차례다. 이들에 비하면 상편의 마초들은 "마초도 아니"다. 슬슬 시작해 보기로 하자.


C 부류
위험한 마초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51-80

11. 마초 근본주의자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여자애랑,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남자애들 재수없더라. 그게 뭐람?"
해악도 55.
남성성과 여성성을 분리하고, 생물학적 성이 반드시 문화적 성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심리다. 문화적 성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한 남성 혹은 여성, 그리고 성적 소수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휘두른다. 완곡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축과,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는 축이 있다. 그래도 제대로 지적해 주는 친구만 있다면 독성을 상당히 뺄 수 있는 부류이기도 하다. 독성이 빠질 경우, 자신의 의견이 편견임을 알면서도 머리의 인식("저래도 돼.")과 가슴의 감정("재수없다.")의 괴리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된다. 최근 하리수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이 역 괴리(머리="재수없다." 가슴="꼴린다;;;") 현상을 보이며 이 증상에서 구출되었다는 설도 있다.

12. 마초 비교우위론자
"내가 집안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니가 훨씬 더 잘하잖아? 사람이 잘하는 일을 해야지."
해악도 60.
이들은 자신이 가사노동에 소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남성들이 잘하는 일, 망치질이나 가구 운반을 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일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 중 일부는 단순반복노동의 품위없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설하지만, 대다수는 조용히 이렇게 외친다. "시범을 보여줘." 그리고 대단히 나쁜 학생이 된다. 이들의 나쁜 성적이 소질없음에서 연유하는지 의도적인 태만에서 연유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의도추정을 해선 안되겠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들이 집안일을 지지리도 안한다는 것이다.

13. 마초 도덕주의자
"여자도 담배 필 수 있게 해달라구? 세상에, 허파 시커매지는 것도 평등이니?"
해악도 65.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남성은 그 엄격한 도덕률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폐암 발병률에 대한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똑같은 짓을 해도 왜 누구는 묵인받는데 왜 다른 누구는 비난받느냐다. 이들은 이 문제를 회피하고, "이제부터" 그 엄격한 도덕률을 남성들에게 적용할 거라고 주장한다. 혹은, 남성들이 어기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여성들이 같이 어겨야 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대충 맞는 말이긴 한데, 역시 위에서 말한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다.) 그 근저에는 "욕망"을 여성성에 결부시키고, 그것에 "절제"라는 금제를 뒤집어씨우는 오래된 문화적 관념이 숨어있다. 이 점을 파헤쳐줄 경우 극히 일부가 교정의 가능성이 있다.

14. 마초 다위니스트(자연선택론자)
"인류의 역사를 통해 언제나 남성이 우월한 성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해악도 70.
힘의 논리 이외의 도덕윤리를 체화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이 들러붙는 표류물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우월이 단지 "힘의 우월"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정태성만 보고 동태성을 보지 못하던 마초 나르시스트, 마초 합리주의자 들이 진화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다. 이들은 힘의 논리 이외의 도덕윤리를 체화하고 있지 않기에 윤리적으로 설득하기가 무척 힘들다. 여성성이 더 우위에 있는 일부 문화인류학적 자료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승리는..."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조금 치사하지만 침팬지와 보노보 등 유인원의 사례를 들이미는게 훨씬 효력이 있다. 즉, '침팬지는 암컷이 따로따로 노니까 막 두들겨 패던데, 보노보는 암컷이 연대하니까 함부로 못 패더라, 그러니 여권운동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약자 두들겨 패는 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겨우 납득을 하는 부류다. (그래도 이건 세계관의 문제라 잘 치유가 안된다.) 이들이 인류역사에 "끝까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오래살며 두고 볼 일이다.

15. 마초 부도덕주의자
"너는 왜 그렇게 고루하니? 좀 만지면 어때서."
해악도 75.
마초 도덕주의자는 이들에 비하면 천사다. 성윤리 해방운동을 남성의 이득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문화인자이다. 이 부류의 극한은 인습과 도덕을 우습게 여기는 "문화혁명가"이며, 이 위대한 과업에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동참할 것을 "여성 동지"들에게 요구한다. 이 부류의 일반은 여자친구들의 고루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당신의 여자친구, 당신의 딸, 당신의 아내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이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논리의 일관성을 지키는 연습을 끊임없이 시키면 구제의 가능성이 있는 부류이다.

16. 마초 소피스트(상대주의자)
"마초라는 말은, 여성이 자신이 싫어하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해악도 80.
한국 땅에서 남녀차별이라는 현상이 없고, 이미 여남 평등의 과업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될 것이다. 혹은, 그러한 "현상"이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그러한 일이 어째서 "과업"인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일 것이다. 첫째, 이 부류는 구제의 여지가 없다. 둘째, 이 부류와는 여성에 대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셋째, 이 부류는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과 결부할 가능성이 크다. 넷째, 이 부류는 서술할수록 서술자가 괴롭다....


D 부류
사악한 마초 (주변 사람들을 심각하게 다치게 하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80-100

17. 마초 권리주의자
"난 남자고, 남자는 하늘이고....."
해악도 85.
"마초 의무주의자"의 반대. "마초 의무주의자"(해악도 15)와 이 "마초 권리주의자"(해악도 85)를 섞은 것이 바로 "마초 순수주의자"(해악도 45)인데, 그 평균이 그래도 "의무" 쪽에 치우쳐진다는 점에서 "마초"의 따뜻함(?)을 찾아야 할까? 여하튼, 이 부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초",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능력없는 가부장이며, 실속없는 폭군 남편이며, 여성들을 억압하는 직접적인 기제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떠받들여 주기를 바라지, 그들을 괴롭히면서 쾌감은 얻지 않는다는 데에 지고의 악, "마초 사디스트"와의 차이점이 있다.

18. 마초 사디스트
"........."
해악도 95.
이들은 "말"이 없다. "폭력"은 동원될 수도 동원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은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더 이상 서술하지 않는다.

19.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
"나는 마초가 아니다. 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이다."
해악도 100.
지고의 악, "마초 사디스트"의 해악도를 능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 이들은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이다. 자생적인 부류와, 가장 해악도가 낮은 마초인 마초 메저키스트 자기억압형에서 발전한 부류가 있다. 이들은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아마도 이들은 쿨한 남자친구, 그럭저럭 괜찮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 이들은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인 파급력으로 무한대의 해악도를 발휘한다. 마초이즘의 땅, 대한민국에서, 마초이즘은 자신의 유일한 적인 "페미니즘"인자에 기생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이것은 마초이즘의 표류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도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인자의 전염력은 대단히 높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온갖 마초 짓을 다 하면서도 마초성을 인정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를 가르치려고 들거나, 페미니스트에 합류한 마초이즘, 마초 생존술의 극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F 부류
상대적 마초 (해악도 측정이 힘든 마초이즘의 표류)

20. 마초 귀차니스트
"내가 너 무시해서 일 안하냐....귀차나서 안하지....."
해악도 측정 불가.
귀찮아서 안 움직이는 마초이즘의 표류. 여자친구가 얼마나 부지런하냐에 따라 해악도가 천차만별이다. 만약, 여성 역시 귀차니스트라면 가사 분업은 완벽하게 이룩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결벽증이라도 있다면 마초 귀차니스트는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하게 여성을 착취할 것이다.

21. 마초 니힐리스트
"남녀 평등? 난 원리는 안 믿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해악도 측정 불가.
어떠한 도덕윤리도 믿지 않는 마초이즘이다. 그러나 "마초 다위니스트"와는 달리, "힘의 윤리"에도 감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시 해악도가 천차만별이다. 여성분들께서는 이 부류의 남성을 만날 경우 "마초 다위니스트"로 빠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상대해야 겠다. "그래, 남녀평등하라는 법 없지. 근데 남녀차별하라는 법도 없잖우?" "어, 그건 그러네." "그러니까 원칙을 일단 제껴두고 생각한다면, 우리 둘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만들면 되겠지?" "어, 그것도 그러네." "그럼 그런 방법을 찾아보자." "어, 그래." 이 부류의 해악도를 줄일 수 있는 필승해법이다. 이들을 위해 잠시 "유물론자" + "쾌락주의자"가 되시라.


후기
여성분들께는, 이 현상을 희화화시킴으로써 문제를 가볍게 본다는 느낌을 드린 것에 대해 사죄드린다. 이것은 농담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분들은 뒤의 사과를 보고 필자의 의도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뒤의 사과는 이런 것이다. 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 마초분들께는, 이견이 있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는 "유머"라는 형식으로 이렇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으로 여러분을 비난(!)한데 대해 깊은 사과를 드린다. 필자의 의도를 알았다면 반박하지 마시길. 사실 많은 남성들이 이글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언짢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언짢음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찾아보지도 않고 화낸다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땅에 사는 마초로써, 나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리의 일단을 상기하게 하는 곤란을 겪게 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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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대 한미동맹?  (7) 2008/12/10
기사 하나  (2) 2008/12/01
Posted by 비앙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중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간혹 서울을 떠났지만 매번 곧 돌아왔다. 도시 전체가 옛 시대의 유산인 곳이나 빼어난 절경을 가진 곳에서도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내 서울이 그리워졌고 돌아오면 안도했다. 서울이 전적으로 태평하고 무사한 도시여서가 아니었다. 대개의 삶이 그렇듯, 그런 날은 일부에 불과했다. 안도감이나 그리움은 서울을 벗어나 있을 때에나 가능했다.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서울은 나와 가장 닮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 편혜영, 「크림색 소파의 방」서문(???), p. 211


그 도시는 나의 유년시절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철없이 논다.

- 윤성희,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서문(???), p. 184



소설집을 들춰보다가 어쩔 수 없이 깊이 공감하게 된 문장. 그랬다. 안도감, 그리움은 서울에 있을 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철없이 놀 수 있었고 철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덧붙여 편혜영씨의 말에 토를 조금 더 달자면,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하기만 한 나와 가장 닮았을 뿐 아니라,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나를 가장 받아들여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을 배경으로 <테마 소설집>이 얼마 전 나왔다. 나로서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로 읽혀서 책을 샀는데 솔직히 말해 서울은 너무나도 '서울'이기에 다른 문학에서도 충분히 서울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특별히 이 소설이 '서울 테마 소설집'이라고 느끼진 못하겠다. (난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인터넷 그림을 볼 땐 소설집의 '쿨'하고 '감각적인' 북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첫 인상에 비해 쪼오금은 실망할 수밖에.

소설집에서는 '서울성(性)'이랄까 'seoulness'랄까, 하는 무언가에 대한 직접적인 사유를 읽어 내기 힘들었다. 내가 기대했던건 어쩌면 이것이었을테다. 다시 말해, 결국 내가 가진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에 합치하는 소설은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조각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면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어떤 총체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이게 곧, 서울인가?). 내 소설 편식증 때문에 전혀 읽히지 않는 소설도 있었고.. 조금은 아쉽다.

그래도 일단 잘 읽히고 재밌는 소설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건졌다. 몽땅 필사해 뒀다는! ^^

Posted by 비앙

6. 9 작가 선언

스크랩 2009/06/0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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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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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출처 : 씨네21 [070330]

약자의 테러, 강자의 전쟁

사랑이나 전쟁은 상대방의 존재가 자기 인식과 깊이 연결해 있어서 본래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모순된 행위다. 우리-속국-동맹-적은 나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지 배타적 범주가 아니다. 나-연인-연적도 마찬가지다. 자타 경계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저런 인간에게 목을 맸단 말인가”라며 사랑이 끝난 뒤 자기 모멸감으로 괴로워하고, “겨우 계집애랑 붙으란 말이냐”, “세계 최강을 상대로…” 식으로 모든 싸움에서 상대의 ‘체급’을 확인한다.

군수산업체나 안보 국가처럼 전쟁이 존재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정체(政體??)들은 언제나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파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모순어법이 등장한다. 대개 전쟁사는 “몹쓸 놈들(적)이 우리를 침략했지만, 우리는 용감하게 맞서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화’시에는 적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만, ‘전시’에는 전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일부 보수층이 북한에 대해 절대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도 (공격자는 방어자보다 최소 3배 이상 전력의 우위가 있어야 하는데도) 남침 가능성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나,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으스대면서도 파괴할 건물조차 남아 있지 않은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그런 예이다. 그래서 전쟁은 히스테리일 수밖에 없다.

동양의 선현들은 ‘지혜’가 있었는지, 아예 처음부터 이러한 모순을 간파하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침략 행위에 등급을 매겼다. 수직적 불평등 문화인 유교권에서 전쟁은 정(征), 토(討), 취(取), 침(侵), 습(襲), 벌(伐), 전(戰) 등으로 나뉜다. ‘전’(戰), ‘적국’(敵國)은 동등한 정치집단간의 무력 충돌에만 사용하며, ‘찌질한 오랑캐들’에 대한 무력 행위는 나머지 용어로 지칭했다. 강자의 폭력은 침략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벌(罰)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남의 것을 훔치기 위해 폭력을 쓰면서, 약자를 치는 자기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다” 표현하지 않고 “너를 혼내고 취(取)했다”는 언설의 정치학은, 강자의 전쟁론에 저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가정폭력 가해 남편이 아내 구타 행위를 “때려서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모두, 강자가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사망한 고 윤장호 하사를 추모하는 거의 모든 언론 보도와 여론에서, 텔레반의 자살 폭탄 “테러”와 이에 맞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폭력 자체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미국 정부의 공격은 ‘정의의 전쟁’이고, 텔레반의 공격은 ‘악당들의 테러’란 말인가? 텔레반도 그들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 중이다. ‘테러’와 ‘전쟁’은 이미 위계적이다. 전쟁은 정당하고 떳떳하며 심지어 영웅적 혹은 자기희생적인 어감마저 풍기지만, 게릴라전이나 테러라는 표현은 뭔가 도발적이고 비겁하며 뒤통수친다는 느낌을 준다. 약자는 전면전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약자는 상대방을 히트 앤드 런(치고 ‘도망가는’)할 수밖에 없지만, 강자는 어디서나 치고 점령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도망갈 필요가 없다(미국은 현재 전세계 144국에 46만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강자의 폭력과 탐욕을 정상화하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도 문제지만, 윤장호 하사를 추모한다는 일부 여론이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면서 미국의 시선에서 아프간 ‘테러 세력과의 전쟁’을 독려하는 것은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도 “미국의 치어걸”, “부시의 애완견”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판에 국제사회에서 한·미 동맹을 평등한 ‘동맹’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게다가 군수자본이 주물럭거리는 현대전에서 동맹(同盟), ‘하나의 맹세’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난센스다. 연인 사이에서든 국제정치에서든 이해관계가 다른데, 어떻게 사랑의, 동맹의 맹세가 성립하겠는가. 한국이 스스로를 제국의 일부로 착각하는 이러한 부풀린 자아는, ‘국익’도 ‘평화수호’도 ‘안보’도 아닌 보기 민망한 식민성일 뿐이다. 우리의 자발적인 식민주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적으로 상상된 누군가를 살상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윤 하사는 이러한 우리를 대신한 희생자였다. (정희진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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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출처 : 씨네 21 [06.09.29]

자주국방 대 한미동맹?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한국사회 내부의 성별, 계급, 지역 등 권력관계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성희롱은 ‘sexual harassment’의 번역인데, 여성의 시각에서는 오역에 가깝다. ‘harass’는 의도를 갖고 반복적으로 괴롭힌다는 뜻이지만, 장난과 비슷한 ‘희롱’으로 번역되면서 의미가 사소화되었다. 말 자체가 특정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데다, 한국 실정과 안 맞는 경우도 많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대표적이다. 노사관계 선진국과 달리 한국처럼 사회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유연성은 “사용자 맘대로 해고”를 미화할 우려가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시장이 ‘경직’된 것이 나은데, 경직성은 유연성보다 어감이 나빠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97년 대선 때 이인제 후보는 노동시장을 “딱딱하게” 하겠다고 공약한 적 있다).

부시 대통령은 2000년 당선되자마자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을 추진했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다. 유연성의 핵심은 자유롭고 빠른 이동이다. 미군을 특정한 국가에 붙박이로 주둔시키지 않고, 언제든 출동 태세를 갖춰 세계 곳곳에 신속하게 파견해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駐日)미군은 극동 지역을 넘어 중동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주한미군은 더이상 북한 대비용이 아니라 중국과 대만 갈등에 개입하는 등 동북아시아를 분쟁지역화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부시 행정부의 관점에서 유연한 것이지, ‘침략을 받는’ 지역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그만큼 신속하게, ‘저항없이 유연하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폭력과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라면, 늦게 도착할수록 아니,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닌가?

전시 군 작전권 환수를 자주국방이냐 한미동맹이냐로 논하는 것은 현실 왜곡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자주국방’도 ‘한미동맹’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전권 환수=한미동맹 약화=안보 공백”이라고 아우성치는 보수 세력의 무지와 시대착오는 비판하기에도 기운 빠지는 일이다. 이들을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주한미군 주둔 이유가 북의 남침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북침 계획을 억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현재 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9배가 넘어 북한의 GNP에 근접할 지경이다. 방위비 외에도 남한은 북한보다 국민소득 33배, 무역 규모 155배이다. 1994∼98년 무기 수입은 남한 세계 4위, 북한 70위 밖이었다. 지난 10년간 남한의 무기수입비는 북한의 37배였다.

평화네트워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등 많은 전문가 집단이 지적했듯이, 군 작전권 이양은 군사주권 문제라기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국의 필요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탈냉전의 도래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원래 미국의 안보 세력과 군수 자본가에게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 체제의 목적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라는 가상/‘실제’의 위협을 강조하여 전세계에 군사적 긴장을 창출하고 억압적인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 것, 그래서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전쟁 국가의 목표는 승리(전쟁의 끝)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련이라는 공식적인 ‘적’이 사라진 뒤,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 같은 새로운 적을 지목했다. ‘적’이 없다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팍스 아메리카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러와의 전쟁은 적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하고 싶어서’ 하는 임의적인 전쟁이다. 미국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영구 전쟁(permanent war)이다. 미국이 영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맹국’의 협조, 즉, 비용 분담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비용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한국이 제시한 2012년보다 빠른 2009년경에 작전권을 이양하겠다는 등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 작전권을 “빨리 가져가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뭐가 ‘자주국방’이란 말인가?

작전권 환수가 국방비 증가로 이어진다면, 이는 한국이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계획대로 “주변국(북한)을 위협하는” 지역 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자주국방은 주권국가의 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군대를 통한 국민국가 완성 의지가 아니길 바란다. 부국강병 욕망은 (‘자주’를 위해 극복해야 하는) 미국 모방일 뿐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전쟁 위협에 시달리는 국가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의 선제공격을 두려워하는 북한이다. 지난해 참여정부가 주장한 대로, 한국이 미국과 동등한 ‘동북아 균형자’가 되는 길은 군사비 증강이 아니라 외교력과 민주화, 문화 역량 같은 소프트 파워를 통해서 가능하다. 더이상의 강병은 침략 행위다. (정희진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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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기사 하나

스크랩 2008/12/01 18:59

'퇴근'할 때쯤 스트레스를 잔뜩 받을 일이 있어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를 켜니... 역시 암울한 뉴스 뿐이네. 사실은, 어디까지나 그냥 '암울한 뉴스'일 뿐이다. 별 다른 깊은 내용도, 미더운 내용도 없이 그냥 어두운 기운만 마구 흩뿌린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렇게 인터넷을 떠돌다가 프레시안에 비교적 깔끔하게 잘 정리된 글이 올라왔기에 링크. 여지껏 헷갈렸던 일들도 좀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다 읽고서 누가 썼나 싶었는데, 장시복씨가 쓴 글이었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201095028&Section=02 [새창으로]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그저 손 놓고 이렇게 인터넷만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우울해지네..


덧) 태그 쓰다가 느낀건데... 이게 반드시 '경제'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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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EBS 지식채널ⓔ - [버튼을 누르지 않은 이유] 스크랩




"피실험자들이 실험자가 내리는 명령에 반항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인성이 아무리 정의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시민들이 만약 옳지 않은 권위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그들 역시 인간의 야만성과 비인간적인 태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탠리 밀그램 (이 실험의 호스트)


심리학개론 수업 들으면 종종 언급되는 이 '유명한' 실험이 얼마나 올바른지 얼마나 적합성이 있는건지 얼마나 현실적용성이 있는 건지 하는 문제들은 일단은 (이 실험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니) 차치해두자. 어쨌든 스탠리 밀그램의 결론은 나름대로 유의미한 것 같다.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나온다는 라이히의 분석처럼.

그러나 밀그램이 "권위자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권위자와의 관계를 단절"해도 '안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절"하는 건 엄청난 영웅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나의 양심에 비추어보았을 때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권위자의 권위와 '나'를 분리시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단절" 행위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불이익들을 감수하는 일들은 오로지 개인에게 맡겨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단절"은 권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권위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권위를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곧 '배신'이기 때문이다. '배신'. 그로인해 '배신자'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왜소한 개인에게 일종의 주홍글자의 낙인으로 부여된다. ㅡ물론 예컨대 '장기수' 같은 경우에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한겨레신문사에서 나온 <배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서점에서 살짝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예전에 '삼성'의 내부를 낱낱이 고발했던 한 변호사의 글, 그리고 정신의학 전공의의 글을 읽었다. 이중 후자의 글은 재밌게 잘 보았다. '배신'이라는 말의 심리학이랄까. '신뢰'란 건 어쨌거나 정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ㅡ한번 '배신'이라는 말로 낙인이 찍히면, 그리고 그것이 널리 한 커뮤니티에 일종의 서사적 권위를 지닌 채 전달이 된다면, '매장' 당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양치기 소년 우화, 박쥐 우화 등등도 우리에게 '신뢰'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배신'의 위험성을 가르쳐주는 '교훈적'인 역할을 하지 않던가.

게다가 이런 식의 '매장'은 단지 '마을'이나 무슨무슨 모임,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 같은 소규모 커뮤니티 뿐 아니라, 소위 '지식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교수의 비리(?)를 언론에 전달했던 한 국문과 대학원생이 완전히 그 커뮤니티에서 축출당했던 (그리고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를) 것처럼. 사람 모인데면 뭐 사실 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배신>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글에는 이런 식의 질문이 나온다. 한 번 배신했다고 알려진 사람을 과연 당신이 속한 곳에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그래서 결속력 있고 지속성 있는 (제도화 된) 시민 단체, 시민 운동 내지는 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제도-장치로는 보호될 수 없는, 그런 "단절" 된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더 중요하게는, 집단적 "단절"을 위해서. 급진주의 정치를 표방하며 (제도화 된) 시민단체의 '보수성' 내지는 심각한 '한계' 등을 비웃는 것은 쉬운일 이지만, 그런 식으로 빈정대고 비꼬기'만 하는' 건 역시 자위는 할 수 있지만 큰 도움은 안되는 일이다. 그것은 잡스러운 냉소주의적 좌파 에고이스트로 가는 길이다. 우리에게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것도 안정적인, 소속감을 주는, 그런 '커뮤니티'. '저항적(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이라면 더 좋고...

읭? 근데 왜 글의 결론이 이렇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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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라..

스크랩 2008/09/10 10:35

출처 : http://www.macalester.edu/courses/geog61/chad/thefavel.htm


Favelas


Rio de Janeiro, like most third world cities, is experiencing a dramatic increase in population. This increase has come mostly in the form of the rural poor migrating to the cities. Because of the high land values and the enormous demand for space, these poor are forced into squatter settlements known as favelas. Named after the location of the first such settlement, the hill Morro da Favela, these settlements usually occur in two areas of Rio: one, along the steep hillsides or, two, along the outer fringes of urban expansion. The most famous favelas are those build along the hillsides (see the picture above). The houses are usually made first from wattle-and-daub, a mixture of sand and clay, and eventually to the use of wood, brick and sheet metal. One can tell the length of time that each family has lived in the favela by the type of material the ir house is made of and its location. Usually the first settle near the bottom of the hills and as time goes by the hill fills upward. Since their is no rent to pay, the money saved is used to purchase stronger materials such as brick and cinder blocks. These are then used to modify and solidify the structure. Houses are only upgraded if the site is safe from landslides and demolition by the city.

The first recorded favela was in the early 1920's, made up of about 839 of these houses, even though squatter settlements have existed in Rio since the late 1800's. The first of these favelas were located on the hillside because of no rent and their central location to the city, utilities and work. Today, there are over 500 favela communities existing within the city of Rio and comprise about a third of the total population. Five-hundred thousand to 1 million are estimated to live on the hillsides directly surrounding the CBD. While the city of Rio is growing at 2.7% a year, the favelas are growing at a rate of 7.5% a year. This massive and uncontrolled urbanization has extended Rio퉠 utilities and infrastructure passed their limit. The favelas are the ones that suffer. Rio is not the only city with these types of squatter settlements, but it was one of the first. What makes the favelas so unique for Rio is their location on the steep hillsides. Here the extremely poor live on the hillside with the scenic views while the rich live along the bottom where conditions are less than favorable. Not only is the direct opposite of city development around the world, but it creates a dramatic contrast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by putting the two directly next to one another. This is one of the advantages to livingin this type of favela. The rich provide many of the jobs, in way of services, that help sustain the the livelihood of the faveladors. Many of the rich rely on the cheap labor and service jobs that the faveladors supply, but this does not quell the criticism and negative image that they evoke.

How the People Of Rio View the Favelas

The image that most people have of the faveladors revolves around their rural origins, supposed lack of urban experience and that they are only leaching off the infrastructure of Rio. Many consider the favelas the source of Rio's urban problems, citing them for crime, violence, promiscuity, family breakdown and the creation of a culture of poverty. The prevailing view is that the favelas are just a transfer of poverty form the country to the city and are responsible for the negative effects of over-urbanization.

This over-urbanization are seen by some as a positive aspect, creating a perfect atmosphere for new industrial development. Because of the cheap, surplus labor that exists in the favelas, industries could find an easy market for locating and making money. Still others view the favela as just another part of the framework of Rio. It is a natural occurrence of the city and is compared to a weed growing in a garden, there will always b e weeds. Despite these views, little is being done to modernize the favelas or even deal with the shortage of utilities.

Shortage Of Utilities

Though there is much variation from favela to favela, the shortage of utilities is constant. Some favelas have better access to different utilities due to their location. Regardless of this, all are below standard access. Clean water is a must and first and foremost in need. Water is usually accessed by tapping into a water main that runs near the favela. This is always at the bottom of the hill and creates an incredibly difficult journey for those who live near the top. Several journeys a day are sometimes needed to gain enough for a household. Only about 50% of the faveladors hav e access to an in-house toilet facility. From these facilities, sewerage runs through open ditches and eventually ends up at street level, creating an incredible health hazard. Electricity is scarce and very hard to access. The electric company connect s outlets through only a few houses with meters, in the favela, and extension chords are run from these trunks to supply electricity to others. Each household is charged a fee per outlet, per month. This fee is usually much higher than what it would cost if it were metered directly. The demand is much higher than is being supplied and because of this, over tapped lines do not fulfill the need. When electricity is needed most, the evenings, there is hardly enough to run simple machines need to bring in extra in come (sewing machines, power tools, irons, etc..). Garbage is either incinerated on the hill or brought down to the street where the city is supposed to haul it away. If incineration occurs, this can easily ignite many of the wooden houses and cause pe ople become sick due to the smoke. Since the city often does not live up to its obligation to haul away the trash, it can build up on street and also become a source for disease.

The Favela As A Community

Each favela has its own community complete with grocery markets, clothing stores, pharmacies, repair shops and other types of small businesses. This varies depending on the location of the favela and by the size of its population. These shops are created to serve the needs of the faveladors. Often times, for groceries, the prices are higher in the favelas than elsewhere in the city. This is usually counteracted by selling merchandise in much smaller, affordable quantities and extending credit to customers. There are also community based organizations which people can join to help put pressure on the city government to extend facilities. most often these are created out of fear that the city will remove the residents from their homes. This is a constant fear that most fav eladors live under, but not all. Since a couple types of favelas exist, each has their own bonuses and drawbacks to locating where they do.

The Different Favelas

Favelas located in the South Zone have the best chance of finding work. This is due to the infrastructure of the wealthy and their need for people to complete odd jobs. Many times these jobs can lead into positions of housekeeper, nanny or groundskeeper for the wealthy residents. This then leads to another bonus of living in the this type of favela, schooling. In Rio, schooling is divided by address of residency. Because of this, faveladors are not allowed to attend these schools. If a parent has a connection or job with one of the wealthy residents, they can clai m that as their home address and allow their children to attend that school. This is not so for residents that are located in a favela in an industrial zone or a suburbio. Neither of these places would have access to such a public service. Because the Brazilian industrial economy is so depressed, factory jobs are very hard to come by. This hurts the chances of a favelador finding steady work living in this area. The poor in the suburbio have it even worse. There is no access to jobs in the area they live so they are forced on long bus rides into the city everyday to find work. This puts a further financial drain on the residents of the suburbio who already have so little. Community coalitions are in constant battles to force the government to give money for a community school. It is nearly an impossible task to get funding of any type for these areas. The government does not feel it is a worthwhile investment to put money into these poor communities. It would rather avoid the whole situation an d force these people to figure out other ways to school their children. Despite this, there is an advantage to living further from the city.

Because the land in Rio is so valuable, developers are constantly looking for new land to exploit. This would be mainly in the south and central zones where the higher land values exist. Since the the favelas and suburbios exist mainly away from this development, there is very little worry that they will be removed. More investment is be made in these homes and the local infrastructure. These squatter settlements are also located north of the city where the land becomes flatter and much less susceptible to mud slides and erosion. This in not the case of the favelas closer to the city. Mud slides have been known to wipe out entire favela communities and is very hard to control. The hillsides are very steep and erosion is uncontrolled. Since these favelas are located on marginal land, in a prime location, they live in constant fear that developers will come in and remove their homes to make way for new development. Very little housing for the poor is created by the state. The housing that is created is often located away from their work. There was an attempt to replace some favelas on the same site with three-story apartment buildings that would still allow the faveladors to work where they have been. This was only a limited experiment and was never considered to replace all favelas.

The Favelas Compared To the City

Unlike innercity poor, the favelas are considered a separate issue. There does exist an innercity poor to in Rio. They are not considered slums and are made up mostly of Jewish, Spanish and Portuguese families who have live there for quite some time. Because of the high land value rates, there is a very high turnover rate of the poorer areas. There isn't the mass exodus away from the city and the poor moving in, like in the United States, but rather a constant clearing and rebuilding process that keeps new poor from finding existing housing to move into. The migrants who live in the favelas are looked down upon. Part of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the majority of these migrants are black or mulatto. Over 70% of the faveladors are mulatto or black. This compares to less than a third of the rest of the city. Even though a very large portion of the population lives in the favelas, the government will often times not admit to their existence. There have been maps made recently, by the city, that show vacant land where thousands of faveladors live. It becomes easier to marginalize and forget, than to admit and deal with the situation.

Despite efforts to clear and stop the in migration, people have just kept coming to Rio. As cleared rain forest land becomes unfarmable, farmers give up and move to the city. Despite being marginalized and blamed for all kinds of Rio's social problems, the faveladors have created a society based on cooperation to survive and have found a niche in the overpopulated city. Recently, the populations in the Favelas has leveled off. Much of this is due to the lack of available land and the clearing of favela settlements. Despite this, the migration to the city still continues. In many ways, Rio does not wish to acknowledge the existence of the favelas would rather passively ignores them instead. By doing this the problem only gets worse and the faveladors are still subject to margin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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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종류

스크랩 2008/08/15 13:17
이거 보다는 더 많은 걸로 알고 있지만... 일단 모아 두자.

출처 : 네이버 검색

1. 어떤 대상물과 비교하여 붙인 이름

·개잠 : (개가 자는 모습처럼) 머리와 팔다리를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 자는 잠. ¶~을 잤더니 몸이 개운하지가 않다.

·나비잠 : 갓난아기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

·등걸잠 : 옷을 입은 채 덮개 없이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는 잠.

·말뚝잠 : 꼿꼿이 앉은 채로 자는 잠.

·새우잠 : 새우처럼 몸을 꼬부리고 자는 잠.

·토끼잠 : 토끼처럼, 깊이 들지 못하고 아무 데서나 잠깐 자는 잠.


2. 어의(語意)에 따라 붙인 이름

·개잠(改―) : 아침에 깨었다가 다시 자는 잠. 두벌잠.

·귀잠 : 매우 깊이 든 잠. ¶~이 들어 비가 온 줄도 몰랐다.

·꾀잠 : 거짓으로 자는 체하는 잠.

·낮잠 : 낮에 자는 잠. 오수(午睡). 오침(午寢). 주침(晝寢). ↔밤잠.

·늦잠 : 아침 늦게까지 자는 잠. 아침잠.

·단잠 : 기분이 좋은 상태로 깊이 든 잠. 달게 자는 잠.

·두벌잠 : ☞개잠.

·발칫잠 : 남의 발치에서 자는 잠. ¶남의 집에서 ~을 자며 자식을 가르쳤다.

·밤잠 : 밤에 자는 잠. ¶악몽으로 ~을 설치다. ↔낮잠.

·새벽잠 : 새벽녘에 든 잠. 새벽에 자는 잠.

·선잠 : 깊이 들지 못하거나 충분히 자지 못한 잠. 겉잠. 헛잠.

·수잠 : 깊이 들지 아니한(못하는) 잠.

·아침잠 : 아침에 자는 잠. 아침 늦게까지 자는 잠. 늦잠.

·여윈잠 : ①흡족하지 못한 잠. ②깊이 들지 않은 잠.

·이승잠 : [이 세상에서 자는 잠이라는 뜻으로] ‘병중에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해서 자는 잠’을 이르는 말.

·일잠 : 저녁 일찍 드는 잠.

·초저녁잠 : 초저녁에 일찍 드는 잠.

·풋잠 : 잠이 든 지 얼마 안 된 옅은 잠.

·한뎃잠 : 한데에서 자는 잠. 노숙(露宿). ¶젊어 떠돌 때는 무던히도 ~을 잤지.

·한잠 : ①깊이 든 잠. ¶~이 들었는지 세상 모르고 잔다. ②잠시 자는 잠. ¶밤새 ~도 못 잤다. / ¶~ 자고 나니 몸이 아주 가뿐하다.

·헛잠 : ①거짓으로 자는 체하는 잠. ②잔 둥 만 둥 한 잠. 선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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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아흥 보기만 해도 도키도키...

곧 있을 세계철학자대회랑 세계여성철학자대회는 일단 참가비가 들기 때문에, (난 요새 너무 가난..)
그리고 워낙 폄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서 가지 않을 것 같아서 좀 아쉬운 참이었는데...

이런 것들이 있었군~ㅎㅎ

<아시아문화와 생명윤리>는 끌리기는 하나 결국 안 갈 것 같지만,
로지 브라이도티 교수와 비토리오 회슬레 교수의 강연은 꼭 들어봐야지 +_+



아시아문화와 생명윤리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유네스코 국제포럼



일시
 

  2008년 7월 29일(화) - 30일(수)

 
장소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관 231호

   
프로그램
    Session 1 : 아시아문화와 생명윤리 <생명윤리와 인권 보편선언>을 중심으로Ⅰ
 Sssion 2 : 아시아문화와 생명윤리 <생명윤리와 인권 보편선언>을 중심으로Ⅱ
 Session 3 : 다문화주의적 시각에서 본 생명윤리의 실행
 Session 4 : 동아시아 정책에서 생명윤리의 적용을 위한 방향 모색



초대의 글


 중국, 일본, 인도, 태국, 필리핀, 모로코 등 총 7개국, 22명의 발표자와 토론자가 참가하여, 아시아 문화권에서의 중요한 생명윤리 이슈들을 논의하고 각 국의 생명윤리 정책 및 제도를 모색하기 위한 ‘BPRC-UNESCO 아시아문화와 생명윤리 국제포럼’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참가하실 분은 성함, 소속, 이메일 연락처를 메일 또는 팩스로 신청해주세요.(참가비 없음) 동시통역이 제공됩니다.

연락처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관 316호
 홈페이지 : http://bprc.re.kr
 Tel : 02-3277-4232 / Fax : 02-3277-4221
 E-mail :
bprc@bprc.re.kr

주최


 보건복지가족부
 유네스코(UNESCO)

주관후원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BPRC)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유네스코 방콕사무소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한국생명윤리학회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
 연세대학교 아시아의료법윤리연구소
 가톨릭대학교 생명윤리연구소




탈경계인문학연구단(HK 사업단) 해외석학 초청
Distinguished Scholars' Lecture Series  제 4, 5회



"Affimative Ethics and Bio-Politics"
 

 강연자 : Rosi Braidotti 교수
(네덜란드 Utrecht University, Women's Studies/ Director of Centre for the Humanities)
 강연시간: 13:00 ~ 14:30

 
"Women and Cyborgs in Visual Culture"
 

 강연자 : Anneke Smelik 교수
(네덜란드, Radboud University of Nijmegen, Cultural Studies)
 강연시간 : 14:30 ~ 16:00

   
  

 일시 : 2008년 7월 26일(토) 13시 ~ 16시

   장소 :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포스코관  B161호
 주최 : 이화인문과학원, 한국문화연구원


제 6 회 탈경계인문학연구단 (HK 사업단) 해외석학 초청강연


Distinguished Scholars' Lecture Series (6)
빗토리오 회슬레 교수 (미국 노트르담대학교 석좌교수)

Philosophy and Its Languages: A Philosopher's Reflections
On the Rise of English as Universal Academic Language
Prof. Vittorio Hösle (U of Notre Dame, Paul Kimball Chair of Arts and Letters)

 

일시
    2008년 7월 29일(화) 15시
 
장소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포스코관 160호
   
주관
  

 이화인문과학원, 한국문화연구원
 Tel : 3277 - 6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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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예전에 옮길 일이 있어서 옮겼던, 수전 손택의 글...


어떤 매플소프들

이성적으로는 카메라가 내 머리에 겨눠진 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취할 때마다 나는 불안함을 느낀다. 이것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을 도둑맞는다는 식의 잘 알려진 공포와는 다르다. 나는 사진작가가 나와 똑같은 복사본을 탄생시키기 위해 내게서 뭔가를 빼앗아 간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이 뒤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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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중도에 붙여서 '흥행'했던 자보 +_+ ㅋㅋ 이제야 스크랩. 다음 건 더 쎄게~ 더 쎄게~


촛불집회, 그 속에서 느끼는 일말의 불편함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로 시작된 촛불 집회가 ‘쇠고기’ 이슈를 넘어 점점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불법시위의 오명을 넘어서’ 이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은 국가의 부당한 정책 추진과 권력 남용에 대항하는 당당한 시민으로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경찰(정부)의 강경 진압이 크게 이슈가 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강제 연행되는 과정에서 인권침해를 겪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전경들이 더 불쌍하다’ 고 말하던 사람들마저도 ‘과연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가’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우리들은 의회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 우리의 요구를 거리에서 외치는 것에 익숙해지고 해방감을 맛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집회와 집회를 둘러싸고 이야기되는 어떤 것들은 집회에 참여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남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불편함 하나 : 관악의 학우가 전경에게 다쳤다! 그런데...

5월 31일에는 10만명 넘는 시민들이 시청광장에 모이고, 다음날 새벽에는 200여명이 강제 연행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대포를 맞고, 방패에 찍히고, 소화기 가루를 먹었습니다. 그 와중에 서울대 학우들 역시 물대포에 맞아 피멍이 들고, 방패에 찍히고, 연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관악 학우 한 명이 전경에게 맞아서 크게 다쳤습니다. 언론은 이 학우의 실명을 포함한 신상 관련 정보를 대서특필하면서 특히 ‘서울대 여학우’라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서울대 여학우, 군홧발에 무참히 밟히다’라는 식의 보도 태도는 학내외를 막론하고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우리에게 복잡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우선 군홧발에 밟힌 사람이 ‘서울대’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또한 그냥 ‘서울대 학우’ 일 뿐만 아니라 ‘여학우’라는 점이 그녀를 ‘무참히’ 밟은 ‘군홧발’의 폭력성을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약한 여자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폭행할 수가 있는가?’ 하는 지점에서 분노합니다.

물론 전경으로 표상되는 국가에 의한 폭력은 합법의 가면을 쓰고 자행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들만큼은 그녀를 그렇게 무력한 피해자로 호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 역시 ‘예비군 오빠’들이나 ‘넥타이 부대’와 마찬가지로, 혹은 그들보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하여 집회에 참석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국가가 자행하는 조직적이고 합법적인 폭력에 맞서 목소리를 내려고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그 학우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담론 구도는 그녀를 그저 군홧발에 짓밟힌 ‘여자’로 치환함으로써 그녀 역시도 한 사람의 당당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불편함 둘 : “남자분들 앞으로 나오세요, 여자분들 뒤로 빠지세요”

집회 현장에서 살수차가 등장하거나 방패부대가 밀고 들어올 때 항상 터져나오는 말입니다. 여남을 막론하고 간절히 ‘남자분 없어요?!’라며 ‘맨 앞에서 버티어 줄 건장한 남자 시민’을 목놓아 찾기도 합니다. 실제로 물대포를 맞더라도 물러서지 않으려고 버티는 여성들을 잡아끌어내고, 자신이 대신 앞으로 나가는 ‘흑기사’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군복을 입고 등장하여, 경찰의 방패를 코앞에서 마주하며 멋진 ‘예비군 오빠’들로 칭송받습니다. 2008년 현재, 집회에서 나오는 말들이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의 정점이라는 집회 현장에서도 발현됩니다.

물론 전경과의 대치 상황에서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거나, 다친 곳이 없는 사람이 앞장서서 전경의 폭력에 대항하고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버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꼭 ‘건장한 남성’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집회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힘이 있느냐, 혹은 그 사람의 성별이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얼마나 정부와 경찰의 폭력에 대항할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싸울 의지가 없는 최홍만보다 ‘폭력경찰 물러가라’를 소리 높여 외치는 여성이 오히려 집회 현장에서는 더 강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분들 뒤로 빠지세요.’와 같은 말은 그 순간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을 ‘시민’의 범위에서 배제시키고 투쟁의 현장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에서 버티고 싶은 분이 앞으로 나와 주세요.’ 라는 말로도 충분합니다. 신체적 접촉이 불편하거나 전경과의 직접 충돌이 싫은 사람이라면, 여남을 불문하고 조금 더 뒤쪽에서 자리를 지키며 힘을 실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편함을 딛고 거리로 함께 가요!

‘촛불집회’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사안으로 시작하여 현 정권의 무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총체적 반대의 흐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번 촛불집회는 우리 사회 전반의 구조와 이념을 재구성하는 새로운 흐름의 시발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 ‘시민’의 의미와 범위를 새로이 구성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그저 국가권력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당하거나 시위대 남성들의 보호를 받는 ‘딸, 여동생’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집회에 나갔다가 다친 관악의 학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어깨 걸고 싸웠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촛불집회’가 반드시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거리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범대 여성주의자 모임(가)
http://club.cyworld.com/edu-fem
Posted by 비앙
변방에서 중심으로
― 지방대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 ―

양새슬
삼류대에서 학생운동에 기웃거리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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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접속을 환영합니다."

독자가 이 글에 접속하여 필자와 본격적으로 소통하기에 앞서 에피소드 하나 풀어 보겠다. 이 원고를 처음 청탁 받고는 서울대 <학회평론>에서 청탁 받았다고 주위에 자랑했다. 동료들은 '서울대'가 주는 '경이로운 무게' 만큼의 부러움과 질시를 보냈다. 그리고 이 유치한 자랑에 유치하게 대꾸했다. '지방대를 다니는 것은 맞지만 니가 학생운동을 하고 있긴 하느냐'고. 동료들의 말뜻은 필자가 열심히 운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글 쓸 자격이 없다는 얘기였지만, '너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그렇게 청탁 받을 만큼의 가치를 갖는 일일까?'라는 자괴감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학생운동을 하긴 하나 하는 의문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우리의 운동이 수준 낮다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청탁자가 요구하는 글의 형식이 지역 학생운동의 현황을 담은 주간, 월간지의 '르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한겨레신문 지방면만 꼼꼼히 수합하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청탁자의 요구는 지방대의 운동 조건과 차별성에 대한 얘기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지방대에서의 운동'의 외연은 '서울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운동이지만 그것은 지리상의 위치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에 있어서 상이한 질과 수위를 갖는 변방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그 지역의 특수한 조건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문제겠지만 먼저 변방 일반이 갖는 조건부터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초두에서 꺼냈던 동료들과의 유치한 대화만큼이나 너절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멋드러지게 써보려고 시높시스를 짜 봐도 토로와 배설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이유는 필자의 능력 부족에도 기인하겠지만 이 글의 테마, 즉 '지방대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이란 테마 자체가 지방대생이 갖는 의식과 살아가는 삶을 자기 고백적으로 쓸 수밖에 없는 테마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써 가면서 청탁한 이를 맘속으로 '이 따위 주제를 나한테 주다니, 나쁜 놈!'이라고 욕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공부 못해서 지방대 다니는 것도 서러운데 그걸 얼굴도 모르는 독자 앞에 드러내 놓으라는 요구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래서 글은 거의 열 받았던 기억을 반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지금이라도 이 글이 무가치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독자들은 즉각 다음 글로 뛰어넘길 바란다.


go margin 

아무도 우리의 입학을 축하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모님의 기대와 성적, 가정형편 등과의 불만족스러운 타협에 불과했다. 엄청난 양의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고서 들어온 학교는 기대에 비해 형편없었지만, 재수, 삼수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나마 다행스러워 했을 뿐이었다. 지방대가 한국 자본의 교육-노동시장에서 하위 관리자를 생산하는 부위라는 사실을 우린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후진 학교일 뿐이야', '열심히 살면 뭔가 되겠지'라고 위안하면서 계층상승의 욕망을 요체로 하는 향학열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대학은 이미 수직서열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대학의 서열은 큰 이변이 없는 한 평생에 걸쳐 내 삶에 확대재생산되어 투영될 것이었다. 이 사실이 너무 끔찍스러워 재수를 하거나 편입학을 감행해 보지만, 이는 결국 계층상승 욕망을 더욱 깊숙이 내면화시키고 자본의 질서가 갖는 힘을 절대화시키는 데로 귀착된다.

그러다가 우리 삶에 큰 이변이 생겼다. 재수 없게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 큰 이변은 서열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국 CIA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의 제6계층인 직업적 운동권 계층으로 추락할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한국 학생운동은 직업적 운동가를 양산하는 주요 시스템이다. 80년대 그 치열했던 운동의 역사 속에서 배출된 무수한 학생운동가들이 생을 바쳐 지금의 대중운동을 일구어냈다. 그런데 이 대중운동의 시대에도 '공부도 못하는 게 데모질이야!'라는 말로 대변되는 의식이 우리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지방대 학생운동가들에게 열등감을 갖게 만드는 첫 번째 계기는 운동 바깥에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대학의 서열이다. 운동의 깊이가 더해갈수록 열등감의 계기와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지방대 학생운동가는 학생운동사를 읽으며 비애를 느낀다. 70년대와 80년대의 학생운동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울대운동사였고 90년대 운동은 전대협-한총련 운동의 역사였다. 무림-학림 논쟁이, MT-MC 논쟁이 과연 지방의 대학들에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다. 아니 영향받을 학생운동의 주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겠다. 학생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던 87년 이후라고 하더라도 전대협-한총련을 주도하는 학교는 서울의 학교들과 지방의 메이저 캠퍼스들이었다. 마치 구한말에 족보 산 집안이 그렇듯이 자기 학교의 학생운동사를 공부해 보려고 해도 어느 시기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는다. 전국적 흐름에서 영향을 받아 발생했을 뿐, 자기 운동의 역사가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있었다손 치더라도 전국적 흐름을 선도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심화되는 열등감은 캠퍼스 바깥으로 나가 지역 연대질서를 일구어가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결정타를 맞는다. 필자의 지역 연대운동체 회의에서 우리 지역 메이저 캠퍼스는 지역 학생운동에 소극적으로 임하면서도 헤게모니를 잃을 것 같으면 매우 분파적인 발언을 해가면서 '메이저 캠에 걸맞게 대우해줄 것을 은근히 그러나 강력하게' 주장하곤 한다. 그렇다고 그 학교 대오가 수가 많다거나 주도적으로 일을 펼쳐왔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함께 집회를 치러 내고선 갑자기 분담금을 못내겠다는 등 땡깡을 피우기도 하고, 연대운동체의 일정에 함께 할 수 없다면서 공연히 어깃장을 놓는 등의 힘빼기 전술을 구사하며 은근히 자기 캠퍼스의 서열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방대 집단 안에까지 존재하는 운동의 서열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운동은 그 모든 억압적 질서로부터의 해방되는 과정이다'라는 진술을 의심케 만든다. 필자에게 쌓이는 스트레스의 정체는 기실 운동 가운데에조차 일, 이, 삼류대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도 캠퍼스로 돌아오면 우린 여전히 캠 운동을 담당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활동가이고, 후배들에게는 절대적 존경을 받는 선배이기에 죽으나 사나 당면한 사안에 대처하기 위해 골머리 싸안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역과 캠운동이 갖는 협소함과 일천함은 또 한 번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수공업적이고 부실한 학습풍토를 개선해 보려고 연세대에서 제기됐던 제2대학 자료를 뒤적여보기도 하고, 고려대 생활도서관 회보를 펴보기도 하지만 입맛만 다시다가 덮곤 한다. 그런 사업을 꾸릴 주체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용도가 낮을 것이 뻔하기에 '냉면 개시' 깃발을 내걸고 싶은 맘은 굴뚝 같지만 채산성 때문에 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답답함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단대신문들도 발행되고 교지도 여러 개인 학교나 총학생회 기관지가 우리 학교 교지보다 더 화려하게 나오는 학교를 볼 때, 또 한 학교 학생들이 돈 받고 파는 책을 만드는 『학회평론』을 볼 때도 '없는 자궁'과 '없는 아가미'가 답답한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지방대 학생운동 출신들은 또 어떻게 살아갈까? 가끔씩 찾아오는 선배들을 만나면 지방대 출신이 살아가는 모습과 운동권 출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심하게 비틀린 채 결합된 군상들을 보게 된다. 운동권의 덕목에 전문성이란 것이 추가된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 캠에서 자질과 적성, 전공을 살리는 선배를 본 적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30세가 넘기 전에 자리잡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의 운동적 전망을 사회에 나가서 선명하게 주도적으로 풀어내는 서울대 출신을 볼 때 왠지 그 이면에 우리 캠 선배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가끔 운동을 하다가 변절했다는 서울대 사람 얘기를 들을 때면, '서울대 놈들이 다 그렇지'라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냉소적인 말들을 뱉어 버리곤 한다. 사실, 변절의 기회조차 지방대생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난 직업적 운동이나 삶의 현장에서의 운동을 포기하고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에 취직해 소시민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우리 선배들이 과연 변절했는가 의문을 품곤 한다. 적어도 변절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포기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출세를 의미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 '변절'이라는 주홍글씨가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특별히 비운동권에 대하여

'특별히' 비운동권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이유는 97년 학생회선거를 통해 전국적으로 30여 개 대학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의 엄청난 약진 앞에서 경악하기보다는 '96년 연세대사태로 인한 학우들의 일시적 이반'이라고 위안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다만 96년 학생운동탄압(특히 NL에 대한)이 전면화되었던 정세 속에서 비운동권 집단이 효율적으로 정세대응을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들이 운동세력에 비해 조직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무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지방대에서의 비운동권 집단의 양태를 보면, 이들 집단이 8∼90년대를 지나면서 끈질기게 살아 남아 성장한 유일한 세력임을 입증한다. 따라서 97년 한 해만의 현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더구나 학생운동세력과 학생대중의 적대적 관계가 조장되고 안착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비운동권은 기존 운동세력에게 혁신에의 과제를 더 이상 방기할 수 없음을 '실천적으로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97년 4월, 광주 전남대에서 열린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호남대학교 교지편집위는 총학생회가 앞장서서 교지편집위를 탄압한 사실을 폭로했다. 한총련 대의원들은 그 대자보 앞에서 모두 공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학생회장이 교지편집위 편집장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며 해산을 명령하는 일이 어디 있을 법한 일인가? 또 올해 어느 지방대에서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앞장서서 대학노조 사무실에 쳐들어가 테러와 폭력을 행사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 이러한 사건들은 지방대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주 드문 사례들은 아니다. 90년대를 지나면서 지방대에서 비운동권이 당선되는 경우가 점차 빈도를 더하더니 급기야 97년에는 한총련 탈퇴 선언이 줄을 이었다. 이런 학교에서 운동권 세력과 비운동권 집단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지방대에서 비운동권이 광범위하게 당선될 수 있는 조건은 지방대 학생대중의 의식의 후진성에 있지 않다. 대학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이나 광역시와는 달리, 학우대중의 상당수가 그 지역 출신인 시, 군 지역 학교는 동문회를 중심으로 지역세가 발호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된다. 한, 두 고등학교 출신 동문세력 또는 연합동문 형식으로 묶여 있는 이들은 비운동권을 넘어서 반(反)운동권으로서의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단대 및 자치기구, 총학생회에 후보를 조직적으로 출마시킨다. 이들은 거의 모든 과에 골고루 흩어져 있어 선거에서는 위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또한 나름의 재생산구조를 갖추고 끊임없이 '활동가'(!)들을 충원 받는다. 이들은 학생운동이 대중화되었던 87년 이후에는 학생운동세력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학생운동과 학생들의 관계가 유리되는 것을 넘어서 적대적 관계로까지 악화되고 있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자신들의 이념적 입장을 반운동권으로 선명하게 표방했다.

그러나 이들이 반운동권 깃발을 일관성 있게 내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백색 세력의 주동력은 학생회비와 졸업 이후의 진로 보장이다. 따라서 캠퍼스 내에서의 역관계에 따라서는 운동권 세력과 일정 지분의 양보를 전제로 한시적으로 연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독자적으로 또는 비운동권 집단들의 연합 형식으로 출마한다. 이들의 학생회 사업 작풍은 막대한 학생회비를 갖고서도 제대로 된 사업 하나 추진하지 않은 채 1년을 넘겨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며, 각종 비리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또 1년 사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합으로 학생회를 잡은 각 블럭간의 내부갈등으로 집행부가 분열되어 쪼개지기도 한다. 이들의 행태가 폭로되어 탄핵, 사퇴까지 이어지더라도 다시 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비운동권 구도로 쟁점을 형성하면서 학우들의 표를 긁어간다. 또 선거 운동은 1년 동안 축적된 학생회비를 갖고 과학생회장 등을 술판으로 몰아 가는 조직선거 전술을 구사한다. 이들 중 수뇌부는 졸업 이후 학교측에 의해 취직을 보장 받거나, 일부 종교집단이나 지역 관공서에서 '모셔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지역세력은 또한 학교 밖의 조직폭력배와 연계하기도 한다. 강원도 지방이 타 지역보다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생회 선거에 지역의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협박, 테러 등을 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 가두시위 등의 계획이 있을 때에는 이들과 경찰이나 지역의 조직폭력배들과 함께 미리 입수한 가두시위 장소에 진을 치고 있어 시위 계획을 수포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비운동권 집단이 광범위하게 지방대 캠퍼스를 장악할 수 있는 이유는 대학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90년대 끝물의 대학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금의 대학은 과연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까지 다닐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만큼 그 사회적 위상이 추락했고, 대학인의 '교육'은 고사하고 '관리'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대학은 개인을 훈련시켜 노동시장으로 배출하는 '양성소'에도 못미치는 '대기소'로서 밖에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은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국한지어지고 그 책임 또한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진다.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이들에게 그 어떤 울타리가 공통의 질서와 이념적 지향을 갖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학생회는 관성화된 사업 사이클과 폐쇄적 구조로 대중과 점점 유리되면서 결합 고리를 잃어가고 있으며, 게다가 학생 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테마도, 정책도 부재한 상태이다. 정치조직에서는 저항의 주체를 형성하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저항주체 형성의 프로젝트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제출된 생활도서관이나 제2대학, 반대학 같은 사업들은 이벤트화되면서 학생회의 반짝 사업, 공약으로 변질되었다.

대중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슬로건이 민망할 만큼 대중을 전취해내지 못하는 현 지방대 학생운동의 널럴한 정세대응력은 학생대중으로 하여금 학생운동을 공격의 제1대상으로 지목하는 비운동권 집단에게 표를 몰아주게 하는 요인이 된다. 어쩌면 지방대 학생대중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한 테마는 비운동권, 반운동권이라는 자기 선언일 지도 모른다. 더구나 96년 연세대사태처럼 정권의 물리적-이데올로기적 탄압이 가중된 시기에는 더욱더 수월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운동의 대중적 외연의 상실과 지방 중소도시의 동문회 집단의 존재, 그것이 비운동권 이익집단이 독버섯처럼 피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go center

97년 한총련 대의원대회 의장선거에는 좌파에서 두 정파가 후보를 냈다. 그 논의 과정에서 한 후보자는 전국 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한 지역의 좌파 학생운동을 무당파적이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여 회의 분위기를 격렬하게 만들었다. 결국 휴회 끝에 후보자가 사과를 하고, 지역 수임자가 사과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회의는 속개되었다. 그렇지만 그 얘기를 들은 지역 활동가들은 모두 씁쓸해 하였다. 지역 활동가들이 씁쓸해 했던 이유는 '정파적 목마름'에 있었다.

원전 속의 당파성은 적대적 계급 가운데 편들기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후보자가 말했던 당파성은 정파적 실천을 갖느냐 안 갖느냐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한다. 보다 세밀하게는 정파운동의 부재 가운데 대중추수적이고 다만 현실에의 안티적 조응으로 일관하는 그 지역 학생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씁쓸해했던 그 지역 운동가들은 캠 운동에서 정파적 관점에 매우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지역 활동가들 상당수는 정파적 실천에 목말라 한다. 한 활동가는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전제하면서 서울의 운동이 그 지역의 운동보다 10년은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지역 수준으로만 상승되어도 지역의 분위기는 일신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활동가가 말하는 '수준' 역시도 거의 지역의 정파적 활동에 있어 10년 뒤쳐져 있다는 것일 뿐이다. 운동 수준의 이러한 단순비교는, 특히나 정파적 활동을 기준으로 일괄적으로 운동을 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매우 싱거운 결론이겠지만 지역 학생운동은 자기 캠퍼스 현실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 긍정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령 그 자기 긍정성이란 이런 거다. 서울의 정파운동은 자신이 갖고 있는 분파적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상당수 개방했지만 그 정치조직 중앙이 보이고 있는 극심한 파벌싸움을 보면 그와는 일정한 간극을 유지하고 있는 지방대 풍토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건강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상대적 건강성은 자기 대오를 유지해가는 기풍의 문제이다. 한국 학생운동을 학생회운동, 나아가 한총련운동으로 치환해서 사고하는 우파 운동도, 은연중에 학생운동을 정파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좌파운동의 시각도 문제다. 지리한 조직, 사상논쟁의 과정에서 깨져 나가고 있는 운동 대오의 문제를 일정 정도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학생운동의 대중적 외연을 어떤 관점을 갖고 어떤 조직과 저항의 방식으로 전취해낼 것인가이다. 대중의 표정을 읽어내야 한다는 상투적인 결론밖에 얘기 못하는 것은 필자의 한계겠지만, 그 대중의 표정을 연상하는데 있어 도움을 주고자 몇몇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6,000명이 넘는 학우들이 참여한 학생총회를 성사시켜 내고 대학교육개혁투쟁에 힘있게 들어간 97년 4월의 인하대학교 사례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대학 사회에서 아직도 학생회라는 기구를 통한 대중적 결집이 가능하다는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회를 뛰어넘는 대중자치기구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인하대의 학생회들이 어떻게 대중을 그렇게 조직할 수 있었을까? 엉뚱하지만 굴업도 핵 폐기물처리장 문제로 인천지역 학생운동의 대중동원력과 결합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한다. 인천지역 학생운동은 서울 출신 학우들이 많은 관계로 지역의 사안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어려운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처럼 전국적 이슈가 되는 사안을 갖고 대중과 적절하게 결합했던 결과 캠 내 운동의 지반과 대중적 외연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각 캠퍼스의 현실에 천착하고 대중의 표정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은 상투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여전히 거머쥐어야 하는 원칙인 것이다. 92년 경부고속전철의 경주통과안에 반대해 벌어진 동국대 경주캠퍼스의 대중적 투쟁, 96년 대구 승당마을 철거투쟁에의 지역 학생운동의 결합, 96년 합천 해인사 골프장 건설문제에서의 불교학생회의 투쟁 등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총련 주류가 캠별, 지역별로 총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96년 8월 연세대사태에서 입었던 타격을 딛고 실천동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또 한편, 96년 시화호 무단방류사건, 여천공단 환경오염 문제 등에 대한 학생운동 진영의 무감성은 안타까운 사례에 속할 것이다.

97년, 서울의 도심개발 계획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시작된 빈민주택가의 철거와 서울 재정비는 일단락 지어지고 이제 광범위한 개발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선진복지통일한국이라는 목표 하에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중심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문제는 대부분 빈민주택가 재개발, 철도, 원자력 발전소, 도시개발계획 등이 이슈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개발은 민중생존권을 철저히 유린하면서 모든 민중에게 환경 오염으로 인한 고통과 비용을 떠 안기게 된다. 또한 이것은 비단 해당 주민들만의 문제로 국한되지도 않는다.

지방대 학생운동은 이러한 이슈와의 광범위한 연대를 구축하는 가운데, 학생대중의 참여와 결집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그 가운데 반자본의 관점으로 각이한 사안들을 정세적으로 바라보고, 학생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할 때 최대한으로 대중과의 접촉 지형이 확장될 것이다.


Log out  ; 모든 변방은 중심이다.

대학을 입학하면서부터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지방대 학생운동가들. 그들이 운동을 해나가면서 '단지 지방대를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절망하고 체념해 버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필자 자신도 혹여나 그러하지 않는가 반문하면서 우리의 희망은 어디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현실의 문제로부터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임하는 것, 그것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는 길이라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싶다. 아니 '모든 변방은 중심이다'라고 말해두고 싶다. 이러한 언급이 힘을 가진 언설이기 위하여 보다 각론화된 검토가 풍성하게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 일반적인 풀이법만을 제시하는 건 힘빼기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 글에서 누락되어 있는 서울 소재 대학의 제2캠퍼스 문제가 그런 경우다. 학생들은 독립채산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립학교법이 걸림돌이 된다. 제2캠퍼스 간의 연계를 통해 법적 소송까지 불사하지 않는 한 이들 학교의 문제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제2캠퍼스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지방대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들과 싸워나가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이곳, 변방을 중심으로 가져갈 수 있는 길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변방인가? 중심인가? 아니 이 우문을 폐기하자. 그저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을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고만 얘기해 두자. 'X'  또는 'bye' 를 치기 이전에 접속 종료 직후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구상하라.

"안녕히 가십시오.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학 / 회 / 평 / 론 /

Posted by 비앙

언니네 채널넷 특집의 얀새님의 글. 공감 공감~
출처 : http://www.unninet.net/channel/ch_special_vw.asp?ca1=1&ca2=405&ct_Idx=2380


비어있는 자리

안녕. 오늘도 당신들은 우리들의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가 신경 쓸 수 없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  니다. 데카르트인가 하는 사람은 당신들에게 영혼이 없다고 말했다지만,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다지만나는 당신들과 내가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당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병든 당신들의 몸을 이 나라에 수출하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먹고 죽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불 보듯 뻔한 위험을 알면서도 그것들을 수입하기로 한 정부의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사람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나라가 미국의 폐기물 처리장이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라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한편 마음이 무거운 건 병든 당신들에 대한 이야기의 부재였습니다. 당신들은 그저 ‘30개월 이상의 소’ ‘20개월 미만의 소’와 같은 언어로 정의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묻고 싶었습니다. ‘20개월 미만의 소’라면 괜찮은 것인지, 또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라면 당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지 말이지요. 나는 당신들이 왜 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왜 미국이 당신들을 도축해서 팔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왜 당신들이 '상품'이 되어서 세상 곳곳에서 거래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인류는 소의 기생충이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에 동의합니다. 인간이 먹기 위해 키우는 당신들의 숫자가 십삼억 마리라는 통계를 본 적도 있습니다. ‘광우병’을 둘러싼 이야기들 속에서 저는 당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의 삶에 관한 일을 꺼내려는 시도조차 비정치적인 것으로 폄훼되곤 했지요.

저는 사람들이 당신들을 먹는 식문화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고기를 먹는 일이 비윤리적이라고 소리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당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고통을 외면하다


미국에서의 축산업은 그 나라의 기반 사업 중의 하나입니다. 축산업은 다른 사업들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합니다. 포드가 합리적인 자동차의 조립과정을 소고기의 해체 작업을 통해 익혔다고 말했던 것처럼, 축산업은 '실용적인' 생산라인의 모형을 제시한 사업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실용적 사고'에는 당신들을 '고기 생산 기계'로 생각한다는 전제가 들어있습니다. '동물기계'라는 데카르트의 사고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움직이는 기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당신들은 영혼이 결락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지배받고 복종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당신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폭력에도 합당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축산업자들은 '동물기계'라는 전제 위에 '효율적인 이윤 창출'이라는 목표의식을 달았습니다.

축산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대되어갑니다. 고기의 포화상태. 이는 물론 몇몇 국가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의 70%는 비자발적 채식을 합니다. 빈곤 때문입니다. 축산업이 대량화되면서 전세계의 곡물 생산량의 30%가 축산업에 쓰이게 됩니다. 축산업에 쓰일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제3세계의 삼림이 불에 타고, 자신의 경작지를 잃은 농민들은 몇백만명이나 됩니다.) 많은 국가들이 이런 식의 시스템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효율적인 이윤확대를 위해서 당신들은 사육장이라는 곳에서 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탄생과 동시에 어미와 분리되고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낳은 자식을 빼앗긴 어미의 고통은 신체적인 병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특히 우유를 생산하지 못하는 수컷 젖소는 제 몸 크기의 사육장 안으로 들어가서 몸도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합니다. 움직이면 고기가 질겨진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 송아지들은 이 개월도 안 돼서 도축되고 아주 비싼 식재료로 팔린다고 합니다. 저는 데카르트에게 묻고 싶습니다. 영혼이 없는 쪽은 동물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발명해낸 사람들이 아니냐고요. 어떤 동물도 자신의 식도락을 위해서 다른 동물의 존엄을 이렇게 함부로 훼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멋진 뿔은 사육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뽑히고, 거세는 흔한 일입니다. 이 공장 안에서 당신들은 자연스러운 상태보다 3배 이상의 우유를 만들어 내고 수명은 과거 25년이었던 것이 현재 4년이 채 못 되게 되었습니다.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당신들은 항상 임신 중입니다. 대부분의 사육장에서 당신들을 2평방미터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사육장에 가둬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면서 병에 걸리지 말라고 항생제를 주입하고 보다 더 많은 고기를 생산하도록 호르몬제를 투입합니다. 그러면서 사료에 톱밥과 쓰레기, 다른 동물의 사체들을 섞고 심지어 당신들의 동족의 뼛가루까지 먹이기도 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병드는 건 당연합니다. 당신들은 기계가 아닌 생명이니까요. 무기체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니까요.

관계를 생각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 저는 그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양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먹는 행위는 인간과 동물이 맺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보여줍니다. 저는 그 관계가 너무도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렇게 잔혹하게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부당합니다.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살아있는 당신들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건 오로지 당신들의 사체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들과 우리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 저는 왜 당신들이 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합니다. 저는 평생을 폭력에 노출되고, 도살되기 위한 생은 없다고 믿습니다. 아무도 그런 생을 원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합리적' '실용적'이라는 미명 아래 극한의 고통에 노출된 당신들을 생각합니다. '아픈소'를 키운 그 미친 방식에 대해서 회의합니다.

광우병 문제는 당신들에 대한 폭력의 극한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장에 수입 협정이 결렬되고, 이 모든 상황이 ‘해소’된다고 할지라도 당신들에 대한 폭력을 멈추지 않는 한 같은 비극은 되풀이 될 것입니다.


*글을 퍼 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언니네 채널넷(www.unninet.co.kr) 2008년 6월 특집 '살기등등' 中
Posted by 비앙
한겨레의 문화 일반 코너에서 연재했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기획을 옮겨온다. 나는 당연하게도, 박정수씨 보다는 이현우씨와 이성민씨에 가까운 편.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9298.html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헤겔과 라캉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르크스·대중문화 이론적 틀까지
매혹과 혐오의 시선 동시에 받는
21세기 세계철학계의 이단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시대 넘나드는 철학적 재담으로
오늘날 이념적 지형·돌파구 찾아
‘독창성·진정성 없다’ 비판 불구
열정과 광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이현우/서울대 강사

[namunnib] 뭐 일단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사회운동"이 "'혁명 없는 혁명'" 내지는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은 운동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가 신사회운동의 대표적 주자인 것인양 명명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모든 운동들에도 개별성을 넘어서 "사회적 총체성"을 고려하는, 혹은 '보편성'을 고려하는 움직임들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신사회운동"이라 칭해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속성'들은, 그 어떤 '-이즘'에도 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것과 싸우고 그것과 구별하려는 움직임은 "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에서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을 터. 또한 소위 '개별' 운동들이 총체성과 아무련 연관이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같지'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초월'하고 '총체성'을 고려하고 어떻게 '보편성'에 이를 것인가. 그렇게 하려는 건 누구의 욕망인가?)




* *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0673.html


현실 비판할 뿐 대안찾기엔 침묵

② 실천 없는 철학

이현우씨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 면에서 ‘괴물’ 같은 철학자라 해도 그의 사유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 기여의 실체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결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게 박정수씨의 생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성민씨가 지젝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안수찬 기자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한 문장 속에 지젝의 비판 철학이 지닌 가치와 한계가 담겨 있다.

지젝은 헤겔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 좌파이다. 헤겔 좌파로서 지젝은 물신주의적 믿음 위에 세워진 현실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지만 정작 어떻게 그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모든 철학이 일상의 현실은 생각만큼 확고하게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연기론은 만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가르치고,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의 물질적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젝은 신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믿는 주체(인간)의 상상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방법을 따른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

신경증 환자의 실재인 ‘외상’도 마찬가지다. 외상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을 객관적 실재로 믿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속에서 객체화된 외상을 주체 자신의 창조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객관성의 형식으로 환자를 괴롭히던 외상이 주체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환자는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외상의 환상성을 깨달아도 신경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비도의 체질을 바꾸거나 대안적인 인간관계를 찾지 못하는 한, 증상은 괴롭지만 살아갈 의미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면 신앙생활은 지속되고,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 의사와 능력이 없으면 민족주의는 지속된다. 화폐의 물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걸 알아도 대안적인 교환 방법을 찾지 못하면 화폐 물신주의는 계속되며,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도 자본 권력을 대체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할 욕망과 능력이 없으면 자본가에게 좀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은 자유로운 연합체를 구성하는 욕망들과 그 욕망들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가능하다. 신ㆍ민족ㆍ자본이라는 초월적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의 욕망이 구성하는 공통적(commune) 삶의 형식, 그것이 마르크스가 기획한 코뮨주의다. 그런 코뮨적 욕망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해 노예가 되는 사회를 당연하다거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환상 숭배자들에게만 안 보일 뿐 우리의 삶 속에 실재적으로 잠재해 있다.

현실의 비실재성 폭로하면서
어떻게 벗어날까 언급 적어
인간은 서로에 대한 ‘타자’일 뿐
코뮨적 삶 불가능하다 주장도


지젝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이런 코뮨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에게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는 인간을 자연(사물, 신체)과 분리시키고,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고, 낱낱이 떨어진 개별 인간들로 분리시킨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미지의 타자로 존재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형식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유롭다고 한다. 아무도 타자의 욕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타자의 욕망은 배려의 대상일 뿐 아니라 유일한 가치척도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참아라’거나 ‘즐겨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할 뿐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척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시장 민주주의적인 가치척도를 위해 딱 하나 금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을 배려하지도 않고, 타자의 욕망을 척도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수’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것,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 경제가 대중을 일반적 노예로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지젝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넘어선 세계 질서를 언급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이 기획은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을 승인하면서 시작된다. 홉스가 말한 ‘국가’라는 괴물. 지젝은 프로이트의 문명론에 내재한 홉스주의를 충실히 반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은 ‘법’과 ‘초자아’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욕망을 억압하는 법과 억압을 욕망하는 초자아가 없으면 인간 무리는 욕망의 충족을 향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젝 역시 상징적 질서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미지의 타자이며, 평화로운 이웃들의 이면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이 욕망의 시장 체제를 초극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 주체 형식으로서의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모든 작은 타자들을 하나의 총체적 집합으로 통합하는 예외적 큰타자, 곧 헤겔의 입헌군주와 모든 작은 괴물들의 욕망을 중화시키는 보편적 욕망의 괴물, 곧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솔직히, 지젝의 기획이 정말 이걸까 의심했는데, 이현우씨의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욕망의 자유민주주의 벗어난
헤겔·레닌 결합한 제국 기획
‘헤겔 좌파’인지 ‘우파’인지 모호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불투명


헤겔의 입헌군주가 정말 ‘텅 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남아 있을까?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의 관료집단들이 정말 ‘비계급’으로서의 보편계급을 대변할까? ‘지젝의’ 레닌주의에 따라붙을 이런 의문들은 사실 본질적인 게 아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젝의 말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실천은 가짜 행위다. 실천의 근거는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예견에서 찾을 수 없다. 혁명의 실천은 전대미답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근거는 그로 인해 창조되는 세계가 좋은 세계라는 자기 확신뿐이다. 지젝은 정말 그걸 확신하고 있을까?

지젝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타자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그래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물어보게 만들지만) 그런 만큼 자유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자유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그래서 텅 빈 상징으로 존재하는 주인에 의존할 때만 자유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의 상징적 주인 밑에서 보편적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때 지젝은 더는 지배적 현실의 환상성을 비판하는 헤겔 좌파가 아니라, 유일한 지배자의 환상으로 수립된 현실을 추구하는 헤겔 우파의 자리에 선다. 그것도 좋다. 좌파든 우파든 중요한 건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삶을 창안하고 싶은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가? 지젝의 흥미진진한 비판의 뒷맛으로 그가 욕망하는 삶을 느끼고 싶다. 무리인가?

박정수 / 수유+너머 연구원


* * *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 안수찬 기자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정치·경제체제 변화보다
개인 향유 방식의 변화가 더 시급
“문명의 모든 것을 재발명하라”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 아닌
혁명 가능성의 조건 탐색할 뿐
지젝의 ‘정치적 기획’ 주장은 오독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Posted by 비앙
허, 참. 흥미로운(!) 기사다. 2MB 행정부가 꼼짝도 않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인 것 같아서 옮겨 둔다. 오늘은 4만이나 거리로 나왔는데 꼼짝도 안하는 그 인간 밑에 있는 사람들이니 오죽 하겠냐마는... 진짜 분통이 터진다. 사실 적당히 어이 없으면 생까고 마는데, 이건 뭐, 진짜 뭥미?

암튼 이번 정부 인사들은 관상부터가 최악이다. 어쩜 저렇게 기름기 좔좔 흐르는 재수없는 얼굴들이 많을까. 40대가 지나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건 정말 맞는 말 같다. 자기가 보통 접하는게 무엇인지, 자기가 처한 일상적인 환경이 어떤지,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이 어떤지 등에 따라 얼굴은 변한다. 마치 먹는게 같다 보니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차츰 체지방의 축적율 등이 비슷하게 되어 얼굴이 닮아가는 부부들처럼, 2MB 정부 인사/각료 그 인간들도 맨날 보고 먹고 듣고 하는게 그 밥에 그 지랄들이다보니, 그냥 죄다 다 닮아 보이는 것 같다. 아아 젠장; 뉴스 보는게 겁나; 하긴 이번 정부는 출발부터 외모지상주의를 과감히 깨트리고 출범한 정부니까 -_-; 빌어먹을; 빌어먹을;



"멍청한 대중은 재밌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부정 여론 진원지 방송·인터넷 적극 관리"

2008년 5월 28일(수) 오후 6:53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지난 10일 오후 정부 중앙 청사 별관에서 열린 각 정부 부처 대변인 회의에서 기자실 복원 세부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부정적 여론 확산의 진원지(방송·인터넷)에 대한 각 부처의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겠음."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지난 9일 열린 정부의 언론 대책회의 문건에 적시돼 있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문제로 촛불문화제가 한참 확산되고 있던 그 때, 정부는 부정적 여론을 차단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한겨레21> 최신호(712호)는 그날 회의 문건인 '부처 대변인회의 참고자료'를 입수해 당시 어떤 주제가 논의됐는지 보도했다.

<한겨레21> 보도에 따르면, 당시 언론대책회의에는 청와대 관계자를 비롯해 정부부처 대변인 22명이 참석했다. 청와대 쪽에서는 박흥신 언론1비서관, 추부길 홍보기획비서관이 참석했다. 그리고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조원동 국무총리실 국정운영실장, 김규옥 기획재정부 대변인 등을 비롯해 대부분의 정부부처에서 참석했다.

정부 언론대책회의 "방송과 인터넷 적극적 관리 필요"

이들은 각 언론사의 보도 논조에 따라 정부 광고를 어떻게 집행할 것인가를 주되게 논의했다. 즉 삼성 특검이 진행될 때 삼성이 자신들에게 비판적 보도를 하는 언론사에 광고를 주지 않았던 것처럼, 정부도 자신들이 집행할 수 있는 광고비로 일부 언론사를 달래려 했던 것이다.

특히 문건에 신재민 차관의 '말씀'으로 분류된 부분이 흥미롭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의 확산 진원지로 방송과 인터넷이 지목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한 대상으로 분류했다. 

이는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논란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선이 어떤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정부는 자신들의 부실한 협상을 성찰하지 않고, 논란의 원인을 일부 언론의 비판적 보도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9일 열린 언론 대책회의에서는 '청와대 홍보 관련 지시사항 전달'을 통해 신문 가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빠른 대응 방법도 논의했다. 정부의 가판 신문 구독은 언론 로비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참여정부에서는 금지됐다. 하지만 "프레스 프렌들리"를 외친 이명박 정부에서는 가판신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지원국 소속 12명이 참가한 정책 커뮤니케이션 교육에 사용된 자료집 '공공갈등과 정책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의 일부.
ⓒ 박상규




"대중은 꼬드기면 바로 세뇌... 인터넷 게시판은 외로운 사람 한풀이 공간"

또 <한겨레21>은 9일 문화체육부 홍보지원국 소속 공무원 12명이 참가한 정책 커뮤니케이션 교육에 사용된 68쪽짜리 자료집 '공공갈등과 정책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입수해 보도했다. 이 자료집에는 중앙정부 공무원 교육 자료집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황당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자료집 한 카테고리의 제목은 '멍청한 대중을 조작, 영합(하는 방법)'이다. 제목도 문제가 있지만, 수록된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해 잘 꾸며서 재미있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 가능."

"몇 가지 비판적 요소를 받아주고 '기술을 걸면' 의외로 쉽게 꼬드길 수 있음."

"그럴듯한 감성적 레토릭(Rhetoric)과 애국적 장엄함을 섞으면 더욱 확실. ex) 붉은 악마."

또 자료집은 인터넷 미디어와 시민단체의 타락을 최대한 활용하라며 아래와 같은 '팁'을 제시하고 있다.

"조중동에 꿇던 것 30%만 꿇으면 더욱 확실한 공작효과."

"인터넷 게시판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한풀이 공간. 따뜻하고 친절한 응대(필요)."

"비판성의 상당부분이 주류(main stream)에 못 낀 좌절을 포함 엉겨주면 너무 뿌듯해함."

자료집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인터넷 게시판은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의 자기실현 공간,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같이 떠드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대중매체의 영향'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대충 질러대서 뜨고 나면 그만"이라며 그 예로 손석희, 김미화, 신강균을 들고 있다.

"조중동만이 아니라 방송사의 기자, PD도 표 안나게 관리하라"

이 뿐만이 아니다. '제대로 피하고 알리는 지혜' 부분에서는 "공격적 인터뷰에서는 뭉개기, 거꾸로 묻기, 잘 아는 것만 말하기"를 제시했고, 위기모면 기술로는 "웃기기, 그럴듯하게  말하기, 늘여 말하기"를 제안했다.

또 언론 대응 전략으로 "조중동 중심의 관리를 넘어서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며 "방송판의 주요 기자, PD, 작가, 행정직을 절대 표 안나게 관리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지원국은 국내외 국정홍보 지원을 총괄하며 국내외 뉴스의 수집, 분석 업무 등을 담당한다.

13일 오후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서 방송통신위원회 송도균 부위원장 임명에 대해 야당의원들이 친여인사 임명이라며 공격을 퍼붓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해명하고 있다.(자료사진)
ⓒ 남소연


출범 초기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프레스 프렌들리"한 정권이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약속과 달리 현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처럼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위에 적시한 언론 대책회의와 홍보지원국의 부적절한 교육 자료집만 봐도 그런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방송 때문이며 그 원인 중 하나가 한국방송 정연주 사장"이라고 말해 물의를 일으켰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보도유예와 비보도 요청을 남발해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은 최근 촛불집회 정국에 대응하기 위해 대책회의도 열기도 했다. 바야흐로 자율과 분권, 그리고 다양성의 시대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통제와 권위의 시대로 퇴행하고 있다.  












여기서부턴 로쟈님의 블록에서 퍼왔음.

한겨레21(08. 05. 26) “부정적 여론 진원지, 적극적 관리 필요”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입만 열면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불통’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소통은 국민의 말을 듣고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정부의 말만 듣고 따르라는 ‘일방통행’ 같다. 이런 방식의 소통을 생각하는 정부에게 국민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순치의 대상일 뿐이다. 순치의 수단은 두려움와 회유다. 이른바 공안 정치다.

<한겨레21>은 청와대와 정부가 언론과 인터넷 포털을 순치시키기 위해 마련한 ‘채찍과 당근’이 담긴 문건을 입수했다. 국민들이 서로 불신하게 만드는 경찰의 공안 시스템이 부활하는 현장도 잡았다. 이른바 김경준씨 기획입국설 수사를 통해 정부와 검찰이 정치권을 향해 겨누고 있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의 방향도 점검해봤다. 이번 취재를 통해, 민주정부 10년을 거치고도 정부 각 기관에 ‘공안의 DNA’가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국민에게는 민주정부 10년의 경험을 통해 ‘자유의 DNA’가 심어져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공안의 부활’을 예단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편집자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으로 국민 여론이 크게 악화됐던 5월9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와 정부 부처 대변인들이 연 언론 대책회의 내용이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한겨레21>이 5월23일 입수한 ‘부처 대변인회의 참고자료’를 보면, 당시 회의에서는 신문과 방송, 인터넷은 물론 지역신문에 대한 ‘관리 방안’이 논의됐으며, 이를 위해 정부 광고의 집행, 언론·정부 공동(협찬) 행사 운영, 가판 모니터링 강화 등의 방법이 거론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반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 핵심 관계자들이 모여 사태의 원인을 언론 탓으로 돌리고 ‘언론 길들이기’ 수단을 논의한 것은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문제의 회의 내용 일부를 보도한 <경향신문>(5월17일치)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며 언론중재를 신청했지만, 관련 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문서가 확인됨에 따라 정부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논조 안 맞으면 광고 주지 말자”
문건에 따르면, 당시 ‘부처 대변인회의’ 참석자는 모두 22명이었다. 주요 인사는 청와대 박흥신 언론1비서관과 추부길 홍보기획비서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조원동 국무총리실 국정운영실장, 김규옥 기획재정부 대변인 등이다. 이 밖에도 거의 모든 부처의 대변인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는 신재민 차관의 모두 발언으로 시작해 조원동 국정운영실장의 언론 대응 방안 발언으로 이어졌다. 핵심 주제는 언론사의 논조에 따른 정부 광고 운영 방안이었다. 쉽게 말해 정부를 비판하는 특정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정부 광고를 집행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거론된 것이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은 한 참석자의 말을 빌려 “회의 모두에 조원동 국정운영실장이 일부 언론의 쇠고기 관련 보도가 적대적인 만큼 이에 상응하는 정부 차원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냐는 취지로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참석자는 “<경향신문> 논조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파문 관련 해명 광고 내용이 너무 다른 만큼 과연 이런 신문에 광고를 줄 필요가 있느냐를 놓고 고민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경향신문> 보도가 논란이 되자 문화부에서는 “각 부처 대변인회의는 격주마다 열리는 정례회의로, 정부 광고와 관련한 얘기를 할 성질의 회의가 아니었다”라고 해명했다. 이마저도 거짓말이었다. 이날 회의자료를 보면, 정부 광고 운영 방안은 표지에도 ‘주요 논의사항’으로 소개돼 있다. 자료 3~4쪽을 보면, 조원동 실장이 관련 논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부처 협조사항 논의’라는 항목으로 △언론·정부 공동(협찬)행사 활성화 △특정 언론 대상 정부 광고 및 기고 금지 조치 해제 이후, 운영상 문제점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언론광고 집행 여부를 특정 언론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려는 천박한 인식에서 비롯된 행태라는 지적이다. 즉, 정부 광고는 정부가 최대한 많은 국민에게 알려야 할 내용이 발생할 때 집행하는 것이다. 특정 언론사의 논조나 규모와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 이른바 비판 언론의 독자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정부 광고를 통해 정부 입장을 전달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신재민 차관이 발표한 다른 언론대책 내용도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쇠고기 논란과 관련해 신 차관의 ‘말씀자료’에는 “부정적 여론 확산의 진원지(방송·인터넷)에 대한 각 부처의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겠음”이라고 적시돼 있다. 이어 “학생·주부 등 정서적 민감 계층의 동요가 많은 점을 감안해 교과부·보건복지가족부 등에서는 교육 현장 및 주부 대상 프로그램 등을 활용한 정확한 정보제공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도 관련 뉴스 배치 확인
정부의 부실한 쇠고기 협상에서 비롯된 비판적 여론을 방송과 인터넷 탓으로 돌리고 이에 대한 적극적 ‘관리’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언론통제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국세청이 5월초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이같은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기업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는 대개 5년마다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음은 지난 2004년 세무조사를 받았다. 다음은 이례적으로 4년만에, 그것도 대단히 미묘한 시기에, 세무조사를 통보받은 것이다. 또다른 포털사이트인 야후 역시 지난 4월말 세무조사를 통보받았다.

포털사이트에 대한 전격적인 세무조사 통보가 눈에 보이는 압박요인이라면, ‘포털 검열’ 의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더욱 심각하다. 신 차관은 5월9일 회의에서 광우병 파동 등을 예로 들며 ‘언론보도 관련, 조기경보 체계 가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1차적으로 문화부 홍보지원국에서 인터넷상의 각 부처 관련 사항을 모니터링하고 해당 부처에 신속히 통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발언이 나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5월14일께 문화부 홍보지원국에 ‘인터넷 조기대응반’이라는 이름의 비공식 조직이 꾸려진 것으로 확인됐다.

“부정적 여론 확산의 진원지(방송·인터넷)에 대한 각 부처의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겠음”이라는 대목과 관련해 주목해볼 만한 정부 보고서도 있다. 정부의 언론 대책회의가 열린 직후 외교통상부가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 ‘인터넷 여론 형성 과정-독도 괴담 사례’ 등의 문서다.
5월19일 일본 문부성이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명기할 방침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이명박 대통령의 대일 외교에 대한 비난 여론이 또 한 번 들끓었다. 해당 보고서는 이를 계기로 작성됐다. <한겨레21>이 입수한 보고서 내용을 보면, 정부는 정당한 비판 여론에 관심을 두는 대신 이른바 ‘독도 괴담’이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독도 괴담이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지식인 게시판을 통해 형성되고 유통되는 것으로 보고 ‘이명박 독도 포기?’(2008년 5월3일) 등 7개의 지식인 게시물을 예로 들었다. 보고서는 괴담의 유포 경위에 대해서는 “괴담 유포 시점이 광우병 문제가 논란이 된 시기와 맞물려 있어 정치적으로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 유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네이버와 다음, 엠파스 등 주요 포털에서 독도 관련 뉴스가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는지에 대해 확인하고 있다. 보고서에는 독도 관련 토론방은 물론 카페와 블로그의 주소, 심지어는 댓글 동향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어놓았다.

포털에 “비판 댓글 ‘블라인드’ 처리하라”
문제는 보고되는 내용 대부분이 ‘쪽발이, 왜놈 등 극단적 반일 표현과 극일 주장이 속출’ ‘이명박이 화근이야 등 대통령에 대한 비이성적 비난이 다수’ ‘비논리적, 무조건적 독설 및 비방 다수’ 등으로 인터넷 여론을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정부의 부주의 결과 사태가 악화되었다는 등 합리적 비난에 대해서도 일부 소개하고는 있지만 양적으로 적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파동 등에 대해 끊임없이 ‘괴담’ 탓을 하는가 하면, 포털에 대한 댓글 삭제 압력까지 행사하는 배경이 이같은 보고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부는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이명박 대통령 비판 댓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해 물의를 빚은 일이 있다. 다음 등에 따르면 5월3일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시중) 네트워크윤리팀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와 “광우병 관련 글이 올라오고 카페가 만들어지는 등 심상치 않다”고 말한 뒤 이 대통령 비판 댓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블라인드는 삭제의 한 방법이다.

5월9일 언론 대책회의에서는 얼마 전 불거졌던 혁신도시 논란에 대해서도 다뤄졌다. 정부는 혁신도시 논란을 “지역 이기주의에 근거한 지역언론의 정부 정책 비판”으로 매도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는 “(특히 영남권·충청권 지역언론이) 혁신도시 등 지역균형 발전 추진에 대한 정부 신뢰성에 강한 의문과 함께 부정적 여론을 중점 부각”하고 있으며, “쇠고기 수입과 조류독감에 대해서는 비판 언론에 버금가는 수준의 비판적 시각을 집중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쯤 되면 모든 게 언론 탓이라는 식이다.

정부의 언론 탓은 이날 회의에서 신문 가판에 대한 점검을 강화하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청와대에서 참석한 박흥신 언론1비서관 등은 ‘청와대 홍보 관련 지시사항 전달’을 통해 가판 모니터링 강화 및 신속 대응체계를 논의했다. 정부의 가판 신문 구독은 언론사에 대한 로비와 압력 행사의 창구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 때문에 참여정부 시절부터 폐지됐던 악습이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지난 정부에서 가판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언론사들이 이에 화답한 것은 가판이 오랫동안 정부 의도대로 신문 논조를 조작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활용됐기 때문”이라며 “가판 모니터링으로도 모자라 신속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은 언론 보도가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청와대가 입맛에 맞게 내용을 바꾸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신문 가판 점검도 강화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 ‘프레스 프렌들리’라는 희한한 말까지 써가며 언론과의 건강한 관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취임 100일이 지나기도 전에 언론 환경이 5공화국 시절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인터넷 댓글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한국방송> 정연주 사장에 대한 정부의 퇴진 압력도 도를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조직이나 마찬가지인 뉴라이트전국연합과 극우 단체인 국민행동본부 등 일부 보수단체가 감사원에 제기한 특별감사 청구는 단 7일 만에 뚝딱 통과됐다. 전윤철 감사원장이 외풍으로 인해 정해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감사원을 떠나자 곧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비판 언론에 대해서는 ‘광고’ ‘관리’ 등의 용어까지 남발하고 있는 현 정부의 언론관은 전속력으로 추락하는 이 대통령의 지지율과 닮았다. 5월9일 여의도 한 언론사 건물에서 열린 정부의 언론 대책회의 내용은 현 정부의 언론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최성진기자)

문화부 홍보지원국 교육 자료 입수

‘외롭고 가난한’ 네티즌 대응방안은 ‘세뇌와 조작’
“(인터넷) 게시판은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의 한풀이 공간.”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 잘 꾸며서 재미있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 가능.”
“어차피 몇 푼 주면 말 듣는 애들에게 왜 퍼주고 신경쓰는가.”

인터넷 ‘악플’이 아니다. 하지만 악플 수준의 현상 진단과 대책이 오간 이 자리는 이명박 정부가 5월 초 홍보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문가 집담회였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던 시점에 마련됐다. 문화부 홍보지원국 소속 공무원 12명이 참가한 이날 정책 커뮤니케이션 교육에는 68쪽짜리 ‘공공갈등과 정책 커뮤니케이션의 역할’ 자료가 활용됐다. <한겨레21>이 입수한 해당 문건의 내용은 홍보담당 공무원 교육용이라고 보기에는 위험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우선 이 자료는 최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반 현상을 언론의 선정주의 탓으로 돌린다. 정부 정책이나 의사소통 능력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은 채, 특히 방송이 감성적 선동의 온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중매체는 기본적으로 감성에 민감하다. 신문의 상대적 위축과 방송의 부상 속에서 <미디어오늘> 출신 방송쟁이가 <조선(일보)> 데스크만큼 괴롭힐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식한 놈이 편하게 방송하는 법이 대충 한 방향으로 몰아서 우기는 것이다. 신강균, 손석희, 김미화 등 대충 질러대서 뜨고 나면 그만이다.”

포털 사이트 등 인터넷 공간을 기본적으로 ‘저급 선동의 공간’이라고 정의한 뒤 젊은 층은 아무 생각도 없고 비판적 이성의 밑천도 바닥이라고 폄하한 대목도 문제다. “이해찬 세대의 문제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고 원칙도 없다는 것이다. 학력이 떨어지니 직업전선에 더욱 급급하고, 하다 안 되면 언제든 허공에 주먹질할 것이다. 최루탄 3발이면 금방 엉엉 울 애들이지만 막상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부리기엔 아주 유리하다.”

황당한 대응방안도 나왔다. 핵심 키워드는 ‘세뇌’와 ‘조작’이다. “다양해진 미디어를 꼼꼼하게 접하고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 게시판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한풀이 공간이지만 정성스런 답변에 감동하기도 한다.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하므로 몇 가지 기술을 걸면 의외로 쉽게 꼬드길 수 있다. 붉은 악마처럼 그럴듯한 감성적 레토릭과 애국적 장엄함을 섞으면 더욱 확실하다.”

이날 교육에서는 마지막으로 언론 대책과 관련해 “절대 표 안 나게 유학과 연수, 정보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한 주요 기자와 프로듀서, 작가, 행정직의 관리가 필요하다”며 “소프트 매체에 대한 조용한 (취재) 아이템 제공과 지원도 효과적”이라고 끝맺고 있다. 이에 대해 문화부 관계자는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해당 교육은 문화부 공식 행사가 아니라 홍보지원국 소속 12명의 공무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부모임 같은 것”이라며 “(문제의) 교육 내용을 문화부가 그대로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여러 의견 가운데 하나로 참고하겠다는 정도”라고 말했다.

최시중·이동관·신재민

빅 브러더스 3인방
언론 환경을 5공화국 시절로 되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정부 인사는 최시중·이동관·신재민 등 3인방(사진 왼쪽부터)이다. 이 세 명의 ‘빅 브러더스’는 모두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대선 직전까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을 지냈다.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 이상득 국회부의장 등과 함께 이 대통령의 ‘복심’이자 그림자로 불린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역시 선대위에서 각각 메시지팀장, 공보상황실장을 맡았다. <동아일보> 출신인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공영방송인 한국방송 장악을 위해 도를 넘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방송 때문이며 그 원인 중 하나가 한국방송 정연주 사장”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 출입기자를 ‘마크’하고 있다. 이 대변인이 대통령의 입으로 나선 직후 청와대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엠바고’와 ‘오프더레코드’ 요청이 속출하고 있다. 엠바고는 조건부 보도제한, 오프더레코드는 보도금지다. 이 대변인은 지난 4월 말 자신의 부동산 투기 의혹 보도를 막기 위해 <국민일보> 편집국장에게 직접 압력을 넣은 사실도 있다. 문제가 터지자 청와대 내부에서도 ‘이 대변인이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높았다. 그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터진 미국산 쇠고기 파동 덕분이었다. 여론의 관심이 쇠고기로 옮겨가며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최 위원장과 이 대변인은 둘 다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안고 있다. 이 대변인은 <동아일보>에서 논설위원까지 지냈다.

현 정부의 미디어정책을 관장하는 신재민 차관은 특히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압박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을 통해 미국산 쇠고기 논란이 확산된 직후 그는 “포털도 언론중재법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등의 언급을 했다. 최근 문화부 안에 ‘인터넷 조기대응반’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든 것도 신 차관이다. 그는 <조선일보> 부국장 출신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3인방이 언론탄압의 전면에 나선 것에 대해 시민사회와 언론계의 우려는 높아지고 있다. 180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는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비뚤어진 언론관을 가진 사람들이 요직에 앉아 있는 한 이명박 정부는 끊임없는 언론통제 논란으로 국민의 분노를 키울 것”이라며 “정부의 대언론 관계를 파행으로 이끈 최시중 방통위원장, 이동관 대변인, 신재민 차관은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Posted by 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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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이름만 담그고 있는 사대여모에서 나온 자보. 교ㅅ도 이제 막바지다~



불법시위의 오명을 넘어서 -'집시법' 다시보기


무엇이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는가

경찰과 정부에 의해서 ‘허가’되어 온 평화적이고 합법적이었던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는, 그러나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어느 순간 특정 ‘배후 세력’의 선전·선동으로 거리로 나서 행진을 시도하고 도로를 점거하는 등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시위로 ‘변질’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어져 논쟁합니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도로를 점거해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등 불법시위를 해서는 안되지 않냐”와 “촛불집회를 해도 우리의 이야기를 안 들어주지 않냐, 얼마나 절박했으면 불법시위를 감내하면서 거리로 나섰겠냐.” 그렇습니다, 아마도 도로를 점거하고 행진하고 전경과 대치했던 시위대, 그 시위대를 구성한 많은 시민들은 우선은 정부가 이야기를 안 들어준다는 답답함과 절박함에, 그리고 오히려 자신들을 핍박하는 공권력에 대한 분노로 거리로 나섰을 것입니다.


집회나 시위를 '허가'해주는 경찰?!

검찰과 경찰, 노동부의 지도부들은 5월 27일 화요일에 공안대책회의를 열고 광우병 쇠고기 집회가 정치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우려, 평화집회를 여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불법적으로 폭력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날 밤, 거리에서 시위를 하던 100여명의 시민들을 한꺼번에 연행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법질서 유지를 위한 의지'를 보여준 셈이지요. (그만한 인력을 유괴나 성폭력 같은 무서운 범죄들을 예방하는데 투입해줬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단순히 중학교 때 배운 사회 과목이나 고등학교에서 배운 정치 과목의 한 부분만 돌이켜보더라도 “집회 및 결사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권”일 텐데 왜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없는’ 혹은 ‘하면 안 되는’ 집회나 시위가 많을까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직접 나서고 지지하는 시위가 단순히 도로를 점거했다고 불법이니까 하면 안 되고 하면 잡혀가는 것일까요? 그럼 정말 저들의 말대로 얌전히 시키는 장소에서 촛불만 들다가 정부가 들어주면 감사히 여기고, 들어주지 않으면 그냥 화를 삭이며 집으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헌법 원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

<헌법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이 말은 다소 불편하거나 시끄럽다고 해서 집회·시위를 제한할 수 없으며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흔히들 말하는 ‘경찰에 의해서 불허된’ 혹은 ‘허가받지 않은’ 따라서 ‘불법인’ 집회 같은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헌법에서 이렇게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회나 시위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조차 무슨 집회는 불법, 무슨 시위는 하면 안 되는 시위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원칙적으로 ‘신고제’인 집회가 사실상 ‘허가제’인 것처럼 교묘하게 이용해온 경찰 및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현재 경찰이 집회 및 시위를 합법 혹은 불법으로 규정하는 기준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2004년에 한번 크게 개정(사실은 개악)된 것으로 ‘신고제’인 집회 및 시위를 마치 ‘허가제’인 것으로 악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법입니다.

사실 집회나 시위시 경찰에 미리 신고를 하는 이유는 경찰 ‘따위’의 허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회를 보호하고 교통소통이 문제가 없게 사전조치를 마련하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집회는 원래 그냥해도 되는 것이지만 경찰업무 협조차원에서 ‘친절하게도’ 알려주는 것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경찰 측에서 악용·오용·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합법/불법, 평화/폭력의 기준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

물론 우리가 지양해야 할 만한 어떤 시위문화가 분명히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합의는 시위에 참여하는 우리 스스로, 시민들 스스로가 그 시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합의되고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경찰·검찰이나 정부에 의해서 미리 ‘만들어진’ 판만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25일 새벽,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진행하던 시민들이 더 이상 촛불을 드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청와대로 자발적이고 평화로운 행진을 시도했던 것처럼,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매일같이 모여 거리로 나서고 있는 것처럼, 방패라고 불리는 무기를 가지고 무력 진압하는 전경에 맞서 비폭력저항을 결의하고 스크럼을 짜는 것처럼.


함께 거리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집회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시위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촛불을 들고, 발에 편한 신발을 신고, 염원과 소망과 요구를 품고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사범대 여성주의자 모임 쵸딩
사범대 여성주의자 모임 파란
Posted by 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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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 낯익은 이름이.. ^^; 서동진 선생님 강연은 이미 지나고나서야 알게되어 가지 못했다 orz
4월 2일과 4월 16일만 가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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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인지 다행인지, 여기 나온 4월 14일과 15일은 모두 연극 상연일이야... 흑흑 ㅠ.ㅠ
Posted by 비앙

출처 :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090

킁.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와 더불어 사놓고 못 보고 있는 책... -ㅅ-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는 못사고 있다. 왜케 이 시리즈는 가격이 비싼겨;ㅅ;)

이런 저런 것들을 걸러서 읽자. 난 왜 이렇게 바디우의 생각이 무서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나의 계급이나 뭐 그런 것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솔직히 서구에서 '기독교'가 갖는 위치랄까 뭐랄까, 암튼 그게 완전히 와 닿지 않다보니, 왜 이렇게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이 사도 바울에 목을 매고 있는지 잘 모를 일이다.. 그런 담론이 한국에 넘어올 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잘 모르겠다. 별로 (적어도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의미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은. 아직은 판단 유보. 홍홍.

어쨌든, 강조는 비앙 :)



사도 바울, ‘다시’ 논쟁의 가운데 서다
알랭 바디우『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그러나 이렇게 말한 맑스 역시 잊은 것이 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반복이 꼭 비극-소극 짝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그 예외적인 경우 중 하나가 사도 바울(10?~67?)과 철학자들의 조우이다. 이들 간의 첫 번째 조우는 대략 51년경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등의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배꼽을 움켜잡은 채 파안대소하며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희극적이라고 할 만한 이 조우 이후 거의 20세기 뒤에 이뤄진 두 번째 조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현대 유럽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조우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1937~  )에 의해 촉발되어 지난 2005년 미국 뉴욕 주의 시러큐스 대학에서 제법 ‘진지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바디우인가? 바디우 이전에도 사도 바울을 언급한 철학자들은 부지기수이다(바디우 본인이 작성한 명단만 봐도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리오타르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바디우만이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의 두 번째 조우를 실제로 현실화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디우의 바울은 ‘사도’ 바울이기 전에 ‘투사’ 바울이기 때문이다. ‘투사’ 바울의 형상을 찾는 것 역시 바디우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로 그려진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새로운 투사였고, 이 새로운 투사로서의 바울이 갖는 동시대적인 의미는 동료 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번에 국역되어 나온 바디우의 1997년 저서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원래 제목은 “성 바울: 보편성의 정초”이다)는 바로 이 두 번째 조우의 발단이자 초대장 같은 책이다. 이 초대에 응할지 안 할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겠지만, 이 초대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보편성’의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기 때문이다. 흔히 보편성이란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모든 사람/사물에 적용되는 어떤 성질/원칙이다. 그런데 바디우의 설명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정초한 보편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는 기존의 모든 차이와 분리를 무화시키는 무엇인가가 보편성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자와 후자의 보편성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실제 대상들에서 뭔가 공통적인 것을 ‘추출’해낸 것이라면(이런 보편성은 “……이지만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지만 인간이다”), 후자는 공통적인 것을 ‘창출’해냄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보편성은 “……이고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고 그리스도교인이다).

<'사도 바울'과의 두 번째 조우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사진)에 의해 촉발됐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적 주체’라는 새
로운 주체를 창안함으로써 바로 이 새로운 보편
성의 윤곽을 정초했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적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를 창안함으로써 바로 이 새로운 보편성의 윤곽을 정초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 위해서 그/그녀가 반드시 어떤 특정한 귀속 조건(민족, 성별, 신분 등)을 미리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봤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28)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는 묘한 ‘도약’이 있다. 통상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것 안에서 통합된다. 가령 성별의 범주로 보면 그/그녀는 남성/여성이지만, 종(種)의 범주로 보면 인간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성별)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공통적인 것(종)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그녀의 정체성은 연속적이다, 혹은 말 그대로 동일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는 이런 연속성(동일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범주는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무화’된다. 그러므로 이때의 공통적인 것은 기존의 차이와 분리를 뛰어넘는(여기서 “뛰어넘는다”는 “극복한다”보다는 “초월한다”에 가깝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은 차이에 ‘무관심’하다) 제3항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가 창안되려면 그 이전의 주체에게서 미리 일종의 단절이 일어나야만 한다. 열정적으로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담하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을 사도 바울로 뒤바꿔놓은 것과 같은 단절 말이다.

바디우는 이 단절을 ‘사건의 도래’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단절이었다. 바디우가 그 안에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레닌에게는 1914년 8월에 발생한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 혹은 1917년 2월 혁명이 그런 사건이겠다(흥미롭게도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 시기를 레닌의 ‘철학적 계기’라고 부른 바 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실이 아니다. 사건은 “한 시대의 열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관계들의 변화”, 즉 가능성의 열림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음”) 때문이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열린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사건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건은 단절이기에 “……이 아니라 ……임”의 논리를 갖는다. 바디우에 따르면 여기에서 “……이 아니라”는 폐쇄적인 특수성들을 해체하는 과정이고, “……임”은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에 주체들이 동역자(즉, 사도)로서 임해야 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은 주체(화)와 하나의 구성적 짜임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 이 사건을 사건으로서 볼 수 있는 주체(사도)가 있다. 이 주체는 이 사건을 사건이라고, 혹은 이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의 사상가”가 “시인”인 동시에 “투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건의 사상가는 늘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하기에 시인(시인의 어원이 그리스어 ‘만들다’[ποιέω]인 점을 염두에 둬라)이며, 그 보편성에 근거해 새로운 세계를 열기 때문에 투사이다.  

그리고 두 가지 공식이 있다. “……이 아니라 ……임”이라는 사건의 논리.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 이 두 가지 공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주체는 사건의 논리에 따라 이미 도래한 사건을 저지하려는(또는 보지 못하는) 힘을 해체하고, 주체화의 논리에 따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료들을 사건에 충실한 주체로 만듦으로써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걷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진리의 사건=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바로 이것이 바디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가 왜 첫 번째 조우 때와는 달리 희극적이지 않았나를 이해
할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들이다."-본문에서


사건, 주체성, 보편성. 바로 이것이 바디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가 왜 첫 번째 조우 때와는 달리 희극적이지 않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들이다(따라서 이 두 번째 조우에 “철학자들 한가운데의 성 바울: 주체성, 보편성, 그리고 사건”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인류의 위대한 실험이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체의 진리가 상대화되고, 인류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원칙이 의심받으면서 국가에 맞서는 정치가 정체성의 정치로 축소되어버린 오늘날, 우리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려 한다면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의 의미를 몸소 보여준 ‘우리의 동시대인’인 사도 바울을 외면할 수 있을까?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소 뒤처진 감이 있지만, 우리는 뛰어난 국역자의 도움으로 비로소 바디우가 내놓은 ‘미래를 위한 내기’에 동참할까 말까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이 내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철학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있다. 아감벤은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를 “……이지만 ……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남겨진 시간: 로마서에 대한 주해』, 2000)의 논리로 다시 읽는데, 이는 사도 바울을 “보편성의 정초자”가 아니라 “급진적인 분리의 주창자”로 읽는 방법으로서 바디우의 주체화 논리와 첨예한 쟁점을 형성 중이다. 그리고 『까다로운 주체』(1999)에서 『꼭두각시와 난장이: 그리스도교의 도착적 핵심』(2003)[이 책의 국역본 제목은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에 이르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표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의 결과 역시 곧 책으로 발간될 예정이며, 그리고 또…….

아무튼 우리에게는 더 많은 판단 자료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바디우의 말마따나 많은 사건들, 심지어 멀리 떨어진 사건들조차 여전히 우리가 그것들에 충실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재원은 중앙대 대학원 영문과(비평)를 졸업했으며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장으로 일했다. 『사진에 관하여』, 『속도와 정치』, 『타인의 고통』, 『불복종의 이유』, 『은유로서의 질병』 등을 옮겼다.

Posted by 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