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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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05/24 12:41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늘 새벽, 신경숙 소설가의 신간을 끝마침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썼다고 했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그 시간대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폈을 때는 어둑하고 눅눅한 새벽 3시였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 허리를 곧게 펴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제목과 소설이 정확히 상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아 좀 불만이기는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수작인 것 같다. 여느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을 읽기는 읽어도 늘 별다른 감동없이 읽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편집실에서, 낡디 낡은 보부아르의 책 앞면에 씌어있던 손글씨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 관계의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맺음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반전화와 편지와 전보만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던 시절의 청춘들은, 불가피하게 좀 더 깊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어도 관계도 좀 더 익을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내면에서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으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지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들ㅡ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와 퀵 메시지가 아니라, 어쩌면 침묵과 견뎌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재하거나 느리게 찾아오는 것들에 대한 환대.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해지는 것.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에게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말마따나 덥석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내가 이미 거쳐온 시간 혹은 지금도 거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관계의 부침(vicissitude)을,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여러 기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네에서 벤치에서 계단에서 혹은 누구도 앉자고 하지 못해 아예 선 채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들로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아침 해를 맞아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들.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온 신경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려하고 질투하고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간들. 그때의 냄새와 온도와 바람과 사소한 분위기나 오갔던 대화 같은 것들. 빈곤했던 기억에 얼마간 생생한 서사와 언어가 부여되면서- 기억이 비로소 재조립되고 있다. 그렇지. 기억이란 이렇게도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것이지. 그러므로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기억 뿐이겠지. 이것 외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이닥치는 기억을 견디느라 잠시 눈을 책에서 떼면, 머리 속으로 문장이 하나씩 깜빡깜빡 흘러갔다. 하나의 서술로도, 하나의 명제로도, 하나의 가설로도 문장은 재생되었다. 그 문장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책귀를 접어두는 걸로 갈음했다.

나의 20대 초중반은 '시시각각'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늘 바빴고 늘 일이 있었고 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망했지만, 늘 그 무게가 버거워 헐떡대며 꿇어 앉을까 벌렁 드러누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 단면이 지나면 다른 단면이 찾아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단면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시각각'은 점차 '시간'으로 누적되고, 누적된 시간이 임계점을 넘으면 '세월'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구잡이로 누적되어 쌓였던 나의 시간이 세월에 통합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점차 먹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진 청춘인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은 이제 시시각각이라기보다는 세월일 것임을 직감했다. 청춘 이후 세월 속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호품"은 어느 시인들이 말했던 대로 "그리움"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앞으로도 애도하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나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계속 사랑할 것이고 계속 질투할 것이고 계속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역사와 기억과 맥락과 그리움과 추억이 뒤섞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이며, 더 정직하고 더 여유롭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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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10/03/16 14:53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2007&article_id=59962 에서 몇개만...

-산문과 소설을, 가볍게 쓰는 글과 힘주어 쓰는 글을 뚜렷이 구분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각별히 경건한 것 같습니다.

=천재의 소설이냐 소설이 아니냐가 아니라 진짜 훌륭한 소설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늘 그와 비슷한 소설을 추구하지만 항상 실패하죠. 그리고 다음에는 더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에세이는 평상시의 자아로 쓰는 글인데, 소설을 쓸 때는 개인으로서 쓴 적이 없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는 저보다 인생 전반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이야기를 해석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책도 많이 보고 기술적인 것도 배우고 경험도 하죠. 그대로의 저는 제가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 자신이 점점 소설 쓰는 자아로 변했고 제가 나아지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간증을 할 수도 있어요. (웃음)
 
-보통은 그냥 “작가로서 성숙했다”고 표현할 텐데 복잡하네요. 같은 사람이지만 소설을 쓰는 순간의 자신은 다른 존재라고 여기시나 봅니다.

=왜 소설 쓰는 자아와 제 자아가 다르냐면 창작하는 과정에 단절이 있어요. 처음 사회적 자아로서 뭘 쓰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먼저 스토리를 만드는데 쓰레기 같은 것들이 나와요. 평소의 내가 얼마나 후진 생각을 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죠. 마감을 앞두고 잠도 안 자고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고쳐 쓰다 뻗어버리는데, 내 자만심도, 습득한 지식도 다 부정하고 아무것도 없이 깡그리 벗겨진 그 상태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예요. 그러니 평상시의 저와는 다른 존재가 썼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대표적인 예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에요. 그 작품을 끝내는 순간에는 “이것은 소설임에 틀림없다”는 환희가 들었어요. 독자들도 제 에세이와 소설이 다르다는 걸 알아요. 에세이와 평소의 저를 좋아하지만 소설은 어려워하는 분도 있어요. 저 역시 독자들을 만나 소설을 설명할 때면 이미 평소의 자아로 돌아가 있기 때문에 남이 쓴 작품을 말하듯 어색해요. 문예지에 연재할 때는, 첫회가 제일 쉬워요. 마감하고 한달 놀고 한달 자료 찾고 마지막 달에 2회분을 쓰려고 첫회를 읽어보면 너무 잘 썼어요. 도저히 이렇게 쓸 수가 없고 남이 써줬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겠다 싶어요. 그렇게 비참해하다가 간신히 쓰죠. 그리고 3회에 가면 또 가까스로 썼다고 여긴 2회분이 훌륭해 보여요. 그 상황이 반복되는 거죠. (웃음)

-역사소설을 쓸 때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하십니다. 고증에서 상상력으로 갈아타는 지점을 어떻게 정하세요?

=상상력 자체가 자료에 기초해요. 자료로 더이상 알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자료를 보죠. <꾿빠이 이상> 같은 경우 마지막 순간에 이상이 갖고 있었던 마음이 가장 중요한데 그건 자료가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에요. 그 부분을 제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읽는 이들이 자료로 써진 부분을 읽으면서 유추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게 제가 한 작업이었어요. 그게 인문학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어떤 진실의 순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쓰지 못해요. 방계의 정황들로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으면 제일 좋다고 생각하죠. 

-사료나 옛날 신문의 중립적이고 짤막한 기록을 볼 때 가장 궁금한 부분이 무엇인가요?

=구체적 감각이 와닿는 사건들이죠. 예를 들어 고문이 있었다면 고문방법의 종류는 자료에 다 나와요. 그러나 제가 궁금한 건 1인칭화된 고문이에요. 당연히 아픔이 있었겠지만 아픔은 그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 게 없죠. 고문당하는 와중에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일까? 그건 고문 자체의 고통이 아닐 수도 있어요. 김근태씨의 경험담을 보면 고문자들이 애들 교육문제를 잡담하는 소리였다죠. 그것만 해도 많이 들어간 건데 전 그것도 성에 안 차요.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 당사자조차 모르는 무엇을 알아내야 해요. 그리고 사람들은 제가 취재를 한다고 하면 옛날 인물의 복식 같은 걸 찾는다고 생각하는데 좀 달라요. 예컨대 1940년에 태어나 60년에 대학 들어간 인물을 쓴다면 그 무렵 그가 읽었을 법한 책을 무작위로 읽어 그의 교양수준, 접했던 어휘, 감각적으로 노출됐던 폭력, 인식의 지평을 체화해야 해요. 그렇게 인물의 상태를 파악한 다음, 극적인 상황에 던져놓아야 고유한 행동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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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10 23:26
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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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문학 / 2009/08/15 00:16

공지영 씨에 대한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불만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공개적으로(언론지면에서, 그것도 좀 의식있다는 <한겨레>에서 말이다) 공지영 씨의 소설을 씹으면서 "소녀적 감수성", "조숙한 여자아이 수준의 인식", "고집스런 어린아이의 투정", "미성숙한 자아", "신파", "감상의 과잉 분출", "자의식의 과잉" 운운하며 그녀를 폄하하던 그 비평가들의 수준은 도대체 뭐라 평해야 좋을지. 잘 나가는 작가에 대한, 그리고 '작가'라는 집단에 대해 괜한 열등감을 느끼기 쉬운 비평가들의 일상적인 질투라고 생각하기엔, 사실 너무 마초적이고 저열하기 짝이 없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뭐라 반박하자면 내가 한없이 더러워지고 꼴 사나워지는 것 같고, 내 수준도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밖에 없는 소설을 오늘 단숨에 읽었다. 신작 <도가니>. 공지영 씨의 소설이 너무 잘 읽히는게 장점이자 불만이라던 남성 작가ㅡ예전에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얼마 전에 뻘소리로 9회말 투아웃 만루 상황에서 아웃성 파울을 때려 버려서 이제는 절대 좋아할 수 없게 된ㅡ의 평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달까(물론 그 작가는 저 위에 비평가들처럼 공지영 씨를 싫어하는게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도가니>를 쓰기 위해 취재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한 포털에 연재를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글을 뱉었어야 했을 공지영 씨가 (주제 넘게도)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스스로 작가의 글에 밝히고 있듯, "나답지 않게 자주 아팠고, 초교, 재교를 보고 나서 한번씩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열에 들떠 며칠씩 누워 있어야 했"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기 때문이다(이해란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 말일 수밖에 없는지!). 소설의 내용에도 그렇다. 아니다, 와닿았다기보다는, 나도 그리된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아니, 아니,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할 언어가 없다. 이 순간, 언어가 터무니 없이 빈한해진다. 기억의 질서와 담론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 근본적으로 빛의 세계를 지향하는 언어가 밤을 만나면서 완전히 말소되는 순간, 전시(展示)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을 만나는 찰나, 더 나아가 압도적인 말과 권력의 폭력이 갑자기 체감될 때의 그 먹먹한 느낌.

'그런 것'에 대해 예민하게 감응할 수 있는 생생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말로 옮기려 드는 사람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언어가 무의식을 만들고 실재(계)를 만든다면, 필경 언어는 폭력이고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말하려면 다른 외피를 써야만 한다. 정희진 씨의 석사 논문(<성폭력을 다시 쓴다>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간된)처럼 사회과학 논문['객관'을 위장한 건조한 기술(description)]의 형식을 갖든, 아니면 <도가니>처럼 몇 가지 충격 완화장치를 도입하든지. 하지만 어쨌든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아픈 것은 어디 가는게 아니다.

줄이면서 <도가니>에서 아쉬운 점을 굳이 찾자면, 사실 이 작품에 도입된 충격 완화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정희진 씨의 책이 정말 읽기 힘든 것에 반해(필력 있는 정희진 씨의 글인데도!) 상대적으로 easygoing하기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건 내게는 어쩜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안전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해야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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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9/06/24 21:16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중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간혹 서울을 떠났지만 매번 곧 돌아왔다. 도시 전체가 옛 시대의 유산인 곳이나 빼어난 절경을 가진 곳에서도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내 서울이 그리워졌고 돌아오면 안도했다. 서울이 전적으로 태평하고 무사한 도시여서가 아니었다. 대개의 삶이 그렇듯, 그런 날은 일부에 불과했다. 안도감이나 그리움은 서울을 벗어나 있을 때에나 가능했다.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서울은 나와 가장 닮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 편혜영, 「크림색 소파의 방」서문(???), p. 211


그 도시는 나의 유년시절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철없이 논다.

- 윤성희,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서문(???), p. 184



소설집을 들춰보다가 어쩔 수 없이 깊이 공감하게 된 문장. 그랬다. 안도감, 그리움은 서울에 있을 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철없이 놀 수 있었고 철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덧붙여 편혜영씨의 말에 토를 조금 더 달자면,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하기만 한 나와 가장 닮았을 뿐 아니라,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나를 가장 받아들여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을 배경으로 <테마 소설집>이 얼마 전 나왔다. 나로서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로 읽혀서 책을 샀는데 솔직히 말해 서울은 너무나도 '서울'이기에 다른 문학에서도 충분히 서울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특별히 이 소설이 '서울 테마 소설집'이라고 느끼진 못하겠다. (난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인터넷 그림을 볼 땐 소설집의 '쿨'하고 '감각적인' 북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첫 인상에 비해 쪼오금은 실망할 수밖에.

소설집에서는 '서울성(性)'이랄까 'seoulness'랄까, 하는 무언가에 대한 직접적인 사유를 읽어 내기 힘들었다. 내가 기대했던건 어쩌면 이것이었을테다. 다시 말해, 결국 내가 가진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에 합치하는 소설은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조각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면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어떤 총체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이게 곧, 서울인가?). 내 소설 편식증 때문에 전혀 읽히지 않는 소설도 있었고.. 조금은 아쉽다.

그래도 일단 잘 읽히고 재밌는 소설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건졌다. 몽땅 필사해 뒀다는! ^^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8/08/24 00:06

아, 요즘엔 소설 읽는게 일상의 전부다 (..)

아, 물론 틈틈이 번역도 하고 있고, 토플 단어도 좀 보고는 있지만,
어차피 곧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기 때문에... 미련은 별로 없다.
머지 않아 사용해야 할 텝스 점수도 마련되어 있기는 하고.


아직 읽지 않은 배ㅅ아의 소설들을 보고 있는데, 요즘 같아서는(요즘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유난히 버겁게 느껴진다. 예전엔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내 상황 탓인지, 배ㅅ아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변화 탓인지. 사실 예전에 읽었던 <철수>, <ㅎㅜㄹ>, <소설집 No.4>의 몇몇 단편들, <일요일 스키야ㅋ 식당>, <부주ㅇ한 사랑>, <젊은 에ㅅ이스트의 책상> 등은 읽으면서 곱씹고 또 곱씹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나에게 이래 저래 영향을 주기도 한 소설들이었다. 우울할 때 읽으면 왠지 힘도 되었고, 배ㅅ아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 건조한 목소리에 공명하면서 내 건조한 일상들에 메마르나마 바람을 불어 넣기도 했고.

그런데 가장 최근에 읽은 <독ㅎ자>나 <당나ㄱ들> 같은 소설, 아니, 차라리 <ㄷ학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ㄴ귀들>은 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지금도 내가 뭘 읽었나 머리에 잘 남아 있지도 않다. 분명 이 소설에 있는 대부분의 문장들(비문이나 오타가 섞인 문장은 빼고)이 좋고, 또 그 빼곡한 사유가 마음에 들고, 또 몇몇 구절들은 인상 깊어서 책 구석을 접어두기는 했지만. 사실 내가 지금 딱히 인상에 깊게 남기지 못한 이유는, 독일어나 독일과 관련된 이야기들, 많이 나오기 때문인 것 같은데, 으흐... 음...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난 독일에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난 옛날부터 독일 냄새가 싫었다. 예전에 독일의 아름다운 한 남부 도시에서 3일 간 있었는데, 거기서 보았던 수용소도 끔찍했고, 그 탓인지 거기 사람들과 풍경에서 느껴지는 묘하게 멀끔한 분위기가 싫었다. 맥주만 맛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갈아 타고 있다. 한강씨로.

그녀의 소설을 접한 것을 대라고 해봐야 <채식주ㅇ자>나 <그대의 차가ㅇ 손>정도지만, 얼마 전에는 그녀의 첫 장편이라고 알려진 <검ㅇ 사슴>도 사서 읽을 리스트의 최우선순위에 올려놓고 있다. 그리고 몇 권 더 사려고 알아보고 있는 중. 내일은 광화문 교보에 가서 한 번 싹 훑어볼 다짐이다.

머지 않아 나름의 '한강론'을 머리 속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수ㅇ론도 아직 멀기는 했지만... 한강씨는 배ㅅ아와는 너무나 다른 매력이 있는데, 그게 뭔지는 아직 언어화를 못하겠다. 암튼 흡입력이 상당히 강하다는 건 인정하고 있음.

S의 말로는, 한강씨는 너무 글쟁이 같이 생겨서 재수 없다고(ㅋㅋ). 근데 몇몇 아티클들을 찾아 보니, 썩 그리 계급적으로 상층부는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꺼이.

근데 한강씨 가족에 소설가가 많더라... 역시 문학적인 재능도 성장 분위기 내지는 유전이 영향을 미치는걸까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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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문학 / 2007/08/15 00:18

소설을 보고 이런 식의 느낌을 받은 것은 오정희씨 소설을 읽은 이후에 처음인 것 같다. 물론 오정희씨와 배수아씨 소설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지만.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저만치 거리를 두고 이 텍스트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훔쳐볼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제한되어 있다. 이 소설의 서사 속에 어떤 고통이나 멜랑꼴리 따위가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것들에 도저히 다가갈 수 없다. 나 같은 독자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소설이 너무나 고매하거나 위대하고 또 고귀한 빛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닐게다. 다만 이 소설의 고통은, 혹은 어떤 것은 정말 내가 인식할 수 없는, 재현할 수 없는 것 같단 느낌이다. 내가 개별의 인물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인물들은 이미 텍스트에 흉한 상처를 남기고 뛰쳐나갈 것 같다. 그럼 그건 더 이상 배수아씨의 <철수>라는 소설이 아니게 되겠지. 그렇기에 나는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는 거겠지.

나 아파, 아파요, 라고 노골적으로 떠들어 대는 서사는 도처에 널려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도 어쩌면 이러한 '자기 연민'일 것이다. '나'-미디어인 블로그나 미니홈피들을 돌아다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마도 '나'-미디어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과 목 언저리에 각인된 (어딘가 닮은) 서로의 상처 자욱들을 확인하고, 그것들을 모아서 모든 이들이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떠돌아 다니는 한밤중의 저잣거리 속에 내던져버리며, 너도 아프구나(그렇지만 내가 더 아파), 라고, 누구에게 전달되는지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되뇌이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것들은, 슬픔을 온 몸에 체현하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몸뚱아리들의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는ㅡ그렇게 하지 못하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리고 그 누구도 그 반복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언할 수 없는 '자기 설명'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자기의 슬픔과 고통은 온전히 자기 것이고 따라서 자기 서사는 특별하다 생각하며, 자기는 자신의 텍스트 속에서 벌거 벗었다 착각하면서(그러니 너도 벗어! 라고 말하며), 그러나 이미 기표로 둘러쌓인 두터운 외투와 가면을 걸친 채 나 몰라라 하며, 자기의 나르시스적인 독백을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같은 서사를 반복하고 또 생산하는 그 욕망의 지리멸렬한 쳇바퀴들. 그것의 소비, 클리셰, 그리고 카타르시스.

만약 이 텍스트가 그런 구조를 택했다면, 충분히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카타르시스적인 배설이나 만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화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고통'은 아닌지도 모른다. 누구든 무엇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주인공의 "늑대의 눈" 속에 있는 그 욕망과 고통과 슬픔의 무게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나는) 언어화 할 수 없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나는 배수아씨를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굳이 특권화 하고 싶진 않다(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숭고'로 의미화 하고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소설을 본 이후에 나는 혼란스럽지도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오늘 하루 끊임없이 어디로 튈지 몰라 들끓었던 마음은, 갑작스럽게 편하게 정돈되었다. 어쩌면 배수아씨의 소설을 접하게 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읽지 않은 배수아씨의 다른 소설이 어딘가 무서워졌음도 말해두고 싶다.

겨우 1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그래서 이불 위에 누워서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끊이지 않고 다 읽어 버릴 수 있었던 이 소설을,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더 설명하고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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