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나오는 맥락이야 늘 다르지만, 어떤 사람을 불가피하게 외모로 설명해야 할 때가 언제나 있다. 정치적 올바름 같은 건 별로 상관없이 말이다. 그럴 때면 아직도 언제나 비끗해버린다. 아직도 예쁘다, 아름답다, 잘생겼다, 섹시하다, 못생겼다, 추하다, 키가 크다 하는 식으로 외모를 직접 묘사하는 단어를 잘 쓰지 못하겠다. 그래서 아주 노골적으로 "예뻐?", 혹은 "잘 생겼어?" 라고 물어보거나, 마치 뭔가를 아는 듯 "아, 그 사람 예쁘지/잘 생겼지"라고 말하면... 정말 답도 안 나온다. 아직까지 그 말에 전혀 호응을 할 수가 없다. 그럼 서둘러 에둘러 표현할 뿐; 음.. 예컨대 이런 식으로 "(삐질삐질) 어... 어떤 기준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실 이 단어들은 어느 수준의 '객관'을 가정한다. 즉 이 단어들은 사회적으로/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어떤 (성애적인) 외모 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관적 판단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판단에 가깝다. "예뻐?", "잘 생겼어?" 따위의 질문이나 "예쁘다", "잘 생겼다"라는 진술은 잠재적으로 yes나 no로 판단할 것을 요구하게 되고, 주관식 판단은 이단과 탈주로 간주된다. 이 말에 yes, no 따위로 판단하는 건 그 말 안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외모에 대한 이성애 사회의 규범을 일단 승인하고 들어가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들을 쓸 때 "내가 볼 땐..."이나 "내 기준에서는" 같은 단서를 붙인다 해도 크게 다를 바 없으며, 그 뒤에 덧붙이는 설명도 단지 변명처럼 들리게 될 뿐이다. (흔히 쓰이는 "귀엽다"는 말은 노골적으로 권력을 드러내는 말이니 사람에 대해서는 더더욱 쓰기 어렵다)
그에 비해 사람의 외모를 표현할 때 "매력적이다", 아니면 좀 고풍스럽게 말하자면 "곱다", 하는 식의 표현은 조금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 같다. 이 단어들은 앞서 언급한 단어군에 비해 '이차적'인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해 이 단어들은 직접 외모에 호소하기 보다는, 차라리 어떤 모종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한 때 유행했던 형용사 "훈훈한"이 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단어는 외모로는 '2급'이지만 친근감 있다는 뉘앙스로 쓰였다). 그것은 주관적 체험을 암시한다. 그 말은 다만 내가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전체 호감도를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외모에 대한 사회의 규범을 비판하지는 않아도 슬며시 피해가는 효과가 있다. 쓰기에 큰 무리가 없고 안전하다는 얘기다. 시각보다는 청각과 후각이 더 민감한 나로서는 선택하기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단, 누구도 "그 사람 매력적이야?" 같은 질문을 하거나 "그 사람 되게 매력적이더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게 문제; 또 많은 맥락에서 "매력적"이라는 말은 외모에 관한 말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어떤 지적/감성적 능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쓰인다. 그러니 이제는 고어(古語) 내지는 사어(死語) 느낌까지 주는 "곱다"는 단어는 말할 것도 없다(백석의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에 나오는 표현에 꽂힌 탓에 퍽 좋아져 버린 단어인데...). 그러니까 제발 내게 자꾸 묻지 말라고 ㅠㅠ 난 잘 모르겠다고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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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ㅅ을 하면서, 대체 이 학교라는 사회 제도가 젠더, 섹슈얼리티 규범을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생긴다. 예전에 내가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닐 때에도, 학교는 분명 강력한 이성애 중심적 젠더 체계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 제도-공간이었다. 모든 것이 남/여로 구분되어 있고, 그것은 선생님들 사이에서의 인식은 물론, 학생들 사이에서의 인식에서도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규범으로서, 학교 제도의 모든 인식-해석틀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언어게임과 의사소통 체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다. 학교 내에 존재하는 모든 규칙들도 성별화된 규범들을 따른다. 그렇게 각각의 성을 타자화하는 전략으로, 젠더를 생산해낸다. 다시 말해, 젠더/섹슈얼리티 없이 학교 제도는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이 학교의 아이들은 그냥 부정해버리고 싶으리만치 성적으로 activate 되어 있다. 매일 같이 porn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sexy girl"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영어 시간에 하는 아이들은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의 뜻을 질문한다(다소 짓궂은 얼굴로). 여전히 궁금한 건, 이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n명의 아이들의 n개의 성적 실천들이, 왜 지배적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지이다. 무슨 섹슈얼리티는 왜 말해지고, 무슨 섹슈얼리티는 왜 말해지지 않는가. 즉, 왜,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어떤 특정한 섹슈얼리티가 하나의 규범으로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섹슈얼리티는 분명 하나의 담론이자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규범은 분명 일종의 교육적 효과를 갖는다. 다시 말해, 많은 아이들에게 이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교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일상 속에서 아이들이 갖는 수 없이 다양한 수행들과는 별개로, 이 교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서사적인 권위를 갖는다. 아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섹슈얼리티는, 이 서사적 권위를 차지하는 섹슈얼리티의 해석틀을 벗어나서 소통될 수 없다. 그래서 사실 아이들이 갖는 성적 관심은 모두 한결같고 뻔하고 재미 없다. 아이들이 자기의 섹슈얼리티를 설명할 수 있는 방식도 이런 규범적인 것에 의해 제한되고 한계 지어지기 마련이다. 소위 '어른'들도 자기 섹슈얼리티를 표현하기 힘들어 하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중학교 교육 현장에서 (재)생산되는 규범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갈수록 호기심이 생기는 이유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성적으로 activate되는 시기가 이쯤이기 때문이다. 이 굳건한 한국 사회의 젠더 위계와 섹슈얼리티 정상성-규범들이 아이들에게서 최초로 나타나는 방식들을 부지런히 살펴보면,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기대감에서.
덧) 한국 사회가 언제부터 LGBTQ에 대해서 이렇게 '쿨하게' 말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교ㅅ들 사이에서 3학년 어떤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다. 그 아이가 말하는 방식, 말하는 내용, 행동들을 이야기하면서 "아무래도 걔 gay 같아"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자기들이 게이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좀 웃긴데, 그걸 또 대놓고 이야기하곤 하는 것도 좀 많이 그렇다. what is 'gay'? why does it matter(왜 이것이 중요한가/문제가 되는가?) how does it operate? 사실 그 말을 하는 본인들은 짐짓 성소수자에 대해 쿨한 척 하고 있지만, 그 쿨함이야 말로 사실은 LGBTQ에 대한 heterosexual적 혐오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은 왜 하지 않을까.
덧2) 이런 글을 끄적끄적 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런 고민을 하면 할수록 나의 섹슈얼리티는 불분명해지고 불투명해지는 것 같다. 어떻게 자기들을 heterosexual이다, homosexual이다, bisexual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알 수 없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고, 때에 따라 다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대상에 따라 다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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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버틀러 세미나에서 <모방과 젠더 비순종Imitation and Gender Insubordination>을 읽었는데, 버틀러는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Aretha Franklin의 히트곡인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을 언급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사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Feel Like"라는 글자일 것이다. '심적 동일시psychic identification'의 기제를 설명하면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In my view, the self only becomes a self on the condition that it has suffered a separation (grammar fails us here, for the "it" only becomes differentiated through that seperation), a loss which is suspended and provisionally resolved through a melancholic incorporation of some "Other." That "Other" installed in the self thus establishes the permanent incapacity of that "self" to achieve self-identity; it is as it were always already disrupted by that Other; the disruption of the Other at the heart of the self is the very condition of that self's possibility.
내가 보기에 자아the self는 오직 분리seperation("it ; 대문자 I"은 오직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구별화될 수 있기 때문에 문법은 여기서 우리를 저버리게 된다)와, "타자"의 멜랑콜릭한 통합을 통해서 보류되고 또 잠정적으로 해소된 상실loss로부터 고통 받았다는 조건 하에서만 자아a self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아 안에 정착한installed 그 "타자"는, 자기 동일성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그 "자아"의 영구적인 무능성을 확립한다; 말하자면 자아는 이미 항상 그 "타자"에 의해 분열disruption되어 있다; 자아 심장부에서의 타자의 분열은, 자아의 가능성의 바로 그 조건이다.
(...)
If incorporation in Freud's sense in 1914 is an effort to preserve a lost and loved obect and to refuse or postpone the recognition of loss and, hense, of grief, then to become like one's mother or father or sibling or other early "lovers" may be an act of love and/or a hateful effort to replace or displace. How would we "typologize" the ambivalance at the heart of mimetic incorporations such as these?
만일 1914년의 프로이트적 관점에서의 통합incorporation이, 상실된 사랑했던 대상을 보존preserve하려는 노력이고, 상실과, 따라서 애도의 인정을 거부하거나 연기하려는 노력이라면,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나 형제자매 혹은 이른 날의 "연인들"과 같은like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자(또는) 대체하거나 전치하려는 증오에 찬 노력일 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와 같은 모방적인 통합의 심장부에 있는 양가성(이중 의식;애증)을 "유형화"할 수 있을 것인가?
버틀러에게 "Feel like"라는 말은 이미 어떤 '모순'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그 자체로는 natural woman이 아니며, 누군가의(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럴 때에만 자신은 "마치" natural woman인 것 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항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인정의 '순간'에만 Aretha 자신은 '자연적인' 여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Aretha의 노래의 '그녀'는 이미 타자의 담론 속으로 들어와 있는 분열된 주체이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일종의 사랑 행위의 방식으로도 드러날 수 있고, 혹은 이미 증오를 함축한 행위일 수도 있다. 자기 동일성은 언젠가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담론 속에서 이미-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natural wo/man(남성과 여성의 메커니즘이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은 존재할 수 없고 온전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일종의 phantasm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려는, 버틀러도 말하고 있지만 정체성과 심적 동일시에 대한 "안정된stable" 유형화를 훼손시킬수 있는 정치적인 기획이다. 유형화하고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관찰은, 그것의 훨씬 많은 모순점들과 어려움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화'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유형화란 것은 "단순화simplification"인 것이며, 따라서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쉽게with alarming ease" 규제적인 요구조건들에 순응하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젠더와 섹스의 실체화에 저항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한 버틀러의 언급을 조금만 더 보자.
When Aretha Franklin sings,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she seems at first to suggest that some natural potential of her biological sex is actualized by her participation in the cultural position of "woman" as object of heterosexual recognition. Something in her "sex" is thus expressed by her "gender" which is then fully known and consecrated within the heterosexual scene. There is no breakage, no discontinuity between "sex" as biological facticity and essence, or between gender and sexuality. Although Aretha appears to be all too glad to have her naturalness confirmed, she also seems fully and paradoxically mindful that that confirmation is never guaranteed, that the effect of naturalness is only achieved as a consequence of that moment of heterosexual recognition. After all, Aretha sings,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suggesting that this is a kind of metaphorical substitution, an act of imposture, a kind of sublime and momentary participation in an ontological illusion produced by the mundane operation of heterosexual drag.
아레사 프랭클린이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고 노래할 때, 그녀는 우선 그녀의 생물학적 섹스의 자연적인 잠재성은, 이성애적 인정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문화적 위치에 참여함으로써 현실화actualized 된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녀의 "섹스"안의 무엇인가가, 이성애적인 장면scene 속에서 완전히 알려지고 성화(聖化; consecrate)된 그녀의 "젠더"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녀에게는)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실체essence 사이, 혹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이에는 어떠한 손상breakage도, 어떠한 불연속성도 없다. 아레사는 자신의 자연성이 확증되었다는 것에 매우 기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확증이 결코 보증된 것은 아니라는 것, 자연성의 효과란 오직 이성애적 인정의 그 순간의 결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에, 전적으로나 역설적으로나 신중을 기하는 것 같다. 결국 아레사는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고 노래하면서, 그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대체substitution이자 사기imposture 행위, 또한 이성애적 드랙drag의 세속적인 작동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론적 환상에의 숭고하고 일시적인 참여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버틀러도 잘 지적하고 있지만, 아레사는 자신이 natural woman이라는 점을 유보하고 있다(natural이라는 수식어도 섬찟하다. 자연적인 여성이 있다면, 비자연적인 여성을 은연중 또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이성애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식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는 가사는, 어쩌면 우리 시대에 일반적인 이성애 '연애'가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 인정이 비록 '순간'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natural woman이 되는 것도 한 순간의 '빛'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조건들과 규제들을 인정하고 들어갈 때 비로소 이성애 연애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강간 수준의 성폭력을 행하는 남성들의 오래된 대사 중에 "오늘 밤, 내가 널 여자로 만들어 줄게"라는 섬뜩한 말이 있지 않던가? 따라서 이성애적 연애와 성폭력은 완전히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종의 정도와 맥락 속의 차이이지, 결코 완전히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레사의 노래는 그러한 이성애 메커니즘에 대한 훌륭하고 직관적인 관찰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에게 있어 드랙drag이란 우리가 버틀러에 대해 흔히 생각하고 오해하는 드랙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즉, 드랙이란 말을 들을 때 즉각 드랙 퀸이나 드랙 킹과 같은 (버틀러가 저항하는) '유형화'된 대상을 떠올리게 될 때와 같은 바로 그 드랙이 '아니라는' 것이다. 버틀러에게는 이성애 역시도 드랙drag의 한 효과에 불과한 것이며(다시 말하자면 드랙 그 자체가 아니라 '효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수행적performative으로 '구성되어' 가는 것이다. 어떤 내적 본질이나 기원도 아닌 것이며, 오히려 자신이 기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드랙이란, 기원이고 내적이고 참이고 실재적으로 간주되는 (실체화된) 모든 젠더의 "섹스"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 나가는 행위act가 된다.
물론 버틀러의 기획에 의문을 제시할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버틀러 자체는 푸코 식의 권력 담론ㅡ권력은 그 내부에 저항을 내포한다는ㅡ을 자신의 논의에 중요하게 끌어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의 해결책이자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도, 언뜻 보면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근본적이거나 혁명적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에는 버틀러의 주장에 심히 공감하는 편이다. 내가 보기엔 버틀러의 기획은 결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버틀러식의 기획이야 말로 체제 '밖에서' 사고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체제를 닫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유형화 된) 새로운 젠더, 새로운 섹슈얼리티를 백날 수백날 들고 와봐야 상징계는 그것을 또 다시 상징화하고 내부로 포섭해 들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윤리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상징계 내에서 유통되고 타자의 담론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이미 윤리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사라져버리게 된다. 예수의 죽음, 그것도 타자의 담론 속에 유통되는 순간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체 게바라가 요즘 유통되는 방식도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라는 상징계는 저항 마저도 내부로 포섭하고 있지 않던가. '인용 가능성citablity'이란 그만큼 무섭고, 또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유혹에 또 빠져들기 쉬운 것이다.
덧) 번역은 양모 쌤의 번역을 기본으로, 원문과 대조해서 내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약간 수정했음. 이 자리를 빌어서, 양 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_*
덧2) 버틀러는 확실히 영문을 보아야(물론 한글 번역본이 있어야 훨씬 편하다) 이해가 더 빠르고 명료한 것 같다. 흑.. <안티고네의 주장>은 읽을만 하던데, 정말 조현순씨는 '능력자' 인 것 같다;
Aretha Franklin 노래가 아니라 Celine Dion의 노래이지만, 한번 들어보실 분은 밑에 열어서 클릭.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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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츠 콜로미나가 엮고, 동녘에서 역간된 <섹슈얼리티와 공간>이란 책을 재미삼아서 보고 있다. 물론 '재미'삼아서 보기에는 난해한 논문들이 좀 있다. 한국 땅에서는 썩 익숙치는 않을 '공간'에 대한 사유가 진행되기에, 아무래도 쉽게 몰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중 엘리자베스 그로츠가 쓴 <몸-도시>라는 짧지만 쉽지 않은 논문이 인상적인데, 내가 갖고 있는 그녀의 다른 책(엘리자베스 그로츠, <뫼비우스띠로서 몸>, 여이연)에서 느꼈던 난해함과 마찬가지로 약간 읽기에 쉽지만은 않다.
앞으로 정리한 것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거친 정리이므로 읽으실 때 힘드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로츠는 몸과 도시의 관계를, '사실적'이고 '역사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발달과정, 즉 유목민→농경사회→지방분권적 마을→도시국가→...→현대 기술거대도시로 발달하는 선형적인 발달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에는 "도시가 몸의 산물이며 투사라는 생각", 즉 '휴머니즘'적 가치관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로츠에게 이러한 관점은 몸body과 정신의 이항 대립을 그대로 끌고 들어와서, 몸(도시)를 정신(인간)에 종속시키고 있는, 일방적인 입장을 전제하고 있기에 단호히 거부해야 하는 설명이다.
몸과 도시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대중적인 공식으로는, "몸과 도시가 유사하거나 이종 동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몸과 사회질서를 동일시 한다. 즉 어떤 "정치적 통일체"와 유사한 설명이다. 과거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의 '정치적 통일체' 개념은, 몸의 은유를 들어 설명되곤 했다. 지도자 즉 왕 혹은 국가체는 머리요,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몸body이다. 법은 신경에, 군대는 팔, 상인은 다리라는 둥. 이러한 관점은 물론 어떤 면에서는 '명쾌'하고 약호화되어 있기에 알기 쉽다. 그러나 그로츠는 묻는다. 만약 이 관점이 성립한다면 "성기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즉 이 관점은 그 자체로 남성 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갖는다(명쾌하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음;). 더 나아가서 그로츠는 이 비유가 갖는 정치적 기능, 즉 '자연스럽게'만드는 정치적 과정을 비판한다. '육체'는 각 기관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기 보다는 어떤 명령에 따라 위계적으로 '전체'를 위해 작동한다. 그리고 이것은 고도로 '자연스러운 형태'의 조직일 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속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감추고 '자연화'한다.
따라서 그로츠는 이러한 설명들을 거부하고, 각각의 설명에서 요소들을 결합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일단 그로츠는 몸이 도시를 생산하고 건설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과 관계'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모든 원인은 그 결과로부터 논리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과 도시는 상호 결정적이다. 그렇기에 몸은 도시와 구별되지도 않으며, 또 따로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인터페이스 내지는 공동구축이라고 할만한 쌍방 연결망이 있다. 정리하자면 몸과 도시는 어떤 동형적 관계로 존재함과 동시에 서로 강력한 영향력을 주고 받기에 떨어질 수 없는 어떤 관계를 갖는다.
더 나아가서, 그로츠는 몸과 도시는 각각이 거대하고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 각 부분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진단한다. 이 모델은 '실천적' 함의를 갖는 것으로서 몸과 도시가 서로를 규정하고 확립할 때 실제 '생산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도시의 형태나 구조, 그리고 그 내부의 규범은 자기 자신을 체현하는 주체들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다. 도시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주체가 공간을 이해하고 배열하게 되며, 그에 따라 주체의 포지션이 결정된다. 공간의 양식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또 각 주체는 각 공간의 공식에 따라 육체를 작동하는 형식을 결정한다. 다시 말해 도시는 몸이 침윤될 수 있는 장소site인 것이다. 공간의 문법에 따라 도심, 전원, 빈민가, 교외가 등의 구획이 설정되면, 각 개인이나 집단은 그 도시공간과 협상을 벌이게 된다(물론 그 안의 권력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와 동시에 다시 몸들은 변화하는 자신의 욕구에 따라서 도시를 변화시키고 재각인 시킨다. 즉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몸과 도시는 서로 분리됨과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생산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도시는 몸들의 성적sexual이고 사회적social인 관계의 방향도 결정한다. 공사 영역의 분리 뿐 아니라, 사회적 주변성을 관리(예컨대, 게토화)하는 것도 도시-기계의 주요 작동 메커니즘이다. 몸들은 '가시적'인 대상이기에 국가의 관리 대상이며, 도시는 그 핵심적 도구로서 작동한다. 따라서 그로츠에게 있어 도시는 권력의 생산과 유통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지점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로츠는 이러한 얼핏 보면 단순한 이 진단과 함께, 폴 비릴리오의 논문을 빌려서 정보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주체의 물질성(신체성)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로츠는 이를 "공간이 시간으로 내파되는 것", 즉 "거리가 속도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순간적인 의사소통방식ㅡ위성, 텔레비전, 광섬유, 텔레마틱ㅡ의 출현과 함께 도착이 출발을 대신하고 있다. 모든 것이 출발할 필요도 없이 도착하게 된다. (...) 그 강렬한 페이스 때문에 내일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영원한 현재가 생겨나면서, 내일을 알지 못하는 시간의 경과 형태는 점점 더 타락해 가는 사회의 리듬을 망가뜨린다. '기념비'는 이제 더 이상 정교하게 지어진 기둥이나 화려한 건물로 종착되는 기념비적인 통로가 아니라 무료함, 즉 기계로부터의 서비스 제공을 기다리는 기념비적인 대기상태인 것이다. 의사소통이나 텔레커뮤니케이션 기계의 작동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늘어선 행렬, 비행기 조종사의 점검 목록표, 컴퓨터 앞의 밤샘 책상들 모두 기념비적 대기상태의 예이다. 궁극적으로, 문은 자동차, 그리고 다양한 벡토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자동차와 벡토들의 흐름이 끊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것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카운트다운이다. 그것은 노동시간의 긴박성이 시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일종의 초읽기 단계인 것이다. 반면 실업과 휴가기간은 주변 역할, 즉 시간의 교외 역할을 맡는다. 모든 사람이 결핍과 사생활의 삶으로 추방되는, 일종의 청소라고나 할까.
Paul Virilo, "The Overexposed City," Zone1/2(1986), p.19~20
사실 이 논문이 뭔가 명쾌하다거나 깔끔하다거나 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일종의 개괄이고 요약이며 '작업 노트'적 성격이 오히려 강한 것 같다.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정리한 거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최근 교지에 "공간의 문화정치"라는 거창한 부제를 단 부끄러운 글을 썼듯, 최근 나는 '공간'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고 있다. 공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미시 기술 등에 대한 치밀한 고민과 분석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유물론적 접근 방법에 치우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난 더욱더 많은 유물론적 방법을 끌어다 적절히 써야 한다고 본다.
학교-공간의 젠더를 분석하지 않는한, (마음에 드는 제목은 아니다만) 나임윤경씨의 책의 제목처럼 "여성과 남녀공학대학교의 행복한 만남"은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아직은 '섹슈얼리티'까진 잘 모르겠다. 책을 더 공부하면 나오겠지). 예컨대 화장실의 변기수 배분만 해도 그렇다. '여휴' 관련 사업이나 투쟁도 그러하고. 이런 것만 봐도 공간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거나 독립적인 개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각 주체들이 타협하고 경쟁하고 경합하는 어떤 정치적 장이다. 또한 학교-공간의 배치 질서와 구조를 분석하지 않고서, 관념적으로만 장애인 이동권을 사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광장'의 부재(화)와 그에 따른 정치적 행위의 어려움 등등. 블라블라.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전공을 "건축"으로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페미니즘적, 평화주의적, 생태주의적 관점을 모두 녹여낸 건축! 상상만 해도 굉장하지 않은가!, 라기 보다는 도저히 상상되질 않는다만... 어쨌든-,ㅡ 도시계획 분야나 건축계야 말로 이런 미시 권력 담론 분석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공간이 내파되고 시간 개념으로 휩쓸려 간다니, 정말 무시무시하지 않은가ㄷㄷㄷ;
▶ 참고문헌
베아트리츠 콜로미나, <섹슈얼리티와 공간>, 강미선 외 역, 동녘, 2005
성, 연애, 사랑의 경험 중심주의
성, 연애, 사랑은 우리들에게 지상명령처럼 자리 잡았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서 좋은 연애를 하고, 또 좋은 결혼까지 나아가라는 명령은, 별로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된 수많은 대학생들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통로처럼 보인다. 사실 누구나 연애를 하고 있으며, 누구나 사랑을 한다. 이건 사회사적으로 무엇이 중요한 가치냐, 즉 어떤 연애와 사랑을 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냐와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다. 가문 때문에 차마 맺어지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오랜 신파든, 시쳇말로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의 목에 도덕의 칼날이 떨어지던 시절의 이야기든, “즐겨라!”라는 명제 이외에 남은게 없는 엿 같은 리버럴 연애 담론이 판을 치는 오늘날의 세상이든, 언제나 성, 연애,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늘날 힘들고 앞날이 보이지 않고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회라는 벽에 부딪힌 우리들의 거의 유일한 탈출구는, ‘사적 관계’인 연애가 되었다. 때문에 대학교 3, 4학년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사람들은 별종으로 취급되거나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또 한편으로는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졸업한 후에는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이 백 만번 쯤은 쏟아질 것이다. 요즘엔 중 고등학교 때에도 연애를 하지 않으면 별종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들에게도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파트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신경증적이고 강박증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 연애, 사랑의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경험’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쿨하고 리버럴한 연애 담론이 판을 칠수록 더욱 그 경향은 강화된다. 오늘날 순진하고 성적 매력이 없음은, 또한 연애 경험이 없음은 곧 ‘능력없음’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는 성, 연애, 사랑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에 대해 더 ‘잘 안다’라고 규정된다. 그것을 많이 ‘해본’ 사람은 그것들을 잘 끌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간주되며, 또한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반면 성, 연애, 사랑의 경험에 막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사람들은, 혹은 그것들에 대해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연애 교과서>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따위의 ‘관계’에 대한 서적이 출판되고 또 잘 팔리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다 더 잘 아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은, 관계에 있어서 항상 불안한 나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경험’이라는 말을 좀 더 정교화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실상 위에서 ‘경험 중심주의’라 명명했던 것들은, ‘체험 중심주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은 성, 연애, 사랑에 대해서 수도 없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소설, 등등 수많은 문화 컨텐츠는 물론이고, 때로는 철학까지도 성, 연애, 사랑에 대해서 수도 없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연애 각본, 성 관계를 맺는 방법,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에 의해서 이미 학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성, 연애, 사랑을 다룸에 있어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체험’이지 않던가.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은유 속에서 말이다.
나는 여기서 ‘경험’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경험’은 지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경험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누적되고 새겨지는, 절대로 없어질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경험이 부정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이나 상실감은 나 역시도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렇게 ‘경험’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다만 많이 겪어본 사람이면 정말로 ‘올바르게’ 경험을 해본 것인가? 그리고 그 경험의 의미는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것이 되는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더럽고 짜증나는 온갖 것들이 널려있는데,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경험(물론 체험이라 표현하는게 맞다) 최고”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이에 관해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우리는 수많은 개 마초들의 언사에서 성, 연애, 사랑에 대한 경험 중심주의의 ‘몽매’를 볼 수 있다. 그들의 멍청한 대화들에 녹아나는 것들은, 그래서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법칙이 되어버린 것들은 그들의 ‘체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 여자의 No는 Yes다, 따위의 말들은 결국 그들 ‘나름대로’의 경험에서 수없이 증명되고 또 강화되는 것들이다. 그들에게 다른 체험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삭제되는 것은 그들이 그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필드와, 그러한 경험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들의 경험을 정당화 하는 어떤 흐름들과, 그러한 경험들이 유통되는 방식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은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경험을 둘러싸고 있지만, 경험 중심주의에서 삭제되고 있는 수많은 것들임을 알고 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어떤 체험의 ‘누적’으로 좋다/나쁘다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많이 해본 사람이 많이 알 것이라는 가설은, 어떤 면에서는 맞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이다. 많이 관계를 맺는 것도 성, 연애, 사랑 관계를 맺어나가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연애 관계 속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새롭게 쉴 새 없이 강박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관계에 있어서는 불구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만 열심히 사귀지 않으면 수치심을 느끼거나 도덕적 자책감을 느끼는 보수적이거나 혹은 순진한 성 담론과는 별로 상관없다. 그렇다고 프리 섹스주의도 아니고 플라토닉 러브도 아니고, 아가페 러브도 아니다. 다만 체험과 경험을 절대시 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일 뿐이다.
다시 말해 경험은 결코 개인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온갖 사회적 가치들에 의해 적당히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작정 긍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파트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고, 그 관계를 자기의 삶의 중심 속으로 끌어들이며, 그것들을 쉴 새 없이 평가하는 것이야 말로 성, 연애, 사랑을 대하는 우리들의 윤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항상 지금의 순간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그 사람과의 ‘고유한’ 단 하나의 경험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새로운 것이어야만 한다. 겹겹이 쌓이는 경험의 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에는 성, 연애, 사랑 관계란 너무나 복잡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다. 경험 중심주의의 몽매에서 벗어나자. 오직 새로운 것에 부딪히는 일만이, 비록 그 경험 속에서 길을 잃고 좌절하고 눈물 흘릴지라도, 그것만이 우리 앞에 남아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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