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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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11 여성영화제, 도장, 꾹.
  2. 2008/04/04 문학에서 성을 다루기 (8)
영화 / 2010/04/11 23:26
새삼 국제여성영화제가 12회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어느덧!!). 그리고 여전히 빵빵한 기업 스폰서들까지(물론 얼마나 지원받는지는 모르나). 심지어 광장 공연의 인터미션에 스폰서 기업 광고도 상영되더군. 그만큼 영화제가 커지고 영향력 있다는 얘기인지라, 예전에는 반씁쓸함을 느꼈지만 이제는 오히려 아예 왕창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4년 여름에 여성주의에 입문(?)한 뒤에 2005년부터는 계속 갔으니까 이제 어느덧 나도 6년 째 도장 찍었다는 거(나도 나이 먹어가는구나). 꾹꾹. 10년, 20년, 30년이고 계속 개근 도장 찍어야지 싶다. 같이 나이 먹어갔으면 좋겠다. 하하

사실 재작년이랑 작년은 별로 흥미가는 영화도 없었지만 어줍잖은 의무감 비슷한 걸로 영화제에 갔었던 기억이다(이건 진짜 부끄러운 일; 이 블로그에는 그때 당시에 쓴 완전 창피한 글도 있다). 그런데 그건 영화제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인 나의 매너리즘 탓이었다.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권태로운 눈동자엔 모든 게 권태로워 보이는 것이다. 이번에도 사실 약간은 의무감에 예매를 했지만, 그 결과는 역시, 문제는 갈수록 풍성해지고 세련되지며 외연이 넓어지는 영화제 문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서울에 가면서 챙겨 갔던 책은, 다름아니라 사놓고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벨 훅스의 <벨 훅스, 경계넘기를 가르치기>였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짬나는 대로 술술 읽었던 이 책 덕에 몇년 간 정체되었던 내 문제가 뭐였는지를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을 5개의 'ing'로 얘기하자면, encouraging, empowering, inspiring, fascinating, easy-going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 ㅎㅎ 'easy-going'하다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수 있을 것 같아 첨언하자면, 절대 내용이 쉽다는게 아니라 문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철학적 계보를 후광으로 하는 복잡한 개념어(이 책을 이해하려면 칸트/헤겔이나 프로이트부터 읽어라!!)를 동원하지 않고, 경험과 직관적인 언어를 써서 날카롭지만 또 따뜻하고 설득력있게 글을 이어나간다. 진짜 멋있어! 최고야!!



올해 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다가올 그날(The Day Will Come)>은 정말 멋진 영화였다. 줄거리나 세세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건 그만두고, 인상 깊었던 부분(인지 뭔지) 2가지만. (거칠게 말하는 거니 이상하다 싶어도 패스패스해주세요.)

하나는 흔히 말하는 '모성'에 대한 것이다. 흔히 모성은 자연(타고난 것)으로 간주되지만, 여성주의에서 말해주는 상식은 모성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으며 사회와 경험 속에서 '학습'하고 실현하는 그 무엇이다. 또한 사라 러딕이 <모성적 사유>에서 말했듯, '모성(motherhood)'은 '어머니 역할(mothering)'과 구분되는 것이다. '어머니 역할'은 모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보살핌' 혹은 '양육'에 관한 지침이나 실천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 러딕에게 '어머니 역할'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에게 할당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그 구분법에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모성'과 '어머니 역할'이라는 구분법에 다른 차원(?)을 개입시킬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거칠기 짝이 없지만, 일단 각 개념에 '공식적' 차원과 '비공식적'차원을 고려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해를 막기 위해 언급하자면 공식적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고 탈정치적이며 모두에게 동의되는 올바른 개념이기에 '공식적'이라는게 아니라 다분히 지금의 문화적인 코드를 반영한 것이며, 비공식적이라는 말도 안 중요하기 때문에 비공식적이라는게 아니다.)

'공식적인 모성'은 교훈과 이념화를 지향하며 널리 유통되는 이념이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인 서사나 이야기로 존재한다. 예컨대 고대로 올라가 어머니 자연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러 아이가 자동차에 깔렸을 때 번쩍 차를 들어올린 슈퍼 엄마의 이야기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공식적인 모성'은, 모성은 위대하고 자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사회적 상식이되며, 대체로 억압적이다(엄마들은 모두 위대한 모성을, 혹은 최소한 모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공식적인 모성'은 일종의 판타지이지만, 전쟁, 군대, 징병제, 남성성(남성들은 '모성'을 쉽게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애착관계가 있다)을 깊은 곳에서부터 유지하고 지탱하는, 정말 중요한 형식이다. 천안함 참사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들도 상처를 봉합하는데 다시금 '모성'을 동원하고 있다. '비공식적 모성'은 자기에게 소중한 타인, 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자신이 낳았든 낳지 않았든, 혹은 어떤 관계에서 아이가 생겼든)에게 갖게 되기 쉬운 강한 애착이다. 차라리 생물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아이의 현존보다는 부재와 상실에서 더 잘 드러난다. 아이의 부재와 상실에는 엄청나게 강한 에너지를 지닌 상실감과 슬픔이 찾아온다. 단지 마음이 슬픈게 아니라, 몸이 반응한다. 사랑은 자기와 관계를 맺을 아이를 만나는 순간에(혹은 그 이전에도) 즉각 시작할 수 있지만(물론 사랑의 실천에는 온갖 우여곡절이 있지만), 그러나/그렇기 때문에 상실의 애도에는 정말 오랜 기간이 걸린다.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공식적인 모성'보다는 훨씬 역사적인 맥락화가 가능하며 유동적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하는 일종의 규범이다. 이를테면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아이의 생애주기에 따라 어머니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준다. 언론과 온갖 전문가들, 혹은 엄마의 엄마나 친구들 등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라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한다고 조언하는게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이다. 태교는 모짜르트나 영어 회화로 해야한다는 식의 조언부터, 아이의 대학 입학과 결혼 대상자 선택, 혹은 그 이후에도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온갖 조언들로 가득차 있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하지는 않지만,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혹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진 것으로 취급된다). '비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과 얼마나 조응하든 상관없이, 양육하는 개인의 역사나 습관, 혹은 욕망이 반영되어 실제로 실천되는 '어머니 역할'이다. 이는 만고불변이며 보편적인 게 아니라, 개인의 것이며 따라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는 개인의 상황 등에 따라 '어머니'로서의 양육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도 함의한다.

이렇게 나눈 것에다가 사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아마도 독일의 적군파? <바더 마인호프>가 생각나는 군)도 고려해야하는데, 그것까지 하면 진짜 나도 병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으니 그만두어야 할 듯. 여하간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구분법이 떠올랐고, 이 구분법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주인공인 알리스와 주디스의 관계, 그리고 주디스와 주디스가 새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키워드가 되었다(그래서 영화에 몰입하지를 못했다 흑흑). 관계 뿐 아니라 관계의 변화하는 측면까지도. 아아.

하나가 너무 길었는데, 여하간 다른 하나는, 이 '모성'을 둘러싼 이해에 성차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잉 일반화(over-generalization)의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성차가 무조건 실재한다는 게 아니다. 여하튼 영화에서는 알리스ㅡ주디스가 과거 독일에서 낳은 딸ㅡ와 프란신ㅡ프랑스에서 만난 새 남편과의 관계에서 낳은 딸ㅡ이 주디스를 대하는 방식과, 주디스가 프랑스에서 만난 새 남편과 그 아들이 주디스를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영화 내에서 여성 인물과 남성 인물의 태도가 다르다는 얘기다. 영화의 초반과 중반에는 알리스, 프란신, 남편, 아들이 모두 주디스를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각각 '날 버린 매몰찬 생물학적 어머니', '날 이해 못하고 화만 잘내는 꼰대 엄마', '과거를 잘 알진 못하지만 일 잘하고 사랑스러운 아내',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날 사랑하는 엄마'로 이해한다. 이들에게 주디스는 어쨌든 개인사와 의지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단지 엄마이자 아내이다.

그러나 알리스가 찾아온 뒤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주디스는 엄마이자 아내로 '묶어두기'엔 <지나치게> 많은 역사와 사연을 가진 개인임이 차츰 밝혀진다. 남편과 아들은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주디스에게 진실의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된 진실 앞에서 주디스를 괴물로 바라본다. 진실이 밝혀지자, 그들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사람은 분명히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들은 이에 묘하게도 배신감을 느낀다(대체 무엇을 믿었고 배신당했다는 것일까?). 그러나 프란신은 주디스가 과거에 은행을 털었다는 사실을 알자 그에 배신감을 느끼기는 커녕 "엄마가? 은행을? 멋진데(cool)!"으로 응수한다. 프란신은 영화 내내 한번도 주디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디스가 떠나는 장면에서 남편과 아들이 배신감에 휩싸여 주디스를 냉큼 보내는 반면, 프란신은 주디스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잡아두려고 한다. 알리스도 차츰 주디스와 관계를 조율하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주디스를 '날 버린 엄마'가 아니라, 역사 속의 행위자였던, 정치의식과 신념을 가졌던 한 명의 타인이자 개인임을 인정하고 타협하기에 이른다.


<아시아 단편 경선1>도 봤는데, 다섯 개의 단편 영화가 모두 좋았다. 투표는 <파마>에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거짓말>을 찍을까 했는데, 이 영화는 정말 웰메이드였지만 20대 중후반의 감수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결정은 <파마>로. <파마>는 길지 않은 상영시간에 결혼이주 여성이 한국에서 겪을 수 있는 일, 혹은 한국이 결혼이주 여성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매우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언어의 문제, 일반적인 한국 가족 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강압적인 위계질서, 소위 '못 사는 나라'에 대한 한국적인 환상(경멸 섞인 동정심), '미혼 남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처방 등에서 시작해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과 감각에 이르기까지, 정말 섬세하고 넓게 다루면서도, 유머감각까지 갖춘 영화였다. 정말 멋지다능!


오늘 본 영화는 <아시아 스펙트럼 : 인도네시아, 포스트 98>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4개의 단편 영화 중에 마지막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일단은 모두 좋았다. 좋았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보았다는게 아니고, 정말 불편한 마음으로 봤다. 그 중에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이주 노동과 성매매(성노동)를 각각 다룬 <위태로운 삶 : 홍콩의 연인들>, <위태로운 삶 : 중국인 묘지> 2편이 기억에 남는다.

예전에 어떤 논문을 읽으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여성 노동력 이주가 심해서 인도네시아 내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내용을 본 적 있다. 물론 이 '사회적 문제'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인도네시아 남성들이나 인도네시아 국가의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남성의 기준에서 보자면 너무 많은 여성들이 해외로 나가는 탓에 인도네시아 본토의 남성들이 성욕을 못풀고 결혼을 못하게 되었기에 '문제'가 되며(물론 여기엔 계급문제도 끼여든다), 국가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구학적인 '재생산' 문제가 달려있기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여성노동자들의 이주가 해결되어야 할 '사회적 문제'로 취급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농촌 노총각'이 재력과 공권력을 투입해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가 되었듯이(심지어 내가 사는 지역의 관공서에서는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일 년치 예산에 '국제 결혼' 지원 예산도 포함하고 있다).

그 논문의 저자는 유명한 인류학자기는 해도 페미니스트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숫자가 차츰 적어지면서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지고 있다고 본다(기존의 여남 관계가 도대체 얼마나 좋고 조화로웠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 본 영화를 보면 그리 좋았던 과거는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도네시아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점점 더 왜곡되고 있다고도 지적한다. 즉, 결혼 같은 '정상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성매매나 성착취가 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지적에 대해서도 귀담아둘 필요는 있지만, 오늘 본 두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서 먼저 제대로 인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다가올 그날>에 대해 너무 길게 써서 탈진해버렸다. 뒤에 영화들도 이에 못지 않게 할 얘기가 많은데... 난 이제 자야하므로 그냥 내 마음 속에 남겨두자 하하


덧) 티켓 끊는데서 우연히 들은 어이없는 대화. 남자애 - "와, ㅇㅅ영화제라더니 스텝들도 전부 여자네." 여자애 - "응, 그렇네" 남자애 - "(선심이라도 쓰듯) 그래, 오늘만큼은 여자의 날이다! 하하!" 아 제발 쫌 -_-;;; 당장 이런 애랑은 헤어지라고 할수도 없고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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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4/04 02:15

문학에서 성(性)을 다루는 건 정말 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마나 한 소리 ^^;)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어제의 한 에피소드 때문에. 메리 롤랜드슨(Mary Rowlandson)의 "The Sovereignty and Goodness of God"을 다루는 수업 중. 이 작품은, 17세기 미국의 퓨리턴 이주민 공동체와 아메리칸 원주민 사이의 전쟁 속에서의 체험담을 다루고 있다. 뉴 잉글랜드에서는 최초의 여성 작가가 남긴 작품. 퓨리턴 이데올로기가 아주 담뿍 녹아들어가 있는 텍스트다.

교수 : 왜 롤랜드슨이 자신의 포로 체험기(captivity narrative)를 시간적 순서가 아닌, 공간적 순서로 기술했는지 알겠나?

학생들 : ..... [자기는 답을 알고 있으니 맞춰보라는 식의 퀘스쳔은 던지나 마나 아닙니까요?]

교수 : 대개 일기는 날짜 순서를 따르잖아. 근데 이 작품은 왜 공간 순서로 1st remove, 2nd remove 이런 식으로 기술했냐는 말이지. 나는 이게 어떤 근본적인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서 오는 기술 방식의 차이는 아닐까 생각하는데. 누구 한 번 말해봐요. [헉!!!!!!!]

학생1 : 저는 그 차이는 그냥 위급한 포로 상황에서 시간적 감각이 없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수 : 그 말도 맞을 순 있는데, 누구 다른 생각하는 사람?

학생2 : 저는 원래 여성들은 공간적 변화에 민감하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남성들은 수렵 생활을 했고 여성들은 채집 생활을 했잖습니까? [이쯤에서 피식 웃어버렸다. 아, 난 진짜 농담인 줄 알고...] 아무래도 그러다보면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주변 공간 변화에 더 민감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학생3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교수 : 음음. 그렇죠. 사실 나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다르다는게 아니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는거죠. [이쯤에서 내 표정은 썩어 들어가고...] (짐짓 검열 작동) 아, 그렇다고 이게 무슨 성차별주의는 아니에요. 허허허. 성차별주의는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공평한 분배를 할 때 생기는거고. [오오... 교수님 잘 나가다가 왜 이러시나이까 ㅠㅠㅠ] 나는 어떤 유전자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헉!] 어떤 생활 습관이 우리의 유전자에 기록이 되어서 그게 내려오지 않느냐는 거지. 아까 수렵과 채집 생활을 얘기했는데, 그런게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남아서... @#$@ [중략] 어쨌건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텍스트도 이런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지 않냐는거지.


이 놀라울 정도로 안습인 에피소드는, 오늘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생각나는대로 각색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오늘 다 같이 읽어 갔어야 할 텍스트에 보면 인종주의적 '타자화'의 일반적인 전략을 요약해 놓은 부분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집단간 차이를 생산하고 강조한다는 것. 이것도 사실은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이런 설명 문구는 오늘 수업에서 한 저 에피소드랑 완전 충돌되잖아욤! 게다가 오늘 읽을 텍스트는 교수님이 직접 쓰신 글 아닙니까요 ㅠㅠ 헌데 남성과 여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심지어 유전적으로 다르다니요. 무슨 근거로? 대체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신화적인 태곳적 이야기를 들고와서 성차sexual difference를 정당화 하시다니요!

사실 문학에서 성(性)을 빼놓으면 서사의 진행이 턱- 막혀버릴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서사들은 성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물론 인종, 계급 등의 범주와 동시에 작동한다). 때문에 문학을 공부할 때 성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문학을 다룰 때 이렇게 탈역사적으로 성을 다루기 쉽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긴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뻘줌한 안드로메다 점프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성차는 많이들 알다시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태곳적에 남자는 수렵 생활을 하고 여자는 채집 생활을 했다... 따위(-_-)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란 말이다. 성차는 기본적으로 제도의 효과다. 특정한 제도 내에서 생산되는 그 무엇이라는 얘기.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 성차는 어떤 제도 내에서 반복/ 인용/ 수행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지, 어떤 '구조' 내에 깊숙히 내재하고 그 구조 자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그 무엇으로 볼 수 없다.

위 에피소드에서의 성차에 대한 이해는,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 +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무관심 혹은 불능에서 기인한다. 성차는 사회적인 층위에서 규범적으로normatively 개인들에게 영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차를 다룸에 있어 그 사회성, 그 사회적인 맥락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성과 그 작품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성과의 상상적 조우라는, 하나의 사건을 작동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문화적 맥락이 다른 지역의 작품을 읽을 경우엔, 그 차이란 더 크다면 크지 적다고 보기엔 힘들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의 그 작품을 읽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만나는 과거는 어디까지나 제 현재의 '투사'의 효과이다. 즉 과거 역시 문학 작품을 읽음과 동시에 '구성되고' '생산된다'(물론 이미 정해지고 유통되고 있는 역사 담론의 어떤 규칙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지만). 그런 점에서 '상상적'이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우리들의 맥락과 우리들이 속해 있는 제도의 틀을 벗어나서는 문학 작품을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에, 혹은 상징계에ㅡ두 개념이 같은 말은 아니다ㅡ등록register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을 통과하지 않는 정치학은,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다. 쓸모가 없다기 보다는 제 목적에 봉사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로 이런 맥락성을 잊어 버리고, 문학 작품을 쉽게 '탈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완전히 자기 맥락에서 전유해버리거나, 혹은 완전히 현재와는 다른(이해할 수 없는) 어떤 그 무엇으로 탈맥락화 시켜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갑자기 모든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떼어내고, 위의 에피소드처럼, 어떤 특정한 속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악은 악을 지각하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보면 재귀적인reflexive 규정이다. 자기를 참조하면서, 혹은 자기를 지시하면서, 담론과 규범norm을 생산해내는 게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본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해내고 유포하지만, 그 과정에서 되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드러내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문학에서 성을 다루면서 빠져버리기 쉬운 함정인 셈이다.

게다가 언어가 주는 수행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화행이론이 말해주는 거지만, 모든 말은 그 자체로 가치 중립적이고 '진술적인 것'은 없다. 모든 진술은 동시에 특정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순전히 정치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무슨 관념이 발화되고 유통되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 관념은, 무수한 행위자들 사이의 '인용' 행위라는 매개를 타면서, 동시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때문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순간 이미 어떤 정치가 발생하는 셈이다. 그 발화된 말로 인해 그 말을 보증해주고 그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른 맥락들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하니까. 그 맥락들이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말을 아예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그 수업은 성-근본주의, 혹은 성차별적인 정치로 화끈 달아 올랐던 셈이다..


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지만, 적어도 인종주의를 공부하는 수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성립할 수도 없는 말이지 않은가. 나와서도 안되는 말이고. 사실 이런 점은 문학 교수직을 맡고 있는 내가 친애하는(정말이다) 그 교수님이 더 잘 알고 있을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엉뚱한 '유전자'까지 나오니 나는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다규... 저절로 성차 근본주의에 토대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만 셈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학생 1,2,3를 보면서 나는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답'을 말했다고 간주된 2번 학생님.. (아 이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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