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학기에 교지에 썼던 글. 제목도 마음에 안들고 -.ㅡ;; 늘 제목 센스부터 엉터리였음. 학교명은 다 지웠음.
서울공화국, 그 음울한 환상
- 공간의 문화정치
그런 말이 있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서울 빼고는 다 ‘시골’이라는. 그래서 명절 때 ‘지방’ 사람에게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이 “시골 내려가?”이지 않던가. 나름대로 뼈 있는 이 말을 뜯어 보면, 한국이란 영토국가가 서울과 비-서울(보통 ‘시골’로 명명되는)이라는 상징적인 두 개의 구획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울이 아닌 곳이면 그곳이 어딘지 상관없이 ‘비’-서울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서울이 중심-기준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또한 “내려가?”1)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국이 단순히 서울과 비-서울로 나뉜다는 것을 넘어서, 이미 어떤 ‘위계질서’를 내포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서울은 그 위계질서의 가장 상위에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은 한국의 ‘중심’이다. 단순히 가운데 있다는 말이 아니라, 서울이 가진 중력이 한국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서울공화국’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사실 서울공화국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들이 들어 있다. 정치경제문화 중심지, 과밀 인구, 또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등등. 그러나 내게는 이미 반복적으로 문제화되었던 그 많은 의미들을 한 데 녹여낼 재간이 없다. 다만 이 글은 작게나마 필자 나름의 서울공화국-공간의 ‘지도’를 다시 그려보는 시도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지도에는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서 그려진 내 나름대로의 지도가 일상의 미로 속에서 조금은 다른 길로 걸어갈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서울과 비-서울, 공간이라는 은유
우리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간다. 좀 더 구체적으로 ㅇㅇ산 기슭에 있는 ㅇㅇ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공간(空間;space)의 원래 뜻―비어있는―과는 달리, 여기서 말한 ‘공간’은 어떤 기시감을 준다. ㅇㅇ대학교를 떠올리면 무엇이든 보이는 듯이 떠오르고, 강남하면 또 무언가가 보이는 듯 떠오르며, 자기의 방을 생각해봐도 무언가 보이는 듯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공간 없이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와 삶의 풍경들이 재생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이며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것으로 보인다. 공간이 없으면 우리는 점심시간에 긴 줄을 서서 학관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친구와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도 없으며 한가로운 오후에 캠퍼스를 느그적느그적 거닐 수도 없다. 이렇게 우리는 실로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간을 배치하는 ‘질서’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 배치되는 것들의 ‘조건’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공간은 결코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 공간은 그 자체로 열려있지 않고 어떤 나름의 규칙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인문대 해방터의 ‘김밥 할머니’ ㅇㅇㅇ씨가 인문대 학장단과 행정실 직원에 의해 ‘퇴출’을 당한 바 있다. 당연히 ‘지성인’들인 학장단이 그냥 내보낼 수는 없었을 테고 나름대로 주절주절 이유를 늘어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학내 무허가 영업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영업을 하려면 아무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해프닝은 공간의 작동방식의 한 예―물론 그 일을 전부 이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를 보여준다. 학교-공간을 통제하는 권력들에게는 ㅇㅇㅇㅇㅇㅇ, ㅇㅇㅇㅇ, ㅇㅇㅇㅇㅇ는 합법―계약의 대상―이고, 김밥 할머니는 불법―퇴출의 대상―이다. 적당한 세련됨을 갖춘 현대적인 점포는 변화하는 학교에 어울리고, 노점에서 음식을 판매하는 할머니는 학교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모양이다. 물론 어찌 이러한 예가 이뿐 일까.
이렇게 공간-권력은 그 안에 배치될 수 있는 주체와 사물을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서울스러운 것이 서울에 배치되고 비-서울스러운 것이 비-서울에 배치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비-서울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사물이나 주체가 서울에 배치되는 순간 우리는 지극히 어색해 하며, 그것에 폭력을 가할 수 있다. “제 자리로 돌아가! 넌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라고.
서울과 비-서울, 공간의 배치 질서
이와 관련해서 서울공화국의 배치 질서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보자. ‘공간’은 그 공간에 출입하는 주체들에게, 그리고 배치된 사물에게 어떤 특정한 자격을 부여한다. 그래서 만약 어떤 주체가 서울에 배치되어 있다면 서울의 어떤 암묵적인 배치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야 그는 서울에 머물 자격을 받을 수 있다. 만약 그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위에서 말했듯 특정한 비난/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비-서울 출신의 개인이 서울에 오는 경우 1급 서울공화국 신분증을 발급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굳이 돈 들여 머리 하고 옷을 새로 구입하는 요란을 떨어야 하며, 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서울 말’을 배워서 바이링궐bilingual이 되도록 지난하게 노력한다. 촌스럽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의 은유 속에서의 배치 질서는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서울에 있으면 서울의 규칙을 따르고, 비-서울에 있으면 비-서울의 규칙을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이는 공간 배치 질서 자체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위계질서를 반영하는 상징들이 짜임새를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사람이 비-서울 지역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비-서울 주체들이 서울에 적응하는 방식처럼, 말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고칠 필요가 있는가? 아니, 고쳐야 된다고 어떤 압력을 받기는 하는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은 ‘서울’ 사람으로서, 세련되며 특별한 존재가 되어 어떤 우러름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서울공화국의 ‘서울스러움’이라는 가치는 구성원들에게 “서울스러워지라!”라는 윤리적 명령을 내리는 기표가 된다. 따라서 비-서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서울스러움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더 매력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보여 짐에 따라, 그리고 서울에 안전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해, 비-서울 주체들은 끊임없이 그것을 고통스럽게 학습하게 된다. 사투리를 ‘고치지 못해’ 상처받는 사람의 모습은 결코 소설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서울 토박이들도 마찬가지로 이 명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끊임없이 비-서울스럽지 않아 보이기 위해서, 다시 말해 촌스럽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서울 주체들은 헤어스타일과 옷 스타일에 있어서는 되도록 세련되게, 행동거지도 멀끔하고 ‘쿨’하게 보이도록, 그래서 ‘서울스러워’ 보이도록 항상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2)
이렇게 서울공화국의 배치 질서는 결코 주체들에게 일관된 것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이는 파시스트 권력의 테크닉과 닮아 있다. 파시즘은 모든 사회 성원에게 잠재적인 ‘체제의 적’이라는 혐의를 씌우고, 누구도 자신의 성원권의 ‘안정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3) 언제든 체제의 적이 될 수 있다. 안정적이지 못한 지위는 각 성원들을 끊임없는 불안 속으로 몰아 넣는다.
이는 서울공화국 사람들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배치되는 자격은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해서, 또한 서울에 살고 있다 해서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라도, 그리고 그 누구라도 아차! 하는 순간 비-서울스러워질 수 있다. 이것은 주체들의 불안감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우선 서울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항상 서울스러움을 욕망하고, 비-서울스러움을 부정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 ‘부정’되는 대상인 비-서울스러움은 항상 우리들의 곁에 유령처럼 남아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이 부정성과, 또한 불안과 함께 머물고 있기에 때로 “촌스럽다”는 말에 대해 언제나 ‘히스테릭’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는 촌스럽다는 말이 욕설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과 비-서울, 이분화 된 공간을 바라보는 구체적 방식들우리들의 일상에서 하나의 자연스러움으로 코드화되어 있는 공간배치 질서는, 여러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는 그것들을 유형화해서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하나는 비-서울에 대한 전형적인 비하의 방식이다. 일단 대표적으로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촌스러움’에 대한 비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서울 출신이건, 비-서울 출신이건 큰 상관이 없다. 그냥 옷을 세련되지 않게 입는다거나, 얼굴이 까무잡잡하다거나, 성격이 ‘쿨’하지 못하다거나, 때로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도 ‘촌스럽다’는 말이 등장한다.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는 그 마저도 ‘스타일’로 승화하기도 한다마는, 대체로 어떤 개인에게 비-서울스러움, 다시 말해 ‘촌스러움’이란 말은 모욕을 주는 말이 된다.
한편으로 아주 ‘순진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비-서울 출신이면서 사투리를 쓰지 않는 사람은, 흔히 “사투리 어떻게 고쳤어요?”라는 질문을 듣는다. 그렇다면 사투리는 ‘고쳐야’하는 것일까. 고친다면 무엇으로 고친단 말일까. 또한 이러한 비-서울 사람들 중에는 사투리와 표준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바이링궐bilingual도 자주 눈에 띈다. 이들은 가족이나 ‘고향’친구들한테 전화할 때는 사투리를 쓰다가, 전화를 끊고 나서는 다시 표준어를 쓰는 신공을 발휘한다. 그런 경우 ‘신기한’ 대상이 되어 사투리를 써보라는 ‘호기심’ 어린 요구를 받는다. 방식만 순진할 뿐, 이런 질문들과 요청들이 결국 비-서울에 대한 은근한 비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또 무엇일까. 그리고 그 대상이 비-서울 주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례가 아니라면 또 무엇일까.
다른 하나는 비-서울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보통 ‘시골’이라 칭해지는 공간이다. 우리는 서울 생활이 너무나 복작복작하고 퍽퍽하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으나, 비-서울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들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많은 서울-주체들은 서울로부터의 탈주를 꿈꾼다. 비-서울, 그곳에 가면 항상 빙그레 미소 짓는 마음 넉넉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고 꺄르르 웃으며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들과 항상 배부르고 행복한 멍멍 꼬꼬 음메 냐옹 짹짹 동물들이 있다. 또한 그곳에는 신선한 공기와 시원한 나무그늘이 있고, 맑은 시냇물은 졸졸 흐르며, 텃밭에는 탐스런 수박과 딸기가 자라서 원두막에 앉아 유유자적 언제든 마음껏 따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비-서울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서울과 비-서울이라는 위계질서의 전복은 발생하지 않는다. 상징적으로 비-서울은 항상 생기 넘치며 가득 차 있는 전체whole로서의 ‘자연’ 공간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를 부분적이고 풀기 죽어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반대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주체는 근본적으로 ‘결여’된 존재다. 항상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은 채 지내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막연한 향수. 우리는 서울에서의 탈출구로서의 의미로 비-서울이라는 타자-공간을 설정하고, 그것에 수많은 위안의 서사와 판타지를 기입한다. 언젠가는 돌아갈 풍요로운 공간, 어딘가 친밀하고 나를 포근히 받아줄 것 같은 공간. 그러나 이런 판타지와는 달리 비-서울은 현실이고 ‘실재’이다. 여러 환상들이 아슬아슬하게 터질 듯 누벼져 있기에, 그것이 비-서울과 언제라도 맞부닥뜨리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이 분명하다.
서울과 비-서울, 그 음울한 환상이제 다시 ‘서울스러움’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서울스러움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언어화’ 할 수 있는가? 강남의 고층 빌딩, 사람들로 들끓는 멀티플렉스, 우아한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서울 타워와 한강의 유람선과 연인 등등, 이러한 것들이 서울스러움인가? 혹은 관계의 ‘쿨’함, 정치적 올바름(혹은 쿨한 무관심), 바쁘지만 세련된 도시인의 풍모, 이러한 것들이 서울스러움인가? 물론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연출’할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 그것이 삶의 중요한 일상적 풍경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지만, 서울스러움은 각 개인에게 다 다른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구체적으로 내리지 못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를 빨아들이는 중심적이고 중력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윤리적 명령’으로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각자가 그것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각자의 서사를 써 내려 간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스러움은 의미가 꽉 차있는 과잉 기표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어있는 기표”이다. 이 텅 빈 기표가 우리의 삶을 규약 하는 또 하나의 명령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서울스러움에는 ‘정답’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항상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것을 ‘승인 받아야’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시적’이다. 물론 연예인이라거나 태생부터 서울스러움의 포스가 풍길 수밖에 없는 특이한 사람들은 예외가 될 수도 있으나, ‘평범한’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에 서울스러움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어딘가 찜찜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안감은 일상 속에서의 의례와 사건들을 통해 잠시나마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 ‘촌스러움’이 보이면 단체로 그것을 확인하고 공유하며 비하하는 의례들, 서울에서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해보고 미니홈피와 블로그에 자랑처럼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의례들, 가장 세련된 모델들―그러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진 그들―이 나온 잡지와 인터넷 카페 등을 뒤적이며 ‘도시적’ 유행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의 ‘실천’들. 그것은 서울공화국의 서울스러움이라는 음울한 환상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애처로운 몸짓의 한 단면일 것이다.
각주)-----------------
1) “시골 내려가?”라는 말은 자연스럽지만 “시골 올라가?”라는 말은 영 어색하다. 물론 서울이 South Korea의 북단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서울이면 전부 시골이고, 그 시골과 ‘내려’간다는 말이 자연스레 이어져서 통용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상징적이다.
2) 커뮤니케이션 또한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예컨대 카페에서 촌스러운 사람과 서울스러운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할 경우, 우리는 어떤 위화감 따위를 느끼게 될 것이다.
3) 김현경, 「사람이 되어라」, 비교문화연구소 집담회 발표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