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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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10/13 22:32
나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단편집부터 접했다. 그리고 최근 웹진 문지에서 지난 달 웹진문학상을 수상한 <옹기전>까지. 단편을 읽고 나니 <백의 그림자>라는 경장편을 읽기가 두려웠다. 언제나 좋아 뵈는 글은 최대한 미루고 아껴서 보게 된다. 가장 적확한 순간에 만나게 될 때까지. 내가 읽어 치우는 것들과 동급에 두기를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그 좋은 것들을 끝까지 보존해두기 위해서. 영화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다. 최상의 것들은 최상의 순간에 만나야 하고, 절실할 때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삶의 어느 순간엔, 언젠간, 꼭, 온다. 내가 책을 사 모은 채 보지 않고, '굿 다운로더'가 되어 영화를 다운 받아 둔 채 보지 않고, 한달에 돈 얼마 내면서 150곡을 다운 받고도 안 듣는 음악들이 있는 이유다. 여하튼 몇번이고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늘 실패했다. 부분적인 인용조차 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특히 무재와 은교 사이에 오고가는 짧은 대화가 무척 마음에 드나, 그 대화가 이 작고 하얀 책 밖으로 나오면 황량한 여백에 쉽게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이 소설을 근래 보기 드문 최상급의 사랑소설로 읽었고(연애소설이 아니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별로 겹칠게 없는 다른 범주라고 생각한다. 또 난 연애엔 도통 젬병이므로), 또한 윤리적 탐문으로 읽었다. 사랑과 윤리의 불가분적 관계. 사랑하지 않고 윤리가 어찌 있을 수 있으며, 윤리적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 어찌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혹은 이 소설을 마음에 품고 있는 한, 만났을 땐 손쉽게 서로 인지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라는 착란마저 들게 한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소설을 언젠가 쓰게 된다면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까 싶은,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공이 생긴다면 써보고 싶게 만드는 좋은 소설.

소설 자체에 대해 어쭙잖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과제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부분이 있어 옮겨두려고 한다. 소설에서 인용한 건 아니고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한 부분이다.


이 작가에 대한 기왕의 비평적 논평들을 존중하기 위해 '환상'이라는 용어를 고수했지만 사실 적절한 단어라고 하기 어렵다. 복잡한 문학 이론의 문제들은 제쳐 두고라도, 도대체가 이 소설에서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 주체가 어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발생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인' 환각을 뜻하는 환상이라는 용어로 그 현상을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간 비윤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차라리 '극(極)현실'에 가깝지 않은가.

황정은이 (이 소설뿐만 아니라 기왕의 작품들에서도) 환상을 동원하는 까닭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방금 짚어 본대로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수단으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종류의 것일 때, 소설가는 그 극한의 불행을 어떻게 소설화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학(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자세)의 문제다. 벤야민이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한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178-9)

원래는 문학이론을 가장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너무 붙어 있어서는 데일 수밖에 없으니 '취미'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언제나 스스로 환상 구조ㅡ행위자성, 혹은 주체를 탄생시키는ㅡ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결국엔 자신감 부족일테지) 그것은 잠시 미뤄둔 채 인류학 관련 전공, 더 넓게는 '질적 연구'를 하는 전공에 들어 갔다. 왜냐면, 나는 더 이상 "정보들"을 생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독성"을 밝히고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질적 연구방법론이 할 수 있는 것에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공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때때로 나는 오가는 이야기와 그 결과물에서 "단독성"에 대한 열망을 조금씩 읽을 수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그 열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아직 석사 1학기라 왜 그 전공을 택했냐는 말엔 상대방이 가장 원할 것 같은 말, 혹은 주변 상황에 따라 적당히 조절해서 말하곤 했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단독성"의 문제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블로그에라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요즘 수업에서 강독하는 버틀러 책의 일부분은 마침 이 단독성(singularity)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단수성인가, 단독성인가, 특이성인가, 혹은 독특성인가. 그 무엇으로 번역하든 universal-particular라는 이분항이 아닌 third term으로서 singularity 개념이 적확하게 한국어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지금 당장은 산적한 과제를 해치우고.. 방학 때 조금 더 몰입해 볼 주제.


부록 : http://webzine.moonji.com/?p=2910
나 이렇게 조금 수줍은 인터뷰가 완전 좋아 *-_-* 다음 작품 이야기에서 완전 기다리게 된다. 이 인터뷰도 한참 전에 봤는데 블로그에 올려서 나눌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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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20 21:29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간다는 것. 천상의 혼례, 다양체의 다양체들. 모든 사랑은 앞으로 형성될 기관없는 몸체 위에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바로 이 탈개인화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비로소 누군가가 명명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이나 성(姓)을 얻고, 자신에게 속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다양체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가운데 가장 강렬한 식별 가능성을 획득한다. 얼굴 위에 있는 주근깨의 무리, 여자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년 무리, 샤를뤼스 씨에게서 들리는 소녀들의 재잘거림, 누군가의 목구멍 속에 있는 늑대 떼, 사람들이 골몰하고 있는 항문이나 입이나 눈 안에 있는 항문 다양체.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그토록 많은 몸체들을 지나간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p. 76


옛날, 그러니까 20대 초반이었을 때라면 분명 멋있다고 느꼈을 구절인데, 지금 같아선 건조하게 읽힌다. (그들은 실제 연애도 이렇게 했을까?)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략 알겠는데, 역시 감동이 전혀 없다. 대학원 지망하는데 그 교수가 가끔 이들의 개념을 인용하길래, 에라 모르겠다 도닦는 마음으로 봐보자,해서 그냥 사봤는데 힝ㅠ.ㅠ <천개의 고원> 사는 김에 ㅇㅈㄱ씨의 재판 찍은 책 한 권도 샀는데... 이거 정말 다투자는 거지? 재판을 찍어내면서 수정하기가 귀찮아서 몇 가지 첨부하고 넘겼다는 말이 버젓이 적혀 있어... 세상에... 이거 나는 낚인거지? 성의 없이 낸 책, 덥석 사버린 내가 잘못인거지? ㅠㅠ

어쨌든 들뢰즈와 가타리,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어떤 집단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지, 예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좀 훑어보니 이들이 쓰는 개념이 꽤나 화려하고 그럴싸하다는 것은 잘 알 것 같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 어울리는 개념이라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러나 정작 속은 맹맹한 느낌이다. 나로서는 읽고 나면 허무하기 그지 없다. 이들은 단지 옛날부터 잘 있었던 것을ㅡ이들의 표현법에 따르면ㅡ단지 재밌게 보이는 계열에 따라 배치한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기계라는 개념도 왜 이렇게 시종일관 별로지? 몇년 전 라캉 관련 서적을 열심히 읽었던 것도 점점 머리 속에서 지워져 가는 중에, 지금 같아서 그가 했던 말중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말은 딱 하나 남았다. 남자들은 마치 공기를 넣어 몸을 부풀리고 있는 개구리 같다고. 이 책을 읽는데, 꼭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지금은 이 두사람의 유행이 많이 지난 감도 있지만, 이들이 누린 인기는 과거 이상 시인이나 기형도 시인이 누렸던 인기와 비슷한 성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보다는, 이들의 특이한 이력이나 라이프스타일 이 더 중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그들의 분위기나 패턴을 공유할 수 없거나 거기에 거부감이 든다면, 사유와 표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뭐 그런.

물론, 이들이 그냥 내 취향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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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23 22:00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집단적인 담론 구조에서 혁명의 꿈은 개인의 시간으로 환치되고, 사랑의 열정과 사랑의 대상과 하나가 되었던 황홀한 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 앞에서 멈춰서버린다. 그래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꿈은 '청춘의 열병'으로, 혁명의 시간은 개인의 생애사적 시간 속의 빛나는 순간으로 그려진다. 이 서사는 지속되지 못한 혁명에 대한 사랑의 열병은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혁명을 살아남은 자의, 개인의 생애로 환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의 '좌절된 꿈'의 시간으로 환수된 혁명의 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와 환멸, 혹은 자기모멸의 시간 앞에서 멈춰 서버린다. 따라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사랑은 빛나는 순간 속에서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_권명아, <죽음과의 입맞춤 :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 사회 2010 봄, p. 298

이 글을 읽고 있자니 학부 때 알던 여러 남자들의 얼굴이 아주 새삼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저마다의 구호를 갖고, 저마다의 학정조(학생정치조직)등 집단의 후광을 두고, 가끔씩 일이 있으면 연례 사업처럼 깃발 들고 나가기도 하고, 술집에서는 과장된 영웅담이나 허세를 부리거나 고뇌를 연출하여 후배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선거철이 되었다 싶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수트를 빼입고 컬러 포스터 속에 등장하던 남자들. 그 남자들을 둘러싼 담화는 오직 뒷담화일 뿐이고, 그들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잠적하기 전까지는 매우 잘나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수없이 많은 연애를 했고, 그 연애의 끝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남자들만큼은 그 공동체 속에서 끝끝내 생존해 남았다. "혁명의 문법에서 사랑이 정치와 탈정치를 둘러싸고 젠더화된 위계를 구성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특정 주체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위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문법에서 청년의 열정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지만, 여성, 미성년, '무지한 대중'의 여정은 과잉되거나 부족한, 혹은 훼손되거나 결여된 것으로 간주된다. (같은 글, p. 295)" 음. 계속 다른 부분도 인용.

생애사의 리듬 속에서 혁명은 젊음의 열정, 젊은 날의 추억이 된다. 그 추억 속에서 첫사랑의 열병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지만, 결국 그 열병은 성장을 위해 누구나 겪는 성장통처럼, 통과제의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추억 속에서 혁명은 통과제의와 같은 자연사의 한 과정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생애사의 서사에서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자연 과정이 되어버리고, 현재가 아닌 과거의 몫이 된다.

또한 추억 속의 혁명은 혁명의 좌절에 대한 책임을 언제나 사랑의 대상에게 전가시키고, 추억의 주체는 혁명을 생애사의 원형적 기억으로 곱씹는다. 이렇게 추억이 된 혁명 속에서 변절은 언제나 타자의 몫이며, '나'는 혁명을 순수한 기억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배타적 소유권을 지닌 '순수한 주체'로 면죄된다. 추억이 된 혁명이 혁명에 대한 소유권, 혹은 혁명의 원본과 변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혁명을 생애의 "원형 기억"으로 추억하려는 욕망은 혁명을 과거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혁명의 좌절을 타자에게 전가한다.

_같은 글, pp. 300-1

권명아 평론가의 이 글은 4. 19에 대한 것이지만, 그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이는 단지 4. 19세대만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386세대", "87년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인 어떤 모종의 규칙이다.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젊음'과 사랑과 혁명과 열정과 섹스와 젠더의 결합 공식이랄까. 이 공식을 잘 풀어낸 사람들만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자격을 갖는다.

60년이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추억하는 서사들을 읽을 때 큰 불편함을 느꼈던 게 <정확히> 이런 점들 때문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도 매혹적인 배우들과는 별개로 불편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남자 작가들이 보여줬던 당시 세계는 분명히 예컨대 공지영 작가가 90년대 초반에 그려냈던 세계와는 다르다. 좀 더 생각과 독서를 이어나가야 할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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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영화 / 2010/03/06 16:41


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만났다. 가슴 한쪽 구석부터 차오르는 따뜻함, 그리고 다른 한쪽에 남아버린 씁쓸함. bittersweet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적절한 것 같다. 영화는 얼마간 전형적인 로드무비다. 다소 답답해진 일상을 벗어나서 길따라 여행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은 뒤에 마지막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렇게 돌아온 집은 이전의 집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은 뚜렷하지만 '직업'이 뚜렷하지는 않은 커플, 버트와 베로나는 버트의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다. 베로나는 그 방문이 마뜩찮기는 하지만 아이의 출산이 임박했기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이제 아이가 생겨날 두 사람은, 이 둘 외에 이 관계를 살피고 도와줄, 그들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가족 같은 것" 아니면 "친구 같은 것", "친분 같은 것", "우리가 아는 사람 같은 그런 것"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찾아간 곳에서 버트의 부모님은 2년간 벨기에로 떠나버린다고 뉴스를 전하고, 집도 임대를 놓아버렸다고 한다. 충격. 그럼 이제 이미 떠나온 길을 따라 길을 더 갈수밖에.

피닉스(Phoenix) - 투손(Tucson) - 매디슨(Madison) - 몬트리얼(Montreal) - 마이애미(Miami) - 집의 코스를 밟으면서 이들은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사람들과 사건에서 자신들의 <현재> 모습을 읽어낸다. 피닉스에서는 왜 결혼한 커플들이 자신들처럼 사랑하지 않을까를 궁금해하고(결혼은 관계의 파탄일 것이다. 베로나는 끝끝내 버트와의 결혼을 거부하던 중이었다), 투손에서는 베로나의 동생을 만나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애틋하고 얼마간은 애증이었던 관계를 떠올린다(자신이 부모가 될 때에, 비로소 부모라는 것에 대해 진지해질 계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매디슨에서는 정말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던 버트의 이를테면 사촌인 엘렌을 만나고, 엘렌의 뉴에이지 일상에 충격을 받는다(부모와 태어난 아이와는 '적절한' 거리와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몬트리얼에서는 옛 대학 동기였던 부부를 만나는데, 그들에게서 버트와 베로나 두 사람에게는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방패막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두 사람<만의> 삶은 없어지고 책임감과 인내라는 중요한 가치가 두 사람의 관계를 덧칠하게 된다.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침내 "친구 같은 것"을 찾아냈다고 생각해서 몬트리얼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던 두 사람은, 버트의 형이 전한 급한 연락을 받고 마이애미로 떠난다. 마이애미에서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형네 부부는 이미 파경이었다. 와이프는 이미 떠나서 잠적한 상태고, 버트의 형은 관계와 신뢰, 무엇보다도 평범한(정상적인) 삶이 무너졌다고 절망한다(결혼 생활 중이라도 얼마든 관계는 무너질 수 있고 세계는 붕괴할 수 있다. 아이가 있든 없든. 관계와 세계는 어쨌든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다소 작위적인가?

특히 마이애미에서 버트는 눈에 띄게 불안해 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무너진 커플의 신뢰 앞에서, 버트는 영 자신감이 없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야밤에 콩콩이를 뛰던 버트는 베로나와 인상깊은 장면을 연출한다. 속삭이듯 따뜻한 대화의 연속..

-(버트) 최소한, 결혼은 해줄 수 있겠어? / =(베로나) 절대 안 해. 그러나 절대 너를 떠나진 않을거야. / -(버트) 그래... / =(베로나) 약속할게 / -(버트) 그래 알겠어. 너는 나랑 절대 결혼을 하지 않을거야. 원하지 않으니까. 네 부모님이 결혼식 자리에 없으면 넌 절대 결혼하지 않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날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 할 수 있어? 우리의 이 아이를 절대 안 떠날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그럼(I do). / [... 중략 ...] / =(베로나) 우리 딸이 뭔가를 말하려 할 때 진심으로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특히, 아이가 두려워 할때 말야. 그리고 아이가 싸울 때면 마치 자기 싸움인 것처럼 아이 편을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 -(버트) 응(I do). 내가 부끄럽게 죽든 진부하게 죽든, 우리 딸한테는 아버지가 850명의 체첸 고아들을 구해주려다가 러시아 군인들과 맨손 격투를 벌인 끝에 죽었다고 말해줄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응. 체첸 고아들, 알겠어. 응.

보통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보는 사람은 진부한 사랑의 맹세를 늘어놓고 커플에게 "네(I do)"라고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진부한 결혼식 대신, 그들은 사회문화경제적인 이익을 주는 '제도권' 결혼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거행한 셈이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에 "우리는 비현실적이야", "우리는 망할 수도 있어"라고 자조하기도 하고 "꼬꼬마야? 혼란스러워? 미숙해? 미국적이야?"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얼마간 성장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추운 날씨에도 히터를 켜면 전기가 나가는 집이기는 하지만... 정말 사랑스럽다.


덧)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고 살찌는 것 가지고 베로나를 괴롭히던, 그래서 얼마간은 거북함이 들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던, 어벙꺼벙하고 우유부단하며 썰렁한 유머를 구사하던, 키만 껑충하게 큰(191cm) 버트 역을 맡은 존 크래진스키의 인터뷰 중에서 이런 말이. "제 이름은 원래 존 콜린스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재능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이름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크래진스키라는 폴란드 계관시인의 이름을 빌려왔어요. 완전히 쇼비즈니스계를 위한 이름이더라니까요." 아 이 배우 뭐냐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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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1/14 00:22

얼마 전부터 막 읽기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은 '현상학적 사랑관'을 보여준다. 사교 모임 같은 자리에서 자기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사교계의 불량품"들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한편 의외성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접근해야 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이 아니라, '그 같은 사람이 (내가) 이럴 때 이곳에 나타나다니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인 셈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은 '그'와 '멋있음' 사이에 수없이 깔린 우주적인 연결고리를 사랑한다. 이는 두 단어 사이의 공간을 넓히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엔 오로지 우연 뿐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도 인식으로 남아야 한다.
 
이러한 사랑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얼까? 일단 '낭만적 사랑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울 메이트'에 대한 열망, 하루키 단편 소설의 표현에 따르자면 "100%의 여자 아이"라든가 하는 식의 완벽함에 대한 희구가 늘 존재한다. 또한 지금 내가 마주하는 모든 비루한 것들 너머에 진정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랑 그 자체도 유예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나타났다고 믿게 되는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기꺼이 투기(投己)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도 존재한다. 최상의 경우에 다다랐을 때, 낭만적 사랑관은 현상학적 사랑관과 반대로 '그 참 멋있어'라는 문장과 만난다. 이는 '그'와 '멋있음' 사이의 우주를 축소하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에 필연의 질서가 비집고 들어온다. 낭만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 곧 존재가 된다.
 
나는 이 두 극단 어디에 서 있을까? 아마도 고원원과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과 유사한 유형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직한 일일 것이다)


어떤 작가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단점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누군가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의 단점을 마음에 두고 동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한때 매력을 느꼈던 사람에게서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매혹이 곤혹이 되고, 진담이 부담이 되고, 열정이 치정이 되고, 환상이 환멸이 되고, 사랑이 사죄가 되고, 진실이 진부가 되는 순간이다.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오로지 인격수련이다. 이 인격수련은 어쩌면 윤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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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6/15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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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ritte, <Les Amants>


한 손이 어떤 열매, 꽃 또는 갑자기 타오르는 꽃잎을 향해 내뻗친다.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그 시도는 열매의 무르익음, 꽃의 아름다움, 꽃잎의 불타오름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에서 그 손이 대상을 향해 충분히 움직였을 때, 또 다른 손이 열매로부터, 꽃으로부터, 꽃잎으로부터 튀어나와, 우리의 손을 맞잡기 위해 내뻗친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의 손은 열매의 닫힌 충만함 속에서, 꽃의 열린 충만함 속에서, 작열하는 손의 폭발 속에서 응결된다. 이 순간 발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구멍 뚫린 시트의 사례」(김영찬 외 역, 『성관계는 없다』, 211-2).



주판치치의 이 말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으로는...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컨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 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donner ce qu'on n'a pas,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l'aiment, 즉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l'aimé , 즉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 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55-6.



일전에 넬 4집 앨범인가 나왔을 때, <어떻게 생각해>라는 노래를 들으며 꽤나 슬퍼했던 적이 있었다. 그 가사는 이렇게 된다.

당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내 몸을 맡기고
믿음으로 무장한 관계인것처럼.
하지만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나의 마음 속에 날 가득 채우곤
마치 나는 없고 온통 당신 뿐인것 처럼.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설명해.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
열리지 않는 마음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주판치치와 보조비치의 언급들은, 오히려 이런 불일치와 결여야 말로 사랑의 필수 (구성)요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더 이상 이런 노래의 가사를 보면서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앙가주망'인 셈이다. 다시 말해 관계의 지속은 섣부른 '이해'와 '앎'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관계는 죽어버린다(그러고보면 내가 가장 싫어하고 상처를 많이 받는 말 중 하나는 "너는 ~이다."라는 식의 말이다. 나는 그게 아닌데... 그 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그 결여가 칼날이 되기도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잘 안다고(자식이 부모를 잘 안다고) 너무나 쉽게 착각하고 있듯. 그러면 서로에 대한 '앙가주망'은 철회된다. 그 대신 남는건 더 극심한 허무, 고통, 허울 좋은 의무들 뿐(오히려 이게 신파와 상처의 근원이겠지). 그 대신 나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구속,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의지와 참여와 책임.. 그리고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처와 결여와 공백에 나를 열어두기, 그러면 그 상처와 결여와 공백은 오히려 무한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상처없이 관계는 열릴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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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1/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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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ritte, <Les Amants>



우선 라캉의 테제(?) 중 하나인 "사랑은 하나의 희극적인 느낌이다"를 기억해두자.

희극 예술과 관련하여,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사물[das Ding]이 대상 층위로 강하하는 것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희극들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숭고한 대상이 결국 그것의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실추된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실추가 (웃음은 대상의 숭고한 측면을 지탱하기 위해 이전에 투여되었던 리비도적 에너지를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프로이트적 정의와 부합하게도) 우리를 웃게 할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는 훌륭한 희극이 작동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헤겔이 매우 잘 알고 있었듯이, 진정한 희극적 웃음은 조소어린 웃음이 아니며, 남의 불행에 즐거워함Schaden-freude의 웃음이 아니다. 희극에는 한갓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는 진술의 변주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참된 희극들은 외관들 배후의 나체성이나 공허함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보다는 공허함(또는 나체성)을 구성하는 데 종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희극들은 이 벌거벗음이 상이한 여러 각도에서 탐색되고, 그것을 내보이는 바로 그 과정에서 그것이 구성되는 환경들이나 상황들의 전체적 설정을 편성한다. 그러한 희극들은 사물을 옷벗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의 옷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음, 이것은 면이고 이것은 나일론이고, 여기엔 예쁜 신발이 있네ㅡ이것들을 다 한 데 모으면, 우리는 너에게 사물을 보여주게 될 거야." [하략]

알렌카 주판치치, 이성민 역, <정오의 그림자>, p. 248


오오... 음, 인식적인 '충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용한 부분은 "희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이다.

인용한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사랑-대상선택은 대개 승화sublimation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파악하면, 사랑-대상을 숭고하고sublime 고상한 위치로 격상시킴으로써, 대상에 초월적인 지위와 접근불가능성을 상상 속에서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그 대상은 "비인간적인 파트너"가 되고, '숭배'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이상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타입의 사랑-대상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승화를 거친 사랑-대상선택은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승화' 방식과 맞물린 사랑 양식을 대상에 대한 폭력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대상을 '승화'하지 않고서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승화 과정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특수한 승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이 보기에 이 특수한 승화는 "향유를 인간화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전개하는 주판치치의 모든 논의는 저기 인용한 부분에 압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승화 : 정신분석학에서 승화란, 리비도(충동의 심리적 측면)가 단지 성(性)적인 대상에게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비도의 투사 대상에 어떤 변화를 주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즉, 승화란 "사회적 평가가 참작되는 일종의 목표 수정과 대상의 변경(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이다. 우리는 리비도가 asexual하고 사회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을 향하고 있으면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그만 두고 다음에 더 얘기하고 싶지만, 그냥 한 가지만 더 언급해보자. 오늘날 사랑에 대한 표상체계를 굳이 구분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그야말로 전통을 물려받아 상징들과 기표들의 그물망 속에서 노니는 사랑에 대한 표상이고(예컨대 완전히 통속적인 이성애 연애와 결혼 등의 사회제도 장치들 속에서의 사랑), 다른 하나는 그런 것들을 싹 치워버리고 '이자-관계'(혹은 '삼자-관계' 속에서) '순수한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표상이다. (물론 각 개인들이 하고 있는 개개별의 '사랑'은 이 표상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들은 그냥 '있는' 것들이고, 단지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표상 체계가 이러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전자의 것일테고,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오는 사회생물학적 서적들의 설명은 후자에 가까운 것일테다(혹은 섞여 있다. 사실 후자의 것은 어느 표상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퇴행적 나르시시즘에 기반해 있으니). 하지만 이러한 표상체계에서 잊혀지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 사랑이란 행위 그 자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의미인지에 대한 의문들이다. 다들 알겠지만 사랑은 제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욕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랑은 그 자체로 욕망 체계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욕망을 초과하거나 혹은 심지어 욕망의 순환을 중단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주판치치의 글은 이러한 생각을 진척시키는 데 힌트를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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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08/15 00:49

서동진씨의 글을 오랜만에 여기에 옮겨 둔다(이렇게 옮겨 둬도 될까..). 블로그에 누가 들어오는지 궁금해 하시길래 리플이라도 달까 했다만 역시나 버름하여 -_-. 이 글을 옮겨 오는 이유는 서동진씨의 글이 역시나 반갑고 마음에 들고 좋아서. 그리고 이 주제에 있어서 만큼은 평소 생각하던 바와 유사한 점이 많아서(그냥 읽은 글이 마음에 들면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출처는 www.homopop.org...


 
|사랑의 진정한 능력은 사랑의 윤리란 데 있다. 내게 닥칠 모든 불리를 감수하고 기존의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뜻에서의 윤리, 즉 세상의 규범과 의견이 무어라 말하든 당신을 사랑한 것이 옳으므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고집하는 것으로서의 윤리. 사랑은 그런 윤리적 행위이다. 그 윤리에서 벗어난 사랑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흔한 연애이야기가 아니라 망각될 수 없는 사랑의 증언이 필요하다면? 이 글을 반드시 답파해야 한다.|

나는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을 흔한 레즈비언 연애담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즈비언의 사랑이란 넌센스이다. 사랑은 정체성을 가진 두 명의 사회적 신분의 주체가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분적 속성을 삭제하고, 일체의 사회적 정체성을 소거하고, 속된 말로 이런저런 계급장을 모두 떼고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그래야, 우리는 왜 그토록 수많은 로망스 혹은 연애소설에서 신분이 다른 두 명의 인물들이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그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이란 식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요즘 판치는 논리, 이를테면 <우리의 사랑도 사랑이다>는 식의 주장, 나아가 동성 간의 사랑도 사랑으로서 받아들여달라는 항간의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다>가 아니라, <모든 사랑은 그, 그녀가 누구였는가를 개의치 않는다>가 맞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정체성, 성의 신분끼리의 사랑이므로 허용될 수 있고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에 위배된다.

사랑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 사이의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역으로 그 모든 속성을 지우고 자신을 완벽하게 개인화하는 것이다. 즉 당신과 내가 어떤 배경, 신분, 속성을 가졌건 상관없이 당신과 나는 이제 그 모두를 지운 채 순전히 백지상태의 주체로 만난다. 나는 그것을 사회화된 개인과 다른 뜻에서의 개인, 즉 <사랑하는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근대 사회에서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와 다른 희귀한 개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희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것은 흔해빠져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얼마나 흔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희귀하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빠졌을 때 거의 제 정신이 아니다. 사랑하면서 제 정신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만 그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벗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태에 있는 비규정적인 개인이 감당해야하는 숨 막히는 자유 혹은 무한한 결정의 상태에서 벗어나 곧 안전하고 고요한 상징적인 질서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사랑하는 너와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탈출하여 누구의 남편과 아내, 누구의 아빠와 엄마가 된다. 그래서 결혼은 감옥이란 말이 맞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또한 아늑하고 달콤하다. 나는 내가 맺는 이 관계를 더 이상 나의 개인적 책임과 판단의 세계로 상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연애는 아빠 노릇, 엄마 역할, 부부의 도의 등의 규칙에 의해 관리될 수 있는 세계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끝내고 “성숙”한 커플이 되거나 지금 나의 고집대로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거의 모든 인간에게 고루 분배되어있는, 가장 충격적인 윤리적 우주로부터 탈출한다.

나는 그 점에서 게이, 레즈비언들이 주는 (윤리적) 충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로 그런 상징적으로 위임된 역할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여전히 사랑하는 당신과 나라는 개인성의 위치에 머물러 있도록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런 윤리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잔꾀가 동성결혼의 합법화, 법률화의 의지 가운데 하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줄 수 있는 사회경제적 편익과 이득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진하는 의지 속에는 바로 그런 자유에 대한 저항감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호모콘(Homocon)이라 불리는 호모 콘서버티브(Homo Conservative)의 주장 속에 콘서버티브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과는 전연 다른 뜻에서의)>에 있지 않을까.  

나는 늙은 게이 영감들이 혀끝을 차며, “우리는 안 돼, 자식을 못 낳아서 우리는 안 돼, 발정나면 그것을 말려주는 책임의 세계가 없으니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울고 웃어야 하는 나비떼야”라고 탄식할 때, 그 말을 반쯤만 옳다고 받아들인다. 욕망을 자제한다는 것, 의리와 유대, 찰나적인 욕망에 굴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내 등은 아름답고 기특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와 같은, 나의 또 다른 체현이라고 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타인 앞에서 왜 나는 이렇게 허둥거리고 왜 나는 그간의 나로부터 벗어나는가라고 말하는 나, 즉 나의 분신과 다른 너, 전적으로 나에게 낯선 그/그녀와 해후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사랑의 윤리라면 나는 그 사랑의 윤리를 악착같이 관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계약 결혼이니 자유연애니 하는 말에 심지어 공산주의적인 붉은 사랑이니 하는 말에 심드렁해 한다. 사랑이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충격과 공포에서 비롯된 반성이라고 이런 생각들을 헤아려본다면, 그러나 그런 생각과 주장은 위대해진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손쉽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법에 관한 잡다한 카운슬러의 조언과 이른바 연애를 성사시켜주는 수많은 중개업자들의 장사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게서 무언가 우리에게 잡히지 않는,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규칙을 상회하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하고, 사랑을 끝없이 재발명해야 한다는 충동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을 믿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기형도의 멋진 시제(詩題)처럼 나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같은 말을 뇌일 생각이 없다. 나는 차라리 <사랑을 잃고, 나는 사라졌네>라고 말해야 옳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없는 나 속에서 다시 무슨 낯을 한지 알지 모를 그 다른 나를 두렵게 기대하여, 사랑을 시도하는 것. 사랑에 실패하였으므로 쓰러지지 않고, 또 다시 그 어떤 낯선 타인을 만남으로써 전에 없던 나와 대면하는 그 기적, 또 한 번의 사랑이 당도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다시 시작하는 사랑이든 아니면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이든, 그것을 집요하게 갈구하는 것. 그것은 탐욕일까, 호기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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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4/13 21:45

성, 연애, 사랑의 경험 중심주의

성, 연애, 사랑은 우리들에게 지상명령처럼 자리 잡았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서 좋은 연애를 하고, 또 좋은 결혼까지 나아가라는 명령은, 별로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된 수많은 대학생들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통로처럼 보인다. 사실 누구나 연애를 하고 있으며, 누구나 사랑을 한다. 이건 사회사적으로 무엇이 중요한 가치냐, 즉 어떤 연애와 사랑을 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냐와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다. 가문 때문에 차마 맺어지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오랜 신파든, 시쳇말로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의 목에 도덕의 칼날이 떨어지던 시절의 이야기든, “즐겨라!”라는 명제 이외에 남은게 없는 엿 같은 리버럴 연애 담론이 판을 치는 오늘날의 세상이든, 언제나 성, 연애,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늘날 힘들고 앞날이 보이지 않고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회라는 벽에 부딪힌 우리들의 거의 유일한 탈출구는, ‘사적 관계’인 연애가 되었다. 때문에 대학교 3, 4학년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사람들은 별종으로 취급되거나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또 한편으로는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졸업한 후에는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이 백 만번 쯤은 쏟아질 것이다. 요즘엔 중 고등학교 때에도 연애를 하지 않으면 별종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들에게도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파트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신경증적이고 강박증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 연애, 사랑의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경험’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쿨하고 리버럴한 연애 담론이 판을 칠수록 더욱 그 경향은 강화된다. 오늘날 순진하고 성적 매력이 없음은, 또한 연애 경험이 없음은 곧 ‘능력없음’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는 성, 연애, 사랑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에 대해 더 ‘잘 안다’라고 규정된다. 그것을 많이 ‘해본’ 사람은 그것들을 잘 끌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간주되며, 또한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반면 성, 연애, 사랑의 경험에 막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사람들은, 혹은 그것들에 대해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연애 교과서>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따위의 ‘관계’에 대한 서적이 출판되고 또 잘 팔리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다 더 잘 아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은, 관계에 있어서 항상 불안한 나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경험’이라는 말을 좀 더 정교화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실상 위에서 ‘경험 중심주의’라 명명했던 것들은, ‘체험 중심주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은 성, 연애, 사랑에 대해서 수도 없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소설, 등등 수많은 문화 컨텐츠는 물론이고, 때로는 철학까지도 성, 연애, 사랑에 대해서 수도 없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연애 각본, 성 관계를 맺는 방법,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에 의해서 이미 학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성, 연애, 사랑을 다룸에 있어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체험’이지 않던가.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은유 속에서 말이다.

나는 여기서 ‘경험’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경험’은 지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경험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누적되고 새겨지는, 절대로 없어질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경험이 부정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이나 상실감은 나 역시도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렇게 ‘경험’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다만 많이 겪어본 사람이면 정말로 ‘올바르게’ 경험을 해본 것인가? 그리고 그 경험의 의미는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것이 되는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더럽고 짜증나는 온갖 것들이 널려있는데,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경험(물론 체험이라 표현하는게 맞다) 최고”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이에 관해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우리는 수많은 개 마초들의 언사에서 성, 연애, 사랑에 대한 경험 중심주의의 ‘몽매’를 볼 수 있다. 그들의 멍청한 대화들에 녹아나는 것들은, 그래서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법칙이 되어버린 것들은 그들의 ‘체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 여자의 No는 Yes다, 따위의 말들은 결국 그들 ‘나름대로’의 경험에서 수없이 증명되고 또 강화되는 것들이다. 그들에게 다른 체험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삭제되는 것은 그들이 그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필드와, 그러한 경험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들의 경험을 정당화 하는 어떤 흐름들과, 그러한 경험들이 유통되는 방식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은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경험을 둘러싸고 있지만, 경험 중심주의에서 삭제되고 있는 수많은 것들임을 알고 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어떤 체험의 ‘누적’으로 좋다/나쁘다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많이 해본 사람이 많이 알 것이라는 가설은, 어떤 면에서는 맞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이다. 많이 관계를 맺는 것도 성, 연애, 사랑 관계를 맺어나가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연애 관계 속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새롭게 쉴 새 없이 강박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관계에 있어서는 불구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만 열심히 사귀지 않으면 수치심을 느끼거나 도덕적 자책감을 느끼는 보수적이거나 혹은 순진한 성 담론과는 별로 상관없다. 그렇다고 프리 섹스주의도 아니고 플라토닉 러브도 아니고, 아가페 러브도 아니다. 다만 체험과 경험을 절대시 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일 뿐이다.

다시 말해 경험은 결코 개인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온갖 사회적 가치들에 의해 적당히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작정 긍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파트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고, 그 관계를 자기의 삶의 중심 속으로 끌어들이며, 그것들을 쉴 새 없이 평가하는 것이야 말로 성, 연애, 사랑을 대하는 우리들의 윤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항상 지금의 순간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그 사람과의 ‘고유한’ 단 하나의 경험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새로운 것이어야만 한다. 겹겹이 쌓이는 경험의 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에는 성, 연애, 사랑 관계란 너무나 복잡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다. 경험 중심주의의 몽매에서 벗어나자. 오직 새로운 것에 부딪히는 일만이, 비록 그 경험 속에서 길을 잃고 좌절하고 눈물 흘릴지라도, 그것만이 우리 앞에 남아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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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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