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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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2011/02/06 09:31
- 아침에 일어나서 된장찌개를 데워 김치와 참치, 연근조림, 계란프라이로 든든하게 밥을 먹었다. 동생들은 각 방에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리를 최대한 적게 내려고 주의하지 않는다. 그릇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화력 좋은 가스렌지는 가스를 요란하게 내뿜었으며 수저와 젓가락마저 부주의한 소음으로 아침의 적막을 찢었다. 이렇게 먹는 식사라는게 맛이란게 있을리 없으므로 의무처럼 한그릇을 비운다. 나는 주어진 의무를 다했으므로 설거지는 이후의 몫이다. 어제까지 며칠 동안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던 나는 오늘 아침부터는 다시 현실을 직면하기로 하고 커피를 끓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의식을 잠시 놓고 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핀다. 싸이월드, 트위터, 지메일, 핫메일, 자주 찾는 블로그, 등등. 그러고나면 아침의 결의는 온데간데 없다.

- 얼마 전, 나른하던 겨울 밤을 회상했다. 손님들과 일년에 두 번 있는 의례 한 번을 치르고 모두가 낮잠을 자고 났던지라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던 밤이었다. 좁은 방에 포근한 이불을 덮고 둘러 앉게 된 네 명의 사람. 한 사람은 이들을 각각 280일 씩 몸안에 품었던 사람이고, 세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피와 살과 땀과 눈물을 착취하며 유기체로서 생존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방에는 몇년 동안 마음이 많이 따스해진 오십대 남자 사람이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셋 중 하나로 반쯤 누워 혼곤한 상태로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특별히 따뜻할 것도, 특별히 지루할 것도, 특별히 기억할만한 것도 없이 적당히 끊기는 대화들이 오가던 시간. 나는 졸리다면서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가리라는 걸 직감했다. 스물 일곱이 되는 해 초입에, 기억할 만한 순간,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은 순간.

- 좋은 비평이란 무엇일까? 비평이 예술작품에 '기생'한다는 통념을 신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평은 그런 통념과는 달리 비평 자체로의 독립을 주장해야 하니까. 그렇기에 나는 비평이 비평대상보다는 비평가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를 해준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그렇다면 좋은 비평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비평가가 되어야 하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하나의 비평은 그 자체로 내적 질서, 내적 소우주를 갖추어야만 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비평가가 가진 온갖 것들, 이를테면 언어와 문체, 이론, 지식, 삶의 배경 같은 것들이 작품과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한 만남과 여정의 기록, 혹은 그렇게 만나서 이루는 성좌(constellation)의 제시(그러므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땐 차라리 실패한 만남에 대해 고백적인 에세이를 쓰면 된다). 인용구와 유명한 이론을 들먹이는 건 물론 괜찮다. 그것도 비평가가 가진 것이니까. 하지만 17세기, 존 밀턴이 각주와 인용문을 즐겨 쓰던 연극비평가 윌리엄 프린을 놀리면서 했던 말, "텍스트 안에서 재주를 부리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텍스트 밖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말만큼은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 무엇인가를 '잘한다'는 관념은 사실 인정투쟁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가 무엇을 '잘' 하고, 또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때면 언제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것도 못하고 글을 딱히 잘 쓰는 것도 아니고 발상이 딱히 창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억력이 좋지도 않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이나 음악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길 하나 연애를 잘하기를 하나 주목받고 싶어 안달이기를 하나 쩝. 아, 더 땅굴 파기 전에 얼른 해야할 일을 시작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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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7/11 12:32
근대 서구의 '미적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의 과학과 미학에 그 연원을 둔다. 근대 과학의 이식론은 그때까지 사물에 부여되었던 의미들을 벗겨내고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18세기 후반의 낭만주의에서는 계몽주의의 전도가 일어난다. 대상에 미적 태도를 견지하고, 미적으로 평가하는 자세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루는 인식적 관심, 다른 하나는 선인가 악인가를 다루는 도덕적 관심, 마지막으로 쾌인가 불쾌인가 하는 취미 판단. 칸트는 세 가지 판단이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역이 분명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세 범주의 혼용 속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괄호 넣기"라는 개념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에서부터 연유한 것으로, '무관심'을 그 기본으로 한다. 즉 사물의 어떤 측면엔 관심을 잠시 꺼두고, 특정한 인식론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주관의 능동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미는 감각적 쾌적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무관심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방기하는 데서 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것은 칸트의 숭고론인데, 숭고라는 미적 판단은 감성적 유한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무한함에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숭고는 이성적 무한성을 자기와 대립하는 대상에서 찾는 '자기소외'이다. 여기서 얼핏 보기엔 불쾌한 대상에 대응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주관적 능동성이 적극적으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적 태도는  역사 속에서 구구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를 심미주의적인 태도라고 한다면, 인류학·민속학이라고 하는 쌍 개념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식민주의·제국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새디스틱한 지배로 간주되는 식민주의·제국주의는 미적 태도에서 자신의 최고조에 달한다. 타자를 오로지 미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심미주의자는 일견 반식민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주의의 실현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그 기원을 은폐하며,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괄호에 넣은 것들을 타자 그 자체나 타자에 대한 동경과 혼동한다. 파시즘 같은 경우도 일견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을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괄호를 벗기고 다시 괄호를 씌우는 비평적 과정이다. 페미니즘, 게이 이론은 통상의 남성 독자들이 괄호 속에 언제나 넣어두었던 것들, 그리고 괄호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괄호를 벗길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괄호를 벗긴다는 것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을 잠시 괄호에 넣고 다시금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럴 때에도 비판은 소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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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12/21 01:21

발터 벤야민 선집, <일방통행로>, 길, pp.101-102


1. 비평가는 문학투쟁의 전략가이다.

2. 당파를 정하지 못하는 자는 침묵해야 한다.

3. 비평가는 지난 예술시대를 해석하는 자와 아무 상관도 없다.

4. 비평은 예술인들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서클(同人)이 쓰는 개념들은 구호이고 또한 오로지 구호 속에서만 전투의 함성이 울려 나오기 때문이다.

5. "사실성"(객관성)은 항상 당파정신에 희생되어야 한다. 투쟁의 대상이 되는 사안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말이다.

6. 비평은 도덕적 사안이다. 괴테가 횔덜린과 클라이스트, 베토벤과 장 파울을 오인했다면, 그것은 그의 예술관이 아니라 그의 도덕에서 비롯된 것이다.

7. 비평가들에게 그의 직업동료는 상위의 심급(審級)이다. 독자가 그러한 심급이 될 수 없다. 후세는 더더욱 아니다.

8. 후세는 잊어버리거나 기릴(칭찬할) 뿐이다. 비평가만이 작가의 면전에서 판결을 내린다.

9. 논쟁(혹평, polemik)이란 한 권의 책을 그 책에 들어 있는 몇 개의 문장을 가지고 처치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 책을 적게 연구할수록 그만큼 더 좋다. 파괴할 줄 아는 자만이 비평할 능력이 있다.

10. 진정한 논쟁은 한 권의 책을 마치 식인종이 갓난 아이를 요리하는 것처럼 애지중지하며 다룬다.

11. 예술에 대한 감격은 비평가에게는 낯선 개념이다. 비평가의 수중에 든 예술작품은 정신적 가치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그가 투입할 수 있는 백병(白兵)이다.

12. 비평가의 기법을 짤막하게 요약하면 : 이념들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표어를 부각시킬 것. 칠칠치 못한 비평이 만들어낸 표어들은 사상을 유행에 헐값으로 팔아 치운다.

13. 독자는 언제나 부당하게 취급당하면서 그래도 결국 비평가에 의해 대변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조금 불편한 것도 있지만, 내가 '비평가'라고 분류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제시된 벤야민의 명제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 같다. 특히 인용한 이 부분은, 스티븐 풀러의 <지식인>과 관련 지어서 생각할 것들이 있는 듯 하다.

이 명제 앞에 제시된 <작가의 기법에 대한 13가지의 명제>나 <속물들에 맞서는 13가지 명제>도 재미있다. 다만 후자는 조금 이해가 잘 안 되서... 그나저나 이 다음에 나오는 <13 번지>는 제 아무리 어여삐 봐주려고 노력해도 토할 것 같다. 그래도 꾹꾹 참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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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4/22 21:03

들어가며

오늘 구입한 이번 한겨레21에는 “공지영은 한국 소설의 미래인가”라는 제목의 기획이 있다. 물론 공지영씨가 문단 비평계에서 은근히 ‘왕따’임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나, 이렇게 ‘비난’받는 글은 처음 봐서 약간은 충격이었다. 그 기획에서는 공지영씨의 소설을 정말 신랄하게 비난하는 정문순씨의 비평문 하나, (옹호론이라고 기자가 밝혀놓고) 덜 적나라한 비난을 하고 있는 이명원씨의 비평문 하나, 이렇게 두 개를 게재했다.

물론 공지영씨는 이제는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지 않게 된 작가다. 특히 예전에 무슨 신문에 실렸던 인터뷰를 읽고는 거의 질려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2006년 여름에 나름대로 진행했던 <<여성작가 소설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입했던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별들의 들판>,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이 아직 책꽂이에 꽂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의 기준에서는 그녀의 소설들이 이들 비평가들이 이정도로 ‘혐오’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한번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명원, <위안의 서사 문학적 대중주의>

이 기획의 기자는 이명원씨의 비평문을 ‘옹호론’이라고 생각한 것 아니면 애초에 청탁할 때 결과에 상관없이 ‘옹호론’을 써달라는 계획을 짜놓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명원씨의 글은 그다지 ‘옹호적’이지 않다.

여기서 이명원씨의 논의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물론 공지영의 소설은 문제가 많은 편이지만, 한국 소설계의 반 인간주의라는 특성에 대한 반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 문학적 대중주의의 현재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지영씨의 소설들, 특히 최근 성공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안적 서사”가 대중에게 폭 넓은 호소력을 제시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즉 공지영씨가 “한국 문학의 중요한 현재성”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녀적 감수성”, “센티멘털리즘”으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 문단 비평계의 주류적 해석을 감안해서인지, “문학적 대중주의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이라는 ‘조건문’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혹은 이 글의 필자가)‘대중주의의 실현’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이 비평문에서 보여주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들은 쓸모가 없어지는 것 일 테다. 게다가 비평문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에서 공지영씨에 대한 문단계의 비난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문체는 “~고 한다” 식이다. 남에게 ‘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책 없는 선량한 태도”라는 소제목을 보면 이명원씨가 ‘정말로’ 하고 싶어 했던 말은 역시나 공지영씨에 대한 비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가 앞에서 ‘옹호론’이라고 소개했던 게 정말로 무색할 정도였다. 게다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고 글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대중주의”라는 언표는, 한국에서는 결코 ‘긍정적인’ 기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명원씨의 입장은 분명해진다.

나는 일단 이명원씨의 비평은 ‘무책임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위에 언급했듯 그의 비평문의 상당한 부분은 남에게 들었다는 식이다. 읽다보면 정말 다른 수많은 비평가들의 생각인지, 이명원씨의 생각인지 알 수 없는데, 결국 끝에 가면 “~라는 지적은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식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결국 ‘남의 의견’인 것처럼 포장하고 소심하게 그 뒤에 숨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해 놓고서도, 비평문의 대부분은 그러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나름대로 ‘옹호’한다고 기록한 부분은 정말 몇 줄 되지 않아 오히려 읽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다. 따라서 나는 그가 ‘남의 얘기’처럼 써 놓은 것도 역시 그의 고유한 주장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물론 나는 다른 사람의 분석을 가져오는 것 자체를 ‘무책임’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일종의 행위일 뿐이다. 다만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 만 부 이상이 팔려나갈 인기 잡지의 지면에 글을 게재하고자 했다면, 그는 좀 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공지영씨를 ‘옹호’함으로써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문단 비평계의 ‘원색적 비난’이 걱정되었다면, 아예 이런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자신조차 공지영씨가 싫었다면, 아예 좀 더 떳떳하게 드러냈을 일이다.

게다가 그는 공지영씨의 소설을 “대책 없는 선량한 태도”라고 평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대책 없는’ 그녀의 소설과 영화에 열광하는 독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도 잃지 않는다. 그는 특히 <우행시>에서 나타나는 “사랑에의 몰입은 ‘연민’의 극대화에서 발생하는 갑작스런 선택”이라고 말하며 그것이야 말로 “대중적 환호를 이끌어내는 주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저쪽 한 켠에서는 “연민이 아닌 인간의 존엄으로 대상인물을 상승시키려는 의지가 부족한 채, 오히려 대상을 타자화 함으로써 소설가의 부채의식이 휘발되는”것이라고 말한다. ‘연민’은 대중적 감상이고 대중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며, 반대로 자신들은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소설가들 혹은 비평가들이 된다. 또한 대중들은 판타지와 개인에 대한 공감에 매몰되고 이것들에 환호하는 반면, 자신들은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의 척결을 외치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것들이 ‘배워먹은’ 비평가들이 쉬이 갖는, ‘뭘 모르는’ 대중에 대한 ‘경멸의식’ 그 자체가 아니면 또 무엇일까.


정문순, <통속과 자기연민, 미성숙한 자아>

기자는 정문순씨의 비평을 ‘비판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단 기획의 취지에는 잘 부합하는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비평의 요지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공지영의 소설은 현재적이지 않고 과거에 들러붙어 있으며, 상처받은 영혼들의 과잉 자의식을 드러내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이 강하며, ‘순진’하고 미숙한 어린 자아의 넋두리” 정도로 할 수 있겠다. 한 작가의 소설 세계, 더 나아가 90년대 여성 작가들에 대한 신랄하고 적나라한 (내가 보기엔 정말 대책없고 처절한)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나는 그의 비평의 일부 구절에 공감한다. 예컨대 “약자에 대한 배려와 자기 성찰이 빈약한 한국사회”라든지.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글은 격한 분노와 짜증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에 대한 격한 반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이러한 그의 비평이 걷잡을 수 없이 짜증난다. 특히 “그녀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극심한 피로에 지친 내면을 위로받고 싶을 뿐 세상과의 정면 승부를 감당할 수 없는 독자들과 출판시장의 요구에 부응”한다고 결말을 내리는 부분에서는 화까지 치밀었다. (어쩜 이렇게 ‘멋지게 잘’나셨을까.) 나는 하나하나 그의 구절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에너지가 없다. 솔직히 거의 대부분의 표현들을 정리한 다음에 코멘트를 달고 싶지만, 그냥 대표적으로 하나만 언급해 보겠다.

“과거에 들러붙어 벗어나지를 않는다.”라는 그의 말부터 시작해 보자. 일단 나는 소설들이 왜 과거에 들러붙어 있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과거에 들러붙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공지영씨의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가 말하듯 “불의의 시대에 이상과 정의로움의 염원으로 피끓는 청춘을 세상에 바쳤으나 보상받지 못한 삶,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광부와 간호사들, …… 여성 가사 노동자들 등 경제 성장기의 이면을 떠받친 삶들, ……사형수들,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에 멍이 든 여성들”의 삶들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가 말하듯 “엄정한 시선”을 견지한 채로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엄정한’ 시선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그 ‘엄정한’ 시선은 매우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통찰인 듯하다. 그는 반복적으로 “고집스런 어린아이의 투정”, “푸념하는 듯한 미성년의 목소리”, “쉽게 토라지다가 이내 화해하기 일쑤”, “조숙한 여자아이의 수준의 인식”, “미성숙한 자아” 라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미 ‘성숙/미성숙’의 이분법의 은유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목소리들 자체를 ‘부정’한다. 그것들은 “신파조”이고, “감상의 과잉 분출”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자의식의 과잉”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관찰가능 한 것들에서 출발하는, 경험적이고 또 성찰적인 모습을 지극히 무식하고 단순한 구도로 폄하하고 있다. 그의 논조는 “눈물 따위는 가치가 없다, 다만 강한 세대 인식, 그리고 실천 의지만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다!”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그의 글은 차라리 처절하고, 피 냄새까지 날 정도이다.

그는 ‘위안’과 ‘공감’의 힘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하다. 그가 보기에 그것들은 전부 ‘어린 아이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모든 눈물과 연민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 전부를 어린아이의 ‘순진함’이라고 폄하하는 그의 시선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위안’, ‘공감’은 실제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들을 양분으로 삼고 살았으며, 한편으로 그것은 지극히 ‘제대로’된 방식으로 우리 삶에 편입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가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보살핌’의 윤리라든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등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지극히 부족한 것들이 아니던가. 또한 그것들이야 말로 오히려 타자에 대한 윤리의 한 형태가 아니던가. 그가 경멸하는 ‘위안’과 ‘공감’은 흔히 발견되는 ‘타자에 대한 무시’와는 분명히 다른 태도다. 여기서의 이 ‘무시’는 대체로 타자에 대한 ‘경멸’을 내포한다. 타자에 대한 거리를 선명하게 견지하는 것과는 반대로, 위안과 공감은 타자에 대해 (어느 정도) 열려있는 자아만이 가능하다. 나는 이 ‘경멸’과 ‘무시’, 그리고 ‘위안’과 ‘공감’을 선택하라고 하면 차라리 후자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또한 나는 오히려 그가 그토록 경멸하고 있는 여성작가들이야 말로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라운 ‘성찰’과 ‘치밀함’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단순한 ‘신파’로 경멸당하기에는 그러한 인식의 깊이를 갖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경험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은 그가 말하듯 “미성숙”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성숙한 자아’야 말로 과거에 직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언어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냉철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현실과 과거에 거리를 두는 것은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감정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과거를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남-독자’들에게 공감을 살 정도의 글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최근의 '봉사'라는 것에 대한 나의 감정에서 비롯한 것인데, 나는 물론 그 공감이나 연민, 그리고 위안이라는 것들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나는 타자에 대한 윤리는 그것들로 붙박음질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문순씨의 ‘투명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투박한’ 주장에 의해 재단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것들이 과연 ‘미성숙’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판단을 보류해야 하며, 더 나아가 이 성숙/미성숙의 은유 자체에 대한 질문이 던져져야 할 것이다. 덧붙여 내가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드세지 말고 세상과 맞장뜨지 말아야 하고 고분고분하며 세상과의 불화를 감당하기보다 쉽게 물러서고 자기연민에 탐닉”한다고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여성 작가와 대중적인 것에 혐오를 감추지 않는 비평가는 또 오랜만이다. 오히려 솔직한 것이 고마울 정도로.
 
나는 오히려 거대서사에 매몰된 정문순씨 같은 사람보다 일상의 정치적 투쟁과 좌절 등을 그린 공지영씨의 소설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여성 작가들에 대한 혐오와 ‘공감’, ‘연민’ 등에 대한 경멸은, 강력한 ‘근대적 남성 주체’의 것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주체와 자아들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은 이미 ‘성숙’한 것처럼 묘사하는 점에서는, 그가 그토록 비난하는 ‘나르시시즘’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르시시즘 자체가 비난 받아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특수한 한국적 문화현상.)


나가며

나는 공지영씨에 대한 문학 비평계의 평론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하다. 물론 엄청나게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리고 문학 비평계의 남성 중심성에 대해서는 듣어오기는 했지만, 문학 평론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없이 정말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예전에 들은 바로는, 남성 작가들의 소설 비평을 여성 작가가 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특히 그것이 ‘비판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고 한다. 반면 남성 작가나 비평가가 여성 작가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은 쉬운 것이며 일상적이라 한다. 이렇게 생물학적 남성들이 바글대는 문단에서 생물학적 여성 작가와 비평가가 설 영토는 넓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오히려 공지영씨의 ‘성공’을 ‘축하’하고 싶고 환영한다. 또한 그녀의 소설을 꽤나 갖고 있고,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재미있게, 또 한편으로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정말 ‘옹호’하고 싶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이런 ‘경멸’과 ‘혐오’로 가득한 ‘반 대중적’ 태도에 대해서는 언젠가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비평가들의 태도에 대한 ‘반발감’ 때문에 글을 다다닥 두드린 것이니 말이다.

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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