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벤야민'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10/25 오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2. 2010/09/05
  3. 2010/08/23 기억 (2)
  4. 2010/08/20 글을 잘 쓴다는 것(벤야민) (2)
  5. 2010/06/28 자꾸 묻지 말란 말이야
독서노트 / 2010/10/25 21:07
나는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작품(oeuvre), 책, 문장, 관념에 생명을 불어 넣는 비평에 대해 꿈꾸지 않을 수 없다. ... 이러한 비평은 판단이 아니라 삶의 징후를 증가시킬 것이다.  _미셸 푸코

그런 나쁜 습관에도 불구하고 지도 교수가 훌륭한 보호자로 보이기 떄문에 여러분이 꼭 그와 함께 논문을 작성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일관성 있게 정직하지 않도록 하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복사라는 알리바이에 빠지지 말 것! [...] 종종 복사는 하나의 알리바이로 이용되기도 한다. 수백 페이지의 복사물을 집에 가져 와서는, 그 복사된 책에 대한 간단한 수작업만으로도 그 책을 소유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복사물의 소유는 책 읽기를 방해한다. [...] 그것은 일종의 수집 현기증이며, 정보의 신자본주의다. 복사물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일단 복사를 하자마자 읽고 곧바로 기록하라. 정말로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전의 복사물을 소유하기(말하자면 읽고 기록하기) 이전에는 새로운 것을 복사하지 말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누군가 여러분이 쓴 것을 이해하는지 확인하라. 외로운 천재 놀이를 하지 마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_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신을 드러내는 것, 죽을 수 있는 것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으로 번뜩이는 사람들이 살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비평가라고 부른다. 비평가란 무엇인가? 죽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했던 사람이다. 서양과 북아메리카의 큰 수도에는 죽어서 부활할 수 있는 사람들과 부활하지 못하면서 죽이기만 하는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적 삶이라 부른다. 나는 문화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삶이라는 단어는 이보다 더 부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_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옛 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극소수이긴 하나 사랑에서 영원한 여행을 찾는 이들도 있다. 이 후자의 부류는 어머니 대지와의 접촉을 꺼려야 하는 멜랑콜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향의 우울함으로부터 그들을 멀리 벗어나게 해줄 사람을 그들은 찾는다. 그런 사람에게 그들은 충성한다. 인간의 체질을 논한 중세의 책들은 이러한 인간형이 품고 있는 먼 여행에 대한 동경을 알고 있었다. _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카르투지오 패랭이꽃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외롭게 보인다. _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2) 2010/12/28
젠장  (0) 2010/10/26
오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0) 2010/10/25
자아에 대한 설명  (0) 2010/10/24
아 재밌겠다  (0) 2010/10/20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9/05 23:47
달에서 흘러 내리는 빛은 한낮의 우리 삶이 벌어지는 무대를 비추는 것이 아니다. 달빛이 의심스럽게 빛을 던지는 구역은 지구가 아니라 지구의 반대편, 혹은 지구의 부속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곳은 더 이상 달이라는 위성을 가진 지구가 아니다. 스스로 달의 위성으로 변한 지구이다. 그 땅의 넓은 가슴은ㅡ그 가슴이 호흡할 시간이었는데ㅡ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삼라만상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대낮에 빼앗긴 긴 베일을 다시 착용할 수 있게 된다. 나무 블라인드 틈새로 내게 밀려온 창백한 빛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불안 때문에 나는 잠을 설쳤다. 들락날락하면서 달은 내 잠을 토막 내버렸기 때문이다. 달이 방 한가운데 들어와 있을 때 잠에서 깨면, 나는 그 방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방은 달 이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벤야민, <달>, <<베를린의 유년시절>> 중.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풍부하게(다른 의미를, 다른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낳는다는 의미에서) '달빛'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걸까. 번역자의 번역에 조금 더 유려했다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한다. 조금 이질적인 느낌의 글이 주는 이국성도 매력일 수 있으니까. 오늘도 그의 글쓰기에 대한 질투는 거세질 뿐이다. 벤야민이 유년시절을 보냈을 저 방도 몹시 탐난다.

습하거나 건조한 달빛, 유혹하거나 관조하거나 물리치는 달빛. 그 어느 것조차도, 언제 어느때라도 모두 매력적이다. 서울은 광해(光害)가 심하기 때문에, 달빛이 강렬할 때 조차도 빛을 느끼기가 너무 어렵다. 그러나 가끔은, 오래된 캐러멜 같은 가로등 빛을 뚫고 달빛이 몸에 내려 앉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왜 늑대인간(werewolf)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달빛을 뜻하는 '문샤인(moonshine)'은 '밀수입한 술' 혹은 '밀조한 술'이라는 의미도 있다. 엄격한 금주령에 굴하지 않고 밤에 술을 몰래 빚어 달 밝은 밤에 들이켰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잔하면서도 또 즐겁다. 빛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 혹은 빛이 세상을 지배해야만 하는 시대 이전에는 밤이 얼마나 길고 달빛이 밝았을까. 

달빛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주 어릴 적이었는데.. 나는 뒷산에 동네 또래들이랑 쥐불놀이를 하러 올라갔었다. 그날은 정월대보름이었다. 마침 뒷산엔 교회를 짓고 있었고 우리는 쥐불놀이를 하다 말고 춥다는 이유로 폐자재로 불을 때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담력테스트를 하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뒷산 공동묘지로 올라갔다. 그날은 달빛이 너무나 환해서 불을 켜고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한 명이 없어졌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묘지에 올라가서 이리 저리 살피는데- 없어졌던 한 명이 갑자기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혼비백산. 정작 우리가 모두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그 한 명도 덩달아 혼비백산. 그렇게 숨 차오르게 뛰어 산을 내려왔을 때 내 눈 앞에 그 환한 달이 들어왔다. 크고 둥글었다. 세상은 온통 은은하고 차가운 은빛이었다. 그러나 왠지 따뜻한 느낌이었다.

달빛을 한껏 쬐고 싶은 밤이다. 왜 일광욕이라는 말밖에 없는 것이냐. 내일은 월요일이렷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재밌겠다  (0) 2010/10/20
윤리, 단독성, 소설, 나  (4) 2010/10/13
  (0) 2010/09/05
글을 잘 쓴다는 것(벤야민)  (2) 2010/08/20
읽고 싶은 책 : <변증법적 이성 비판>  (0) 2010/07/12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8/23 22:28
1.

벤야민은 기억이라는 단어의 어원에는 매개물(medium)이라는 뜻이 있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해, 벤야민의 '기억'은 과거에 체험했던 것을 '발굴'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이다. 그렇다면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많은 부분에 '기억'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을 한 때 하나로 묶어주었던 과거의 체험을, 기억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재의 장에 소환하는 것. 그리하여 각자의 일상에 충실하느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관계를 재건하고, 체험의 공백에 다리를 놓으려는 것. 같이 체험을 했다는 것은, 어떤 시간과 공간을 '의미있게' 보냈다는 것, 그리하여 각자의 몸에 서로를 새겨 넣는다는 것, 다시 말해 경험을 체현했다는 것.

그런데 그렇다고 기억이 체험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사고하는데 익숙하지만, 오로지 형식만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보증할 수 있을 때가 많다. 형식이자 내용으로서의 형식,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로서의 어떤 <무엇>이 있다(그 <무엇>을 우리는 어떤 책의 제목을 따라 <영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야민을 따라 기억이 매개라고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그 기억이 체험과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억이라는 행위(형식)은 곧 체험(내용)이다. 기억하는 방식, 기억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체험 조차도 결정짓는다. 몸에 체현한 경험들은 기억에 의해 다시 배치되기 마련이고 우리의 <무엇(영혼)>도 변한다. 그러므로 오랜 관계도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얼마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2.

여기서 '기억'이라는 의미를 지닌 영단어(remember)를 조금 더 뜯어보면 어떨까? 의미상으로 remember는 re/member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member는 무슨 뜻인가? '어느 집단의 일원'이라는 뜻 아닌가?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것은 벤야민의 '기억'의 의미에 덧대어보면 집단의 성원권을 '재re'확인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일원이 아닌 사람들이, 다시(re) 어느 모임의 일원(member)이 된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기억하는 행위의 일상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member에는 '신체의 사지'라는 뜻도 있다. 그리하여 dis/member는 '팔다리를 절단하다'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re/member는 이렇게 절단된 사지를 다시 접합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폭력에 의해 절단되었던 사지를 비로소 잇는다는 것.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감히 기억하는 자만이 고통 끝에 잘려나간 신체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억하는 행위의 정치적인 측면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기획했던 것들은 무너지고  (4) 2011/02/07
문화적 기호와 취향  (0) 2010/11/07
기억  (2) 2010/08/23
락 페스티벌에 가지 않는 이유  (0) 2010/08/03
기억은 차라리 망각의 한 형식  (0) 2010/08/02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8/20 10:00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ㅡ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ㅡ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글을 잘 쓴다는 것」,『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p. 26


이 짧은 글에도 분석할 만한 여러가지 전제가 들어 있지만, 그 전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 없이 글 모두에 동의할만 하다. 글을 쓸 때 두고두고 참고할만한 구절이어서 마침내 옮겨 둬 본다. 그런데 자기가 글 쓰는 스타일을 <잘 쓴다는 것>으로 규 정짓는 것 같아 피식피식 ㅋ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6/28 22:18
그가 골수 수집가가 되는 것은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아마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어떻게 수집가의 특성이 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건 나에게 금시초문인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된다. 이 방면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것이 옛날부터 있어온 해묵은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다시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인용해보자. 어느날 그는 그의 서재를 보고 감탄하고는 으레 의무적으로 하는 물음, 즉 "당신은 이 책을 모두 읽었습니까?"라는 어느 속물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십분의 일도 읽지 못했습니다. 혹시 당신은 매일같이 본 차이나로 식사를 합니까?"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반성완 譯 에서


첫 번째 두려움은 독서의 의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머지않아 사라질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런게 사실이다. 특히 일정 수의 모범적 텍스트들이 그런 신성시의 대상ㅡ물론 그런 텍스트들의 리스트는 분야에 따라 다르다ㅡ이 되는데, 그런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금기이며 이를 어기면 눈총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두려움은 정독해야 할 의무로 불릴 수 있는데, 이는 첫 번째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읽지 않는 것도 눈총을 받지만, 후딱 읽어치우거나 대충 읽어버리는 것, 특히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로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어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ㅡ강의자들 대부분이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ㅡ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담론과 관계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한데 내가 경험해본 바로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 상대 역시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점차 보게 되겠지만,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기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하거나 평문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책읽기에 어떤 위험들이 들러붙는지를 부단히 강조해나갈 것이다. [...]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벤야민의 저 부분은 좀 웃겨서 퍼왔다. 원문엔 세브르 도자기라고 되어 있는데..
피에르 바야르의 책은 심심할 때면 펴보게 된다. 무엇보다 재밌다. 다른 책도 몇 권 번역되었는데 다른 것들은 별로고. 바야르의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지금 인용한 부분에도 등장하는 "눈총"이라는 말이 이 책의 핵심 단어인 것 같다. 그의 전공인 정신분석학에서도 그렇고.

버는 돈은 그다지 없는데 식비보다 책 구입비가 더 많이 나갈 수 있는 지금이, 그래도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서울 생활 시작하면 지금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할테니까. 밥도 대체로 사먹어야 될테고- 교통비도 많이 나올테고- 무엇보다 술값이 많이 들겠지. 그렇게 되면 통장 잔고를 끝없이 생각하며 필요한 책과 사고 싶은 책, 훔치고 싶은 책 따위를 끝없이 비교하며 갈등하게 되겠지.

그렇지만 책도 많이 사버릇해야 감식안이 생긴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땐 그래서 언제나 삐끗하기 마련이다. 최근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를 넘어 한국 동시대 소설을 섭렵(수집)하겠다는 의지로 소설책을 막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요샌 소설책도 양장본이 많고 비싸단 말이야.) 읽다가 재미없어서 내던져버린 책, 읽고 나니 너무 못써서 슬퍼진 책... 어떤 평론가는 나쁜 작품은 같은 이유로 나쁘고 좋은 작품은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좋다고 했는데, 나쁜 책에도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나쁜 경우도 있다. 이런 책이 열다섯권이 쌓일 때 쯤, 나는 비로소 쉽게는 출판사의 마케팅 스킴에 낚이지 않을 눈을 갖게 된 거 같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저자의 이력은 어떤지, 번역자의 이력은 또 어떤지, 출판사는 어딘지, 참고문헌은 무엇이 있는지 ,특히 유명한 저자들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책의 어느 부분에서 인용해 왔는지, 인용할 때의 태도는 어떤지, 서문의 분위기는 어떤지(저자의 철학적 입장이 나타난다), 으레 쓰는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따위로 내게 좋은 책인지 아닌지를 좀 더 쉽게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게 교양이라면 교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편협과 습관이라면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래도 아직 멀었지.

헌데 교양이란 말은 너무 넓은 말이고, 사실 내가 딱히 '교양' 있는 집에서 태어나 자란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교양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주눅들기 일쑤다. 근데 문제는 교양인이 되는 것도 좋고 교양을 쌓는 것도 좋지만, 쌓으려면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양 속물은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지. 통속적이고 진부한 지식을 단정적으로 젠체하면서 말하는 건 정말 티 난다구. 계속 그러면 진짜 솜털까지 서버린다고, 내가 다 부끄러워서. 이를테면 이런 것. 인류학을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제국의 학문이지, 미국에서나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것. 사회학이나 통계를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엘리트를 위한 학문이지. 뭐 이런 것들? ㅋ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소이연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2.0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