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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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12/28 12:06

마지막 남은 기말 요약과제. 계속 수정중인 글이긴 한데... 이렇게라도 올려버려야 끝날 것 같아서.
사실 이 장의 요지는 세속적인 문장 딱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난 떨지 말고 겸손해지라. =_=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Chapter 2. 'Against Ethical Violence'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버틀러는 그가 이전부터 계속 보여 왔던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버틀러는 모든 근대적 인식론의 폭력성, 즉 제대로만 한다면 모든 사물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한다. 근대적 인식론은 타자를 지식으로 다루지만 버틀러에게 오면 타자는 포획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타자는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들 삶의 근저를 뒤흔들고, 또한 시공간적으로도 여기에 이미 항상 도래해 있는 존재다. 2장의 초입에서 읽을 수 있는 버틀러의 단어는 불투명성, 비일관성, 자기동일성의 폐기, 무한히 열린 질문, 앎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이해, 필연적인 인정의 실패, 의무, 윤리적인 실패, 윤리적인 기획 등이다. 이제는 묵은 먼지 날리는 서고에서나 볼 수 있는 기투, 헌신, 책임, 앙가주망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버틀러의 글은, 어쩌면 버틀러야말로 이 시대에 유일한 실존주의의 상속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도 한다.

  버틀러는 2장에서 포스트-헤겔적인 인정(recognition)을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 가져가려고 한다. 이를 위해 버틀러는 우선 ‘투명한’ 인정을 일종의 윤리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투명한 인정의 장면은 우리들은 물론 우리와 인정을 주고받는 타자들의 일관성과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타자는 인정을 수여하는 우리들의 일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삭제될 뿐이다. 그 대신 버틀러는 인정 장면의 근본적인 불투명성에서부터 윤리적인 가능성을 읽어낸다. 1장에서 버틀러가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나와 너를 초과하는 어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의 영역이 인정의 장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들 주체의 능력은 이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에 의해 불투명해지고 제한되고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기획은 너와 나는 물론, 인정의 장면 자체도 근본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정초되어야 한다. 우리가 입주해 있지만 우리를 초과하는 영역의 불투명성 때문에 우리들은 지식과 앎의 과정에서 영원히 투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조건 덕에, 인정의 장면에서 타자에게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고, 또 질문에서 최종적인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방향을 상실하고 자기 동일성을 “실패”하는 조건에서만 지속적으로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너는 누구인가?”라는 인정의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정은 한 번 성취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상태로 영원히 개정되는 과정이자 운동이다. 그리고 이렇듯 끝끝내 완결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인정의 장면은, 불가지론적인 회의주의가 아니라 ‘너’와 ‘나’가 인정의 장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해준다. 그래서 버틀러에게 이러한 불투명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차라리 일종의 윤리적인 의무이다. 사회적 인정을 윤리적인 기획으로 구성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칙적인 불만족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의 한계(Limits of Judgment)

  그런데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는 때로 ‘판단’을 수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든 윤리적인 기획 속에서든 무엇인가를 긴급하게 선택하고 판단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인정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수도 없고, 행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앞서 살펴본 바, 인정의 장면에서 나타나는 영원한 불만족이야말로 일종의 윤리적인 기획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판단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판단은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는 자를 각각의 영역에 격리해버리고 인정의 과정을 종결해 버리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윤리적인 기획에서 판단의 중요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면 어떤 유형의 판단이 작동해야 할까? 다시 말해, 판단은 윤리화 될 수 있을까? 만약 판단이 윤리화 될 수 있다면 윤리적인 기획과 판단은 어떤 방식의 말 걸기 형식에서, 또 어떤 관계 속에서 작동해야 할까? ‘판단의 한계’라는 장에서 버틀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과 예화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장에서 버틀러는 인정, 관계, 윤리, 말 걸기 장면의 복잡한 함수를 펼쳐 놓기 시작한다. 

  버틀러는 비난(condemnation), 탄핵(denunciation) 같은 특정한 유형의 말 걸기 장면을 종합하는 단어로서, ‘판단’이라는 특정 행위를 우선 심문에 올리고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필연적으로 윤리적이지도 않고, 사회적 인정을 작동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판단은 사회적인 인정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있어서,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과 판단 받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도덕적인 거리(distance)를 설정하고 둘 사이의 공통 지반을 부인하는 말 걸기 형식이다. 판단은 이로써 판단하는 사람의 불투명성을 추방하고, 또한 판단 받는 사람의 비판적이며 윤리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다시 말해,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사회적 인정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단호하게 인정이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인정은 언제든지 판단을 중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정에 기초하지 않은 판단은 곧 윤리적인 실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판단은 언제나 판단하는 우리와 판단 받는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고려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정이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영원히 개정되어야 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인정에 기초한 윤리적 판단 역시도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장에서 흥미롭게도 버틀러는 카프카의 우화 <심판>을 들고 와서 분석하고 있다. 게오르그빠져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몸을 던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게오르그 아버지의 선언에 내몰릴 뿐 아니라 스스로도 기꺼이 몸을 내던진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게오르그는 투신을 요구한 아버지의 말에 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버지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여 투신한다. 이렇듯 능동과 수동이 묘하게 얽힌 게오르그의 도착적인 투신 장면에서, 우리는 판단이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애착 관계와 인정의 함수를 읽을 수 있다. 

  <심판>의 서사에서 이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서로에게 관계로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와 게오르그는 모두 상호간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판단의 ‘거리’를 두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행위하고 있다. 이는 도착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스스로에게 내리는 ‘도덕’적이지만 파괴적인 판단이다. 버틀러가 말하듯 이러한 모럴리스트들은 살인자로 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상호간의 인정은 언제나 상호 주체들의 자율성, 자기반성, 자기성찰, 비판적 능력을 지킬 수 있는 윤리적 관계의 장을 열어두고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말 걸기 장면은 이러한 인정과 관계맺음의 과정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말 걸기 장면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말 걸기 장면을 윤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을 원용한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버틀러는 이 장에서 정신분석학의 ‘전이(transference)’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전이의 윤리적인 가능성에 대해 모색한다. 또한 버틀러는 전이 개념을 기반으로 말 걸기 장면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정이 작동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전유하고 있는 전이 개념은 그 자체로 타자와의 관계성이다. 이 논의의 과정에서 버틀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정신분석학에서 전이가 주체형성을 조건 짓는 ‘일차적 관계성(primary relationality)’의 출현을 추적할 수 있는 통로가 되듯이, 말 걸기 장면을 정초하고 기초하는 근본적인 관계성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말 걸기 장면에서 메시지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말 걸기 장면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며, 말 걸기 장면의 전제조건과 실행의 양상 자체를 바꾸어낼 수 있는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는 불투명한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며,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말 걸기 장면은 우리들의 관계에 일차적으로 기초해 있으며, 우리는 말 걸기의 장면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장면 자체에도 개입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바꾸어 나간다는 점이다. 

  우선 말 걸기 장면의 관계성은 우리가 말하고 서사화하는 것들은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한(예컨대 ‘이성’의 광기), 결코 일관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관적으로 구성되고 파편화된 기억과 경험을 연결하고 지배하는 소유격 ‘나의(my)’ 서사는 일종의 심리적 위안이자 환상, 혹은 편집증적 고립일 뿐이다. 이럴 때 ‘나’는 ‘나의’ 서사를 독백하고 강요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인정의 법칙에 따라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말을 전달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다. 또한 말 걸기 장면에서 ‘나’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짜기에 필요한 구조와 규범은 1장에서 살펴보았듯 타자에게 속해있고 너와 나를 초과해 있으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범의 영토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말 걸기 장면에서 서사와 설명은 아무리 비판적으로 개정되고 재구성되더라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 즉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말 걸기의 장면은 전이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나에게 속할 수 없는 무의식을 실연하고 또 무의식이 현재에서 다시 살게 하는 말 걸기의 구조이다. ‘나’는 전이 장면에서 타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말 걸기 장면의 구조 속에서 ‘나’와 ‘나의’ 서사는 타자에게 탈취당하고 압도당하고 휘말려 든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나를 탈취하고 압도하는 “‘너’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의 전이와 역-전이의 특징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전이는 그 자체로 주체와 타자의 근본적인 관계를 현재의 맥락에서 편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주체의 발생적 조건인 ‘일차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또한 자아들이 출현하는 다양한 말 걸기의 장면을 접합한다. 그리고 전이와 역-전이는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작동하지만, 언제나 ‘나’가 타자에게 근본적으로 연루된 상태에서, 결코 일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한다.

  따라서 전이 장면에서 “‘너’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되고 있는가?”라는, 최후의 답변이 있을 수 없는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 ‘너’에 대해 물으면서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것, 이는 곧 ‘너’와 ‘나’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며, 따라서 ‘너’와 ‘나’가 속한 말 걸기 장면에 대한 심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너’와 ‘나’에 대해 동시에 묻는 이 짝패 질문은 말 걸기 장면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전이와 역-전이 장면에서 ‘너’와 ‘나’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관계가 아닐 것이다. 이제 ‘너’와 ‘나’는 전이와 역-전이를 통해 불가피하게 연결된 채 서로에 대한 영향력 속에서 새로운 관계로 돌입할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말 걸기 장면에서는 무시간적이며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서사, 즉 말하는 주체 ‘나’의 투명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에 대해 닫혀 있는 지배적인 ‘나’의 서사는 거부될 수밖에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서사의 불투명성을 긍정하고 일관된 서사화 전략에 저항할 것이다. 반복하지만, 여기서 서사가 비일관적이라는 것은 모호함과 모순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뜻할 뿐이다. 일관성이 없다고, 투명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해서 ‘너’와 ‘나’가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해 설명하고 서사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서사화는 윤리적 기획의 전부도 아니고,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버틀러에게는 완전히 서사화할 수 없는 근본적인 관계성의 장이 분명히 존재하는 탓이다. 버틀러에게 ‘나’는 ‘너’에게 말을 걸면서 ‘너’와 연결되고, ‘나’와 ‘너’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나’와 ‘너’가 연결되는 방식(말 걸기 장면)에 개입한다. 전이가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 공간이 바로 이 개입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말 걸기 장면은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관계와 상호 인정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나’가 타자들과의 관계에 불가피하게 연루된 채로도 생존할 수 있으며, 반대로 타자들도 말 걸기 장면에서 생존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를 인정하는 것은 환상의 죽음이자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의 상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불가피한 윤리적인 의무이다. 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슬픔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를 배려하지 않는 말 걸기는 쉽게 폭력에 경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The “I” and the “You”)

  그러나 버틀러는 ‘상호인정’이라는 균형적이고 양비적인 ‘착한’ 관점으로는 긴급한 윤리적 기획에 필수적인 어떠한 불가피성이나 절박성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성의 장에 연루되고, 또 연루될 수밖에 없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이 장에서 “나(the “I”)”와 “너(the “You”)”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등장하는 주체의 포지션,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어떤 ‘장소(locus)’이자 구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시도한다. 또한 버틀러는 “나”의 불투명성, 불가능성, 부분성, 유한성을 어떤 사회성과 관계의 장에 연결하고, 또한 이를 “너”라는 타자와의 이자적 관계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장에서 타자(“너”)는 말 걸기 장면과 “나”에게 근본적인 층위에서 도입된다. 이렇게 버틀러는 “너”를 관계와 윤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버틀러가 보기에 서사적인 목소리 “나”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 언제나 “나”가 묘사하는 자아도 상연(enact)한다. “나”는 반복적으로 재등록된다. 그러나 “나”라는 서사적 목소리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지금 말하고 있는 “나”가 어떻게 구성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서사적인 “나”는 서사 자체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모든 순간에 재구성 될 뿐이다. 이는 서사화 될 수 없는 수행적이고 비서사적인 행위이다. 요컨대, “나”가 어떻게 이 말 걸기 장면에 출연하고 소환되고 있는지, “나”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나”를 설명하고 “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설명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 최선을 다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망친다. 이는 설명 자체의 ‘내용’보다는 설명이 발생하고 있는 말 걸기 장면의 수사적 차원, 즉 ‘형식’적 차원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실천이 신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국 서사는 일차적인 관계성을 추적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최선의 경로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메시지를 수신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말 걸기 장면에서 이 누군가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누군가는 말 걸기 장면에서 나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는 어떤 상황,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수신자의 장소(locus)나 구조(‘너’)라는 어떤 환영적인 관계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것이 설령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수신 구조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조금 달리 풀어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단수의 타자-수신자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언제나 변화하는 복수의 타자, 또한 복수의 말 걸기의 장면이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말 걸기의 장면에서 천의 얼굴을 한 채 언제나 서로 다르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달받고 있는 타자들의 얼굴 앞에서, 다시 말해 이 복수의 타자들의 목소리, 얼굴, 침묵 속의 현존 앞에서, 타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는 일관적이고 단단한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이 얼굴들을 나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폭력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의 이야기는 풀리게 된다.

  여기서 버틀러는 라플랑슈를 인용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타자라는 ‘얼굴’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라플랑슈는 타자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어떤 단일하고 절대적인 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다양한 타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라플랑슈는 이러한 타자들이 유년 아이에게 남기는 압도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과 자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이들은 성인들이 던지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에 압도당한 채 반응한다. 메시지가 전달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타자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라는 정신분석학의 고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은 타자의 인지/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또한 타자에 반응한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질문이자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아이의 세계를 초과해서 성인의 세계에도 깊숙이 내삽(內揷)해 있다. 라플랑슈의 이론은 주체형성의 조건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라플랑슈의 이론에 따르면 ‘나’의 욕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조차도, 타자의 욕망이라는 ‘나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욕망에 기초해서, 또 이러한 이질적인 욕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주체들의 조건인 일차적 억압에 정초한 ‘일차적 관계성’의 탄생을 설명해준다. 이는 주체 형성을 조건 짓고 또한 말 걸기 구조를 조건 짓는 근본적인 관계성이다. 또한 이는 ‘나’가 벗어날 수 없는 ‘사회성’이라는 조건의 일부이다. 그리고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관계성의 차원은 앞서 살펴보았듯 완전한 서술이 불가능하며, 단지 메타-인지적으로 재구성되어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조건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서술 불가능한 ‘나’의 조건을 대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철학적 사변이나 픽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버틀러가 강조하고 경고하는 점은, ‘나’와 ‘타자들’이 상호적으로 평등하게 무엇인가를 등가교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만큼, 버틀러에게 ‘나’는 타자에 의해 ‘탈중심화’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나’가 위치한 조건을 구성하는 어떤 “수동성”의 이름, 혹은 “수동성에 선행하는 수동성”을 의미한다. 즉 ‘나’는 라플랑슈가 말하던 압도적인 일차적인 인상/자국(impression) 같이 ‘나’의 이전에 존재하던,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의해 탈취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소 불균형하게 느껴지는 관계성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점은, ‘나’가 비록 어떤 수동성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가 존재할 수 없다거나 ‘나’의 기획이 완전히 무용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나’가 최선을 다해 설명할 때조차도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이 개입하여 ‘나’의 설명을 부분적이고 불투명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주체는 존재할 수 있고 또 행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윤리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재구성의 토대는 ‘나’라는 주체를 형성해온 조건들은 궁극적으로 ‘나’가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나”라는 기획에서 탈구되어 ‘너’에게 연결되어야 한다. 결국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너와 나의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나’가 ‘너’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삶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나’의 욕망과 충동을 기원적으로 구성하는 대상이다. ‘나’는 ‘나’의 타동사적인 수동성을 인정하는 토대와 근본적인 관계성 위에서, 그리고 오직 ‘너’에게 말을 거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어떤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는 ‘당신’에 대한 ‘나’의 양도이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윤리적인 겸손함, 반성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반드시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이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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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10/24 19:19

며칠 간 피똥싸면서 한 요약과제 =_= 사실 매일 붙잡고 있진 않았고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만... 원문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하기 부담스러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제출 전날 피토하며 겨우 끝 마치게 되었다. 요약의 질이 높다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일단 텍스트를 내가 풀어서 한 번 써봄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해 안되는 소리는 거의 다 뺐으니... 흑. 어서 번역본이나 나와라.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by Judith Butler
1장 ‘An Account of Oneself’의 요약


  행동하는 것에 대한 탐구, 즉 도덕 철학은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는가? 오늘날 도덕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도덕적인 탐구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아도르노는 “도덕적 탐구는 언제나 공동체의 삶에서 도덕의 행동 규범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의문에 부쳐질 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집단에토스는 언제나 보수적이며, 여러 난관과 불연속적인 것들을 억압하는 허위의 통일성을 강제한다. 그렇기에 집단에토스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을 때에만(이때 집단에토스는 인용부호 “”를 달고 등장한다) 그래서 이 보수적인 에토스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 때에만, 도덕적인 질문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부호를 단 “집단에토스”는 이제 자신의 집단성 혹은 공통성이라는 가상(假想)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도구화한다. 또한 “집단에토스”는 일단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하면 폭력이 되어버린다. 폭력으로서 “집단에토스”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현재에 강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빛을 가리운다. 여기서 도덕성은 폭력적인 “에토스”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출현한다.

  아도르노는 폭력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이 출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정식화도 제공한다. 즉, 폭력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에 대한 요청에 대한 맥락에서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이란 것이 개인을 포함하지 못하기에 “보편”에 대한 요청이 곧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게 되는 경우, “보편”은 곧 폭력이자 개인과 상관없이 단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현존하는 사회 조건을 무시하는 “에토스”는 폭력이 된다. 이런 “에토스”가 특수성에 반응하지 못하고,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개인들에게 전유될 수 없을 때, “에토스”는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개정하기 위한 경합의 장소가 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보편적인 것(예컨대 사회적 조건, 도덕규범 등)과 특수한 것(예컨대 ‘나’) 사이의 어긋남과 불일치는 언제나 도덕적 질문을 위한 장소이다. 아도르노에게 도덕성은 어디까지나 경합에 열려 있는 일련의 보편 규칙을 개인들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렇게 개인의 자리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시켜 초연한 존재로 다루는 실수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점을 잊지 않는다. 물론 ‘나’ 없이는 도덕성이 존재할 수 없지만, ‘나’는 자신을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도덕규범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 혹은 도덕규범은, ‘나’를 인과적으로 생산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나’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는 ‘나’를 초과하고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에 이미 항상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가 도덕규범에 순응해야한다거나, 도덕규범과 궁극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나’를 이해함에 있어 그러한 도덕규범 혹은 “에토스”의 발생적 근원과 사회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에토스”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사회이론은 언제나 ‘나’가 생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할 때, ‘나’는 언제나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히 인식론적 질문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체가 규범들을 전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주체의 존재론적 장을 제공할 수 있는 규범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과연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주체가 될 수 없는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규범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까? 사회적 존재론의 영역에서 주체가 스스로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과정에 규범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을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Scenes of Address)

  여기서는 주체가 도덕성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주체의 생산에 있어 도덕성이 갖는 힘에 대해서 고려해볼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반추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상처 받고 고통 받을 때에만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나 고통 겪는 사람들의 옹호자들은,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를 질문한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은 기억을 만든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양식은 자아가 곧 고통의 원인이므로 특정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특정한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다름 아닌 어떤 기성의 권위이다. 정의와 처벌의 체계로서 권위는 우리를 호명하며, 우리는 그 권위에게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써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 행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게 된다. 요컨대, 니체에게 설명가능성/책임성(accountability)은 기성 권위의 위협과 비난을 받은 뒤에야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니체식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는 아니다. “너”를 알고 이해하려는 욕망과 처벌이 아닌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고 서술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마주할 때에만 설명을 시작한다.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해 나에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 즉 “그게 너였어?”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만, 우리는 설명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자아를 설명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서사(narrative)의 형식을 취하며, 말이 되도록 사건의 이행과정을 설명할 능력 뿐 아니라 서사의 목소리와 권위에도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침묵할 수도 있다. 침묵은 나에게 던져진 질문의 형식과 또 질문을 던진 사람에 대해 그리고 질문자가 호소하는 권위의 정당성을 의문에 던지거나, 혹은 침묵 속에서 질문자가 끼어들 수 없는 자율성의 영역을 보존함으로써 장면 안에 존재하던 관계를 바꾸어 낸다. 이렇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에 대해 진술을 거부하는 행위가 갖는 여러 차원의 의미는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scenes of address)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니체는 이러한 ‘대화’의 장면, 즉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을 완전히 고려하지는 않았다. 니체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사법적 체계의 처벌 위협에서만 도덕적 질문이 만들어지고 설명이 시작될 뿐이다. 이러한 위협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도덕 뿐 아니라 영혼의 국면까지 생산한다. 니체는 이러한 사법적 체계와 처벌 위협의 도덕체계에 귀속되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구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공격과 같은 범위에 걸쳐 있고, 삶의 근원으로서 공격을 금지하면 삶 자체도 금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고통을 입히더라도, 니체에게 이러한 공격과 고통은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분이며 심지어 일종의 생명력을 구성하기도 하므로 쉽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덕성은 차라리 부정적인 의미까지 갖는다.

  푸코는 감옥의 훈육 권력에 대해 설명한 바 있지만, 반성적 주체의 출현에 있어서 처벌 장면을 일반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푸코는 도덕과 ‘양심의 가책’이 어떻게 니체 식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말년의 푸코에게 주체란 일군의 코드와 규정, 혹은 규범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는데, 주체는 (1) 자기의 구성을 제작(poiesis)의 종류로 드러낼 뿐 아니라, (2) 자기제작(self-making)을 더 넓은 비판의 맥락에서 움직이도록 한다. 즉 푸코의 자기제작은 무로부터(ex nihilo) 급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떤 규범에 대한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의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는 늘 자기 자신의 형성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늘 윤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과정을 지지하는 “주체화의 양식”과 “자아의 금욕주의” 같은 자기활동성의 형식들이 도덕적 행위를 구성한다. 또한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실천 과정에 있어서 ‘비판’은 주체가 속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지평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아의 미학에 관여함으로써 “진리의 정치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의 과정 안에서 주체의 탈종속화를 보장”한다.

  푸코는 도덕을 니체처럼 창조적인 충동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니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도덕이 창안적(inventive)이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푸코에게도 주체화/종속화라는 푸코의 설명에서 보듯이 “나”는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생성될 수 있지만, 이러한 생성 과정은 니체처럼 자신을 꾸짖고 자책하는 심리적인 행위성의 결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아가 어떤 외부의 질문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만들고 형성하는가하는 문제는 열린 질문까지는 아니어도 또 하나의 도전이다. 요컨대, 도덕규범이 필연적으로 주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주체가 이러한 규범을 자유로이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방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택할 수 없었던 조건들과 갈등하고 투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만 도덕/윤리적인 주체는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형성과 행위의 구성 맥락이 완전히 자기에 정초해 있지 않다면, 그래서 주체가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하고 자기 스스로도 완전하게 인식해낼 수 없다면, 이러한 주체에게 행위에 따른 개인적·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주체는 윤리적 고려와 인간의 행위성 자체를 훼손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을 불가능한 기획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불투명성은 어쩌면 주체가 관계적 존재, 즉 관계성의 근본적인 형태를 요구하며 관계의 맥락에서 형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불투명하다면, 또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가 윤리적 책임감의 현장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에 대해 불투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주체는 윤리적으로 속박되고 이 속박을 유지한다고 말이다.


푸코적 주체(Foucaultian Subjects)

  푸코에게 자아구성의 문제에서 자기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진리체제(regime of truth)이다. 진리체제의 용어는 어떤 존재의 형식을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의 여부를 사전에 결정하면서, 주체의 본 모습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진리체제가 제공하는 규범은 자기제작에 따르는 일군의 결정에 틀과 참조점을 제공하면서 협상에 열려 있을 뿐, 우리를 결정론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코의 핵심은 우리와 진리체제의 규범이 언제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 외에도, 진리체제와 맺는 모든 관계가 곧 나와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다. 따라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자기 반성적 차원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진리체제는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를 실현하고 통치하지만, 이 통치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제작의 과정 속에서 항상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체제에 대한 의문은 진리체제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즉 진리체제를 문제 삼는 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이며, 이는 곧 나 자신에 대해 설명(account)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가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은 때로 자신의 존재조건과 관련을 맺는 진리체제와 자신을 동시에 의문에 던지면서 주체로서 인정불가능성을 감행하는 것이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인정가능한 주체인지에 대해 의문에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와 타인들이 진리체제 내부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규범은 나-너(타자)라는 이자 관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규범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총체성이나 불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정의 실천 속에서, 타자의, 혹은 타자라고 하는 인정불가능성이 발생시키는 인정의 붕괴와 파열이 진리체제의 규범적 지평을 문제 삼는 경우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보지 못한 점이지만) 다른 이를 인정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 즉 현존하는 진리체제에서는 언제나 충족될 수 없고 실패하는 상호 인정에 대한 욕망과 투쟁은, 진리체제의 규범들을 비판적으로 심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진리체제를 열어놓는 것은 진리체제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정욕망 속에서 진리체제 속의 나를 문제 삼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곧 미덕의 신호이자 윤리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진리체제에 대한 논의를 일인칭 관점을 택한 윤리적인 질문의 맥락에서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이자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을 단순한 형태로 직접 던지게 되면, 나는 사회적인 규범성의 영역 뿐 아니라 권력의 문제 틀에도 즉각 포획된다. 장면 속에 “나”와 “너”가 존재하더라도, 규범적인 프레임이 이 출현과 조우에 필수적이라면 규범은 나의 행위를 규제할 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만나는 장면의 출현도 좌우하게 된다. 또한 윤리의 영역은 사회적인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은 방향을 쉽게 상실한다. 이런 경우 만약 “나”가 “너”에게 인정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는 나 자신의 사적 근거에서 인정을 제공하지 않게 된다. “나”는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규범에 종속되며, 따라서 “나”는 어디까지나 규범의 행위성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가 규범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정도만큼 “나”는 규범에게 사용된다. “나”는 “너”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결국 내가 규범과의 싸움에 휘말려들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규범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포스트 헤겔적인 질문(Post-Hegelian Queries)

  헤겔이 지적하듯 인정은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동시에 나는 인정을 받게 되며, 또한 내가 인정을 제공한 형식도 잠재적으로 나에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두 주체 사이에서 인정이 가능해질 때 암묵적인 상호성의 조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정(recognition)은 헤겔이 지적하듯이 나와 타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호적인 행동에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구조적 동일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alterity)과의 만남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타자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헤겔적인 타자는 언제나 외부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탈-아적(ecstatic)이며, 따라서 나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에서 나 자신을 나의 밖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를 말하고 “나”를 알고 또한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일인칭 관점이 탈구되는 일인칭 너머의 관점에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나도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이며, 따라서 나 자신으로 귀환하는 여정의 최후의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겪는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되며, 따라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에는 과연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이 존재한다. 이렇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조건은 우리가 우리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 밖의 외부적 매개, 즉 규범이나 관습의 힘에 의해서만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헤겔적인 인정의 주체는 이렇듯 불가피하게 상실과 엑스타시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교환은 교환에 참여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규범의 언어와 관습, 그리고 침전에 의해 조건화되고 매개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묘사하는 인정투쟁은 다름 아니라 이자 관계가 사회적 삶을 이해하기 위한 참조점이 되기엔 부적합하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이자 관계에 대한 천착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그 무엇, 예컨대 ‘인륜성(Sittlichkeit)’이다. 다시 말해, 이자 관계의 교환은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어떤 규범을 향한다. 또한 인정의 무대에 서기 전에 서로를 인지하고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로를 독해할 수 있는 시각적 틀, 즉 이자 관계를 초월하는 규범 안에 들어갔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타자는 시각 장의 규범성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나의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내적 능력’을 통해서 나에게 인정을 수여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반응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시각 장의 규범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시각 장의 규범성은 타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인식론적인 장일 뿐 아니라 또한 권력의 작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개인의 얼굴은 쉽게 읽히고 다른 이들은 쉽게 읽히지 못하게 되는 걸까?


“너는 누구인가?”("Who Are You?")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정에 대한 사회이론은 주체의 인지가능성에 있어 비개인적인 규범이 작동한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실제 일상에서 우리는 주로 가까운 이들과의 생생한 교환 속에서 규범과 접촉하고 타자를 만나며, 우리가 누구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카바레로는 이러한 인정의 질문이 마치 사람됨의 그릇에 특정한 내용을 채워야 되는 것인 양 우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카바레로가 보기엔 질문을 던질 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 자체가 이 질문의 함의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한다.

  상호 인정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질문은 직접적인 질문으로, 이는 타자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타자관은 타자의 독특함과 대체불가능성을 가정하면서, 헤겔식의 상호 인정 모델이나 타인에 대해 더 일반적으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제한한다. 또한 이 질문에 함의된 ‘누구’라는 것은 이타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누구’냐는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처럼 도덕적 책임의 귀속과 설명가능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알려질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카바레로는 타자에 노출되는 존재로서, 그리고 취약한 존재로서, 또한 서로의 독특성(singularity) 안에서, 어떻게 이 필연적이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만남을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살핀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갇혀서 오직 나에게만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너”를 위해, 그리고 “너”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 속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나”가 말을 걸 “너”가 없다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너”와 연관해서만 “나”를 지칭할 수 있고, “너”가 없다면 “나”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성을 삭제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헤겔이 논의하는 바 이자 관계에서 사회적 인정이론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논의이다. 카바레로는 오히려 사회적인 것을 이자 관계에 정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카바레로는 그래서 “너”를 무시하고 “나”의 권리만을 칭송하는 모든 개인주의적 유파는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타락과 “너”의 우연성을 회피하는 대신 “우리”라는 집단적인 대명사를 특권화하면서 내부의 도덕에 천착하는 유파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쓴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너희들은 가능한 우리 편이며, 그들은 적대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나는 꼴사납고 너는 물론 불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너”라는 타자를 만날 때 “나” 자신을 드러냄으로써만 나 스스로의 독특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신체성에서 나온 삶의 특질이므로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적 영역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독특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카바레로가 보기에 자신의 사회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공성의 일부분이다. 또한 카바레로는 “나”의 독특함도 타자에게 드러나지만, 타자의 독특함도 “나”에게 드러난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것 때문에, 즉 우리의 독특성 때문에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독특성을, 나 스스로가 만남의 장면에서 드러났음을, “나”와 “너”가 서로의 독특성 때문에 묶여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가능하게 만들고자 할 때 사용하는 규범은 완전히 내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규범이 출현하는 시간은 내 삶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규범은 나의 생과 나의 죽음에 무관심하며, 나와 다른 시간에 존재하기에 나의 시간을 가로막기도 한다. 푸코는 이렇게 적는다. “담론은 삶이 아니며, 담론의 시간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담론으로서 제시하는 “나”에 대한 설명은 살아 있는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의 말은 내가 그 말을 할 때 탈취되어, 내 삶의 시간과 같지 않은 담론의 시간에 차단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규범의 무관심이나 방향상실 같은 것이 나의 생존을 추동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은 담론을 통해 회복되거나 확장될 수 없지만, 이는 불가지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불가피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나”의 것으로서의 “나”의 관점이 차단되고 탈취되는 것은 무엇이 인정할만한 설명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규범의 작동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규범에 어느 정도 순응하거나 협상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에서 설명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것에서 몰수되는 경우에만 완성될 수 있다. 오직 탈취 속에서만 “나”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을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서사는 “나”의 것이 아닌 무엇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만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를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의 독특함과 서사적 권위는 이렇게 규범의 관점과 시간에 어느 정도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다만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태를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그것은 지시체의 회복 불가능성과 폐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불가능성은 서사를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라캉이 얘기하듯, “허구적 방향”에서 서사를 생산한다. 이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차 반복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개연성 있는 판형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 여러 판형 중에 어느 것만이 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또한 내 서사의 조건, 내 서사의 주제에 종속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에 몸이라는 지시체가 있다. 몸은 내가 가리키고 지시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다시 말해 심지어 내 몸이 어디에 갔었고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함에도 완전히 서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몸이 있다. 따라서 몸이 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온전한 회상이 박탈당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을 정리하자면, 나의 독특성을 설립하는 서술 불가능한 (1)드러남(exposure)이 있으며, 내 삶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거듭하여 인상/자국을 형성하는 회복 불가능한 (2)일차적 관계(primary relations)들이 있다. 따라서 나의 (3)부분적인 불투명성(partial opacity)을 확립하는 역사가 존재한다. 여기서 (4)규범(norms)의 존재를 고려해야하는데, 규범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촉진하지만, 내가 지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독특성의 역사를 확립하려는 순간 나를 대체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탈취 현상은 내가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설명함으로써 내 설명의 서사구조가 (5)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structure of address)에 의해 대치된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구성적 통약불가능성(constitutive incommensurability)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나의 이야기가 뒤늦게야 도착하도록 만들고, 내가 서술하려고 하는 삶의 구성적 출발점과 전제조건의 어느 정도를 놓쳐버리는 방식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서사가 갑작스러운 사건 가운데(in media res)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의 손실을 회복하고 재구성한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기원을 픽션으로 만들고 우화로 만든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내고, 이 새로운 형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과거의 삶을 가진 “나”에 서사적인 “나”를 덧붙인다. 이러한 서사적인 “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계속 이야기에 효과적으로 더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서사적 관점에서 다시 나타나고, 또한 이렇게 더해지는 서사적 “나”는 문제가 되는 서사에 관점을 정박할 수 있는 순간에도 완전히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나에 대한 설명은 내가 정확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종속되어 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사적 재구성에 대한 나의 노력은 영원한 개정의 과정이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언제나 나에게 있으며, 또 나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윤리적인 실패로 간주해야 할까? 내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완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윤리가 소멸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투명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언어와 ‘너’에게 더욱 단단하게 묶어줄 관계성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윤리는 “자아”의 조건이 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눈멀게 하는 어떤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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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10/20 21:26
커피하우스 : 로스쿨 학생들의 아비투스와 수행성
Coffee House : Habitus and Performance Among Law Students

- Desmond Manderson and Sarah Turner

피에르 부르디외와 주디스 버틀러의 작업에 의존해서, 우리는 주요 로스쿨의 사회적 공간에 대한 자세한 문화기술지 작업을 통해 로스쿨 학생들이 어떻게 사회화되는지를 탐색해보았다. "커피하우스"는 캐나다 로펌이 스폰서가 되어 개최하는 주간 사교 이벤트로, 로스쿨 재학생들에게 공짜로 음료수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 이벤트와 행위자들이 학생 정체성과 교육적 열망을 변화시키는데 근본적으로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비록 이 학생들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요"라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문화기술지는 "커피하우스" 정체성이 수행을 통해서 발달하며,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미래의 커리어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의 문제라고 느낄 때까지 상징자본이 축적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서 부르디외의 중요한 작업을 탐색할 것이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의 결정론(determinism)을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 버틀러의 작업을 따라 우리는 정체성은 공간, 반복, 수행성의 사이에서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역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커피하우스에 다니는 로스쿨 학생들이 개인의 무의식적 변형을 겪는 과정은 이미 실행중이다. 하지만 이 공간의 의미가 변화할 기회와 로스쿨 학생들의 수행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Drawing on the work of Pierre Bourdieu and Judith Butler, we develop a detailed ethnography of a social space in a major law school and explore its socialization of the students there. “Coffee House” is a weekly social event sponsored by Canadian law firms and offering free drink and food to the students present. We argue that this event and the actors involved profoundly change student identities and alter educational aspirations. Although the students themselves insist that “nothing is going on,” our ethnography suggests that in “Coffee House” identity is developed through performances, and in the accumulation of symbolic capital, until ultimately students come to feel their future career path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destiny. We explore the important work of Bourdieu through this setting, but ultimately we resist his determinism, and suggest instead that, following the work of Butler, identity is a more complicated and fluid dynamic between space, repetition, and performance. It appears that a personal unconscious transformation among law students attending Coffee House is underway; yet opportunities to change the meaning of this space and these performances remain.

Law & Social Inquiry Volume 31, Issue 3, 649–676, Summer 2006


수강 중인 강의 리딩리스트에 있는 논문의 초록. 아.. 이거 재... 재밌겠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강의 리딩리스트에서 재밌어 보이는 논문은 이 논문이 처음일세. 발제를 이번 주에 할 걸 그랬어 아이고

(물론 상징자본이란 개념이 약간 남발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또 부르디외를 결정론자라고 비난하는 것도 어느 정도 맞기는 하지만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다. 이들처럼 집단 속 개인의 현상학적 체험을 다루면서, 부르디외 같은 사회학자의 개념을 쓰려고 들면 당연히 안 맞는 건데. 개념이 설명하는 층위가 있는 건데. 그러니 당연히 버틀러 쪽 개념이 땡길 수밖에..)

여하간 부르디외와 버틀러를 병렬 배치한 건 또 처음일세.

석사 논문 쓸 땐 이것보단 훨씬 땡기는 주제로 써야할텐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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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7/09 22:29

보부아르는 '여자(woman)'라는 것은 역사적 관념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문화적 해석 혹은 생물학적 사실성의 의미작용으로서의 젠더는 구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한 구분법에 따르자면 여성이라는 것(to be a female)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실성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분법에서 여자라는 것(to be a woman)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것(to become a woman)이며, 신체를 '여자'라는 역사적 관념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제한된 가능성에 신체를 복종시키고 물질화하는 것이며, 신체적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급진적인 의지의 창조적인 힘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라는 개념보다는, 젠더 수행이 언제나 그리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일종의 감금 상태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젠더는 문화적 생존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 전략으로서의 젠더는 징벌적 성격의 결과를 낳는 수행이다. 젠더는 하나하나의 개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humanize)' 동시대 문화의 한 부분이다. 사실, 젠더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한 이들은 규칙적으로 처벌받는다. 젠더가 표현하거나 외재화하는 '본질'이란 것도 없고 젠더가 갈망하는 객관적인 이상이란 것도 없으며 그리고 젠더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젠더의 다양한 실천은 젠더에 대한 관념을 생산하며 그러한 실천 없이는 젠더는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젠더는 규칙적으로 그 기원을 은폐하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문화적 픽션으로서 분리되고 양극화된 젠더를 수행하고 생산하고 유지하는 암묵적인 집단적 동의는, 그것이 생산하는 신빙성에 의해 애매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젠더의 저자는 젠더의 구성과정이 개인의 신념을 필연성과 자연성으로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다양한 신체적 양식을 통해 물질화된 역사적 가능성은, 단지 감금된 상태에서 체현되고 위장된 징벌적 규제를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_주디스 버틀러, <수행적 행위와 젠더의 구성>의 일부분


사실 글 자체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내가 과문하여 한국어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고 있다. 공유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참 많은데... 내 언어 실력에 한숨만 나오는 요즘.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접하는 과거의 버틀러는 여전히 매혹적. 누군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비록 타 학과에 속해있지만, 어쨌든 나는 인류학 전공을 희망하는 대학원생이( 될 예정이)다. 전공은 anthropology of education 이지만 나는 근본적으로는 인류학 지향이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교육학이나 인류학은 모두 인간의 문화화와 사회화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사회화하는데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사회를 인간화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건 교육학이라기보다는 인류학이라는 생각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난 후자를 택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알려진 어떤 인류학자는, 페미니스트 인류학은 젠더의 구성에 대해 묻는 학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제도들이 어떻게 젠더라는 프리즘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면 타당한 주장이다. 모든 사회 제도와 문화적·언어적 실천들은 모두 젠더라는 프리즘 없이는 제대로 구성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페미니스트 인류학인가? 그냥 젠더 연구지. 그의 관점에 따를 경우에도 젠더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화된다. 그리하여 젠더는 아무런 질문 없이 실체이자 본질이 된다.

반대로 버틀러는 그러한 실체화와 본질화 과정에 대해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했던 얼마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때론 잊고 지내도 결국엔 다시 돌아와 참조하게 되는게 바로 그녀의 글이다. 가끔은 유일하게 신뢰하며 읽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릴지라도 말이다.


덧) 보부아르가 한 유명한 말인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표현의 영역본은 "One is not born, but, rather, becomes a woman"이다. 한글 번역에서 "만들어진다"는 표현은 실존주의자로서의 보부아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을 인용하는 버틀러의 맥락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역본에 따르면 여자가 "된다"는게 맞다. 현상학적 실천, 제한된 가능성 속에서 주체의 극화된(dramatized) 실천으로서, 스스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번역이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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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1/10 00:21
"우리가 속한 위치와 역사는 모두 다르지만, 나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갖고서 희박한 '우리'를 만들어 왔다. 만약 우리가 상실했다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하게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 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에서
 
 
뉴스공급사들은 전 세계 어딘가에서 발생한 뉴스를 신속하고 재빠르게 타전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언론사들은 그것을 받아 보통 '국제 이슈'의 한 단면으로 다룬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서 본다. 보고 또 봐도 끝이 안나는 뉴스들.
 
어제 버스 안에서 멍하게 바라봤던 TV에는 ㅌㄱ 축구팀이 총격을 받아 10여명이 사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앵커가 있었다. 물론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ㅌㄱ 축구팀은 어떤 나라에 갔다가, 어떤 사람들에게 우연히 총격을 받은 것이다. 소위 "아프리카"에 있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지난 수십년간 "아프리카" 지역은 늘 총성과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다.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끝나서는 안될 노릇이다. 왜 폭력, 질병, 죽음, 빈곤이 "아프리카"에 만연한지ㅡ사실 이 말도 틀렸다. 국가도 수없이 많으며 경제 상황도 다르다. 계급별 젠더별 조건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로 '그들을' 이해한다ㅡ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으레 그러려니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 위에서 ㅌㄱ 축구팀이 당해야 했는지, 또 축구팀이 상징하는 바, 혹은 더 나아가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 어떻게 이 폭력 사태에 연관되었는지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안다고 해도 그 앎이 진실된 것인지 보장할수도 없거니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당히 여유 있는 중간 계급의 도덕주의적 감상주의 아니냐는 내면의 힐난에 침묵해 버린다. 결국엔 냉소주의와 만난다. 어딜가도 냉소 뿐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냉소주의 앞에서 좌절할 때 가장 좋은 치유책은, 버틀러의 윤리학 관련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고, 밑줄치고, paraphrase도 하고, 옮겨 적는다. 복잡한 문장과 꼬인 번역문을 읽는데도 짜증이 일기 보다는 겨울철 때이른 어둠이 어느샌가 세상을 온통 적셔 오듯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드는 걸 느낀다.
 
버틀러는 가장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저 위에 적어놓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 사고 방식을 깨트린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사유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버틀러의 방식은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도 윤리를 포기해 가는 마당에, 한국에 이렇게 감동을 주는 윤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정말이지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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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9/04/10 01:02

어젠가 그제에 포스팅 했던 대로 오바마의 당선에 부치는 버틀러의 글, "Uncritical Exuberance?"를 옮겨 둔다. 역시 인터넷에 원문은 많이 돌아다니니 원문 링크는 일단 패스^^; 이 글은 앞서 올린 지젝 글보다 훨씬 더 번역하기 어려웠다 헥헥; 전체적인 양은 지젝의 글이 한글 기준 2000자 정도가 많지만 버틀러의 글이 단어나 문법 선택이 역시 beyond me이기 때문에 -_-; 이번 뉴레프트리뷰에 올라온 마이크 데이비스의 글도 흥미로울 것 같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번역은 포기했다. 어쨌거나 비록 퇴고도 못한채 출근을 위해 일단 잠을 자야하기에 초고를 올려두지만, 어쨌거나 무려 4시간이나 걸려서 사랑스러은 셸든이 나오는 빅뱅이론 봐도 될 시간에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지만) 독자를 고려한 번역을 끝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글에 엄청나게 지적 자극을 받으면서 그녀에 대한 바보같은 애정이 한층 깊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어졌다. 덧붙여 약간의 행복감마저 느끼며, 그렇기에 오역은,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들 하세요, 하는 무책임한 말을 던지며, 나는 이만 총총... 수정은 천천히...
 

무비판적인 열광(Uncritical Exuberance)?

by Judith Butler
translated by 비앙


이 순간, 이 흥분 상태에 무감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내 좌파 친구들은 나에게 “구원”같은 느낌을 받는다고도 말했고, “이 나라가 우리에게 돌아왔어!”라고도 말했고, “마침내 백악관에 동지가 생겼군!”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나 역시도 오바마의 승리가 확인된 날, 부시 정권이 마침내 끝장나버렸다는 생각이 엄청난 위안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이 흥분 상태에 빠져있었다. 생각이 깊고 진보적인 흑인인 오바마의 생각들은 역사의 토대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만들어 낸 새로운 지형들을 따라 대변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뀐 지형들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이 지형의 윤곽을 완전히 그려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이제부터 평가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구원이 아닐뿐더러 구원일 수도 없다. 만약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오바마가 제안했던 과장스런 동일시 상태나 “그는 우리 동지야”라는 우리들의 제안에 찬성해버린다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특히 오늘날의 정치적인 삶을 구성하는 적대 관계(antagonism)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국가적 연합”을 이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좋은 이유는 항상 있었으며, 정치 지도자를 향한 절대적이면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를 의심하는 생각을 키워야 하는 좋은 이유들 역시도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부분적으로는 지도자를 향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 상태에 의존한다. 공화당은 정치 감정을 조직하기 위해 파시즘과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컨대 엘리자베스 돌(Elizabeth Dole)은 그녀의 청중들을 쳐다보며 “나는 당신들 각각을 사랑하고, 당신들 모두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바마의 당선에 대한 열의 넘치는 동일시의 정치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오바마에 대한 지지가 보수적인 대의에 대한 지지에 부합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자면 말이다. 이는 그가 “지지 정당을 바꾸는 투표(cross-over)”로 성공했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는 60%의 득표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서는 52%의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명백한 괴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오바마가 동성 결혼권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지한 바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더 나아가, 웬디 브라운이 주장했듯이 공화당원들은 최근에 있었던 선거들과는 달리 유권자들이 “도덕적인” 이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오바마에게 투표한 이유는 분명히 경제 때문인 것처럼 보이며, 그것은 종교 문제 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에 의해 완전히 구조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권자 다수가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던 공화당 소속 알래스카 주지사인 페일린(Palin)의 정치 회합이 결국 실패했다는 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총기 규제나 낙태권 그리고 게이의 권리 같은 “도덕”적인 이슈가 예전과는 달리 더 이상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이는 이 도덕적인 이슈들이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의 다른 칸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정치적 신념의 새로운 형상화(configuration)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상화 안에서는 명백히 모순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는 오바마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오바마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그들의 인종주의를 명백히 드러내면서 어쨌든 간에 오바마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고, 투표장에서는 백인 후보에게 투표하면서 여론조사나 출구조사에서는 비백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하는 브래들리 효과(Bradley-effect)의 반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 아마도 그가 경제에는 더 낫겠죠.” 이러한 유권자들은 그들의 조각난 신념을 해결하지 못하고 감춰둔 채 인종주의를 지키면서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다.

강력한 경제적 동기 외에 경험적으로 조금 더 분별하기 쉽지 않은 요소들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이 선거에서 있었던 탈동일시의 힘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즉 조지 부시가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했다는 점에 대한 불쾌감, 미국이 저지른 고문과 불법 구금에 대한 부끄러움, 엉뚱한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적 관점을 유포했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 과도한 탈규제 경제가 전 지구적 경제 위기를 낳았다는 점에 대한 경각심과 공포심 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오바마가 그의 인종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의 인종 덕분에 이 국가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대표자가 된 이유 아닐까? 그러한 대의제적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오바마는 흑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흑인이 아니기도 하였으며(누군가는 “충분히 흑인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너무 흑인스럽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오바마는 인종문제에 대해 양의적인 관점을 해소하지 못하는 유권자들 뿐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원치 않는 유권자들에게도 호소할 수 있었다. 대중들이 대중들 스스로의 양의성을 견뎌내고 감출 수 있도록 해주는 공적인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의 인물로 나타난다. 이는 당연히 이데올로기의 기능이다. 그러한 요소는 강렬한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인 힘을 잃는 것은 아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오바마 개인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관심들이 쏠렸다. 즉, 진중하고 신중한 그의 성격, 언제 어디서든 성미를 놓아 버리지 않는 능력, 상처를 주는 공격들과 야비한 정치적 수사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방식,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부끄러운 상황을 회복할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약속 말이다. 물론 그러한 약속은 매혹적이지만, 오바마를 선택하면 이 모든 불협화음을 일거에 해소하고 통합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믿음을 낳는다면 어쩔 것인가? 이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자신의 과오점을 보여주고 자발적으로 다른 세력과 타협하며, 심지어 소수자들을 팔아치울 때에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실망에 고통 받는 결과로 끝나 버릴만한 가능성은 또 어떤가? 사실 그는 분명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점들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이들은 이 순간 극단적으로 모호하지 않은(extremely un-ambivalence) 상황을 즐기기 위해 이러한 우려를 “미뤄두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더 잘 알게 되었을 때에도 무비판적으로 즐거워하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뭐니 뭐니 해도 오바마는 거의 좌파가 아니다. 보수주의 반대세력이 오바마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칭을 붙여줬다지만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의 행동들이 정당 정치와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해 제한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미 타협되었는가? 만약 우리들이 현재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기 위해 오바마를 지지할 것이라면, 우리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비판적인 정치학을 떨궈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덧없는 것일지에 대해서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라고 공공연하게 자백한 인종주의자가 한 켠에 있다면, “오바마가 게이의 권리와 팔레스타인을 팔아 치웠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아. 하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의 구원이야”라고 말하는 좌파들도 분명히 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I know very well, but still)’라는 말은 부인(disavowal)의 고전적인 형식이다. 우리는 어떤 수단을 통해 이렇게 충돌하는 신념을 유지하고 감추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

오바마의 성공이 미국의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유럽의 사민주의를 닮은 경제 접근법이 도입되면서 경제 규제에 있어서 새로운 원리를 보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도 논리적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부시 행정부가 국가 간의 조화를 파괴해 온 치명적인 흐름을 뒤바꿔 놓을 다변적인 관계로 재편되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서도 더 자유주의적인 흐름이 있게 되리라는 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오바마가 전 국민 의료혜택 보장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동성 결혼권을 명백하게 지지하는데도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가 중동에서 정당한 정책을 펴리라고 희망할만한 이유가 많지도 않다. 물론 그가 컬럼비아대 중동문제연구소 소장으로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오던 라시드 칼리디를 알고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오바마의 당선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요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성공에 암묵적으로 강제된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하고만 관련이 있다. 이 사실은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격려할 것이며 또 압도할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미국의 자기 정의(self-definition)의 변화를 촉진할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이 투표자들 다수가 오바마에 의해 “대표되기”를 원한다는 의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즉, 우리는 많은 인종으로, 각양각색의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가(nation)다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오바마는 우리가 누구로 되어왔으며, 또 앞으로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지를 인지해야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대통령직의 대의제적 기능과 대중을 대표하는 것, 둘 사이의 불화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거의 메시아에 거는 것만큼 이 남자에게 쏟아진 기대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오바마의 재임기간이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실망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또 실망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 분(the man)은 한낱 인간이 될 것이며,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정치는 모호함이나 신중함 없는 찬양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사실 정치는 소란스러운 토론과 공중의 비평, 필수적인 적대의 장이지 메시아적 경험은 아니다. 오바마의 당선은 토론과 투쟁의 장이 이동했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지리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의 당선을 잠정적이나마 투쟁의 끝으로 생각한 우리들은 어리석었지만, 오바마의 당선은 투쟁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오바마가 시도할 많은 행동들과 시도하지 못할 일들에 의심할 여지없이 동의하고 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오바마가 그 자체로 “구원”이며 “구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때 우리는 그를 무자비하게 처벌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통합되었다는 느낌과 모호한 점 하나 없는 사랑의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실망을 거부하거나 억누를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따라 붙을 드라마틱한 실망감을 피해가려면 오바마는 빠르고 자알~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충돌”ㅡ그에게 반대하는 정치 의지를 불러일으킬 심각한 실망ㅡ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 재임기간의 첫 두 달 안에 중대한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아마도 관타나모 기지를 폐쇄하고 수용자들의 재판을 합법적인 재판정으로 이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이라크에서 병력을 철수할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셋째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그의 호전적인 언급을 철회하고, 그 지역에서 외교적이고 다변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단계를 밟아가는 데 실패한다면, 오바마에 대한 좌파들의 지지는 악화될 것이며, 우리는 자유주의적 주전론자들과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들 사이의 균열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또 만약 오바마가 시오니스트인 로렌스 서머스 같은 이들을 주요 내각에 지명하거나, 클린턴과 부시가 이미 실패한 경제 정책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우리의 메시아는 엉뚱한 예언자로 판명되어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불가능한 약속의 지점에서, 우리는 부시 정권이 저지른 정의(justice)의 끔찍한 폐기를 뒤집기 위해 확실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환멸(disillusionment)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비판적인 정치학을 되찾으려면 얼마만큼의 각성(dis-illusion)이 필요하며, 극적인 각성을 얼마나 해야 지난날의 정치적 견유주의(cynicism)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정치란 오바마가 보여줬던바 인간에 대한 것이나 불가능하고 아름답기만 한 약속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러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더 큰 정의의 여건을 만들어줄 확실한 정책 변화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_끝.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29 01:34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Routledge, 1999 (2nd edition), 3-4의 일부 번역

푸코는 사법적 권력의 구조가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재현하게 될 주체를 "생산"한다고 지적한다. 사법적 권력 개념들은 순전히 부정적인 항으로 정치적인 삶을 규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제한, 금지, 규제, 통제, 그리고 심지어는 우연적이고 원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선택의 과정을 통해 정치적 구조에 관계하는 개인들의 "보호"를 통해서. 그러나 그러한 구조에 규제되는 주체들은, 그 구조에 종속되는 덕분에 그러한 구조들의 요구에 맞추어서 형성될 수 있고 정의될 수 있고 재생산 될 수 있다. 이 분석이 옳다면, 페미니즘의 "주체"로써 여성을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학의 사법적 구성체는 그 자체로 담론적 구성체이자 재현적 정치학의 주어진 판본의 효과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주체는 그 주체의 해방을 촉진한다고 가정되는 바로 그 정치적 시스템에 의해서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이 밝혀진다. 만약 그 시스템이, 차별화된 지배의 축을 따라서 성별화된 주체를 생산한다고 보여지거나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주체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문제적이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그러한 시스템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명백히 자멸적일 것이다.

"주체"에 대한 질문은, 정치학 특히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사법적 주체들은 언제나 똑같이 일정한 배타적 실천ㅡ이 배타적 실천은 정치의 사법적 구조가 한번 설립되면 그 실천을 "보여" 주지 않는다ㅡ을 통해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체의 정치적 구성은 일정한 합법화와 배타적인 목적과 함께 진행되어 나가며, 또한 그러한 정치적 기능은 사법적 권력들을 그들 자신의 토대로 하는 정치적 분석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은폐되고 자연화된다. 사법적 권력은 불가피하게 자신이 그저 재현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정치학은 반드시 이러한 권력의 이중 기능ㅡ사법적인 것과 생산적인 것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실제로, 법은 자연화된 근본적 전제로서의 담론적 구성체를 불러내기 위해서 "법 이전의 주체"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는 곧 은폐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법 고유의 규제적인 헤게모니를 합법화한다. 어떻게 여성이 언어와 정치학 속에서 완벽하게 재현될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페미니스트 비평은, 페미니즘의 주체로서의 "여성" 범주가, 해방이 추구되는 바로 그 권력 구조를 통해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제한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아카데미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조금씩 원서를 번역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출판할 것도 아니고, 이해한 대로만 번역해보면 될 것 같다. 시간을 엄청 뽈아 먹지만, 어쩌랴.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나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뭐 여기에 쓴다고 해서 방해가 될까 싶기도 하고;

그 첫번째 프로젝트는, 거창하게도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_-;; 물론 다 할 것은 아니고, 읽다가 흥미진진한 부분이 있거나 만만한 부분이 있으면 번역해 보려고 하는 것. 게다가 원서 중에 애정이 가는 책은 이 책밖에 없다. 사실 지젝의 <Parallax View>를 조금씩 번역 해볼까 했는데, 그건 출판된지 1년 넘었으니 한국에서 곧 번역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지젝의 책이 나오면 제깍제깍 번역하면서 버틀러의 책은 번역 안된게 산더미 같은데 번역 잘 안하는 번역계(?)가 미울 뿐이다 ㅠ.ㅠ
 
그런 맥락에서, <젠더 트러블>은 앞으로도 번역이 안 될 것 같아서 (<안티고네의 주장> 번역하신 조현준(순)씨가 번역 안해주시려나 ㄲㄲ) 시도해 보는 거다. 그나마도 <젠더 트러블>의 1장은 예전에 양쌤 세미나에서 봤었기 때문에 낯이 익기는한데... 당시에 한글로 번역된 것만 읽다가 이렇게 원서로 다시 보니 또 새로워서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_- 읽고서 내가 이해한 바라 다른 것도 있고. 일단 그 때 번역된 글은 염두에 두지 않고 번역을 해봐야 겠다.. 번역의 어려움을 새삼;

아 버틀러 박사 논문 출판본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담. 이 부분을 읽으니 사고 싶어. 또 열흘 이상 걸릴텐데 ㅠ.ㅠ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역시나 동문선 판이라 영 못 미더워서 구입을 주저하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원서랑 같이 비교해 보고 산다... 는 말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불어를 못해;)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10/01 00:43

언어에 관한 '현대적 이해'(특히 서구 철학계의)는, 더 이상 언어를 합리적인 의사소통이나 정보교환의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화행speech act 이론은 물론이요, 라캉주의자들의 언어 이해, 그리고 수많은 현대 이론가들은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거부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언어는 권력 관계를 확인하고 확립하는 어떤 수단으로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언어는 세계 속에서 작용함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수단이자 논리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언어 사용과 용법, 유통, 그리고 의미의 고정과 변화 등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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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 세계관 내에서 타자로 기입된 동성애, 장애인, 여성, 환경, 동물 등의 '비-인간 주체'들에 대한 혐오 발화hate speech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혐오 발화는 단지 특정 개인이 특정 개인에게 향하는 '장난질' 정도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맥락에서 권력 관계를 구성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이 된다(물론 그것을 '탈정치화'하는 일종의 폭력gewalt를 수반하지만).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되거나 가정된 특정 집단에 봉사하는 지배 헤게모니 전술의 일상적인 실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혐오 발화에 대한 일차적인 대처 방식은,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PC)운동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방식이다. 각 개인들의 '도덕 의식'에 호소하면서, 보다 더 올바른 호칭, 보다 더 올바른 사고를 주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PC적 접근 방식은 '쿨'의 정서와 맞물리면 놀라운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특정 혐오 발화를 하는 것은 '쿨'하지 않은 구시대적인 구닥다리 같은 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자유주의적 담론의 힘이 증가하고 젊은 세대 특유의 '쿨'이 유래없이 커지면서 동성애가 대중 문화 속에서 쿨하게 소비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호모 포비아적 발언 또한 더 이상 '쿨'하지 않게 인식된다. 심지어 어떤 '쿨'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이섹슈얼bisexual'이 되는 것이 장려되기도 한다. 또한 여성 혐오적 발언은 더 이상 (적어도)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서는 유통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한 발언을 하는 주체는 이제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근데 땅박씨는 예외상태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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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PC 운동의 궁극적인 성과는, 아마도 '법 체계'의 정비일 것이다(여기서부터는 자유도덕주의자들의 영역을 넘어선다). 오늘날 모든 개인의 도덕 수준을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혐오 발화를 하지 못하도록 법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혐오 발화를 차단함과 동시에 처벌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윤리 21>에서 읽을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윤리(도덕)적 접근 방식과는 전연 다른 접근 방식이다.

여기서 1942년에 있었던 "채플린스키chaplinsky" 사건을 중요하게 상기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모욕을 주는insulting 특정한 '표현'들을 금지하는 것이 그 유명한 미국 자유주의적 헌법의 "수정헌법 1조"에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다. 여기서 "fighting words"라는 말이 등장한다. 법원은 "fighting words"의 발화가, 이 말words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위'를 유도하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수많은 논란을 증폭시킨 판결이기도 했지만, 어떤 법적 접근에 대한 사고의 clue를 주는 것이기도 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법정 판결에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은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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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법적 접근'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한다. 자꾸 미국의 예를 들어오게 되어서 난감하지만(미국 같이 갈등을 정치-투쟁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호소하는 '소송 사회'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도 마찬가지로 흘러가는 거 같거든),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1992년에 있었던 사건(통칭 R.A.V사건으로 알려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인종주의자가 한 '흑인' 가정의 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워버렸다. 이는 그 소도시의 조례 법규에 따르면 일종의 '혐오 범죄hate crime'으로 규정되어 '경범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소도시의 규칙 자체가 '인종', '종교', '민족' 등의 "특정한 영역"만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정치성향', '동성애' 등 다른 영역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중립성을 벗어나고 있기에 위헌이라는 무척이나 뻔뻔스러운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그 중립성을 위장해 또다른 혐오 발화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법' 자체의 특성상 얼마든 이러한 법적 접근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라캉주의적 독해 또한 이러한 '법 체계'의 정비 자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법'언어는 일종의 '금지'의 언어다. 이러한 금지는 또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만큼 더 강력한 숨겨진 법의 이면, 즉 '초자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금지는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강한 금지는 더 강한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법을 받아들이는 주체들은 법의 명령을 수용하지만, 은연 중에 법의 이면의 초자아까지도 인식하게 된다. 초자아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외설적으로 귀환한다. 법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 내에서도 결코 문제점들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는 더 교묘해짐과 동시에 법 체계가 지속적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는 이러한 문제점을 잘 예시한다(마치 법이 자기 증식을 위해 '사건'과 위반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살인에 대한 법의 과중한 처벌은 살인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이 과중해질수록, '살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외설적인 초자아적 위반의 욕망이 자라나기 마련이다. 혐오 발화에 대한 법적 접근도 마찬가지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까? 혐오 발화에 대한 금지는 오히려 인종주의자들 성차별주의자들 동성애혐오자들의 외설적인 초자아적 욕망을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혐오 발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objet a)"이 있다는(욕망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권력 구조를 유지함과 동시에 강건하게 만든다는) 주체들의 인식을 오히려 강화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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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혐오 발화에 대한 PC적 접근, 법적 접근 모델은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나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혐오 발화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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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난점이 있을 수 있다. "주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 구조주의적 관점은 "그렇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개인은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은 구조의 꼭두각시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 개인을 그렇게 만든 구조의 잘못이지 그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구조주의적 접근이 무효한 것은 아니다만, 순전히 이렇게 접근해버리면 운동이고 정치고 뭐고 다 힘이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대개 논리적 난국 aporia에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쉽게 융합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 즉 개인의 순전한 잘못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개인이 '선택'한 것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이런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개인의 '선택'이라는 어휘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역사적 선험 historical a priori 으로 경험되는 조건들(누가 선택을 '선택'할 수 있고 누가 왜 불가능한가?)은 물론, 오늘날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수용성과 친화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Free Speech", 혹은 거의 신격화된 "언론과 출판의 자유"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자유'라는 말도 오늘날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중추가 아니던가?)

이러한 구조주의적 접근과 유사한 방식으로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화에 대한 이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버틀러는 유통되고 있는 혐오 발화들은, 각 개인들이 만들어 냈다기 보다는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는 인종주의적 표현의 코퍼스corpus에서 인용cite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즉 혐오 발화를 한 주체는 그러한 코퍼스의 인용의 효과이자 결과일 따름이며, 따라서 혐오 발화자는 그 말의 주체이자 저자author가 될 수 없다. 이러한 독해에서는 어떤 발화자를 '저자'로 가정하는 것은 단지 효과이자 결과에 불가능 한 것을 '실체화' 하는 일종의 위장이자 가정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렇게 끝내버리면 나의 사랑 버틀러가 '바보짓'한 것이 된다. 조금 뒤에 덧붙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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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혐오 발화와 동시에 구조주의적 난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중 하나는 가라타니 고진식의 칸트 윤리적 접근 방식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책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그에게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도덕성을 오직 '자유'(이 말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하겠지만)의 관점에서만 도덕을 찾았으며, 이 '자유'야 말로 유일한 의무 즉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이다. "자유를 의지(意志)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칸트 윤리적 의무이므로 따라서 이러한 자유를 누리지 않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않은 것이 된다. 여기서는 자유주의-구조주의적인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읽어낼 수 있다. (칸트가 아니라 고진의 칸트인듯?) 그러나 이러한 가라타니 고진식의 도덕-윤리적 접근 방식은 어딘가 김이 샌다. 다 줄이고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윤리를 고민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칸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혐오 발화를 했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위와 사고에 대해서 끊임없이 '개개인들이' 성찰하면 문제는 끝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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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의 혐오 발화에 대한 분석에 기반한 방법들을 개발해 내려고 한다. 물론 버틀러의 분석에 따르면 혐오 발화자들은 혐오 발화들의 '코퍼스corpus'에서 그 말들을 인용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은 "인용할 수 있는citable 발화이면서 동시에 인용을 초과하는 흥분하기 쉬운ex-citable 발화"이기 때문에 "모든 발화들은 화자의 통제를 벗어나"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버틀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적극적인 시도를 모색한다. 버틀러는 법적 접근을 매우 싫어하고 회의懷疑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모욕을 입힌 주체의 행위를 추적하고 사회적 모욕을 협상하는 장소로서의 특권을 법정에 부여하는 것은, 주체를 발화의 출발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론이 정확히 어떻게 모욕을 생산하는가에 대한 분석을 중단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버틀러의 질문에 요약되어 있다.
 
또한 버틀러는 윤리-도덕적인 접근 자체를 차라리 선호하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도 일종의 도덕적인 '검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회의를 보낸다. 검열은 단지 '권력'에 호소한다는 문제점을 야기할 뿐 아니라 복잡한 언어와 법, 그리고 담론의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버틀러는 오히려 어떤 '해체론적'인 입장에 기반해서 그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으로는 혐오 발화들에 대한 담론적인, 일종의 전복적인 '재인용', '재의미작용'으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혐오 발화들에는 일련의 취약성과 수정가능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만약 텍스트가 화행speech act적인 것이고 실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행할 수 있으며, 그 이전 행위에 반하게 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발화'는 외상적인 중핵(라캉적인 objet a)을 갖고 있으며(그러니까 excitable speech), 이 외상적 중핵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일종의 '반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여기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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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접근으로는 호사가들에 의해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 학파'로 분류되는 레나타 살레클의 것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6장). 살레클은 라캉주의적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혐오 발화와 인권의 문제를 함께 사고한다. 살레클은 버틀러와 일단 비슷한 분석틀을 갖고 있다. 살레클에게 혐오 발화들은 "통제될 수 있는 동시에 통제될 수 없"으며,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도 없다". 그러나 혐오 발화들은 일종의 외상적인 중핵을 건드리는 발화들이며, 그 외상적 중핵은 라캉적인 '실재'를 건드리는 것이다. '실재'를 건드리고 자극하는 것은 각 주체들의 고통과 공포를 자극하기에 일종의 '폭력'이 된다(성폭력sexual harassment에 관해 지젝을 포함한 몇몇 라캉주의자들의 독해도 이와 유사하다). 살레클은 일단 이 혐오 발화를 해결하기 위해 헤겔의 용어를 차용해서 윤리적인 접근을 검토한다.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륜성Sittlichkeit("습속들의 체계, 윤리적 삶의 체계")은 "공동체를 한 데 묶어주는" 것이자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칙이 된다. 이는 법률과의 관계에서도 "우연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독립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법률에 대한 대중들의 복종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레클이 보기에 이는 어떤 도덕적인 습속, 즉 헤겔적인 인륜성적 접근 방식으로는 '보편적인' 해결이 어렵다. 물론 법적 접근 또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법령', '인륜성' 모두 국가와 공동체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르게 체험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영역은 모두 투쟁의 영역이다. "누가 보편자를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그리고 또한 누가 모욕적인 말을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끊임없는 투쟁"인 것이다. 여기서 "인권"의 중요성(물론 통속적인 인권 독해와는 조금 다른) 이 대두된다. 살레클이 보기에 "전체주의적 체제조차도 폭력을 적법화하려는 의도에서일지언정 인권과 자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떤 인권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장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그리고 바라건대 민주적인 의미를 획득할 유일한 길"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즉 혐오 발화를 정신분석학적 윤리, 그리고 최근 대두되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인 독해에 기반해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뉴 레프트 리뷰>에 기고된 <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에서 보여준 지젝의 '인권'에 대한 독해와도 유사하다. 지젝은 랑시에르의 독해를 끌고 오면서, "인권을 정치투쟁의 우연적 영역과 별개의 비역사적인 '본질주의적' 피안으로, 역사로부터 면제된 보편적인 '천부적 인간권리'로 설정해서는 안되지만, 인권을 시민의 정치화라는 구체적인 역사과정에서 생겨난 사물화된 물신으로 간단히 도외시해서도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인권'은 전 정치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본래적인 정치화의 적실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언급하며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 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만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정치성의 정치학"과 협상 논리에 기반한 '행정-통치'로 정치를 환원하는 최근의 경향에 반대하는 지젝의 입장에 기반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언급할 기회가...)


물론 여기서 언급한 방식들은 나름의 적합성을 가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확신이 없다. 그래도 나에게 있어 혐오 발화는 끊임없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 문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있고. 어흑.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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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8/29 17:31

어제 버틀러 세미나에서 <모방과 젠더 비순종Imitation and Gender Insubordination>을 읽었는데, 버틀러는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Aretha Franklin의 히트곡인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을 언급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사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Feel Like"라는 글자일 것이다. '심적 동일시psychic identification'의 기제를 설명하면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In my view, the self only becomes a self on the condition that it has suffered a separation (grammar fails us here, for the "it" only becomes differentiated through that seperation), a loss which is suspended and provisionally resolved through a melancholic incorporation of some "Other." That "Other" installed in the self thus establishes the permanent incapacity of that "self" to achieve self-identity; it is as it were always already disrupted by that Other; the disruption of the Other at the heart of the self is the very condition of that self's possibility.

내가 보기에 자아the self는 오직 분리seperation("it ; 대문자 I"은 오직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구별화될 수 있기 때문에 문법은 여기서 우리를 저버리게 된다)와, "타자"의 멜랑콜릭한 통합을 통해서 보류되고 또 잠정적으로 해소된 상실loss로부터 고통 받았다는 조건 하에서만 자아a self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아 안에 정착한installed 그 "타자"는, 자기 동일성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그 "자아"의 영구적인 무능성을 확립한다; 말하자면 자아는 이미 항상 그 "타자"에 의해 분열disruption되어 있다; 자아 심장부에서의 타자의 분열은, 자아의 가능성의 바로 그 조건이다.

(...)

If incorporation in Freud's sense in 1914 is an effort to preserve a lost and loved obect and to refuse or postpone the recognition of loss and, hense, of grief, then to become like one's mother or father or sibling or other early "lovers" may be an act of love and/or a hateful effort to replace or displace. How would we "typologize" the ambivalance at the heart of mimetic incorporations such as these?

만일 1914년의 프로이트적 관점에서의 통합incorporation이, 상실된 사랑했던 대상을 보존preserve하려는 노력이고, 상실과, 따라서 애도의 인정을 거부하거나 연기하려는 노력이라면,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나 형제자매 혹은 이른 날의 "연인들"과 같은like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자(또는) 대체하거나 전치하려는 증오에 찬 노력일 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와 같은 모방적인 통합의 심장부에 있는 양가성(이중 의식;애증)을 "유형화"할 수 있을 것인가?


버틀러에게 "Feel like"라는 말은 이미 어떤 '모순'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그 자체로는 natural woman이 아니며, 누군가의(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럴 때에만 자신은 "마치" natural woman인 것 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항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인정의 '순간'에만 Aretha 자신은 '자연적인' 여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Aretha의 노래의 '그녀'는 이미 타자의 담론 속으로 들어와 있는 분열된 주체이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일종의 사랑 행위의 방식으로도 드러날 수 있고, 혹은 이미 증오를 함축한 행위일 수도 있다. 자기 동일성은 언젠가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담론 속에서 이미-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natural wo/man(남성과 여성의 메커니즘이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은 존재할 수 없고 온전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일종의 phantasm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려는, 버틀러도 말하고 있지만 정체성과 심적 동일시에 대한 "안정된stable" 유형화를 훼손시킬수 있는 정치적인 기획이다. 유형화하고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관찰은, 그것의 훨씬 많은 모순점들과 어려움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화'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유형화란 것은 "단순화simplification"인 것이며, 따라서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쉽게with alarming ease" 규제적인 요구조건들에 순응하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젠더와 섹스의 실체화에 저항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한 버틀러의 언급을 조금만 더 보자.

When Aretha Franklin sings,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she seems at first to suggest that some natural potential of her biological sex is actualized by her participation in the cultural position of "woman" as object of heterosexual recognition. Something in her "sex" is thus expressed by her "gender" which is then fully known and consecrated within the heterosexual scene. There is no breakage, no discontinuity between "sex" as biological facticity and essence, or between gender and sexuality. Although Aretha appears to be all too glad to have her naturalness confirmed, she also seems fully and paradoxically mindful that that confirmation is never guaranteed, that the effect of naturalness is only achieved as a consequence of that moment of heterosexual recognition. After all, Aretha sings,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suggesting that this is a kind of metaphorical substitution, an act of imposture, a kind of sublime and momentary participation in an ontological illusion produced by the mundane operation of heterosexual drag.

아레사 프랭클린이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고 노래할 때, 그녀는 우선 그녀의 생물학적 섹스의 자연적인 잠재성은, 이성애적 인정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문화적 위치에 참여함으로써 현실화actualized 된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녀의 "섹스"안의 무엇인가가, 이성애적인 장면scene 속에서 완전히 알려지고 성화(聖化; consecrate)된 그녀의 "젠더"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녀에게는)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실체essence 사이, 혹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이에는 어떠한 손상breakage도, 어떠한 불연속성도 없다. 아레사는 자신의 자연성이 확증되었다는 것에 매우 기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확증이 결코 보증된 것은 아니라는 것, 자연성의 효과란 오직 이성애적 인정의 그 순간의 결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에, 전적으로나 역설적으로나 신중을 기하는 것 같다. 결국 아레사는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고 노래하면서, 그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대체substitution이자 사기imposture 행위, 또한 이성애적 드랙drag의 세속적인 작동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론적 환상에의 숭고하고 일시적인 참여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버틀러도 잘 지적하고 있지만, 아레사는 자신이 natural woman이라는 점을 유보하고 있다(natural이라는 수식어도 섬찟하다. 자연적인 여성이 있다면, 비자연적인 여성을 은연중 또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이성애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식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라는 가사는, 어쩌면 우리 시대에 일반적인 이성애 '연애'가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 인정이 비록 '순간'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natural woman이 되는 것도 한 순간의 '빛'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조건들과 규제들을 인정하고 들어갈 때 비로소 이성애 연애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강간 수준의 성폭력을 행하는 남성들의 오래된 대사 중에 "오늘 밤, 내가 널 여자로 만들어 줄게"라는 섬뜩한 말이 있지 않던가? 따라서 이성애적 연애와 성폭력은 완전히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종의 정도와 맥락 속의 차이이지, 결코 완전히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레사의 노래는 그러한 이성애 메커니즘에 대한 훌륭하고 직관적인 관찰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에게 있어 드랙drag이란 우리가 버틀러에 대해 흔히 생각하고 오해하는 드랙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즉, 드랙이란 말을 들을 때 즉각 드랙 퀸이나 드랙 킹과 같은 (버틀러가 저항하는) '유형화'된 대상을 떠올리게 될 때와 같은 바로 그 드랙이 '아니라는' 것이다. 버틀러에게는 이성애 역시도 드랙drag의 한 효과에 불과한 것이며(다시 말하자면 드랙 그 자체가 아니라 '효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수행적performative으로 '구성되어' 가는 것이다. 어떤 내적 본질이나 기원도 아닌 것이며, 오히려 자신이 기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드랙이란, 기원이고 내적이고 참이고 실재적으로 간주되는 (실체화된) 모든 젠더의 "섹스"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 나가는 행위act가 된다.
 
물론 버틀러의 기획에 의문을 제시할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버틀러 자체는 푸코 식의 권력 담론ㅡ권력은 그 내부에 저항을 내포한다는ㅡ을 자신의 논의에 중요하게 끌어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의 해결책이자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도, 언뜻 보면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근본적이거나 혁명적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에는 버틀러의 주장에 심히 공감하는 편이다. 내가 보기엔 버틀러의 기획은 결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버틀러식의 기획이야 말로 체제 '밖에서' 사고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체제를 닫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유형화 된) 새로운 젠더, 새로운 섹슈얼리티를 백날 수백날 들고 와봐야 상징계는 그것을 또 다시 상징화하고 내부로 포섭해 들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윤리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상징계 내에서 유통되고 타자의 담론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이미 윤리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사라져버리게 된다. 예수의 죽음, 그것도 타자의 담론 속에 유통되는 순간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체 게바라가 요즘 유통되는 방식도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라는 상징계는 저항 마저도 내부로 포섭하고 있지 않던가. '인용 가능성citablity'이란 그만큼 무섭고, 또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유혹에 또 빠져들기 쉬운 것이다.

덧) 번역은 양모 쌤의 번역을 기본으로, 원문과 대조해서 내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약간 수정했음. 이 자리를 빌어서, 양 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_*
덧2) 버틀러는 확실히 영문을 보아야(물론 한글 번역본이 있어야 훨씬 편하다) 이해가 더 빠르고 명료한 것 같다. 흑.. <안티고네의 주장>은 읽을만 하던데, 정말 조현순씨는 '능력자' 인 것 같다;


Aretha Franklin 노래가 아니라 Celine Dion의 노래이지만, 한번 들어보실 분은 밑에 열어서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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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7/11 02:02

한 사상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또 깨닫고 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보통 마조히스트라고 누가 그랬다)

앨피에서 한창 나오고 있는 루틀리지 출판사의 <Critical Thinkers> 시리즈는 책 한 권당 한 사상가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맨 뒤를 보면 "~의 모든 것"이라고 하여 그 사상가의 저술은 물론 그 사상가에 대한 다양한 저술, 그리고 참고할 만한 문헌들을 소개해주고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되고는 한다. 내가 누구의 전공자도 아닌 이상 특정 사상가만 공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최소한 '깜'정도는 잡기에 적절한 수준으로 생각되기에 많이 수집해 두고(역간된 것 중 2개만 빼고ㅡ폴 드 만, 스튜어트 홀ㅡ모두 갖고 있다. 구입하지 않은 2개는 영 꺼림찍해서 안 샀다) 틈틈히 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상가인 보봐르, 크리스테바, 그리고 자그마치 버틀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세 권 모두 구입했다. 그런데 어제 갓 받아본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의 "버틀러의 모든 것"은 좀 특이했다. "'필수적인' 이론적 읽을거리"라는 파트가 따로 있는 것이다(보통 다른 시리즈물은 그냥 '읽든 말든' 수준의 권유에서 그치고 만다). <The Judith Butler Reader>의 편집자인 사라 살리Sarah Salih가 저술한 책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그마치 "필수적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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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엇이 있을까하여, 살짝만 훑어봤더니 이건 거의 인격모독 수준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보봐르의 <제 2의 성>(* 읽어야는데;;), 푸코의 <성의 역사>(* 이건 조만간 사려고 생각중..),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 <The Ego and the Id>, 헤겔의 <정신현상학>, 라캉의 <에크리Ecrits>(* 이건 번역 소식은 들었는데, 대체 나올 수는 있는건가; 번역이 엉망일거면 아예 나오지 않기를 바랄뿐),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물론 게일 루빈, 모니크 위티그, 크리스테바(* 땡스, 루틀리지!), 맥키논, 데리다 등 정신없이 많은 저술들이 "필수적인"이라는 이름하에 제시되어 있다. 물론 그 앞에 버틀러가 쓴 논문을 골라 놓은 것과, 버틀러 인터뷰, 버틀러의 저서 및 공저도 많은 양이 제시되어 있지만, 사라 살리는 "필수적인"것으로 제시한 것을 '필수적'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한 사람의 모든 사상을 날로 먹자는 것도 아니지만, 이건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닐까? 버틀러를 그나마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오려나. 버틀러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인 사람들은 당최 버틀러를 읽기는 읽은 걸까? 세미나를 하고 꾸역꾸역 원문으로 보려고 발버둥을 쳐도 자꾸 거리감만 생긴다. 왜 그렇게 당신은 멀리에 있나요. 이 쯤 오면 옷깃에라도 닿을 줄 알았더니, 당신은 왜 안드로메다로 훌쩍 날아가 버리신 건가요;ㅁ; 아니다. 이건 주디스 버틀러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라 살리가 버틀러를 독점하기 위해 독자들을 모욕하려는 음모임이 틀림없다 =_=;  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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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7/06 01:22

요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이론에 점점 더 강한 매력을 느낀다. 지금처럼 1주일에 한 번씩 버틀러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에도, 요즘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듯한 ‘수행성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버틀러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또한 유명하고 스타덤에 오른 ‘퀴어 이론가’로서 버틀러에게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세미나를 진행하고, 버틀러의 글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예전에 가졌던 생각들에는 많은 지각변동이 있었다. 그리고 버틀러는 한국에는 일종의 ‘시기상조’이거나 ‘적당치 않은’ 이론이라고 말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그런 비난에 동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버틀러가 지극히 절실하다는 생각만 강화될 뿐이다.

하나씩 따져보자. 일상생활에서 ‘새로 만나는’ 어떤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 ‘외모’가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놀라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우리는 그 사람을 카테고리화 하고, 그 카테고리를 통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판단한다. 물론 외모에는 여러 가지의 구성 요소가 들어갈 수 있겠으나, 거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성’이 될 것이다. 외모가 매력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판단은 그 사람의 섹스와 젠더의 일치 여부에 대한 판단을 이미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치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우리에게 어떤 ‘자연화’된 법칙으로서의 젠더 문법이 존재한다. 섹스는 ‘자연’의 영역이고 ‘과학’적인 것이라는, 그리고 그것에 어떤 의미가 덧붙여지는 것이라는, 그런 흔해 빠진 젠더 이론 또한 그런 젠더 문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이때부터 이런 젠더 문법을 강요 받아왔다. 나 같은 경우는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보면, “남자답다”라는 말을 나에 대한 일종의 모욕처럼 느껴왔다. 심지어 ‘아빠’를 닮았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 무척 기분 상해하고 짜증을 내고는 했다. 그건 초등학교 시절에도 그랬고, 대학 시절에도 역시 그러하다. 어릴 적에도 “대장부 같다”라는 말을 들은 적도 거의 없지만, 어른들이 흔히들 하곤 하는 인사치레로 그런 말을 들을라손 치면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와는 반대로 “여자같다”라는 말은, 차라리 나에게 불쾌하지는 않은 말이었다. 몇 가지의 의문을 떠올리게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차라리 기분이 좋았던 말이기도 했다. 실제로 비중을 따져보자면 “남자답다”보다는 “여자같다”라는 말을 더 많이 들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말 뒤에 이내 따라오는 것은 일종의 ‘사과’였다. 즉, “여자같다” 표현 자체가 나에게 ‘모욕’이 되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과 맥락들을 따져보면, 우리에게 얼마나 젠더 분류 체계가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이해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우선 “남자답다”와 “여자같다”라는 말을 잠깐만 뜯어보면, 섹스와 젠더를 일치시키려는 하는 욕망이 강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논리에 의하면 나는 생물학적 성이 남성이므로 ‘남자다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답지 못한’ 나는 마치 여자 ‘같은’ 남자가 된다. 나에게 “여자같다”라는 말을 한 사람들이 흔히 하곤 하던 일종의 ‘사과’도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언행이 나에게 ‘모욕’이 된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나는 그 말을 들으면 몹시 불쾌한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말 해놓고 정말 미안해하면서 몸둘 바를 몰라 하는, 그런 상황 자체에 대한 불쾌감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행위가 증명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뿌리 깊은 이분법적인 젠더 구분 의식과 젠더 문법이다. 그리고 이런 젠더 문법이야말로 곧 이성애와 동성애의 엄밀한 구분 및 동성애에 대한 온갖 사회적 테러와 폭력의 기본적인 인식틀이라고 생각한다.

약간 체험담을 통해 기술했는데, 물론 버틀러라면 이런 ‘자전적’인 어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에게 여기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위안감을 부여할 것이다. (Butler, Preface of Bodily Inscripsion, Performative Subversions)” 물론 텍스트는 분명 “주체를 탈구dislocation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개인적인 체험을 여기에 쓰는 동시에,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텍스트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안도감’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젠더 문법 하에서 ‘알려질 수 있는’, ‘언어화 되고’, ‘이해할 수 있는intelligible’한 주체가 이것을 쓰고 있다는, 그런 안도감이다. 버틀러는 또한 자신을 레즈비언이라 칭하는 그런 지배적인 경향에 대해서,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레즈비언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닐 수 있다(그것의 밖에 있다)”라고 말한다. 글을 쓴 주체를 발견하려는 끈질긴 시도, 동시에 그 주체를 ‘특수화’함과 동시에 게토ghetto화하고 분리segregation하려는 유혹은, 결국 우리들의 ‘자연화’된 젠더 문법에 충실히 따르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버틀러를 ‘퀴어 이론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버틀러가 지속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것을 버틀러에게 역으로 뒤집어씌우는 무지몽매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자꾸 ‘나’를 등장시키는 것은, 내가 버틀러를 좋아하는 이유가 나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경험 속에서만 섹스와 젠더가 ‘자연화’되어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 경험 속의 숨 막히는 젠더 문법 속에서 숨을 좀 트이고자 하는, 그런 나의 강렬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버틀러 또한 “젠더를 탈자연화하려는 끈질긴 노력은, 성에 대한 이상적인 형태학에 함축되어 있는 규범적 폭력에 대항하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일상적이고 아카데믹한 담론들에 의해 형성된 자연적이거나 추정적인 이성애에 대해 만연한 가정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버틀러는 진정으로 섹스/젠더/섹슈얼리티라는 (오늘날 성 이론에서 공식화된 것으로 보이는)위상학적 질서에게 조차 근본적인 질문을 마구 쏟아 붓는, 거의 유일한 학자로 보인다. 그렇기에 버틀러는 많은 이들에게 거부되기 쉬울지도 모른다. 버틀러를 '여성', '레즈비언', '퀴어 이론가'로 분류하는 젠더 문법 체계 속에서는 버틀러를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외상적인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난감한 경향에 대해서 저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전복의 가능성과 저항의 가능성에 조차도, 언제나 항상 ‘~ing’를 추구하며 기존의 ‘적의 방법’을 거의 참고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학자로 보인다. 그렇기에 버틀러는 복잡하고 어렵고 또 난해하다. 원문을 읽는 것도 물론 쉽지 않고, 번역하고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도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나 나에게 반드시 버틀러는 필요하다. 백날 지적해봐야 항상 ‘식상한’ 지적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자연화’된 답답한 젠더 세계를 토악질 하지 않으며 숨 쉬고 살아가는데 절실한 거의 유일한 담론이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 몇 년간은 버틀러의 팬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블로그에도 잘 정리가 되는 대로 꼬박꼬박 올리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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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버틀러
독서노트 / 2007/07/04 23:57
Judith Butler, Preface of Bodily Inscriptions, Performative Subversions
세미나 번역문에서 발췌.

<젠더 트러블>을 읽은 평론가, 친구들의 이목은 모두 책의 스타일의 난해함에 집중되었다. 아카데믹한 기준에 따라 “대중적으로” 쉽게 소비되지 않는 책을 발견한다면 이는 분명 이상해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괘씸한 일일 수 있다. 복잡함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닐때, 당연하게 간주되는 진리를 문제 삼는 데 도전이 가담하게 될 때, 그러한 진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억압적이게 될 때, 복잡하고 도전적인 텍스트를 읽으려는 독서 대중의 능력과 열망을 과소평가하는 우리의 방식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놀라게 될지 모른다.

나는 스타일이란 복잡한 영역이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목적에 따라 일방적으로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일찍이 사르트르에 대한 책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분명 스타일을 연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소용이 있을 스타일들은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문법이나 스타일 어느 것도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지적인 발화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습득하는 것은 자상하게 정상화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고 그 경우 순응하지 않는 것의 대가는 지성 자체의 상실이다. Drucillla Cornell는 아도르노의 전통 안에서 다음을 내게 상기시킨다 - 즉 상식엔 급진적인 것은 없다는 것. 문법이 사유에 강요하는, 즉 사유가능한 것the thinkable 자체에 강요하는 강제를 인정한다면, 표준화된 문법이 급진적 시각을 표현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법을 비트는 정식들, 혹은 명제적 의미의 주어-동사 자격에 암묵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정식들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짜증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정식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일거리를 생산해주고, 때로 그들의 독자들은 그런 요구에 감정이 상할 수 있다. 공격받은 자들은 합법적인 요청으로서 “평범한 말하기”를 주장할까? 혹은 그들의 불평은 지적 삶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치에서 나오는 것일까? 언어학적 어려움에 대한 그런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어떤 가치가 과연 있는 것일까? 만일 모니크 위티크가 주장했듯이 젠더 자체가 문법적 규범을 통해 자연화된 것이 사실이라면 가장 근본적인 에피스테메적인 층위에서의 젠더 수정alteration은 부분적으로는 젠더를 수여하는 문법과의 경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명석성lucidity에 대한 요구는 표면상ostensibly “분명한” 시각을 운반하는 책략을 망각한다. Arital Ronell은, 닉슨이 국민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는 완벽히 분명하게 말해보겠소”라면서 계속 거짓말을 한 순간을 생각해낸다. “명백함”의 신호 아래 돌아다니는 것은 무엇이며 투명함의 도착이 고지되었을 때 비판적인 의심을 전개하지 못함으로써 치르는 댓가는 무엇일까? “명백함clarity”의 의정서protocol(*나는 protocol의 뜻은 컴퓨터 용어적 의미에서 생각하고 싶다. TCP/IP와 같은 컴퓨터 문법을 protocol이라 하는데, 이런 특정한 통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용자간 어떠한 커뮤니케이션도 불가능하다.)는 누가 발명해내고 그것은 누구의 관심에 봉사하는가? 모든 의사소통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으로서 편협한 표준으로서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에 의해 폐제되는 것은 무엇인가? “투명성”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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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스피박Spivak 의 말도 약간..

요즘에도 사람들이 내게 "오, 스피박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어!"라는 케케묵은 비난을 퍼부을 때면, 난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좋다. 당신에게, 오직 당신을 위해서, 단음절로 된 문장으로 대답하겠다. 그러면 당신은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단음절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평이한 글에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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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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