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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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5 국수 (백석)
  2. 2010/03/08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에게
문학 / 2010/12/15 20:48
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녚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생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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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국수, 백석,
문학 / 2010/03/08 22:54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_백석,「북방에서-정현웅에게」中
 
이 부분을 두고 백석 연구자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했다고 했다. '민족주의' 국문학자들은 3행, 즉 "숭가리를"에 마침표를 찍어서 1행의 "떠났다"를 서술어로 간주했다. 시의 화자는 비록 떠났지만, 숙신이나 여진, 요, 금 같은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민족사'의 일부인 부여와 발해를 "배반하지"는 않았으니 백석을 '민족문학사'의 일부로 넣으려는 학자들로서는 그게 훨씬 편이로웠을테다. 화자가 "배반"한 것은 고작 "범과 사슴과 너구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지금 읽고 있는 백석 연구자의 해석은 이보다 더 한걸음 나아간다. 단지 추정되었을 뿐인 유사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나'를 무려 고구려와 동일시한다. 잠시 아연해지고.. 아 어떻게 이 시를 그런식으로.. 부여까진 그렇다 쳐도 발해, 여진, 요, 금은 어쩌고? 그런 역사학적 해석을 뛰어 넘는 훨씬 아름다운 시인데.. 책 전반이 다 재밌다가 마지막 장에서 삐끗해버렸다.
 
한국을 무려 반만년 역사로 보려는 국가민족주의적 국사학의 움직임탓에, 한국에서 근대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말하는 건 과장해서 말하면 바보가 되어버리는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모든 역사 서술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국에서, 아니 동북아에 있어 통용되는 상식은 그렇지 않나?
 
물론 이건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고작 스물 세살에 걸출한 논문을 썼지만, 네이션의 산물인 '사적 언어학'이 태동하던 프랑스에서의 교수자리를 고사해버리고, '중립국'인 스위스의 작은 대학교에서 평생 책 한권 제대로 내지 않았던 소쉬르를 생각해보면. 소쉬르가 남긴 강의에는 네이션 언어학에 대한 경계심이 녹아 들어있다고 했다.

백석이 지금 한국에 살았다면 진작에 "배반하고" "떠났"을거라고. 백석의 저 시는 단지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노래로 바쳐져야 해.

시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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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백석,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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