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3/10 문학적인 윤리? 윤리적인 문학?
  2. 2008/11/24 사랑의 변주곡
  3. 2008/04/04 문학에서 성을 다루기 (8)
  4. 2007/04/22 공지영씨에 대한 비평에 대한 비평 (2)
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비앙

사랑의 변주곡

문학 2008/11/24 20:44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의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1967. 2. 15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 의심할 거다! / 복사씨와 살구씨가 /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위에서 김수영 시인이 말한, '그 날'이 올까?, 했던 의구심을 접어두고, '그 날'이 지금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던, 지난 날.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불란서 혁명의 기술 /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지난 날..

그냥 '지난 날'이라고만 추억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참 싫은(혐오스럽기도 한) 요즘..


정말, 당최 내가 어찌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_-a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에게  (0) 2010/03/08
도가니  (0) 2009/08/15
사랑의 변주곡  (0) 2008/11/24
To read in the morning and at night  (0) 2008/03/17
연기 -김수영  (0) 2008/02/21
Posted by 비앙

문학에서 성(性)을 다루는 건 정말 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마나 한 소리 ^^;)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어제의 한 에피소드 때문에. 메리 롤랜드슨(Mary Rowlandson)의 "The Sovereignty and Goodness of God"을 다루는 수업 중. 이 작품은, 17세기 미국의 퓨리턴 이주민 공동체와 아메리칸 원주민 사이의 전쟁 속에서의 체험담을 다루고 있다. 뉴 잉글랜드에서는 최초의 여성 작가가 남긴 작품. 퓨리턴 이데올로기가 아주 담뿍 녹아들어가 있는 텍스트다.

교수 : 왜 롤랜드슨이 자신의 포로 체험기(captivity narrative)를 시간적 순서가 아닌, 공간적 순서로 기술했는지 알겠나?

학생들 : ..... [자기는 답을 알고 있으니 맞춰보라는 식의 퀘스쳔은 던지나 마나 아닙니까요?]

교수 : 대개 일기는 날짜 순서를 따르잖아. 근데 이 작품은 왜 공간 순서로 1st remove, 2nd remove 이런 식으로 기술했냐는 말이지. 나는 이게 어떤 근본적인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서 오는 기술 방식의 차이는 아닐까 생각하는데. 누구 한 번 말해봐요. [헉!!!!!!!]

학생1 : 저는 그 차이는 그냥 위급한 포로 상황에서 시간적 감각이 없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수 : 그 말도 맞을 순 있는데, 누구 다른 생각하는 사람?

학생2 : 저는 원래 여성들은 공간적 변화에 민감하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남성들은 수렵 생활을 했고 여성들은 채집 생활을 했잖습니까? [이쯤에서 피식 웃어버렸다. 아, 난 진짜 농담인 줄 알고...] 아무래도 그러다보면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주변 공간 변화에 더 민감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학생3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교수 : 음음. 그렇죠. 사실 나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다르다는게 아니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는거죠. [이쯤에서 내 표정은 썩어 들어가고...] (짐짓 검열 작동) 아, 그렇다고 이게 무슨 성차별주의는 아니에요. 허허허. 성차별주의는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공평한 분배를 할 때 생기는거고. [오오... 교수님 잘 나가다가 왜 이러시나이까 ㅠㅠㅠ] 나는 어떤 유전자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헉!] 어떤 생활 습관이 우리의 유전자에 기록이 되어서 그게 내려오지 않느냐는 거지. 아까 수렵과 채집 생활을 얘기했는데, 그런게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남아서... @#$@ [중략] 어쨌건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텍스트도 이런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지 않냐는거지.


이 놀라울 정도로 안습인 에피소드는, 오늘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생각나는대로 각색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오늘 다 같이 읽어 갔어야 할 텍스트에 보면 인종주의적 '타자화'의 일반적인 전략을 요약해 놓은 부분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집단간 차이를 생산하고 강조한다는 것. 이것도 사실은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이런 설명 문구는 오늘 수업에서 한 저 에피소드랑 완전 충돌되잖아욤! 게다가 오늘 읽을 텍스트는 교수님이 직접 쓰신 글 아닙니까요 ㅠㅠ 헌데 남성과 여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심지어 유전적으로 다르다니요. 무슨 근거로? 대체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신화적인 태곳적 이야기를 들고와서 성차sexual difference를 정당화 하시다니요!

사실 문학에서 성(性)을 빼놓으면 서사의 진행이 턱- 막혀버릴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서사들은 성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물론 인종, 계급 등의 범주와 동시에 작동한다). 때문에 문학을 공부할 때 성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문학을 다룰 때 이렇게 탈역사적으로 성을 다루기 쉽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긴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뻘줌한 안드로메다 점프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성차는 많이들 알다시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태곳적에 남자는 수렵 생활을 하고 여자는 채집 생활을 했다... 따위(-_-)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란 말이다. 성차는 기본적으로 제도의 효과다. 특정한 제도 내에서 생산되는 그 무엇이라는 얘기.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 성차는 어떤 제도 내에서 반복/ 인용/ 수행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지, 어떤 '구조' 내에 깊숙히 내재하고 그 구조 자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그 무엇으로 볼 수 없다.

위 에피소드에서의 성차에 대한 이해는,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 +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무관심 혹은 불능에서 기인한다. 성차는 사회적인 층위에서 규범적으로normatively 개인들에게 영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차를 다룸에 있어 그 사회성, 그 사회적인 맥락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성과 그 작품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성과의 상상적 조우라는, 하나의 사건을 작동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문화적 맥락이 다른 지역의 작품을 읽을 경우엔, 그 차이란 더 크다면 크지 적다고 보기엔 힘들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의 그 작품을 읽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만나는 과거는 어디까지나 제 현재의 '투사'의 효과이다. 즉 과거 역시 문학 작품을 읽음과 동시에 '구성되고' '생산된다'(물론 이미 정해지고 유통되고 있는 역사 담론의 어떤 규칙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지만). 그런 점에서 '상상적'이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우리들의 맥락과 우리들이 속해 있는 제도의 틀을 벗어나서는 문학 작품을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에, 혹은 상징계에ㅡ두 개념이 같은 말은 아니다ㅡ등록register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을 통과하지 않는 정치학은,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다. 쓸모가 없다기 보다는 제 목적에 봉사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로 이런 맥락성을 잊어 버리고, 문학 작품을 쉽게 '탈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완전히 자기 맥락에서 전유해버리거나, 혹은 완전히 현재와는 다른(이해할 수 없는) 어떤 그 무엇으로 탈맥락화 시켜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갑자기 모든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떼어내고, 위의 에피소드처럼, 어떤 특정한 속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악은 악을 지각하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보면 재귀적인reflexive 규정이다. 자기를 참조하면서, 혹은 자기를 지시하면서, 담론과 규범norm을 생산해내는 게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본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해내고 유포하지만, 그 과정에서 되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드러내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문학에서 성을 다루면서 빠져버리기 쉬운 함정인 셈이다.

게다가 언어가 주는 수행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화행이론이 말해주는 거지만, 모든 말은 그 자체로 가치 중립적이고 '진술적인 것'은 없다. 모든 진술은 동시에 특정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순전히 정치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무슨 관념이 발화되고 유통되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 관념은, 무수한 행위자들 사이의 '인용' 행위라는 매개를 타면서, 동시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때문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순간 이미 어떤 정치가 발생하는 셈이다. 그 발화된 말로 인해 그 말을 보증해주고 그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른 맥락들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하니까. 그 맥락들이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말을 아예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그 수업은 성-근본주의, 혹은 성차별적인 정치로 화끈 달아 올랐던 셈이다..


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지만, 적어도 인종주의를 공부하는 수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성립할 수도 없는 말이지 않은가. 나와서도 안되는 말이고. 사실 이런 점은 문학 교수직을 맡고 있는 내가 친애하는(정말이다) 그 교수님이 더 잘 알고 있을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엉뚱한 '유전자'까지 나오니 나는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다규... 저절로 성차 근본주의에 토대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만 셈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학생 1,2,3를 보면서 나는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답'을 말했다고 간주된 2번 학생님.. (아 이 계몽주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만주의의 유산과 낙관주의  (4) 2008/04/23
2MB 정부의 놀라운(?) 통치 전략  (4) 2008/04/19
문학에서 성을 다루기  (8) 2008/04/04
Johan Galtung 실망...  (5) 2008/03/19
독신이라는 정체성(진행중)  (0) 2008/03/19
Posted by 비앙

들어가며

오늘 구입한 이번 한겨레21에는 “공지영은 한국 소설의 미래인가”라는 제목의 기획이 있다. 물론 공지영씨가 문단 비평계에서 은근히 ‘왕따’임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나, 이렇게 ‘비난’받는 글은 처음 봐서 약간은 충격이었다. 그 기획에서는 공지영씨의 소설을 정말 신랄하게 비난하는 정문순씨의 비평문 하나, (옹호론이라고 기자가 밝혀놓고) 덜 적나라한 비난을 하고 있는 이명원씨의 비평문 하나, 이렇게 두 개를 게재했다.

물론 공지영씨는 이제는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지 않게 된 작가다. 특히 예전에 무슨 신문에 실렸던 인터뷰를 읽고는 거의 질려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2006년 여름에 나름대로 진행했던 <<여성작가 소설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입했던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별들의 들판>,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이 아직 책꽂이에 꽂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의 기준에서는 그녀의 소설들이 이들 비평가들이 이정도로 ‘혐오’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한번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명원, <위안의 서사 문학적 대중주의>

이 기획의 기자는 이명원씨의 비평문을 ‘옹호론’이라고 생각한 것 아니면 애초에 청탁할 때 결과에 상관없이 ‘옹호론’을 써달라는 계획을 짜놓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명원씨의 글은 그다지 ‘옹호적’이지 않다.

여기서 이명원씨의 논의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물론 공지영의 소설은 문제가 많은 편이지만, 한국 소설계의 반 인간주의라는 특성에 대한 반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 문학적 대중주의의 현재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지영씨의 소설들, 특히 최근 성공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안적 서사”가 대중에게 폭 넓은 호소력을 제시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즉 공지영씨가 “한국 문학의 중요한 현재성”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녀적 감수성”, “센티멘털리즘”으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 문단 비평계의 주류적 해석을 감안해서인지, “문학적 대중주의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이라는 ‘조건문’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혹은 이 글의 필자가)‘대중주의의 실현’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이 비평문에서 보여주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들은 쓸모가 없어지는 것 일 테다. 게다가 비평문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에서 공지영씨에 대한 문단계의 비난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문체는 “~고 한다” 식이다. 남에게 ‘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책 없는 선량한 태도”라는 소제목을 보면 이명원씨가 ‘정말로’ 하고 싶어 했던 말은 역시나 공지영씨에 대한 비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가 앞에서 ‘옹호론’이라고 소개했던 게 정말로 무색할 정도였다. 게다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고 글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대중주의”라는 언표는, 한국에서는 결코 ‘긍정적인’ 기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명원씨의 입장은 분명해진다.

나는 일단 이명원씨의 비평은 ‘무책임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위에 언급했듯 그의 비평문의 상당한 부분은 남에게 들었다는 식이다. 읽다보면 정말 다른 수많은 비평가들의 생각인지, 이명원씨의 생각인지 알 수 없는데, 결국 끝에 가면 “~라는 지적은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식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결국 ‘남의 의견’인 것처럼 포장하고 소심하게 그 뒤에 숨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해 놓고서도, 비평문의 대부분은 그러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나름대로 ‘옹호’한다고 기록한 부분은 정말 몇 줄 되지 않아 오히려 읽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다. 따라서 나는 그가 ‘남의 얘기’처럼 써 놓은 것도 역시 그의 고유한 주장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물론 나는 다른 사람의 분석을 가져오는 것 자체를 ‘무책임’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일종의 행위일 뿐이다. 다만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 만 부 이상이 팔려나갈 인기 잡지의 지면에 글을 게재하고자 했다면, 그는 좀 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공지영씨를 ‘옹호’함으로써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문단 비평계의 ‘원색적 비난’이 걱정되었다면, 아예 이런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자신조차 공지영씨가 싫었다면, 아예 좀 더 떳떳하게 드러냈을 일이다.

게다가 그는 공지영씨의 소설을 “대책 없는 선량한 태도”라고 평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대책 없는’ 그녀의 소설과 영화에 열광하는 독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도 잃지 않는다. 그는 특히 <우행시>에서 나타나는 “사랑에의 몰입은 ‘연민’의 극대화에서 발생하는 갑작스런 선택”이라고 말하며 그것이야 말로 “대중적 환호를 이끌어내는 주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저쪽 한 켠에서는 “연민이 아닌 인간의 존엄으로 대상인물을 상승시키려는 의지가 부족한 채, 오히려 대상을 타자화 함으로써 소설가의 부채의식이 휘발되는”것이라고 말한다. ‘연민’은 대중적 감상이고 대중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며, 반대로 자신들은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소설가들 혹은 비평가들이 된다. 또한 대중들은 판타지와 개인에 대한 공감에 매몰되고 이것들에 환호하는 반면, 자신들은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의 척결을 외치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것들이 ‘배워먹은’ 비평가들이 쉬이 갖는, ‘뭘 모르는’ 대중에 대한 ‘경멸의식’ 그 자체가 아니면 또 무엇일까.


정문순, <통속과 자기연민, 미성숙한 자아>

기자는 정문순씨의 비평을 ‘비판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단 기획의 취지에는 잘 부합하는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비평의 요지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공지영의 소설은 현재적이지 않고 과거에 들러붙어 있으며, 상처받은 영혼들의 과잉 자의식을 드러내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이 강하며, ‘순진’하고 미숙한 어린 자아의 넋두리” 정도로 할 수 있겠다. 한 작가의 소설 세계, 더 나아가 90년대 여성 작가들에 대한 신랄하고 적나라한 (내가 보기엔 정말 대책없고 처절한)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나는 그의 비평의 일부 구절에 공감한다. 예컨대 “약자에 대한 배려와 자기 성찰이 빈약한 한국사회”라든지.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글은 격한 분노와 짜증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에 대한 격한 반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이러한 그의 비평이 걷잡을 수 없이 짜증난다. 특히 “그녀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극심한 피로에 지친 내면을 위로받고 싶을 뿐 세상과의 정면 승부를 감당할 수 없는 독자들과 출판시장의 요구에 부응”한다고 결말을 내리는 부분에서는 화까지 치밀었다. (어쩜 이렇게 ‘멋지게 잘’나셨을까.) 나는 하나하나 그의 구절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에너지가 없다. 솔직히 거의 대부분의 표현들을 정리한 다음에 코멘트를 달고 싶지만, 그냥 대표적으로 하나만 언급해 보겠다.

“과거에 들러붙어 벗어나지를 않는다.”라는 그의 말부터 시작해 보자. 일단 나는 소설들이 왜 과거에 들러붙어 있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과거에 들러붙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공지영씨의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가 말하듯 “불의의 시대에 이상과 정의로움의 염원으로 피끓는 청춘을 세상에 바쳤으나 보상받지 못한 삶,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광부와 간호사들, …… 여성 가사 노동자들 등 경제 성장기의 이면을 떠받친 삶들, ……사형수들,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에 멍이 든 여성들”의 삶들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가 말하듯 “엄정한 시선”을 견지한 채로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엄정한’ 시선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그 ‘엄정한’ 시선은 매우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통찰인 듯하다. 그는 반복적으로 “고집스런 어린아이의 투정”, “푸념하는 듯한 미성년의 목소리”, “쉽게 토라지다가 이내 화해하기 일쑤”, “조숙한 여자아이의 수준의 인식”, “미성숙한 자아” 라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미 ‘성숙/미성숙’의 이분법의 은유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목소리들 자체를 ‘부정’한다. 그것들은 “신파조”이고, “감상의 과잉 분출”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자의식의 과잉”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관찰가능 한 것들에서 출발하는, 경험적이고 또 성찰적인 모습을 지극히 무식하고 단순한 구도로 폄하하고 있다. 그의 논조는 “눈물 따위는 가치가 없다, 다만 강한 세대 인식, 그리고 실천 의지만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다!”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그의 글은 차라리 처절하고, 피 냄새까지 날 정도이다.

그는 ‘위안’과 ‘공감’의 힘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하다. 그가 보기에 그것들은 전부 ‘어린 아이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모든 눈물과 연민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 전부를 어린아이의 ‘순진함’이라고 폄하하는 그의 시선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위안’, ‘공감’은 실제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들을 양분으로 삼고 살았으며, 한편으로 그것은 지극히 ‘제대로’된 방식으로 우리 삶에 편입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가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보살핌’의 윤리라든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등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지극히 부족한 것들이 아니던가. 또한 그것들이야 말로 오히려 타자에 대한 윤리의 한 형태가 아니던가. 그가 경멸하는 ‘위안’과 ‘공감’은 흔히 발견되는 ‘타자에 대한 무시’와는 분명히 다른 태도다. 여기서의 이 ‘무시’는 대체로 타자에 대한 ‘경멸’을 내포한다. 타자에 대한 거리를 선명하게 견지하는 것과는 반대로, 위안과 공감은 타자에 대해 (어느 정도) 열려있는 자아만이 가능하다. 나는 이 ‘경멸’과 ‘무시’, 그리고 ‘위안’과 ‘공감’을 선택하라고 하면 차라리 후자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또한 나는 오히려 그가 그토록 경멸하고 있는 여성작가들이야 말로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라운 ‘성찰’과 ‘치밀함’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단순한 ‘신파’로 경멸당하기에는 그러한 인식의 깊이를 갖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경험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은 그가 말하듯 “미성숙”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성숙한 자아’야 말로 과거에 직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언어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냉철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현실과 과거에 거리를 두는 것은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감정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과거를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남-독자’들에게 공감을 살 정도의 글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최근의 '봉사'라는 것에 대한 나의 감정에서 비롯한 것인데, 나는 물론 그 공감이나 연민, 그리고 위안이라는 것들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나는 타자에 대한 윤리는 그것들로 붙박음질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문순씨의 ‘투명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투박한’ 주장에 의해 재단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것들이 과연 ‘미성숙’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판단을 보류해야 하며, 더 나아가 이 성숙/미성숙의 은유 자체에 대한 질문이 던져져야 할 것이다. 덧붙여 내가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드세지 말고 세상과 맞장뜨지 말아야 하고 고분고분하며 세상과의 불화를 감당하기보다 쉽게 물러서고 자기연민에 탐닉”한다고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여성 작가와 대중적인 것에 혐오를 감추지 않는 비평가는 또 오랜만이다. 오히려 솔직한 것이 고마울 정도로.
 
나는 오히려 거대서사에 매몰된 정문순씨 같은 사람보다 일상의 정치적 투쟁과 좌절 등을 그린 공지영씨의 소설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여성 작가들에 대한 혐오와 ‘공감’, ‘연민’ 등에 대한 경멸은, 강력한 ‘근대적 남성 주체’의 것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주체와 자아들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은 이미 ‘성숙’한 것처럼 묘사하는 점에서는, 그가 그토록 비난하는 ‘나르시시즘’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르시시즘 자체가 비난 받아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특수한 한국적 문화현상.)


나가며

나는 공지영씨에 대한 문학 비평계의 평론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하다. 물론 엄청나게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리고 문학 비평계의 남성 중심성에 대해서는 듣어오기는 했지만, 문학 평론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없이 정말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예전에 들은 바로는, 남성 작가들의 소설 비평을 여성 작가가 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특히 그것이 ‘비판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고 한다. 반면 남성 작가나 비평가가 여성 작가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은 쉬운 것이며 일상적이라 한다. 이렇게 생물학적 남성들이 바글대는 문단에서 생물학적 여성 작가와 비평가가 설 영토는 넓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오히려 공지영씨의 ‘성공’을 ‘축하’하고 싶고 환영한다. 또한 그녀의 소설을 꽤나 갖고 있고,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재미있게, 또 한편으로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정말 ‘옹호’하고 싶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이런 ‘경멸’과 ‘혐오’로 가득한 ‘반 대중적’ 태도에 대해서는 언젠가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비평가들의 태도에 대한 ‘반발감’ 때문에 글을 다다닥 두드린 것이니 말이다.

Posted by 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