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 정황의 차이가 그 책읽기의 차이를 부른 것이리라 생각한다." (89)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96)


생애 말년에 쓴 일기를 엮었다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아저씨'의 이미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배는 볼록도 아니고 불룩하게 튀어나와 늘어졌으며 목과 턱이 구분되지 않아 살집이 두둑하지만, 다리는 몸집에 비하면 얇은 그런 아저씨.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고 유행 한참 지난 고지식한 양복을 입으며 구두 역시 마찬가지다. 셔츠는 늘 꼭 윗단추까지 모두 잠그기에, 접시 위에 얹힌 돼지 머리를 상기시킨다. 바지는 늘 배바지다. 손목엔 금시계. 양말은 흰색이거나 검정색인데 늘 종아리 중간까지 올려 신으며 무좀 치료를 위한 발가락 양말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머리에 든건 많은데 그 학식이 땀으로만 배출되는지 봄 중순부터 가을 중순까지 몸을 움직일 때는 늘 땀을 흘리며 행여 식당에서 기름기 둥둥 떠있는 매운 찌개를 먹을 땐 티슈를 한통씩 써버리기 마련이다(그렇지만 맵고 짠 찌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산에라도 올라가서 찌개를 끓여 먹다가는 그 자리에서 나무아미타불 할지도 모른다. 물론, 젊었을 때엔 클레릭 이미지였을수도 있다.

책 읽기가 단지 책 읽기가 아니라 상황 읽기라는 그의 말, 그리고 사유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내 육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물론 그의 말에는 어폐가 좀 있다. 육체는, 어떤 초유기체적인 '나'가 있어서 '내'라는 소유격 명사를 통해 소유할 수 있는 대상(문법의 환상)이 아니라, 그냥 나 자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한국 남자 지식인들이 그랬고 그래왔으며 지금도 그렇듯이 정신주의자였던 셈이다.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김현은 데카르트 흉내를 내고 있지만(생각하다가 생각에 도달한다? 이 얼마나 @#$!한 표현인지), 의미심장하게도 뒤에 인용한 문단에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사회적 맥락의 냄새를 풍긴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많이 안좋았다고 한다. 누구나 말년이면, 별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상 건강이 안좋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육체)를 둘러싼 관계의 질서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가피하게 의존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건강한 그의 동료와 친구들이, 건강이 악화된 그를 어떻게 배려하고 도와주는지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앞서 인용한 96쪽에서 여기에 따오지 않은 내용을 보면, 젊었을 적 그의 육체는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을 때엔 육체가 그런 사고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적, 합리적, 비의존적 <사유>라는 환상은 건강한-이성애-개인-남성-육체에 의해 지배되고 관장된다. 그건 하나의 문화적 각본일 것이다. 그 환상이 생산하는 글 역시 어떤 육체 조건에 기반한 것이리라. 그런 각본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진다는 건 상당한 불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바치는 '후배'의 말을 보면, 그 후배 역시도 이 불운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자신의 육체적 징후들을 통해 몸 속 깊이 번져가는 죽음의 증식을 보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아무도 예측을 못한 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깊이, 그 응시와 사유의 궤적들을 글로 드러내왔었다."

그에 반해 시인 김수영은 좀 더 명민하다 할 수 있다. "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낙타과음(駱駝過飮) 중에서) 어떤 사람이 창작에 몰두할 때, 그 사람의 몸을 한 번 보자. 그는 빼어난 머리와 빠른 손으로 창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온 몸으로 창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뛰어난 비평가와 뛰어난 작가의 차이는, 이런 지점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서부터 나타나는게 아닐까?


여하간 그의 책은 신기하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지금은 전혀 알 수도 없고 거론되지도 않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 작가가 수두룩 하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100년은 갈것 같은데.. 이 책을 보니 역시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김현은 또 이렇게 적었다. "르네 샤르가 죽었다. 이제 대가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가보다." (148) 그러나 대가들은 늘 존재했고, 얼마 전에도 우리는 여러 대가를 떠나보냈다. 대가들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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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막 읽기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은 '현상학적 사랑관'을 보여준다. 사교 모임 같은 자리에서 자기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사교계의 불량품"들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한편 의외성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접근해야 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이 아니라, '그 같은 사람이 (내가) 이럴 때 이곳에 나타나다니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인 셈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은 '그'와 '멋있음' 사이에 수없이 깔린 우주적인 연결고리를 사랑한다. 이는 두 단어 사이의 공간을 넓히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엔 오로지 우연 뿐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도 인식으로 남아야 한다.
 
이러한 사랑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얼까? 일단 '낭만적 사랑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울 메이트'에 대한 열망, 하루키 단편 소설의 표현에 따르자면 "100%의 여자 아이"라든가 하는 식의 완벽함에 대한 희구가 늘 존재한다. 또한 지금 내가 마주하는 모든 비루한 것들 너머에 진정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랑 그 자체도 유예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나타났다고 믿게 되는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기꺼이 투기(投己)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도 존재한다. 최상의 경우에 다다랐을 때, 낭만적 사랑관은 현상학적 사랑관과 반대로 '그 참 멋있어'라는 문장과 만난다. 이는 '그'와 '멋있음' 사이의 우주를 축소하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에 필연의 질서가 비집고 들어온다. 낭만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 곧 존재가 된다.
 
나는 이 두 극단 어디에 서 있을까? 아마도 고원원과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과 유사한 유형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직한 일일 것이다)


어떤 작가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단점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누군가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의 단점을 마음에 두고 동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한때 매력을 느꼈던 사람에게서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매혹이 곤혹이 되고, 진담이 부담이 되고, 열정이 치정이 되고, 환상이 환멸이 되고, 사랑이 사죄가 되고, 진실이 진부가 되는 순간이다.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오로지 인격수련이다. 이 인격수련은 어쩌면 윤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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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사실 담배에 불을 붙일 때까지만 해도 아주 많은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목이 쓰라리고 기침이 나오고 눈이 매워지면서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그런 부작용들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담배의 첫 모금을 빨아들였을 때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워온 사람처럼 담배연기가 쑤욱 몸 안으로 들어왔다. 순하고 부드럽게,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그때 많이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쉽다니, 이렇게 별거 아니었다니……. 마음에서 어떤 벽 하나가 툭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편견과 관습과 자아의 작은 벽이.

김형경, <사람풍경>, pp. 129-30


내가 담배를 처음 피웠던게 언제였더라. 2005년 2월의 어느날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04학번이던 나는 '첫 후배'를 맞이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새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 결국 새터 D-Day가 되었고 나는 새벽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대감' 때문은 아니었고 단지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새터 준비하는 과/반 사람들은 <올리브>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고 나는 잠을 자고 싶었기에 짜증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와중에 여차저차 하여 나는 갑작스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아 하게 되었다. 역사 관련 교양 프로그램이었던가. 자의 반 타의 반 이었을 것이다. 그때 시간은 새벽 3시 경. 9시~10시면 학교에서 출발이었는데.

물론 나는 그 일을 맡은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성격과 달리 데드라인이 코 앞에 닥친 급박한 상황을 즐겨하는 편이다. 내 성품은 그걸 싫어라 하는 것은 물론이오, 그런 방식이 내 기질과 맞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뭐 어떤가. 사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투덜거릴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특권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나 진짜 바빠. 갑자기 일이 커졌단 말이지. 아 진짜 죽을 것 같애 ㅠㅠ" 이런 식으로. 물론 그런 투정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그 때, 모두가 피곤하고 잠을 자고 싶어했던 그 때에 내 투정을 들어줄 사람은 당연히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아침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땐 그냥 혼자 있는게 낫다. 하여 나는 <올리브>에서 먼저 나와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가는 길은 5분 남짓. 어쨌거나 사위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고 조용했고 그래서 나는 좀 외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재목은 아니었고 물론 지금도 아니다.

그래서 자취방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좀 더 걸었다. 잠시 뒤에 자취생 생활용품과 필수품의 만신전, <패밀리마트>의 초록 간판이 눈에 확, 하니 들어왔다. 한겨울 새벽, '사연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맥주를 사 마시면 왠지 간지가 흐르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 편의점엘 들어갔고, 잠시 뒤에 내 손에는 맥주 대신 시중에 깔린지 얼마 안 된 담배인 "더 원"과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아마 왠지 '맥주보단 담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정확히 위에 인용한 문단대로 일을 치렀다.

어렸을 때 아빠 근처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고, 집 수리를 하러 온 아저씨들이 며칠 동안 머물며 뿜었던 담배 연기도 싫어했고, 담배를 소유한 것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랑스러워 하는 초/중등학교 때의 아이들을 싫어했었던 내가, 내가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술은 마셔도 담배는 안 해! 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과거는 단지 과거가 되었다. 꼭 담배가 나를 위해, 바로 이 순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니, 드디어 내가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는 느낌이었다. 담배소명설.

이상하게도 그 해의 봄엔 과/반에 유달리 흡연 인구가 많았더랬다. 과/반에서만 스물 몇 명이었던가로 기억한다. 2004년엔 담배 안 피우는게 자랑이었던 과/반이었는데. 04학번 동기 중 딱 1명을 제외하곤 모두 비흡연자였는데. 그 해는 참 이상했긔…. 참으로 이상했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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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thecommentfactory.com/will-the-cat-above-the-precipice-fall-down-slavoj-zizek-on-iran-2259/comment-page-1

When an authoritarian regime approaches its final crisis, its dissolution as a rule follows two steps. Before its actual collapse, a mysterious rupture takes place: all of a sudden people know that the game is over, they are simply no longer afraid. It is not only that the regime loses its legitimacy, its exercise of power itself is perceived as an impotent panic reaction. We all know the classic scene from cartoons: the cat reaches a precipice, but it goes on walking, ignoring the fact that there is no ground under its feet; it starts to fall only when it looks down and notices the abyss. When it loses its authority, the regime is like a cat above the precipice: in order to fall, it only has to be reminded to look down…

권위주의 정권이 마지막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정권의 붕괴는 대개 2개의 절차를 따른다. 실제로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균열이 시작된다. 갑자기 사람들이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다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정권이 단지 정당성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집행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공포에 입각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화의 고전적인 장면을 알고 있다. 고양이는 절벽에 다다른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발 밑에 땅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해서 걷는다. 고양이가 밑을 바라보고 심연을 발견했을 때가 되어서야 고양이는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정권이 권위를 잃으면 정권은 이렇게 절벽 위의 고양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붕괴하기 위해서는, 밑을 내려다 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이 정권에 대한 분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분석들에는(그 분석을 집행하고 널리 알릴 채널이 없으니) 당연히 힘이 없고 그만큼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런 냉소주의 중에 가장 악질이 '국개론'일 것이고, 가장 평이한 것으로는 다음 총선(혹은 다음 보궐선거) 내지는 대선을 기약하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 공통적인게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정권은 무능하다" 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찰이나 검찰이 휘두르는 무기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눈앞에 어른대는 서슬퍼런 흉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그 반작용은 두려움, 공포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복종도 있을리 없다.

그러니까,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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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중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간혹 서울을 떠났지만 매번 곧 돌아왔다. 도시 전체가 옛 시대의 유산인 곳이나 빼어난 절경을 가진 곳에서도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내 서울이 그리워졌고 돌아오면 안도했다. 서울이 전적으로 태평하고 무사한 도시여서가 아니었다. 대개의 삶이 그렇듯, 그런 날은 일부에 불과했다. 안도감이나 그리움은 서울을 벗어나 있을 때에나 가능했다.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서울은 나와 가장 닮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 편혜영, 「크림색 소파의 방」서문(???), p. 211


그 도시는 나의 유년시절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철없이 논다.

- 윤성희,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서문(???), p. 184



소설집을 들춰보다가 어쩔 수 없이 깊이 공감하게 된 문장. 그랬다. 안도감, 그리움은 서울에 있을 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철없이 놀 수 있었고 철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덧붙여 편혜영씨의 말에 토를 조금 더 달자면,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하기만 한 나와 가장 닮았을 뿐 아니라,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나를 가장 받아들여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을 배경으로 <테마 소설집>이 얼마 전 나왔다. 나로서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로 읽혀서 책을 샀는데 솔직히 말해 서울은 너무나도 '서울'이기에 다른 문학에서도 충분히 서울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특별히 이 소설이 '서울 테마 소설집'이라고 느끼진 못하겠다. (난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인터넷 그림을 볼 땐 소설집의 '쿨'하고 '감각적인' 북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첫 인상에 비해 쪼오금은 실망할 수밖에.

소설집에서는 '서울성(性)'이랄까 'seoulness'랄까, 하는 무언가에 대한 직접적인 사유를 읽어 내기 힘들었다. 내가 기대했던건 어쩌면 이것이었을테다. 다시 말해, 결국 내가 가진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에 합치하는 소설은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조각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면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어떤 총체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이게 곧, 서울인가?). 내 소설 편식증 때문에 전혀 읽히지 않는 소설도 있었고.. 조금은 아쉽다.

그래도 일단 잘 읽히고 재밌는 소설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건졌다. 몽땅 필사해 뒀다는! ^^

Posted by 비앙

오늘 루틀리지에서 나온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개론서를 읽다가, 나로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던 접근 방식을 읽었다. 한나 아렌트는 특히 (정치)철학, 그리고 그녀의 삶의 맥락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서양)현대사, 홀로코스트 연구(Holocaust studies), 유대인 연구(Jewish studies) 등에서 알려진 인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거의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 같은 경우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을 포함한 몇 권의 국역본을 갖고 있지만, 꽤나 많이 알려진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의 마지막 장 정도와 <정치의 약속> 일부를 읽고는 너무나 읽기 뻑뻑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주목 받고 있는 (독특한(?)) '아렌트'에 대해서는, 랑시에르 같이 한국에서 '최신 유행'인 이들의 글을 읽어서, 대략적으로만, 아주 간략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우파'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안티-페미니스트'로서 평가받던 아렌트가 최근 들어서 왜 이렇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만(이에 대해 다룬 글을 읽은 적 있다)... 이는 오늘 끄적이고 싶은 주제가 아니므로 패스.

어쨌든 이 개론서의 저자는 정치철학자로서의 아렌트가 아닌, 문학 연구의 맥락에서 아렌트를 읽자고 제안한다. 아렌트가 문학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서사(literary narrative)를 말이다. 심지어 아렌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어떠한 철학도, 의미의 강렬함과 풍족함이라는 측면에서, 잘 서술된 이야기(properly narrated story)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기존의 고전적인 정치 개념으로는 당시에 새로이 등장하던 유례없는 전체주의ㅡ나는 이를 어떤 현대 철학자가 그랬듯 '절대 악'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ㅡ를 이해할 수도 없으며 심각한 왜곡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그녀의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듯, 예술과 서사, 그리고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는, '이론(theory)'에 대한 불신, 내지는 '이론'의 '몰락'이라는 특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 있다. 조금 현대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테리 이글턴이 지적했듯(그러나 약간은 새삼스럽게도), 특히 21세기 초의 엄청나게 급격한 변화를 겪는 전지구적 상황의 맥락에서, 이론과 이론가들은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춰가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미국적인 상황에서 이론은 쉽게 낡은 것이 되거나 현실과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 역시도 당시 현실에 도래하고 있었으며 이미 도래했던 전체주의와 근본주의를 목격하면서, 이론과 서구 철학의 죽음을 읽었다. 간단히 말해 서구 문화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정적인(static) 이해 모델인 반면ㅡ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ㅡ, 스토리텔링은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모델이다. 특히 아렌트는 그녀의 선생이자 연인이기도 했던 모 철학자가 1930년을 즈음하여 나치에 가입했던 유명한 사건을 두고도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토록 철학적 명민함(subtlety)을 가진 사람이, 나치 정권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들을 갖지 못했다는, 그 놀랍지만 놀랍지 않은 선명한 대조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 2000년을 내려온 서구 철학 전통의 추상적 이론화 경향이 어떻게 공적 세계와 사유행위 그 자체에 폭력을 가해왔는지 의문을 쏟아 놓는다.

그에 반해 스토리텔링은 전통적인 이론들이 읽어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젖힌다. 아렌트에게 스토리텔링은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비극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스토리텔링은, "정의의 오류(the error of defining)"를 저지르지 않고 다른 의미들을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은 지식인의 '독백'에 가깝고 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언제나 편집증적일 수밖에 없는 '이론'과는 달리, '커뮤니티community'를 가정한다는 점에 아렌트는 주목했다(커뮤니티를 흔히 하듯 '공동체'로 번역하는 것은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를 심각하게 제한한다는 생각이다. community는 commune이라는 동사에서 볼 수 있듯, 친교와 교제와 우정과 공감의 의미도 함께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동체는 '하나의 신체'라는 뜻이다. 너무나 낡고 진부한 유기체적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온갖 위계질서와 기능주의적인 설명이 덧붙여진다. 심지어는 '한 솥 밥을 먹고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식의 가족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이해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즉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the teller of the story)", "(이야기 속) 행동의 행위자(the hero of action)", "그 이야기를 심판하고 이야기에 반응하는 청자 혹은 독자"를 늘 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론으로 설명되면 이해될 수 없는 사건들이,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형상으로 묘사되면 더 넓은 청중과 커뮤니티에 의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 즉, '인지가능한(intelligible)' 사건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를 참조하여, 그녀의 정치적 이상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문학적인 방법들에 주목한다..



아렌트의 책을 제대로 읽은 바 없는 나로서도,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아렌트의 사유 체계를 부분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쉽게 지우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아렌트의 이러한 접근은 '정치적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스토리텔링 행위는 '현실' 자체의 문제에 개입하고, 그 지평을 이해함과 동시에 확장(내지는 그 지평 자체의 붕괴)을 시도하려는 끈질긴 노력의 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지배적인 상징 체계에 저항함으로써ㅡ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공포를 증언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우파적인 수정주의적 입장은 얼마나 끔찍한가?ㅡ잊혀져 가는 오랜 기억들을 잊혀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스토리텔링과는 전연 다른 차원의 스토리텔링일 것이며, 김연수가 얘기한 바 있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스토리텔링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와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은 나로서는 매력적이었다. '이론'이냐 '현장'이냐 하는 식의 이분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이론'에 많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말이다. 또한 나는,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문학적 글쓰기'라고 믿고 있다. 또한, 피에르 마슈레 식으로 말하면, 한 작품 혹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 뿐 아니라, 작품 내지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고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이, 주위의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면서 평생 공부하는 사람들의 임무라면 임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서사, 내지는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러한 내 믿음과 연결되는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우기 힘든 고민들이 남는다.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정치적인 실천이 될 것인가? 어떤 스토리텔링이 '정치적'인가? '정치적' 스토리텔링을 규정하는 속성을 우리는 정의할 수 있는가? 만약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쉽게 정의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이라고 '느끼는가'? '정치'란, 바디우같은 이들이 말하듯, '메시아적'이고 '섬광'과도 같은, 그런 급진적인 단절/도약의 순간, 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윤리적 명령을 가진 어떤 '사건에 충실'하면 되는 것인가? 거기에서 스토리텔링의 위상은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많이 필요할 것 같으므로 패스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어떠한가. 어떻게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이미지화되거나 스펙터클화되지 않고 그 자체의 유효성과 독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을 정도로 홀로코스트 역시도 자본주의의 엄청난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 만화 등은,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고유한 사건 특유의 정서적 소통 능력을 갖지 못하고, 하나의 끔찍한 사건, 혹은 구경거리로 전락해서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저 먼 곳에서 일어난 어떤 비극'이라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했듯, 드보르로부터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사람들이 늘 말해온 바대로 어떤 사건이 이미지화되고 스펙터클화되는 과정에서, '지시체referent'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70년대 흑인 혁명노동자 연맹(the League of Black Revolutionary Workers)의 디트로이트에서의 일시적/부분적 승리와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짤막하게 분석하면서 이야기했듯 말이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은, 애초에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결국엔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 외에 몇 가지는 생략... ;ㅅ;



덧) 만약 정말 아렌트가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를 참조했다면... 나로서는 웃음만 나올 일이다 ㅋㅋ 왜냐면 내가 학부 시절에 가장 읽고 싶었지만 가장 읽을 수 없었던 책의 주인공들이 바로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이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은 단어와 문법 양면에서 모두(바다와 어선에 관련된 '끔찍한' 어휘들을 보면 알 것이다. 심지어 허먼 멜빌 작품용 딕셔너리도 있다-_-;;), 콘라드는 문법의 측면에서 읽기 너무 힘들고 뻑뻑했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는, 지금 내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탐색하고 조사하고 해부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기에... 결국 다 포기하고 국역본만 읽었다네~ㅎㅎ 아렌트의 책들이 뻑뻑한 이유도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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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홍성흡 옮김, 이학사, 2005)를 보고 있다.. 첫 장은 나름대로 흥미진진 했는데... 4장 쯤 가니까 갑자기 흥미가 조금은, 아주 조금 뚝, 했지만 일단 끝까지 봐야지 싶다는. (사실 흥미만 뚝, 하면 괜찮은데, '이게 뭥미?' 싶은 구절들도 눈에 띄어서... 그치만, 60년대에 쓴 글이니 pass, pass!)

재밌는 얘기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냥 짧은 '의문'이 든 것 중에 하나만.

[...]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 없는 사회이고 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적인 사회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다. 이러한 배열은 역사 없는 사회들을 권력 없는 사회로 취급하는 권력에 대한 현재의 사고와는 매우 다르다. [...] (p. 32) [강조는 원문.]


뭐, 일단 여기에 쓰인 '역사적'이라는 개념(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무엇인지?)과 '비/강제적'이라는 개념, 그리고 '정치''권력'이라는 개념에 대한 보다 명료한 정의(definition)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혼동이 되어서 말야.

어쨌든, 만약 여기서 쓰인 '강제적 정치권력'이라는 말을, '(군)주권 권력(sovereign power)'정도로 이해해도 좋다면, 결국 클라스트르가 '역사'와 '(군)주권'의 깊은ㅡ어쩌면, 필연적이자 불가분의ㅡ유대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고 읽힌다. 그렇다면 '역사'란, 결국 주권의, 주권에 의한, 주권에 대한 담론일 뿐이란 이야기일까? 다시 말해, 주권 권력을 (새로이) 쓰면서 그 근원과 정초foundation를 (탐색 및) 창조해 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주권 권력의 정통성legitimacy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정당화하는, 그저 그렇게 이러쿵저러쿵한 담론이란 이야기? 

과연 '역사'라는 담론은, 이러한 의미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비강제적"인 사회는 역사를 쓰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가졌다고 말해질 수 있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여기서 푸코를 좀 불러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지만(사실은 어느 정도 불러온 것 같지만), 깊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므로 일단 접어두자.

그런데 "역사 없는 사회"와 "역사적인 사회"라는 말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한 걸까? 그러니까, "역사적인"이란 말은 정확히 "역사 있는"이라는 의미인건지? (그럴 경우 '있는'이라는 말도 상당히 문제적이겠군) "역사적인"이라는 것은ㅡ어떤 집단, 혹은 어떤 형태의 권력에 의해서ㅡ문자로 꼼꼼하게 기록되고 영구토록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것에 붙이는 말인지? 혹은 어떤 형태든지 기록이 남을 경우에ㅡ우연이든 혹은 특정한 노력의 산물이든ㅡ붙이는 말인지? 아니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암튼 의문 가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라니까; 그냥 읽자면 그냥 읽겠지만, 궁금해지잖아..)

지저분한 의문, 하나만 더. "역사적인"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상관없이 여기서 과학적 사실 진술을 하듯 말하고 있는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혁신', '변화', '동인'이라는 말들이 어우러지면서 너무나 진보주의적(개량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냄새가 나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도 하고..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과 "역사적인"ㅡ어쩌면 인터넷을 하고 있는 우리는 '역사적인' 사회에 이미 살고 있는 셈 아닐까?ㅡ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부분에서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주권 권력을 구성하는 '정초적 폭력'이니, '성스러운 테러'니 하는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말들은 종종 들을 수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 (정치) 권력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괜찮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설득력 있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이런 경향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영 찜찜하기만 해서 말야.

물론 현재까지 '생존'해 있고 또 널리 기록되고 보존되어온 '역사'를 가진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와 현재엔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볼수도 없고 기록도 보존도 되지 못한 '역사'를 가진 역시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단절, 차이, 균열이 분명히 있겠지. 근데 그러한 단절이나 차이점들을 설명할 때, '폭력'과 '강제'라는 말을 넣어서 코딩하는 것에는 여전히 거부감을 느낀다. '폭력'과 '강제'라는 말의 뜻도 엄청 애매하거니와, 그 말들이 애매한 채로(사실은 애매하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특권화 되고, 재생산되고, 특정한 정치 권력의 모델을 옹호하는 것만 같아서 말야.


결론 : ... 아 모르겠다. -_- (무책임한 주인장은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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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훑다가

독서노트 2008/09/19 00:34

만약 그 공동체가 바로 인종주의적 배제를 통해 구성된다면, 인종주의적 발언의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데 그 공동체를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 「문화의 보편성」.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p. 81.



마사 너스봄(누스바움)의 책을 읽다가 인용.

버틀러가 "만약"이라고 말했지만, 이를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오늘날 "인종주의적 배제"의 매커니즘을 갖지 않은 '공동체'가 과연 존재할까(국가는 말할 것도 없으니까)? 심지어 무한히 다양한 국가와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모인ㅡ따라서 더 이상 지배적인 인종이 없는 특별한ㅡ'공동체' 속에서도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종주의를 경유하지 않은 발화를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인종주의를 경유하지 않은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인종주의에 단순히 반대한다고, 우리는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는 순진한 다문화주의적 리버럴 좌파 인종주의자들과 거리를 둘 때 조차도,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은밀한 인종주의자들은 아닐까?

인종주의는 진짜 어려운 주제란 말이야 (..)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나오는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은,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것 이었다. 여태까지 볼 수 있었던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고 방법이었으니. 특히 인종주의 하면 딱 '흑인' 과 '라틴', 혹은 '홀로코스트' 운운하는 이야기들에 피곤해지기도 했고. 전부 다 미국-유럽산(産) 담론들. 한국에서도 뭐,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본격적으로 한국의 인종주의에 대해서 언급하는 글들은 찾기 힘든 것 같다. 다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폐지', 혹은 뭐 '인권', '다문화' 등등의 어휘로 그것들을 에둘러 풀어낼 뿐. 아마 인종주의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나 보다. 아마, 다들 그렇게 믿고 싶겠지.

푸코가 그 책에서 얘기하는 것은 인종주의 탄생의 역사적 비화랄까? 푸코가 보기에 인종주의의 탄생은 기존의 '주권적 역사'와 구분되면서, 16, 17세기 들어서 등장했다고 보는 넓은 범위에서의 "종족 투쟁의 역사" 내지는 "반역사"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족 전쟁의 역사" 관점 이후에 등장하였던(하지만, 푸코가 찬양하는ㅡ그러나 나중에 철회하는ㅡ"종족 투쟁의 역사"와 인종주의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가 '인종주의'라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국가'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반드시 '국가 인종주의'다. 또한 푸코는 이러한 "종족 투쟁의 역사" 이전에도 있었던, 예컨대 유대인에 대한 차별 같은 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놀라운 주장을 편다. 이러한 푸코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인종주의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담론을 세밀하게 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듯 하다. 사실 푸코가 인종주의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분석이 다소 미약하기는 하다마는..

물론, 게다가, 아직 이 책을 다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이어, Security, Territory, Popul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의(이건 세미나에서 다 같이 구해뒀음)와 그 이후의 The Birth of Biopolitic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의(아직 영역본이 출판되지도 않았다 한다)로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들을 다 보아야 하고, 『성의 역사』 1권의 5장 등을 꼼꼼히 참조해야겠지. 어쨌건 재미있고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는 분석들이라는 생각. 그리고 결국 이 일련의 세 강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니까(이기도 하니까), 꼼꼼히 읽어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건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 지반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치밀하게 알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 쿨럭 -_-


어쨌건... 마사 너스봄의 짧은 논문, 그리고 이 논문에 응답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답변을 모은 이 책, 은근히 재미있는 것 같다. 물론 짜증스러운 글들도 있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 책의 부제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애국주의"라는 말은,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 폐기 처분해줘야한다는 생각을 했을텐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너스봄의 센세이셔널한 질문, "순화된(purified) 애국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녀가 주장하듯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흐억.


덧) 버틀러의 이 짧은 글에서 "실행의 모순"이라고 번역된 "performative contradiction"은 일반적으로 "수행적 모순"이라고 번역하는 걸로 알고 있다. "실행의 모순"이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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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은유"

독서노트 2008/06/15 01:57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gritte, <Les Amants>


한 손이 어떤 열매, 꽃 또는 갑자기 타오르는 꽃잎을 향해 내뻗친다.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그 시도는 열매의 무르익음, 꽃의 아름다움, 꽃잎의 불타오름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에서 그 손이 대상을 향해 충분히 움직였을 때, 또 다른 손이 열매로부터, 꽃으로부터, 꽃잎으로부터 튀어나와, 우리의 손을 맞잡기 위해 내뻗친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의 손은 열매의 닫힌 충만함 속에서, 꽃의 열린 충만함 속에서, 작열하는 손의 폭발 속에서 응결된다. 이 순간 발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구멍 뚫린 시트의 사례」(김영찬 외 역, 『성관계는 없다』, 211-2).



주판치치의 이 말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으로는...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컨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 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donner ce qu'on n'a pas,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l'aiment, 즉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l'aimé , 즉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 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55-6.



일전에 넬 4집 앨범인가 나왔을 때, <어떻게 생각해>라는 노래를 들으며 꽤나 슬퍼했던 적이 있었다. 그 가사는 이렇게 된다.

당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내 몸을 맡기고
믿음으로 무장한 관계인것처럼.
하지만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나의 마음 속에 날 가득 채우곤
마치 나는 없고 온통 당신 뿐인것 처럼.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설명해.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
열리지 않는 마음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주판치치와 보조비치의 언급들은, 오히려 이런 불일치와 결여야 말로 사랑의 필수 (구성)요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더 이상 이런 노래의 가사를 보면서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앙가주망'인 셈이다. 다시 말해 관계의 지속은 섣부른 '이해'와 '앎'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관계는 죽어버린다(그러고보면 내가 가장 싫어하고 상처를 많이 받는 말 중 하나는 "너는 ~이다."라는 식의 말이다. 나는 그게 아닌데... 그 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그 결여가 칼날이 되기도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잘 안다고(자식이 부모를 잘 안다고) 너무나 쉽게 착각하고 있듯. 그러면 서로에 대한 '앙가주망'은 철회된다. 그 대신 남는건 더 극심한 허무, 고통, 허울 좋은 의무들 뿐(오히려 이게 신파와 상처의 근원이겠지). 그 대신 나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구속,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의지와 참여와 책임.. 그리고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처와 결여와 공백에 나를 열어두기, 그러면 그 상처와 결여와 공백은 오히려 무한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상처없이 관계는 열릴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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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Fritz Klein, The Bisexual Option: A Concept of One Hundred Percent Intimacy (1978), Mell Storr, Bisexuality, NY: Routledge, 1999, pp.38-48에서 재인용 및 번역.

정신병리학자들이 질문해 온 오래된 낭만적인 질문 중의 하나는, 한 남자가 혹은 한 인간이 두명의 여성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 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 이다. 인간이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 이는 개인들이 가진 충실함의 기준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녀들은 피상적이거나 일시적인 걸 뛰어넘어, 관계 속에서 진실된 신뢰라는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녀들은 이중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스파이'가 되는가?

[...]

우리들의 사회에서, 친밀감에 대한 공포는 부분적으로 헤테로포비아와 호모포비아 또는 양쪽 모두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공포와 혼란의 중요한 이유는, 섹슈얼리티와 친밀감이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필연적으로 같이 가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상보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독립적인 감정이다. 그 감정들의 양립가능성은, 개인적인 환경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존한다.

병원에 누워있는 좋은 친구와 가까워지면 섹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순수하고' 100% 친밀감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 간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섹스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친밀감은 병원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다. 혹은, 두 명의 사람이 일치감을 공유하기 위해 한번 서로를 안아 주는 것ㅡ성적이든 감정적이든ㅡ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황을 가정해보라. 만약 그 포옹이 개인적이나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거부된다면, 그 두 사람은 100% 친밀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들에 자유롭게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강좌 교재 였던 책. 클레인이 보기에 감정적인 층위에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양성애적' 층위에서 움직인다. (요약하자면) 결국 그래서 클레인은 양성애야말로 100% 친밀함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말한다. (허허허 ^^;) 갑자기 너무나 낭만적인 이야기들을 끌고 들어오기도 하고. 그러니까 태초에 우리는 하나였으나 신이 우리를 찢어 놓았다는, 그런 식의 말 이랄까(이게 클레인의 말은 아님). 나이브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클레인의 생각을 한국의 맥락에 그대로 끌고 들어오면 곤란하다. 적어도 클레인이 이 책을 쓴 미국에서는 G/L 집단과 B집단 사이에 여러 가지 알력이 많이 있었고, 그 과정의 산물이니까. HIV에 대한 공포가 미국을 휩쓸 때 나온 이야기기도 하니까. 한국은 뭐, 내가 알기론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호모 포비아'가 전면에 나선 것도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특히 B집단 같은 경우엔 '전무全無'에 가깝잖아? 게다가 당시에는 클레인 같은 사람들이 내놓은 생각들이 여피족스러운 '쿨한 유행'으로 다루어졌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유력 일간지 등을 통해서도 보도가 된... "왜 하나만 해? 둘 다 할 수 있는데?" 뭐 이런 -,ㅡ

이런 쿨한 맥락에서 "그녀애자" 혹은 "그남애자"라는 말도 성립하게 된다. 자기는 그녀나 그남을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사랑하는거지, 내가 G나 L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이런 탈정치도 문제적일 것이다. 예컨대, 왜 굳이 자기가 G나 L이 아니라는 걸 덧붙이는가? 어떤 성적 규범 속에서 그런 말을 덧붙여야'만' 하는가? 그건 '-포비아' 때문은 아닌가? 동시에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굳이 정치화하는 것도 문제적일 순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개인들을 추상화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추상화 과정 자체에서 배제와 인식론적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까.

멜 스토어의 책에는 너무 적게 인용이 되어 있어서(그래도 5장 정도는 된다마는), 클레인이 쓴 full text로 읽으면 재밌을 것도 같다.


덧) 이런 글을 읽으면 꼭 이런 글을 쓴 이의 성적 지향이 무얼까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ㅎㅎㅎ. 그런 것도 또한 현재 우리들이 속한 성 제도(sexual regime)의 효과겠지. 이성애/동성애/(양성애)라는 단순하고 명쾌 투명한 구도로 섹슈얼리티를 재단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빈곤하면서도 동시에 폭력적인 제도. 또 한편으로는 정체성의 정치학에서는 필요할 수밖에 없는..

Posted by 비앙

반대의 이유

독서노트 2008/04/05 21:33

칸트는 과학의 원리가 그 어떤 학문의 원리들보다 심오하다고 믿었으며, 과학적 논리와 과학적 방법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어떤 점에서든 열광적이거나 혼란스러운 것 모두를 싫어했다. 그가 좋아한 것은 논리와 엄밀함이었다. 그는 이러한 성질들에 반대하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나태한 이들로 치부했다. 논리와 엄밀함은 인간 정신의 고된 훈련이었으며, 이런 일들이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른 곳에서 반대의 이유를 생각해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강유원 나현영 역, p. 114. 강조는 내가.


굳이 벌린의 칸트를 가지고 이야기 할 것은 없지만, 예전에 읽고 지나쳤던 부분이었는데 어떤 글을 읽고는 문득 생각나버려서...

자기의 입장에 반대되는 입장을 만나면,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아주아주 짜증나면서도 무서운 유형의 사람들이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엔 더더욱 그렇다. 예컨대 이런 사고의 흐름은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런 경쟁이 자기 자신에게 너무 고되고 힘들고 벅차기 때문에 반대한다, 는 식으로... 이런 관점이 관대한 휴머니스트적 관점, 혹은 국가주의적 관점 등과 맞물리면, 인간 개조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나.

그나저나 "혼란스러운 것 모두를 싫어"한 칸트의 책을 보면, 마구 혼란스러워지는 사람들도 많은데 ㅎㅎ 나를 비롯하여. 그래서 이런 책도 있잖아. T.K.Seung, Kant: A Guide for the Perplex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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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피에르 바야르,『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김병욱 역, 여름언덕, pp.204-5

특정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 책을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두 진영으로 양단하려는 것은 독서 행위의 불확실성을 모르는 소치다. [...]

그렇다면 '타자가 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ㅡ여기서 '타자'란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ㅡ이야말로 우리가 읽었건 읽지 않았건 책들에 대해 좋은 여건에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일차적 조건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책들에 대한 담론에서 문제의 그 앎이란 불확실한 앎이며, '타자'란 우리의 대화 상대들에게 투영된 우리 자신의 불안한 형상이다. 학교 교육이 선전하는 교양 같은 존재, 그 허구성이 우리의 삶과 사유를 방해하는 흠결 없는 교양 같은 존재가 타자인 것이다.

'타자'가 알 거라는 생각이 주는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진정한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다. 타자가 읽었으리라는 생각, 그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 하는 생각은, 창작을 비독자가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부득이 의존하는 수단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 책의 핵심이라면 '핵심'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어서 옮겨둔다. ^^;

무엇보다 이 책은 재밌다. 문학 작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렇게 인용을 많이 하면서도 이 책이나 저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용이 된 원래의 책을 봐야겠다는 의심이 들지 않게 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쓰여진 책인 것 같다. 그만큼 '속아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인용은 속임과 속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게임이고 거기에서 비로소 의미가 만들어지니까. 사실 '그럴싸함plausible'을 텍스트에서 구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문학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라는데, 딱 그 느낌의 책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해법'도 거의 모두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내가 아는) 프랑스에서 이 책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이, 너무나 자연스러워보이는..

예전에 한 교수의 연구실에 찾아가서 면담했을 때 일부러 이런 질문을 던진적 있었는데. "연구실 여기에 있는 책, 쭉- 다 보신거에요?" 사실 대화를 나누다가 좀 조금 뒤틀려 버린 마음에서 했던 말이기는 했지만. 그 교수는 내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그걸 왜 걱정하니? 역시 ㅇㅇ대 애들은... 이런 말투;) 넘어가버렸다. 때문에 나는 이 말이 교수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좀 옹졸....; 이 책을 보고 나니, 그 때 의도했던 것 보다 그 교수에게 더 큰 실례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다 :)

Posted by 비앙
Gloria Anzaldua. Borderlands/La Frontera : The New Mestiza. San Francisco: Aunt Lute Books. 100-1

반대편 강둑에 서서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지고 가부장제와 백인들의 관습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대하는 자세(counterstance)는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의 결투 안으로 우리를 가둔다. 경찰과 범죄자처럼 사투를 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는 폭력의 공통 분모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하는 자세는 지배적인 문화의 관점과 신념을 반박하며, 이로 인해 반대하는 자세는 자랑스럽게 도전적인 것이 된다. 모든 반항(reaction)은, 그것이 저항하고 있는 것에 의해 한정지어지며, 또 그것에 의존한다. 반대하는 자세는 외부와 내부 모두에 있는 권위의 문제로부터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방식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새로운 의식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길 위에서, 우리는 반대편의 강둑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 사투하는 두 전투원들 사이의 분열이 어떻게든 해소될(healed)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쪽 강기슭에 한 번 그리고 다른 쪽 강기슭에 한 번 서서 큰 뱀과 독수리의 눈을 통해서 보게 될 것이다. 혹은, 아마도 우리는 지배 문화를 벗어 던지고, 그 지배 문화 모두를 잃어 버린 목적인 양 청산해버리고, 경계를 건너서 완전히 새롭고 분리된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반항(react)하지 않고 행동(act)하려고만 결심한다면 가능성은 수도 없이 많다.


아, 좋다 :). 비슷한 말로는, "적을 공략하기 보다는 낙후시켜라"라는 말이 있겠지. 조이여울씨가 한 말이던가? 물론 이런 생각과 말은, 사실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되고야 만다. (물론 안잘두아의 글과는 상관이 없지만) 어느 사범대의 남자 교수가 한국의 페미니즘은 너무 적대적이라며 좀 더 온화하고 조화 지향적인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척하지만 결국 비난하고야 말 때, 하지만 어떤 학생이 그런 발언을 비판하자 솔직히 자기는 5년 동안 여성학 책을 안봐서 잘 모르겠다고 뻔뻔하게 변명하고야 말 때, 그 남자 교수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은 그야말로 당장 태워없애 버려야하는 쓰레기가 될 것이다(귀가 썩는다;). 또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관망자의 위치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만하는(나도 이럴때가 많은데;)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때도 진정성이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치만 적어도 안잘두아의 손을 통해 나온 글이라면 신뢰할 수 있겠지.

나는 지배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 깨어질지 몰라 (주제넘게) 걱정스러워 할 때도 있다. 저렇게 하다가 무너져 버리진 않을까. 너무 힘들지 않을까. 나같이 어디에도 잘 끼지 않으며 자의식도 세고 말도 많은 회의적인 개인주의자들 때문에 힘이 더 빠져버리지는 않을까... 그런데 때로 어떤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불편해서 피하고야 말 경우도 있다. 자기는 다 안다는(Know-It-All)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볼 때, 뭐든 다 알 수 있으며 알고 있다고 여기는 '아는 주체(knowing subject)'들을 볼 때. 혹은 그 "자랑스럽게 도전적인" 표정과 태도들이 진정성으로 느껴지지 않고, 왠지 겉도는 자존심으로 보이거나 이 사람이 가진 인정 투쟁의 무기로만 되었구나 싶을 때. 그리고 그 자존심과 무기가 나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물론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그 어떤 것을, 남들 눈엔 뵈지 않는 품 안에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와 아스카가 가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잠재된, 그러나 틈만 나면 튀어 나와 자의식 강한 자기 자신마저 당혹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제발) 나를 봐 줘"라는, 그 절박한 인정에의 욕구.

이는 "우리는 깨끗한 척 해봐야 누구나 다 더러워", 라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던 누군가의 인식과 같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반/행위(re/act)하지 않는 자에게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기분이 한 없이 "더러워"진다. 설령 누구나 다 더럽다고 할지라도, 그 차이가 오십 보 백 보라고 할지라도, 그 차이에는 오십 보 만큼의 차이가 있으며 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죽어도 오십 보는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채식을 선언한 사람이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볼 때 역시 정치고 선언이고 실천이고 뭐고 다 소용없구만 하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은 물론 본인의 자유다. 비정규직과 노동 운동을 말하고 마이너리티의 권리를 말하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껌을 내미는 사람들을 냉혹하게 내치는 것을 보고 역시 너도 똑같은 놈이구만 하고 비웃는 것도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러한 관찰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차이인 오십 보가 그 사이에 있으니까.

Posted by 비앙

Donna J. Haraway, <한장의 잎사귀처럼>: Thyrza Goodeve와의 대담, pp.139-143에서 발췌

해러웨이 | [해러웨이의 방법이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굿이브의 말에 대해서] 저는 배율 바꾸기를 아주 좋아해요. 생물학 세계가 여러 다른 배율에서 그리고 여러 다른 배율에 대해 사고하도록 유도한다고 생각하지요. 생물학 세계는 또한 매우 기이한 생물학적 체계와 기제에서 발전된 상상력과 존재들로 가득 차 있어요. 생물학은 고갈될 수 없는 전의(轉義)의 원천이에요. 생물학은 물론 은유로 가득 차 있으나 은유 이상의 것이지요.

[은유 이상의 것이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대해] 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생리학적, 담론적 은유들 뿐 아니라, 설화들도 의미하는 겁니다. [...] 생물학은 어떤 다른 걸 밝혀주는 은유일 뿐 아니라, 문자로 되어 있지 않은 (비문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에요. 또한 저는 사실과 허구, 물질성과 기호성, 대상과 전의 등의 동시성에도 주목하기를 원하지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에 대한 굿이브의 말에 대해] 네. 저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라는 실재물을 이용하여 개체성과 집합성에 대해 동시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생물체는 남 호주에 사는 흰개미의 후장에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단세포 유기체이지요. 무엇을 "그 생물체"로 간주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그 생물체는 다섯개의 다른 종류의 실재물들과 절대 공생관계obligatory symbiosis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각 종류의 실재물은 분류학적 이름을 갖고 있고, 박테리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박테리아는 세포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박테리아는 핵산nucleic acid을 갖고 있고, DNA를 갖고 있으나, 핵으로 조직되지는 못했어요. 이런 다섯 개의 다른 종류의 물체들은 각각 그 세포의 안에 살고 있거나 그 세포의 다른 영역 위에 살고 있지요.

[...] 그러나 그것들은 완전한 의미에서 그 세포의 일부는 아니에요. 반면, 그들은 절대 공생관계 속에서 살고 있어요. 거기에서는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살 수 없어요. 이 관계가 바로 문자 그대로의 공의존codependency 관계이지요! 그러므로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실재물이냐 혹은 여섯 개의 실재물이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섯 개라는 답은 옳지 않아요. 한 개의 핵을 지닌 세포마다 다섯 종류의 핵이 없는 실재물들이 백만 개 가량 있으니까요. 수많은 복사판들이 있는거지요. 그러므로 하나는 언제 두 개가 되기로 결정하는가? 이 집합체 전체가 언제 분열되어 두 개가 되는가? 무엇을 믹소트리카라고 생각해야 하나? 단지 핵이 있는 세포인가? 아니면 집합체 전체인가? 이것은 하나와 여럿에 관한 우리들의 개념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실제 물체이자 매우 멋진 은유임이 분명합니다.

[...] 생물학은 끝 없는 자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정신분석학보다 생물학을 더 좋아했어요. 우리의 역사적, 심리적, 정치적 존재의 일부에 도달하는 듯이 보이는 설화들을 지어낼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가능성들을 생물학이 토해내니까요. 정신분석학은 사물들을 너무 일찍 고정시킵니다. 그것은 진리의 일부일 수 있으나 가장 흥미롭지는 못해요.




얼마 전 출간 된 해러웨이의 다른 중요한 책 <겸손한_목격자(이하 생략;)> 역시 오역으로 거의 퇴출된 마당에, 해러웨이의 다른 번역물들은 어떨른지 궁금하다. 이 책은 그래도 대담집이니까 오역 리스크가 적겠지;

생물학에 대한 엄청난 편견을 지니고 있던 나에게, 처음으로 생물학이 재밌을 수 있고 또 그렇게 "정치적으로 위험한" 담론이 아닐 수 있다고 알려준 사람은 스티븐 제이 굴드였고 그 다음이 다나 해러웨이인 것 같다. 생물학은 어쩐지 내가 선호하는 담론들과는 상충하는 측면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진화생물학(들) 같은 담론은, 사실 성차를 심각하게 정당화하고 또 '자연스러움'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유포하는 과학의 탈ㅡ객관적, 전문적으로 보인다는 의미에서ㅡ을 쓴 악덕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구학적 우생학 담론, 또 심각한 인종주의적 담론과 너무나도 쉽게 연결된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한 생물학 수업에서 발표하는 애들의 주제나 이런 것들을 보고서 토할 것 같았던게 제법 있었던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나의 편견은 계속 재생산된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다윈의 대답> 1권을 읽고서는ㅡ훑어 본 나머지 권들은 정말 쓰레기라고 생각. 몇 장 읽고는 너무 뻔해서 던져버렸다ㅡ썩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피터 싱어에게도 '아쉽지만 안녕'을 고할 정도였으니. 그나마 1권은 나은데도 불구하고(다윈주의 좌파라는 개념은 아직은 미숙한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막연하지만 꽤나 강한 생물학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굴드의 책도 <풀하우스>만 읽었고, 해러웨이는 DBPIA 등에서 논문 약간과 블로그 포스팅 약간을 본 정도이다. 굴드의 책은 엄청 재밌었는데, 그에 반해 해러웨이에 관한 글들은 꽤나 어렵고 또 한편으로는 '억지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해러웨이가 싫어질 정도로. 하지만 이 대담집을 보니 그 논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논문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고. 하긴 해러웨이가 어렵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으니까. 연구하는 사람들도 지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 같고. 어쨌든 해러웨이가 사용하는 몇 가지 은유들은 참 마음에 든다.

덧붙이자면, 은유는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개념 비스무레한 것들을 계속 만드는 것도 되게 중요한 것 같다. 예컨대 예전에 여이연 강좌 들을 때 만들어진 조어(?)인 퀴어 메스티자(Queer Mestiza) 같은 것. 딱 봐도 어딘가 그럴싸하면서도(발음 했을 때 더 그렇다^.^;) 좀 얘기를 들으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기존에 쓰이던 다른 개념들과의 차별성과 차이를 드러낼 수 있으니까. 위에 인용한 걸로도 여러가지 조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컨대 호모 믹소트리쿠스Homo Mixotricus(?)라든가; 뭐 당연히 유통되지는 못하겠지만ㅎㅎ


입시만 끝나면, 해러웨이를 볼 수 있으려나. Haraway Reader 같은 책들도 있을 것 같은데-



이는 "괜한 호기심"에 검색해 본 Mixotricha Paradoxa에 대한 소략한 정보. 출처는 microbewiki.kenyon.edu. 발로 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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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xotricha paradoxa ⓒ Dean Soulia

Mixotricha Paradoxa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는 흰개미인 Mastotermes darwiniensis의 창자 속에서 발견된다. 그들의 형태학적인 특질 때문에, Mixotricha는 핵으로 이루어진 세포의 역사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Mixotricha는 이빨 모양의 세포체이다. 총 4개의 편모가 있으며, 그 편모 중 하나는 회귀적recurrent(?)이며 몸에 부착되어 있지 않다. 그 편모들은 약하기 때문에 세포체의 실제적인 움직임 보다는 방향을 조절하는데 사용된다. Mixotricha는 또한 이동을 위해서 섬모들을 사용한다. 그 섬모들은 세포의 표면에 붙어 있는 실제의 스피로헤타spirochete(나선상균의 일종)이다. 또 세포체 위에는 막대기 모양의 정연한 패턴을 지닌 박테리아가 있다. Mixotricha는 미토콘드리아를 결여하고 있지만, 미토콘드리아가 수행하는 역할을 충족시키는 박테리아 내적 공생자endosymbionts를 갖고 있다. Mixotricha 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박테리아는 총 4가지의 종류가 있다. Mixotricha는 종속영양생물heterotroph이다. 그들은 나무를 먹는 원형생물protist이다. 그들은 Mastotermes darwiniensis의 창자 속에 서식하면서 그 개미가 섭취하는 나무의 소화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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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otermes darwiniensis ⓒ Ecowatch

Mixotricha는 흰개미termite Mastotermes darwiniensis와 공생적symbiotic인 관계를 맺는다. Mixotricha는 인류에게는 직접적으로 병을 유발하는pathogenic 위협을 가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해로울 수 있다. 흰개미의 창자에 Mixotricha가 없다면, 흰개미는 곧 죽는다. 그들이 흰개미 종을 살아 있도록 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는 해로울 수 있는 것이다.

* 아니 근데, 이 말인 즉슨, 흰개미는 해로운 생물이라는 것? 왜? 집 파먹어서?

Posted by 비앙

"What is important in a work is what it does not say. This is not the same as the careless notation 'what it refuses to say,' although that would in itself be interesting: a method might be built on it, with the task of measuring silences, whether acknowledged or unacknowledged. But rather this, what the work cannot say is important, because there the elaboration of the utterance is carried out, in a sort of journey to silence."

"한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작품이 말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라는, 그 자체로는 흥미로울 수 있지만 조심성 없는 주석과 같지 않다. [작품이 말하기를 거절하는 것ㅡ즉 작품의 침묵에서] 그 침묵들이 인정되든 인정되지 않든, 침묵을 측정하는 과업과 함께 [그 침묵 위에서] 하나의 방법론을 쌓아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작품이 말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일종의 침묵으로의 여정 같은 것을 통해서 발화가 정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Pierre Macherey (G.C.Spivak, Can the Subaltern Speak? 에서 재인용)




아.. 이건 별개로 치고, 정말이지 10번 넘게 들여다봐도 저~언혀 이해가 가질 않는 문단이 있다.
그 문단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어찌해야할까 ㅠㅠ

"The postcolonial intellectuals learn that their privilege is their loss. In this they are a paradigm of the intellectuals."

비교적 간단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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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2008/02/01 00:15

진태원씨의 블로그에 갔다가 재밌어보이는 책을 발견하였음! 바로 이 책..


이런 책도 있구나. 구미가 당긴다 당긴다! 지름신도 오신다! (책 값은 무려 5만원; 예전에 받은 상품권 한 장 남았는데 지를까 말까...) 설 연휴에는 어차피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좀 두툼한 책이라도 읽고 싶었는데... 이 책의 시각에 동의하든 말든 그건 추후의 문제고, 일단 분량이나 자료의 수준에 압도될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고?>(무려 500여쪽!)와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도착했는데 요런 책보단 왠지 이 역사서가 더 땡기는 이유는...

이는 출판사 소개.

현재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을 둘러싼 논의가 무성한 가운데, 유럽 좌파의 거의 모든 역사를 일별할 수 있는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책에서 다루는 1848년부터 2000년까지의 ‘(매우) 긴 20세기’는 가히 좌파의 세기라 이름붙일 만하다. 지은이 제프 일리는 유럽의 구석구석에 눈길을 주면서 150년에 걸친 좌파의 역사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분량만 방대한 것이 아니라 다루는 내용 역시 시기적, 지리적으로 무척 광범위하다. 여기서 말하는 좌파는 온건한 사회민주당에서부터 볼셰비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비밀 무장투쟁 옹호론자들에서부터 1968년 이후의 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력을 아우른다. 소련 붕괴 이후에 출간된 몇 안 되는 좌파 역사서의 하나로서 이 책은 냉전의 두 진영 및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양극단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고 냉정한 시각에서 좌파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또한 지은이는 운동 진영의 승리와 패배, 혁명의 성공과 타락, 민주주의의 확립과 파시즘의 파괴 등으로 점철된 극적인 역사를 서술하면서도 결코 좌파를 낭만화하거나 이상시하지 않는다. 읽는 이가 질릴 정도로 침착하고 냉철하게 구체적인 사건과 역사적 과정을 써나갈 뿐이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1848년 혁명이 패배한 직후인 1860년대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산업자본주의가 팽창을 거듭하는 가운데 좌파가 새로운 정치조직을 모색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 시기에 속속 생겨난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의회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한편 혁명적 변혁을 부르짖었다. 1914-23년의 두 번째 시기는 미증유의 전쟁이 야기한 풀뿌리의 전투성과 의회민주주의의 대안을 추구한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의 등장을 특징으로 한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56년까지 이어지는 세 번째 시기에는 대공황과 파시즘의 충격 및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기반으로 하여 서유럽에서 의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확립된다. 1968년 이후를 다루는 마지막 4부에서는 기존의 개혁주의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한 신사회운동이 전면에 대두된다. 3부까지의 서술이 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전통을 중심에 두면서 그 전통이 생략하고 축소한 여러 계기와 쟁점을 부각시킨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좌파가 놓친 기회나 가지 않은 길, 알든 모르든 간에 저지른 오류를 탐색한다면, 당대를 다루는 4부는 새로운 정치를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의 윤곽을 살피면서 미래로 시선을 돌린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자연스러운 합의나 경제적 번영, 냉전이라는 부정적인 접합제로부터 유기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만든 것은 갈등과 투쟁, 봉기와 반란이었다. 민주주의는 19세기 말에 처음 꽃을 피운 사회주의, 페미니즘, 공산주의를 비롯한 여러 급진운동이 다양한 결집을 이루면서 공들여 만들고, 계속 확대하고, 집요하게 지켜온 것이다. 유럽의 좌파는 1차대전 이후의 혁명적 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했고, 파시즘의 위협과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며, 1945년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결론부에서 지은이는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현대성’이라는 산만하고 공허한 말만을 제시했고 잔존한 사회주의 정당들 역시 이것을 모방해서 대응하는 데 급급했다면서, 그러나 이미 짜맞춰진 새로운 영역에 사실상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있던 ‘새로운 중도New Center’나 ‘제3의 길’ 같은 공허하고 불명확한 개념들은 실행 가능한 민주적 변화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의 대체물이 결코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좌파’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더욱 폭넓고 엄격한 틀, 나아가 그것의 모든 사회경제문화개인적 차원과 동일시함으로써 20세기 마지막 30년의 사회주의의 위기로 인해 야기된 무력감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는 진태원씨의 블로그(이곳)에서 퍼온 "출판사에서 제공한 발췌문의 일부"이다. 함부로 퍼오면 안 될 것 같긴한데... 두고두고 보려면 어쩔 수 ㅠ.ㅠ)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그냥 가려둡니다... 발췌 부분만 봐도 소장하고 싶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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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지나간 시간이 그 내용과 관계없이 결국은 수치이자 죄의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나이들어 늙게 되면서 비로소 깨우쳤다. 그것의 시작은 행복하다고 느껴보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감정이 죄의식과 연결되는 것은 무언지 모를 막연한 자신의 과실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느 순간들을 그대로 헛되게 흘려보냈다는 과도하게 예민한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혹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그 소심하게 겁먹은 비굴함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으리라는 지레짐작 때문이다. 내가 늙기 전에는 그것이 단지 개인사의 불행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의 계단을 점점 더 많이 내려오면서 죄의식은 그 자체가 곧 과거의 보편적인 거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어느 순간의 빛나는 기억조차도 그것이 과거의 것이 된 이상 수치나 죄의식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으로 변해버린다. 그 수치는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고 무지와 경솔함에 대한 도덕적 수치이며 필연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해 깊은 환멸과 회의로 종결된다. 수치의 쌍둥이이자 더욱 견고하고 지속적인 형태인 죄의식은 개인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각 기관에서 효소처럼 비밀스럽게 분비되어 배출되는 일 없이 일생 동안 조금씩 쌓이는 매우 비선택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일생 동안 어떤 윤리적인 판단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죄의식,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둔할 뿐이다. 아무런 외관상의 흠 없는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영원한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는 듯 하다. [...]

[...] 죄의식이란 이렇듯 철저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자아를 위해서 발생하며, 그 자체는 숭고한 이상이나 도덕적 결벽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래서 휴머니즘이나 종교적인 헌신과도 무관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단지 사정없이 증폭될 수 있을 뿐이다.

배수아, <훌>, pp. 12-14 [강조는 namunnib]


아... 이걸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느껴야하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단련되는 느낌이다. 나는 죄의식으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래도 죄의식의 컨텐츠는 바꿔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울하지 않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 옛날엔 멋있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매우 구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배우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 역시 지금은 매우 구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느 것으로부터도 전혀 해방될 수 없을 것이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의도한다고 해서 발생할 수 있는 효과도 아닐 것이며, 책을 읽는 행위 그 자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요즘엔, 할일이 없어서 마지 못해 읽는다는 말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읽는다는 말이 차라리 와닿는다. 그렇다면 (요즘엔 몇권 읽지도 않지만) 나는 왜 책을 읽는가? 그게 참...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이지 미스테리다; 흐흐


**

그나저나 "나이들면서 깨우친다"는 말, 옛날엔 무지 불편했던 말이었는데 이제는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깨우친다는 것은, 성숙이란 말과 유사어일 수는 있어도 동일어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깨우친다는 말과 성숙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다른 말이다. "깨우치는 것"은 자아의 (때로는 급진적이지만 대개는 부분적인) 변화를 포함하며, 따라서 깨우친 이후의 자아와 이전의 자아는 전혀 같지 않다. 깨우침의 '번쩍이는 순간'이란 언젠가 반드시 있으며, 그것은 설령 타인에게는 비의적이고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적어도 깨우친 개인에게는 매우 진정성 있는 순간이다. 그 진정성을 따를 것을 선택하면, 우리는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또한 깨우치는 것은 미로에서 헤메는 것이 아니라 그 미로를 거칠게 파괴하고 새로운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는 다르게 성숙은 자아의 연속성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계속 자신을 단절시키는 자아는 성숙할 수 없다. 그리고 성숙은 연속적인 개념으로, 따라서 미래에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과거를 떠올리며 회고적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미로에 익숙해지는 것을 뜻한다. 성숙한 자는 미로에 종속되기 보다는 미로의 주인이 될 것이며, 점차 미로를 즐기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인을 우리의 미로로 초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성숙한 우리는 지나치게 독선적으로 될 수 있으며 권력 지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할 것이다. 성숙은 독이 될 수 있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성숙한 자아는 곧 썩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라면, "나이들면서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들면서 깨우치는" 삶을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나는 항상 단절적으로 나의 삶을 구성했으므로, 한번도 성숙한 적이 없었다(이건 나에게 어떤 특권이나 우월함을 부여한다기보다는, 나를 옹호하고자 함에 지나지 않음). 그래서 나는 항상 날이 서있는 편이다. 미로를 갓 파괴하고 나온 자의 손에는, 해머나 도끼같은 거친 무기가 들려있기 마련이다. 방금까지도 그런 무기를 휘둘렀기 때문에 늘 숨이 차있고 여유가 없으며 지쳐있다. 게다가 새로운 미로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늘 불안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도전정신", "패기" 따위가 아니다. 단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선택할 권리는 갖고 있지만, 어차피 우리에게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성숙한 사람들을 보면 늘 끌리면서도 어딘가 불편하다. 그 사람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은 것 같아서, 그 사람은 나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사람이 나를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늘 그 사람 앞에서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이걸 열등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가 며칠간 헤메었던 미로를 하나 갓 파괴하고 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러니까 아직은 해방의식에 젖어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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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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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ritte, <Les Amants>



우선 라캉의 테제(?) 중 하나인 "사랑은 하나의 희극적인 느낌이다"를 기억해두자.

희극 예술과 관련하여,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사물[das Ding]이 대상 층위로 강하하는 것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희극들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숭고한 대상이 결국 그것의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실추된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실추가 (웃음은 대상의 숭고한 측면을 지탱하기 위해 이전에 투여되었던 리비도적 에너지를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프로이트적 정의와 부합하게도) 우리를 웃게 할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는 훌륭한 희극이 작동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헤겔이 매우 잘 알고 있었듯이, 진정한 희극적 웃음은 조소어린 웃음이 아니며, 남의 불행에 즐거워함Schaden-freude의 웃음이 아니다. 희극에는 한갓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는 진술의 변주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참된 희극들은 외관들 배후의 나체성이나 공허함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보다는 공허함(또는 나체성)을 구성하는 데 종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희극들은 이 벌거벗음이 상이한 여러 각도에서 탐색되고, 그것을 내보이는 바로 그 과정에서 그것이 구성되는 환경들이나 상황들의 전체적 설정을 편성한다. 그러한 희극들은 사물을 옷벗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의 옷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음, 이것은 면이고 이것은 나일론이고, 여기엔 예쁜 신발이 있네ㅡ이것들을 다 한 데 모으면, 우리는 너에게 사물을 보여주게 될 거야." [하략]

알렌카 주판치치, 이성민 역, <정오의 그림자>, p. 248


오오... 음, 인식적인 '충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용한 부분은 "희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이다.

인용한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사랑-대상선택은 대개 승화sublimation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파악하면, 사랑-대상을 숭고하고sublime 고상한 위치로 격상시킴으로써, 대상에 초월적인 지위와 접근불가능성을 상상 속에서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그 대상은 "비인간적인 파트너"가 되고, '숭배'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이상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타입의 사랑-대상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승화를 거친 사랑-대상선택은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승화' 방식과 맞물린 사랑 양식을 대상에 대한 폭력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대상을 '승화'하지 않고서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승화 과정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특수한 승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이 보기에 이 특수한 승화는 "향유를 인간화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전개하는 주판치치의 모든 논의는 저기 인용한 부분에 압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승화 : 정신분석학에서 승화란, 리비도(충동의 심리적 측면)가 단지 성(性)적인 대상에게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비도의 투사 대상에 어떤 변화를 주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즉, 승화란 "사회적 평가가 참작되는 일종의 목표 수정과 대상의 변경(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이다. 우리는 리비도가 asexual하고 사회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을 향하고 있으면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그만 두고 다음에 더 얘기하고 싶지만, 그냥 한 가지만 더 언급해보자. 오늘날 사랑에 대한 표상체계를 굳이 구분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그야말로 전통을 물려받아 상징들과 기표들의 그물망 속에서 노니는 사랑에 대한 표상이고(예컨대 완전히 통속적인 이성애 연애와 결혼 등의 사회제도 장치들 속에서의 사랑), 다른 하나는 그런 것들을 싹 치워버리고 '이자-관계'(혹은 '삼자-관계' 속에서) '순수한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표상이다. (물론 각 개인들이 하고 있는 개개별의 '사랑'은 이 표상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들은 그냥 '있는' 것들이고, 단지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표상 체계가 이러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전자의 것일테고,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오는 사회생물학적 서적들의 설명은 후자에 가까운 것일테다(혹은 섞여 있다. 사실 후자의 것은 어느 표상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퇴행적 나르시시즘에 기반해 있으니). 하지만 이러한 표상체계에서 잊혀지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 사랑이란 행위 그 자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의미인지에 대한 의문들이다. 다들 알겠지만 사랑은 제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욕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랑은 그 자체로 욕망 체계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욕망을 초과하거나 혹은 심지어 욕망의 순환을 중단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주판치치의 글은 이러한 생각을 진척시키는 데 힌트를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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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크릉.. 자크 랑시에르의 책을 기대하고 있던터라 서점에 나오자마자 반가워하며 샀건만, 도대체 막 들여다 봐도 당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결국 영역본을 도서관에서 빌렸다(불어본은 읽을 수 없으니;). 근데 영어본과 한국어본의 번역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니 왜 두 책이 아예 다른 소리를 하는거야 -_-)! 그렇다고 영역본을 무작정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국역본을 읽는 것도 잠시 보류해둔 터였다.


결국 알라딘에 갔다가 로쟈님의 코멘트를 보고야 말았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그 이상의 오역을 읽게 될 것이다!"


... 캭! 으어어 정말 "<인간사랑>에 대한 증오"가 시작될 판이다 -.-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도, <민주주의의 역설>도 읽다가 번역에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아서 저만치 버려둔 책들인데.. 게다가 <민주주의의 증오>의 표지에 "la haine"가 아니라 "la haime"라 적혀 있길래, 내가 스펠을 잘못 외고 있었걸로 오해까지 했다. 설마 표지까지 이럴 줄은.. 으으 환불할 수도 없고 이거;



참. 랑시에르 책의 번역본 출간 예정은 다음과 같음(출처 : http://blog.naver.com/virilio73/80045004592)

  •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La haine de la démocratie, La Fabrique/2005) [인간사랑/2007]

  •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 Cinq leçons sur l'émancipation intellectuelle, Fayard/1987; 10/18 Poche/2004) [도서출판 궁리/근간예정]
  •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Aux bords du politique, Osiris/1990; La Fabrique/1998; Folio/2003) [도서출판 길/근간예정(번역대본은 1998년판)]
  • <감각의 배분>(Le partage du sensible, La Fabrique/2000) [도서출판b/근간예정]
  • <불화>(La mésentente. Galilée/1995) [도서출판 길/근간예정]

역시 http://blog.naver.com/virilio73 에서 알게 된 랑시에르에 관해 읽을만한 글들.

- http://www.dambee.net/news/read.php?idxno=292&rsec=MAIN§ion=MAIN
- http://myhome.shinbiro.com/~spinoc/essays/rancier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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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추함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무언가를 추하다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추하다고 부르는 것에 대한 금기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그 까닭에 대한 설명을 찾으려면, 이른바 '도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의 등장을 살피기 전에 먼저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의 진화와, 도의적 공정성 운동과 소비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공모를 살펴보라.) 요는 지금까지 아름답다고 간주되지 않던 것에서 아름다움을 (또한 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이후, pp. 30-31

2004년, 이 심미적(?)인 작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당시 놀기 좋아하는 꼬꼬마에 지나지 않던 나는 그 애도 행렬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만... 지금은 괜히 애도하고 싶어진다. 그만큼 좋다는 얘기다(하지만 불행히도 그럴 만한 재간이 없다).

손택의 글은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 나는 그녀의 글쓰는 능력이 정말(곱하기 100번해도 모자를 정도로) 부럽다. 읽는 독자들의 머리를 마구 강타하는 그 사유의 힘도 부럽기 짝이 없다. 헝 ㅠ.ㅠ 게다가 '쉽게' 쓰잖여!

물론, 오늘날의 (넓은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소비주의 이데올로기'가 갖는 뿌리 깊은 공모성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전혀 신선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화폐 앞의) '평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손택이 지적하는 대로, 이러한 흐름과 맞물려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엘리티즘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세간의 거센 공격을 받는다. '아름다움'은 전통적으로 "(손택의 말로) 계층을 수립하는 기능을 하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여러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들을 강조해야겠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보다 '중립적'이고 '올바른' 표현으로 보이는 "흥미롭다"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과연 이런 표현이 '솔직한' 것일까? 사람들은 "흥미롭다"는 말을 단지 무엇인가를 감추고 싶어서 쓰는 것은 아닌가? (한국의 상황에서 '흥미롭다'라는 말보다 더 극적이고 자주 쓰이는 표현은 '재미있다'일 것이다.. 아마도 '흥미롭다'라는 말은 'interesting'의 번역어일테니까. '흥미롭다'라는 역어를 '재미있다'로 전부 다 바꿔도 대강ㅡ아니, 어떤 경우에는 보다 더 맞아 떨어지는 듯)

스튜어트 홀이 지적하는대로, 오늘날의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무계급성감각sense of classlessness'라는 효과를 낳는다. 즉 사람들은 더 이상 여전히 사회에 진하게 남아있는 '계급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만인은 화폐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서 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계급을 확인하거나 확인 받는 일에 대해서 '거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별짓기'를 할 수 있는 표현들을 아예 쓰지 않거나 다른 표현들로 대체해 버린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식으로 언어 상의 대체가 일어나도, 계급성이 실제로 사회 속에서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계급성, 계급간의 적대를 단지 단어 상으로만 감춤으로써, 계급(성) 재생산과 계급 구조의 유지라는 효과를 초래할 따름이다.

손택은 오늘날 "무엇을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아름다운가 아닌가 (혹은 선한가 아닌가) 하는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다. 흥미로움은 이제 계속 영역을 확장해 나아가려 하는 소비주의적 개념이 됐다. 무엇인가에 대한 흥미가 커질수록 흥미가 커진다"고 지적한다. 오늘날에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또 바로 뒤에 이어서 (내가 보기엔 정말) 놀라운 말을 계속 하고 있다. 즉, "부재, 공허로 인식되는 '따분한 것'은 그것[흥미로움]에 반대 작용을 하는데, 곧 흥미로운 것을 무차별적으로 아무 뜻 없이 긍정하게 한다. 현실을 불분명하게 경험하는 기묘한 방식이다."

뒤에 이어서 손택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젠더성을 지적한다. 잘생긴handsome과 아름다운beautiful이라는 말을 대조해가면서. 끄덕끄덕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한국의 맥락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예컨대 한국에서는 "잘생긴(아름다운) 책(handsome book)"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으니까;) 여기에서는 생략해두려고 한다. 헌데 손택이 어디에선가 자기를 '-ist'로 붙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했던것으로 기억하는데... -ist라면 -ist 맞는듯;


덧붙이자면, 손택도 지적하는 바지만, 확실히 이런 말은 우습다. "저 저녁놀은 흥미로운데." ...(;;;)... 낄낄


p.s) "도의적 공정성"이라는 역자의 번역어 선택은, 왜 그랬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사실 이해하자면 이해할 수도 있다. 사실 PC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고 지칭하기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PC는 '도덕'에 가까우니.. 하지만 그 번역어 옆에 political correctness를 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예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구글링 해보니 아예 안쓰이는 표현은 아니었다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political의 번역어가 어떻게 '도의적'이 될 수 있지? 게다가 손택은 칼 슈미트까지 인용하고 있는데... 그냥 많이 쓰는 표현인 '정치적 올바름'이라거나 '정치적 공정성'이라고 쓰면 훨씬 잘 와 닿을수도 있었을텐데.. 조금 아쉽달까 :-) 근데 오늘날 '정치'라는 말이 독자들에게 주는 '거북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려나? 그렇다면 슬픈 일이고ㅠ 근데.. 에에.. 모르겠다!! 이렇게 써 놓고 나니까 도의적 공정성이라는 말도 나쁘지 않네; 오히려 '정확한' 개념이란 생각도 들고 -,ㅡ...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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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