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하는 쇼팽 200주년 기념 행사의 마지막 리사이틀에 갔다 왔다. 별로 기대를 안하고 갔...다고 하기는 좀 무엇한게, 리사이틀 시작 전에 제일 먼저 공연장에 도착했기에... 여하튼 덕분에 제일 앞에 앉을 수 있었고 연주 하는 이의 몸에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빠르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통통한 손가락, 격정적인 순간에 부르르 떠는 몸, 딱딱 끊어지는 몸짓, 몰아치기 바로 직전에 들이켜는 콧소리, 연주 한가운데서 흐르는 땀방울까지, 이 모든 게 다 가까이서 전해졌다. 일찍 온 게 다행이었지. 연주 시작 직전의 몰입과 침묵의 시간, 연주가 시작하고 끝날 때 수트의 단추를 잠그고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살짝 삑사리 난 부분도 있었는데, 유명한 피아니스트도 삑사리를 낼 수 있다는 게 차라리 정직한 일이겠지. 리사이틀은 너희들 연주 들으러 온거지 다른 거 뭐 필요한 게 있냐는 듯, 인터미션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안내나 소개도 없이 진행되었다. 원래 리사이틀은 다 그런가? (내가 교양이 없어서..) 아무튼 무척 아쉬운 건 피아노 어떤 건반을 누를 때 쇳소리가 살짝 길게 난다는 거. 다른 데도 아니고 음대 콘서트홀에 있는 피아노인데 쇳소리가 나면 좀 그렇지 않나. 이 리사이틀에 비하면, 그제 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공연은 정말... 거기에 쏟아 부은 돈으로 차라리 학생들 창작극에 지원해주면 좀 좋니?
대학원 생활이나 대학원 수업이 재밌냐는 질문을 여전히 많이 받는다. 아무래도 첫 학기니까 그렇겠지만, 악의 없는 이런 질문을 받고 나면 조금 지친다. 모든 질문에 따르는 답변의 형식과 내용은, 이미 질문 자체에 어느 정도 내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원 공부는 재미의 영역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재미'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대학원은 '진정한' 삶이 아니기 때문에? 악의 없는 이런 사교적인 질문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을 보면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요 며칠 동안 왠지 조금 닳아버린 느낌이다. 오전 수업을 듣는 내내 장차 잡혀 있는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내일도 조금 먼 걸음을 해야 하고, 모레와 글피에도 멀리 갔다 와야 한다. 갔다 와서는 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군... 그러면 바로 월요일이 될 것이고, 다시 수업을 들어야 할 것이고... 정말 이번 학기는 지독하게 긴 것 같다. 즐거운 일은 잠깐이고, 씁쓸하고 쓸쓸한 일은 여러 겹으로 한꺼번에 터진다. 가끔 억울해질 때도 있다는 게 싫다.
'대학원'에 해당되는 글 9건
- 2010/10/28 10월 28일
- 2010/10/13 윤리, 단독성, 소설, 나 (4)
- 2010/07/09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 2010/06/20 6월 20일 (2)
- 2010/04/24 믿음을 상실하는 과정
- 2010/04/13 이론 공부
- 2010/04/10 힘을 빼고 싶어 (2)
- 2008/03/08 3월 8일 (4)
- 2007/12/12 모르겠다;
나는 이 소설을 근래 보기 드문 최상급의 사랑소설로 읽었고(연애소설이 아니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별로 겹칠게 없는 다른 범주라고 생각한다. 또 난 연애엔 도통 젬병이므로), 또한 윤리적 탐문으로 읽었다. 사랑과 윤리의 불가분적 관계. 사랑하지 않고 윤리가 어찌 있을 수 있으며, 윤리적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 어찌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혹은 이 소설을 마음에 품고 있는 한, 만났을 땐 손쉽게 서로 인지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라는 착란마저 들게 한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소설을 언젠가 쓰게 된다면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까 싶은,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공이 생긴다면 써보고 싶게 만드는 좋은 소설.
소설 자체에 대해 어쭙잖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과제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부분이 있어 옮겨두려고 한다. 소설에서 인용한 건 아니고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한 부분이다.
이 작가에 대한 기왕의 비평적 논평들을 존중하기 위해 '환상'이라는 용어를 고수했지만 사실 적절한 단어라고 하기 어렵다. 복잡한 문학 이론의 문제들은 제쳐 두고라도, 도대체가 이 소설에서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 주체가 어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발생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인' 환각을 뜻하는 환상이라는 용어로 그 현상을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간 비윤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차라리 '극(極)현실'에 가깝지 않은가.
황정은이 (이 소설뿐만 아니라 기왕의 작품들에서도) 환상을 동원하는 까닭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방금 짚어 본대로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수단으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종류의 것일 때, 소설가는 그 극한의 불행을 어떻게 소설화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학(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자세)의 문제다. 벤야민이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한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178-9)
원래는 문학이론을 가장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너무 붙어 있어서는 데일 수밖에 없으니 '취미'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언제나 스스로 환상 구조ㅡ행위자성, 혹은 주체를 탄생시키는ㅡ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결국엔 자신감 부족일테지) 그것은 잠시 미뤄둔 채 인류학 관련 전공, 더 넓게는 '질적 연구'를 하는 전공에 들어 갔다. 왜냐면, 나는 더 이상 "정보들"을 생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독성"을 밝히고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질적 연구방법론이 할 수 있는 것에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공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때때로 나는 오가는 이야기와 그 결과물에서 "단독성"에 대한 열망을 조금씩 읽을 수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그 열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아직 석사 1학기라 왜 그 전공을 택했냐는 말엔 상대방이 가장 원할 것 같은 말, 혹은 주변 상황에 따라 적당히 조절해서 말하곤 했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단독성"의 문제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블로그에라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요즘 수업에서 강독하는 버틀러 책의 일부분은 마침 이 단독성(singularity)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단수성인가, 단독성인가, 특이성인가, 혹은 독특성인가. 그 무엇으로 번역하든 universal-particular라는 이분항이 아닌 third term으로서 singularity 개념이 적확하게 한국어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지금 당장은 산적한 과제를 해치우고.. 방학 때 조금 더 몰입해 볼 주제.
부록 : http://webzine.moonji.com/?p=2910
나 이렇게 조금 수줍은 인터뷰가 완전 좋아 *-_-* 다음 작품 이야기에서 완전 기다리게 된다. 이 인터뷰도 한참 전에 봤는데 블로그에 올려서 나눌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이.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자아에 대한 설명 (0) | 2010/10/24 |
|---|---|
| 아 재밌겠다 (0) | 2010/10/20 |
| 윤리, 단독성, 소설, 나 (4) | 2010/10/13 |
| 달 (0) | 2010/09/05 |
| 글을 잘 쓴다는 것(벤야민) (2) | 2010/08/20 |
보부아르는 '여자(woman)'라는 것은 역사적 관념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문화적 해석 혹은 생물학적 사실성의 의미작용으로서의 젠더는 구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한 구분법에 따르자면 여성이라는 것(to be a female)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실성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분법에서 여자라는 것(to be a woman)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것(to become a woman)이며, 신체를 '여자'라는 역사적 관념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제한된 가능성에 신체를 복종시키고 물질화하는 것이며, 신체적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급진적인 의지의 창조적인 힘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라는 개념보다는, 젠더 수행이 언제나 그리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일종의 감금 상태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젠더는 문화적 생존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 전략으로서의 젠더는 징벌적 성격의 결과를 낳는 수행이다. 젠더는 하나하나의 개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humanize)' 동시대 문화의 한 부분이다. 사실, 젠더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한 이들은 규칙적으로 처벌받는다. 젠더가 표현하거나 외재화하는 '본질'이란 것도 없고 젠더가 갈망하는 객관적인 이상이란 것도 없으며 그리고 젠더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젠더의 다양한 실천은 젠더에 대한 관념을 생산하며 그러한 실천 없이는 젠더는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젠더는 규칙적으로 그 기원을 은폐하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문화적 픽션으로서 분리되고 양극화된 젠더를 수행하고 생산하고 유지하는 암묵적인 집단적 동의는, 그것이 생산하는 신빙성에 의해 애매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젠더의 저자는 젠더의 구성과정이 개인의 신념을 필연성과 자연성으로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다양한 신체적 양식을 통해 물질화된 역사적 가능성은, 단지 감금된 상태에서 체현되고 위장된 징벌적 규제를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_주디스 버틀러, <수행적 행위와 젠더의 구성>의 일부분
사실 글 자체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내가 과문하여 한국어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고 있다. 공유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참 많은데... 내 언어 실력에 한숨만 나오는 요즘.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접하는 과거의 버틀러는 여전히 매혹적. 누군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비록 타 학과에 속해있지만, 어쨌든 나는 인류학 전공을 희망하는 대학원생이( 될 예정이)다. 전공은 anthropology of education 이지만 나는 근본적으로는 인류학 지향이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교육학이나 인류학은 모두 인간의 문화화와 사회화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사회화하는데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사회를 인간화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건 교육학이라기보다는 인류학이라는 생각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난 후자를 택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알려진 어떤 인류학자는, 페미니스트 인류학은 젠더의 구성에 대해 묻는 학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제도들이 어떻게 젠더라는 프리즘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면 타당한 주장이다. 모든 사회 제도와 문화적·언어적 실천들은 모두 젠더라는 프리즘 없이는 제대로 구성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페미니스트 인류학인가? 그냥 젠더 연구지. 그의 관점에 따를 경우에도 젠더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화된다. 그리하여 젠더는 아무런 질문 없이 실체이자 본질이 된다.
반대로 버틀러는 그러한 실체화와 본질화 과정에 대해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했던 얼마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때론 잊고 지내도 결국엔 다시 돌아와 참조하게 되는게 바로 그녀의 글이다. 가끔은 유일하게 신뢰하며 읽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릴지라도 말이다.
덧) 보부아르가 한 유명한 말인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표현의 영역본은 "One is not born, but, rather, becomes a woman"이다. 한글 번역에서 "만들어진다"는 표현은 실존주의자로서의 보부아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을 인용하는 버틀러의 맥락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역본에 따르면 여자가 "된다"는게 맞다. 현상학적 실천, 제한된 가능성 속에서 주체의 극화된(dramatized) 실천으로서, 스스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번역이 어디 없을까?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읽고 싶은 책 : <변증법적 이성 비판> (0) | 2010/07/12 |
|---|---|
| 가라타니 고진, <미학의 효용> 1장의 리라이팅(RW) (0) | 2010/07/11 |
|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0) | 2010/07/09 |
| 자꾸 묻지 말란 말이야 (0) | 2010/06/28 |
| 평등이거나 판타지거나 현실이거나 (0) | 2010/06/17 |
어제 ㅅㄱ 미술관에 처음 가봤다. 차학경의 작품이 하나 전시 된다고 해서, 오로지 그걸 보기 위해 전시회에 갔다. 가는 길에 있던 건물들이 기억난다. 건물들은 높지는 않았지만, 위압적인 벽과 대문, 철조망, 그리고 CCTV 카메라가 있었다. 어느 골목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건물엔 식당이라고 간판이 있었지만 큰 철제 대문이 있어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대문 앞에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벨이 붙어 있다. 그 벨을 누르지 않으면 식당에 들어갈 길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감히 누가 그 식당에 들어가려고 할까. 거기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있을텐데, 그들은 누구일까. 이런 것들이 모이면 gated community가 되는 걸까. 그 길을 따라서 미술관에 가는 건 왠지 지치는 일이었다. 골목골목에 설치된 카메라를 모두 부수고 싶었다. 차학경의 작품에 대해서는, 함구.
* 대안영상을 상영하는 홍대 근처의 공간에서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를 봤다. 사회의 폭력에 더 쉽게 노출되는, 혹은 이미 노출된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아무래도 고통받고 슬픔에 젖어 제대로 일상을 꾸리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구체적인 사람들의 일상을 얼마나 타자화하는지.. 아마 정희진 씨의 글에서 읽었었지.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성산업 종사 여성들을 방문한 자원봉사자들이, 이 여성들이 밝게 웃는 모습을 보자 아이고 밝게 사셔서 보기 좋네요, 라고 말했다던 일화. 이 엄청난 타자화에 깔깔깔 웃지 않을 수 없었지.
폭력에 노출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상징체계로서 사회는 언제나 모든 개인들에게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피해자화' 하지 않고서도 자신에게 가해진 사회적인 폭력을 의미화하고 폭력에 저항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사람이 사회의 온전한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회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피해를 당당하게 입증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있지도 않는 피해를 만들어낼 권력을 가지고 있다(예컨대 힘을 가진 이들이 명예훼손 고소를 남발하지).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기꺼이 귀 기울인다. 반면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실재하는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에 대해 말하는 입을 부정한다. 그건 그 사람의 무능 탓이거나, 폭력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사회 구조의 탓이다.
다큐는 참 좋았다. 아픈 부분도 많았고 즐거운 부분도 많았다. 피해는 실제로 있으며, 그 피해 때문에 괴로운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 괴로움을 평생 안고 가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피해를 피해로서 인정하고, 피해를 정당하게 언어화하며, 피해자 정체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복원하는 순간을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권리이다. 실제 구속력을 가진 사법의 언어가 성폭력 피해와 폭력을 의미화하는 언어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다큐에서 읽을 수 있던 여러 노력들과 언어들과 관계들이 계속 이어진다면 사법체계의 언어 따위는 언젠가는 낙후될 것이다. 그리고 사법의 언어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언어는 아니므로, 언젠가 우리는 복수의 정당한 언어 체계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신형철 평론가가 인용해서 최근 더 유명해진 한나 아렌트의 말을 여기에 끼워 넣어도 좋을까. 이 말을 이 글에 맞게 조금만 바꾸면, "모든 (성)폭력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렌트가 제대로 말하지 않은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앞서 말한대로 그 이야기가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와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물론 아렌트의 저 말은 그 관계와 공간의 가능성에 대한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 관계와 공간이 없다면 이야기로 만든다고 하여도 무슨 소용일까. 관계와 공간은 이야기의 선행 조건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쓰고 말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위한 관계와 공간을 만드는 게 몇 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얼마나 더 멀리 쉽지 않은 길을 가야 할까. 나도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보태야지.
* 어제는 오랜만에 S를 만나 꽤 괜찮은 (하지만 예전에 종로 모처에서 먹었던 게 더 훌륭했던) 단호박 해물찜을 먹고, 신림에서 녹두로 가는 길을 걸었고, 녹두에서는 커피를 마셨다. (녹두는 커피 값이 착해서 정말 좋다. 나는 절대 녹두에 살지 않을 거지만, 커피 값이 매우 싼 카페는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뭔가에 굶주렸다는 듯 말을 많이 했고, 어제는 좀 피곤했던터라 말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던 순간도 많았다. 그리고 교지 모임에도 갔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 반가운 얼굴들. 술을 많이 마셨다. 말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어제 하루는 정말 길었고, 길었던 시간 만큼이나 말도 참 많이 했다. 말을 많이 한 날은 늘 후회하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말도 많이 했던 것 같지만, S라면, 그리고 교지 친구들이라면 아무래도 이해해 줄 것이다.
* 그제 올렸다 지운 글에 함께 올렸던 영상.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아쿠아리움이라고 했다. 가끔 보면 정말 좋다. 느긋해지지는 않아도 왠지 위안은 좀 된다. 잠수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심해에 오래 머물고 싶다.
수학/학업계획서를 쓰다 보니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앞으로의 계획을 최대한 '젊은이'스럽게 말하고 있는데도 우울하다니 말이다. 그나마도 짧게 쓰지도 못해서 표준 서식의 5배를 초과해서 써버렸다. 짧게 쓰지 못한 건, 결코 이 정도로는 내 원대한(ㅋㅋ) 계획을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5배를 넘게 쓰고 여러 번 줄이기 위해서 잘라내고 수정했지만, 실제로 구상하고 있는 것은 반도 못담았다. 그러나 계획서의 단순 길이는 애초부터 문제가 아니었다. 이보다 더 길게 썼으면 더 좌절했을 것이다. 그건 과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처음 생각난건 계획서에서 내가 젊은이인 것처럼 열정을 가장했다는 점이었다. 즉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별로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학과 커리큘럼이 정말 재미있을 것처럼, 정말 내가 학과에 흥미있는 것처럼 글을 써야만 했고 그렇게 썼다. 학기강의계획서를 하나하나 열어보면, 몇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좀 시시하던데. 그러나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고, 또 일상에서 거짓말에 죄책감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거짓말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산담? 게다가 거짓말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다보면, 그 수행은 어느 새 나와 내 주변의 상황을 규정하는 힘이 된다. 그럼 거짓말은 하나의 진실이 된다. 그러니 이건 문제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난 건, 아직 유예기간인 내가, 내 인생에서 실제로 뭔가가 '되는' 걸 거부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학교 3~4학년들이 흔히 겪는 병이 아직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대학원에 간다는 건 사실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교육학과에 가는 건 교육학자가 되겠다는 것이고, 특히 하위 분야에서 질적 연구를 다루는 전공에 지원하는 건 그 중에서도 마이너리티로 가는 걸 의미한다. 물론 나는 진짜로 '그 쪽'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학위는 거쳐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최대한 재빨리 처리하고, 기나긴 '본 게임'에 들어가야할 하나의 예비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갈수록 구조화, 고도화, 폐쇄화 되어가는 이 제도적 몸짓의 장에 들어가야 하는게 못내 씁쓸하지만.
그러니 학위 과정, 학과에 대한 환상은 거의 없다. 다만 어딜 가든 좋은 동료, 선후배, 세미나 메이트, 교수자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래도 교육학과 교수들은 타과 교수들에 비해 낫다는 평판을 들었다. 그들은 어쨌든 교육학과에 다니니까 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 단순한 생각도 든다. 학과에서 케어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나는 알아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쨌든 지금 거기에서 버티고 있는 친구도 있으니, 내가 가서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싫다. 지금의 나는 하루바삐 무엇인가가 되고 싶고, 그 무엇인가가 75%만 마음에 들고 25% 남은 내 공간을 옥죄지만 않는다면 뭐든 상관없다. 또 나 같은 사람은 100%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도 않고, 100% 만족하는 순간엔 아마도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문제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가 오늘에서야 그 끝없는 우울에 대한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읽던 책의 끝을 넘기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가 고학력자가 되어가는 모든 과정은 믿음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석박사급 고학력 실업자, 학자금 빚더미와 바꾼 졸업장/학위증명서, 낮은 사회적 지위, 뭐 이런 것 때문에 학위과정에 대해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에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을 잃다니, 그것만큼 진부한 대학원생이 어딨어? 하지만 그 안에서의 관계가 문제였다. 이를테면 교수자와 학생의 일방적인 착취 관계, 열정과 흥 따위는 없는 강의실, 서로를 믿지 않는 학생과 교수자들, 뭐 이런 것들이었다. 더 추가하자면, 더럽고 치사하고 비루한 교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영원히 모를 것이라는, 그럼에도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 결국 사람에 대해, 관계에 대해, 내 신념에 대해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그 모든 과정이 믿음을 잃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는 두려움. 결국 그게 깊은 우울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어떤 책을 보는데, 저자는 페미니스트 운동/관점(movement/perspective)과 페미니스트 관심(feminist concern)을 구분하고 있었다. 페미니스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참 많아졌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페미니스트 관점을 가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관심은, 오랜 기간에 걸친 운동과 관점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진 연구 주제다. 페미니즘의 주제와 방법론을 전유했기 때문에 언뜻 보면 페미니즘 연구 같지만, 그 연구자를 실제로 만나보거나 그의 행보를 보면 페미니스트라고 할수는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이나 삶의 윤리를 성찰하지 않고도 페미니스트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도 수학계획서에는 페미니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젠더 연구, 젠더에 민감한 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이것조차도 어떤 징후를 감지하게 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오늘 펴본 어떤 책의 저자는 페미니즘의 죽음을 누가 두려워하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서의 학습, 학습하는 몸, 무의식 (0) | 2010/05/30 |
|---|---|
|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 된다." (1) | 2010/05/26 |
| 믿음을 상실하는 과정 (0) | 2010/04/24 |
| 50대 남자사람 (0) | 2010/04/23 |
| 이론 공부 (0) | 2010/04/13 |
연구자와 이론가는 겹칠 수 있는 범주이지만, 평생 연구자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필연적으로 이론가도 겸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는 되고 싶다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론가는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살다보면 그냥 되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쓴다고 해서 이론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실천이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의 삶, 자기의 고통, 자기의 욕망을 설명하는 방법을 찾는 이들은 반드시 이론가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학계에서 일하는 연구자나 여러 단체의 실천이론가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이론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론가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개인, 그리고 그 존재와 정체성 그 자체다.
그래서 이론은 쉽게 섞이거나 융합되지 않는다. 이론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다. 그래서 이론은 공격될 수도 없고, 이론가 개인이 생존해 있는 한 사라질 수도 없다. 물론 누군가의 연구물이나 삶을 다룬 기록물은 건조하게 암기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론을 공부하는 건, 우선 그 이론가의 존재와 삶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론 공부는 누군가의 이론을 암기하는게 아니라, 누군가의 이론을 나에게 적용해보는 것이며 나 스스로가 흡수하는 것이다. 이론가의 앞에서 정보는 지식이 되고 지식은 이론화 된다. 이론가에게 진정한 공부는 곧 이론화의 과정이다. 그런 탓에 공부를 하면서 누군가의 이론을 비판하거나 비난한다는 것은, 사실 그 이론을 만든 개인에게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향해 메시지를 날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론 공부를 통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이 단지 하나의 앎-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그 앎에 대한 나의 감정과 나의 역사가 수반될 때 그것은 나의 이론이 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과 내가 감정 세계를 공유할 수 없다면, 나의 이론은 그냥 외롭고 고독하니 잠자리 베갯닢에 찍힌 긴 물의 흔적과 다를게 없다. 역으로 내가 세운 이론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른 사람과 내가 감정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 때 누군가의 이론은 나의 이론이 되고, 나의 이론은 누군가의 이론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이론가들은 필사적으로 자기의 이론이 들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성주의가 너무나 다양하기에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복잡다단한 여성주의(들)일 수밖에 없다면, 부분적으로 여성주의는 단지 이념이나 연구물이 아니라 이론(틀)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주의가 이론(틀)이라면, 여성주의는 개인의 맥락에서, 개인의 감정과 삶을 반드시 수반해서, 그리고 외우고 학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실천되는 그 무엇일 수밖에 없다. 흔히 언어의 환상 속에서 이론과 실천을 나누어 생각지만, 이론(틀)로서 여성주의 안에서 그 둘은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그렇게 여성주의는 수없이 많은 다른 '-주의'들과는 존재론부터 다른 그 무엇이다. 또한 여성주의는 다른 보통의 '주의'들과는 달리, 내가 앞서 언급한 '이론'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와 학제로서의 여성학은 다른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겹칠 가능성은 있다. 여성학은 학적인 연구 성과일수는 있으나, 이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물론 여성학 연구를 읽는 사람들에 의해 여성학은 이론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루는 소재나 인식론이 얼마나 유사하냐와는 큰 관계 없이, 여성학과 여성주의는 실천되고 공유되는 방식에서 갈리는 것일테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어떤 일이든 하게 되면 잘 할 것 같다고 위로해주지만, 나는 내가 어떤 일이든 잘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규칙적인 주5일 칼 출퇴근이나 안정적인 통장 잔고를 동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생활을 시작하면 내가 어떻게 차례로 무너져 내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만약 주말 출근이냐 야근을 해야하는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차츰 몸이 무너지기 시작해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이고(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다. 병원에 가도 단지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랬고, 또 그렇다), 그러면서 마음이 무너질 것이고 이어서 내 생활과 관계 전체가 붕괴할 것이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내가 안티소셜이자 사회부적응자일 수밖에 없다면, 소위 '사회 생활'에 적응할 수 없다면, 또 일반적이면서 위압적인 이성애적 연애 산업과 시장에도 적응할 수 없다면, 이 세계의 위계 질서와 권력, 억압적인 젠더 체계가 몸서리처질 정도로 싫고 못견디겠다면, 차라리 열심히 공부해서 윤리적인 연구자(혹은 작가)이자 탁월한 이론가가 되는 걸 꿈꿀 수밖에.
물론 지금 가려는 대학원이나 학계가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예술가가 되기엔 언어적 재능도 공간적 재능도 음악적 재능도 부족한 나로서는, 그곳이 이 세계에서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소재와 줄거리, 플롯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언젠가는 소설을 쓰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젠가의 이야기). 나는 거기서 잘 살아남을 것이고, 또 거기서 잘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 해야할 것이다.
지금 하는 것도 다 열심히 할 것이고, 또 언젠가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관계에도 열심히 걸어볼거다.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믿음을 상실하는 과정 (0) | 2010/04/24 |
|---|---|
| 50대 남자사람 (0) | 2010/04/23 |
| 이론 공부 (0) | 2010/04/13 |
| 외모를 어찌 말해야할지 (0) | 2010/03/19 |
| 무서운 할아버지들 (2) | 2010/03/16 |
어제 대학원 입시 일정이 발표났다. 그런데 예년에 비해 정원이 4명에서 5명으로 1명이 늘어났다는 거! 대학원 정원은 늘기보단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왠일이람. ㅎㅎ 예전에 정원 줄인다는 말도 있었고. 사실 성골 진골 출신 자과생 졸업생 2명이 이미 지원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ㅡ그리고 입시에서도 자과생 우대정책이 알게 모르게 있다고 들어서ㅡ동일 단대 유사업종 전공으로 6두품 출신인 나로서는 자리 하나가 굉장히 컸는데(어떤 친구는 내가 6두품이라고 했더니 6두품의 다른 말이 득난이었다고 했음-_-ㅋ 아아 고등학교 국사여), 이젠 조금 마음이 놓인다. 물론 내정자가 5명이라서 정원을 5명으로 늘린 거 아닌가 하는 음모론도 지울 수는 없다 하하
며칠 전부터 <ㅇㅍㄹ의 유령> OST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OST를 괜히 다시 들었다가 요렇게 푹 절어버렸고. 아직 뮤지컬은 계속 하는 중인데 예매를 해둬야할까 역시 며칠 째 고민중. 5월 평일 특정한 날에는 20%할인하던데, R석이 8만원. 낮 3시 공연이라 그런지 자리가 아직 많다. 잘만하면 앞쪽에 좋은 자리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뮤지컬 뮤지컬. 할인해도 8만원이라는 게 너무 크다. 이래서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걸까? 이거 가면 아무래도 그린 플러그드는 패스해야 되겠지? 대규모 락 페스티벌은 일단 가면 좋은데, 막상 가면 너무 사람이 많아서 싫다. 공연 무대 근처에 가면 싫은 신체접촉도 해야되고, 이런 저런 냄새가 섞여 코도 마비되거든. 여름 때 하는 야외공연은 또 엄청 뜨겁겠지? 사람의 체열이나 냄새 같은게 싫은게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라는게 싫다. 막 섞이다보면 이상한 남자애들하고도 부딪히고 아아. 그렇다면 여기 뮤지컬 예매인가 ㅎㅎ
대학원에 붙든 안붙든 서울 생활을 다시 시작하겠지만, 아마 이번엔 예전 살던 동네엔 안 살 것 같다. 그래서 일상에서 가장 필요한 건 아무래도 동네친구들인듯. 편한 복장으로 만나 맥주 500cc씩 하면서 얘기하다가 다시 편하게 각자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음 좋겠다. 아니면 주말 오후엔 소박한 동네 카페에서 만나 각자 읽고 있는 책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도 나누고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음 좋겠고. 이것도 임대료 비싼 서울 땅에서는 큰 욕심일까? 그렇게 모여서는 얼마 전부터 시작해서 수십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 키르키즈스탄의 (<가디언>지가 명명하기로는) "전나무 혁명(fir tree revolution)"에 대해서도 좀 심각하게 얘기할 수 있음 좋겠고, 한명숙 총리 무죄 판결에 대해서도 아무리 봐도 어이 없는 천안호 참사에 대해서도 얘기하면서, 뭔가 할 수 있을지 작당모의할 수 있음 좋겠다. 물론 잘 안 돼가는 연애 얘기를 해도 좋고, 나쁜 상사/동료/교수를 매일 같이 씹어도 좋고, 온갖 연예인 가십이나 소문 얘기도 좋고(나 어이없는 뜬소문 완전 좋아하는데!). 학교 친구도 좋긴 하지만 동네 친구만큼 캐주얼하게 보지는 못하니까.
서울에 왔다갔다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완전 버닝하고 있는 과자. 터미널 근처 편의점에서 팔고 있는데, 아무래도 나만 사먹는 것 같다. 이러다 없어지면 어쩌나 싶어 자주 사먹어야겠다고 결심. 버스 안에서 야금야금 먹다보면 2시간 동안 입이 심심하지는 않은 분량이다. 맛도 맛이지만 봉지를 딱 열었을 때 확 올라오는 크랜베리의 향기가 진짜! 감동이다. 왜 빅뱅이론의 꽃사스미 셸든이 크랜베리 소스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900원이라는 만만찮은 가격이지만 진짜 맛있어! 맛있다고!
1.
곧 졸업이라고 생각하니, 모든게 (적어도 대학 생활에서는)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보내버린 3월 8일도 '마지막' 3월 8일이고, 지인들을 만나는 것도 '마지막' 만남 같고, 지금 하는 일들도 모두 '마지막' 일 같다. 근데 조금은 이상하게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간절해진다거나 아쉬움이 남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이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가는 느낌이어서, 조금 서글퍼질 뿐이다. 손으로 쥐려 하면 쥐려 할수록 더 쉽게 빠져나가고야 마는 물처럼, 내가 잡으려하면 할수록 더 쉽게 빠져나가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손을 최대한 동그랗게 움켜잡고,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들을, 다만 지켜볼 수밖에. 그럼 이번 학기도 어느 덧 끝이 나겠지.
2.
내가 영문학과에 지원한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뜨악'이다. 내가 영문학과에 어울리지 않는 걸까 고민하는 중. 내가 인문대 쪽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다만 ㅇㅎㅅ 쌤은 난 사회학보단 영문학이 어울리는 것 같다는 말을 해주었으니, 그나마 덜 팔랑거리고 있달까; 그리고 난 무엇보다 사회대 사람들ㅡ특히 자기가 뭔가를 하고 있으며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남자애들ㅡ이 무섭다(기 보단 좀 짜증스러운 사람들이 많달까? 아닌 사람들은 또 아닌 경우도 많지만).
하긴 나조차도 내가 영문학과에 적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의 관심사와 전혀 맞지 않을 수 있는 수많은 시, 소설들을 비롯한 텍스트들을 꾸준히 그리고 다소 강제적으로 읽어야하니까. 근데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아직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 내가 '관심사' 운운하는게 좀 웃기다는 생각도 들고. 구려보여도 읽다 보면 새로운 재미가 드는 텍스트들도 많을테니까, 그걸 희망으로 삼자. 심지어 Beowulf도 좀 재밌던걸? -_-
3.
사실 사회학과가 아니라 영문학과에 가겠다고 점점 생각이 기울었던 (여전히 미미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도 있다. 많은 사회학(적) 담론들은 '거대한 힘의 관계'에 대해서'만'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사회 구조, 커뮤니케이션, 이데올로기, 권력 개념 따위는 대부분 이런 '거대함'을 다룬다. 푸코적인 의미에서 '미시 권력'도 내가 보기엔 '거대함'을 다루는 것이다. 수많은 정치 비평용어들과 정치 개념들은, 단지 아카데믹한 공간에서 유통되고 반복되어 재생산될 따름이다. 여기에서 사람들(개별 주체들)이 '어떻게 느끼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은 다뤄지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다뤄지기 힘들다.
나의 최근 관심사는, 이렇게 어떤 담론들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과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들에 좀 더 초점이 있다. 무엇인가가 허구적일 뿐이며, 과학적으로 검증해봤더니 틀린 이야기더라 하는 방식은 사실 정치적인 설득력을 얻기 어렵단 생각이다. 예컨대 오늘날의 화석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잘못됨'과 허위성에 대해서 지적하고 '옳은'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들에 설득되어 자본주의를 반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파토스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종주의가 아무리 잘못되었고 허구적이라고 말한다고 한들, 인종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느끼느냐'인 것이다.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했을 때, 그 말이 과학적이나 사회적으로 허구이냐 진실이냐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그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느냐가 중요하다(집단 귀속감, 안정감 등이 주는 쾌락).
그러한 동시대적contemporary인 거대 담론들에게서 개인들이 받는 '느낌'들은, 학술 엘리트들의 글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예컨대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공포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홉스와 동시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홉스가 느끼던 식으로 세상을 느꼈을까? 오히려 그러한 '느낌'의 보다 충실한 반영은, 동시대적 '문학' 텍스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인 개인들의 '실천'들은 '문학'적인 글에서 더 잘 나타난다는 생각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문학'을 투명한transparent 대상이자 텍스트인 것처럼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문학'텍스트는 기본적으로 해석/번역 불가능성을 갖고 있다. 나쁘게 말하면, 코에 대면 코걸이고 귀에 대면 귀걸이인 식이다. 따라서 진정한 해석은 있을 수 없으며, 소위 anthology등에 실려있는 정전(正典, canon)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자에 대한) 캐논cannon인 셈이다(그래서 나는 정전의 학습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영문학과는 "정전의 체계적 학습"을 중요한 목표로 한다고 했... 이 점이 걱정스럽다).
문학텍스트 안에는 수없이 많은 담론들이 교차하며, 그 텍스트의 저자는 물론 그 텍스트의 충실한 독자들도 그러한 복잡함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물론 모든 텍스트들도 그렇다. 하지만 문학적 텍스트의 복잡함은 따라가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러한 복잡함과 불투명성이 좋고, 이런 점이야 말로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하나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개 잘못된 일이고 또 폭력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하나의 선택'들이 필요한 때가 있고, 정치적 전략적으로 유효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설익고 섣부른 선택'으로 인한 여러 가지 리스크를 감내하면서까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글을 쓰고 학술 엘리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 뭐, 어떤 의미에서는 회피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중함이다.
영문학과에 가서는 20, 21세기 동시대적 문학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비평이론(문학비평이론이라기 보다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비평이론)을 전공할 생각이다. 비중은 후자 쪽에 보다 더 많이. 또 단지 책으로 '출판'되는 텍스트 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매개를 통해 볼 수 있는 텍스트를 연구하고 싶다('문학적 읽기'). 오늘날엔 많은 텍스트들이 '영어'로 번역이 되니까(사실 상당히 슬픈 현실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편리함'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관심가는 것은 테리 이글턴 할아버지가 말한 <정치적 비평>을 보다 심화시키는 것이랄까...?
근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더 생각해봐야지.
(누가 보면 나 보수적이라고 욕할 수도 있겠다)
4.
요즘은 자꾸만 '새로운 용어'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자본에 이해관계가 크게 얽히지 않은 관대하고 휴머니스트적인 머져러티majority(이 머저리들!)들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마이너리티minority 종합 세트(여성, LGBTQ, 장애, 환경, 노인, 컬러드 피플 등등)'에 대한 염증과 혐오에서 그렇다. 개개별 담론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종합 세트로'만' 파악하는 것들. 뭐, 그런 관대한 휴머니스트들 자체를 저주하는 것은 아니다. 나조차도 그런 관대한 휴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최근들어 저주하는 것은 다른데 있다.
어떤 현상을 "문제"라고 칭할 때, 대개 그 문제 때문에 피해를 받는 집단의 명칭을 붙이는 일이 더 잦은 것 같다. "여성 문제", "LGBTQ 문제", "장애 문제" 따위의 일반적인 호칭이 그 예이다. 나는 이런 호칭을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꽤나 옛날부터 정말 싫어하게 되었다. 이렇게 호명해야 "남성"들, "이성애자/모노섹슈얼"들, "비장애인"들이 더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운동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는 문제의 핵심을 '외재화'하고 문제의 급진성과 '타자성'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오히려 이 땅과 저 땅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원인은, 언제나 둔감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으며 다른 것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기 위한 훈련조차 되지 않은 "남성"들이며 "이성애자/모노섹슈얼"들이고 "비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은, 머져러티들이 그러한 멍청함을 갖고도 평생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허락하는 담론적 실천들과 제도들이다.
따라서 보다 더 정확한 명칭은 (좀 어색할 수는 있겠지만) "여성 문제"가 아니라 남성 문제이며, "LGBTQ(더 일반적이고 편리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칭은 '동성애')문제"가 아니라 이성애자/모노섹슈얼 문제이며, "환경 문제"가 아니라 인간 문제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용어들을, 이제는 더 이상 쓰기가 싫다. 너무 많은 오염이 된 것 같아.
덧) 여기서 3번과 4번은 분명히 모순적이며, 충돌하고 있다. 나는 요즘 이거 때문에 미칠 것 같다 -_-
모르겠다; 난 아직도 대학원을 어딜 가야할지 맘을 못 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내년 5월에 시험치는건데.. 사실 대학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대학원을 그냥 믿음이나 막연한 추측만으로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어딜 가든지 내가 나의 공부를 하는거고, 원체 내가 교수와의 관계를 끈끈하게 맺기 힘든 성격이니까 내게 간섭만 많이 안 해주면 어디든 괜찮긴 할 텐데, 라는 알딱꾸리한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더 맘을 못 정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가려고 마음 먹었던 학과는, 역시, 잘 모르겠다. 여전히도 가장 가고 싶은 학과기도 하지만 우려되는 건 역시 <협동과정>이라는 시스템의 애매함이다. 진짜로 여러 과들이 '협동'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하나의 분과로 존재하는 것 같은데 이 시스템 이름은 협동과정이니.. 예전에 어떤 친구랑 했던 얘기지만, 내가 전공 하고 싶은 이 '학문'은 meta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분과 형태로 존재해버리면 곤란한 측면이 좀 있다. 그 안에서 갈길이 너무 많기도 하고. 차라리 다른 분과에 들어가서 하는게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고.. 요즘에는 어떤 다른 생각이 들어서 좀 더 망설여지기도 한다. 이 생각은 나중에 포스팅하기로 하고...
게다가 요즘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학과가 하나 더 생겨버려서, 친구들한테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 좋아하는 어떤 선생님의 말귀가 아직도 머릿 속을 울리고 있는데, 사실 그 말이 난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말과 그나마 가까운 학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살펴봤던 최근의 몇몇 논문들이 마음에 들어서 가 볼까 싶은건데, 그나마 그 논문 쓴 분들 지도교수가 곧 퇴임을 할 예정이라 자칫 거기서 오리알이 되어 버릴거 같아 걱정스럽다. 좀 더 지켜봐야하려나..
또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 외로움과 우울증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한동안은 별로 외로움 안 탄다고 생각했는데, 뭐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외로움 타는 때가 있고 안 타는 때가 있는데, 안 탈 때는 탔던 때를 기억 못/안 할 뿐이다.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난 조증적인 현상은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항상 우울증이다. 그렇다고 뭐 심각한 건 아니라지만 일상적이라는게 문제다.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니 자꾸 딴 짓을 하게 된다. 블로그에 자꾸 주저리주저리 쓰고 싶고. 그리고 자꾸 문학이 땡긴다. 그래서 그제는 김수영 시인 시 전집도 주문해 보았다. 백석 시인 전집과 김수영 시인 전집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일단 후자를 선택했다. 지금 이 상태론 백석 시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시집치고 너무 투박한 양장본이라서 잠시 고민했지만, 뭐 어쩌랴.
참, 버틀러의 육성을 웹으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아예 육성을 들을 수 있단 상상도 못했는데. 진짜 유투브에는 없는게 없다; 지금은 버틀러와 스피박의 대담 영상을 다운받고 있다. 버틀러, 내년 7월에는 기필코 만나 보리라 ㅎㅎ 얼마 전에는 도서관에 주문 신청했던 <Judith Butler in Conversation>이 들어와서 당장 빌려왔다. 아직 읽을 시간은 없는데, 뭐 버틀러의 글들 보다는 훨씬 쉽겠지란 생각이 들어 기대하고 있다. 버틀러가 게일 루빈과 했던 인터뷰도 뽑아 뒀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 내일 시험인데 참 잘하고 있는 짓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