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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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3 나에게 계급은? (10)
  2. 2007/04/06 '대학'이라는 공간
조각들 / 2008/08/03 17:34

나에게 계급이란 무엇일까? 인종, 성, 장애 등등, 소위 '사회적'인 분류를 위한 범주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까?

벨 ㅎ스의 새 책, <벨 훅ㅅ: 계급에 대해 말ㅎ지 않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슬펐다.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데,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벨 훅ㅅ가 어렸을 때와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 그리고 자신이 성장한 집 주변에 있는 여대에 진학 했다가 겪었던 온갖 계급-인종 차별들, 좀 더 인종적으로나 계급적으로 평등함을 지향한다고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에 진학했을 때에 겪었던 모든 계급성들...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현실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살아 나가기에 한국도 엄청나게 끔찍한 공간이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전혀 없었던 셈.


그렇다면 나의 계급은 어떨까? 나도 완전 잘사는 집안의 아이는 못된다. 아빠는 한 시골에서는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행정 관료이고, 엄마는 읍내의 한 병원에서 사무일을 본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는 3명의 자식이 있고, 첫째와 둘째는 이름만 대면 많이들 아는 대학에 다니고 있고 셋째는 집에서 2시간 거리인 다른 도시에서 유학중인 고등학생이다. 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빠듯하기는 하지만 내 부모님은 다 대주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매달 34만원의 방세와 6만원 가량의 핸드폰 비, 그리고 10여만원 정도의 용돈 보조를 해주고 있다. 나도 40만원의 과외 수입을 갖고 있으며 이걸로 그냥 한달은 그럭저럭 살아간다. 놀 것도 다 놀고 살 것도 대충은 다 사면서. 약소하지만 1만원의 후원금도 내고 있고.

어쨌든 나는 무리 없이 학교를 졸업했다. 학비를 마련하거나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쿨하게', 그리고 내 하고 싶은 짓 다하면서 졸업을 앞두고 있다. 교지에서 5학기를 보냈고 다른 단체나 학회 등에서도 시간을 많이 보냈다. 이렇게 '운동권 경계인'의 감수성으로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 소속 과의 수업들을 경멸하면서, 그리고 많은 타인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고 증오하면서, 그러면서도 나와 어딘가 비슷한 이들과는 잘 어울리면서 4년 반을 보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과정에서 계급은 굉장한 역할을 했다. 아이들을 만나는 과정들을 쭉 돌이켜보면, 나는 나와 비슷한 아이들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아이들과는 거리를 뒀고, 대부분 지방에서 유학을 온 아이들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교수 등의 전문직인 아이들이라기 보다는, 대개 행정 관료나 선생님 내지는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는) 노동계급의 아이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가난해 보이거나, 너무 부자처럼 보이는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일은 굉장히 어려웠다. (물론 '보이는'게 문제 였다. 실제로 그 아이가 어떤 계급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아마 계급은 나에게 '환상'의 영역이었던 것 같다. 계급성, 계급투쟁의 대의, 이 모든 것에 동의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가끔은 계급이 어떻고 저떻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 '남의 일'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는 점을 느끼게 되면, 나는 아마 입에 똥을 물고 끔찍한 말들을 내뱉으며 경멸하고 거리를 뒀을지 모를 일이다. 가난은 그저 끔찍하거나 아니면 아름답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했다. 물론 그것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다른 어휘일 뿐이다. '아름다운 가난'이나 '끔찍한 가난'이나, 둘다 계급이나 가난을 타자화하는 말인 점에서는 완전히 똑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다니는(이제 곧 졸업이군) 대학은 계급이 높은 학생들이 주로 다닐 것으로 생각되는 학교이다. 단지 경제 자본 뿐 아니라, 문화 자본까지도 두루 갖춘 부모들을 둔 학생들이 실제로 굉장히 많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옷과 신체와 행동거지와 사고 방식 모든 것에 반영되어 있다. 촌스러움과 세련됨 사이에서 많은 아이들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젖어 있어서 '자연스러운' 세련됨을 풍기는 아이들과, 이제서야 세련됨을 학습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거리감과 요원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노력이 없으면 이 거리는 좁힐 수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마저 계급을 따라가곤 했다. 그것도 세련됨의 일종이었으니까, 잘 나가는 아이들은 너그러운 휴머니스트로서 정치적인 올바름까지도 쉬이 가질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비싼 옷과 가방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공정 무역, 가난한 사람들, 환경 오염에 대해 운운하는 모습에 심한 불편함이나 때론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그건 단지 불편함이나 역겨움일 뿐이었다. 그것을 말할 사람도 별로 없었으니까.

나는 그런 점들을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굳이 의식하거나 표현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은 잘 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도 계급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 장애, 환경, 인종 등등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계급은 껄끄러운 주제였다. 자기가 '현재' 돈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왜' 돈이 없는가, 즉 자기의 계급 내지는 자기 부모의 계급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 모두는 이 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일종의 규범 내지는 규칙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는거. 계급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열등감 이런거, 잘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고, 내가 다니는 이 학교는 이 사회의 '중심부'에 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네가 잘나서 잘하면 되는거지 왜 남 탓을 하느냐, 너도 잘나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 너도 이제 계급 상승을 하고 있는거 아니냐 하는 암묵적인 이야기들이 모든 구성원들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암묵적인 이야기'라는 말은, 설령 자기 스스로는 계급 시스템의 모순 등을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음에도, 정작 자기 문제가 되면 자기 탓 내지는 개인 탓으로 돌리기 쉽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때로는 이 사회의 계급성이나 가난을 목격했을 때 '슬퍼할' 줄도 알아도, 그건 결국 1시간 지나면 잊어 버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나'의 계급성은 결국 '나' 스스로 열심히 극복해야 한다. 그걸 다른 사회적 범주와 차별 탓으로 하는 건 안된다. 학벌도 갖췄는데 뭐가 문제랴. 하는 생각들.


학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성장한 지역을 보면 이 계급 문제는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나는 완전 변두리인 시골에서 자랐고, 그 지역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아이들 중에 잘 사는 아이들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많은 경우 내가 자란 고향에서 머물고 있으며, 부모님의 계급이나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다.

부모님이 종종 하는 말 중에 "대학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됐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야 이 말을 실감한다. 나는 계급 이동에 이미 가까이 다가왔으며, 설령 앞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을지라도 나의 학벌 자원이나 문화 자본 등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일종의 계급 보증서로서 나의 계급 이동을 철저히 보증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모르겠다. 그냥 끔찍하고 슬프고 그렇다.

벨 훅ㅅ의 책의 원제인 "where we stand: class matters" 마냥,
"나(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

정말 중요한 주젠데 나는 너무나 부분적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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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4/06 16:38
4학년이란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단 한번도 많은 이들이 경험했을 ‘방황’을 한 적이 없다. 휴학도 한 적이 없으며, 대학에 대한 회의감 끝에 수업에 결석하고, 친구들에게 며칠이고 아무 연락 없이 잠적을 한 적도 없다. 나 역시도 수업이 싫고 전공이 싫고 수많은 사람이 꼴 보기도 싫었지만, 나름대로 ‘적응’을 하면서 살아왔던 터였다.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수업이 아니라, 이 대학 자체가 아니라, 혹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다만 내가 몸담고 있는 그런 특수한 개별 공간과 그 안에서의 관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나의 ‘정치’. 이렇게 나에게는 대학이란 공간은 적절히 의미화 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4년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반이자 ‘지형’인 이 공간에 대해서, 다시 말해 우리들에게 대학이란 공간이 어떻게 의미화 되어 있는지 한번도 진지하게 사고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 니힐리즘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사고 틀에 갇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다른 것들에 탐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대학이라는 이 공간에서 나름대로의 경험 끝에 좌절하고 슬퍼하고 또 환희하고 만족하고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지 못했다/않았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들은 이 공간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아마도 쉽게 할 수 있는 대답들을 여러 가지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을 듣는다, 공부를 한다, 취직 준비를 한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등등의 것들. 우리들 누구나 저런 것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들은 결코 우리의 일상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대학-공간에 가면 무엇을 하게 될 거라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극히 ‘막연’하게 알고 있다. 또한 나름대로 “대학생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각자의 마음속에 내심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들과 막연한 것들에 대해서 적절히 언어화하지 않고/못하고 4년을 살아내고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렇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실재하는 이 대학-공간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한다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묘하게 모순적이고 아픈 현실에 부딪힌다. 그리고 우리 각각이 가진 대학-공간에 대한 욕망과 실제로 충족되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음을 새삼스럽지만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대학-공간은 실로 ‘기의 없는 기표’다. 그러나 선뜻 기의가 ‘없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측면이 있다. 그런 대학-공간을 수많은 이들이 욕망하고 또 거쳐 가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우리들 각각이 의미화 하는 방식이 나름대로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나름의 기의를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라는, 다시 말해 대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경우에는, 그리고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수준에서 검토를 하기 시작하면, 대학-공간이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 기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다시 말해 내 생각에 ‘대학’은 실로 ‘민족’이나 ‘국가’나 ‘가족’과 같이,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고 규율하는 어떤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 공간은 우리들의 삶의 어떤 ‘일관성’만을 보증해주는 기표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대학-공간은 4년이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할당해주고, 제도를 통해서 그것을 보증해준다. 따라서 누구나 대학-공간에 들어오면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보장된다. 이 공간에서 방황하는 것도, 열심히 하는 것도 모두 용납된다. 적절히 열려있는 것들을 둘러싼 어떤 ‘선’을 위반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대학생’이므로. 이렇게 실로 어떤 공동체는 이렇게 일관성을 보증해주는 제도를 통해서 유지가 된다. 위에서 말한 ‘민족’, ‘국가’, ‘가족’등의 어휘들이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고 있듯, 대학-공간도 우리들의 삶에 일관성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 유사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공간’들의 기의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실로 수수께끼다. 누구나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삶의 준거 틀로 삼고 지내기에, 누구나 ‘그것을 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실제로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그것들은 어떤 ‘진실된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이라는 이름과, 국가라는 이름과, 가족이라는 이름과, 대학이라는 이름은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허구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어휘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들은 말한다. 언제나 "~해야 한다."의 어미로 끝나는 "민족이란~", "대학이란~", "국민이란~". (이러한 진정성의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일단 의심해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그것들을 한편으로 편리하게 마구 ‘사용’한다. 국민이라는 정체성, 한 가족의 딸/아들/자매형제 등의 정체성, 그리고 대학생이라는 정체성.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또 한편으로 삶의 규율이 되며, 또 한편으로는 모든 생활의 토대가 된다. 또한 우리는 그것에 어떤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들은 그 윤리적 명령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미 알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도 알도록 요구한다. 그것들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로 서로가 서로를 규약하고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누구도 명령하지도 않았는데도. 너와 나의 ‘실천’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기의 없는 기표’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비극이야 말로, 그리고 이렇게 역설적으로 알지 못함이야 말로, 이 거대하면서도 허구적인 공동체를 작동하게 하는 어떤 핵심 메커니즘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대학-공간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충족될 수 없다. 이미 개념상 대학-공간은 어떠한 욕망도 충족될 수 없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알고 있는 알지 못함을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이것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작동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공간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 공동체 구성원리에서 지금 당장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써는 그 굴레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알지 못함(무지)이 그 자체로 허무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무지라는 것과, ‘기의 없는 기표’를 욕망하는 행위의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극복은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에 이 무지는 실제로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하여 좌절하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안전하게’ 우리들의 삶을 규정짓는 이 ‘기의 없는 기표’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없는 기의에서 나오는 윤리적 명령과, 우리들 스스로 그것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즉 그런 텅빈 기표들은 우리들의 실천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조직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인 즉슨,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 기표는 더 이상 우리들에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 대학-공간 내부에서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접근하고 분석하고 때로는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런 허무함이야말로 어떤 정치적 기획을 조직하고 실천할 것인가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도록 해주는 토대일 것이다.


덧_ 이 글에서는 고의적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다시 읽어보니 약간 불쾌감도 오지만, '나는'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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