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담배에 불을 붙일 때까지만 해도 아주 많은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목이 쓰라리고 기침이 나오고 눈이 매워지면서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그런 부작용들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담배의 첫 모금을 빨아들였을 때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워온 사람처럼 담배연기가 쑤욱 몸 안으로 들어왔다. 순하고 부드럽게,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그때 많이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쉽다니, 이렇게 별거 아니었다니……. 마음에서 어떤 벽 하나가 툭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편견과 관습과 자아의 작은 벽이.
김형경, <사람풍경>, pp. 129-30
내가 담배를 처음 피웠던게 언제였더라. 2005년 2월의 어느날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04학번이던 나는 '첫 후배'를 맞이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새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 결국 새터 D-Day가 되었고 나는 새벽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대감' 때문은 아니었고 단지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새터 준비하는 과/반 사람들은 <올리브>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고 나는 잠을 자고 싶었기에 짜증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와중에 여차저차 하여 나는 갑작스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아 하게 되었다. 역사 관련 교양 프로그램이었던가. 자의 반 타의 반 이었을 것이다. 그때 시간은 새벽 3시 경. 9시~10시면 학교에서 출발이었는데.
물론 나는 그 일을 맡은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성격과 달리 데드라인이 코 앞에 닥친 급박한 상황을 즐겨하는 편이다. 내 성품은 그걸 싫어라 하는 것은 물론이오, 그런 방식이 내 기질과 맞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뭐 어떤가. 사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투덜거릴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특권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나 진짜 바빠. 갑자기 일이 커졌단 말이지. 아 진짜 죽을 것 같애 ㅠㅠ" 이런 식으로. 물론 그런 투정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그 때, 모두가 피곤하고 잠을 자고 싶어했던 그 때에 내 투정을 들어줄 사람은 당연히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아침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땐 그냥 혼자 있는게 낫다. 하여 나는 <올리브>에서 먼저 나와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가는 길은 5분 남짓. 어쨌거나 사위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고 조용했고 그래서 나는 좀 외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재목은 아니었고 물론 지금도 아니다.
그래서 자취방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좀 더 걸었다. 잠시 뒤에 자취생 생활용품과 필수품의 만신전, <패밀리마트>의 초록 간판이 눈에 확, 하니 들어왔다. 한겨울 새벽, '사연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맥주를 사 마시면 왠지 간지가 흐르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 편의점엘 들어갔고, 잠시 뒤에 내 손에는 맥주 대신 시중에 깔린지 얼마 안 된 담배인 "더 원"과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아마 왠지 '맥주보단 담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정확히 위에 인용한 문단대로 일을 치렀다.
어렸을 때 아빠 근처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고, 집 수리를 하러 온 아저씨들이 며칠 동안 머물며 뿜었던 담배 연기도 싫어했고, 담배를 소유한 것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랑스러워 하는 초/중등학교 때의 아이들을 싫어했었던 내가, 내가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술은 마셔도 담배는 안 해! 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과거는 단지 과거가 되었다. 꼭 담배가 나를 위해, 바로 이 순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니, 드디어 내가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는 느낌이었다. 담배소명설.
이상하게도 그 해의 봄엔 과/반에 유달리 흡연 인구가 많았더랬다. 과/반에서만 스물 몇 명이었던가로 기억한다. 2004년엔 담배 안 피우는게 자랑이었던 과/반이었는데. 04학번 동기 중 딱 1명을 제외하곤 모두 비흡연자였는데. 그 해는 참 이상했긔…. 참으로 이상했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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