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 정황의 차이가 그 책읽기의 차이를 부른 것이리라 생각한다." (89)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96)
생애 말년에 쓴 일기를 엮었다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아저씨'의 이미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배는 볼록도 아니고 불룩하게 튀어나와 늘어졌으며 목과 턱이 구분되지 않아 살집이 두둑하지만, 다리는 몸집에 비하면 얇은 그런 아저씨.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고 유행 한참 지난 고지식한 양복을 입으며 구두 역시 마찬가지다. 셔츠는 늘 꼭 윗단추까지 모두 잠그기에, 접시 위에 얹힌 돼지 머리를 상기시킨다. 바지는 늘 배바지다. 손목엔 금시계. 양말은 흰색이거나 검정색인데 늘 종아리 중간까지 올려 신으며 무좀 치료를 위한 발가락 양말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머리에 든건 많은데 그 학식이 땀으로만 배출되는지 봄 중순부터 가을 중순까지 몸을 움직일 때는 늘 땀을 흘리며 행여 식당에서 기름기 둥둥 떠있는 매운 찌개를 먹을 땐 티슈를 한통씩 써버리기 마련이다(그렇지만 맵고 짠 찌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산에라도 올라가서 찌개를 끓여 먹다가는 그 자리에서 나무아미타불 할지도 모른다. 물론, 젊었을 때엔 클레릭 이미지였을수도 있다.
책 읽기가 단지 책 읽기가 아니라 상황 읽기라는 그의 말, 그리고 사유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내 육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물론 그의 말에는 어폐가 좀 있다. 육체는, 어떤 초유기체적인 '나'가 있어서 '내'라는 소유격 명사를 통해 소유할 수 있는 대상(문법의 환상)이 아니라, 그냥 나 자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한국 남자 지식인들이 그랬고 그래왔으며 지금도 그렇듯이 정신주의자였던 셈이다.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김현은 데카르트 흉내를 내고 있지만(생각하다가 생각에 도달한다? 이 얼마나 @#$!한 표현인지), 의미심장하게도 뒤에 인용한 문단에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사회적 맥락의 냄새를 풍긴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많이 안좋았다고 한다. 누구나 말년이면, 별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상 건강이 안좋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육체)를 둘러싼 관계의 질서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가피하게 의존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건강한 그의 동료와 친구들이, 건강이 악화된 그를 어떻게 배려하고 도와주는지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앞서 인용한 96쪽에서 여기에 따오지 않은 내용을 보면, 젊었을 적 그의 육체는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을 때엔 육체가 그런 사고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적, 합리적, 비의존적 <사유>라는 환상은 건강한-이성애-개인-남성-육체에 의해 지배되고 관장된다. 그건 하나의 문화적 각본일 것이다. 그 환상이 생산하는 글 역시 어떤 육체 조건에 기반한 것이리라. 그런 각본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진다는 건 상당한 불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바치는 '후배'의 말을 보면, 그 후배 역시도 이 불운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자신의 육체적 징후들을 통해 몸 속 깊이 번져가는 죽음의 증식을 보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아무도 예측을 못한 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깊이, 그 응시와 사유의 궤적들을 글로 드러내왔었다."
그에 반해 시인 김수영은 좀 더 명민하다 할 수 있다. "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낙타과음(駱駝過飮) 중에서) 어떤 사람이 창작에 몰두할 때, 그 사람의 몸을 한 번 보자. 그는 빼어난 머리와 빠른 손으로 창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온 몸으로 창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뛰어난 비평가와 뛰어난 작가의 차이는, 이런 지점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서부터 나타나는게 아닐까?
여하간 그의 책은 신기하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지금은 전혀 알 수도 없고 거론되지도 않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 작가가 수두룩 하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100년은 갈것 같은데.. 이 책을 보니 역시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김현은 또 이렇게 적었다. "르네 샤르가 죽었다. 이제 대가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가보다." (148) 그러나 대가들은 늘 존재했고, 얼마 전에도 우리는 여러 대가를 떠나보냈다. 대가들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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