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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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10/08/23 22:28
1.

벤야민은 기억이라는 단어의 어원에는 매개물(medium)이라는 뜻이 있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해, 벤야민의 '기억'은 과거에 체험했던 것을 '발굴'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이다. 그렇다면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많은 부분에 '기억'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을 한 때 하나로 묶어주었던 과거의 체험을, 기억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재의 장에 소환하는 것. 그리하여 각자의 일상에 충실하느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관계를 재건하고, 체험의 공백에 다리를 놓으려는 것. 같이 체험을 했다는 것은, 어떤 시간과 공간을 '의미있게' 보냈다는 것, 그리하여 각자의 몸에 서로를 새겨 넣는다는 것, 다시 말해 경험을 체현했다는 것.

그런데 그렇다고 기억이 체험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사고하는데 익숙하지만, 오로지 형식만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보증할 수 있을 때가 많다. 형식이자 내용으로서의 형식,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로서의 어떤 <무엇>이 있다(그 <무엇>을 우리는 어떤 책의 제목을 따라 <영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야민을 따라 기억이 매개라고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그 기억이 체험과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억이라는 행위(형식)은 곧 체험(내용)이다. 기억하는 방식, 기억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체험 조차도 결정짓는다. 몸에 체현한 경험들은 기억에 의해 다시 배치되기 마련이고 우리의 <무엇(영혼)>도 변한다. 그러므로 오랜 관계도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얼마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2.

여기서 '기억'이라는 의미를 지닌 영단어(remember)를 조금 더 뜯어보면 어떨까? 의미상으로 remember는 re/member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member는 무슨 뜻인가? '어느 집단의 일원'이라는 뜻 아닌가?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것은 벤야민의 '기억'의 의미에 덧대어보면 집단의 성원권을 '재re'확인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일원이 아닌 사람들이, 다시(re) 어느 모임의 일원(member)이 된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기억하는 행위의 일상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member에는 '신체의 사지'라는 뜻도 있다. 그리하여 dis/member는 '팔다리를 절단하다'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re/member는 이렇게 절단된 사지를 다시 접합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폭력에 의해 절단되었던 사지를 비로소 잇는다는 것.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감히 기억하는 자만이 고통 끝에 잘려나간 신체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억하는 행위의 정치적인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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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13 00:08

창문을 모두 열어 놓으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노래도 물을 흠뻑 먹은 듯 질퍽대며 어딘가 힘겨워 잘 들리지 않는다. 김현 평론가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산울림의 <청춘>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뒀는데, 폭우 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들기 전까지 무한반복해 들을 예정이다. 이 노래가 어쩐지 스물 아홉에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서른 넘어갈 즈음에... 비가 과연 쏟아지는 중이다.

황정은의 소설집을 완독했다. 너무 좋아서 어느 작품은 두 번 세 번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백의 그림자> 해설에서 이 소설집을 발표한 순서대로 읽어보라고 하기에 그렇게 읽었다. 그러자 과연 이 작가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게 느껴졌다. 부러울만한 속도로 말이다. 사실 초기 작품인 <마더>나 <소년>은 조금 평이하다고 느꼈지만(그래도 좋은 작품), 그 이후에 발표한 작품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좋았다. 내가 느끼기엔 신형철 평론가가 좋아할만한 스타일ㅡ평소에 하던 이야기에 부합하는 스타일, 즉 나 역시 좋아할만한 스타일ㅡ을 갖춘 작가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작가가 명사(특히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이 작가는 배수아를 좋아할까?). 같이 구입한 <백의 그림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한나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뒹굴거릴 수 있을 때 읽으려 한다.

대가족적인 삶에 대해 동경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왜냐면 어렸을 적 꽤나 오래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까), 최근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재)발견한 동영상 몇개를 보면서 그것도 꽤나 좋을 때가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2006년 겨울 <열린 교실> 때였는데... 점심 때 아이들과 함께 김밥을 싸먹고 비빔밥을 해먹던 때였다. 언제나 시끌벅적 했다. 어느 손은 당연하다는 듯 서툴게, 어느 손은 김밥을 좀 팔았는지 능숙하게 밥을 펴고 재료를 깔고 둘둘둘.. 물론 맛있었다. 그리고 큰 양철에 고사리며 도라지며 콩나물이며 참치며 참기름이며를 듬뿍 넣고 사깡에서 사온 공기밥을 털어 넣고 고추장을 넣어 슥슥비벼서 입안 한가득 넣던 10명의 사람들. 내 컴플렉스인 목소리가 많이 들려서 민망했지만 어쨌든.

짐멜의 에세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을 읽고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했던 건데... 아이들에게 예쁜 걸 입히고 좋은 걸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는게 과연 아이에게 좋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반응에 민감하기 때문에, 부모 욕심이라는게 보이면 그것에 은근슬쩍 응해버리기 쉽다. 그건 결국 아이의 감성을 부모의 감성대로 패턴화하는 것, 아이를 작은 부모로 만들어 버리는 것, 달리 말해 자극을 처리하는 방법을 (시행착오 끝에) 아이 스스로 터득할 가능성을 막아 버리고 이미 한 번 처리된 자극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아이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부모들이 조금 거북하다. 아이들마저 레디-메이드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어릴 때는 '촌스러울'수록 좋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회사에서 만들어 파는 장난감을 줄 필요도 없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아이들은 모든 사물에서 장난감을 발견하니까. 옷도 예쁜 새옷을 입히느니, 어디서 받아와 성장의 흔적이 묻은 헌옷을 입히는 게 좋다고 믿는다. 또 아이의 조기 교육이 필요하다면 학원에 보내고 비디오를 보일 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된다. 미메시스의 원칙.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 특별히 잘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듯 기다리면서. 그리고 아이들 특유의 변덕을 인내하면서. 여기 덧붙인 사진은 나는 아니고 동생 어릴 때인데, 모두 어디서 받은 낡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예쁘잖아.

결국 저마다의 방식이란 게 있는 법이어서, 예전 같으면 이기적인 행동 아니냐고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를 어떤 방식에 대해 납득하게 되어버렸다. 납득하게 되었다는 건 나를 그 방식에 던져 넣는 것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게 과히 나쁘지 않다. 관계에 이기적인 건 어디에도 없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결국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니까. 어쩐지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덧) 이게 앞서 언급한 김밥 씬. 이런 동영상이 몇 개 더 있는데... 아 배가 고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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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8/02 17:46

기억과 망각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고 모순적인 관계이기 쉽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 잊어버린 것은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나의 형편없는 기억력에 좌절한다. 또 기억하기 위해 쏟아붓는 시간도 아까워 한다. 학부에 다닐 때는 일부러 객관식 시험이 없는 수업만 골라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이런 인식은 기억을 특권화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 관심범주는 늘 제한되어 있기에 모든 국면을 총체적으로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다는 사실, 또 우리 뇌의 기억력은 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좋은 기억력은 늘 부러운 대상이었다.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에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차라리 망각일 때가 있고, 망각했던 것이 차라리 기억일 때가 있다. 특히 경험과 역사를 언어화할 때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부분적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이 발화되는 순간 그 기억이 거짓일 수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때때로 기억은 순전히 어떤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서 존재할 때도 있다. 그렇게 기억은 차라리 망각의 한 형식일 때도 있다. 또한 망각도 기억의 한 형식일 수 있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수정하고, 동시에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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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기억, 망각
독서노트 / 2010/05/24 12:41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늘 새벽, 신경숙 소설가의 신간을 끝마침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썼다고 했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그 시간대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폈을 때는 어둑하고 눅눅한 새벽 3시였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 허리를 곧게 펴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제목과 소설이 정확히 상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아 좀 불만이기는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수작인 것 같다. 여느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을 읽기는 읽어도 늘 별다른 감동없이 읽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편집실에서, 낡디 낡은 보부아르의 책 앞면에 씌어있던 손글씨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 관계의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맺음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반전화와 편지와 전보만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던 시절의 청춘들은, 불가피하게 좀 더 깊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어도 관계도 좀 더 익을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내면에서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으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지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들ㅡ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와 퀵 메시지가 아니라, 어쩌면 침묵과 견뎌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재하거나 느리게 찾아오는 것들에 대한 환대.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해지는 것.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에게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말마따나 덥석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내가 이미 거쳐온 시간 혹은 지금도 거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관계의 부침(vicissitude)을,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여러 기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네에서 벤치에서 계단에서 혹은 누구도 앉자고 하지 못해 아예 선 채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들로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아침 해를 맞아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들.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온 신경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려하고 질투하고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간들. 그때의 냄새와 온도와 바람과 사소한 분위기나 오갔던 대화 같은 것들. 빈곤했던 기억에 얼마간 생생한 서사와 언어가 부여되면서- 기억이 비로소 재조립되고 있다. 그렇지. 기억이란 이렇게도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것이지. 그러므로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기억 뿐이겠지. 이것 외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이닥치는 기억을 견디느라 잠시 눈을 책에서 떼면, 머리 속으로 문장이 하나씩 깜빡깜빡 흘러갔다. 하나의 서술로도, 하나의 명제로도, 하나의 가설로도 문장은 재생되었다. 그 문장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책귀를 접어두는 걸로 갈음했다.

나의 20대 초중반은 '시시각각'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늘 바빴고 늘 일이 있었고 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망했지만, 늘 그 무게가 버거워 헐떡대며 꿇어 앉을까 벌렁 드러누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 단면이 지나면 다른 단면이 찾아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단면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시각각'은 점차 '시간'으로 누적되고, 누적된 시간이 임계점을 넘으면 '세월'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구잡이로 누적되어 쌓였던 나의 시간이 세월에 통합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점차 먹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진 청춘인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은 이제 시시각각이라기보다는 세월일 것임을 직감했다. 청춘 이후 세월 속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호품"은 어느 시인들이 말했던 대로 "그리움"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앞으로도 애도하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나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계속 사랑할 것이고 계속 질투할 것이고 계속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역사와 기억과 맥락과 그리움과 추억이 뒤섞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이며, 더 정직하고 더 여유롭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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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3/27 22:48
서경식 교수와 타와다 요코 작가의 서한집 <경계에서 춤추다>에는 고향에 대한 챕터가 있다. 여기서 서경식 교수는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 독일어로는 하이마트(Heimat)가 어디냐는 질문에서 어떤 폭력을 읽는다. 이 책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어딘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서경식 교수의 이런 느낌은 여러 차례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바이고, 고향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제국주의나 파시즘에 동원되었는지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특히 이 부분은, 뭐랄까, 서경식 교수가 폭발한다고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애써 튀어오르는 감정의 다발을 억누르는 느낌. 그래서 역설적으로 고향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이 느껴지고 상실감이 느껴지는, 그러나 채워질 수 없는, 그래서 강한 추동력이 될 수 있는, 그 무엇.

이와는 조금 달리, 내게는 구체적으로 고향이 어디냐하는 질문은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게 서교수와 나의 결정적 차이겠지.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고향을 떠나는게(어차피 고등학교가 별로 없었으니 '유학'을 가야만 했다) 학교를 다니는 목적이었고, 고등학교부터는 마침내 그 목적을 성취했다. 그 뒤 얼마 간은 고향의 냄새를 지우는 게 일상의 실천이기도 했다.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더듬기 일쑤였고, 에둘러 대답을 피하기에 바빴다. 그건 시골에 살았다는게 창피해서도 아니고, 시골에서 사는게 두려워서도 아니다. 시골 출신이라고 말하면 거기서는 제일 가는 수재였겠네하며 눈을 동그렇게 뜨는 서울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순간들, 그런 촌구석에서 도대체 어떻게 사냐며 자기의 경험 부족과 상상력 부족을 자랑하는 서울 사람들을 뒤돌아 욕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다만 내게 구체적인 고향이 생긴다는 게 무서웠달까. 외롭지만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도시의 부유하는 일상 속에서 어떤 구체성이 붙박히는게 싫었달까.

그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 약 1년 4개월은 불가피하게 '고향'에 있어야 했다. 물론 자주 서울에 다니긴 했지만. 고향에서 중요한 것은 아는 사람을 만들지 않는 일이었다. 거리에서 중고등학교 동창이나 알던 후배들을 멀리서 보면, 그들을 여전히 쉽게 알아보고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앞서 저만치 도망가버리곤 했다. 가끔 나를 알아보고 반기는 어른들이나 동창생들이 있어도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춤주춤 물러나 사라져버리곤 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말 걸고 싶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아주 구체적인 욕망도, 이 망각에 대한 욕망 앞에선 쉽게 사그러들었다. 그들이 싫었던게 아니라 여기에 나의 구체적인 일상, 구체적인 기억이 박히는 게 싫었을 뿐이다. 여기서 내가 기억하게 될 그 무엇이 더 이상 내 일상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쩌다 중학교 때 앨범을 보게 되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괜히 심심했고, 한강 작가의 새 장편소설을 마침내 다 읽었고, 읽고 난 뒤 알 수 없는 갈증과 허기를 강하게 느끼면서, 그 공허감을 즉각 피할 수단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앨범이 컴퓨터가 있는 책상에 꽂혀 있었던 탓이다. 짙은 초록색 표지에, 책등엔 2001년 제 54회 ㅇㅇ중학교가 금색으로 새겨진 얇은 앨범이.

그 앨범을 펼치면서 놀라웠던 건, 내게 그렇게도 많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 기억은 매우 신체적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엔 여러 감정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 친하지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어떤 아이의 손이 사진을 찍는 순간에 내 어깨에 올라왔던 것, 그 손이 유난히 불쾌했었던 기억이 그대로 재생된다. 가볍지만 어딘가 땀에 절어 끈적한 손이 어깨에 올라온 느낌을 받았고 이내 불쾌해졌다. 애들을 테니스채로 마구 때리곤 했던 기술 선생님이 컴퓨터를 잘한다고 알려진 나를 데려다 시험지 채점과 점수 입력을 시키며 내 어깨를 두드리던 것, 그 손길을 뿌리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던 기억도 재생된다. 싫다고 짜증을 내던 내 몸을 기어코 만지던 남자애들과의 불쾌했던 경험도 재생되고, 결국 어떤 애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고야 말았을 때 내 주먹에 남았던 그 둔탁한 타격감도 재생된다. 교실의 찌든 냄새도, 애들이 흘린 불쾌한 땀냄새도, 씻지 않아 나는 군내도, 화장실의 지린내도 재생된다. 선생님들의 목소리도 남아서 귓가를 울린다. 여하간 기분이 더럽다. 좋았던 기억이 그리 없구나.

내가 알았던(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고) 어떤 여성학 교수는 사석에서, 단식원에 들어갔다왔다며, 단식의 놀라운 효과에 대해 장광설을 풀어놓았었다. 거기서 기억에 남는 건 단식의 구체적 과정 같은게 아니라, 단식을 얼마간 할 때마다 몸이 아팠다는 것, 그리고 그 아팠던 부분은 사실 과거에 크게 다쳤던 부분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날이 지날 때마다 아픈 부분은 계속 달라졌고, 놀랍게도 아픈 순서는 다쳤던 순서와 역순으로 일치했다. 다쳤던 부분은 물리적으로는 다 나아서 일상에 지장이 없지만, 몸은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구체적인, 신체적으로 남은 이 기억들이 싫다. 앨범을 태워버리고도 싶지만, 그랬다가는 모든 근거들이 사라질까 싶어 차마 그렇게 하진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작가는 서울이 자신을 닮아서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고, 결국엔 서울로 돌아오고야 만다고 말한 적 있다. 에세이집 <Stay>에서 김영하가 말했던 것처럼(사실은 너무나 흔한 스테레오타입이긴 하지만) 서울은 아무래도 망각에 익숙하다. 물론 서울에도 소중하고 좋아하는 공간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서울이 공간에 대한 망각이 쉽게 일어나는 곳이란 건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공간을 망각한다는 건 그 공간과 연결된 여러 구체적인 기억들을 망각한다는 것과 유사한 이야기다. 잊을 수 있다는 건 슬프거나 피해야하는 일이 아니라, 일상을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다. 모든 것을 지워야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따로 있고 나는 그것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144일 남았다. 조금만 더 견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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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23 22:00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집단적인 담론 구조에서 혁명의 꿈은 개인의 시간으로 환치되고, 사랑의 열정과 사랑의 대상과 하나가 되었던 황홀한 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 앞에서 멈춰서버린다. 그래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꿈은 '청춘의 열병'으로, 혁명의 시간은 개인의 생애사적 시간 속의 빛나는 순간으로 그려진다. 이 서사는 지속되지 못한 혁명에 대한 사랑의 열병은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혁명을 살아남은 자의, 개인의 생애로 환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의 '좌절된 꿈'의 시간으로 환수된 혁명의 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와 환멸, 혹은 자기모멸의 시간 앞에서 멈춰 서버린다. 따라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사랑은 빛나는 순간 속에서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_권명아, <죽음과의 입맞춤 :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 사회 2010 봄, p. 298

이 글을 읽고 있자니 학부 때 알던 여러 남자들의 얼굴이 아주 새삼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저마다의 구호를 갖고, 저마다의 학정조(학생정치조직)등 집단의 후광을 두고, 가끔씩 일이 있으면 연례 사업처럼 깃발 들고 나가기도 하고, 술집에서는 과장된 영웅담이나 허세를 부리거나 고뇌를 연출하여 후배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선거철이 되었다 싶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수트를 빼입고 컬러 포스터 속에 등장하던 남자들. 그 남자들을 둘러싼 담화는 오직 뒷담화일 뿐이고, 그들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잠적하기 전까지는 매우 잘나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수없이 많은 연애를 했고, 그 연애의 끝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남자들만큼은 그 공동체 속에서 끝끝내 생존해 남았다. "혁명의 문법에서 사랑이 정치와 탈정치를 둘러싸고 젠더화된 위계를 구성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특정 주체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위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문법에서 청년의 열정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지만, 여성, 미성년, '무지한 대중'의 여정은 과잉되거나 부족한, 혹은 훼손되거나 결여된 것으로 간주된다. (같은 글, p. 295)" 음. 계속 다른 부분도 인용.

생애사의 리듬 속에서 혁명은 젊음의 열정, 젊은 날의 추억이 된다. 그 추억 속에서 첫사랑의 열병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지만, 결국 그 열병은 성장을 위해 누구나 겪는 성장통처럼, 통과제의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추억 속에서 혁명은 통과제의와 같은 자연사의 한 과정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생애사의 서사에서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자연 과정이 되어버리고, 현재가 아닌 과거의 몫이 된다.

또한 추억 속의 혁명은 혁명의 좌절에 대한 책임을 언제나 사랑의 대상에게 전가시키고, 추억의 주체는 혁명을 생애사의 원형적 기억으로 곱씹는다. 이렇게 추억이 된 혁명 속에서 변절은 언제나 타자의 몫이며, '나'는 혁명을 순수한 기억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배타적 소유권을 지닌 '순수한 주체'로 면죄된다. 추억이 된 혁명이 혁명에 대한 소유권, 혹은 혁명의 원본과 변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혁명을 생애의 "원형 기억"으로 추억하려는 욕망은 혁명을 과거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혁명의 좌절을 타자에게 전가한다.

_같은 글, pp. 300-1

권명아 평론가의 이 글은 4. 19에 대한 것이지만, 그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이는 단지 4. 19세대만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386세대", "87년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인 어떤 모종의 규칙이다.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젊음'과 사랑과 혁명과 열정과 섹스와 젠더의 결합 공식이랄까. 이 공식을 잘 풀어낸 사람들만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자격을 갖는다.

60년이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추억하는 서사들을 읽을 때 큰 불편함을 느꼈던 게 <정확히> 이런 점들 때문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도 매혹적인 배우들과는 별개로 불편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남자 작가들이 보여줬던 당시 세계는 분명히 예컨대 공지영 작가가 90년대 초반에 그려냈던 세계와는 다르다. 좀 더 생각과 독서를 이어나가야 할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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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1/05 00:20
나의 기억력은 정말이지 형편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이름이나 소설, 드라마, 영화 따위의 제목과 대사 따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구나 숫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기억하지 못한다. 생일이라든지 날짜라든지 돈의 액수라든지 전화번호라든지 하는 것들. 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 단기 기억은 그럭저럭해서 시험은 그냥저냥 봐도 정작 시험지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모두 까먹는... 뭐 그런 종류의 휘발성 메모리.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논문을 쓰며, 가끔씩은 소설을 쓰는 생활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걱정되는 건 이런 형편없는 기억력이다. 너무 까먹는게 싫어서 1년 넘도록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이나 아이디어가 나타나면 옮겨 적는게 버릇이 되었다지만, 그게 언젠가 발목을 잡아도 크게 잡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를테면 오늘 어느 시인이 쓴 블로그의 글도 그렇다. 2년 전 이맘 때 출간한 한 산문집의 어느 파트가 알고보니 어떤 칼럼니스트의 글을 '편집'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느 독자가 꼼꼼히 짚어가며 의혹을 제기했고, 그 시인은 그 본의아닌 표절을 인정하고 다음 판에는 그 파트를 제외하기로 했다. 예전에 자료조사 하면서 이게 대체 자기가 쓴 메모인지 남의 글을 옮겨 쓰는지 구분하지 않았던 탓이라 했다.
 
나도 이러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내가 좋아서 몇 번이고 암송했던 문장ㅡ그러나 물론 지금은 까먹어버린ㅡ이 어느날 갑자기 내 손에 출현해서 글로 옮겨져도 나는 그게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나도 메모와 옮겨쓰기를 구분하지 않는 탓이다. 나중에 글을 쓰다 예전에 읽었던 남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 오면서 그게 내가 해낸 생각이라고, 정말이지 훌륭하다고 자화자찬하며 무릎을 칠수도 있는 노릇이고.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문학에서도 그렇겠지만 논문을 쓰면서는 정말 최악의 일이 된다. 자칫하면 그쪽에서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표절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내 기억력이 나쁜 탓에 그걸 옹호하기 위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네 일상에서 오가는 모든 일상적인 언어는 사실 모두 표절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다. 연예인 가십, 상사나 친구의 험담, 친구와의 환담, 혹은 속담과 민담, 심지어 진지한 사랑의 고백까지도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어딘가에서 읽고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 아니던가.
 
물론 남의 것을 그대로 베껴써서 자기 것처럼 위장하고 그걸로 자기의 업적을 세운다면 그건 반칙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칙이고 경고와 주의를 주면서 다같이 고민하고 경계해야할 문제지, 오늘날의 한국은 병적인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정작용과 자기반성, 도덕적인 문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사법권 혹은 법의 이름으로 치환해서 다루는 '아메리칸'적 방식.
 
진중권의 최근작 <교수대 위의 까치>는 그의 유명세(그래서 사실 소설이든 뭐든 그걸로 돈 깨나 벌고 싶으면 일단 유명해진 다음에 출판하는게 더 쉬운 일이다), 그리고 특유의 입담과 깔끔한 문장, 또 그림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잘 나가는 편인 책이다. 그러나 그가 한겨레21에서 밝혔듯, 그 책은 사실 인터넷의 정보를 짜깁기(편집)한 것이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저자의 관점과 직관인 셈이고, 수없이 인터넷에 널린(한 표현을 빌자면 "자기 산출적 우주"로서의 인터넷) 자료들을 취합해 모종의 논리와 일관성에 따라 편집한 결과물이 바로 그 책인 셈이다. 그건 결국 뭐라 해도 표절이 아니다. 없던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로서의 저자, 결과물에 대한 무한한 권위자로서의 저자라는, 전통적인 이미지의 저자는 그에게서 한 번 더 무너지는 셈이다. 사실 이런 저자관은 진부한 것이다. 왜냐면 논문 쓰는 사람들은 사실 본질적으로 이런 저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용을 세련되게 잘 각색해서 원작이 안 보이게 만들면 훌륭한 문학가로 인정받게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서 난 언젠가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잘 빠진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다. 인용했다는 걸 떳떳히 밝히고.
 
그 시인이 지나치게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게 논문도 아니고, 그걸 통해 뭐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어디서 참고했다고 작게 명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지. 혹은 머릿말이나 저자의 말에 그냥 여러 사람의 글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지. 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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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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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 된다"
 
서경식 : 한국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소위 진보세력이 집권하게 됐는데 오히려 폐쇄적인 민족주의 국가로 바뀐 것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또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이어진 과거 개방적인 성격의, 또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주의가 지금도 한국에 남아 있는지 묻고 싶다.
 
김상봉 : 민족주의가 자기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형성된다고 할 때, 저항적 민족주의는 상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자기의식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소위 '월드컵 민족주의'는 더 이상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민족주의다. 지금 우리시대 많은 한국인이 더 이상 역사의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서경식 : 갖고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김상봉 : 그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인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역사의식은 영광스러운, 자랑스러운 역사로 흘러버린다. 정신적인 허영과 소수자 및 타자에 대한 배제는 늘 짝을 이룬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엷어지는 게 문제다. 일본에서는 과거 전쟁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엷어지면서 침략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 남았다.
 
요즘 한국 사회의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가를 잊을 수 있다면 모든 역사는 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식민지 개발론'이 나오는 것도 일제시대에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개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잊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시대를 기억한다고 할 때, 그 시대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였는지를 알려준 사건이 서승 선생의 '난로 사건'(편집자 주: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서승.서준식 형제가 간접 혐의로 보안사에 검거된 뒤, 서승 씨는 심문과정 중 심한 고문으로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짓 자백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경유 난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기도한 바 있다)이었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으면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죽음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잊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고통을 잊는 한 역사의식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박제화된 것만 남는다. 수치화된 박정희 정권, 그의 치적만 남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도 똑같다. 최근 경남 통영을 방문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온통 작곡가 윤이상 선생으로 도배를 했다. 윤 선생은 한국 정부로부터 끝끝내 거부됐지만 그가 죽고 나서 한국 정부에게 더 이상 무해하게 됐을 때, 그의 수난을 그런 식으로 박제화, 상업화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최고의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한국 지식인들이 동아시아인의 공통성을 쉽게 얘기하나"
 
서경식 : 동감한다. '이 나라 사람들이 고통의 기억을 잊어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은 일반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최근 창비에서 주최한 한 포럼의 주제가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공통성을 갖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은 과거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할 때 내세웠던 논리다.
  
▲ ⓒ프레시안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계속 배신당했다. 어떻게 한국에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공통성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얘기를 그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가. 언제, 어느 시점에서부터 일본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가. 최근 <한겨레>에 서강대의 한 중국전문가가 '동아시아인의 건배'라는 글을 썼다. 벌써 건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한국인들이 역사의 고통을 다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든다. 일본 시민들의 역사망각증, 즉 역사의 기억을 지우고 자기를 긍정하고 싶은 욕망을 보면서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는데, 한국에 와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다. 어떻게 이 나라 사람들은 식민지 경험이 있으면서도 일제 식민지 시절의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김상봉 : 완전히 망각했다 보지는 않는다. 또 외적 조건이 완전히 망각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기보다는 즉자적이다. 광주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도 그런 부분인데, 역사에서 언제라도 다시 침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 있는 한 방어적 무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다만 역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매번 즉자적으로 부딪힐 때만 환기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면, 그 슬픔은 힘이 되지 못한다. 수동적인 의미의 고통의 감수성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방어적이 되고 자기 보전 본능만 강해진다. 이럴 경우 고통의 기억은 인간을 용렬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고통의 기억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고통의 기억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과 타자와 연대를 위해 자기 고통에 대한 성실한 성찰을 요구한다.
 
서경식 : 일본은 전쟁의 가해자인데도 히로시마, 오키나와 등 피해자로서의 기억만 보존해 왔다. 학생들을 데리고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 가보면, 전부 피해의 기억이며 다 기호화돼 있다.
 
반면 한국은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다 잊은 듯하다. 한국의 시를 보면 김수영 시인도 그렇고 신경림의 '농무'도 패자의 역사, 패자의 아픔을 담고 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도 같은 범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패자의 아픔을 통해 자기 인식으로 형성된 감수성이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걸 잘 기억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다 잃어버린 것 같다.
 
김상봉 : 더 늦게 전에 우리 시대의 지성사를 성찰해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수난의 역사를 살아 왔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참여, 또는 연대로 확장되지 못했다. 오히려 단순한 자부심과 긍지, 이를 통해 왜곡된 민족주의로만 나타나는 게 대단히 위험스럽고 걱정된다.
 
이전 세대는 고통이 가까이 있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다. 거꾸로 지금 세대는 그런 고통의 기억은 없다. 우리 세대가 6.25를 기억 못 하듯 지금 세대는 5.18을 기억 못한다. 이들이 아는 것은 그 이후에 누린 상대적인 경제적 풍요고, 이런 경제 풍요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다 희석시킬 뿐 아니라 막연한 자부심, 자신감을 주기까지 한다. 이런 자신감과 자부심이 그 이전까지 민족적 열등감과 묘하게 맞물려 별로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과도하게 표출된 게 '월드컵 민족주의' 등 '과도한 운동장 민족의식'이 아닐까.
 
서경식 : 지금 세대적 단절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 젊은 세대의 경우 상상을 못 하니까 당시의 고통의 의미가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젊은 세대보다 기존 세대의 책임이 무겁다. 프리모 레비 (편집자 주: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했던 유태계 이탈리아인으로 2차대전 말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뒤, 40여 년 동안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홀에서 투신자살해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같은 전쟁 생존자가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을 젊은 세대에 전달하려고 할 때 느껴지는 어려움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윤동주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이부끼 사토(伊吹鄕)라는 일본 사람이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일어로 번역했다. 이부끼는 윤동주는 기독교인으로 그의 시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표출이다, 미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가 윤동주의 시에 대해 "그는 일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 것을 자신의 번역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윤동주가 표현한 '죽어가는 것들'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적인 것, 사라져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반면 이부끼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라고 번역한 것은 일본의 애니미즘(animism :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여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깊은 미움과 동의적 의미다. 미움이 있으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설사 윤동주가 일본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사랑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일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
 
김상봉 : 일본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학대했는데 그 학대받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주기까지 바라는 것은 어린애 같은 기대 아닌가.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허약함을 보는 것 같다.
 
서경식 : 이런 게 일본의 허약한 제국주의적 인식의 전형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들에게 '상상 못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해보자', '바깥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안 보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해보자'고 얘기한다.
 
민족이 타자, 침략하는 사람에 대한 반동을 통해 형성된다면 그 관계성과 운동성을 제고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윤동주가 민족 시인이라고 할 때 어떤 의미인가. 모순적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난 디아스포라이므로 민족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가 왜 조선말로 시를 썼는가. 조선말밖에 못 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간도에서 자랐기에 초중등 교육을 조선말로 받았다. 그래서 자기 진심을 조선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미 조선의 문학가들은 일본어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일본말을 쓴다는 것을 일본 문화를 배우는 의미도 있다.
 
김상봉 : 윤동주는 연희전문 출신이다. 연전이 당시 우리말에 대한 자의식이 상당히 강했다. 조선어학회 사건(편집자 주 : 1942년 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대거 투옥한 사건. 최현배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은 1년 동안 일본 경찰의 갖은 야만적인 고문에 시달린 끝에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國體)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단체'라는 죄명으로 기소돼, 6년에서 2년까지 징역을 받았다) 으로 정인보, 김윤경 등이 잡혀가기도 했다.
 
난 윤동주 같은 이가 역사에 있어 '목격자'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강건함이 없는 상황에서는 순수함이 없다. 인간을 감동시키는 순수함은 여린 감수성으로 나타난다.
 
우리 역사를 보면 저항운동에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전통이다. 동학, 항일 의병, 서승과 서준식 선생이 바로 이들이다. 1970~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감옥을 들락날락 했던 이들도 이 전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프레시안

반면 함석헌, 윤동주, 한용운은 '목격자'들이다. 하지만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다. 시인, 철학자들은 증언자가 돼야 하고, 이 증언은 언어에 대한 치열함, 몰입이 필요하다. 이들은 저항의 역사 속에 같이 존재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증언자의 전통은 별로 진지하게 반추된 적이 없다. 이제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미 부여해야 한다.
 
끝끝내 할 수 없는 일을 안 했을 때 순교자가 된다. 수난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해서 순교자가 된 게 아니다. 악한 사람들이 나의 악에 동참하라고 할 때 거기에 동참하지 못해서 순교자가 된다. 그래서 윤동주는 죽었고 함석헌은 죽지 않았지만 똑같다고 생각한다.
 
삶의 알량한 안락함, 명예, 지위 등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려면 타협해야 한다. 같은 시인으로서 서정주와 윤동주의 차이는 사소한 것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절대적인 것이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단순히 소극적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서경식 :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보면 자기 운명을 아주 냉담하게 예측한다. 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런 것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김상봉 : 그런 전통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고 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내 경우를 보면, 무엇이 살아있게 했는가? 내 인생에 각인된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서승선생의 '난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일방직사건(편집자 주 : 1978년 인천의 동일방직이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을 부수고 인분을 투척한 사건)이다. 내게는 이 두 사건이 하나이자 전부로 삶을 이끌어 왔다. 내가 당한 상처였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고통이 한 사람의 삶에 지울 수 없이 각인돼 삶의 에너지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들의 고통은 혼자만의 무익한 고통이나 수난으로 끝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수 많은 다른 타인들의 응답 속에서 역사가 발전한다. 내가 마음속으로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얘기는 그 고통을 누가 대신해줄 수 없었지만, 그분들이 품었던 이상주의적 열정이 절대로 역사 속에서 속절없이 배신당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때"
 
서경식 : 윤동주의 시 '별을 헤는 밤'을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온다. 윤동주는 이를 통해 열린 형태의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본다. 민족의식이 형성되는데 타자와의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타자와 만나지 않을 때 국수주의적 민족의식이 우선한다.
 
윤동주의 모어(母語)는 조선어였다. 나는 일본어가 모어다.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는 35년 만에 끝났지만 아프리카처럼 1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면 모어가 없어지고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들에게 모어가 절대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자기가 쓰고 있는 모어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면 나도 운동주의 '서시'를 보고 이부키 같이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내 사고엔 일본적인 사고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 좋다는 느낌 자체가 일본어로 구성된다.
 
일본어라는 모어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아기일 때 투입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원초적인 폭력이다. 이 과정이 폭력으로 인식되면 근원적인 것도 의심하게 된다. 애국심이나 가장 깊은 수준까지 생각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말에 대한 의심까지 든다.
 
김상봉 :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이 '실체'냐 '무(無)'냐 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빠질 수 있다. 민족은 '실체'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집단적 주체다. 그것은 '우리'라는 공유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그것이 없으면 사라진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자와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언제나 타자와 만남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성이 형성되고 그게 '서로 주체성'이다.
 
나는 이전에 민족을 가리켜 역사와 언어라고 하는 어떤 전제, 조건 위에서 수립되는 '공동 주체성'이라고 풀이했는데, 서경식 선생을 만나면서 내 안에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타인과 만남에 전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역사나 언어라는 전제를 버려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에 들어온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민들과의 '공동 주체성'의 형성이란 과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만남의 공동체' 정도로 느슨하게 개념 지어져야 한다.
 
윤동주 시인이 패, 경, 옥 등 이국 소녀 이름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개방성에 대해 개념적인 말로 형상화시켜야 하는 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디아스포라적인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지금까지의 민족 개념이 아닌 다른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혼자서 곱씹으면서 도달한 결론이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개념은 만남의 지평 그 자체를 민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 : 5·18에서 '서로 공동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다 나서서 싸운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 일상적인 지역적 억압에 대한 분노 등이 근간이 됐다. 한국 사람이니까, 광주니까,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5·18을 생각하면 정치적 이념에 앞서야 하는 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의 문제다. 그것 없이 정치적 이념이 먼저 갈 때 인간은 수단화된다.
 
서경식 : 1960년대에 일본에 재일조선인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을 때 일본 내에서 조선 문화를 얘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장은 일본이 고대와 중세 때 백제, 고려 등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있다, 없다는 문제와 지배, 피지배는 다른 얘기다. '문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천대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배당해도 되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인들이 인디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 보면 식민지 지식인의 인식의 세 단계가 나온다. 처음에는 백인에 동일화하려고 노력하고, 두 번째 자기들이 고대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문화가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아프리카에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백인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문화를 시발점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 있는 싸움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바로 디아스포라인 내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파농도 디아스포라다. 알제리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위해 싸웠다.
 
김상봉 :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이 한국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
 
서경식 : 디아스포라적인 객관성이 있다. 디아스포라야 말로 자신의 존재조건, 즉 언어조차 의심하면서 그래도 남는 자신을 근거로 타자와 서로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 노동자를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그들과 만남을 바탕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삶의 의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이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끈들을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디아스포라 기행> 46~49쪽)
 
김상봉 :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제일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낯선 도시 호텔방에서 내가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나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한 인간이 놓여 있는 측량할 수 없는 뿌리 없음, 허무함 등에 대해, 이 절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응답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허무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교양인이 아니라는 식의, 우리 시대의 가벼운 허무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로서 아주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허무의 체험과 또 정반대로 보통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말로 서경식 선생이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만 더 정면으로 선생이 그 지점을 대면해줄 수 있겠나.
 
서경식 : 아주 근본적인 문제다. 민족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허무주의라고 할 때는 두 가지가 생각난다. 가네코 후미코(편집자 주: 조선인 남편 박열과 함께 1923년 히로히토 당시 일본 왕세자와 고관들을 폭살하려다가 붙잡힌 일본인. 1926년 3월 이들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가네코는 석달 후 감옥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무정부주의자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주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사생아라서 호적이 없었고, 그래서 소학교도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미코는 가부장제와 국가 제도에 대해 아주 철저한 증오를 갖고 이를 끝까지 관철했던 사람이다. 그는 죽음으로 자기를 관철했다.
 
이봉창(편집자 주: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로 일왕 히로히토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 그해 10월 사형을 당했다)도 마찬가지다. 과자점 직공, 철공소 직공 등을 전전하던 그는 유가다를 입고 게다를 신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죽고 싶다. 죽을 명분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봉창이 마지막에 히로히토를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갈 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평생 집착이 없었다. 이봉창도 다이스포라였고 그래서 그런 허무주의자의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삶에 집착하는 한 누구도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걸 수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 근원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 때문에 병든다.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냉소에 빠지면 모든 게 다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 정반대로 그 허무주의를 참을 수 없을 때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유토피아도, 절대자도 오지 않는 시대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로 그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서경식 : 진부한 말이 될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정의'다.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다. 중국의 루쉰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길이 있다고 해서 걸어가는 게 아니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건 싸움이 아니다. 근거가 없더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전부 다 없어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뭐냐고 물으셨는데, 그럼 전부 다 없으면 죽는 것이냐. 개개인의 허무주의와의 싸움이다. 19세기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은 다 귀족이었다. 사치스럽게 살 수 있었는데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나눠줬다. 이런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변화가 있었다.
 
김상봉 : 수백년 전 사람이 경험했을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동력 같은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다.
 
서경식 : 나는 유한이다. 국가나 국민은 무한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죽으면 불사가 된다. 새로운 우리라는 걸 구성할 때는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해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 한 국가나 국민이 재생되고, 국가주의나 국민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
 
진짜 자유인이 되려면 이것부터 거부해야 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는 길이다. 마음 아프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만든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 삶의 끈을 잡는 행위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를 놓는 게 패배라고 생각해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내일 여기에서 몸을 던지고 죽었다고 해도 놀랄 필요나 가슴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7/29 10:42

나는 예전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포스팅(http://www.namunnib.net/30)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어딘가 맥이 빠진 듯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한 것에 대해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레비에게 독자인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피해자를 특정한 형태로 유형화하고, 그 안에 가두려는 속셈은(타자를 관리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은) 없었을까? 피해를 받은 사람이면 으레 고통스러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럼으로써 나는 생존자의 행위성agency를 깔끔하게 무시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생각이 바뀌고 바뀌고 있다. 정희진씨의 강좌를 들은 탓이다. 정희진씨는 몇 년 전에 '가정 폭력 피해자'에 관한 논문을 썼다. 따라서 그 논문에는 '끔찍한' 실제의 사실들을 많이 기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게 진짜냐? 꾸며낸거 아냐?" 라고, 심지어는 "아직도 더 할말이 남았냐?"고. 정희진씨는 사건 내용 자체의 끔찍함은 물론, 그러한 사람들의 (몰지각한) 반응 때문에 논문에 담을 내용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정희진씨의 책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나는 이 책을 읽고 거의 구토할 뻔 했다.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은 많은 경우 '미치'거나, '자살'하고는 했다. 프리모 레비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아우슈비츠 같은 끔찍한 폭력 사건의 트라우마는, 생존자들을 끊임없이 붙들어 매고 또 평생 고통을 준다. 성폭력 생존자는 물론이고, 아동 폭력 생존자들도 물론이다. 거기에 빈곤의 극한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쟁 생존자들의 이야기도, 일본 '정신대' 생존자들의 이야기도 물론이다.

이에 대한 정희진씨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들 '생존자'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말하는(말할 수 있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그 간극이 이들을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물론 어떤 끔찍한 일이 있다고 하여 모든 주체가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그런 끔찍한 일들이 있었지만, 난 그것을 '의미화'하지는 않고 있다. 모든 사건의 피해자를 외부에서 임의로 '피해자화'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전히 재발견되고 재사유되고 끊임없이 전유되어야 하는 중요한 가치다.)

서경식씨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보면, 레비가 자살하기 1년 전(1986년)부터 "가스실은 없었다" 따위의 아우슈비츠 부정론이 등장했다 한다. 1985년에는 나치의 범죄를 부정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나치를 긍정하거나 나치를 옹호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으며, 그렇게 하고자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매우 거셌음을 증명한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침공을 정당화 하는데도, 아우슈비츠 담론이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레비가 자살하고 난 이후에도ㅡ후에 '수정주의'라 불리는ㅡ나치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담론이 등장하였다고 한다. 나치가 나쁘기만 한 것이었냐는 이야기는 물론, 생존자들의 경험은 그들 자신을 특권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해석적이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생존자가 아닌 외부의 사람들은, 끔찍한 일에 대해 대체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아마도 민주주의의 이상, 생명의 존엄, 평등의 가치, 자유의 가치 등 오늘날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포섭되지 않는 가정폭력, 성폭력 등 끔찍하고 '외설적'인 사건 등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 때문일 것이다. 분명 한 사회의 사람들과 자기 자신은 어떻게든 좋게 좋게 살아가는데, 그 내부에서 그에 반反하는 끔찍한 일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종주의자들의 담론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 즉 그 안에 (라캉식으로 말하면) objet petit aㅡ일종의 '배설물'ㅡ가 있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주체들에게는 공포이자 두려움이 될 것이다. 그 공포는 때로 생존자들을 직접적으로 억누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성폭력 생존자에 가해지는 2, 3차 폭력과 같다. 이는 일종의 '자기 기만'이기도 한데,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항상' 곁에 와 있는 타자의 경험을 못 본체 하거나 부러 보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짓이기 때문이다(먼 나라의 고통에는 민감하면서 자기 주변의 고통을 못본 체 하는 사람들도 해당한다.). 따라서 생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할 때 '알아서' 조절할 수밖에 없다. 그 무시무시한 간극. 아.

생존자들의 그 '조절된 경험'들은 결국 어떤 '핵core'이 제거된 것이다. 생존자의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무의식 속 공포를 건드리지 않는, 어떤 무시무시한 '핵'이 제거된 경험. 타자의 담론을 무한정 섭취하고 그것을 순환시키는 지배 담론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방해하는(지배 담론의 전체성whole을 해치는) '핵'을 제거한 경험. 그러나 그 '핵'이 제거되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남는 것일까?

생존자의 증언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내라고, 더 많이 이야기하라고, 당신은 우리들의 영웅이라고,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의 범위를 정해주는 것도 또한 이들이기도 하다. 이 안에서 타자의 경험은 '동일자화' 된다. 핵이 제거된 생존자의 증언은 단순한 이야기거리와 '연민'의 대상이 된다. 고작 이렇게 되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보다("거짓말 하지마! 꾸며낸 거지? 요즘 같은 세상에 절대로 그럴리 없어!" 라고 말하는)는 훨씬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적어도 한국에서 생존자/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큰 결단을 내리는 경험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며, 동일자들의 섭취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더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재현하는 태도,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 그 어떤 것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고통이 재현되고 유통되는 순간, 어떤 '핵'이 제거되는 것도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고통, 그리고 공감empathy(연민sympathy과는 구분되는)에 기초한 정치학과 타자 윤리학이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라캉의 윤리학이 정확히 맞닿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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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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