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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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09 9월 9일
  2. 2011/02/16 거울 뒤로 (2)
  3. 2010/05/17 요즘엔
  4. 2010/01/28 글쓰기, 호흡
  5. 2008/01/02 set me free
  6. 2007/09/26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글쓰기
  7. 2007/07/04 '난해한' 글쓰기 (8)
조각들 / 2011/09/09 12:24
모든 단어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단어들은 서로 불화하고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며, 따라서 그것들 자체로 하나의 소우주를 그린다. 혹은 저마다의 '진영(陣營)'을 뽐낸다. 그것들은 특정한 분위기를 풍겨내며, 어떤 것들에는 인력(引力)을, 어떤 것들에는 척력(斥力)을 내뿜는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서로의 자장 속에 존재한다. 포함적(inclusive)이면서 동시에 배제적(exclusive)이다. 그리고 요즘 나는 그것만이 내 공부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70%는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느끼고 있다. 어딘가에는 '진리(Truth)'가 있을 것이라는 기획을 포기한 자리에 여전히 남아서 조금씩 썩어가던 미련은, 적어도 작은 '진실(truths)'들은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련마저 잘라낸 자리에서 움트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어라는 그런 희망과 신념 뿐이다.

이럴 때 단어들은 결코 단순한 '수사'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확실하면서도 물질적인, 특정한 장소와 주체(의 입)을 갖는, 그리고 가장 독특(singular)하면서도 또한 고도로 정신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예컨대 네가 뱉어낸 "그리움"이라는 단어와 다른 네가 뱉어낸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전혀 다른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전달된다. 따라서 단어들은 단순히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에 새겨진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우리는 어떤 단어(의 우주)에 참여함으로써,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르게 지각하고 인식하고 사유한다. 만약 우리가 저마다의 사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인지/인정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저마다가 편찬하고 있는 사전의 짜임새와 어휘풀이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입에서 전달된 단어들은 네가 쓰고 있는, 또한 네가 살아가면서 편찬하고 있는 사전의 일부이다. 따라서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수사'가 아니다.

물론 논리의 확실성, 명료성만을 글쓰기의 규범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수사는 거치장스럽거나 화려할 뿐인 허망한 장식품일 것이다. 그들은 수사를 논리를 왜곡하거나 논리의 불명확함을 술수를 부려 극복하려는, '메이크업' 같은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어들은, 벤야민의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통해서'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어들은 스스로의 '속에서(안에서)' <어떤 것>을 전달한다. 그 <어떤 것>은 물론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며, 우리를 우리로 가능하게 하는, 느낌과 정서와 감정의 복합체이며 우리의 삶과 미래를 향한 지향 그 자체를 담고 있다(나는 아직까지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은 단어와 불가분이(어야 한)다. <어떤 것>의 본질이 따로 있고, 단어(언어)는 단순히 그것을 전달하는 한갖 매개인 것은 아니다. 단어는 어떤 것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실현한다. 다시 말해, 내가 쓰는 단어는 나와 너의 관계를 표현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덧) 대학원에 와서 내 글에 대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ㅡ아마도 비난일 것인데ㅡ"화려하다"였다. 나는 내 글이 한번도 화려하다 느끼지 못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멋있게 쓰려고, 있어보이게 쓰려고 한적이 없다. 나는 자랑하려고 쓰지 않는다. 또한 포장하려고 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것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고, 포장하고 싶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추상적인 독자 K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내 글은 K와 연결되는 방식이다. 혹은 K와 공존하는 상상적인 소세계를 창조하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그곳으로 향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나는 내가 K에게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것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들더러 "화려하다"라고 비난한다면 나는 당신과 어쩌면 전연 다른 사람일수도 있을 것이며 당신은 절대로 K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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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1/02/16 11:42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옥수수 뜯어 먹듯 조금씩 씹어 몇 알씩 삼키고 있다. 그 중에 뭐라도 글을 쓴 뒤에 딱 자책하기 좋게 만드는 글이 있어 옮겨둠 ^ㅅ^ (벌써 자책 중ㅋ 젠장...) 물론 이 글이 자책하기 좋게 만든다는 건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이고,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이 글이 사실 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내 나름의 맥락을 덧대어 일반적 지침으로 삼을만 하다는 얘기다. 아도르노의 짧은 에세이들이 연속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보면, 그도 무슨 사건이나 사람이 동기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곳 저곳에서 때로 모순되고 갈라지는 틈이 느껴지거든(즉,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얘기). 물론 전체적으로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글 다운 글'을 써보고 싶다. 블로그에 쓰는 것 말고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열흘 간 어디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여하간 3월부터는. 물론 지금은, 그리고 당분간은 내게 허락된 지면이 없(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지면을 만들고자 한다면...


51. 거울 뒤로

문필가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유의사항은, 모든 텍스트와 모든 절, 모든 문단에서 중심 모티브가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쓰인 것에 대한 별다른 반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내버려두려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생각 속에서는' 자신의 의도에 밀착되어 있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어떤 결함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무방할 정도로 너무나 작고 사소하지는 않다. 수백 번의 교정 중 하나하나의 작업은 사소하고 고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체가 합쳐지면 새로운 차원의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길이는 아무래도 좋다. 분량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유치하다. 일단 존재하게 되고 씌었다는 이유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단지 변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종종 저자가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그 무엇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이 경우 최상의 표현을 골라내어 이것을 가지고 계속 작업해나가야 한다. 구성상 필요할 경우 버리기 아까운 사유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문필가의 테크닉이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버려진 사유들이 힘있고 꽉 찬 구성에 도움이 된다. 식탁에서처럼 마지막 한 입을 먹지 않아야 하며 술잔의 바닥을 비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바닥이 보인다는 의심을 받는다.

상투어를 피하려는 사람이 속된 아양떨기에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개개의 단어 선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훌륭한 산문들은 그런 것에 특히 민감했다. 하나의 단어도 진부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음악에서 또한 개개의 음조는 진부함에 저항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상투어는 카를 크라우스가 비판했던 유형의 단어 결합ㅡ예를 들어 '남김 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번영으로 그리고 파멸로', '확장시키고 심화시켜' 같은ㅡ이다. 왜냐하면 이런 단어 결합에서는, 말이 절실히 요청되는 곳에서 필요한 저항이 정교한 표현을 통해 가동되는 대신 김빠진 언어의 한가한 물결만이 철썩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은 단어 결합뿐만 아니라 전체 형식의 구성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어떤 변증법론자가 휴지부마다 '그러나'라는 표현으로 시작함으로써 사유 진행의 전환을 표시하려 든다면, 그러한 구성 틀은 그의 사유가 체계 없는 거짓말이라는 판결을 받게 만든다.

덤불은 정성스럽게 보살핀 신성한 숲이 아니다. 자기는 최선을 이해한다는 편안함에서 나오는 난해성을 해소하는 것이 의무이다. 대상의 깊이를 충실히 감당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쓰려는 의지와, 독특하고 난해하며 자만에 찬 날림 글에 대한 유혹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전한 인간 오성'이라는 우둔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진부한 사유를 화려한 문체로 치장하려 들지 않난 조심해야 한다. 로크의 진부한 문체가 하만의 모호한 문체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길이와 상관없이 완성된 글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이의라도 제기된다면 그러한 이의가 적절한가와 관계없이 이의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텍스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적 개입이나 허영심은 모든 의심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의심이라고 흘려버린 것은 텍스트 전체가 객관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징표일 수 있다.

에히터나흐의 부활절 댄스 행진[이 댄스 행진은 세 발짝 앞으로, 두 발짝 뒤로 간다ㅡ역주]이 세계정신의 행진은 아니다. 일정한 부분에 국한시키거나 유보시키는 것은 변증법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변증법은 극단을 통해 나아가며, 사유를 한정시켜 거기에 일정한 특성을 부여하기보다는 그 논리의 극단까지 몰고가 반전을 시도한다. 일거에 너무 멀리 나가는 모험을 금하는 '신중함'이란 대개 사회적 통제의 대리인, 나아가 우민화의 도구이다.

어떤 텍스트나 담론이 '너무 아름답다'는, 종종 제기되는 이의는 의심해볼 만한다. 표현된 사물, 심지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너무 쉽게, 인간이 겪은 치욕의 흔적을 무로하한 언어 형태로는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저자에 대한 앙심만을 합리화시킨다. 치욕 없는 존재자에 대한 꿈ㅡ그런 꿈을 내용으로 그려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런 꿈에 대한 언어적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데ㅡ은 악의적으로 교살된다. 문필가는 아름다운 표현과 객관적 표현을 구별하려 드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문필가는, 성실한 비평가에게는 그런 구별이 가능하리라 믿어서도 안되며 자기 스스로에게도 그런 구별을 용인하면 안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완전하게 말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된 표현의 아름다움이란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추잡한 허식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사물에 봉사한다는 핑계로 표현의 순수성을 등한시하는 사람 또한 항상 '사물'을 배반하게 된다.

고귀한 텍스트는 거미줄 같다. 촘촘하고 집중되어 있으며 투명하고 탄력있고 견고하다. 이것들은 날고, 기는 것들을 모두 자신 안으로 잡아챈다. 거미줄 같은 텍스트를 재빨리 통과해 빠져나가 보려는 메타포들은 거미줄의 제물이 되어 텍스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거기에는 재료들이 날아든다. 어떤 관념이 견실한가는 인용이 적절한가의 여부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 사유가 현실의 세포를 열어준 바로 그곳에서 사유는 주체의 폭력 행위 없이 다음 세포로 파고들어야 한다. 이런 사유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유지하며, 금방 다른 대상들이 그런 사유의 주변에 결정체를 이루면서 모여든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한 그의 시선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문필가는 자신의 텍스트 속에 집을 짓는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고 다니는 종이, 책, 연필, 서류들로 방을 어지럽히듯, 그는 사유 속에 비슷한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사유는, 그가 기분 좋게 느끼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가구이다. 그는 이것들을 다정스럽게 문지르기도 하고 혹사시키기도 하며, 뒤범벅을 만들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이제는 고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거주가 된다. 글쓰기에서 그는 예전에 가족들이 그랬듯이 어쩔 수 없이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배출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창고가 없기 떄문에 이 찌꺼기들과 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을 자기 앞에 밀어놓기 때문에 결국 자기 주변을 쓰레기로 둘러싸이게 할 위험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에는 가혹하라는 요구에는 기술적 필요도 들어 있는데, 이것은 지적 긴장을 늦추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다음의 모든 것, 즉 작업 중에 나온 부스러기, 괜히 얼쩡거리는 것들, 처음 단계에서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가십이었지만 점점 가면서 이제는 초라하고 곰팡내나 피우게 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 속에서 거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미니마 모랄리아>, 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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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17 21:46
1. 요즘엔 읽고 있는 책은 많은데, 뭔가를 쓰고 싶도록 하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재미있는 책들도 많기는 한데 이상한 일이다. 책을 읽고 정리해보는 습관은 갖게된 것 같은데, 쓸 욕심은 아무래도 안난다. 쓰고 나면 늘 바보 같아 보인다. 그냥 지금은 input이 더욱 필요한 시기일 뿐이려나? 예전엔 인풋도 없으면서 미친척하고 아무거나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샌 일기 밖에 못쓰겠어. 예전에도 이런 내용으로 포스팅 했던게 기억나는 것 보면, 아무래도 순환과 리듬의 문제인 것 같다.


2. 요즘엔 막연한 덩어리들 사이에 실마리가 이어지면서, 옛날에 ㅅㄷㅈ 샘과 했던 세미나의 문제 의식과 연결되는 부분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 언어학/사적 언어학 분석, (세미나에서 읽었던) 푸코의 근대국가/권력 형성 분석, 얼마 전 다시 한 번 일독한 <지도의 상상력>의 주제, 제국과 제국주의 국가의 구분, 그리고 최근에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있는 책에서 본 어떤 구절이 뒤섞이면서 어떤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오랜만에 탈식민주의 텍스트를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몇 달만의 경험이라 상당히 소중함 ㅎㅎ (그러나 별 다른게 아니네)


3. 요즘엔 생물학에 대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것 같다. 옛날에는 젠더를 다룰 때 생물학 이야기만 나오면 근본주의/본질주의라고 바로 욕했던 것 같은데. 요즘 같아선 생물학과 관련해서 생리학, 실험심리학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검지와 약지 길이의 비율 계산으로 성격과 젠더를 짐작할 수 있다니 뭐 이런 엉뚱생뚱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이다. 아동의 행동과 인지에 대한 최근 실험들도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다. 뭔가 나름의 통찰은 준다. 물론 지금처럼 잠깐 흥미는 가더라도, 오래가는 재미는 못느낄 주제들이기는 하지만... nature vs. nurture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신념과 실천의 문제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난 무조건, 일관되게 후자 지향.


4. 요즘엔 내가 가진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은 아니고, 좀 더 질투와 갈망이 세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빼앗고 싶거나 흡수하고 싶다. 꼭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못사는 책을 서점의 서가에서 몇 분이고 서서 바라볼 때 같은 느낌. 상당히 오랜 기간 마음 속에 누적되어 폭발할 듯 말듯 무언가가 있는데, 계기를 아직 못만난 것 같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 탓이라면 상황 탓일테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줄 관계를 못만난 탓이라면 그것 탓일테다. 여하튼 아슬아슬하게 찰랑찰랑대고 있다는 것. 위험한 충동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이럴 때는 "Protect me from what I want."를 주문처럼 되새김질 하는 수밖에.


5. 요즘엔 자꾸만 내가 예전에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 말에 따르면 예전에 나는 신념에 찬 '애정분배주의자'였다.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해서다. 연애 관계든 아니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집약적인 심적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주변 관계에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연애 관계에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면서, 다른 관계나 일상 생활 자체가 뒤흔들리는 걸 사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올바르지 않다'고까지 여긴 적이 있다. 특히 여이연 강좌 들으면서 바이섹슈얼리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는 말이다(이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살았는지).

그러나 사실 이는 생존전략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대학 시절에만 하더라도 내가 하기 싫거나 귀찮은 일을 해야할 때가 많았고, 그때만 되면 늘 소진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만 하더라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일이 가능했다(이게 생각대로 하면 되고~도 아니고. 이제와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근근히 '일상'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그리고 이는 성적표에 반영 되기도 했다; 애정을 철회해야 할 때면 급락하는 성적표 숫자...;). 하기 싫은 일, 그리고 주변 관계에, 그 에너지를 공평하게 분배해서 말이다. 

지독히 나르시시스틱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도 이도저도 아닌 선택이었는데다, 어쩌면 천성에 반하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는 탓에,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방어기제였다는 생각도 들고. 요즘엔 좀 바뀐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6. 요즘엔 어떤 다른 글쓰기 양식에 대한 욕심도 부쩍 커지고 있다. 앞서 3번에서 말한 게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영화 <시>를 보고 나서 정말 크게 느꼈던 부분이었다. 내가 자주 썼떤 글은, 기껏해야 의미(meaning)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려들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고 의미있는 글쓰기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러한 글쓰기는, 이를테면 'sense'를 전달해야 한다. '센스'는 감각과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 그러므로 태생부터 결핍으로 시작하는 논문식 문체 같은 걸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일전에 영화 <시>를 보고 여기에 썼던, 그리고 이내 지웠던 글이 한없이 부족하고 한심해 보였다면, <시>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어떤 '의미'를 설명하고 재현represent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시>는 'sense'를 내 앞에 '제시present'ㅡ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이밀어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ㅡ했다. 그러므로 내가 택했던 글쓰기 방식은 완전히 틀렸던 셈이다. <시>에 대해 쓰려면, 완전히 다른 글쓰기를 택해야 한다. 내가 갖지 못한 어떤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차라리 문학적인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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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1/28 00:24

글쓰기를 다루는 책을 보면 종종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보라는 조언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에도 문장의 리듬을 내심 느낀다는 이유다. 묵독을 할때조차 음성은 영향을 미친다. 고로 소리내어 읽기 좋은 문장은 눈으로 읽기에도 좋다. (그렇다고 구어체로 글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예전엔 이 말이 무슨 말일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새는 어떤 의미인지 알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 어떤 외국인이 한국어가 아름답다고, 시적이라고 얘기한 적 있었다. 많은 문장들이 "다."로 끝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각운이 들어간다는 이유다. 그때는 잘 모르는 소리라고 가볍게 그냥 지나쳤는데, 이제는 한국어가 가장 예쁜 음성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요즘 나를 놀라게 한 건 이런 얘기가 문장에만 해당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문장 말고 문단에도, 물론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소설론을 다룬 어떤 책에서는 문단 나눔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한 소설의 일부를 인용한다. 전쟁, 무기, 싸움, 남자들의 전우애를 다루는 내용인지라 내용에는 호감이 없었지만, 한줄 한줄 읽어 문단을 끝마치는 부분에 다다랐는데 이상하게 호흡이 무척 가빠진 걸 느꼈다. 그리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면 그 가빠진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고, 계속 문장을 읽어 나가면서 호흡은 다시 가빠졌다. 놀라운 것은 그게 번역문이었단 점이다. 문단의 길이도 사람의 호흡시간에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번역문이었으니 길어질 수밖에). 짧지 않은 인용이었는데 단숨에, 단박에 읽어내려갔다. 신비경이었다.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건 비상한 상상력도, 아름다운 단어도, 독창적인 구상도 아니라, 아마 어느 정도는 이런 생물학적 측면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겠지만, 최근에 나오는 멋진 과학 이슈들에도 관심이 점점 생긴다. 특히 뇌과학이나 신경과학 같은 거. "진화"라는 접두어가 붙은 건 종교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싫지만. 내가 그런 것을 생산하고 싶은건 아니고, 인문학의 기반에서 해석하고 응용하고 인용하고 싶다. 그건 "생물학으로 대동단결"을 외치는 개념인 '통섭'과는 다른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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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08/01/02 22:27

발터 벤야민 선집, <일방통행로>


재봉용품

범죄자를 죽이는 것은 윤리적일 수 있다 ㅡ 그러나 범죄자를 죽이는 것의 합법화는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

두 번째 안뜰 왼편, 마담 아리안느

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사람은 다가올 것에 대해 자신의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포기하는 셈이다. 그 내면의 소리는 그 여인들에게서 그가 듣게 되는 것보다 천 배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를 이끄는 것은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나태함이다.

천문관 가는 길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 시킬 수 있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 그 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결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말은 취함의 상태에서 우주와 소통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셀프서비스 식당 "아우게이아스" 中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 이것은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이의다. 혼자서 하는 식사는 삶을 힘겹고 거칠게 만들어버린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영락(零落)하지 않기 위해 엄격하게 살아야 한다. 은둔자들은, 이것 때문만 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소한 식사를 했다.




얼마 전 도서출판 길에서 벤야민 선집이 출간된 이후로, 그의 문장과 사유가 주는 힘에 감복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읽어가고 있다. 물론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조금 김이 새는 면도 있지만, 내가 지금 당장 벤야민의 원본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맡을 수 있을리 없으니 입 다물고 역자에게 감사하며 읽어야 할 터이다.


나에게 책은 '한 줄'로 많이 남는다. 느닷없이 머리를 강타하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한 문장, 한 줄. 마치 아파트 화단에서 뜬금없이 동물을 본 것 처럼. 마치 기대치 않던 작은 선물처럼. 혹은 버스 안에서 문득 스치는 에피퍼니들처럼. 오래도록 기억 저편 한 구석에 조용히 남아서, 언젠가 갑자기 내게 다시 나타나는 그런 '한 줄'. 그러면 나는 그 '한 줄'과 함께, 목적 따위는 정해진 바 없이 끊임없이 변형(metamorphosis)된다. 그러한 체험 이후의 나는 체험 이전의 내가 아니다. 그 누구도 체험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 체험으로 인도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이런 '한 줄'이다. 현란한 글도 좋고 한껏 어려워서 나를 굴복시키는 글도 좋지만, 결국 나에게 남는 건 이 '한 줄'이다. 나에게 독서는 이 한 줄 한 줄이 없다면 거의 무의미한 과정이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자꾸만 '글쓰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한없이 무엇인가에 구속되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 느낌이 정말이지 싫다. 이럴 때면 늘 나는 재능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진정성을 심문하게 되고, 투명성을 비웃게 되고, 재현의 윤리를 따지게 된다. 이렇게 혼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다 보면 결국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은 투명한 세계들이다. 그래서 나는 조롱 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곳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주절댄다. 나의 '글'도 글 일 수 있다면, 나의 '글쓰기'는 고통이라기 보다는 도피에 가깝다.

will you just set me free please please set me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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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9/26 21:04

(지나치게 '개괄적'으로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정의justice'란게 만약 누군가에게(혹은 어떤 집단에게) 존재한다면, 그건 오로지 그/녀의 '계몽'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 상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의는 어떤 하나의 상상적 진실truth을 상징적 진실로 승격시키는 상상적 과정이다. 다시 말해 정의는 진실을 상징으로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프로젝트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는 상징적으로 '보편성the universal'의 지위를 획득한다. 또한 정의는 그 진실을 보증함과 동시에 널리 퍼트리기 위한 수많은 담론의 생성을 포함한다. 그 진실을 둘러싼 담론들은, 그 진실과 갈등을 빚는 '다른' 진실들을 억압하고 물리치기 위한 장치로서 작동한다. 그 모든게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정의는 그 자체로 완전하게 된다. 정의는 자기 순환적인 프로젝트다. 정의는 정의이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정의는 자신을 대표하는 '영웅들'을 만들어 낸다. 정의의 특성상 정의를 목소리 높여 외치는 자들은, 자연스레 영웅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의는 단지 상징으로 작동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상징을 받아들이는 주체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인격화된personalized' 주체를 만들어 낸다. 그 영웅들은 정의의 담지자가 된다. 이렇게 정의는 자신을 통속적으로 '종교화'한다.

여기서 문제는 명백해진다. 나는 정의란 개념은 물론, 그 정의를 담지하는 영웅도 혐오한다. 물론 정의란 개념 자체가 갖는 정치적 효과(물론 '계몽'적 효과)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정당한 문제인가? '다른 진실'들을 억압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정의는 자기 순환 속에 발견되는 모순들, 그 간극들은 어떻게 감추고 억압하고 있는가? 정의에 포섭되지 않는, 또한 영웅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의는 어떻게 처단하는가?

그렇다면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대답은 요원하기 짝이 없다. 혹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일단 '다른 진실'이 있다는 생각부터 폐기해야 할 것이다. 진실이란 개념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의'는 물론 '계몽'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세상에 남는 것은 온갖 '의미들meanings'밖에 없다. 오늘날 해석, 차이, 사이, 경계, 틈새 같은 개념들이 판을 치고 다니는 것은 기존의 '정의'개념이 그 아우라를 상실함과 동시에 의미들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 의미들의 차이를 해석하고, 그 의미들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대해 말하고, 그 의미들에서 정치성을 발견하는 프로젝트가 각광을 받는다.
 
전통적인 계몽주의자, 모더니스트들이 보기에 이것들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갈래로 보일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이러한 사조가 위험하기 짝이 없게 보일 것이다. 물론 그건 실제로 위험하다. 이러한 '의미들'조차 자신을 '정의'인 것인양 상징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명백히 존재하는 현대 사회의 위기들 조차도 '의미들' 속에 포괄함으로써, 그 위기 자체를 위기가 아닌 것으로 탈정치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한 '의미들'은 계몽 끝에 등장하는 새로운 '냉소주의'의 한갈래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늘날 그 '냉소주의'와 싸우는 것이 하나의 정치적 의무가 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은 항상 있어 왔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가야트리 스피박은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을 말한 바 있고, 주디스 버틀러는 '경합하는 보편성들competing universalities'를 말한 바 있고, 알랭 바디우는 새로운 '보편성the universal'을 확립하기 위한 8개의 테제를 말한바 있다(이에 비해 지젝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감히 말하건대)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전통적인 정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오늘날 등장한 파편화된 가치들과 그를 옹호하는 냉소주의 그리고 새로운 위기와 싸워나가기 위한 노력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새로운 '정의'의 담지자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오늘날 온갖 부조리를 마주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이들과 현대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이들의 새로운 '영웅'이 되었다. 그들이 쓴 글들은 수많은 이들의 손때가 묻도록 읽히고 또 읽히며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들은 밤잠을 설치는 이들이 할 고민을 대신 해주고 그 고민에 흔쾌히 답을 주는 영웅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비싸게 팔리고 있으며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숭배를 받는다. 그들은 현대 사회의 위기를 고민하는 숭고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세상의 문제를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이들은, 이들 영웅의 글을 읽고 이해하느라 밤잠을 설친다.

물론 이들 스스로도 이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푸코도 거의 강박증처럼 이러한 포섭을 거부한 바 있다. 푸코는 생전에 푸코라는 인간이 '영웅'인 것인양, 자신의 전기를 쓰려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푸코도 오늘날 하나의 '영웅'처럼 되어버린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담론과 상징 질서 속에서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글쓰기란 가능한가? 말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 정박시킴으로써 의미망 안에 포섭하려는 '정의' 담론과 싸우는 것은, 혹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그건 오만한 나르시시즘에 불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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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07/04 23:57
Judith Butler, Preface of Bodily Inscriptions, Performative Subversions
세미나 번역문에서 발췌.

<젠더 트러블>을 읽은 평론가, 친구들의 이목은 모두 책의 스타일의 난해함에 집중되었다. 아카데믹한 기준에 따라 “대중적으로” 쉽게 소비되지 않는 책을 발견한다면 이는 분명 이상해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괘씸한 일일 수 있다. 복잡함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닐때, 당연하게 간주되는 진리를 문제 삼는 데 도전이 가담하게 될 때, 그러한 진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억압적이게 될 때, 복잡하고 도전적인 텍스트를 읽으려는 독서 대중의 능력과 열망을 과소평가하는 우리의 방식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놀라게 될지 모른다.

나는 스타일이란 복잡한 영역이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목적에 따라 일방적으로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일찍이 사르트르에 대한 책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분명 스타일을 연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소용이 있을 스타일들은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문법이나 스타일 어느 것도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지적인 발화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습득하는 것은 자상하게 정상화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고 그 경우 순응하지 않는 것의 대가는 지성 자체의 상실이다. Drucillla Cornell는 아도르노의 전통 안에서 다음을 내게 상기시킨다 - 즉 상식엔 급진적인 것은 없다는 것. 문법이 사유에 강요하는, 즉 사유가능한 것the thinkable 자체에 강요하는 강제를 인정한다면, 표준화된 문법이 급진적 시각을 표현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법을 비트는 정식들, 혹은 명제적 의미의 주어-동사 자격에 암묵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정식들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짜증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정식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일거리를 생산해주고, 때로 그들의 독자들은 그런 요구에 감정이 상할 수 있다. 공격받은 자들은 합법적인 요청으로서 “평범한 말하기”를 주장할까? 혹은 그들의 불평은 지적 삶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치에서 나오는 것일까? 언어학적 어려움에 대한 그런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어떤 가치가 과연 있는 것일까? 만일 모니크 위티크가 주장했듯이 젠더 자체가 문법적 규범을 통해 자연화된 것이 사실이라면 가장 근본적인 에피스테메적인 층위에서의 젠더 수정alteration은 부분적으로는 젠더를 수여하는 문법과의 경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명석성lucidity에 대한 요구는 표면상ostensibly “분명한” 시각을 운반하는 책략을 망각한다. Arital Ronell은, 닉슨이 국민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는 완벽히 분명하게 말해보겠소”라면서 계속 거짓말을 한 순간을 생각해낸다. “명백함”의 신호 아래 돌아다니는 것은 무엇이며 투명함의 도착이 고지되었을 때 비판적인 의심을 전개하지 못함으로써 치르는 댓가는 무엇일까? “명백함clarity”의 의정서protocol(*나는 protocol의 뜻은 컴퓨터 용어적 의미에서 생각하고 싶다. TCP/IP와 같은 컴퓨터 문법을 protocol이라 하는데, 이런 특정한 통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용자간 어떠한 커뮤니케이션도 불가능하다.)는 누가 발명해내고 그것은 누구의 관심에 봉사하는가? 모든 의사소통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으로서 편협한 표준으로서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에 의해 폐제되는 것은 무엇인가? “투명성”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덧붙여, 스피박Spivak 의 말도 약간..

요즘에도 사람들이 내게 "오, 스피박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어!"라는 케케묵은 비난을 퍼부을 때면, 난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좋다. 당신에게, 오직 당신을 위해서, 단음절로 된 문장으로 대답하겠다. 그러면 당신은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단음절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평이한 글에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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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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