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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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11/09/09 12:24
모든 단어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단어들은 서로 불화하고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며, 따라서 그것들 자체로 하나의 소우주를 그린다. 혹은 저마다의 '진영(陣營)'을 뽐낸다. 그것들은 특정한 분위기를 풍겨내며, 어떤 것들에는 인력(引力)을, 어떤 것들에는 척력(斥力)을 내뿜는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서로의 자장 속에 존재한다. 포함적(inclusive)이면서 동시에 배제적(exclusive)이다. 그리고 요즘 나는 그것만이 내 공부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70%는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느끼고 있다. 어딘가에는 '진리(Truth)'가 있을 것이라는 기획을 포기한 자리에 여전히 남아서 조금씩 썩어가던 미련은, 적어도 작은 '진실(truths)'들은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련마저 잘라낸 자리에서 움트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어라는 그런 희망과 신념 뿐이다.

이럴 때 단어들은 결코 단순한 '수사'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확실하면서도 물질적인, 특정한 장소와 주체(의 입)을 갖는, 그리고 가장 독특(singular)하면서도 또한 고도로 정신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예컨대 네가 뱉어낸 "그리움"이라는 단어와 다른 네가 뱉어낸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전혀 다른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전달된다. 따라서 단어들은 단순히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에 새겨진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우리는 어떤 단어(의 우주)에 참여함으로써,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르게 지각하고 인식하고 사유한다. 만약 우리가 저마다의 사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인지/인정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저마다가 편찬하고 있는 사전의 짜임새와 어휘풀이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입에서 전달된 단어들은 네가 쓰고 있는, 또한 네가 살아가면서 편찬하고 있는 사전의 일부이다. 따라서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수사'가 아니다.

물론 논리의 확실성, 명료성만을 글쓰기의 규범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수사는 거치장스럽거나 화려할 뿐인 허망한 장식품일 것이다. 그들은 수사를 논리를 왜곡하거나 논리의 불명확함을 술수를 부려 극복하려는, '메이크업' 같은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어들은, 벤야민의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통해서'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어들은 스스로의 '속에서(안에서)' <어떤 것>을 전달한다. 그 <어떤 것>은 물론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며, 우리를 우리로 가능하게 하는, 느낌과 정서와 감정의 복합체이며 우리의 삶과 미래를 향한 지향 그 자체를 담고 있다(나는 아직까지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은 단어와 불가분이(어야 한)다. <어떤 것>의 본질이 따로 있고, 단어(언어)는 단순히 그것을 전달하는 한갖 매개인 것은 아니다. 단어는 어떤 것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실현한다. 다시 말해, 내가 쓰는 단어는 나와 너의 관계를 표현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덧) 대학원에 와서 내 글에 대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ㅡ아마도 비난일 것인데ㅡ"화려하다"였다. 나는 내 글이 한번도 화려하다 느끼지 못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멋있게 쓰려고, 있어보이게 쓰려고 한적이 없다. 나는 자랑하려고 쓰지 않는다. 또한 포장하려고 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것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고, 포장하고 싶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추상적인 독자 K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내 글은 K와 연결되는 방식이다. 혹은 K와 공존하는 상상적인 소세계를 창조하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그곳으로 향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나는 내가 K에게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것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들더러 "화려하다"라고 비난한다면 나는 당신과 어쩌면 전연 다른 사람일수도 있을 것이며 당신은 절대로 K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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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1/02/16 11:42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옥수수 뜯어 먹듯 조금씩 씹어 몇 알씩 삼키고 있다. 그 중에 뭐라도 글을 쓴 뒤에 딱 자책하기 좋게 만드는 글이 있어 옮겨둠 ^ㅅ^ (벌써 자책 중ㅋ 젠장...) 물론 이 글이 자책하기 좋게 만든다는 건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이고,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이 글이 사실 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내 나름의 맥락을 덧대어 일반적 지침으로 삼을만 하다는 얘기다. 아도르노의 짧은 에세이들이 연속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보면, 그도 무슨 사건이나 사람이 동기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곳 저곳에서 때로 모순되고 갈라지는 틈이 느껴지거든(즉,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얘기). 물론 전체적으로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글 다운 글'을 써보고 싶다. 블로그에 쓰는 것 말고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열흘 간 어디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여하간 3월부터는. 물론 지금은, 그리고 당분간은 내게 허락된 지면이 없(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지면을 만들고자 한다면...


51. 거울 뒤로

문필가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유의사항은, 모든 텍스트와 모든 절, 모든 문단에서 중심 모티브가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쓰인 것에 대한 별다른 반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내버려두려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생각 속에서는' 자신의 의도에 밀착되어 있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어떤 결함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무방할 정도로 너무나 작고 사소하지는 않다. 수백 번의 교정 중 하나하나의 작업은 사소하고 고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체가 합쳐지면 새로운 차원의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길이는 아무래도 좋다. 분량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유치하다. 일단 존재하게 되고 씌었다는 이유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단지 변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종종 저자가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그 무엇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이 경우 최상의 표현을 골라내어 이것을 가지고 계속 작업해나가야 한다. 구성상 필요할 경우 버리기 아까운 사유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문필가의 테크닉이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버려진 사유들이 힘있고 꽉 찬 구성에 도움이 된다. 식탁에서처럼 마지막 한 입을 먹지 않아야 하며 술잔의 바닥을 비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바닥이 보인다는 의심을 받는다.

상투어를 피하려는 사람이 속된 아양떨기에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개개의 단어 선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훌륭한 산문들은 그런 것에 특히 민감했다. 하나의 단어도 진부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음악에서 또한 개개의 음조는 진부함에 저항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상투어는 카를 크라우스가 비판했던 유형의 단어 결합ㅡ예를 들어 '남김 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번영으로 그리고 파멸로', '확장시키고 심화시켜' 같은ㅡ이다. 왜냐하면 이런 단어 결합에서는, 말이 절실히 요청되는 곳에서 필요한 저항이 정교한 표현을 통해 가동되는 대신 김빠진 언어의 한가한 물결만이 철썩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은 단어 결합뿐만 아니라 전체 형식의 구성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어떤 변증법론자가 휴지부마다 '그러나'라는 표현으로 시작함으로써 사유 진행의 전환을 표시하려 든다면, 그러한 구성 틀은 그의 사유가 체계 없는 거짓말이라는 판결을 받게 만든다.

덤불은 정성스럽게 보살핀 신성한 숲이 아니다. 자기는 최선을 이해한다는 편안함에서 나오는 난해성을 해소하는 것이 의무이다. 대상의 깊이를 충실히 감당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쓰려는 의지와, 독특하고 난해하며 자만에 찬 날림 글에 대한 유혹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전한 인간 오성'이라는 우둔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진부한 사유를 화려한 문체로 치장하려 들지 않난 조심해야 한다. 로크의 진부한 문체가 하만의 모호한 문체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길이와 상관없이 완성된 글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이의라도 제기된다면 그러한 이의가 적절한가와 관계없이 이의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텍스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적 개입이나 허영심은 모든 의심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의심이라고 흘려버린 것은 텍스트 전체가 객관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징표일 수 있다.

에히터나흐의 부활절 댄스 행진[이 댄스 행진은 세 발짝 앞으로, 두 발짝 뒤로 간다ㅡ역주]이 세계정신의 행진은 아니다. 일정한 부분에 국한시키거나 유보시키는 것은 변증법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변증법은 극단을 통해 나아가며, 사유를 한정시켜 거기에 일정한 특성을 부여하기보다는 그 논리의 극단까지 몰고가 반전을 시도한다. 일거에 너무 멀리 나가는 모험을 금하는 '신중함'이란 대개 사회적 통제의 대리인, 나아가 우민화의 도구이다.

어떤 텍스트나 담론이 '너무 아름답다'는, 종종 제기되는 이의는 의심해볼 만한다. 표현된 사물, 심지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너무 쉽게, 인간이 겪은 치욕의 흔적을 무로하한 언어 형태로는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저자에 대한 앙심만을 합리화시킨다. 치욕 없는 존재자에 대한 꿈ㅡ그런 꿈을 내용으로 그려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런 꿈에 대한 언어적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데ㅡ은 악의적으로 교살된다. 문필가는 아름다운 표현과 객관적 표현을 구별하려 드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문필가는, 성실한 비평가에게는 그런 구별이 가능하리라 믿어서도 안되며 자기 스스로에게도 그런 구별을 용인하면 안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완전하게 말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된 표현의 아름다움이란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추잡한 허식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사물에 봉사한다는 핑계로 표현의 순수성을 등한시하는 사람 또한 항상 '사물'을 배반하게 된다.

고귀한 텍스트는 거미줄 같다. 촘촘하고 집중되어 있으며 투명하고 탄력있고 견고하다. 이것들은 날고, 기는 것들을 모두 자신 안으로 잡아챈다. 거미줄 같은 텍스트를 재빨리 통과해 빠져나가 보려는 메타포들은 거미줄의 제물이 되어 텍스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거기에는 재료들이 날아든다. 어떤 관념이 견실한가는 인용이 적절한가의 여부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 사유가 현실의 세포를 열어준 바로 그곳에서 사유는 주체의 폭력 행위 없이 다음 세포로 파고들어야 한다. 이런 사유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유지하며, 금방 다른 대상들이 그런 사유의 주변에 결정체를 이루면서 모여든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한 그의 시선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문필가는 자신의 텍스트 속에 집을 짓는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고 다니는 종이, 책, 연필, 서류들로 방을 어지럽히듯, 그는 사유 속에 비슷한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사유는, 그가 기분 좋게 느끼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가구이다. 그는 이것들을 다정스럽게 문지르기도 하고 혹사시키기도 하며, 뒤범벅을 만들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이제는 고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거주가 된다. 글쓰기에서 그는 예전에 가족들이 그랬듯이 어쩔 수 없이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배출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창고가 없기 떄문에 이 찌꺼기들과 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을 자기 앞에 밀어놓기 때문에 결국 자기 주변을 쓰레기로 둘러싸이게 할 위험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에는 가혹하라는 요구에는 기술적 필요도 들어 있는데, 이것은 지적 긴장을 늦추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다음의 모든 것, 즉 작업 중에 나온 부스러기, 괜히 얼쩡거리는 것들, 처음 단계에서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가십이었지만 점점 가면서 이제는 초라하고 곰팡내나 피우게 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 속에서 거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미니마 모랄리아>, 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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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8/20 10:00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ㅡ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ㅡ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글을 잘 쓴다는 것」,『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p. 26


이 짧은 글에도 분석할 만한 여러가지 전제가 들어 있지만, 그 전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 없이 글 모두에 동의할만 하다. 글을 쓸 때 두고두고 참고할만한 구절이어서 마침내 옮겨 둬 본다. 그런데 자기가 글 쓰는 스타일을 <잘 쓴다는 것>으로 규 정짓는 것 같아 피식피식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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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7/27 00:21
1.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책의 저자는 홍콩 출신으로 미국 학계에서는 깨나 이름 날리는 학자. 그는 미국 문화연구계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에서의 보편성/특수성과 오리엔탈리즘/지역주의라는 이항 대립 관계, 낭만주의적 태도와 문화주의에 의해 은폐되는 현실의 정치경제학 문제들,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서발턴화ㅡ자기를 피해자화하면서 역설적으로 획득하는 권력과 돈ㅡ와 문화연구계에 주류화되는 서발터니티,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더욱 침묵에 빠지고야 마는 사람들, 세계화 된 담론 시장에서 불안해하고 상실감 속에서 우울증에 빠진 제1세계 지식인 주체들, 제국 담론에서 흔히 발견되는 중심부/주변부 이분법 등등의 이면을 치밀하게 폭로한다.

그는 또한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어떤 포지션에 있으며, 그 포지션은 어떤 현실적인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뒷받침되는지, 그리고 말하는 자들이 발화의 기원을 은폐함으로써 언뜻 중립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최상의 정치적 행위자로 만드는 현실에 대해서도 끝없이 심문한다. 논문의 제목, 에세이의 한 구절도 이 학자 앞에서는 최악의 죄로 규탄된다. '대기업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회장들이 이사로 있는 모임에 들어가야'하는 현실도 비난한다. 모두 옳다. 물론 옳은 말들이지만 사실은 너무 피곤하다. 그런데 그런 피곤함이 기분 좋은 것도 사실이다. 그 책의 원제목은 <Writing Diaspora>이다. 글을 쓴다는 것, 혹은 무언가를 '쓰는' 행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물질세계에 자국을 남기는 행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인 것 같다. 그의 끈질긴 성찰성이 조금은 부럽다. 그러나 그 성찰성을 자기에게도 조금은 투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쏟아내는 비판은 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사를 가는데 제일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책들이다. 한국에선 책이 내용을 담는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상품'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책들이 정말 한결같이 무겁다. 왠만한 소설책도 누워서 읽다보면 손목이 지끈지끈 아플 정도다.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서 허리 건강 생각하라는 배려는 아닐테고... 깔끔한 모노톤의 표지에 포인트를 주고 가벼운 종이를 쓰는 페이퍼백 형태의 저가 책이 나오면 좋을텐데. 수집벽을 자극하는 북디자인이 별로 없다. 펭귄클래식 같은 느낌도 좋을 것 같은데..

여하튼 책의 무게도 무게지만, 이사를 갈 때 집에 두고 갈 책과 가지고 갈 책을 구별하는 큰 일이 남았다. 천권 정도 되는 책들을 다 가져갈 순 없을테고... 아마 대학교 1학년 때랑 2학년 때 샀던 책들을 가져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뜻도 모르고 허세를 부리겠다고 산 책들이 많아서. 3, 4학년 때 충동적으로 산 책들도 그다지 가져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에센스를 뽑아 딱 고것들만 가져가고 싶은데 욕심을 버리진 못하겠다. 유학가는 선배는 책을 나눠줄 생각을 하던데, 나는 왜 그런 행동을 못하지.


3. 이제 4번만 더 나가면 조금 긴 휴가가 있고, 그 휴가의 끝에서 하루를 더 지내면 끝. 돌이켜보면 여유 시간이 많았음에도 시간이 훌쩍 참 빨리 간 것 같은데, 나는 해놓은게 없어서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지금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들도 이미 누군가들은 선취해 놓았다. 그들은 먼저 읽었고 먼저 썼다. 먼저 사유했고 먼저 다른 길로 재빨리 들어섰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글을 쓰든 은연 중에 누군가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 두려움의 정체는 뭘까? 무엇을 향한 두려움일까? 경쟁자들의 이름을 올린 리스트에서 누락될까봐? 권력을 가진 타자의 인지/인정을 획득하지 못하리라는 불안?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타자의 인지는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할 수도 없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잘 모르니까. 그런거, 잘 모르니까 그냥 할 수 있는거나 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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