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런 저런 일로 지하철을 오고 가면서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그로테스크한 글귀를 보았다. <2010년 세계 디자인수도 서울>이라고 최근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게 있는데, 거기 앞에 붙어 있는 글귀였다
"시민고객과 함께 만들어가겠습니다."
시민고객... 시민고객... 시민고객... 시민고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최근 오픈한 상담 콜센터 <다산120>인지 뭔지 앞에도 역시 시민'고객'이라는 말이 붙어있다. -_-;
신자유주의의 승리와 자본주의적 마인드의 '자연화'와 '일상화'가, 학계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전 영역에 뻗쳐나가고 있다는 점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나, 이렇게 공공 기관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틀을 가져다 쓸 줄은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
만약 오늘날의 '시민'이, 민주주의적 주체로서 권리를 가진 시민 내지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니라, 정말 '시민고객'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이제 '시민고객'으로서의 권리란 전통적인 정치 담론이 늘 가정해 왔던 추상적인 담론, 즉 인권 등의 자연법적 원리에 의해서 구성될 틈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아주 '명시적'인 '계약'에 의해서('사회계약론'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권리와 의무가 구성되고 실천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명시적인 계약은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다. 추상적인 '법'이라기 보다는 현실에 아주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법'은 추상과 공백의 위치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서로 다른 가치와 입장들의 헤게모니 투쟁에 의해 결정되고 생산되고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곁에 있지만 한편으로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 영속적으로 소속된 것이 아니다. 즉, '법'은 '정치'의 영역이다. 하지만 '법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이미 지키기로 계약을 맺었음을 전제한다. '법률'은 오직 적용과 집행의 영역일 뿐이다. 즉, '법률'은 '행정'의 영역이다.
-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흐름의 하나는 바로 한국 사회가 미국적인, 너무나도 미국적인 '소송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회적 갈등은 <법원>을 통해서 '해결'된다. 또한 한국 사회의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주체는 (마치 중세의 최고위 종교 재판소와 흡사한) <헌법재판소>가 되었다. 예전의 탄핵정국과 이번의 쇠고기 정국도 그런 흐름이고.
이제 사람들은 '소송'을 통해 옮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정치와 윤리의 문제를 '법률'에 위탁하게 된다. 아주 일상적인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서로가 합의와 토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들의 '계약'에 따라, '합리적'으로, '법률'의 말씀에 의거하여 또한 '판사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판단'하는'게 아니라) 판단 '되'어야 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만 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시민고객'이라는 말이 가능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국가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아 그것에 항의할 수밖에 없을때, '시민고객'들은 거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행정소송을 통해 그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만약 '법률'에 '구제책'이 없다면? 그냥 무력하게 계약을 지키며 '고객'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 '법률'을 강행돌파 하려는 순간 계약 위반이 되고, '불법'이 되며, '준법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전경의 검은 몽둥이와 방패가 내리 꽂힐 테니 말이다. 그 대신 '시민고객'들은 <소비자보호원>같은 기관에 하소연하고 자비와 관심을 베풀어 줄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꼭 <인권위> 같은.
-
'시민고객'들의 세상은 얼마나 비참하고 처연한가. '68혁명 정신'이, 68 이후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이 되었다는 분석은 역시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86년 정신'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정신의 핵심이 되었다는 분석도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역시 유효하다. 탈중심과 탈권위 정신은 기존 자본주의의 맹점을 완벽히 메이크-업 해주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재 '소송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한 것 같다.
여전히 전문가적 권위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여전히 우리는 전문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법률전문가, 경제전문가, 의학전문가 등등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 전문가들은 기존의 '권위'를 갖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상품을 제공하는 충실한 '상인'들이 되었고, 우리는 그들의 충실한 '고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과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있다. 늘 미소짓고 서로를 대한다.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한, 우리는 서로 얼굴 붉힐일도 없다. 복잡하지도 않다. 그냥 돈을 지불한다음 모든 권리를 위임해서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비참함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
요즘 촛불 집회가 한창이다. 그런데 집회를 자꾸 나가면서, 과연 이것이 '시민'들의 '정치적'인 집회인지, 아니면 '시민고객(내지는 소비자)'들이 '뿔'나서 뛰쳐나온 것에 불과한지 확신을 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명 정치적 집회라고 생각했건만,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면서 과연 내가 처음에 생각한게 맞기는 한건지 의심하게 되었다... 슬픈 일이다.
-
사실 서울시가 '시민고객'을 내세운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지방 도시들이 자기 지역을 상품화하고 '고객'들을 유치하려고 노력했던 건 비교적 오래된 일이다. 특히 제주도가 두드러지는데, 뭐 다른 지역들이라고 크게 다를게 없다. 서울시에서는 군수 내지는 시장들이 양복을 입고 나와서 지역 특산품을 배경으로 깔고 광고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사회적인 것'이 점차 붕괴하고 새로운 논리가 그것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비스'제공자. 고객. 자본. 사용료. 투자와 이익. 미소. 원칙. 합리성.
덧)
본인 매스컴 탔음-_- (한겨레) 진짜 불쌍한 표정이다 ㅋㅋㅋㅋ (ㅠㅅㅠ)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에게 계급은? (10) | 2008/08/03 |
|---|---|
| 촛ㅂ집회에서의 ㅇㅂㄱ '논란'을 보며 (2) | 2008/06/12 |
| "시민고객" (2) | 2008/06/04 |
| 낭만주의의 유산과 낙관주의 (4) | 2008/04/23 |
| 2MB 정부의 놀라운(?) 통치 전략 (4) | 2008/04/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