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6070022485&code=940401
권위는 개인의 됨됨, 성품, 지식, 인성 같은데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들먹이며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하는 권위주의자들은 그냥 스놉들처럼 보일 뿐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서울-경기 교육감은 참 잘 되었다며 기뻐하던 중에 위에 링크한 기사를 읽어서 더 기뻤다. 온화한 외모 만큼이나 일상적인 자리에서의 행실도 참 고까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또 학생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할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사람도 정말이지 드무니까.
한편 씁쓸했던 건 그의 '탈권위'적인 언행 앞에서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탈권위'적인 행동을, 교육청 직원들은 새로운 '권위'로 인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탈권위 역시도 하나의 권력이자 권위가 되는 상황이다. 곽노현 교육감 당선자가 얼마나 탈권위적이고 실제로 권위에 반대하든지 상관없이, 그의 임기 동안 사람들은 새 수장의 방식에 적응하게 될테지만 궁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다음 교육감 당선자가 전통적인 권위적 인물이라면, 교육청 사람들은 이내 거기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지난 대선 결과가 말해 주듯, 선거 한 방, 당선자 1인으로 공직 관료 문화가 바뀔리도 없을 것이다. 대선 한 방에 관료 문화는 얼마나 빠르게 바뀌었는가.
한국 사회에서 탈권위적으로 살려는 노력은 쉽게 좌초하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학생들을 대할 때 탈권위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처음엔 좀 긴장 관계가 유지되지만(대체로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훨씬 더 자유롭고 편하게 수업을 할 수 있고 관계도 맺을 수 있다. 탈권위라고 해서 권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훈육가로서 교사의 권위를 벗고(탈권위) 좀 더 인격화된 옷을 입으면 일상적인 관계를 맺는데 훨씬 더 유리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돌발 사건은 생기기 마련이고, 화가 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 교사의 분노나 포지션은 탈권위적 관계를 쉽게 전통적 권위의 모습으로 재배치해 버린다. 어쨌든 전통적인 권위와 탈권위를 선택할 수 있는 건 학생들이 아니라 교사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교실에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이다. 곽 당선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책에서 조금 마음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있었다. 흑인 노예제도가 온전히 살아 있던 미국의 맥락에서 백인 여성 '주인'과 흑인 여성 '노예' 사이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였다. 소수의 마음씨 좋은 백인 여성 '주인'은, 백인 남성들이 지배하는 일상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곤 했던 흑인 여성 '노예'들과 인간애적인 우정을 만들어 나간다. 친구까진 아니더라도, 흑인 노예 '유모'에 대한 추억을 미화하는 내러티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들의 삶은 언제나 불안정한 것이었기에, 이들의 우정도 시한부 우정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백인 여성 '주인'들은 아름답고 진정했던 짧은 '노예'와의 우정에 대해서 썼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 여성 '노예'들은 물론 이런 소수의 맘씨 좋은 백인 '주인'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이 백인 '주인'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 흑인 '노예'들이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면ㅡ특히 권력 관계의 변화를 원하는 듯 보일 때면ㅡ백인 여성 '주인'들은 대개 다시 '주인'의 입장에서 이들을 벌하고 억압했다. 인격적인 관계조차 노예제도와 인종주의의 맥락에서는 변덕스러운 한 개인의 선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 고어에서 'free'가 자유라는 뜻과 함께 관계/우정이라는 뜻이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는 것 같다. 개인들을 분별하고 권력을 차등 분배하는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않은 개인들은, 관계와 우정을 맺을 수 없다는 것. 스놉의 정의가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스노보크라시에서는 자리를 넘어 관계와 우정을 맺을 방법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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