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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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0 약자의 테러, 강자의 전쟁 (5)
  2. 2008/12/10 자주국방 대 한미동맹? (7)
스크랩 / 2008/12/10 18:59

출처 : 씨네21 [070330]

약자의 테러, 강자의 전쟁

사랑이나 전쟁은 상대방의 존재가 자기 인식과 깊이 연결해 있어서 본래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모순된 행위다. 우리-속국-동맹-적은 나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지 배타적 범주가 아니다. 나-연인-연적도 마찬가지다. 자타 경계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저런 인간에게 목을 맸단 말인가”라며 사랑이 끝난 뒤 자기 모멸감으로 괴로워하고, “겨우 계집애랑 붙으란 말이냐”, “세계 최강을 상대로…” 식으로 모든 싸움에서 상대의 ‘체급’을 확인한다.

군수산업체나 안보 국가처럼 전쟁이 존재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정체(政體??)들은 언제나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파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모순어법이 등장한다. 대개 전쟁사는 “몹쓸 놈들(적)이 우리를 침략했지만, 우리는 용감하게 맞서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화’시에는 적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만, ‘전시’에는 전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일부 보수층이 북한에 대해 절대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도 (공격자는 방어자보다 최소 3배 이상 전력의 우위가 있어야 하는데도) 남침 가능성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나,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으스대면서도 파괴할 건물조차 남아 있지 않은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그런 예이다. 그래서 전쟁은 히스테리일 수밖에 없다.

동양의 선현들은 ‘지혜’가 있었는지, 아예 처음부터 이러한 모순을 간파하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침략 행위에 등급을 매겼다. 수직적 불평등 문화인 유교권에서 전쟁은 정(征), 토(討), 취(取), 침(侵), 습(襲), 벌(伐), 전(戰) 등으로 나뉜다. ‘전’(戰), ‘적국’(敵國)은 동등한 정치집단간의 무력 충돌에만 사용하며, ‘찌질한 오랑캐들’에 대한 무력 행위는 나머지 용어로 지칭했다. 강자의 폭력은 침략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벌(罰)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남의 것을 훔치기 위해 폭력을 쓰면서, 약자를 치는 자기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다” 표현하지 않고 “너를 혼내고 취(取)했다”는 언설의 정치학은, 강자의 전쟁론에 저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가정폭력 가해 남편이 아내 구타 행위를 “때려서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모두, 강자가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사망한 고 윤장호 하사를 추모하는 거의 모든 언론 보도와 여론에서, 텔레반의 자살 폭탄 “테러”와 이에 맞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폭력 자체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미국 정부의 공격은 ‘정의의 전쟁’이고, 텔레반의 공격은 ‘악당들의 테러’란 말인가? 텔레반도 그들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 중이다. ‘테러’와 ‘전쟁’은 이미 위계적이다. 전쟁은 정당하고 떳떳하며 심지어 영웅적 혹은 자기희생적인 어감마저 풍기지만, 게릴라전이나 테러라는 표현은 뭔가 도발적이고 비겁하며 뒤통수친다는 느낌을 준다. 약자는 전면전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약자는 상대방을 히트 앤드 런(치고 ‘도망가는’)할 수밖에 없지만, 강자는 어디서나 치고 점령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도망갈 필요가 없다(미국은 현재 전세계 144국에 46만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강자의 폭력과 탐욕을 정상화하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도 문제지만, 윤장호 하사를 추모한다는 일부 여론이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면서 미국의 시선에서 아프간 ‘테러 세력과의 전쟁’을 독려하는 것은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도 “미국의 치어걸”, “부시의 애완견”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판에 국제사회에서 한·미 동맹을 평등한 ‘동맹’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게다가 군수자본이 주물럭거리는 현대전에서 동맹(同盟), ‘하나의 맹세’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난센스다. 연인 사이에서든 국제정치에서든 이해관계가 다른데, 어떻게 사랑의, 동맹의 맹세가 성립하겠는가. 한국이 스스로를 제국의 일부로 착각하는 이러한 부풀린 자아는, ‘국익’도 ‘평화수호’도 ‘안보’도 아닌 보기 민망한 식민성일 뿐이다. 우리의 자발적인 식민주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적으로 상상된 누군가를 살상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윤 하사는 이러한 우리를 대신한 희생자였다. (정희진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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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12/10 18:52

출처 : 씨네 21 [06.09.29]

자주국방 대 한미동맹?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한국사회 내부의 성별, 계급, 지역 등 권력관계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성희롱은 ‘sexual harassment’의 번역인데, 여성의 시각에서는 오역에 가깝다. ‘harass’는 의도를 갖고 반복적으로 괴롭힌다는 뜻이지만, 장난과 비슷한 ‘희롱’으로 번역되면서 의미가 사소화되었다. 말 자체가 특정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데다, 한국 실정과 안 맞는 경우도 많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대표적이다. 노사관계 선진국과 달리 한국처럼 사회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유연성은 “사용자 맘대로 해고”를 미화할 우려가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시장이 ‘경직’된 것이 나은데, 경직성은 유연성보다 어감이 나빠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97년 대선 때 이인제 후보는 노동시장을 “딱딱하게” 하겠다고 공약한 적 있다).

부시 대통령은 2000년 당선되자마자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을 추진했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다. 유연성의 핵심은 자유롭고 빠른 이동이다. 미군을 특정한 국가에 붙박이로 주둔시키지 않고, 언제든 출동 태세를 갖춰 세계 곳곳에 신속하게 파견해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駐日)미군은 극동 지역을 넘어 중동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주한미군은 더이상 북한 대비용이 아니라 중국과 대만 갈등에 개입하는 등 동북아시아를 분쟁지역화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부시 행정부의 관점에서 유연한 것이지, ‘침략을 받는’ 지역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그만큼 신속하게, ‘저항없이 유연하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폭력과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라면, 늦게 도착할수록 아니,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닌가?

전시 군 작전권 환수를 자주국방이냐 한미동맹이냐로 논하는 것은 현실 왜곡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자주국방’도 ‘한미동맹’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전권 환수=한미동맹 약화=안보 공백”이라고 아우성치는 보수 세력의 무지와 시대착오는 비판하기에도 기운 빠지는 일이다. 이들을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주한미군 주둔 이유가 북의 남침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북침 계획을 억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현재 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9배가 넘어 북한의 GNP에 근접할 지경이다. 방위비 외에도 남한은 북한보다 국민소득 33배, 무역 규모 155배이다. 1994∼98년 무기 수입은 남한 세계 4위, 북한 70위 밖이었다. 지난 10년간 남한의 무기수입비는 북한의 37배였다.

평화네트워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등 많은 전문가 집단이 지적했듯이, 군 작전권 이양은 군사주권 문제라기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국의 필요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탈냉전의 도래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원래 미국의 안보 세력과 군수 자본가에게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 체제의 목적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라는 가상/‘실제’의 위협을 강조하여 전세계에 군사적 긴장을 창출하고 억압적인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 것, 그래서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전쟁 국가의 목표는 승리(전쟁의 끝)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련이라는 공식적인 ‘적’이 사라진 뒤,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 같은 새로운 적을 지목했다. ‘적’이 없다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팍스 아메리카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러와의 전쟁은 적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하고 싶어서’ 하는 임의적인 전쟁이다. 미국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영구 전쟁(permanent war)이다. 미국이 영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맹국’의 협조, 즉, 비용 분담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비용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한국이 제시한 2012년보다 빠른 2009년경에 작전권을 이양하겠다는 등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 작전권을 “빨리 가져가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뭐가 ‘자주국방’이란 말인가?

작전권 환수가 국방비 증가로 이어진다면, 이는 한국이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계획대로 “주변국(북한)을 위협하는” 지역 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자주국방은 주권국가의 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군대를 통한 국민국가 완성 의지가 아니길 바란다. 부국강병 욕망은 (‘자주’를 위해 극복해야 하는) 미국 모방일 뿐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전쟁 위협에 시달리는 국가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의 선제공격을 두려워하는 북한이다. 지난해 참여정부가 주장한 대로, 한국이 미국과 동등한 ‘동북아 균형자’가 되는 길은 군사비 증강이 아니라 외교력과 민주화, 문화 역량 같은 소프트 파워를 통해서 가능하다. 더이상의 강병은 침략 행위다. (정희진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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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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