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분명 아름다웠다. 소설가로서 인문사회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소설도 분석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나는 존 쿳시의 책처럼 다소 분석적이고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이 '나쁜'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석적이고 도식적이면 또 어떤가. 여하튼 쿳시의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타자에 연루'되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 타자에게 연루되는지, 그 장면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우연한 계기라고 표현했지만, 한번 타자에게 연루된 후에는 타자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쿳시는 인간성이 차례로 박탈 당하는 과정(어떤 의례와 절차를 거쳐서 인간성은 박탈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성이 박탈되었을 때(그리하여 비로소 '비체'가 되었을 때)에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인간성은 어떻게 회복될 가능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아름답게 다룬다. 그리고 쿳시는 '적'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즉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적-타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가 얼마나 무용하며 위험한 일인지를ㅡ그리하여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상 식민지(약자)가 제국(강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강자)이 식민지(약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ㅡ아주 섬세한 문체로 폭로한다.
쿳시의 소설은 제국주의 (지식인) 남성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제국주의 남성 정체성과 젠더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쿳시는 일견 도덕적이고 범인간애적으로 보이는 제국주의 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상당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타자'에게서 인간(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들,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고 한들 그는 제국주의의 자장에서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보편-제국주의 주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타자-야만인'에게도 보편의 빛을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 보편의 빛은 상황 논리에 따라 얼마든 철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쿳시의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시선에서 '야만인-여성'은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이다. '야만인-여성'은 유독 '(제국의) 언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성적으로 분방하고 자유롭지만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국주의자-남성이라는 두개의 항에 의해 이중으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만인-여성'은 어느 때는 의존하고 복종하는 것 처럼 묘사되지만, (특히 성행위를 할 때에는) 종속되지 않는 이중적인 존재처럼 묘사된다. 쿳시의 남성 주체가 '타자에게 연루'되었고 또한 일견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윤리적으로 연루되는 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를 향할 때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남성 주체가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은, 오로지 성애화된 사랑 혹은 섹스가 걸려 있을 때 뿐인가? 남성 주체의 도덕적인 실천은 성애화된 타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가? (그 많던 '운동권 남자애'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도 종종 이런 징후를 읽는다.) 이에 관해서는 재미소설가 이창래 작가의 <제스처 라이프>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
물론 쿳시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 기꺼이 인식하고 분석한다.
덧) 이 소설을 읽고서 '50대 이상 남자'들의 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대다수 남성들의 정체성에서 남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많은 소설에서 50대 이상의 남자가 자신을 수컷으로 드러낼 때는 어김없이 이 남근 문제가 등장한다. 성적으로 문제를 겪음과 동시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몸의 근육과 피부의 탄력에 대한 인식 등이 어우러진다. 그 탓에 쿳시의 남성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50대 남성 인물들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갖 복잡함으로 뒤섞여 있다. 자기 몸이 더럽다는 인식(<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책을 보라), 자신의 성적 능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erection문제이지만)에 대한 자의식, 과거에 대한 향수 등등. 술자리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성적 소수자는 "4-50대, 대머리, 배 나온 화이트 칼라 남성"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다른 책,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학부 때 교육 쪽을 전공한 나로서는(나는 교육 자체보다는 내 전공을 무지 싫어했으니까), 가끔 교육관련 서적을 펴볼일이 있었다. 한국의 주류 교육학자들에게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ㅡ보통은 "학교 없는 사회"라고 번역하지만 오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리치는 그 스스로가 강조했듯 학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ㅡ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는 대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곤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일리치를 그저 그런 과격한 낭만적 급진주의 사상가로 생각했는데, 이번 대화집을 읽고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오히려 과격한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욕이 될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들 보다는 오히려 '정통파'에서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제도는 적당한 타협을 요구할 뿐, 과격한 근본주의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탓에 일리치는 온갖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범위와 폭이 놀라워 본받아야 할 정도다. 그를 문명 비평가라고 간주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국가 주도 공교육제도,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 조건, 건강의 '의료화', 표준 언어, '개발' 담론 등등 온갖 사회 체계에 내재한 복잡한 권력체계와 폭력을 일관되게 반대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제도로부터 미움 받기 딱 좋은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일리치는 세속적이며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내적 신념에 충실하고 경건한 신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그가 낭만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사상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사상의 가치체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폭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엔 평온하게 공생하는 자연스러운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는데, 국가 권력-자본주의-의료담론-공교육제도 등등이 일상을 폭력적으로 침탈했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식이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책인데도 여전히 "여권주의"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거 아직도 이렇게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고. 이와 관련해서 일리치에게 특별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역시 그의 젠더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에게 성별은 사회적으로 발명된 그 어떤 현상이라기 보다는,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획하는 근원이자 철학이다. 그렇기에 이쪽은 저쪽을 감히 넘보거나 이해할 수도 없고, 오직 은유와 상상으로만 연결될 수 있다. 이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다(이해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놀랍게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곳에서만 성차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성역할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에서는 차별 논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경건한' 상호의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좀 오버해서 말하면 자꾸 여자들이 남자 세계를 욕심내고 남자들이 여자 세계를 넘보려고 하니까 (자연질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이거 참 ^^;; 정말 일관적인 사람이야.
공부하기 싫으니까 이런 뻔한 잡글이나 쓰고... 에휴.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0) | 2010/05/24 |
|---|---|
| 사랑에 대한 한 구절 (0) | 2010/05/20 |
| 야만인을 기다리며,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0) | 2010/05/19 |
| 멘토에서 뮤즈로 (2) | 2010/03/27 |
| 혁명서사, 사랑, 기억, 젠더 (0) | 2010/03/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