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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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05/19 20:02
어제 오늘해서 유명한 두 남자사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이고, 다른 하나는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이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분명 아름다웠다. 소설가로서 인문사회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소설도 분석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나는 존 쿳시의 책처럼 다소 분석적이고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이 '나쁜'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석적이고 도식적이면 또 어떤가. 여하튼 쿳시의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타자에 연루'되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 타자에게 연루되는지, 그 장면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우연한 계기라고 표현했지만, 한번 타자에게 연루된 후에는 타자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쿳시는 인간성이 차례로 박탈 당하는 과정(어떤 의례와 절차를 거쳐서 인간성은 박탈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성이 박탈되었을 때(그리하여 비로소 '비체'가 되었을 때)에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인간성은 어떻게 회복될 가능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아름답게 다룬다. 그리고 쿳시는 '적'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즉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적-타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가 얼마나 무용하며 위험한 일인지를ㅡ그리하여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상 식민지(약자)가 제국(강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강자)이 식민지(약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ㅡ아주 섬세한 문체로 폭로한다.

쿳시의 소설은 제국주의 (지식인) 남성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제국주의 남성 정체성과 젠더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쿳시는 일견 도덕적이고 범인간애적으로 보이는 제국주의 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상당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타자'에게서 인간(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들,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고 한들 그는 제국주의의 자장에서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보편-제국주의 주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타자-야만인'에게도 보편의 빛을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 보편의 빛은 상황 논리에 따라 얼마든 철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쿳시의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시선에서 '야만인-여성'은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이다. '야만인-여성'은 유독 '(제국의) 언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성적으로 분방하고 자유롭지만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국주의자-남성이라는 두개의 항에 의해 이중으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만인-여성'은 어느 때는 의존하고 복종하는 것 처럼 묘사되지만, (특히 성행위를 할 때에는) 종속되지 않는 이중적인 존재처럼 묘사된다. 쿳시의 남성 주체가 '타자에게 연루'되었고 또한 일견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윤리적으로 연루되는 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를 향할 때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남성 주체가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은, 오로지 성애화된 사랑 혹은 섹스가 걸려 있을 때 뿐인가? 남성 주체의 도덕적인 실천은 성애화된 타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가? (그 많던 '운동권 남자애'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도 종종 이런 징후를 읽는다.) 이에 관해서는 재미소설가 이창래 작가의 <제스처 라이프>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

물론 쿳시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 기꺼이 인식하고 분석한다.

덧) 이 소설을 읽고서 '50대 이상 남자'들의 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대다수 남성들의 정체성에서 남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많은 소설에서 50대 이상의 남자가 자신을 수컷으로 드러낼 때는 어김없이 이 남근 문제가 등장한다. 성적으로 문제를 겪음과 동시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몸의 근육과 피부의 탄력에 대한 인식 등이 어우러진다. 그 탓에 쿳시의 남성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50대 남성 인물들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갖 복잡함으로 뒤섞여 있다. 자기 몸이 더럽다는 인식(<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책을 보라), 자신의 성적 능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erection문제이지만)에 대한 자의식, 과거에 대한 향수 등등. 술자리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성적 소수자는 "4-50대, 대머리, 배 나온 화이트 칼라 남성"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다른 책,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학부 때 교육 쪽을 전공한 나로서는(나는 교육 자체보다는 내 전공을 무지 싫어했으니까), 가끔 교육관련 서적을 펴볼일이 있었다. 한국의 주류 교육학자들에게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ㅡ보통은 "학교 없는 사회"라고 번역하지만 오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리치는 그 스스로가 강조했듯 학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ㅡ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는 대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곤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일리치를 그저 그런 과격한 낭만적 급진주의 사상가로 생각했는데, 이번 대화집을 읽고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오히려 과격한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욕이 될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들 보다는 오히려 '정통파'에서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제도는 적당한 타협을 요구할 뿐, 과격한 근본주의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탓에 일리치는 온갖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범위와 폭이 놀라워 본받아야 할 정도다. 그를 문명 비평가라고 간주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국가 주도 공교육제도,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 조건, 건강의 '의료화', 표준 언어, '개발' 담론 등등 온갖 사회 체계에 내재한 복잡한 권력체계와 폭력을 일관되게 반대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제도로부터 미움 받기 딱 좋은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일리치는 세속적이며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내적 신념에 충실하고 경건한 신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그가 낭만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사상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사상의 가치체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폭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엔 평온하게 공생하는 자연스러운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는데, 국가 권력-자본주의-의료담론-공교육제도 등등이 일상을 폭력적으로 침탈했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식이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책인데도 여전히 "여권주의"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거 아직도 이렇게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고. 이와 관련해서 일리치에게 특별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역시 그의 젠더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에게 성별은 사회적으로 발명된 그 어떤 현상이라기 보다는,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획하는 근원이자 철학이다. 그렇기에 이쪽은 저쪽을 감히 넘보거나 이해할 수도 없고, 오직 은유와 상상으로만 연결될 수 있다. 이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다(이해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놀랍게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곳에서만 성차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성역할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에서는 차별 논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경건한' 상호의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좀 오버해서 말하면 자꾸 여자들이 남자 세계를 욕심내고 남자들이 여자 세계를 넘보려고 하니까 (자연질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이거 참 ^^;; 정말 일관적인 사람이야.



공부하기 싫으니까 이런 뻔한 잡글이나 쓰고...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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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영화 / 2010/04/17 18:02

<언 에듀케이션>은 제목 그대로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학교교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교육이 보편화, 제도화, 국가화되면서 일반적으로 '교육'은 곧 '학교교육'으로 쉽게 치환되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교육'을 제대로 받았느냐 하는 여부는, 그 사람이 정규 학교 과정을 이수했느냐 그리고 학교가 발행한 졸업장으로 공인을 받았느냐의 문제가 된다. 옥스포드에 가고 싶어하는 16살 제니에게 접근한 데이빗은, 이러한 '공인' 자격증을 갖지는 못했으나 스스로는 "인생 대학"을 졸업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학교교육'은 아니지만 '교육'의 한 형식(an education)이다. 비록 데이빗 스스로도 잘 이수하지는 못했다고 이야기 하지만.

10대 청소년기를 꼼짝 없이 '학생 정체성'에 저당잡혀야 하는 입장에서, '학교교육'은 제니가 이야기하듯, 한없이 "지루한" 것이다. 제니가 보기에 데이빗은 정규 대학과정을 이수하지 않았지만, 교양있고 재미있고 품격있는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다. 데이빗은 돈이 많은데다가 미술과 음악에 대해 잘 알며,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다. 데이빗은 고급 레스토랑, 미술품 경매장, 콘서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에 반해 제니의 아버지는 옥스포드를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한 보수적인 하위 중간 계급 출신 속물이며, 학교에서 제니를 담당하는 교사는 제니가 보기엔 캠브리지를 나왔음에도 '지루한 학교에서 아이들이나 가르치며 가사 노동이나 하는' 그저 그런 교사 인생일 뿐이다. 물론 제니의 담당교사는 제니가 보기에도 멋있고 아름답지만, 제니에게 있어 담당교사는 캠브리지를 나와도 여성에게 '허락된' 삶은 '그 정도'일 수밖에 없다는 영국사회 현실의 상징이 된다.
그렇게 옥스포드는 "인생 대학" 앞에서 힘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제니는 옥스포드를 가지 않고 대신 데이빗이 다니는 "인생 대학"에 가서ㅡ혹은 바로 데이빗과 함께/데이빗의 후광 아래 그 "인생 대학"에 가야만ㅡ, 옥스포드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어떤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고 느낀다. 제니에게 그 고급문화는 매력적이고 근사한 것이다. 그리고 하위 중간 계급인 제니의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다. (물론 데이빗과 그의 통장 잔고가 허락하는 한이겠지만)

한편 <언 에듀케이션>은 '학교교육'이 "지루하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봤을 때 '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니가 데이빗에게 청혼을 받아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를 만류하던 교장과 담당 교사조차도 학교가 지루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폭로된다. 교장조차도 사실 우리는 너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게 없으며, 학교는 단지 퍼블릭 서비스일 뿐이라고 언급한다. 학교에 한 명 쯤은 있는 명문대 지망생인 제니는 그렇게 학교를 나간다. 한국처럼 대학이 서열화 된 영국의 양대 명문 대학인 캠브리지를 나온 담임 교사도, 제니가 원하는 그 "인생 대학"의 '교육' 앞에서는, 그리고 제니의 말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고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언 에듀케이션>은 이 '학교교육'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생 대학"에서 한편의 소녀 성장 드라마를 상연한 뒤, 제니는 결국 씁쓸함을 안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목표는 다시 옥스포드가 된다. 제니는 교장을 만난 뒤 담당 교사를 찾아간다. 그렇게 찾아간 담당 교사의 집은 러블리하고 책과 그림이 있으며 페이퍼백도 엽서도 있다. 여전히 멋있는 담당교사는 돌아온 제니의 말을 듣고 "노련해지고 현명해(old and wise)"진 것 같다고 말하지만, 제니는 "노련해지긴 했으나 그리 현명하지는 못하다(I feel old, but not very wise)"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니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담당교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 말을 들으니 기쁘다"고 대답한다. (이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은데 언어가 부족해서... 어쨌건 이 선생님 진짜 멋있어 이런 선생님들보면 진짜 임용고사 준비해야나 싶어진다) 이제 제니는 비록 지루하고 무용한 '학교'를 다녀야 하지만, 그래도 이 멋있는 교사와의 관계에서, 더욱 현명하고 주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 에듀케이션>은 교육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다. 교육의 한쪽에는 '학교제도'가 있고, 그 밖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인생 대학"이 있다. 영화는 그런 것에 본격적으로 가치 평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제니가 처해 있으며 (얼마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일 뿐이다. 그러나 <언 에듀케이션>은 그 모든 것 보다도, 사실은 제니가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가 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요컨대 결국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니 스스로의 성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제니는 성장에는 "지름길(short-cut)"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언 에듀케이션>이 제시하는 '교육'은, 이러한 제니의 성장을 돕는 것이자, 또 제니 스스로의 성장이다. '교육(an education)'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장이어야 한다.


덧) <언 에듀케이션>은 이렇게 한 편의 웰메이드 성장 영화지만, 한편으로 흥미로운 정보도 많이 제공한다. 1960년대 영국의 인종주의(유태인과 흑인을 대하는 주류 백인의 태도와 그들이 가진 이미지)에 대해서, 옥스브리지라는 양대 대학교가 영국의 맥락에서 어떤 위상을 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영국의 교육제도와 문화에 대해서, 영국의 하위 중간 계급 남성의 정체성(제니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 남성 정체성이 어떤 맥락에서 갈등을 겪으며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 계층화된 '계급 문화'에 대해서, 그 계급 문화가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상처와 자국을 남기는지에 대해서, 소년과 소년의 성장에 대해서, 또 한편으로 더 중요하게는 젠더 시스템 등등에 대해서도. 이 모든 것들을 생략한 채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영화의 서사를 비난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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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교사와 학생 관계에 대한 가장 '보통'의 이해  (0) 2010/04/04
Posted by 소이연
영화 / 2010/04/04 23:26
근대국가의 제도권 공교육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있다면, 아무래도 프랑스일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주 거론되는 영국의 경우 서구식 근대교육제도의 보편적 모델으로 삼기에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보니까, 아무래도 한국은 영국보다는 프랑스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로랑 캉테 감독의 프랑스 산 영화 <클래스>를 보면, 너무나, 너무나도 낯익은 장면을 많이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다.

<클래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클래스의 정규학기만을 다룬다. 영화는 방학이나 방과 후의 학교 밖 풍경은 전연 다루지 않는다. 또한 아이들이 학교 밖에서는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며 학교 안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전혀 다루지 않는 건 물론이고, 마랭 선생의 학교 밖 일상도 아예 다루지 않는다. 그리하여 <클래스>는 말 그대로, 한 '클래스'에서 교사와 아이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만을, 가장 '보통'의 수준에서 다루고 있다. 형식적으로도 공립학교에서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는 '보통'은 이런 것이다. 정규 수업시간에, 교사와 학생으로서 만나는 것 외에는, 서로에게 무지하고 또 무심하다. 한명의 개인대 개인으로 만나기 보다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역할지위로서 만날 뿐이다. 1년간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입지만, 어디까지나 교사와 학생이므로 지킬 선을 지키며 각자에게 의무로 주어진 학기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보통'은 그런 것이다. 심지어 이 영화는 공립 보통학교를 배경으로 하며(한국의 평준화 학교를 연상시킨다), 프랑스의 인종 비율까지도 학생 집단의 구성에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보통'의 교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심지어 마랭과 갈등하는 학생들은 '보통'의 편견이 그렇듯,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용어를 쓰자면 '유색인종' 아이들, 혹은 비코커시언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등장하는 교사들도 모두 나름대로 전형성을 갖는다. '보통' 학교에 이런 교사들이 '보통' 있지 않냐는 듯이 말이다. 규칙은 규칙이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고 주장하는 교사(그래서 퇴학 조치도 당연하다), 아이들의 태도에 분노하는 교사, 아이들을 냉소적으로 보는 교사, 아이들 고유의 성격이나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와 행동으로만 평가하는 대다수의 교사들. 물론 마랭 선생은 이런 가장 '보통'의 교사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특별한 교사로 등장한다. 마랭은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으로 수업을 못하거나 어이없게 말꼬리를 잡혀도 쉽게 분노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아이들을 납득시키고 설득하려고 노력하며, 수업 중에 자기가 틀린게 있으면 곧바로 인정하고, 또 교실에서 평등한 토론 문화를 만들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데다, 학교에서 강제하는 규율이 교사와 학생 관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정말이지 보기 드문 훌륭한 교사로 등장한다.

또 영화에서 다루는 감정의 결은 의외로 세밀해서,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쓴 사람이 실제로 교사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교사 마랭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그 소설가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 때 교사가 상처받는지, 또 아이들이 어떤 점에서 상처를 쉽게 받는지, 또 그게 어떤 식으로 봉합이 되고 봉합되지 않는지를 섬세하게 다룬다. 아이들이 웃음짓는 순간, 또 교사에게 화를 내고 실망하는 순간도 잘 잡아낸다. 또한 아이들을 너무 손쉽게 평가하고 규율로만 다스리려 하는 다른 대다수 교사들 앞에서, 자기가 담임을 맡은 아이들을 변호하고 싶어지는 그 마음까지도 너무나 와닿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클래스>는 가장 상식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 상식일 뿐 -_-) 교사와 학생들의 아웅다웅 치고 받는 일상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클래스>는 아이들이 단지 '학생' 정체성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분명히 아이들은 학생이기 이전에 하나하나가 타인들이다. 여느 누구와 똑같이 존중해야 하는, 각각 한 명의 개인이자 타인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마랭은 평소에는 아이들이 단지 공부하고(지적 학습) 규율에 따르는(정의적 학습) 것을 익히는 '학생'들이 아니라, 한 명의 타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랭은 그 사실을 인지만 하고 있을뿐, 실제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한계를 보인다(이것은 제도의 효과 탓인가?). 그래서 마랭은 자기가 아이들과의 게임에서 불리해질때가 되면, 자기는 누가 뭐래도 교사이며 원래 '꼬꼬마 아이들'인 너희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예컨대 아이들은 마랭이 스스로의 권위를 깎아 내릴 수 있는 '말 실수'(과연 이것이 단지 말 실수인가?)를 한 것에 대해 정당하게 항변하지만, 집단으로 '대드는' 아이들에게 감정이 상한 마랭은 그것을 묵살하고 무시한다. 그리고 발언의 문제성은 애써 무시된다.

마랭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 스스로도 거리를 두곤 했던 교장과 동료 교사들을 위시한 학교 제도의 후광 덕이다. 아이들을 규율과 사회화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개별적 욕구를 지닌 인격체로 취급하는건, 안타깝게도 교사 마랭의 선택과 변덕에 달려있다. 아이들과 관계를 잘 맺는건 교사의 도덕적/윤리적 의무라기 보다는 마랭 개인의 자의식적 선택으로 비춰진다. 그래서 마랭은 자기가 불리한 순간엔, 그 강력한 학교 제도나 교사 연대와 별 트러블 없이 쉽게 공모한다. 이 제도 속에서 아이들은 하나의 타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자유의지와 재량권에 따라 '처벌'을 받고 심지어 '처분'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이들의 감정과 행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정작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어쨌든 남는 건 다만 보여지는 행동(성적 혹은 교사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평가하고 상벌을 내리는 제도뿐인 것이다.

그래서 <클래스>는 학교 제도와 교사-학생 관계에 대한 가장 '보통'의 이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리는 있겠지만 이 정도는 상식인이라면 납득할만한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클래스>의 마랭이 보여주는 상식까지 한국 제도권 교육에 바라는 건 무리일까? 한국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사실 누구나 교육'전문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고, 그렇기에 누구나 한국 교육이 문제라는 걸 알고 또 저마다의 견해를 갖고 있다. 언론에서도 대학 입시 중심의 교육, 방대한 사교육 따위의 문제가 언제나 이런 저런 이해관계가 얽혀서 복잡하게 제시된다. 또한 교육의 문제는 교육 외적인 영역에서 자주 다루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교육감 선거도 교육적 관점이 아니라 계급 이해관계의 실현의 측면에서 치뤄지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거대 담론적 수준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에서, 교사와 학생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전면에 부각되어 다뤄진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교사 학생 관계는 단지 '붕괴된 교권'의 측면에서, 언론을 통한 일종의 추문으로만 다루어진다. 교사와 학생은 그런 식으로 밖에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듯이. 우리에겐 상상력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상상력을을 뒷받침할 든든한 사람들까지. <클래스>는 마지막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끝난다. 마랭에 공감할 수 있는 교사가 1/3만 있다면, 한국 학교에도 어쩌면 봄의 샛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겠다.


덧) 마랭을 보면서, 지금 일선 교사가 된 친구들이 어떤 상황에 부딪히고 어떤 고민을 하게 되는지를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졌다. 내가 교생 할때는 아무래도 student teacher다 보니, 아이들이 좀 더 편하게 대해준 것도 있었거든.

덧2) 학교 다닐땐 당연하다는듯 체벌에 적극 반대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임용 붙고 교사가 된지 1년 만에 술자리에서 애들은 때려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정말 엄청난 '변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미안해지는구나. 안 친해서 직접 말은 못하겠지만, 미안해요, 선배.

덧3) 그러나 나는 아직도 체벌은 납득하기 어렵다. 사범대에 다닐 때에도 "애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충격이었다. 애들은 때려야 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정치인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내가 살던 동네엔 '매맞는 아내(battered wives)'가 많았다. 심지어 친할머니도 "여자들은 맞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할머니가 무섭게 보였던 최초의 순간). 그러나 이제는 남성 무의식의 차원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형법상의 차원에서는 '때리는 남편'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제는 누구도 아내가 맞아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사회가 개선되었다기 보다는, 단지 그런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져 낙후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덧4) 한편 우리는 <클래스>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마랭은 어디까지나 남자 교사고, 교사와 아이들이 맺는 관계는 교사-아이간 성별에 따라 아주 다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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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2/06 23:57

벨 훅스의 신간, <경ㄱ 넘기를 가르치기>의 초반부를 뒤적이다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읽어도 크게 와닿지 않으리라는 판단하에 일단은 잠시 접어 두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제약하는 경험의 폭 때문에도 그렇고, 현재 나의 '신분' 때문에도 그렇다 -_-


분명 '해방적 교육'이라느니,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이라느니 하는 개념들은 매력적이다. 여기서 매력적이라는 말은, 그 개념들이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하나 불가능한 것에 불과하다고 (암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될 수 없는 어떤 것,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어떤 것, 그러면서도 나를 확 잡아 끈다는 의미에서(많이 오버하자면, '소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ㅋㅋ) 매력적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더.

"가르치지를 원치 않는 교사"와 "배우기를 원치 않는 학생"이 있는 교육이란 대체 무엇일까. 벨 훅스가 말한 것처럼, "은행 출납식 교육"ㅡ교사가 전해준 지식만을 학생들은 그저 은행에서 빼다 쓰듯 훗날 사용할 수 있다는ㅡ이 대학에서도 주류 중의 주류인 지금, 대체 '교육'의 위상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 걸까.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 맑시스트들의 개념이나 소위 '비판 사회학' 같은 흐름에서 쓰이는 '사회과학'적 어휘들을 갖다 붙여서 뭐라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심정적으로 답답하고 갑갑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나에게 있어 "해방적 교육",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어디까지나 '맛만 봤다'는 얘기). 그렇다고 그 대학이 그 자체로 해방적이고 자유의 공간이었냐, 하면 다들 알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의가 다루는 것들은, 말 그대로 강단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에게 흥미도, 의미도, 전연 주지 못했다. 정말 단 한 냥의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다. 영어교육이었던 전공 강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강의들은, 너무나 단순했던 내 견해들ㅡ예컨대 평준화 찬성, 고교등급제 반대 등등ㅡ에 대해서 너무나 단편적이고 표면적이긴 했지만 지지하는 말들을 해주곤 했던 고등학교 논술 선생의 말들 보다도 힘이 없었다. 물론 때때로 재밌는 강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들과 지식을 만날 수 있었던 ㅇㄹㅎ 개론, 한국 현대사 입문 같은 강의들. 그러나 1년에 한 강의 정도? -_- 그나마도 수강자들의 태도 탓에 금방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수업은 2학년 말이었던가? 페미니즘의 미학과 예술이라는 수업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학회 세미나 등을 통해서 봤던 책들이 해방감과 자유로운 느낌을 주곤 했었지만(세미나 자체는 아니었다! 그 뒤의 수다가 그랬지), 대학 강의실에서는 처음이었다. 수업이, 그리고 교수자가 흥미롭다고 느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수업만은 시시하지 않았고, (벨 훅스가 강조하는) 흥(excitement)이 났다ㅡ물론 기말고사 시즌에는... 흑. 그 뒤로 수업의 연장선에서 방학 간 학기 간 안가리고 몇 년간 진행했던 세미나도 내게는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다. 교수자인 ㅇㅎㅅ 쌤은 여느 강사들과는 많이 달랐고, 수업 스타일도 당연히 다른 수업들과는 꽤나 달랐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점도 있었지만, 일단 '분위기'등이 달라서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발제를 맡거나 하면 의무감에 늦은 밤까지 시달리기도 했지만-_-) 수업과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버틀러의 사유들도 그 세미나에서 만난 거고.

그 다음으로는 풀집에서 들었던 정희ㅈ 선생님의 강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의 기대보다는 늘 수강자가 차고 넘쳐서, 애초에 의도했던, '책상 모아 놓고 썰 푸는' 강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 강의에 온 수강자들의 열정, 그리고 때때로 들을 수 있었던 정ㅎ진쌤을 포함한 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내게 큰 의미였다. 그리고 내 좁디 좁은 인식에 충격을 주어 확장시키는 이야기들을 강의 시간 내내 전해주는 ㅈ희진쌤의 이야기들은 노트에 기록해두고 지금도 틈나는대로 보고 있다(고작 노트한 것 가지고도 empower될 수 있다!). 그 덕에 이젠 왠만한 '쎈' 담론 아니면 자극 받지도 않는다. 너무 잰체하고 폼만 잡는 남성 학자들의 강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의. 그 다음으로는 여이연에서 들었던 ㅇㅅㅇ 강의도 있지만... 이 강의에 대해서는 일단 패스.

결과적으로 보면, 내게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결국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을 다루었다고 해서 어떤 교육의 장이 "자유의 실천"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떤 독문과 교수가 맡았던 어떤 강의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사회학적' 인식틀로만 페미니즘을 다루었던 어떤 강의도 정말이지 재미없었다.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그 교육의 장 내부에 있던 '관계의 질서'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교육의 장에서 당사자들이 '무엇을 습득하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들이 모여서 어떻게 습득하는가' 역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해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여러 학문이나 인식론들을 공부하는 모임들에 종종 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지긋지긋함을(때로는 공포를) 느끼면서 뛰쳐나왔다. 지식이 '해방적'이면 뭘하나, 그 지식을 공부하고 써먹는 사람들이 '해방적'이지 않은 걸.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자의식과 자기 연민으로만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교육의 장에서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진행되는 교육의 장이, 대학에서 유행하는 '실용적 지식'이나 "은행 출납식 교육" 보다 도대체 나은 점이 있었을까?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은 천천히 완독하도록 하자 ㅎㅎ

덧) 내가 좋아했던 강의나 모임에서, 나 스스로가 그 내부의 관계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느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편안함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뿐. 내가 그 모임들에 어떤 폐를 끼쳤는지는, 알 듯 말 듯 모르겠다. 흑.

덧2) 난 너무 관계에 있어 소심하고, 또 너무 자주 관계에 소홀해지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이거, '생각'만 할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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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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