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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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11/02/07 01:11
오랫동안 활동했던 동아리를 나오고 난 후로 나는 지난 몇 년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몇 가지의 기획에 발을 담그었지만, 돌이켜보건대 그 어느 것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기획했던 것들은 죄다 무너지고 내게 남은 것은 허약하디 허약한 몇 마디의 말 뿐이다. 아니, 말의 순간, 선언의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흐릿한 기억일 뿐이다. 그런 모래알 같은 기억들을, 마치 마지막 남은 희망의 소포인 것인양 포장을 뜯어 내용물의 실체를 확인하지 않은 채 끈질기게 내 품에 소유하려드는 것은 오래된 내 불치병이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겉포장의 그럴싸함이 배고프고 무능한 청춘의 양식이자 구호품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약속의 달콤함이었다. 그것은 또한 어떤 욕망에 대한 우리들의 공동서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소포 안에 든 것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것처럼 해골인지, 멍청이라고 쓰인 쪽지인지, 아름다운 초상화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침내 포장을 뜯어야 할 때다. 모든 것들은 실패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거나, 멍청이라고 쓰여 있거나, 해골이거나, 아름다운 초상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마침내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확인할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무너져 버릴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너짐과 실패와 더 이상 아무것도 충실함을 띄지 못하는 무의한 언어들 뿐이다. 또한 무의한 언어가 헛도는 관계를 직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물론 같이 일을 한다는 것, 그러니까 기획이란 것이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몇 번의 실패나 무산이 총체적인 기획무능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런 취약한 기억에 의존하는 나 자신이다. 왜 기억(약속)을 상기시킬 때 모종의 죄의식을 느끼면서 말을 건네야 할까(왜냐면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일들로 분주할 나이니까?). 왜 나는 여전히 그런 것들에 의존해야만 할까(왜냐면 현실은 늘 시궁창이고 언젠가는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싶으니까?). 왜 우리는 기획을 실현시키지 못할까(왜냐면, 아니, 어쩌면 기획과 약속의 언어 자체가 이미-항상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결국 모든 기획했던 것들은 무너지고 내게 남은 것은 안타까운 질문들 뿐이다. 당분간은 일을 벌리지 않아볼 것이다. 상대적인 수동성 속으로 침잠해서 도대체가 무엇이 왜 불가능해졌는지,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이 가능할 것인지를 따져볼 것이다. 감각을 예민하게 정련할 것이다. 대화와 독서, 글쓰기 모두가 그런 감각의 세련을 위한 훈련이 될 것이다. 배수아의 <독학자>처럼 되어 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걸 잘 안다. 나는 그것마저도 '혼자'는 아니면 좋겠다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끈질긴 역설이고 아포리아다. 불치병이다. 결국 내게 돌아오는 가장 큰 문제는, 너와 나의 (가능한) 공동서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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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12/28 12:06

마지막 남은 기말 요약과제. 계속 수정중인 글이긴 한데... 이렇게라도 올려버려야 끝날 것 같아서.
사실 이 장의 요지는 세속적인 문장 딱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난 떨지 말고 겸손해지라. =_=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Chapter 2. 'Against Ethical Violence'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버틀러는 그가 이전부터 계속 보여 왔던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버틀러는 모든 근대적 인식론의 폭력성, 즉 제대로만 한다면 모든 사물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한다. 근대적 인식론은 타자를 지식으로 다루지만 버틀러에게 오면 타자는 포획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타자는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들 삶의 근저를 뒤흔들고, 또한 시공간적으로도 여기에 이미 항상 도래해 있는 존재다. 2장의 초입에서 읽을 수 있는 버틀러의 단어는 불투명성, 비일관성, 자기동일성의 폐기, 무한히 열린 질문, 앎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이해, 필연적인 인정의 실패, 의무, 윤리적인 실패, 윤리적인 기획 등이다. 이제는 묵은 먼지 날리는 서고에서나 볼 수 있는 기투, 헌신, 책임, 앙가주망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버틀러의 글은, 어쩌면 버틀러야말로 이 시대에 유일한 실존주의의 상속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도 한다.

  버틀러는 2장에서 포스트-헤겔적인 인정(recognition)을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 가져가려고 한다. 이를 위해 버틀러는 우선 ‘투명한’ 인정을 일종의 윤리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투명한 인정의 장면은 우리들은 물론 우리와 인정을 주고받는 타자들의 일관성과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타자는 인정을 수여하는 우리들의 일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삭제될 뿐이다. 그 대신 버틀러는 인정 장면의 근본적인 불투명성에서부터 윤리적인 가능성을 읽어낸다. 1장에서 버틀러가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나와 너를 초과하는 어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의 영역이 인정의 장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들 주체의 능력은 이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에 의해 불투명해지고 제한되고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기획은 너와 나는 물론, 인정의 장면 자체도 근본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정초되어야 한다. 우리가 입주해 있지만 우리를 초과하는 영역의 불투명성 때문에 우리들은 지식과 앎의 과정에서 영원히 투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조건 덕에, 인정의 장면에서 타자에게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고, 또 질문에서 최종적인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방향을 상실하고 자기 동일성을 “실패”하는 조건에서만 지속적으로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너는 누구인가?”라는 인정의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정은 한 번 성취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상태로 영원히 개정되는 과정이자 운동이다. 그리고 이렇듯 끝끝내 완결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인정의 장면은, 불가지론적인 회의주의가 아니라 ‘너’와 ‘나’가 인정의 장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해준다. 그래서 버틀러에게 이러한 불투명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차라리 일종의 윤리적인 의무이다. 사회적 인정을 윤리적인 기획으로 구성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칙적인 불만족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의 한계(Limits of Judgment)

  그런데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는 때로 ‘판단’을 수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든 윤리적인 기획 속에서든 무엇인가를 긴급하게 선택하고 판단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인정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수도 없고, 행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앞서 살펴본 바, 인정의 장면에서 나타나는 영원한 불만족이야말로 일종의 윤리적인 기획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판단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판단은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는 자를 각각의 영역에 격리해버리고 인정의 과정을 종결해 버리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윤리적인 기획에서 판단의 중요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면 어떤 유형의 판단이 작동해야 할까? 다시 말해, 판단은 윤리화 될 수 있을까? 만약 판단이 윤리화 될 수 있다면 윤리적인 기획과 판단은 어떤 방식의 말 걸기 형식에서, 또 어떤 관계 속에서 작동해야 할까? ‘판단의 한계’라는 장에서 버틀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과 예화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장에서 버틀러는 인정, 관계, 윤리, 말 걸기 장면의 복잡한 함수를 펼쳐 놓기 시작한다. 

  버틀러는 비난(condemnation), 탄핵(denunciation) 같은 특정한 유형의 말 걸기 장면을 종합하는 단어로서, ‘판단’이라는 특정 행위를 우선 심문에 올리고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필연적으로 윤리적이지도 않고, 사회적 인정을 작동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판단은 사회적인 인정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있어서,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과 판단 받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도덕적인 거리(distance)를 설정하고 둘 사이의 공통 지반을 부인하는 말 걸기 형식이다. 판단은 이로써 판단하는 사람의 불투명성을 추방하고, 또한 판단 받는 사람의 비판적이며 윤리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다시 말해,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사회적 인정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단호하게 인정이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인정은 언제든지 판단을 중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정에 기초하지 않은 판단은 곧 윤리적인 실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판단은 언제나 판단하는 우리와 판단 받는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고려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정이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영원히 개정되어야 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인정에 기초한 윤리적 판단 역시도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장에서 흥미롭게도 버틀러는 카프카의 우화 <심판>을 들고 와서 분석하고 있다. 게오르그빠져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몸을 던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게오르그 아버지의 선언에 내몰릴 뿐 아니라 스스로도 기꺼이 몸을 내던진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게오르그는 투신을 요구한 아버지의 말에 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버지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여 투신한다. 이렇듯 능동과 수동이 묘하게 얽힌 게오르그의 도착적인 투신 장면에서, 우리는 판단이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애착 관계와 인정의 함수를 읽을 수 있다. 

  <심판>의 서사에서 이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서로에게 관계로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와 게오르그는 모두 상호간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판단의 ‘거리’를 두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행위하고 있다. 이는 도착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스스로에게 내리는 ‘도덕’적이지만 파괴적인 판단이다. 버틀러가 말하듯 이러한 모럴리스트들은 살인자로 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상호간의 인정은 언제나 상호 주체들의 자율성, 자기반성, 자기성찰, 비판적 능력을 지킬 수 있는 윤리적 관계의 장을 열어두고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말 걸기 장면은 이러한 인정과 관계맺음의 과정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말 걸기 장면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말 걸기 장면을 윤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을 원용한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버틀러는 이 장에서 정신분석학의 ‘전이(transference)’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전이의 윤리적인 가능성에 대해 모색한다. 또한 버틀러는 전이 개념을 기반으로 말 걸기 장면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정이 작동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전유하고 있는 전이 개념은 그 자체로 타자와의 관계성이다. 이 논의의 과정에서 버틀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정신분석학에서 전이가 주체형성을 조건 짓는 ‘일차적 관계성(primary relationality)’의 출현을 추적할 수 있는 통로가 되듯이, 말 걸기 장면을 정초하고 기초하는 근본적인 관계성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말 걸기 장면에서 메시지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말 걸기 장면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며, 말 걸기 장면의 전제조건과 실행의 양상 자체를 바꾸어낼 수 있는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는 불투명한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며,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말 걸기 장면은 우리들의 관계에 일차적으로 기초해 있으며, 우리는 말 걸기의 장면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장면 자체에도 개입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바꾸어 나간다는 점이다. 

  우선 말 걸기 장면의 관계성은 우리가 말하고 서사화하는 것들은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한(예컨대 ‘이성’의 광기), 결코 일관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관적으로 구성되고 파편화된 기억과 경험을 연결하고 지배하는 소유격 ‘나의(my)’ 서사는 일종의 심리적 위안이자 환상, 혹은 편집증적 고립일 뿐이다. 이럴 때 ‘나’는 ‘나의’ 서사를 독백하고 강요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인정의 법칙에 따라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말을 전달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다. 또한 말 걸기 장면에서 ‘나’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짜기에 필요한 구조와 규범은 1장에서 살펴보았듯 타자에게 속해있고 너와 나를 초과해 있으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범의 영토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말 걸기 장면에서 서사와 설명은 아무리 비판적으로 개정되고 재구성되더라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 즉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말 걸기의 장면은 전이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나에게 속할 수 없는 무의식을 실연하고 또 무의식이 현재에서 다시 살게 하는 말 걸기의 구조이다. ‘나’는 전이 장면에서 타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말 걸기 장면의 구조 속에서 ‘나’와 ‘나의’ 서사는 타자에게 탈취당하고 압도당하고 휘말려 든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나를 탈취하고 압도하는 “‘너’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의 전이와 역-전이의 특징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전이는 그 자체로 주체와 타자의 근본적인 관계를 현재의 맥락에서 편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주체의 발생적 조건인 ‘일차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또한 자아들이 출현하는 다양한 말 걸기의 장면을 접합한다. 그리고 전이와 역-전이는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작동하지만, 언제나 ‘나’가 타자에게 근본적으로 연루된 상태에서, 결코 일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한다.

  따라서 전이 장면에서 “‘너’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되고 있는가?”라는, 최후의 답변이 있을 수 없는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 ‘너’에 대해 물으면서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것, 이는 곧 ‘너’와 ‘나’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며, 따라서 ‘너’와 ‘나’가 속한 말 걸기 장면에 대한 심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너’와 ‘나’에 대해 동시에 묻는 이 짝패 질문은 말 걸기 장면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전이와 역-전이 장면에서 ‘너’와 ‘나’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관계가 아닐 것이다. 이제 ‘너’와 ‘나’는 전이와 역-전이를 통해 불가피하게 연결된 채 서로에 대한 영향력 속에서 새로운 관계로 돌입할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말 걸기 장면에서는 무시간적이며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서사, 즉 말하는 주체 ‘나’의 투명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에 대해 닫혀 있는 지배적인 ‘나’의 서사는 거부될 수밖에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서사의 불투명성을 긍정하고 일관된 서사화 전략에 저항할 것이다. 반복하지만, 여기서 서사가 비일관적이라는 것은 모호함과 모순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뜻할 뿐이다. 일관성이 없다고, 투명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해서 ‘너’와 ‘나’가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해 설명하고 서사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서사화는 윤리적 기획의 전부도 아니고,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버틀러에게는 완전히 서사화할 수 없는 근본적인 관계성의 장이 분명히 존재하는 탓이다. 버틀러에게 ‘나’는 ‘너’에게 말을 걸면서 ‘너’와 연결되고, ‘나’와 ‘너’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나’와 ‘너’가 연결되는 방식(말 걸기 장면)에 개입한다. 전이가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 공간이 바로 이 개입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말 걸기 장면은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관계와 상호 인정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나’가 타자들과의 관계에 불가피하게 연루된 채로도 생존할 수 있으며, 반대로 타자들도 말 걸기 장면에서 생존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를 인정하는 것은 환상의 죽음이자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의 상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불가피한 윤리적인 의무이다. 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슬픔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를 배려하지 않는 말 걸기는 쉽게 폭력에 경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The “I” and the “You”)

  그러나 버틀러는 ‘상호인정’이라는 균형적이고 양비적인 ‘착한’ 관점으로는 긴급한 윤리적 기획에 필수적인 어떠한 불가피성이나 절박성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성의 장에 연루되고, 또 연루될 수밖에 없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이 장에서 “나(the “I”)”와 “너(the “You”)”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등장하는 주체의 포지션,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어떤 ‘장소(locus)’이자 구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시도한다. 또한 버틀러는 “나”의 불투명성, 불가능성, 부분성, 유한성을 어떤 사회성과 관계의 장에 연결하고, 또한 이를 “너”라는 타자와의 이자적 관계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장에서 타자(“너”)는 말 걸기 장면과 “나”에게 근본적인 층위에서 도입된다. 이렇게 버틀러는 “너”를 관계와 윤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버틀러가 보기에 서사적인 목소리 “나”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 언제나 “나”가 묘사하는 자아도 상연(enact)한다. “나”는 반복적으로 재등록된다. 그러나 “나”라는 서사적 목소리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지금 말하고 있는 “나”가 어떻게 구성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서사적인 “나”는 서사 자체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모든 순간에 재구성 될 뿐이다. 이는 서사화 될 수 없는 수행적이고 비서사적인 행위이다. 요컨대, “나”가 어떻게 이 말 걸기 장면에 출연하고 소환되고 있는지, “나”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나”를 설명하고 “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설명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 최선을 다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망친다. 이는 설명 자체의 ‘내용’보다는 설명이 발생하고 있는 말 걸기 장면의 수사적 차원, 즉 ‘형식’적 차원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실천이 신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국 서사는 일차적인 관계성을 추적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최선의 경로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메시지를 수신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말 걸기 장면에서 이 누군가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누군가는 말 걸기 장면에서 나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는 어떤 상황,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수신자의 장소(locus)나 구조(‘너’)라는 어떤 환영적인 관계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것이 설령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수신 구조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조금 달리 풀어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단수의 타자-수신자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언제나 변화하는 복수의 타자, 또한 복수의 말 걸기의 장면이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말 걸기의 장면에서 천의 얼굴을 한 채 언제나 서로 다르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달받고 있는 타자들의 얼굴 앞에서, 다시 말해 이 복수의 타자들의 목소리, 얼굴, 침묵 속의 현존 앞에서, 타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는 일관적이고 단단한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이 얼굴들을 나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폭력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의 이야기는 풀리게 된다.

  여기서 버틀러는 라플랑슈를 인용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타자라는 ‘얼굴’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라플랑슈는 타자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어떤 단일하고 절대적인 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다양한 타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라플랑슈는 이러한 타자들이 유년 아이에게 남기는 압도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과 자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이들은 성인들이 던지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에 압도당한 채 반응한다. 메시지가 전달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타자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라는 정신분석학의 고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은 타자의 인지/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또한 타자에 반응한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질문이자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아이의 세계를 초과해서 성인의 세계에도 깊숙이 내삽(內揷)해 있다. 라플랑슈의 이론은 주체형성의 조건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라플랑슈의 이론에 따르면 ‘나’의 욕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조차도, 타자의 욕망이라는 ‘나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욕망에 기초해서, 또 이러한 이질적인 욕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주체들의 조건인 일차적 억압에 정초한 ‘일차적 관계성’의 탄생을 설명해준다. 이는 주체 형성을 조건 짓고 또한 말 걸기 구조를 조건 짓는 근본적인 관계성이다. 또한 이는 ‘나’가 벗어날 수 없는 ‘사회성’이라는 조건의 일부이다. 그리고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관계성의 차원은 앞서 살펴보았듯 완전한 서술이 불가능하며, 단지 메타-인지적으로 재구성되어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조건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서술 불가능한 ‘나’의 조건을 대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철학적 사변이나 픽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버틀러가 강조하고 경고하는 점은, ‘나’와 ‘타자들’이 상호적으로 평등하게 무엇인가를 등가교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만큼, 버틀러에게 ‘나’는 타자에 의해 ‘탈중심화’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나’가 위치한 조건을 구성하는 어떤 “수동성”의 이름, 혹은 “수동성에 선행하는 수동성”을 의미한다. 즉 ‘나’는 라플랑슈가 말하던 압도적인 일차적인 인상/자국(impression) 같이 ‘나’의 이전에 존재하던,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의해 탈취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소 불균형하게 느껴지는 관계성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점은, ‘나’가 비록 어떤 수동성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가 존재할 수 없다거나 ‘나’의 기획이 완전히 무용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나’가 최선을 다해 설명할 때조차도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이 개입하여 ‘나’의 설명을 부분적이고 불투명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주체는 존재할 수 있고 또 행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윤리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재구성의 토대는 ‘나’라는 주체를 형성해온 조건들은 궁극적으로 ‘나’가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나”라는 기획에서 탈구되어 ‘너’에게 연결되어야 한다. 결국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너와 나의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나’가 ‘너’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삶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나’의 욕망과 충동을 기원적으로 구성하는 대상이다. ‘나’는 ‘나’의 타동사적인 수동성을 인정하는 토대와 근본적인 관계성 위에서, 그리고 오직 ‘너’에게 말을 거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어떤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는 ‘당신’에 대한 ‘나’의 양도이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윤리적인 겸손함, 반성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반드시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이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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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13 00:08

창문을 모두 열어 놓으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노래도 물을 흠뻑 먹은 듯 질퍽대며 어딘가 힘겨워 잘 들리지 않는다. 김현 평론가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산울림의 <청춘>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뒀는데, 폭우 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들기 전까지 무한반복해 들을 예정이다. 이 노래가 어쩐지 스물 아홉에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서른 넘어갈 즈음에... 비가 과연 쏟아지는 중이다.

황정은의 소설집을 완독했다. 너무 좋아서 어느 작품은 두 번 세 번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백의 그림자> 해설에서 이 소설집을 발표한 순서대로 읽어보라고 하기에 그렇게 읽었다. 그러자 과연 이 작가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게 느껴졌다. 부러울만한 속도로 말이다. 사실 초기 작품인 <마더>나 <소년>은 조금 평이하다고 느꼈지만(그래도 좋은 작품), 그 이후에 발표한 작품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좋았다. 내가 느끼기엔 신형철 평론가가 좋아할만한 스타일ㅡ평소에 하던 이야기에 부합하는 스타일, 즉 나 역시 좋아할만한 스타일ㅡ을 갖춘 작가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작가가 명사(특히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이 작가는 배수아를 좋아할까?). 같이 구입한 <백의 그림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한나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뒹굴거릴 수 있을 때 읽으려 한다.

대가족적인 삶에 대해 동경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왜냐면 어렸을 적 꽤나 오래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까), 최근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재)발견한 동영상 몇개를 보면서 그것도 꽤나 좋을 때가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2006년 겨울 <열린 교실> 때였는데... 점심 때 아이들과 함께 김밥을 싸먹고 비빔밥을 해먹던 때였다. 언제나 시끌벅적 했다. 어느 손은 당연하다는 듯 서툴게, 어느 손은 김밥을 좀 팔았는지 능숙하게 밥을 펴고 재료를 깔고 둘둘둘.. 물론 맛있었다. 그리고 큰 양철에 고사리며 도라지며 콩나물이며 참치며 참기름이며를 듬뿍 넣고 사깡에서 사온 공기밥을 털어 넣고 고추장을 넣어 슥슥비벼서 입안 한가득 넣던 10명의 사람들. 내 컴플렉스인 목소리가 많이 들려서 민망했지만 어쨌든.

짐멜의 에세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을 읽고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했던 건데... 아이들에게 예쁜 걸 입히고 좋은 걸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는게 과연 아이에게 좋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반응에 민감하기 때문에, 부모 욕심이라는게 보이면 그것에 은근슬쩍 응해버리기 쉽다. 그건 결국 아이의 감성을 부모의 감성대로 패턴화하는 것, 아이를 작은 부모로 만들어 버리는 것, 달리 말해 자극을 처리하는 방법을 (시행착오 끝에) 아이 스스로 터득할 가능성을 막아 버리고 이미 한 번 처리된 자극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아이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부모들이 조금 거북하다. 아이들마저 레디-메이드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어릴 때는 '촌스러울'수록 좋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회사에서 만들어 파는 장난감을 줄 필요도 없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아이들은 모든 사물에서 장난감을 발견하니까. 옷도 예쁜 새옷을 입히느니, 어디서 받아와 성장의 흔적이 묻은 헌옷을 입히는 게 좋다고 믿는다. 또 아이의 조기 교육이 필요하다면 학원에 보내고 비디오를 보일 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된다. 미메시스의 원칙.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 특별히 잘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듯 기다리면서. 그리고 아이들 특유의 변덕을 인내하면서. 여기 덧붙인 사진은 나는 아니고 동생 어릴 때인데, 모두 어디서 받은 낡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예쁘잖아.

결국 저마다의 방식이란 게 있는 법이어서, 예전 같으면 이기적인 행동 아니냐고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를 어떤 방식에 대해 납득하게 되어버렸다. 납득하게 되었다는 건 나를 그 방식에 던져 넣는 것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게 과히 나쁘지 않다. 관계에 이기적인 건 어디에도 없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결국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니까. 어쩐지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덧) 이게 앞서 언급한 김밥 씬. 이런 동영상이 몇 개 더 있는데... 아 배가 고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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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6/09 23:06
기사 링크 : <곽노현의 '탈권위', 서울 교육청 '긴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6070022485&code=940401

권위는 개인의 됨됨, 성품, 지식, 인성 같은데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들먹이며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하는 권위주의자들은 그냥 스놉들처럼 보일 뿐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서울-경기 교육감은 참 잘 되었다며 기뻐하던 중에 위에 링크한 기사를 읽어서 더 기뻤다. 온화한 외모 만큼이나 일상적인 자리에서의 행실도 참 고까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또 학생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할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사람도 정말이지 드무니까.

한편 씁쓸했던 건 그의 '탈권위'적인 언행 앞에서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탈권위'적인 행동을, 교육청 직원들은 새로운 '권위'로 인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탈권위 역시도 하나의 권력이자 권위가 되는 상황이다. 곽노현 교육감 당선자가 얼마나 탈권위적이고 실제로 권위에 반대하든지 상관없이, 그의 임기 동안 사람들은 새 수장의 방식에 적응하게 될테지만 궁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다음 교육감 당선자가 전통적인 권위적 인물이라면, 교육청 사람들은 이내 거기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지난 대선 결과가 말해 주듯, 선거 한 방, 당선자 1인으로 공직 관료 문화가 바뀔리도 없을 것이다. 대선 한 방에 관료 문화는 얼마나 빠르게 바뀌었는가.

한국 사회에서 탈권위적으로 살려는 노력은 쉽게 좌초하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학생들을 대할 때 탈권위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처음엔 좀 긴장 관계가 유지되지만(대체로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훨씬 더 자유롭고 편하게 수업을 할 수 있고 관계도 맺을 수 있다. 탈권위라고 해서 권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훈육가로서 교사의 권위를 벗고(탈권위) 좀 더 인격화된 옷을 입으면 일상적인 관계를 맺는데 훨씬 더 유리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돌발 사건은 생기기 마련이고, 화가 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 교사의 분노나 포지션은 탈권위적 관계를 쉽게 전통적 권위의 모습으로 재배치해 버린다. 어쨌든 전통적인 권위와 탈권위를 선택할 수 있는 건 학생들이 아니라 교사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교실에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이다. 곽 당선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책에서 조금 마음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있었다. 흑인 노예제도가 온전히 살아 있던 미국의 맥락에서 백인 여성 '주인'과 흑인 여성 '노예' 사이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였다. 소수의 마음씨 좋은 백인 여성 '주인'은, 백인 남성들이 지배하는 일상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곤 했던 흑인 여성 '노예'들과 인간애적인 우정을 만들어 나간다. 친구까진 아니더라도, 흑인 노예 '유모'에 대한 추억을 미화하는 내러티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들의 삶은 언제나 불안정한 것이었기에, 이들의 우정도 시한부 우정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백인 여성 '주인'들은 아름답고 진정했던 짧은 '노예'와의 우정에 대해서 썼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 여성 '노예'들은 물론 이런 소수의 맘씨 좋은 백인 '주인'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이 백인 '주인'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 흑인 '노예'들이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면ㅡ특히 권력 관계의 변화를 원하는 듯 보일 때면ㅡ백인 여성 '주인'들은 대개 다시 '주인'의 입장에서 이들을 벌하고 억압했다. 인격적인 관계조차 노예제도와 인종주의의 맥락에서는 변덕스러운 한 개인의 선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 고어에서 'free'가 자유라는 뜻과 함께 관계/우정이라는 뜻이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는 것 같다. 개인들을 분별하고 권력을 차등 분배하는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않은 개인들은, 관계와 우정을 맺을 수 없다는 것. 스놉의 정의가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스노보크라시에서는 자리를 넘어 관계와 우정을 맺을 방법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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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24 12:41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늘 새벽, 신경숙 소설가의 신간을 끝마침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썼다고 했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그 시간대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폈을 때는 어둑하고 눅눅한 새벽 3시였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 허리를 곧게 펴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제목과 소설이 정확히 상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아 좀 불만이기는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수작인 것 같다. 여느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을 읽기는 읽어도 늘 별다른 감동없이 읽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편집실에서, 낡디 낡은 보부아르의 책 앞면에 씌어있던 손글씨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 관계의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맺음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반전화와 편지와 전보만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던 시절의 청춘들은, 불가피하게 좀 더 깊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어도 관계도 좀 더 익을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내면에서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으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지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들ㅡ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와 퀵 메시지가 아니라, 어쩌면 침묵과 견뎌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재하거나 느리게 찾아오는 것들에 대한 환대.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해지는 것.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에게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말마따나 덥석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내가 이미 거쳐온 시간 혹은 지금도 거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관계의 부침(vicissitude)을,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여러 기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네에서 벤치에서 계단에서 혹은 누구도 앉자고 하지 못해 아예 선 채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들로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아침 해를 맞아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들.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온 신경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려하고 질투하고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간들. 그때의 냄새와 온도와 바람과 사소한 분위기나 오갔던 대화 같은 것들. 빈곤했던 기억에 얼마간 생생한 서사와 언어가 부여되면서- 기억이 비로소 재조립되고 있다. 그렇지. 기억이란 이렇게도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것이지. 그러므로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기억 뿐이겠지. 이것 외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이닥치는 기억을 견디느라 잠시 눈을 책에서 떼면, 머리 속으로 문장이 하나씩 깜빡깜빡 흘러갔다. 하나의 서술로도, 하나의 명제로도, 하나의 가설로도 문장은 재생되었다. 그 문장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책귀를 접어두는 걸로 갈음했다.

나의 20대 초중반은 '시시각각'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늘 바빴고 늘 일이 있었고 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망했지만, 늘 그 무게가 버거워 헐떡대며 꿇어 앉을까 벌렁 드러누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 단면이 지나면 다른 단면이 찾아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단면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시각각'은 점차 '시간'으로 누적되고, 누적된 시간이 임계점을 넘으면 '세월'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구잡이로 누적되어 쌓였던 나의 시간이 세월에 통합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점차 먹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진 청춘인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은 이제 시시각각이라기보다는 세월일 것임을 직감했다. 청춘 이후 세월 속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호품"은 어느 시인들이 말했던 대로 "그리움"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앞으로도 애도하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나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계속 사랑할 것이고 계속 질투할 것이고 계속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역사와 기억과 맥락과 그리움과 추억이 뒤섞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이며, 더 정직하고 더 여유롭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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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17 21:46
1. 요즘엔 읽고 있는 책은 많은데, 뭔가를 쓰고 싶도록 하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재미있는 책들도 많기는 한데 이상한 일이다. 책을 읽고 정리해보는 습관은 갖게된 것 같은데, 쓸 욕심은 아무래도 안난다. 쓰고 나면 늘 바보 같아 보인다. 그냥 지금은 input이 더욱 필요한 시기일 뿐이려나? 예전엔 인풋도 없으면서 미친척하고 아무거나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샌 일기 밖에 못쓰겠어. 예전에도 이런 내용으로 포스팅 했던게 기억나는 것 보면, 아무래도 순환과 리듬의 문제인 것 같다.


2. 요즘엔 막연한 덩어리들 사이에 실마리가 이어지면서, 옛날에 ㅅㄷㅈ 샘과 했던 세미나의 문제 의식과 연결되는 부분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 언어학/사적 언어학 분석, (세미나에서 읽었던) 푸코의 근대국가/권력 형성 분석, 얼마 전 다시 한 번 일독한 <지도의 상상력>의 주제, 제국과 제국주의 국가의 구분, 그리고 최근에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있는 책에서 본 어떤 구절이 뒤섞이면서 어떤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오랜만에 탈식민주의 텍스트를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몇 달만의 경험이라 상당히 소중함 ㅎㅎ (그러나 별 다른게 아니네)


3. 요즘엔 생물학에 대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것 같다. 옛날에는 젠더를 다룰 때 생물학 이야기만 나오면 근본주의/본질주의라고 바로 욕했던 것 같은데. 요즘 같아선 생물학과 관련해서 생리학, 실험심리학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검지와 약지 길이의 비율 계산으로 성격과 젠더를 짐작할 수 있다니 뭐 이런 엉뚱생뚱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이다. 아동의 행동과 인지에 대한 최근 실험들도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다. 뭔가 나름의 통찰은 준다. 물론 지금처럼 잠깐 흥미는 가더라도, 오래가는 재미는 못느낄 주제들이기는 하지만... nature vs. nurture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신념과 실천의 문제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난 무조건, 일관되게 후자 지향.


4. 요즘엔 내가 가진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은 아니고, 좀 더 질투와 갈망이 세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빼앗고 싶거나 흡수하고 싶다. 꼭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못사는 책을 서점의 서가에서 몇 분이고 서서 바라볼 때 같은 느낌. 상당히 오랜 기간 마음 속에 누적되어 폭발할 듯 말듯 무언가가 있는데, 계기를 아직 못만난 것 같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 탓이라면 상황 탓일테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줄 관계를 못만난 탓이라면 그것 탓일테다. 여하튼 아슬아슬하게 찰랑찰랑대고 있다는 것. 위험한 충동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이럴 때는 "Protect me from what I want."를 주문처럼 되새김질 하는 수밖에.


5. 요즘엔 자꾸만 내가 예전에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 말에 따르면 예전에 나는 신념에 찬 '애정분배주의자'였다.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해서다. 연애 관계든 아니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집약적인 심적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주변 관계에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연애 관계에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면서, 다른 관계나 일상 생활 자체가 뒤흔들리는 걸 사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올바르지 않다'고까지 여긴 적이 있다. 특히 여이연 강좌 들으면서 바이섹슈얼리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는 말이다(이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살았는지).

그러나 사실 이는 생존전략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대학 시절에만 하더라도 내가 하기 싫거나 귀찮은 일을 해야할 때가 많았고, 그때만 되면 늘 소진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만 하더라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일이 가능했다(이게 생각대로 하면 되고~도 아니고. 이제와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근근히 '일상'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그리고 이는 성적표에 반영 되기도 했다; 애정을 철회해야 할 때면 급락하는 성적표 숫자...;). 하기 싫은 일, 그리고 주변 관계에, 그 에너지를 공평하게 분배해서 말이다. 

지독히 나르시시스틱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도 이도저도 아닌 선택이었는데다, 어쩌면 천성에 반하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는 탓에,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방어기제였다는 생각도 들고. 요즘엔 좀 바뀐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6. 요즘엔 어떤 다른 글쓰기 양식에 대한 욕심도 부쩍 커지고 있다. 앞서 3번에서 말한 게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영화 <시>를 보고 나서 정말 크게 느꼈던 부분이었다. 내가 자주 썼떤 글은, 기껏해야 의미(meaning)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려들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고 의미있는 글쓰기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러한 글쓰기는, 이를테면 'sense'를 전달해야 한다. '센스'는 감각과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 그러므로 태생부터 결핍으로 시작하는 논문식 문체 같은 걸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일전에 영화 <시>를 보고 여기에 썼던, 그리고 이내 지웠던 글이 한없이 부족하고 한심해 보였다면, <시>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어떤 '의미'를 설명하고 재현represent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시>는 'sense'를 내 앞에 '제시present'ㅡ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이밀어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ㅡ했다. 그러므로 내가 택했던 글쓰기 방식은 완전히 틀렸던 셈이다. <시>에 대해 쓰려면, 완전히 다른 글쓰기를 택해야 한다. 내가 갖지 못한 어떤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차라리 문학적인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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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  (0) 2010/05/14
Posted by 소이연
영화 / 2010/03/30 22:43

소년을 남자로 만드는 마법의 레시피를 알려드리죠. 일단 재료를 준비하세요. 재료는 간단해요. 소년, 소녀, 로맨스, 그리고 일(꿈)입니다. 재료가 준비되면 시작은 쉬워요. 여름방학을 맞이한 소년은, 언제나 신비로운 모험(로맨스)과 소녀를 바라기 마련이거든요. 소년은 소녀를 만나면 즉각 화학작용을 시작해요. 우리가 손써볼 틈도 없어요. 

일단 화학작용이 시작했으면 500일 동안 가만히 소년을 지켜보세요. 모두 알다시피 여름방학의 시작은 달콤한 기대로 충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쓴 맛을 느끼게 되죠. 혹시 소녀와의 관계가 어려워서 소년이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면, 주위에서 기운을 북돋아주세요. 소년의 마음은 상처받기 쉽고 섬약하니까요. 설령 소년이 공격적으로 나온다고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쑥스럽고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거라네요. (註 : <소년백서>, 2010) 이게 견디기 어려우시면, 그만 두셔도, 뭐, 상관은 없다네요. 그렇게 500일을 꾹 참고 지내면, 소년의 여름방학은 끝나요.

여기까지 왔으면 거의 다 된거에요. 여름방학이 끝나면 곧 가을이거든요. 드디어 결실을 맺을 때가 된거죠. 이제 소년은 남자가 될동말동한 상태예요. 여기에, 우리는 마지막 남은 재료를 조심스럽게 추가해야돼요. 소년은 (꿈꾸던) 일을 만나야 해요. 일이 잘 풀리면, 소년은, 드디어 가을학기를 맞이하고, 비로소 남자가 될 수 있어요. (물론 이건 도박이에요. 될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고)

참, 조심해야할 점이 있어요.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소년은 또 다른 500일의 긴 여름방학을 맞이해야 해요. 그 길고 긴, 여름방학을, 또 다시 말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소년이 우울해하고 힘들어 할 때 기운을 넣어주지 않으면, 소년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가라오케에 토를 할 수도 있고, 종업원을 때릴 수도 있고, 알콜 중독이 될 수도 있고, 스토커가 될 수도 있어요. 정말 조심해야해요. 한 번 잘못되면, 소년은 영원한 소년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500일의 썸머>는 시작부터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가 아니며, 대신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라고 못박는다. 그렇다. <500일의 썸머>는 '소년'이, 어떻게, 어떤 심리적 과정과 사건을 거쳐서, 비로소 '남자'가 되는지에 대한 영화다. 마치 500일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소년'이 '남자'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10대 초반의 작은 여동생에게 인간관계 상담을 하곤 하는 소년 톰에게, 어느날 썸머는 마법처럼 다가온다. 소년 톰에게 썸머는 신비로운(그래서 불가해한) 에로스 그 자체다. 썸머는 우유부단하고 감정적으로 미숙한 톰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톰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썸머에게 빠져든다. 영화에서 썸머가 어떤 감정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어낼 수 없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이 영화가 소년인 톰의 입장에서 500일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선언했듯,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때문에 영화의 서사는, 만남에서 이별에 이르는 일반적인 로맨스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영리하게도, 날짜를 짜깁기 하는 방식으로 연애의 에피소드를 배치한다. 썸머와 함께한 500일은 혼란스럽게 재구성된다. 이를테면 톰이 썸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매혹적인 순간을 맞이한 장면 바로 뒤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썸머에게 이별 통고를 받은 후 축 늘어진 톰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톰이나 썸머에게 감정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다소 혼란스럽게 배치된 영화의 에피소드의 얼개를 맞추는 일은 보통의 멜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의 몫이다. 맞추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그건 이 영화가 의도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썸머는 카드 회사에서 직장 동료로 만난 톰과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카페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을 때 책에 대해 질문하던 남자와 결혼한다. 결혼한 썸머는 '수트'(남성 세계의 상징)를 입은 톰을 찾아와 샤프하다고 칭찬해준다. 톰은 자신의 애인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했던 썸머가 갑자기 결혼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상처받은 소년 톰은 썸머에게 이제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만, 썸머는 오히려 자기가 틀렸고 톰이 옳았다고 말해준다. 톰은 여기서 크게 깨닫는다. 톰은 이제 원하던 직장을 얻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가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여성, 어텀(가을)을 만난다. 꿈꾸던 일과 로맨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소년' 톰은 드디어 썸머(여름)에 안녕을 고하고 '남자' 톰이 된다. 날짜를 가리키는 숫자는 500에서 1로 바뀐다. (가만, 그러다 윈터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땐 '중년' 톰이 되는건가)

이 긴 500일의 과정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얼마나 몰입하는지하는 차원을 떠나서(난 나쁘게 말하는 이야기는 이제 쓰지 않기로 결심했음. 하하하하하), 영화의 만듦새가 제법 훌륭하다. 얼굴부터 아메리칸 보이스러운 배우도 영화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 정도면 훌륭한 성장드라마 아닌가? 감독의 첫 데뷔작이라는데 앞으로도 기대해볼만 한 것 같다.


덧1) 시나리오 작가는 과연 '남자'가 되었을까? 영화가 시작하면 작가의 말이 뜬다. "본 영화는 허구이므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비슷한 점이 있더라도 완전히 우연일 뿐입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Bitch." (...)

덧2) 유독 소년에게 너그러운ㅡ심지어 한국의 가부장제는 4~50대의 얼굴을 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소년인 남자들의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ㅡ한국에서는 500일 갖고도 안될지도 모른다. 이거, 마늘과 쑥만 먹으면서 1000일은 썩어야 할지도...

덧3) <언 애듀케이션>을 봐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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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영화 / 2010/03/06 16:41


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만났다. 가슴 한쪽 구석부터 차오르는 따뜻함, 그리고 다른 한쪽에 남아버린 씁쓸함. bittersweet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적절한 것 같다. 영화는 얼마간 전형적인 로드무비다. 다소 답답해진 일상을 벗어나서 길따라 여행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은 뒤에 마지막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렇게 돌아온 집은 이전의 집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은 뚜렷하지만 '직업'이 뚜렷하지는 않은 커플, 버트와 베로나는 버트의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다. 베로나는 그 방문이 마뜩찮기는 하지만 아이의 출산이 임박했기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이제 아이가 생겨날 두 사람은, 이 둘 외에 이 관계를 살피고 도와줄, 그들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가족 같은 것" 아니면 "친구 같은 것", "친분 같은 것", "우리가 아는 사람 같은 그런 것"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찾아간 곳에서 버트의 부모님은 2년간 벨기에로 떠나버린다고 뉴스를 전하고, 집도 임대를 놓아버렸다고 한다. 충격. 그럼 이제 이미 떠나온 길을 따라 길을 더 갈수밖에.

피닉스(Phoenix) - 투손(Tucson) - 매디슨(Madison) - 몬트리얼(Montreal) - 마이애미(Miami) - 집의 코스를 밟으면서 이들은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사람들과 사건에서 자신들의 <현재> 모습을 읽어낸다. 피닉스에서는 왜 결혼한 커플들이 자신들처럼 사랑하지 않을까를 궁금해하고(결혼은 관계의 파탄일 것이다. 베로나는 끝끝내 버트와의 결혼을 거부하던 중이었다), 투손에서는 베로나의 동생을 만나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애틋하고 얼마간은 애증이었던 관계를 떠올린다(자신이 부모가 될 때에, 비로소 부모라는 것에 대해 진지해질 계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매디슨에서는 정말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던 버트의 이를테면 사촌인 엘렌을 만나고, 엘렌의 뉴에이지 일상에 충격을 받는다(부모와 태어난 아이와는 '적절한' 거리와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몬트리얼에서는 옛 대학 동기였던 부부를 만나는데, 그들에게서 버트와 베로나 두 사람에게는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방패막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두 사람<만의> 삶은 없어지고 책임감과 인내라는 중요한 가치가 두 사람의 관계를 덧칠하게 된다.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침내 "친구 같은 것"을 찾아냈다고 생각해서 몬트리얼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던 두 사람은, 버트의 형이 전한 급한 연락을 받고 마이애미로 떠난다. 마이애미에서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형네 부부는 이미 파경이었다. 와이프는 이미 떠나서 잠적한 상태고, 버트의 형은 관계와 신뢰, 무엇보다도 평범한(정상적인) 삶이 무너졌다고 절망한다(결혼 생활 중이라도 얼마든 관계는 무너질 수 있고 세계는 붕괴할 수 있다. 아이가 있든 없든. 관계와 세계는 어쨌든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다소 작위적인가?

특히 마이애미에서 버트는 눈에 띄게 불안해 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무너진 커플의 신뢰 앞에서, 버트는 영 자신감이 없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야밤에 콩콩이를 뛰던 버트는 베로나와 인상깊은 장면을 연출한다. 속삭이듯 따뜻한 대화의 연속..

-(버트) 최소한, 결혼은 해줄 수 있겠어? / =(베로나) 절대 안 해. 그러나 절대 너를 떠나진 않을거야. / -(버트) 그래... / =(베로나) 약속할게 / -(버트) 그래 알겠어. 너는 나랑 절대 결혼을 하지 않을거야. 원하지 않으니까. 네 부모님이 결혼식 자리에 없으면 넌 절대 결혼하지 않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날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 할 수 있어? 우리의 이 아이를 절대 안 떠날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그럼(I do). / [... 중략 ...] / =(베로나) 우리 딸이 뭔가를 말하려 할 때 진심으로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특히, 아이가 두려워 할때 말야. 그리고 아이가 싸울 때면 마치 자기 싸움인 것처럼 아이 편을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 -(버트) 응(I do). 내가 부끄럽게 죽든 진부하게 죽든, 우리 딸한테는 아버지가 850명의 체첸 고아들을 구해주려다가 러시아 군인들과 맨손 격투를 벌인 끝에 죽었다고 말해줄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응. 체첸 고아들, 알겠어. 응.

보통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보는 사람은 진부한 사랑의 맹세를 늘어놓고 커플에게 "네(I do)"라고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진부한 결혼식 대신, 그들은 사회문화경제적인 이익을 주는 '제도권' 결혼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거행한 셈이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에 "우리는 비현실적이야", "우리는 망할 수도 있어"라고 자조하기도 하고 "꼬꼬마야? 혼란스러워? 미숙해? 미국적이야?"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얼마간 성장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추운 날씨에도 히터를 켜면 전기가 나가는 집이기는 하지만... 정말 사랑스럽다.


덧)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고 살찌는 것 가지고 베로나를 괴롭히던, 그래서 얼마간은 거북함이 들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던, 어벙꺼벙하고 우유부단하며 썰렁한 유머를 구사하던, 키만 껑충하게 큰(191cm) 버트 역을 맡은 존 크래진스키의 인터뷰 중에서 이런 말이. "제 이름은 원래 존 콜린스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재능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이름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크래진스키라는 폴란드 계관시인의 이름을 빌려왔어요. 완전히 쇼비즈니스계를 위한 이름이더라니까요." 아 이 배우 뭐냐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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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2/06 23:57

벨 훅스의 신간, <경ㄱ 넘기를 가르치기>의 초반부를 뒤적이다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읽어도 크게 와닿지 않으리라는 판단하에 일단은 잠시 접어 두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제약하는 경험의 폭 때문에도 그렇고, 현재 나의 '신분' 때문에도 그렇다 -_-


분명 '해방적 교육'이라느니,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이라느니 하는 개념들은 매력적이다. 여기서 매력적이라는 말은, 그 개념들이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하나 불가능한 것에 불과하다고 (암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될 수 없는 어떤 것,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어떤 것, 그러면서도 나를 확 잡아 끈다는 의미에서(많이 오버하자면, '소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ㅋㅋ) 매력적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더.

"가르치지를 원치 않는 교사"와 "배우기를 원치 않는 학생"이 있는 교육이란 대체 무엇일까. 벨 훅스가 말한 것처럼, "은행 출납식 교육"ㅡ교사가 전해준 지식만을 학생들은 그저 은행에서 빼다 쓰듯 훗날 사용할 수 있다는ㅡ이 대학에서도 주류 중의 주류인 지금, 대체 '교육'의 위상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 걸까.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 맑시스트들의 개념이나 소위 '비판 사회학' 같은 흐름에서 쓰이는 '사회과학'적 어휘들을 갖다 붙여서 뭐라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심정적으로 답답하고 갑갑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나에게 있어 "해방적 교육",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어디까지나 '맛만 봤다'는 얘기). 그렇다고 그 대학이 그 자체로 해방적이고 자유의 공간이었냐, 하면 다들 알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의가 다루는 것들은, 말 그대로 강단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에게 흥미도, 의미도, 전연 주지 못했다. 정말 단 한 냥의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다. 영어교육이었던 전공 강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강의들은, 너무나 단순했던 내 견해들ㅡ예컨대 평준화 찬성, 고교등급제 반대 등등ㅡ에 대해서 너무나 단편적이고 표면적이긴 했지만 지지하는 말들을 해주곤 했던 고등학교 논술 선생의 말들 보다도 힘이 없었다. 물론 때때로 재밌는 강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들과 지식을 만날 수 있었던 ㅇㄹㅎ 개론, 한국 현대사 입문 같은 강의들. 그러나 1년에 한 강의 정도? -_- 그나마도 수강자들의 태도 탓에 금방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수업은 2학년 말이었던가? 페미니즘의 미학과 예술이라는 수업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학회 세미나 등을 통해서 봤던 책들이 해방감과 자유로운 느낌을 주곤 했었지만(세미나 자체는 아니었다! 그 뒤의 수다가 그랬지), 대학 강의실에서는 처음이었다. 수업이, 그리고 교수자가 흥미롭다고 느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수업만은 시시하지 않았고, (벨 훅스가 강조하는) 흥(excitement)이 났다ㅡ물론 기말고사 시즌에는... 흑. 그 뒤로 수업의 연장선에서 방학 간 학기 간 안가리고 몇 년간 진행했던 세미나도 내게는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다. 교수자인 ㅇㅎㅅ 쌤은 여느 강사들과는 많이 달랐고, 수업 스타일도 당연히 다른 수업들과는 꽤나 달랐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점도 있었지만, 일단 '분위기'등이 달라서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발제를 맡거나 하면 의무감에 늦은 밤까지 시달리기도 했지만-_-) 수업과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버틀러의 사유들도 그 세미나에서 만난 거고.

그 다음으로는 풀집에서 들었던 정희ㅈ 선생님의 강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의 기대보다는 늘 수강자가 차고 넘쳐서, 애초에 의도했던, '책상 모아 놓고 썰 푸는' 강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 강의에 온 수강자들의 열정, 그리고 때때로 들을 수 있었던 정ㅎ진쌤을 포함한 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내게 큰 의미였다. 그리고 내 좁디 좁은 인식에 충격을 주어 확장시키는 이야기들을 강의 시간 내내 전해주는 ㅈ희진쌤의 이야기들은 노트에 기록해두고 지금도 틈나는대로 보고 있다(고작 노트한 것 가지고도 empower될 수 있다!). 그 덕에 이젠 왠만한 '쎈' 담론 아니면 자극 받지도 않는다. 너무 잰체하고 폼만 잡는 남성 학자들의 강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의. 그 다음으로는 여이연에서 들었던 ㅇㅅㅇ 강의도 있지만... 이 강의에 대해서는 일단 패스.

결과적으로 보면, 내게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결국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을 다루었다고 해서 어떤 교육의 장이 "자유의 실천"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떤 독문과 교수가 맡았던 어떤 강의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사회학적' 인식틀로만 페미니즘을 다루었던 어떤 강의도 정말이지 재미없었다.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그 교육의 장 내부에 있던 '관계의 질서'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교육의 장에서 당사자들이 '무엇을 습득하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들이 모여서 어떻게 습득하는가' 역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해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여러 학문이나 인식론들을 공부하는 모임들에 종종 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지긋지긋함을(때로는 공포를) 느끼면서 뛰쳐나왔다. 지식이 '해방적'이면 뭘하나, 그 지식을 공부하고 써먹는 사람들이 '해방적'이지 않은 걸.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자의식과 자기 연민으로만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교육의 장에서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진행되는 교육의 장이, 대학에서 유행하는 '실용적 지식'이나 "은행 출납식 교육" 보다 도대체 나은 점이 있었을까?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은 천천히 완독하도록 하자 ㅎㅎ

덧) 내가 좋아했던 강의나 모임에서, 나 스스로가 그 내부의 관계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느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편안함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뿐. 내가 그 모임들에 어떤 폐를 끼쳤는지는, 알 듯 말 듯 모르겠다. 흑.

덧2) 난 너무 관계에 있어 소심하고, 또 너무 자주 관계에 소홀해지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이거, '생각'만 할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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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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