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나와 이사한 집에서 머물던 동생이 갑자기 뇌수막염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 친척들과 부모님 집들이하랴, 병원 왔다갔다 하랴, 정신없이 보냈던 며칠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동생이 퇴원해서 국군병원으로 간다. 야간엔 눈이 잘 안보이고, 처음 가는 서울 길을 무서워하고, 오래 운전하면 너무 피곤해서 자주 조는, 또 이제는 50 중반 들어선 아빠는, 내일 아침 일찍 동생을 홍천 국군병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서울 집에 와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내 방에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나는 아마 오늘 밤 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묻지마 세트를 잔뜩 보냈고, 나와 동생은 그것들을 정리하다가 조금 짜증이 났다. 도대체 아무도 먹지도 않는 곶감은 왜 가져왔냐며, 변하니까 도로 가져가지도 못하지 않냐며, 제발 좀 미리 물어보고 주든지 말든지 하라고 대놓고 역정을 내는 자식들에게, 아비는 순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삼촌과 소주를 마시고 눈이 벌개져 돌아온 아비가 외삼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궁금해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어지러워 아무 책이나 집고 폈는데, 하필이면 그게 공지영 작가의 옛 소설책이었다. 그 소설책의 몇 소설들은, 90년대식 부채감을 가진 자아로 80년을 회상한다. 90년대식 부채감을 가진 소설의 자아는 '살아남았고', 약간의 죄의식으로 '잘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혹은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전에 두 번 읽었던 이 소설책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구절들을 인상 깊게 읽고 책귀를 펴고 접는다. 오늘 만났던 A에게, '삶이 간결해지고 있다',고 말했던 건 실은 이 책에서 읽었던 표현이었다. 원작 소설과는 다른 맥락이었지만 말이다. 이 소설책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혹은 지나간 것들의 이름으로 현재를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소재는 다르지만, 요즘의 내 상태와 책의 정서 구조는 밀접하다. 영원히 정리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무엇인가가 정리되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는 차곡차곡 정리되어 내 과거의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에 전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여야만 하는데, 혹은 원래 오늘 가려고 했던 심포지엄의 주제인 어느 철학자의 표현을 조금 빌자면, 오래 지속되는 미래이어야만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하나 둘 씩 자연스럽게 과거가 된다. 지금의 내게 남은 게 별로 없다는 느낌이다. 내일은 S와 이태원에 가기로 했다. J도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했다. 만나면 좋겠는데. 약속 시간은 늦은 저녁이다. S를 만나기 전엔 오랜만에 종로에서 청춘을 다룬 영화 한편을 볼 것이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커피 체인점에 잠시 앉아 있어야 겠다. 이태원에 가서는 술을 마시겠지만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과음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내일이다.
공지영 씨에 대한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불만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공개적으로(언론지면에서, 그것도 좀 의식있다는 <한겨레>에서 말이다) 공지영 씨의 소설을 씹으면서 "소녀적 감수성", "조숙한 여자아이 수준의 인식", "고집스런 어린아이의 투정", "미성숙한 자아", "신파", "감상의 과잉 분출", "자의식의 과잉" 운운하며 그녀를 폄하하던 그 비평가들의 수준은 도대체 뭐라 평해야 좋을지. 잘 나가는 작가에 대한, 그리고 '작가'라는 집단에 대해 괜한 열등감을 느끼기 쉬운 비평가들의 일상적인 질투라고 생각하기엔, 사실 너무 마초적이고 저열하기 짝이 없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뭐라 반박하자면 내가 한없이 더러워지고 꼴 사나워지는 것 같고, 내 수준도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밖에 없는 소설을 오늘 단숨에 읽었다. 신작 <도가니>. 공지영 씨의 소설이 너무 잘 읽히는게 장점이자 불만이라던 남성 작가ㅡ예전에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얼마 전에 뻘소리로 9회말 투아웃 만루 상황에서 아웃성 파울을 때려 버려서 이제는 절대 좋아할 수 없게 된ㅡ의 평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달까(물론 그 작가는 저 위에 비평가들처럼 공지영 씨를 싫어하는게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도가니>를 쓰기 위해 취재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한 포털에 연재를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글을 뱉었어야 했을 공지영 씨가 (주제 넘게도)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스스로 작가의 글에 밝히고 있듯, "나답지 않게 자주 아팠고, 초교, 재교를 보고 나서 한번씩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열에 들떠 며칠씩 누워 있어야 했"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기 때문이다(이해란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 말일 수밖에 없는지!). 소설의 내용에도 그렇다. 아니다, 와닿았다기보다는, 나도 그리된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아니, 아니,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할 언어가 없다. 이 순간, 언어가 터무니 없이 빈한해진다. 기억의 질서와 담론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 근본적으로 빛의 세계를 지향하는 언어가 밤을 만나면서 완전히 말소되는 순간, 전시(展示)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을 만나는 찰나, 더 나아가 압도적인 말과 권력의 폭력이 갑자기 체감될 때의 그 먹먹한 느낌.
'그런 것'에 대해 예민하게 감응할 수 있는 생생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말로 옮기려 드는 사람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언어가 무의식을 만들고 실재(계)를 만든다면, 필경 언어는 폭력이고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말하려면 다른 외피를 써야만 한다. 정희진 씨의 석사 논문(<성폭력을 다시 쓴다>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간된)처럼 사회과학 논문['객관'을 위장한 건조한 기술(description)]의 형식을 갖든, 아니면 <도가니>처럼 몇 가지 충격 완화장치를 도입하든지. 하지만 어쨌든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아픈 것은 어디 가는게 아니다.
줄이면서 <도가니>에서 아쉬운 점을 굳이 찾자면, 사실 이 작품에 도입된 충격 완화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정희진 씨의 책이 정말 읽기 힘든 것에 반해(필력 있는 정희진 씨의 글인데도!) 상대적으로 easygoing하기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건 내게는 어쩜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안전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해야할 듯 하다.
오늘 구입한 이번 한겨레21에는 “공지영은 한국 소설의 미래인가”라는 제목의 기획이 있다. 물론 공지영씨가 문단 비평계에서 은근히 ‘왕따’임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나, 이렇게 ‘비난’받는 글은 처음 봐서 약간은 충격이었다. 그 기획에서는 공지영씨의 소설을 정말 신랄하게 비난하는 정문순씨의 비평문 하나, (옹호론이라고 기자가 밝혀놓고) 덜 적나라한 비난을 하고 있는 이명원씨의 비평문 하나, 이렇게 두 개를 게재했다.
물론 공지영씨는 이제는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지 않게 된 작가다. 특히 예전에 무슨 신문에 실렸던 인터뷰를 읽고는 거의 질려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2006년 여름에 나름대로 진행했던 <<여성작가 소설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입했던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별들의 들판>,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이 아직 책꽂이에 꽂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의 기준에서는 그녀의 소설들이 이들 비평가들이 이정도로 ‘혐오’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한번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명원, <위안의 서사 문학적 대중주의>
이 기획의 기자는 이명원씨의 비평문을 ‘옹호론’이라고 생각한 것 아니면 애초에 청탁할 때 결과에 상관없이 ‘옹호론’을 써달라는 계획을 짜놓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명원씨의 글은 그다지 ‘옹호적’이지 않다.
여기서 이명원씨의 논의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물론 공지영의 소설은 문제가 많은 편이지만, 한국 소설계의 반 인간주의라는 특성에 대한 반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 문학적 대중주의의 현재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지영씨의 소설들, 특히 최근 성공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안적 서사”가 대중에게 폭 넓은 호소력을 제시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즉 공지영씨가 “한국 문학의 중요한 현재성”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녀적 감수성”, “센티멘털리즘”으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 문단 비평계의 주류적 해석을 감안해서인지, “문학적 대중주의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이라는 ‘조건문’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혹은 이 글의 필자가)‘대중주의의 실현’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이 비평문에서 보여주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들은 쓸모가 없어지는 것 일 테다. 게다가 비평문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에서 공지영씨에 대한 문단계의 비난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문체는 “~고 한다” 식이다. 남에게 ‘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책 없는 선량한 태도”라는 소제목을 보면 이명원씨가 ‘정말로’ 하고 싶어 했던 말은 역시나 공지영씨에 대한 비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가 앞에서 ‘옹호론’이라고 소개했던 게 정말로 무색할 정도였다. 게다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고 글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대중주의”라는 언표는, 한국에서는 결코 ‘긍정적인’ 기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명원씨의 입장은 분명해진다.
나는 일단 이명원씨의 비평은 ‘무책임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위에 언급했듯 그의 비평문의 상당한 부분은 남에게 들었다는 식이다. 읽다보면 정말 다른 수많은 비평가들의 생각인지, 이명원씨의 생각인지 알 수 없는데, 결국 끝에 가면 “~라는 지적은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식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결국 ‘남의 의견’인 것처럼 포장하고 소심하게 그 뒤에 숨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해 놓고서도, 비평문의 대부분은 그러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나름대로 ‘옹호’한다고 기록한 부분은 정말 몇 줄 되지 않아 오히려 읽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다. 따라서 나는 그가 ‘남의 얘기’처럼 써 놓은 것도 역시 그의 고유한 주장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물론 나는 다른 사람의 분석을 가져오는 것 자체를 ‘무책임’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일종의 행위일 뿐이다. 다만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 만 부 이상이 팔려나갈 인기 잡지의 지면에 글을 게재하고자 했다면, 그는 좀 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공지영씨를 ‘옹호’함으로써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문단 비평계의 ‘원색적 비난’이 걱정되었다면, 아예 이런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자신조차 공지영씨가 싫었다면, 아예 좀 더 떳떳하게 드러냈을 일이다.
게다가 그는 공지영씨의 소설을 “대책 없는 선량한 태도”라고 평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대책 없는’ 그녀의 소설과 영화에 열광하는 독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도 잃지 않는다. 그는 특히 <우행시>에서 나타나는 “사랑에의 몰입은 ‘연민’의 극대화에서 발생하는 갑작스런 선택”이라고 말하며 그것이야 말로 “대중적 환호를 이끌어내는 주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저쪽 한 켠에서는 “연민이 아닌 인간의 존엄으로 대상인물을 상승시키려는 의지가 부족한 채, 오히려 대상을 타자화 함으로써 소설가의 부채의식이 휘발되는”것이라고 말한다. ‘연민’은 대중적 감상이고 대중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며, 반대로 자신들은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소설가들 혹은 비평가들이 된다. 또한 대중들은 판타지와 개인에 대한 공감에 매몰되고 이것들에 환호하는 반면, 자신들은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의 척결을 외치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것들이 ‘배워먹은’ 비평가들이 쉬이 갖는, ‘뭘 모르는’ 대중에 대한 ‘경멸의식’ 그 자체가 아니면 또 무엇일까.
정문순, <통속과 자기연민, 미성숙한 자아>
기자는 정문순씨의 비평을 ‘비판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단 기획의 취지에는 잘 부합하는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비평의 요지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공지영의 소설은 현재적이지 않고 과거에 들러붙어 있으며, 상처받은 영혼들의 과잉 자의식을 드러내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이 강하며, ‘순진’하고 미숙한 어린 자아의 넋두리” 정도로 할 수 있겠다. 한 작가의 소설 세계, 더 나아가 90년대 여성 작가들에 대한 신랄하고 적나라한 (내가 보기엔 정말 대책없고 처절한)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나는 그의 비평의 일부 구절에 공감한다. 예컨대 “약자에 대한 배려와 자기 성찰이 빈약한 한국사회”라든지.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글은 격한 분노와 짜증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에 대한 격한 반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이러한 그의 비평이 걷잡을 수 없이 짜증난다. 특히 “그녀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극심한 피로에 지친 내면을 위로받고 싶을 뿐 세상과의 정면 승부를 감당할 수 없는 독자들과 출판시장의 요구에 부응”한다고 결말을 내리는 부분에서는 화까지 치밀었다. (어쩜 이렇게 ‘멋지게 잘’나셨을까.) 나는 하나하나 그의 구절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에너지가 없다. 솔직히 거의 대부분의 표현들을 정리한 다음에 코멘트를 달고 싶지만, 그냥 대표적으로 하나만 언급해 보겠다.
“과거에 들러붙어 벗어나지를 않는다.”라는 그의 말부터 시작해 보자. 일단 나는 소설들이 왜 과거에 들러붙어 있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과거에 들러붙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공지영씨의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가 말하듯 “불의의 시대에 이상과 정의로움의 염원으로 피끓는 청춘을 세상에 바쳤으나 보상받지 못한 삶,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광부와 간호사들, …… 여성 가사 노동자들 등 경제 성장기의 이면을 떠받친 삶들, ……사형수들,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에 멍이 든 여성들”의 삶들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가 말하듯 “엄정한 시선”을 견지한 채로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엄정한’ 시선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그 ‘엄정한’ 시선은 매우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통찰인 듯하다. 그는 반복적으로 “고집스런 어린아이의 투정”, “푸념하는 듯한 미성년의 목소리”, “쉽게 토라지다가 이내 화해하기 일쑤”, “조숙한 여자아이의 수준의 인식”, “미성숙한 자아” 라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미 ‘성숙/미성숙’의 이분법의 은유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목소리들 자체를 ‘부정’한다. 그것들은 “신파조”이고, “감상의 과잉 분출”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자의식의 과잉”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관찰가능 한 것들에서 출발하는, 경험적이고 또 성찰적인 모습을 지극히 무식하고 단순한 구도로 폄하하고 있다. 그의 논조는 “눈물 따위는 가치가 없다, 다만 강한 세대 인식, 그리고 실천 의지만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다!”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그의 글은 차라리 처절하고, 피 냄새까지 날 정도이다.
그는 ‘위안’과 ‘공감’의 힘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하다. 그가 보기에 그것들은 전부 ‘어린 아이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모든 눈물과 연민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 전부를 어린아이의 ‘순진함’이라고 폄하하는 그의 시선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위안’, ‘공감’은 실제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들을 양분으로 삼고 살았으며, 한편으로 그것은 지극히 ‘제대로’된 방식으로 우리 삶에 편입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가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보살핌’의 윤리라든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등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지극히 부족한 것들이 아니던가. 또한 그것들이야 말로 오히려 타자에 대한 윤리의 한 형태가 아니던가. 그가 경멸하는 ‘위안’과 ‘공감’은 흔히 발견되는 ‘타자에 대한 무시’와는 분명히 다른 태도다. 여기서의 이 ‘무시’는 대체로 타자에 대한 ‘경멸’을 내포한다. 타자에 대한 거리를 선명하게 견지하는 것과는 반대로, 위안과 공감은 타자에 대해 (어느 정도) 열려있는 자아만이 가능하다. 나는 이 ‘경멸’과 ‘무시’, 그리고 ‘위안’과 ‘공감’을 선택하라고 하면 차라리 후자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또한 나는 오히려 그가 그토록 경멸하고 있는 여성작가들이야 말로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라운 ‘성찰’과 ‘치밀함’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단순한 ‘신파’로 경멸당하기에는 그러한 인식의 깊이를 갖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경험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은 그가 말하듯 “미성숙”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성숙한 자아’야 말로 과거에 직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언어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냉철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현실과 과거에 거리를 두는 것은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감정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과거를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남-독자’들에게 공감을 살 정도의 글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최근의 '봉사'라는 것에 대한 나의 감정에서 비롯한 것인데, 나는 물론 그 공감이나 연민, 그리고 위안이라는 것들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나는 타자에 대한 윤리는 그것들로 붙박음질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문순씨의 ‘투명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투박한’ 주장에 의해 재단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것들이 과연 ‘미성숙’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판단을 보류해야 하며, 더 나아가 이 성숙/미성숙의 은유 자체에 대한 질문이 던져져야 할 것이다. 덧붙여 내가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드세지 말고 세상과 맞장뜨지 말아야 하고 고분고분하며 세상과의 불화를 감당하기보다 쉽게 물러서고 자기연민에 탐닉”한다고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여성 작가와 대중적인 것에 혐오를 감추지 않는 비평가는 또 오랜만이다. 오히려 솔직한 것이 고마울 정도로.
나는 오히려 거대서사에 매몰된 정문순씨 같은 사람보다 일상의 정치적 투쟁과 좌절 등을 그린 공지영씨의 소설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여성 작가들에 대한 혐오와 ‘공감’, ‘연민’ 등에 대한 경멸은, 강력한 ‘근대적 남성 주체’의 것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주체와 자아들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은 이미 ‘성숙’한 것처럼 묘사하는 점에서는, 그가 그토록 비난하는 ‘나르시시즘’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르시시즘 자체가 비난 받아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특수한 한국적 문화현상.)
나가며
나는 공지영씨에 대한 문학 비평계의 평론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하다. 물론 엄청나게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리고 문학 비평계의 남성 중심성에 대해서는 듣어오기는 했지만, 문학 평론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없이 정말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예전에 들은 바로는, 남성 작가들의 소설 비평을 여성 작가가 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특히 그것이 ‘비판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고 한다. 반면 남성 작가나 비평가가 여성 작가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은 쉬운 것이며 일상적이라 한다. 이렇게 생물학적 남성들이 바글대는 문단에서 생물학적 여성 작가와 비평가가 설 영토는 넓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오히려 공지영씨의 ‘성공’을 ‘축하’하고 싶고 환영한다. 또한 그녀의 소설을 꽤나 갖고 있고,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재미있게, 또 한편으로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정말 ‘옹호’하고 싶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이런 ‘경멸’과 ‘혐오’로 가득한 ‘반 대중적’ 태도에 대해서는 언젠가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비평가들의 태도에 대한 ‘반발감’ 때문에 글을 다다닥 두드린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