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공간'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7/25 7월 25일 (6)
  2. 2010/05/02 5월 2일 (2)
  3. 2007/08/20 몸-도시
  4. 2007/04/06 '대학'이라는 공간
일기 / 2010/07/25 21:09

오늘은 내가 태어난지 딱 25년 되는 날(해피 버스데이 투 미~♬). 스무살 초반이 넘어서 생일은 보통 일부러 시간을 내서 혼자서 보낼 때가 많았다. 여행을 간다던지, 영화관이나 미술관에를 하루 종일 간다던지, 사고 싶었던 것을 무리해서라도 구입을 한다던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게 너무 장하다는, 그냥 나에게 주는 하루 어치 선물인 셈이었다. 그게 좋았다 싫었다, 혹은 혼자 지내는게 좋다 나쁘다는 문제가 아니고. 그런데 25살 되는 날 생일에는 발품 팔아 열심히 방을 구해야했으니 이거 원ㅋ 그러나 며칠 만에, 수십 개의 방을 본 끝에, 하늘에서 내린 선물처럼, 그 귀하다는 "맘에 쏙 드는" 전세 투룸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ㅠㅠ! 동네가 하늘 받드는 곳이라는 지명을 가진 땅이었는데, 하늘과 이번 방을 구하느라 등골이 휜 부모님께 감사를! 이건 최고의 선물이야!! 아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쌩유 베리마치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셰셰 메씨 보꾸 당케 쉔 마할로 그라찌에 그라씨아스!!


대략적인 집의 배치도. 공간의 상대적인 크기 같은 건 잘 모른다. 1.5층에 전용 면적으로는 대략 14.5평 쯤 되고, 방이 2개(하나는 미닫이 문으로 거실과 침실로 사용 가능)이고, 방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크기지만 <서고>로 쓰기엔 괜찮은 작은 방이 하나 더 있다. 혼자 살기엔 좀 넓을지도 모르겠으나 둘이 살기엔 너무 커서 휑하지 않은 적당한 크기일 것 같다. 베란다엔 물건 보관하기 좋으며, 세탁기와 보일러가 있다. 방쪽 창은 넓은 편이지만 앞에 또 건물이 있어 전망은 그리 좋진 않다. 그래도 나름대로 나무도 심어져 있다. 욕실은 좁지 않고 깨끗하다. 베란다 쪽에서는 산이 보인다.

신혼부부가 살던 집이라 벽지도 하얗고 장판도 깨끗하며 거실 한쪽 면에는 포인트 벽지도 붙어서 예쁘다. 센스 있게 칙칙한 철문에 나무때깔 포인트 스티커도 붙여 놓으셨다. 여기에 책장 몇 개, 옷장 하나, 책상 하나, 부엌에 둘 미니테이블과 스툴 몇개 정도 챙겨 오면 가구 배치는 끝. 전자렌지, 가스렌지, 밥솥, 각종 부엌 집기류, 세탁기 이런 건 다 구입해야 한다. 주인 신혼부부는 인상도 좋고 이래저래 성실해 보여서 좋았다. 아기도 엄청 예뻤고. 스윗 홈을 세주고 자기들은 직장 관계로 경기도로 이사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낡은 싱크대는 교체하고 나간다고 했다.

집에 살게 되면 야심차게 추진할 것들이 있다. 제일 먼저는 <포인트 벽지>와 <포인트 스티커> 구입. 내가 쓸 안방 한 면을 예쁜 포인트 벽지로 덮어버릴거다. 창문에는 스티커를 붙일 거고. 대략 7만원 정도의 돈과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면 해결이 될 것 같다. 다음으로는 <빈 백(bean bag)> 구입. 주말이나 저녁에 집에 돌아와 늘어지듯 빈 백에 누워서 소설이나 시집을 보면 정말 좋겠다. 근데 이 녀석이 생각보다 비싸서 고민하는 중. 마지막으로는 <시리얼 디스펜서> 구입. 예쁘장한 <커피 메이커>는 조금 나중에. 그걸 사려면 그라인더 같은 부수기재도 사야하니까 고민 중. TV는 놓지 않을 것이다.

몇 가지 아쉬운 건 지하철 역에서 10분 정도 걸린다는 거고, 오르막길을 지나야 한다는 것, 주변에 공사를 한다는 것, 뒷산이 예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거실이 넓진 않아서 둘러 앉는 파티는 못하게 될 거라는 것(동생이 오기 전엔 방을 거실로도 쓸 수 있어서 가능하겠지만). 그것 외엔, 뭐, 내가 다닐 학교 근처에 있는 조용한 동네니까 아주 만족한다. 좀 걸어 나가 길을 건너면 마을버스타고 강의실로 바로 갈수도 있고. 바로 밑에 있는 중학교도 밤 12시까지 개방한다고 하고. 조금만 신경 쓰면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봐 올 수도 있고. 만약 노력을 더 한다면 집에서 12~3분 정도 걸어가서 1주일 3시간 강습하는데 한달 수강료가 28,700원 밖에 안하는 수영레슨이나 스쿼시레슨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거 구하려고 정말 눈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눈물의 시간이란 건 문자 그대로다. (ㅠㅠ) 지난 2주는 온통 생활 공간을 구하는데 신경이 쏠려 있었다. 돈 문제, 지역 문제, 부모님과의 가치 갈등, 타이밍 문제 등등 온갖 문제가 일상에 산적하여 책이고 논문이고 뭐고 아무것도 읽지도 못한 채 시간을 모두 쏟아부어야 했다. 사무실에서는 직거래 카페에서 매물 보기에 바빴고... 전세 대란이라더니, 진짜 방 잠깐 보고 생각 좀 해보겠다고 나왔다가 몇 시간 뒤에 전화 걸면 방이 나갔다고 하고 그랬다. 여하튼 이젠 이 번잡한 생활도 끝이구나. 몸 누일 공간 하나 제대로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여기서 5년이고 6년이고 계속 살면 좋겠다. 다 귀찮다. 두 번은 못하겠다.

그리고 제발 8월 중순부턴 여기에 진짜 살게 되길 바란다. 돈도 부쳤으니 계약 파기하시면 안돼요. 흑흑


덧) 미니 테이블은 이런 느낌이면 어떨까? 하지만 난 당분간은 혼자 살잖아? 안 될거야.. ㅠ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 3일  (0) 2010/08/03
7월 26일  (0) 2010/07/27
7월 25일  (6) 2010/07/25
6월 27일  (2) 2010/06/27
6월 20일  (2) 2010/06/20
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02 18:11
요 며칠 이상한 캠프에 다녀와야 했고, 그에 바로 이어서, 갑자기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구제역'이 발생해버렸다. 반강제 계약직 퍼블릭 서비스에 종사하고 있는 처지에, '아직 또렷한 대책은 없지만 전 공무원 일단 출동!'하면 예예, 하고 가야지 뭐. 구제역이 끝날때까지는 '매일출근주말반납'은 도저히 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 대책도 없고 장비도 없고 돈도 없으면서 일단 나가라고 한다. 그래도 내 일상에 닥친 더 큰 위기는 겨우 모면. 이걸로 일단은 OK.

어쨌든 이 탓에 소와 돼지가 몰살 당하고 있다. 규모도 엄청나 수천마리에 이른다. TV에서 종종 구제역 뉴스를 볼 땐 숫자로만 실감했던 것들이, 이제 내 일상에 가까이 오니 다른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수없이 많은 소와 돼지들은, 질병에 걸렸거나 혹은 걸릴 위험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절하게 하루 아침에 학살당하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개활지에 보이던 환한 불빛과 바삐 움직이던 포크레인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싼값에, 혹은 무료로 한우의 뒷다리를 먹을 수 있지 않겠냐며 군침을 삼킨다. 심지어 매립지에서는 이미 소고기를 굽고 있었다. 소를 40여 마리 키우고 있다는 어제 만난 한 축산업자는, 이번 구제역 발생지역 선포로 인해 자신의 꿈이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해, 자기가 어릴 때부터 소를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비싼' 안락침을 맞아야 하는 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도 표현하지 않았다. 소들은 허망하게 죽어버리거나, 500kg 나가는 600여만원 짜리 '재산'일 뿐인 것이다.

예전에 소위 '광우병' 파동이 있었을 때, 가장 절실하게 공감했던 표현은 '미친소'가 아니라 '병든소'라는 표현이었다. 광우병은 결국 거대 축산기업 네트워크와 효율성 논리에 의해 탄생한 재앙이었다. 그 병을 만든건 소가 아니라 결국 인간이었고, 그럼에도 정말 많이 아팠던 건 소들이었고, 그럼에도 인간에게 미친 영향의 원인은 '미친소'에게로 귀결되었다. 이번 구제역의 경우는 또 어떨까? 고기를 더욱 싼 값에 먹겠다는 시장의 욕망은 결국 축산농가의 밀집화, 기업화, 효율화를 이끌었을 뿐, 그런 열악하다못해 처절한 환경에서 돼지와 소가 어떻게 성장하고 자라나고 학살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소와 돼지, 닭 같은 '인기 품목'이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는 가본 사람만이 안다. 그렇게 밀집된 환경 속에서 구제역은 더욱 쉽게 전염된다. 적어도 축산 농가 주변에 목초지만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도, 발생지역 3km이내 무조건 모든 소 돼지 학살은 없을 것이라 했다.

지하철, 버스 따위에서 과도한 밀집은 사람을 정말 미치게 한다. 사람들은 1.5평짜리 독서실에서 우울증에 쉽게 빠진다. 어떤 동물행동학자는 과밀로 인한 총체적인 행동의 왜곡을 '싱크(sink)'라고 표현했다. 28개월 동안 5마리의 쥐는 5만 마리의 쥐떼가 될 수 있지만, 일정 크기의 공간에 사는 쥐들은 결코 일정 개체수를 넘어서 번식하지 않는다. 일정 수를 넘어서 과밀이 발생하면, 쥐들은 서로 꼬리를 물어 뜯어가며 싸우고 태어난 새끼를 죽인다. 소와 돼지, 닭(한국에서만 닭은 하루에 70만 마리, 월드컵 기간엔 200만 마리가 도살당한다)에게 유독 전염병이 빠르게 전파되고 치명적이었던 이유를 다시 짐작하게 한다. 출퇴근 시간에 인사를 건네곤 했던 소들이 생각난다. 다시 한 번, 육식을 하지 않아야겠다. 이건 최소한으로 지킬 수 있는 삶의 윤리다. 정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4일  (0) 2010/05/04
당분간 지켜야할 원칙  (2) 2010/05/04
5월 2일  (2) 2010/05/02
4월 25일  (2) 2010/04/25
4월 19일  (5) 2010/04/19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7/08/20 00:16

베아트리츠 콜로미나가 엮고, 동녘에서 역간된 <섹슈얼리티와 공간>이란 책을 재미삼아서 보고 있다. 물론 '재미'삼아서 보기에는 난해한 논문들이 좀 있다. 한국 땅에서는 썩 익숙치는 않을 '공간'에 대한 사유가 진행되기에, 아무래도 쉽게 몰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중 엘리자베스 그로츠가 쓴 <몸-도시>라는 짧지만 쉽지 않은 논문이 인상적인데, 내가 갖고 있는 그녀의 다른 책(엘리자베스 그로츠, <뫼비우스띠로서 몸>, 여이연)에서 느꼈던 난해함과 마찬가지로 약간 읽기에 쉽지만은 않다.

앞으로 정리한 것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거친 정리이므로 읽으실 때 힘드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로츠는 몸과 도시의 관계를, '사실적'이고 '역사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발달과정, 즉 유목민→농경사회→지방분권적 마을→도시국가→...→현대 기술거대도시로 발달하는 선형적인 발달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에는 "도시가 몸의 산물이며 투사라는 생각", 즉 '휴머니즘'적 가치관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로츠에게 이러한 관점은 몸body과 정신의 이항 대립을 그대로 끌고 들어와서, 몸(도시)를 정신(인간)에 종속시키고 있는, 일방적인 입장을 전제하고 있기에 단호히 거부해야 하는 설명이다.

몸과 도시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대중적인 공식으로는, "몸과 도시가 유사하거나 이종 동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몸과 사회질서를 동일시 한다. 즉 어떤 "정치적 통일체"와 유사한 설명이다. 과거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의 '정치적 통일체' 개념은, 몸의 은유를 들어 설명되곤 했다. 지도자 즉 왕 혹은 국가체는 머리요,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몸body이다. 법은 신경에, 군대는 팔, 상인은 다리라는 둥. 이러한 관점은 물론 어떤 면에서는 '명쾌'하고 약호화되어 있기에 알기 쉽다. 그러나 그로츠는 묻는다. 만약 이 관점이 성립한다면 "성기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즉 이 관점은 그 자체로 남성 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갖는다(명쾌하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음;). 더 나아가서 그로츠는 이 비유가 갖는 정치적 기능, 즉 '자연스럽게'만드는 정치적 과정을 비판한다. '육체'는 각 기관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기 보다는 어떤 명령에 따라 위계적으로 '전체'를 위해 작동한다. 그리고 이것은 고도로 '자연스러운 형태'의 조직일 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속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감추고 '자연화'한다.

따라서 그로츠는 이러한 설명들을 거부하고, 각각의 설명에서 요소들을 결합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일단 그로츠는 몸이 도시를 생산하고 건설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과 관계'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모든 원인은 그 결과로부터 논리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과 도시는 상호 결정적이다. 그렇기에 몸은 도시와 구별되지도 않으며, 또 따로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인터페이스 내지는 공동구축이라고 할만한 쌍방 연결망이 있다. 정리하자면 몸과 도시는 어떤 동형적 관계로 존재함과 동시에 서로 강력한 영향력을 주고 받기에 떨어질 수 없는 어떤 관계를 갖는다.

더 나아가서, 그로츠는 몸과 도시는 각각이 거대하고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 각 부분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진단한다. 이 모델은 '실천적' 함의를 갖는 것으로서 몸과 도시가 서로를 규정하고 확립할 때 실제 '생산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도시의 형태나 구조, 그리고 그 내부의 규범은 자기 자신을 체현하는 주체들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다. 도시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주체가 공간을 이해하고 배열하게 되며, 그에 따라 주체의 포지션이 결정된다. 공간의 양식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또 각 주체는 각 공간의 공식에 따라 육체를 작동하는 형식을 결정한다. 다시 말해 도시는 몸이 침윤될 수 있는 장소site인 것이다. 공간의 문법에 따라 도심, 전원, 빈민가, 교외가 등의 구획이 설정되면, 각 개인이나 집단은 그 도시공간과 협상을 벌이게 된다(물론 그 안의 권력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와 동시에 다시 몸들은 변화하는 자신의 욕구에 따라서 도시를 변화시키고 재각인 시킨다. 즉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몸과 도시는 서로 분리됨과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생산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도시는 몸들의 성적sexual이고 사회적social인 관계의 방향도 결정한다. 공사 영역의 분리 뿐 아니라, 사회적 주변성을 관리(예컨대, 게토화)하는 것도 도시-기계의 주요 작동 메커니즘이다. 몸들은 '가시적'인 대상이기에 국가의 관리 대상이며, 도시는 그 핵심적 도구로서 작동한다. 따라서 그로츠에게 있어 도시는 권력의 생산과 유통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지점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로츠는 이러한 얼핏 보면 단순한 이 진단과 함께, 폴 비릴리오의 논문을 빌려서 정보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주체의 물질성(신체성)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로츠는 이를 "공간이 시간으로 내파되는 것", 즉 "거리가 속도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순간적인 의사소통방식ㅡ위성, 텔레비전, 광섬유, 텔레마틱ㅡ의 출현과 함께 도착이 출발을 대신하고 있다. 모든 것이 출발할 필요도 없이 도착하게 된다. (...) 그 강렬한 페이스 때문에 내일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영원한 현재가 생겨나면서, 내일을 알지 못하는 시간의 경과 형태는 점점 더 타락해 가는 사회의 리듬을 망가뜨린다. '기념비'는 이제 더 이상 정교하게 지어진 기둥이나 화려한 건물로 종착되는 기념비적인 통로가 아니라 무료함, 즉 기계로부터의 서비스 제공을 기다리는 기념비적인 대기상태인 것이다. 의사소통이나 텔레커뮤니케이션 기계의 작동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늘어선 행렬, 비행기 조종사의 점검 목록표, 컴퓨터 앞의 밤샘 책상들 모두 기념비적 대기상태의 예이다. 궁극적으로, 문은 자동차, 그리고 다양한 벡토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자동차와 벡토들의 흐름이 끊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것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카운트다운이다. 그것은 노동시간의 긴박성이 시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일종의 초읽기 단계인 것이다. 반면 실업과 휴가기간은 주변 역할, 즉 시간의 교외 역할을 맡는다. 모든 사람이 결핍과 사생활의 삶으로 추방되는, 일종의 청소라고나 할까.

Paul Virilo, "The Overexposed City," Zone1/2(1986), p.19~20


사실 이 논문이 뭔가 명쾌하다거나 깔끔하다거나 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일종의 개괄이고 요약이며 '작업 노트'적 성격이 오히려 강한 것 같다.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정리한 거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최근 교지에 "공간의 문화정치"라는 거창한 부제를 단 부끄러운 글을 썼듯, 최근 나는 '공간'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고 있다. 공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미시 기술 등에 대한 치밀한 고민과 분석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유물론적 접근 방법에 치우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난 더욱더 많은 유물론적 방법을 끌어다 적절히 써야 한다고 본다.

학교-공간의 젠더를 분석하지 않는한, (마음에 드는 제목은 아니다만) 나임윤경씨의 책의 제목처럼 "여성과 남녀공학대학교의 행복한 만남"은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아직은 '섹슈얼리티'까진 잘 모르겠다. 책을 더 공부하면 나오겠지). 예컨대 화장실의 변기수 배분만 해도 그렇다. '여휴' 관련 사업이나 투쟁도 그러하고. 이런 것만 봐도 공간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거나 독립적인 개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각 주체들이 타협하고 경쟁하고 경합하는 어떤 정치적 장이다. 또한 학교-공간의 배치 질서와 구조를 분석하지 않고서, 관념적으로만 장애인 이동권을 사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광장'의 부재(화)와 그에 따른 정치적 행위의 어려움 등등. 블라블라.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전공을 "건축"으로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페미니즘적, 평화주의적, 생태주의적 관점을 모두 녹여낸 건축! 상상만 해도 굉장하지 않은가!, 라기 보다는 도저히 상상되질 않는다만... 어쨌든-,ㅡ 도시계획 분야나 건축계야 말로 이런 미시 권력 담론 분석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공간이 내파되고 시간 개념으로 휩쓸려 간다니, 정말 무시무시하지 않은가ㄷㄷㄷ;

▶ 참고문헌
베아트리츠 콜로미나, <섹슈얼리티와 공간>, 강미선 외 역, 동녘, 2005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분증명서의 원칙  (0) 2007/09/16
영원한 증인 中  (0) 2007/09/02
몸-도시  (0) 2007/08/20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0) 2007/07/28
작은 해마  (0) 2007/07/22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04/06 16:38
4학년이란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단 한번도 많은 이들이 경험했을 ‘방황’을 한 적이 없다. 휴학도 한 적이 없으며, 대학에 대한 회의감 끝에 수업에 결석하고, 친구들에게 며칠이고 아무 연락 없이 잠적을 한 적도 없다. 나 역시도 수업이 싫고 전공이 싫고 수많은 사람이 꼴 보기도 싫었지만, 나름대로 ‘적응’을 하면서 살아왔던 터였다.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수업이 아니라, 이 대학 자체가 아니라, 혹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다만 내가 몸담고 있는 그런 특수한 개별 공간과 그 안에서의 관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나의 ‘정치’. 이렇게 나에게는 대학이란 공간은 적절히 의미화 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4년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반이자 ‘지형’인 이 공간에 대해서, 다시 말해 우리들에게 대학이란 공간이 어떻게 의미화 되어 있는지 한번도 진지하게 사고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 니힐리즘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사고 틀에 갇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다른 것들에 탐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대학이라는 이 공간에서 나름대로의 경험 끝에 좌절하고 슬퍼하고 또 환희하고 만족하고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지 못했다/않았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들은 이 공간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아마도 쉽게 할 수 있는 대답들을 여러 가지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을 듣는다, 공부를 한다, 취직 준비를 한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등등의 것들. 우리들 누구나 저런 것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들은 결코 우리의 일상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대학-공간에 가면 무엇을 하게 될 거라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극히 ‘막연’하게 알고 있다. 또한 나름대로 “대학생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각자의 마음속에 내심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들과 막연한 것들에 대해서 적절히 언어화하지 않고/못하고 4년을 살아내고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렇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실재하는 이 대학-공간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한다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묘하게 모순적이고 아픈 현실에 부딪힌다. 그리고 우리 각각이 가진 대학-공간에 대한 욕망과 실제로 충족되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음을 새삼스럽지만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대학-공간은 실로 ‘기의 없는 기표’다. 그러나 선뜻 기의가 ‘없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측면이 있다. 그런 대학-공간을 수많은 이들이 욕망하고 또 거쳐 가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우리들 각각이 의미화 하는 방식이 나름대로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나름의 기의를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라는, 다시 말해 대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경우에는, 그리고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수준에서 검토를 하기 시작하면, 대학-공간이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 기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다시 말해 내 생각에 ‘대학’은 실로 ‘민족’이나 ‘국가’나 ‘가족’과 같이,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고 규율하는 어떤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 공간은 우리들의 삶의 어떤 ‘일관성’만을 보증해주는 기표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대학-공간은 4년이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할당해주고, 제도를 통해서 그것을 보증해준다. 따라서 누구나 대학-공간에 들어오면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보장된다. 이 공간에서 방황하는 것도, 열심히 하는 것도 모두 용납된다. 적절히 열려있는 것들을 둘러싼 어떤 ‘선’을 위반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대학생’이므로. 이렇게 실로 어떤 공동체는 이렇게 일관성을 보증해주는 제도를 통해서 유지가 된다. 위에서 말한 ‘민족’, ‘국가’, ‘가족’등의 어휘들이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고 있듯, 대학-공간도 우리들의 삶에 일관성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 유사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공간’들의 기의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실로 수수께끼다. 누구나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삶의 준거 틀로 삼고 지내기에, 누구나 ‘그것을 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실제로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그것들은 어떤 ‘진실된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이라는 이름과, 국가라는 이름과, 가족이라는 이름과, 대학이라는 이름은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허구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어휘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들은 말한다. 언제나 "~해야 한다."의 어미로 끝나는 "민족이란~", "대학이란~", "국민이란~". (이러한 진정성의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일단 의심해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그것들을 한편으로 편리하게 마구 ‘사용’한다. 국민이라는 정체성, 한 가족의 딸/아들/자매형제 등의 정체성, 그리고 대학생이라는 정체성.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또 한편으로 삶의 규율이 되며, 또 한편으로는 모든 생활의 토대가 된다. 또한 우리는 그것에 어떤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들은 그 윤리적 명령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미 알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도 알도록 요구한다. 그것들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로 서로가 서로를 규약하고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누구도 명령하지도 않았는데도. 너와 나의 ‘실천’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기의 없는 기표’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비극이야 말로, 그리고 이렇게 역설적으로 알지 못함이야 말로, 이 거대하면서도 허구적인 공동체를 작동하게 하는 어떤 핵심 메커니즘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대학-공간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충족될 수 없다. 이미 개념상 대학-공간은 어떠한 욕망도 충족될 수 없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알고 있는 알지 못함을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이것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작동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공간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 공동체 구성원리에서 지금 당장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써는 그 굴레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알지 못함(무지)이 그 자체로 허무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무지라는 것과, ‘기의 없는 기표’를 욕망하는 행위의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극복은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에 이 무지는 실제로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하여 좌절하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안전하게’ 우리들의 삶을 규정짓는 이 ‘기의 없는 기표’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없는 기의에서 나오는 윤리적 명령과, 우리들 스스로 그것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즉 그런 텅빈 기표들은 우리들의 실천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조직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인 즉슨,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 기표는 더 이상 우리들에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 대학-공간 내부에서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접근하고 분석하고 때로는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런 허무함이야말로 어떤 정치적 기획을 조직하고 실천할 것인가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도록 해주는 토대일 것이다.


덧_ 이 글에서는 고의적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다시 읽어보니 약간 불쾌감도 오지만, '나는'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간의 법 개정  (0) 2007/04/20
성, 연애, 사랑의 경험 중심주의  (0) 2007/04/13
'대학'이라는 공간  (0) 2007/04/06
작가-되기  (0) 2007/04/04
지식인과 활동가  (0) 2007/02/12
Posted by 소이연
TAG 공간, 대학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2.0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