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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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2010/09/13 20:48
여기까지만 하고, 잠시 단행본 1권 발제가 끝날 때 까지 잠시 휴업 ㅠㅠ

Rey Chow, Ethics after Idealism―Theory-Culture-Ethnicity-Reading, Indiana Univ Press, 1998, pp.XIII~XVI

Introduction

대학원생이었던 이래로, 나는 비판이론에 열린 태도를 지닌 학과와 과정에 속해있었다. 이러한 사실의 이점이 있다면,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이론에 대한 저항”을 하면서 보는 눈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론”의 폭넓은 역사적 함의를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론”이라고 말할 때, 나는 지금도 대학원생들이 배우고 있는 플라톤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던 철학 그리고 해석학, 문예비평 및 해석의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나는 1960년대 이래로 영미권 학계를 급진적으로 만들어온 해석 방식을 대표하는, 일반적으로 “후기구조주의”나 “해체”라고 불리는 용어를 의미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러한 용어들에 특정한 뉘앙스나 정확한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지난 몇 십 년간의 지적작업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던 방식으로 축약해서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에서 이해되는 “이론”의 명백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지시성(referentiality)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화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1916)>에서 언어학적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를 상대화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의 전통을 따르면서 고정된 기원을 유보하고 불안정하게 만들어왔던 이러한 일반적인 추세는, 부분적으로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추세는 “실재”(언어, 텍스트, 이야기, 저자, 자아, 정체성, 커뮤니티 등 무엇으로 실재를 정의하든 상관없이)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내파했던 작업을 관통하며, 이 작업은 최근에도 여러 방식의 보편주의적 비평(젠더, 인종, 계급, 성적 선호 등등에 대한 탐구를 거쳐)으로부터 많은 반향을 얻었다. 지시성을 의미작용과 의미 사이의 투명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혹은 조금 더 잘 정의하자면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끈질기게 [투명한] 반영성(reflectionism)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지시성 문제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문제시되거나 중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는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증적인 것(the positivistic)의 뼈아픈 고역으로 채워진 이론적 거부반응으로서, 지시성은 대신 “문화연구”라 불리는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최근 들어 지식인 간의 논쟁에서 팽배한 “문화”라는 개념의 두 가지 유형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념은 인류학에서 유래했는데, 일반적으로 “생활세계” 혹은 “삶의 방식”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문명화된” 삶의 세련된 성취의 총합으로서 더 엄밀하게 정의되는데, 이는 주로 문예이론, 예술이론, 클래식 음악 등 이른바 “고급문화”를 구성하는 것과 흔히 연결된다. “문화” 개념의 첫 번째 정의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이 관점은 문화를 공통의 신념, 태도,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며, 또 모든 집단의 인류에게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 정의는, 자주 지적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적이고 배타적이며, 그 자체로 특정한 계급이해관계의 헤게모니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각각 다른 종류의 문화정치학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를 옮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이들이 “문화”를 소유한다고 간주하여 잠재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개념은, 모든 문화가 엄격하게 “특수성”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문화적 관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거꾸로 문화가 “고급문화”라는 개념은 엘리트주의적일 수는 있지만,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세련된 성취”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하여 “문화”는 역설적으로 지역적이라기보다는 비교 문화적 현상으로서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개념은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문화연구의 추진력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추진력은 “문화”를 미완성의 과정이자 끝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사회관계의 별자리―절대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라고 보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몇몇 비평가들은 문화연구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이기에 진지한 지적 관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는 연구대상에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문화 자체의 미완성적인 특성과 정확하게 관련된다. 끝없이 열린 역사를 “지금”이라는 말보다 더 잘 상징하는 시간의 순간이 있는가? 또 끝없이 열린 평가에 대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넘겨진 것들보다 더 잘 드러내는 대상이 있는가? 문화의 미완성이라는 특성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이거나 존재론적인 의미작용의 “모호성”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성은 국제 노동 분업에 내재한 엄청난 불평등의 지속적인 효과 때문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재현과 정치적 권력에 대한 접근의 문제, 또 문화자본의 소유와 교환 그리고 강화의 문제에도 내재해 있다. 탈식민주의 시대와 탈냉전 시대는, 부분적으로 후기구조주의의 유산에서 유래했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탐구를 사회주의적 가치의 외관에 천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취해야 하는 정치적 행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도 소실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해왔다.

그렇다면 문화연구는 문화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이해하면서, 기호의 해체와 함께 출발한 문화상대주의의 단순한 연속이고 확장에 지나지 않을까? 문화연구와 비판이론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고급문화” 대 “생활세계”라는 문화의 공식화를 따른다면, 최근 몇 십 년간 학계의 실천은 두 개의 학풍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문학(인문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언어의 주체로 간주하는)”과 “인류학(사회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문화적 환경의 대상이자 생산물로 간주하는)”으로 부르자. 또 최근에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 사이에 유사한 분화가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러한 최근의 분화는 내가 뒤에 자세히 설명할 측면에서 볼 때, 문화에 대한 연구의 잠재적인 인종주의화를 의미한다.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자. “비판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를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연구가 “이론적 엄격함”을 결여했다는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강력한 이유는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문화”를 물화(reify)한다는 것이다. 즉 문화연구는 문화를 유기적인 총체로 간주하면서, 오랜 전통의 연속주의적(continuist) 사유에 속해있는 역사주의와 경험주의, 실증주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다른 두 “가치체계(regimes of value)”, 즉 이론적으로 늘 깨어있음을 상징하는 한 쪽 체계와 문화적 물화(reification)를 상징하는 다른 한 쪽 체계의 통약불가능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만약 이론을 뺀 문화에 대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면, 문화를 뺀 이론에 대한 표현은 가능할까? 나는 “문화”가 무엇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은 언제나 문화연구에 대한 “이론적” 거부라는 측면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 작업이 “너무 이론적”이라고 비판받아온 이론가들이 영리하게 반박했던 것을 빌자면, “이론”에 대해서 가장 잔인한 비평가라 할지라도 이미 언제나 특정한 이론적 위치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말하는 비평가들 역시도 특정한 문화적 위치에서, 또 특정한 문화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문화는 “비판연구”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특정한 형식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이는 영미권이나 불어, 독어권의 정전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나는 그러한 특정 형식이 무엇인지 곧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오로지 비판이론에만 헌신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흔히 문화적 추상화의 정반대로 간주된다.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상스러운 것과 단순한 것들의 쓰레기장이자, 투명하고 이해가능하며 접근도 쉽게 가능한 현상들의 하수처리장이다. 게다가 문화연구의 대상이 자주 유색인종에 연관된다는 사실 때문에, 문화연구는 “우리”라기보다는 “그들”과 동일시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비판이론”이 사용될 때에도 연구주제가 비서구와 관련되거나 이론이 비서구의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면, 연구는 자동적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문화연구”의 자리로 “추락”하게 된다.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위계적 분화의 조건 위에 있기 때문에, “지시성”을 문제화했음에도 지시성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지시성”이 “문화”에 대한 연구로 추방당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의미적 투명성을 가졌으며 따라서 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현상이 내가 언급한 방식처럼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비판이론”으로 가는 노동력과 “문화이론”으로 가는 노동력을 구별하는 계급차이(class distinction)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은 사회계층의 전통적인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 프로우(John Frow)가 지식의 소유와 사용의 관점에서 기술했던 용법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우에 따르자면 지식인들은 곧 “지식 계급”이다. 지식의 습득을 통해, 특정한 사회화 과정이 시작된다. 예컨대 특정한 스타일로 쓰는 것이나 특정한 텍스트의 세부사항에 주목하는 것, 특정한 유형의 매력적인 문학적 비유를 찾는 것은 어떤 습관을 수양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또한 이는 전문적 공동체의 특정한 영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격증을 발급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식”계급에 대한 프로우의 개념에 더해 지식계급 자체에 계급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차이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의 관계에서 논쟁을 유발해왔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비판연구자들만큼이나 주의 깊게 읽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학계의 낮은 계급지층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이다. “문화자본”은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비판이론”에 유창한 상위계급의 감각과 실천, 습관의 문제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노동 종류의 분화 또 백인 문화와 비백인 문화 사이의 분화를 중첩시킬 때, “지식계급”에 내재한 계급차이의 공식화는 급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요컨대 비판이론과 문화계급의 분화는 지식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인종주의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종주의화는 귀족정치라는 결과와 “지식”의 생산과 배포의 관점에서 종속적인 계급을 낳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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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10 17:32
어쩐지 트위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 같아서는 쓸말도 없고, 타임라인에서 읽을 말도 없다. 현직 작가들이나 뮤지션들을 많이 팔로잉 했는데, 그들이 구름 위에서 노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는 왠지 시시해졌다. 몰랐던 바가 아니지만, 실망했던 것 보면 나름 어떤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난 자기의 문제(상처, 사랑하는 방법, 기억 등등)를 작품화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윤리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타인의 문제를(혹은 자기 문제라도 보편으로서 설득할 수 있는) 소설과 시와 노래로 쓰는 사람을 알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문 것 같다. 결여와 결핍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조건이니까 조금은 다른 가능성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어차피 휴대전화를 바꾸면서 요금제가 달라져 휴대폰으로 트위터에 접속할 수도 없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마음으로 트위터와 얼마 간 절연해 보기로 했다.

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가입했던 주택 청약 통장은, 매달 10일이면 꼬박꼬박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 간다. 당분간 수입이 없을 나로서는 너무 큰 부담이기 때문에, 이걸 해지하지는 않더라도 매달 인출 금액을 최소 한도로 맞춰놓고 싶었다. 부모님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왜 그러냐며 반대하신다. 나는 수입이 없는 대학원생이라고, 어차피 난 부유하게 못 살 것이고 그러므로 내 인생에서 집을 구입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얘기했더니, 문자 그대로 펄쩍 뛰면서 그런 소리 말라신다. (그런데 어쩌나, 정말 그럴 것 같은데) 집을 구입하기 위해선 누구나 무리하는 거라고, 누구나 빚을 내면서까지 사는 거라고 설득한다. 대출금 원금과 이자로 뭉텅뭉텅 통장이 잘려 나가고, 행여나 잔금이 모자랄라치면 밤낮 걱정하면서, 다른 데도 아니고 은행에 저당잡힌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얘기까진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서울에 가는 버스 안에서 <1박 2일>을 봤다. 내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예능인데,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프로그램의 감수성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착한 도덕주의 프로그램은 독도에 찾아가서 경비대원들에게 자장면을 만들어줬다. 경비대원들은 계급 순으로 줄을 서서 자장면을 받아야 했고, 결과적으로 수경과 상경 계급은 일찍 다 자장면을 먹었지만, 일경이나 이경 계급은 군침을 삼키며 노심초사 자장면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카메라는 그걸 매우 재밌는 일인양 담았다. 계급 사회에서 이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그리고 이런 게 참 재미있지 않냐는 듯. 나라면 씨팔, 이딴 자장면 안처먹고 말아, 라고 했을 법한 (나로서는) 모욕스러운 장면이었다. 한국의 계급(남성)사회에서 하급자에 대한 인격적 모욕은 이렇게 재미있는 것, 추억이 될만한 것으로 정당화 된다. 하급자도 상급자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언어폭력이나 구타가 많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서점에서 뒤적인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인데, 프루스트는 지인들로부터 최고의 친구(사교적이고 사려깊고 친근한 느낌을 주고 쿨한 직업을 가졌고 게다가 유명하기까지 한)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우정에 대한 회의를 표현하고 피플들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시간을 꿈꾸곤 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소설가인지 나로서는 읽지 못했으므로 사실 알지 못하지만(물론 그는 정전(canon)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이다), 당대 사교계의 톱스타급 '지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체스터톤은 어디선가 "교육을 찬양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교육에 대해 얼마간 경멸하지 않고서는 누구의 교육도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프루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정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의 생로병사를 경험하고, 그것의 허망함에 대해 아는 사람만이, 그것에 대해 진정으로 깨닫고 있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야만 대상을 관조할 수 있는 '거리'가 생기고, 그 때 우리는 그것의 완성을 본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대문 사진 밑에 보면 작은 글씨로 'history'라고 쓰인 게 있는데, 그걸 누르면 여태까지 썼던 대문 사진과 글이 모두 나온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다이어리야 폴더 비공개로 돌리면 간단한 문제지만, 이건 대책이 없어서 죄다 지워버렸다. 더 어릴 적엔 왜 그렇게 싸이월드에 집착했었는지, 한 페이지에 5개 히스토리가 나오는데 이 페이지가 총합 250여 페이지였다. 모두 수동으로 지워야 했으니까 나는 클릭과 스페이스를 최소 1250회 이상 누른 것이다. 왜 지웠냐고? 너무 '쪽팔려서'. 왜 쪽팔리냐면, 그때의 기억들과 행동과 감정들이 모두 그때엔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 지난 진정성만큼 창피한 것도 없다. 짝/사랑의 기억,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온갖 고민들, 배신감, 정체감, 공허감, 허세(니체나 체 게바라를 들먹이는), 유치함 따위가 뒤섞인 싸이월드 히스토리를 보는 건 창피한 걸 넘어 정말 미칠 것 같은 일이다. 결국 30분 걸려서 다 지웠다. 대단해.

요즘엔 레이 초우의 글을 자주 읽고 있다. 그의 글이 매력적인 이유는 섣부른 보편주의도 아니고 맹목적인 특수주의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로만 보편주의/특수주의라는 쌍둥이 이분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야 많지만, 레이 초우만큼 이 이분법 너머에서 사유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문화연구라는 매력적인 이론적 도구의 이상적 조합을 보는 것 같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비평가들도 대개 내가 좋아하는 비평가들이다. 당분간은 계속 읽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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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9/30 12:52

예전부터 시작된 '계급'에 대한 고민들이 흐름을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휘날리다가 결국 생각을 놓고 있었는데, 본가로 돌아와 예전에 뽑아둔 논문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리타 펠스키의 글을 발견했다. 리타 펠스키의 논문을 한 5개 정도 뽑아두었는데, 예전에 세미나 때 읽었던 『근대성과 페미니즘』에서 느껴졌던 엄청난 매력 덕분인지 이 논문들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시간도 많은데다가 시간이 잘 가질 않아서 하나만 살짜쿵 번역해 봤음. 에이포로 빽빽하게 2장 반 정도 되는 양이라 그닥 많지도 않았다(근데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쿨럭).

어쨌건 정말이지 한국에서는 '중산층'이라는 말이 오용(catachresis)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중산층이라는 말이 정말이지 도통 뭔지 모르겠다. 심지어 2mb은 실소득 8800만원에 연수입 1억 2천 이상인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규정했다나(그리고 이게 '글로벌 스탠다드'라던가)? 물론 내가 '계급', '계층', '계급 의식'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지만ㅡ이건 순전히 내 탓만은 아니고, 학내에서 이런 단어들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내게 신뢰를 주지 않았기 때문... -_- 쿨럭ㅡ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특정한 단어들에 지나치게 많은 견해들과 때로는 오해들이 쌓여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물론 어떤 점에서 보면 이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 사이에서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징적 전투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일반적 용법'이라는 식으로 이 단어를 정의 내리는게 위험할 수밖에 없는(왜냐하면 그러한 정의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지적하듯 특정한 누군가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권력 관계 네트워크 내부에서 위협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의 강력한 담론적 무기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것이기도 하고... 에라 몰라.

어떤 블로그들에서 '중산층' (내지는 '중간 계급')에 누구를 포함할 것이고, 누가 이 집단에 포함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들의 논쟁은 분명 일면 타당하지만, 너무나 국지적이란 생각이다. 예컨대 '강남' 사람들이 모든 논의의 중심이 된다든지 하는. 그것 가지고 중산층 내지는 중간 계급 운운하는 것은 약간 오버란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대다수의 담론적 논의와 투쟁들은 오직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거기에 계급적 문제나 계층적 문제가 끼어들게 되면, 이상하게 늘 강남이 언급되고는 한다. 물론 강남은 아주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논의의 중심에 있기 쉽지만, 이러한 논쟁의 구도는 언제나 협소할 뿐 아니라, 이 구도 자체가 오히려 다른 수많은 갈등들을 감추는데 사용되는 덮개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적어도 강남 대 강북의 대립 구도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그닥 아는 바도 없고 담론의 구체적 지형들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므로 그냥 의심만 할 뿐이다. (무책임 흐흐)

어쨌든 "middle class"는 흔히 번역하듯 '중산층'으로 하지 않고 '중간 계급'으로 통일했음.


Rita Felski. "Why Academics Don't Study the Lower Middle Class."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Vol. 48). 2002.

우리는 계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미국에 있는 모든이들이 중간 계급이라는 공통된 믿음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큰 소득 불균형을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투쟁에 관한 맑시스트들의 모델은 여전히 어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얻고 있지만, 사람들(people)이 어떻게 계급을 경험하며 계급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계급 정체성과 그 [정체성들의] 관계들은 그리 깔끔하게 분리될 수 없다. 품위 있는 사람들(people of modest)라는 말은 상위 중간 계급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열망을 의미한다. 부유한 전문직들은 토스카나 농부들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고결함을 느낀다. 백만장자들은 월마트(Wal-Mart)에서 쇼핑한다. 매우 가난한 잉여 인간들(poverty-stricken adjuncts) 은 교육과 학식이 넘쳐난다. 모든 사람들은 갭(Gap)에서 쇼핑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계급에 대한 기호(sign)들이 어떻게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뒤섞여 있는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자 리처드 세네트(Richard Sennett)와 조너던 콥(Jonathan Cobb)이 한 때 "계급의 숨겨진 상처(hidden injuries of class)"라고 불렀던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나처럼 영국을 떠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계급에 대한 미국의 언어는 특히 판독해 내기가 어렵다.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 연구실에 들렀던 학생이 자신은 중간 계급적 배경에서 자랐다고 언급한적이 있다. 계급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자라난 나는 그 학생의 말을 그 학생의 부모가 상류 부르주아지의 구성원이며, 그 부모의 임금 노예들이 공장 바닥에서 구르는 동안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빈둥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실 그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중간 계급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품위있는 배경에서 왔다는 점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학생이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평범함을 강조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 학생이 자신의 특권을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계급에 대한 새로운 언어들을 배워야한다고 느꼈다. 이는 단지 "휘발유(petrol)"을 "가솔린(gas)"으로, "눈깔사탕(boiled sweet)"을 "하드 캔디(hard candy)"로 기억하는 식으로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문제가 아니다. 대신,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은 단어들이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간 계급"이라는 말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은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평균적인 노동자나 그 가족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또한 그 범주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빌 게이츠(Bill Gates)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중간 계급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어느 정도 성공해 왔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부유한 사람은 그들 자신이 특별한 특권을 갖지 못했다고 믿는다. "중간 계급"은 미국의 일상에서는 이상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성공과 겸손함을, 성취와 평범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무한히 융통적이다.

나는 한 저널리스트가 하위 중간 계급에 관한 나의 책ㅡ그가 사실은 읽지 않았다고 고백했던(그는 반만 맞았다. 나는 그러한 책을 쓴 적이 없다)ㅡ에 대해서 토론하고자 전화했을 때 그러한 융통성이 존재한다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왜 하위 중간 계급은 시장 경영자 뿐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무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가 같은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점차 알게 되었다. 인터뷰어에게 지금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하위 중간 계급"이라는 말을 "근로 빈곤층(워킹 푸어; working poor)"라는 의미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나는 허를 찔렸다. 나는 노동 계급과 하위 중간 계급의 차이점을 물었다. 그는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지만, "노동 계급"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했다.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w"로 시작하는 용어("w" term)에 대한 비슷한 저항을 볼 수 있었다. 젠더와 계급문제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으며 반본질주의적인 페미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 혼종성 등의 최신 이론에 대해서는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학생들이, 가장 기본적인 계급 범주를 만나면 버둥거리고 말을 더듬는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최근에 있었던 세미나에서 노동 계급의 삶을 기술하는 19세기의 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들에 대해서 토론했다. 나의 학생들은 "노동 계급"이라는 말을 거의 발음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술은 그 두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용어에 친숙하지 않은가? 아니면 그들은 그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가득차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때때로 그들은 "노동 계급"이라는 말을 "중간 계급"이라고 단순히 바꿔놓기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었던 시기의 맥락에서는 그러한 대체 용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면 그들이 적절한 용어를 궁리하다가 마침내 "하위 계급"이라는 말에 도달하게 되는 숨돌릴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귀에는 하위 계급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만 한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질겁하게 된다.

몇몇 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미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중간 계급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동시에, 나는 학계에서 계급 분석으로 지나가는 많은 것들이 너무 진부하며 상상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문학 연구와 문화 연구 분야에서는 계급의 문제로 돌아갈 필요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최근에 인종과 젠더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계급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취급이 되더라도 오직 이름 뿐이고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취급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경제적 자원, 부의 분배, 계급 특권, 그리고 계급적 박탈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재촉당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논쟁들에서, 계급이라는 말이 자주 노동 계급을 의미하며, 그 노동 계급만이 진지하게 고려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점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한 줌의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그 누구도 중간 계급 자체에 내재해 있는 완전히 다른 경험, 태도, 그리고 경제적 자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중간 계급은 아주 모호한 방식으로 엘리티즘, 사치, 그리고 특권을 대표하는 것으로 가정될 뿐이다. 만약 미국의 미디어들이 모든 사람들이 다 중간 계급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계급적 차이를 지워버리려고 한다면, 좌익(left-wing) 학계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지의 장화에서 짓밟히고 있는 영웅적인 노동자의 이미지를 상상함으로써 계급적 차이를 과장한다. 그러한 상상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계급 차별을 어떻게 살아나가며 느끼며 숨쉬고 있는지에 대한 많은 차이들과 뉘앙스들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들을 얻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최근에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는 많은 이유로 내게 흥미를 준 주제였다. 첫째로, 이 계급은 지식인들이 혐오하기를 좋아하는 계급이며, 또한 나쁜 취향(bad taste)로부터 히틀러의 등장에 이르는 모든 것들의 책임이 있다고 책망받는 계급이다. 보수주의자로부터는 상스럽고 몰락했다며 비웃음당하고 진보주의자로부터는 완고하고 반동적이라고 공격당하면서, 하위 중간 계급은 그 어떤 올바른 것도 행할 수 없다. 나는 근대적 사유의 역사에서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강하고 지속적인 적의가 있었다는 점을 곧 알아차렸다. 그러한 적의는 쁘띠 부르주아지들이 역사의 바퀴를 되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라고 불평했던 맑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엇(Eliot), 울프(Woolf), 그리고 포스터(Foster) 같은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듯 교외에 사는 판매원들과 여점원에 대해 능글능글하게 비웃는 참고문헌에 이르기까지, 내가 대학원에 있을 때 "쁘띠 부르주아지"라는 말이 궁극적인 혹평으로 늘 사용되었던 것에 이르기까지 온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나는 궁금했다. 왜 지식인들은 그렇게까지 하위 중간 계급을 혐오하는가?

두 번째 이유는, 고백하건대 나는 하위 중간 계급 출신이라는 점이다. 대학의 교수로서 상위 중간 계급적인 라이프스타일으로 바뀌는 동안 나는 때때로 나는 이상한 행성에 착륙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중간 계급 내부에 있는 문화, 태도, 그렇다, 그리고 돈의 막대한 차이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엘리트 대학에 있는 교수진들의 계급 문화는, 내가 학생 때 있었던ㅡ때때로 별나고 괴벽스럽거나 장학금을 받는 남학생(아아, 슬프게도, 더욱 드물게는 장학금을 받는 여학생)의 자리를 남겨 두었던ㅡ캠브리지보다도 훨씬 동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아마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계급 출신을 감추거나 과거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고르게 섞이는 데 훨씬 더 능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하위 중간 계급과 상위 중간 계급 사이의 긴장, 적의, 그리고 오해들에 대해서 심사숙고하는데 관심을 점점 더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하위 중간 계급이 딱 잘라지는 범주는 아니다. 이 계급은 무엇을 포함하는가? 상점의 주인? 은행원? 회사원? 비서진? 기술자들? 교사들? 서로 다른 사람들은 사로 다르게 경계를 그리곤 한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자주 숙련되거나 반숙련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으로 정의되는 하위 중간 계급이 미국의 일상에서 가장 큰 계급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중간 계급으로 정의한다/된다. 하지만 그들은 전문 관리직이라고 자주 불리는 의사, 변호사, 상위 관리자에 비하면 더 적은 돈과 교육과 지위를 갖는다.

1960년대에 내가 영국에서 자라날 때, 이웃사촌중에 누가 하위 중간 계급인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관습적인 예의, 노력, 청결함, 그리고 괴벽스럽거나 아방가르드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심의 분위기를 풍기는 품위 있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하위 중간 계급의 문화는 과거 그것이 사용되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더 결착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하위 중간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사이에 낀(in-between) 그 자신의 지위이다. 하위 중간 계급의 구성원들은 그들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하고 일하고 있듯, 그들 자신을 노동 계급 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하지만 사회적 사다리의 높은 곳에서 하위 중간 계급이 문화와 지적 교양이 부족하다며 깔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열망은 자주 비웃음 당하곤 한다.

나는 최근에 내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나의 논문에 대한 매력적인 응답들을 받았다. 분명히, 그 논문은 신경을 건드렸다. 하위 중간 계급적 배경 출신의 학자들은, 그들의 동료뿐 아니라 학생들까지 그들 자신들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썼다.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 그리고 비싼 레스토랑과 외국 여행에 대한 일상적인 직장에서의 대화에 낄 수 없는 자신들에 대한 부끄러움에 대해서 썼다. 그들은 그들의 어색함과 혼란에 대한 여러 감각들을 감명깊게 이야기했다. 모든 종류의 역기능에 대한 공적인 폭로를 과시하는 나라에서 최후의 금기는 자신이 충분한 돈을 갖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계급에 대한 공적 언어의 부족은, 특정한 삶과 경험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 것이다.

나는 하위 중간 계급은 결코 매력적인 정체성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인문학에서는 전복과 위반의 언어가 대유행이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경계로 밀려난 사람들과 줄을 맞추어 행진할 것을 원하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법외 추방자(outlaw)와 아웃 사이더, 그리고 억압당하는 사람들로부터 비춰지는 빛을 쬐고 싶어하는 것처럼. 하위 중간 계급은 너무 주류적이며 점잖고, 그들의 가치는 너무 세속적이다. 하위 중간 계급의 대부분은 체계를 전복하기보다는 물위로 간당간당하게 올라와 있는 그들의 머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걱정할 뿐이다. 하지만 하위 중간 계급은 평범한 개인들의 신념, 가치, 그리고 경험을 이해하는 데 아주 핵심적이다. 이 계급은 현대 미국에서 어떻게 계급이 생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8/03 17:34

나에게 계급이란 무엇일까? 인종, 성, 장애 등등, 소위 '사회적'인 분류를 위한 범주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까?

벨 ㅎ스의 새 책, <벨 훅ㅅ: 계급에 대해 말ㅎ지 않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슬펐다.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데,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벨 훅ㅅ가 어렸을 때와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 그리고 자신이 성장한 집 주변에 있는 여대에 진학 했다가 겪었던 온갖 계급-인종 차별들, 좀 더 인종적으로나 계급적으로 평등함을 지향한다고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에 진학했을 때에 겪었던 모든 계급성들...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현실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살아 나가기에 한국도 엄청나게 끔찍한 공간이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전혀 없었던 셈.


그렇다면 나의 계급은 어떨까? 나도 완전 잘사는 집안의 아이는 못된다. 아빠는 한 시골에서는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행정 관료이고, 엄마는 읍내의 한 병원에서 사무일을 본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는 3명의 자식이 있고, 첫째와 둘째는 이름만 대면 많이들 아는 대학에 다니고 있고 셋째는 집에서 2시간 거리인 다른 도시에서 유학중인 고등학생이다. 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빠듯하기는 하지만 내 부모님은 다 대주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매달 34만원의 방세와 6만원 가량의 핸드폰 비, 그리고 10여만원 정도의 용돈 보조를 해주고 있다. 나도 40만원의 과외 수입을 갖고 있으며 이걸로 그냥 한달은 그럭저럭 살아간다. 놀 것도 다 놀고 살 것도 대충은 다 사면서. 약소하지만 1만원의 후원금도 내고 있고.

어쨌든 나는 무리 없이 학교를 졸업했다. 학비를 마련하거나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쿨하게', 그리고 내 하고 싶은 짓 다하면서 졸업을 앞두고 있다. 교지에서 5학기를 보냈고 다른 단체나 학회 등에서도 시간을 많이 보냈다. 이렇게 '운동권 경계인'의 감수성으로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 소속 과의 수업들을 경멸하면서, 그리고 많은 타인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고 증오하면서, 그러면서도 나와 어딘가 비슷한 이들과는 잘 어울리면서 4년 반을 보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과정에서 계급은 굉장한 역할을 했다. 아이들을 만나는 과정들을 쭉 돌이켜보면, 나는 나와 비슷한 아이들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아이들과는 거리를 뒀고, 대부분 지방에서 유학을 온 아이들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교수 등의 전문직인 아이들이라기 보다는, 대개 행정 관료나 선생님 내지는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는) 노동계급의 아이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가난해 보이거나, 너무 부자처럼 보이는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일은 굉장히 어려웠다. (물론 '보이는'게 문제 였다. 실제로 그 아이가 어떤 계급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아마 계급은 나에게 '환상'의 영역이었던 것 같다. 계급성, 계급투쟁의 대의, 이 모든 것에 동의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가끔은 계급이 어떻고 저떻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 '남의 일'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는 점을 느끼게 되면, 나는 아마 입에 똥을 물고 끔찍한 말들을 내뱉으며 경멸하고 거리를 뒀을지 모를 일이다. 가난은 그저 끔찍하거나 아니면 아름답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했다. 물론 그것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다른 어휘일 뿐이다. '아름다운 가난'이나 '끔찍한 가난'이나, 둘다 계급이나 가난을 타자화하는 말인 점에서는 완전히 똑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다니는(이제 곧 졸업이군) 대학은 계급이 높은 학생들이 주로 다닐 것으로 생각되는 학교이다. 단지 경제 자본 뿐 아니라, 문화 자본까지도 두루 갖춘 부모들을 둔 학생들이 실제로 굉장히 많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옷과 신체와 행동거지와 사고 방식 모든 것에 반영되어 있다. 촌스러움과 세련됨 사이에서 많은 아이들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젖어 있어서 '자연스러운' 세련됨을 풍기는 아이들과, 이제서야 세련됨을 학습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거리감과 요원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노력이 없으면 이 거리는 좁힐 수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마저 계급을 따라가곤 했다. 그것도 세련됨의 일종이었으니까, 잘 나가는 아이들은 너그러운 휴머니스트로서 정치적인 올바름까지도 쉬이 가질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비싼 옷과 가방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공정 무역, 가난한 사람들, 환경 오염에 대해 운운하는 모습에 심한 불편함이나 때론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그건 단지 불편함이나 역겨움일 뿐이었다. 그것을 말할 사람도 별로 없었으니까.

나는 그런 점들을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굳이 의식하거나 표현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은 잘 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도 계급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 장애, 환경, 인종 등등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계급은 껄끄러운 주제였다. 자기가 '현재' 돈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왜' 돈이 없는가, 즉 자기의 계급 내지는 자기 부모의 계급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 모두는 이 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일종의 규범 내지는 규칙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는거. 계급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열등감 이런거, 잘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고, 내가 다니는 이 학교는 이 사회의 '중심부'에 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네가 잘나서 잘하면 되는거지 왜 남 탓을 하느냐, 너도 잘나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 너도 이제 계급 상승을 하고 있는거 아니냐 하는 암묵적인 이야기들이 모든 구성원들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암묵적인 이야기'라는 말은, 설령 자기 스스로는 계급 시스템의 모순 등을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음에도, 정작 자기 문제가 되면 자기 탓 내지는 개인 탓으로 돌리기 쉽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때로는 이 사회의 계급성이나 가난을 목격했을 때 '슬퍼할' 줄도 알아도, 그건 결국 1시간 지나면 잊어 버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나'의 계급성은 결국 '나' 스스로 열심히 극복해야 한다. 그걸 다른 사회적 범주와 차별 탓으로 하는 건 안된다. 학벌도 갖췄는데 뭐가 문제랴. 하는 생각들.


학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성장한 지역을 보면 이 계급 문제는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나는 완전 변두리인 시골에서 자랐고, 그 지역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아이들 중에 잘 사는 아이들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많은 경우 내가 자란 고향에서 머물고 있으며, 부모님의 계급이나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다.

부모님이 종종 하는 말 중에 "대학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됐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야 이 말을 실감한다. 나는 계급 이동에 이미 가까이 다가왔으며, 설령 앞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을지라도 나의 학벌 자원이나 문화 자본 등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일종의 계급 보증서로서 나의 계급 이동을 철저히 보증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모르겠다. 그냥 끔찍하고 슬프고 그렇다.

벨 훅ㅅ의 책의 원제인 "where we stand: class matters" 마냥,
"나(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

정말 중요한 주젠데 나는 너무나 부분적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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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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