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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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2008/09/05 17:03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78-183의 초벌 번역 (진행중)


미궁 속으로, 더 깊게

레비-스트로스가 쓴 "가족(The Family)"이라는 에세이에서 우리는 더 많은 개념들을 추출해 볼 수 있다. 그는 그 에세이에서 친족 분석에 관한 다른 고찰들을 소개한다. 그는『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성적 결합의 규칙들과 체계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한편 "가족"에서는 결혼 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들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노동의 성적 분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친족 체계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사람(people)"들이 요구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비록 모든 사회들이 성을 통해서 과업들을 분담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한 과업을 한 성이나 다른 성에게 부과하는 방법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농업은 어떤 집단에서는 여성의 일이지만 또 다른 집단에서는 남성의 일이다. 어떤 사회에서 여성들은 무거운 짐을 운반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운반한다. 심지어 여성 사냥꾼이나 여성 전사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으며, 또한 아이를 돌보는 일을 수행하는 남성들의 사례도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성에 의한 노동 분업에 대한 조사로부터, 노동 분업은 생물학적으로 특화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가 주장하기로, 이러한 목적은, 최소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을 포함하는 실행 가능한 최소한의 경제 단위를 만듦으로써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연구를 위해서 선택된 사회들을 통해 보건대 [노동의 성적 분업이] 끝없이 다양하다는 그 사실은, . . . 최소한 자연적 필요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노동의 성적 분업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요구된다는 사실, 그리고 완전히 엉뚱하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 . . 노동의 성적 분업은 성별 사이에 존재하는 호혜적인 의존적 상태를 [제도적으로] 설립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 1971:347-48)

따라서 성에 의한 노동의 분업은 "금기"로 보일 수 있다. 즉, 남성과 여성의 같음을 막는 금기, 성들을 상호적이지만 완전히 배타적인 두개의 범주로 나누는 금기, 성들 사이의 생물학적인 차이점들을 심화시킴으로써 마침내 젠더를 창조하는 금기 말이다. 또한 노동의 분업은 최소한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을 포함함으로써 이성애적 결혼을 강요하는 성적 결합을 넘어서는 다른 성적 결합들을 막는 금기일 수 있다.

"가족"은, 섹슈얼리티의 그 어떠한 측면도 지레 "자연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성적 결합에 대한 급진적인(근본적인) 질문들을 보여준다(1960년에 헤르츠(Hertz)는 왼손잡이에 대한 모욕에 대해 전적으로 문화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비슷한 논점을 구축했다). 오히려 섹스와 젠더의 명백한 형태들은 사회 체제의 강제적인 원칙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한 관점으로부터 『친족의 기본구조』또한 특정한 전제 조건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순전히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떤 결혼들을 금지하고 다른 결혼을 할 것을 명령하는 규칙들은, 결혼할 것을 명령하는 다른 규칙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결혼은 결혼할 개인들을 전제한다.이러한 종류의 연역적인 기획을 레비-스트로스가 했던 것보다 더 끌고 나가는 것, 그리고 그의 전체적인 친족 분석에 깔려 있는 논리적인 구조를 해석해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층위에서, 성의 사회적 조직은 젠더, 강제적 이성애, 그리고 여성 섹슈얼리티의 제약 위에 기초한다.

젠더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성의 분업이다. 또한 젠더는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친족 체계는 결혼에 기초한다. 그렇기에 친족 체계는 남성(male)과 여성(female)을 "남자(men)"와 "여자(women)"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그 남자와 여자는 불완전한 반쪽으로서, 다른 쪽과 결합했을 때에만 완결성을 찾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남과 밤, 땅과 하늘, 음과 양, 삶과 죽음만큼 다르지는 않다. 사실 자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남자와 여자는 굉장히 가까우며 다른 자연적인 존재들에 비했을 때도 그렇다. 예컨대 산과 캥거루와 코코 야자나무를 생각해보라. 남자와 여자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비교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서로 다르다는 생각은, 자연이 아닌 그 어딘가로부터 오는 생각이다. 게다가, 비록 남성과 여성들 사이에서 다양한 특질들이 평균적으로 차이 날 수 있다지만, 그러한 다양한 특질의 범위는 상당히 겹치는 측면들을 보여준다. 예컨대, 비록 평균적으로는 남자들이 여성들보다 키가 크지만, 언제나 어떤 여성들은 어떤 남성들보다 키가 클 수 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두개의 상호적이지만 배타적인 범주라는 생각은, 단지 존재하지도 않는 "자연적인" 대립항이라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로부터 비롯된다. 단지 자연적인 차이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배타적인 젠더 정체성은 자연적인 유사성에 대한 억압이다. 이는 심리적인 억압(repression)을 요구한다. 남성에게는 "여성적인" 특질의 지역적인(local) 버전이라면 그 무엇이든 억압되며, 여성에게 있어서는 "남성적인" 특질의 지역적인 정의(definition)라면 그 무엇이든 억압된다. 그 교환 관계에 있어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체계는, 개인의 성격들을 엄격한 구획(division)으로 강제로 밀어 넣으면서 모든 이들을 억압한다.

게다가 개인들이 생겨난 다음에야 결혼이 보장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성애가 제도화된 과정이라고 말할 뻔 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만약 생물학적이고 호르몬에 의한 강제적인 원칙들이 항간의 신화(popular mythology)가 가진 강제적인 원칙들 만큼이나 불가항력적이라면, 경제적인 상호의존성에 의해 이성애적 결합을 보증하는 것은 거의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근친상간 금기는 동성애에 대한 금기를 전제한다. 몇몇 이성애적 결합에 대한 금지는 -이성애적인 결합에 대한 금기를 취한다. 젠더는 한 성의 정체성인 것만은 아니다. 젠더는 다른 성을 직접 향하고 있는 성적 욕망을 포함한다. 노동의 성적 분업은 젠더의 양쪽 측면 모두에 포함되어 있다. 이 분업은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며, 그들에게 이성애를 창조해 준다. 따라서 인간 섹슈얼리티의 동성애의 구성요소에 대한 억압과, 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로서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은, 여성을 억압하는 규칙과 관계를 가진 동일한 체계의 산물이다.

사실 우리의 상황은, 우리가 일반적인 수준에서 특정한 성적 체계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갈 때에는 명백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친족 체계는 이성애를 단지 동성애에 손상을 주는 [섹슈얼리티]로 강제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아마도 이성애의 특정한 형식들이 요구될 것이다. 예컨대, 몇몇 결혼 체계들은 강제적인 교차-사촌 혼의 규칙을 갖고 있다. 그러한 체계에 있는 사람은 이성애적일 뿐 아니라 "교차-사촌-애(cross-cousin-sexual)"적이다. 만약 그 결혼의 체계가 더 나아가 모계적인 교차-사촌 혼을 특화시킨다면, 남자는 "어머니의-남동생의-딸-애(mother's-brother's-daughter-sexual)"적일 것이며 남자는 "아버지의-여동생의-아들-애(father's-sister's-son-sexual)"적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친족 체계의 복잡성은 아마도 특정하게 제도화된 동성애 형식(form)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뉴기니에 있는 많은 집단에서는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간에 너무나 불화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남자 아이가 자궁에서 보내는 기간은 부정된다. [또한] 남성의 삶의 활력은 정액 속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남자 아이는 정액을 얻거나 정액을 섭취함으로써 아이가 태아일 때 겪은 일들의 영향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남자 아이는 더 나이가 많은 남성 친척과 동성애적 관계를 맺는다(Kelly, 1974; Val Ball, 1966; Williams, 1936을 보라).

신부대가 남편과 아내의 지위를 결정하는 친족 체계에서는, 결혼과 젠더의 온전한 필수 전제조건이 무효가 될 수 있다. 아잔데(Azande)족들 사이에서 여자들은 나이든 남자에 의해 독점된다. 하지만 재산이 있는 젊은 남자는 그가 적당한 나이가 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남자 아이를 아내로 둔다. 그는 단지 신부대를 (창(槍)으로) 남자 아이에게 지불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 아이는 아내가 된다(Evans-Pritchard, 1970). 다호메이(Dahomey)족에서는, 여성들이 충분한 신부대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녀 자신을 남편으로 바꿀 수도 있다(Herskovitz, 1937).

모하브(Mohave)족의 제도화된 "교차의상제(transvesticism)"는 한 사람이 다른 성으로부터 또 다른 성으로 바꾸는 것을 허용한다. 해부학적으로 남자인 사람은 특별한 의식을 거치면 여자가 될 수 있으며, 해부학적으로 여자인 사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남자가 될 수 있다. 복장을 바꿔입은 사람(transvestite)은 그/녀의 해부학적 성과 같으면서 자신과 반대의 사회적 성을 가진 사람을 자신의 아내나 남편으로 취할 수 있다. 우리는 아마도 그 결혼에 동성애적이라고 딱지를 붙일테지만, 모하브족의 표준에서 봤을 때 사회적으로 반대의 성으로 정의된 결합은 이성애적인 결혼이다. 우리들의 사회에 비교해 봤을 때, 이러한 결합들은 엄청난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젠더의 양쪽 모두가 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는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지만, 각각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Devereaux, 1937; McMurtrie, 1914; Sonenschein, 1966을 보라).

위에서 제시한 모든 예시에서 볼 수 있듯, 젠더 분업의 규칙과 강제적인 이성애는 그들의 변형들 속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한 두 규칙은 남성과 여성의 행동과 성격에 대한 억압에 똑같이 적용된다. 친족 체계는 양 쪽 성의 섹슈얼리티의 조각들을 받아 적는다. 하지만 우리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여성들이 친족 체계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때에 남성에 적용되는 것에 비해서 여성들에게 더 많은 억압들이 적용된다는 점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약 여성이 교환된다면ㅡ우리가 이 용어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든ㅡ결혼에서 발생하는 부채(debt)는 여성의 살점(flesh)을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어떤 남자의 성적 파트너가 되어야 하며, 그 여자는 이전에 있었던 결혼에 대한 보상으로서[어떤 종족들에서는 여성의 교환이 여성의 교환을 공유하는 (친족) 집단 사이에서 상보적이고 순환적으로 이루어짐. 그 상호적인 보상의 순환이 깨어질 경우 두 집단의 유대는 파괴됨. -옮긴이] 그 남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여자아이가 유아 시절에 누군가와 결혼할 것으로 예정되었고, 만약 이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결혼에 참여할 것을 거부한다면, 이는 부채와 약속들(promises)의 흐름을 파괴할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되는 여성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잠을 같이 잘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문제는 [그 여성이 속한] 그 특정한 체계의 순조롭고 지속적인 작동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처리될 것이다. 이러한 체계의 관점에서 보건대, 보다 선호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능동적으로 욕망하고 타인의 반응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타인들의 욕망에 응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반성은, 젠더와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작동하는 체계속에서의 다양한 변이체들과 자유로운 실천들 속에 종속된다. 레레(Lele)족과 쿠마(Kuma)족은 여성의 교환에 관한 가장 명료한 민족지적 사례를 제공한다. 양 종족의 남자들은 그들의 여성 친척들의 성적인 운명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필요로 하는 체계에 영구히 관여하게 된다. 양 측 사회에서, 남자 친척이 가진 성적인 통제력을 회피하려는 여성들의 시도는 많은 경우 드라마(drama)의 일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경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의 저항은 엄격하게 제한된다(Douglas, 1963; Reay, 1959).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8/27 17:58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71-177의 초벌 번역^^;

"Vile and Precious Merchandise" -모니크 위티그

『친족의 기본구조』는 인간 사회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인상적인 진술이다. 이는 민족지적인 지구의 거의 1/3을 이루는 친족 체계에 관한 논문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이는 친족의 구조적인 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시도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의 마지막 챕터에 요약되어 있는) 그러한 원리들을 친족 자료에 적용하는 것은, 서구 인류학자들을 혼란시키고 신화 속에 빠뜨렸던 금기들과 결혼 규칙에 관한 인지가능한(intelligible) 논리들을 밝혀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서는 요약해낼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진 체스 게임을 구성해냈다. 하지만 그의 체스 말들 중 2개는, 특별히 여성과 관련이 깊다ㅡ"증여(gift)"와 근친상간 금기로, 이 둘의 접합(articulation)은 여성의 교환에 관한 그의 개념에 덧대어진다.

『친족의 기본구조』는 부분적으로 원시적인 사회 조직에 관한 유명한 이론인 모스(Mauss)의 『증여론(Essay on the Gift)』(Shalins, 1972의 챕터 4도 참조하라)에 대한 급진적인 주해(註解)이다. 모스는 원시 사회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들 중 하나의 중요성에 대해서 최초로 이론화한 사람이다. 즉 선물을 주고, 받고, 보답하는 행위의 정도(extent)가 사회적인 교제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음식, 주술, 의식, 말(word), 이름, 장신구, 도구, 그리고 힘 같은 모든 종류의 것들이 교환 속에서 순환한다.

당신은 아마도 당신이 축적해 온(pile up)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여동생(누나), 당신의 돼지, 당신의 얌(yam)을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축적해 온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 다른 사람들의 여동생(누나), 다른 사람들의 돼지, 다른 사람들의 얌은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Arapesh, 레비-스트로스, 1969:27에서 인용)

전형적인 선물 교환에서는, 당사자들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트로브리안드 섬(Trobriand Island)에서는, 각각의 가족들은 얌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유지하며, 각각의 가족들은 얌을 먹는다. 하지만 가족이 기른 얌과 가족들이 먹는 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수확 시기에 남성은 그가 재배한 얌을 그의 동생이 있는 가족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가족은 그의 아내의 오빠(남동생)에 의해서 먹을 것을 공급받는다(Malinowski, 1929). (재산의) 축적이나 거래(trade)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과정은 쓸모 없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러한 교환 논리는 다른 측면에서 탐구되어왔다. 모스는, 선물을 증여하는 것의 중요성은 선물 증여가 교환 파트너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연결(link)을 표현하거나 확인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선물 증여는 선물의 증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연대와 상호적인 도움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제공한다. 선물 교환은 또한 경쟁(competition, rivalry)의 관용적인 표현일 수 있다. 한 사람이 그가 보답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증여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많은 예시들이 있다. 뉴기니 고지대의 빅 맨(the Big Man) 시스템 같은 어떤 정치 제도는, 물질적인 수준에서 불공평한 거래에 기초해 있다. 야심을 가진 빅 맨은 그가 보답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들을 준다. 그는 정치적인 위세를 그 보답으로 받는다.

비록 모스와 레비-스트로스 모두가 선물 교환의 연대적인 측면을 강조했지만, 다른 이들은 선물증여에 의해 제공받는다는 것은 오직 사회적 상업의 편재(遍在)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강화해줄 뿐이라고 주장했다. 모스는 선물이란 사회적 담론의 줄거리(thread)이자, 특화된 정부 기관이 부재하는 사회가 단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증여란, 시민 사회내에서 국가에 의해 보장받는 평화를 성취할 수 있는 원시적인 방법이다. . . . 사회를 구성할 때, 증여란 문화의 해방이었다." (Sahlins, 1972:169, 175)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적 교환에 관한 이론에다가 결혼ㅡ여성이 가장 귀중한 선물인ㅡ이 선물 교환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근친상간 금기가 그러한 교환을 가족들과 집단 사이에 일어날 수 있도록 보증해주는 메커니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친상간 금기의 존재가 보편적이지만 그러한 금지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므로, 그들은 유전적으로 가까운 짝짓기의 발생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 대신, 근친상간 금기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 위에다가 족외혼과 동맹이라는 사회적인 목적을 부과한다. 특히 한 집단 내에서의 결합을 금지함으로써, 근친상간 금기는 집단들 사이에 결혼 교환을 강제하게 된다.

딸이나 여동생의 성적인 사용(use)에 대한 금지는, 그들이 다른 남성과의 결혼에 주어지도록 강제시킨다. 동시에, 이 금지는 이 딸이나 여동생에 대한 다른 남성의 권리를 확립시킨다. . . . 한 남성이 취하지 않은 여성은, 그러한 이유로, 바쳐진다(offered up). (레비-스트로스, 1969:51)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는 어머니나 여동생이나 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머니나 여동생이나 딸을 다른 이들에게 줘버릴 수 있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규칙이다. 이는 증여에 있어 최상의 규칙이다. . . (Ibid.:481)

여성 증여의 결과는 다른 선물 교환의 결과보다 훨씬 심원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들어지는 관계는 단지 보답일 뿐 아니라 친족관계이기 때문이다. 파트너를 교환하면 친인척이 되고, 그들의 후손은 피로써 관계를 맺게 된다. "두 사람은 우정으로 만날 수도 있고 선물을 교환할 수도 있다. 나중에 그들은 말다툼하고 싸울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씨족과의 결혼은 그들을 영원한 예절 속에 결합시킨다." (Best, 레비-스트로스, 1969:481에서 인용). 선물 교환에서는 흔히 있는 경우이지만, 결혼은 단지 평화를 이루기 위한 단순한 활동만은 아니다. 결혼은 아마도 꽤나 경쟁적일 것이며, (이 때문에) 서로 싸우는 수많은 친인척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판단에서 보자면 그 이유란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가 넓은 관계의 네트워크를 낳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친족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교환의 다른 모든 수준, 양, 그리고 방향(잔인한 것까지 포함해서)은 이러한 구조에 의해서 정해진다. 민족지적인 문학에 기록된 결혼 의례란 여성, 아이, 조개, 말(word), 가축의 이름, 물고기, 조상, 고래의 이빨, 돼지, 얌, 주문, 춤, 돗자리 등이 어떤 유대관계를 이루도록 해주면서 손과 손을 거쳐서 거래되는 부단하고 질서정연한 과정의 순간이다. 친족은 조직이며, 조직은 권력을 준다. 하지만 누가 조직되는가?

만일 거래되는 것이 여성이라면, 그들과 연결된 여성들을 주고 받는 건 남성들이며, 거래의 파트너라기보다는 관계를 이어주는 도랑이 되는 건 여성이다. (*) (그러나) 여성의 거래가 여성이 대상화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관점에서보면, 원시적인 세계의 대상들(objectives)은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자질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선물과 주는 사람 사이의 구분을 암시한다. 만약 여성이 선물이라면, 남성들은 파트너를 교환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상호간의 교환이 그 교환이 가진 사회적 결합의 의사(擬似)-신비적인 힘을 수여하는 것은 파트너이지 선물이 아니다. 이러한 체계의 관계들은, 여성들이 그들의 순환에서 오는 이득을 알아차릴 수 있는 처지에 두지 않는다. 그러한 관계가 남성이 여성을 교환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두고 있는 한, 사회적 조직이라는 그러한 교환의 결과물의 수익자는 남성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교환의 총체적인 관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 이루어진 두 집단 사이에서 설립된다. 그리고 여성은 교환 속에서 대상의 하나로서만 나타나지, 파트너의 하나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 . . 게다가 이는 여자 아이의 감정이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때조차도 진실로 남아 있다. 제안된 결합에 묵종(默從)하는 동안 그녀는 교환이 일어나도록 촉진하거나 허락한다. 그녀는 이러한 본성을 바꿀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 115) (**)

파트너로써 선물 교환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증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만약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양도될 수 있다면, 여성들은 그들을 증여해 버릴 수 있는 신세가 아니다.

한 젊은 Northern Melpa족의 남성이 심사숙고하며 말했다. "여성이란 무엇인고하니, '우리가 moka를 만들도록 해줘요, 아내와 돼지를 찾을 수 있게 해줘요, 우리의 딸을 남자에게 줄 수 있게 해줘요, 우리가 전쟁을 할 수 있게 해줘요, 우리가 적을 죽일 수 있게 해줘요'라고 줄곧 떨쳐 일어나서 말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 . . 그녀들은 단지 집에 머물고 있는 그저 하찮은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죠. 그렇지 않나요?" (Strathern, 1972:161)

실로 여성들이란! 이 젊은 남성이 말한 멜파족의 여성들은 그녀들아내이기에 아내를 갖지 못하며, 그렇기에 그녀들이 갖는 것은 남편들이지만, 이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멜파족의 여성들은 그녀들의 남성 친척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딸에 대한 권리ㅡ증여권(소유권은 아니지만)ㅡ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딸을 남성들에게 줄 수 없다.

"여성의 교환"은 유혹적이고 강력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생물학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인 시스템 안에 여성의 억압을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게다가, 이는 우리가 여성 억압의 궁극적인 장소를 상품의 거래라기 보다는 여성의 거래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제안한다. 여성의 거래에 대한 민족지학적이고 역사적인 예시들을 찾는 건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여성들은 결혼 안에서 증여되고, 전투 속에서 취해지며, 호의를 표하기 위해서 거래되며, 공물로 보내지고, 거래되며, 구입되고, 또 팔린다. 이는 "원시적인" 세계에 제한될 수 없다. 그러한 관습들은 더 "문명화된" 사회들 속에서 더 공언되고 상업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남성들도 거래된다. 하지만 그들은 노예로서, 민완가로서, 운동선수로서, 농노로서, 혹은 다른 파멸적인 사회적 지위로서 거래되지, 남성으로서 거래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노예로서, 농노로서, 성매매여성으로서 거래되지만, 단순히 여성으로서도 거래된다. 그리고 만약 인간의 역사의 대부분에서 남성들이 성적인 주체ㅡ교환하는 자ㅡ이고 여성들이 성적으로 반-대상(semi-object)ㅡ선물ㅡ이어 왔다면, 많은 관습들과 클리셰들 그리고 개인적인 특성들은 많은 부분 그럴듯하고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다른 것들 중에서도, 아버지가 신부를 줘버리는 진기한 관습이 그렇다).

"여성의 교환"은 또한 문제적인 개념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근친상간 금기와 그 금기가 적용된 결과가 문화의 기원을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세계사적인 패배가 문명의 기원과 함께 일어났으며 또한 이 패배가 문화의 선결조건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그의 분석이 그저 순수한 형태로 적용된다면, 여성주의자들의 계획은 반드시 남성을 근절하는 것보다도 훨씬 성가신 작업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계획은 문화를 내다버려야만 하며 지구의 표면 위에 완전히 새로운 현상으로 대체해내야만 한다. 하지만 여성의 거래가 없다면 문화도 없을 것이며, 그것 이상의 다른 이유가 없다면 문화는 당연히 창조적(inventive)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미심쩍인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의 교환"이 친족 체계의 모든 경험적인 증거들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 또한 논쟁적이다. 레레(Lele)족이나 루마(Luma)족 같은 몇몇 문화권에서는, 여성을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교환한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여성의 교환은 추측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샘플에서 제외된 그 사냥꾼들과 수집가들의 예에서 보자면, 이 개념의 효용성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유용하지만 여전히 어렵기만한 개념을 만들도록 했을까?

"여성의 교환"은 문화에 대한 정의도 아니며, 문화에 내재해 있는 혹은 문화 그 자체의 작동 원리도 아니다. 이 개념은 섹스와 젠더에 관한 사회적 관계들의 특정한 측면에 대한 예리하지만 응축되어 있는 하나의 이해이다. 친족 체계는 자연 세계의 한 부분 위에 사회적인 목적(end)을 부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친족은 용어의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생산"이다. 이는 물체(이 경우라면 사람)를 주관적인 목적으로(to) 변형시키고 형성시키거나 주관적인 의도에 의해(by) 변형시키고 형성시키는 것을 말한다("생산"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맑스, 1971a:80-99를 보라). 친족은 사람들 사이에 특정한 "재산" 형식을 포함하는 그 나름의 생산, 분배, 그리고 교환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 형식은 배타적이거나 사유재산권과 같지는 않으며,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종류의 권리들을 갖는다. 결혼 교환ㅡ결혼을 특징짓는 의례에서 순환하는 선물들과 물질들ㅡ은 정확히 누가 누구들 사이에서 어떤 권리를 갖는가를 결정하는 풍부한 자료의 원천이다. 그러한 교환들을 보면서 많은 경우에 여성들의 권리는 남성들의 권리에 비하면 훨씬 더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추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친족 체계는 단지 여성만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그 체계는 성적 접근, 가계의 지위, 혈통의 이름과 조상들, 권리와 사람들ㅡ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ㅡ을 사회적 관계의 구체적인 시스템안에서 교환한다. 그러한 관계는 언제나 남성들을 위한 특정한 권리,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특정한 권리를 포함한다. "여성의 교환"은, 친족 체계의 사회적 관계가 남성들이 그들의 여성 친족들에 대해 특정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 그리고 여성들은 그들의 남성 친족들에게 뿐 아니라 그녀들 스스로에게도 남성 친족들과 같은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 대해 성급하게 설명한 개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의 교환'이라는 개념은 여성이 그녀들 스스로에게도 완전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여성의 교환은 만약 그것이 문화적 필연성(necessity)으로서 비춰질 때나, 특정한 친족 체계에 접근하는 분석을 할 때 유일한 도구로서 사용된다면 난처하게 된다.

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여성의 거래를 친족의 기본적인 원리로서 본 점이 맞다손친다면, 여성의 종속은 섹스와 젠더가 조직되고 생산된 관계성의 생산물로써 관찰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인 억압은 파생적이며 이차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섹스와 젠더의 "경제학"이 있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체계(sexual system)의 정치 경제학이다. 우리는 섹슈얼리티의 특정한 관습이 생산되고 유지되는 정밀한 메커니즘을 측정하기 위해서 각각의 사회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거래"는, 성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들의 무기고를 건설하기 위한 최초의 한 걸음일 뿐이다.


(*) "뭐라구요? 당신은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다고요? 대체 뭐가 문제요? 매부(brother-in-law)를 원하지 않는거요? 만약 당신이 다른 남자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다른 남성이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한다면, 당신은 최소한 두명의 매부(자형;처형;시숙)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모르겠소? 그렇지 않고 당신이 만약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한다면 매부를 단 한명도 얻지 못하는데도? 당신은 누구랑 사냥을 갈것이며, 누구랑 정원을 돌볼 것이며, 누구를 방문할 것이란 말이오?" (Arapesh, 레비-스트로스, 1969:485에서 인용)

(**) 여성을 수단으로 하여 남성들 사이에 만들어진 유대에 기초한 사회에 대한 이러한 식의 분석은, 완전히 이해할만한 여성 운동의 분리주의자적인 응답을 만들어 낸다. 여성들 사이에서의 무매개적인(unmediated) 유대에 기초한 사회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분리주의는 이 사회 구조 속에서의 변화로 보일 수 있다. 분리주의는 또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권리"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거부로서,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에 대한 여성의 권리에 의한 선언으로서 보일 수 있다.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8/20 17:12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9-171


친족 관계(유인원으로부터 "인간"으로 가는 이행 속에서 섹슈얼리티에 의해 수행되는 부분에 대하여)

인류학자에게 있어서, 친족 체계는 생물학적인 친척들의 목록을 뜻하지 않는다. 친족 체계는 실제적인 유전적 관계와 자주 충돌하기도 하는 카테고리들과 지위들의 체계이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친족 지위가 생물학에 선행하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누어(Nuer)족의 "여성 결혼(woman marriage)"은 적절한 예시이다. 누어족은 부권의 지위를 어머니를 위해 가축떼를 신부대(bridewealth)로 받는 사람에게 소속된 것으로 정의한다. 그렇기에 여성은 그녀가 정자를 가진 수컷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결혼할 수 있으며 한 아내의 남편과 아이의 아빠가 될 수도 있다(Evans-Pritchard, 1951:107-9).

전(前) 국가 사회에서, 친족은 사회적인 의사소통행위, 그리고 조직화하는 경제적, 정치적, 의례적일 뿐 아니라 성적이기까지한 행위들의 특징이 된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한 사람의 의무, 책임감, 그리고 특권은 상호적인 친족관계나 그것의 결여라는 측면에서 정의된다.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 생산과 분배, 적개심과 연대, 의식(ritual)과 의례(ceremony) 등의 모든 것은 조직적인 친족관계의 체계 속에서 시작된다. 친족 관계의 편재(遍在)적이고 적응력있는 효력은 많은 인류학자로 하여금 언어의 발명과 함께 친족의 발명을 사람과 비슷한 반인류(semi-human hominoid)와 인류 사이의 불연속성을 결정적으로 표식하는 발전으로 간주하도록 하였다(Sahlins, 1960 Livingstone, 1969; Levi-Strauss, 1969).

친족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생각이 인류학에서 으뜸가는 원리라는 지위를 누리는 동안에, 친족관계의 내적 작동방식은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친족 체계는 한 문화로부터 다음 문화로 가는 동안 격렬하게 변화한다. 그들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bewildering) 모든 종류의 규칙들ㅡ어떤 사람이 결혼하고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을지를 지배하는ㅡ을 포함한다. 그 규칙들의 내적인 복잡성은 압도적이다. 친족 체계는 수십년 동안 인류학자들의 상상력을 근친상간 금기, 교차사촌혼(cross-cousin marriage), 혈통 관계(terms of decents)들, 기피해야할 관계나 강요된 친밀성, 씨족(clans)과 계층(sections), 이름과 관련한 금기 등ㅡ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항목들은 실제하는 친족체계의 묘사 속에서 발견된다ㅡ을 해명하려는 시도를 하도록 부추겼다. 19세기에 들어서, 몇몇의 사람들은 인간의 성적 체계(sexual system)의 역사와 본성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을 쓰려고 시도했다(Fee, 1973을 보시오). 그러한 작업 중의 하나는 루이스 헨리 모건(Lewis Henry Morgan)이 쓴 『고대 사회(Ancient Society)』이다. 이 책은 엥겔스에게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엥겔스의 이론은 친족관계의 결혼에 대한 모건의 설명 위에 기초한다.

친족관계 연구로부터 성 억압의 이론을 추출하는 엥겔스의 프로젝트를 취하면서, 우리는 19세기부터 이어진 원숙한 민족학의 이점을 취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독특하면서 아주 특별하게 적절한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들』이라는 책의 이점을 취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결혼을 이해하기 위한 19세기 프로젝트의 굵직한 20세기적 판본이다. 이는 친족이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에 부과된 문화적인 조직으로서 명백하게 상상된 것이라고 보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으로 충만해(permeated) 있다. 이 책은 추상적이고 젠더가 없는(gerderless) 인간 주체를 가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기술이다. 그와는 반대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 있는 인간 주체는 언제나 남성 아니면 여성이며, 따라서 두 성(sex)의 다른 사회적인 운명도 추적해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 관계의 핵심은 남성들 사이에서의 여성의 거래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성 억압에 대한 암시적인 이론을 구성한다. 적절하게도, 이 책은 루이스 헨리 모건의 기억에 헌납되었다.

2008/08/20 - [번역]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4-169
2008/02/16 - [번역]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4


불명확 한것들-

"clan" 과 "section"의 번역어.
"cross-cousin marriage", "terms of decents"의 번역어.
"ritual"과 "ceremony"의 차이점과 적절한 번역어. ritual은 보다 종교적인 건감?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8/20 14:08

번역놀이를 계속 해볼까하여.. 요즘엔 책도 잘 안읽히고 글도 잘 못쓰겠기 때문에, 이러한 '2차 창작'에 몰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집중이 안 될 때(=시간이 잘 안 갈때) 번역을 하면 그래도 집중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오역은 제 책임이겠으나, 오역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는 제가 책임질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건 취미 생활(= 타임킬링)일 뿐 이에용. ㅎㅎ

그나저나 게일 루빈의 글을 읽다보면 정말 매력적이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군데 군데 드러나는 유머와 위트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번역이 어렵다(버틀러나 스피박에 비하면 얌전하지만;). 내 실력을 탓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언니' 정말 멋져요!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4-169의 토막 번역


엥겔스Engels

『가족, 사적 소유, 그리고 국가의 기원(이하 『기원』)』에서, 엥겔스는 성의 억압을 이전의 사회 형태들로부터 자본주의가 물려받은 것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게다가, 엥겔스는 그의 사회 이론에 성sex과 섹슈얼리티를 통합한다. 『기원』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기원』에 실려 있는 증거의 상태는 인류학 내부의 보다 더 현대적인 발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옛스럽다는(기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이 반영하고 있는 다른 19세기의 가족과 결혼의 역사 학술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것의 한계들에 의해 무색해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통찰을 갖고 있다. 특히 "섹슈얼리티 관계"가 "생산 관계"로부터 구분될 수 있고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엥겔스의 훌륭한 통찰이다.

유물론적 관념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당면하고 있는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생존 수단들의 생산, 즉 의식주와 그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대와 특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제도 안에서 살아간다. 이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 즉 한편으로는 노동의 발전 단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엥겔스, 1972:71-72; 이탤릭은 루빈이)


이 단락은 중요한 인식을 암시한다. 즉 인류는 옷, 음식, 그리고 따뜻함을 위해 그 자신의 활동력을 자연 세계를 개척하는데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자연 세계의 요소들은 인간들의 소비 대상으로 변형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체계를 일컬어 "경제"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서조차 경제 활동을 통해 충족된 욕구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들을 없애지 못한다. 또한 인류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그 자신을 재생산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생식의 욕구는 식욕만큼이나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학의 자료들에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추론들 중 하나는, 그러한 욕구들은 식욕이 그러한 것처럼 그 어떤 "자연적인" 형태로는 거의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굶주림은 굶주림이다. 하지만 음식으로 간주된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조직화된 경제적 활동의 형태들을 갖는다. 섹스는 섹스이다. 하지만 섹스로 간주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또한 섹스/젠더 체계를 갖고 있다. 이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생식의 생물학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요소들이 인간들과 사회적 개입에 의해 고안되고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 전통이 얼마나 기괴한지와는 상관없이 전통적인 방식 속에서 만족되는 것이다. 3)

인간의 섹스, 젠더, 그리고 생식의 영역은, 수 천 년 동안 냉혹한 사회적 행동들에 종속되었고, 또 이 행동들에 의해 변화되어 왔다. 우리가 아는 바ㅡ젠더 정체성, 성적 욕망과 판타지, 유년시절에 대한 개념ㅡ로서의 섹스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생산물이다. 우리는 섹스의 생산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잠시 동안은 음식, 옷, 자동차, 그리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대해서는 잊을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맑시스트의 전통에서, 그리고 심지어 엥겔스의 책에서는, "물질 생활material life의 두번째 양상[무슨 말이지?; 이 말은 second aspect of material life의 번역인데 확실히 맑시즘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으니;]"의 개념은 배경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혹은 "물질 생활"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었다. 엥겔스의 제안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섬세한 고안을 따르지도, 종속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내가 섹스/젠더 체계라고 부르고 싶은 사회적 삶의 영역의 존재와 중요성을 보여준다.

섹스/젠더 체계를 부르기 위한 다른 이름들도 제안되어 왔다. 가장 일반적인 대안들은 "재생산 양식mode of reproduction"과 "가부장제patriarchy"이다. 용어를 가지고 애매한 말을 늘어 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 두가지 용어들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한 3가지 제안들은 "경제" 시스템과 "섹스" 시스템 사이의 구별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섹스 시스템은 나름의 자율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경제적 힘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예컨대 "재생산 양식"은 더 친숙한 "생산 양식"의 반대로써 제안되었다.  하지만 이 용어는 "경제"를 생산에, 그리고 섹스 체계를 "재생산"에 연결시킨다. 허나 "생산"과 "재생산"은 두 체계에서 모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두 체계의 풍부함을 축소시킨다. 모든 생산 양식은 (도구, 노동,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의 다양한 국면의 양상들 모두를 섹스 시스템으로 이관할 수는 없다. 기계의 대체는 경제 속에서 볼 수 있는 재생산의 한 예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섹스 체계를 "재생산"이라는 용어의 사회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관점 안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섹스/젠더 체계는 단순히 "생산 양식"의 재생산적 순간은 아니다. 젠더 정체성의 구성은 섹스 체계의 영역에서 생산되는 것의 한 예이다. 그리고 섹스/젠더 체계는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재생산인 "생식 관계"를 넘어서는 것을 포함한다.

"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성차별주의(sexism)을 지속시키는 힘(force)들을, 자본주의 같은 다른 사회적인 힘(force)들과 구분짓기 위해서 소개되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사용은 다른 차별들을 눈에 띄지 않게 한다. "자본주의"라는 용어의 쓸모가 서로 다른 체계들(systems)ㅡ그 체계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고 조직될 수 있는ㅡ을 구분하는데에 정확히 있는 것에 반해, "가부장제"의 사용은 자본주의를 모든 종류의 생산 양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어떠한 사회든지 "정치 경제학"이라는 체계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체계는 평등주의적일수도 있고 사회주의적일 수도 있다. 이는 계급 분화적일 수 있다. 이 경우에 억압받는 계급은 농노, 농부, 노예 등을 포함할 수 있다. 또한 억압받는 계급은 임금 노동자들을 포함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그 체계는 정확히 "자본주의적"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다. 이 용어의 힘은, 사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들이 있다는, 이 용어가 함축하는 바에 있다.

유사하게도, 어떠한 사회든 간에 섹스와 젠더, 그리고 아기들을 다루는 체계적인 방법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체계는 알려진 사례의 대부분이나 전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성적으로 평등할 수 있고, 혹은 "젠더 계급화"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ㅡ심지어 그 우울한 역사에도 불구하고ㅡ성적인(sexual)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인간의 능력 및 필요성, 그리고 성적인 세계가 조직되어온 경험적으로 억압적이었던 방법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가부장제는 그 두 가지의 의미를 같은 용어로 포섭해버린다. 반면 섹스/젠더 체계는 그 영역(domain)을 가리키고, 그 영역에서 억압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억압이 그것을 조직하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적이라고 적절하게 설명될 수는 없는 젠더 계급화된 체계들이 있다. 많은 뉴기니 사회들(엔가, 마링, 베나 베나, 훌리, 멜파, 쿠마, 가후쿠-가마, 포어, 마린드 아님 등등 질리도록 많다; Berndt, 1962; Langness, 1967; Rappaport, 1975; Read, 1952; Meggitt, 1970; Glasse, 1971; Strathern, 1972; Reay, 1959; Van Ball, 1966; Lindenbaum, 1973)은 사악할 정도로 여성에게 억압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무리의 남성들이 가진 권력은 그들이 가진 아버지나 가부장으로서의 역할에 기초해 있지 않다. 대신 비밀스러운 컬트 문화나, 남성들의 집이나, 전쟁이나, 교환 네트워크나, 의례적 지식이나, 다양한 성년식의 과정들에 포함되어 있는 집단적인 성인 남성성에 기초해 있다. 가부장제는 남성 지배의 특정한 형식이며, 그 용어의 사용은 구약성서에나 나올 것 같은 유목 유랑민들이나 그들을 닮은 무리에게 사용되는 것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가부장이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 가축떼와 식솔들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나이든 남성이었고, 그가 살았던 사회적 그룹에서 정의된대로 부권 제도(the institution of fatherhood)의 한 양상이었다.

우리가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든, 중요한 것은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제도, 그리고 섹스와 젠더 관습의 재생산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한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엥겔스가 여성의 종속을 생산 양식의 발전에 위치시키면서 포기했던 프로젝트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1) 이를 위해서 우리는 엥겔스의 결과 보다는 그의 방법을 모방할 수 있다. 엥겔스는 친족 체계 이론을 고찰하는 방법으로 "물질적 삶의 두번째 양상(second aspect of material life)"[* 이게 무슨 말이야 ㅠㅠ]을 분석하는 과제에 접근했다. 친족 체계는 많은 의미를 가지며, 또 많은 일들을 수행한다2). 하지만 친족 체계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섹슈얼리티의 구체적인 형식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그것을 재생산한다. 친족 체계는 섹스/젠더 체계의 관찰가능하고 경험적인 형식이다.



<미주>

1) 원주 - 엥겔스는 남성들은 부(wealth)를 가축떼의 형식, 그리고 이러한 부를 그들의 자손에게 전해주기를 원하면서 부계 상속에 이익이 되도록 "어머니 권리"를 추방(overthrow)하는 형식으로 취득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권리의 추방은 여성(female sex)의 세계사적인 패배였다. 남성은 집안에서도 명령을 할 수 있었다. 여성은 지위가 깎였고, 예속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남성들이 가진 정욕의 노예가 되었고, 단지 아이들의 생산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엥겔스, 1972:120-21; 강조는 원문)." 자주 지적되었듯이, 여성들은 모계 상속을 수행하는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권위를 필연적으로 갖지는 않는다.

2) 역주- 이 문장은 "Kinship systems are and do many things"의 번역입니다. 사전을 뒤적이며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이렇게 적당히 의역해버렸다는... ㅠ.ㅠ


다음에는 "친족"에 관한 이야기


연관된 글:
2008/02/16 - [번역]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4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1/10 10:51

예전에 올렸던 걸 한데 모았다 -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57-167의 번역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모두에게, 여성에 대한 문학은 여성의 억압과 사회적 종속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질문의 오랜 심사숙고의 결과물이다. 그 질문은 사소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주어진 답은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에 대한 희망이 현실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 억압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젠더 위계gender hierarchy가 없는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 변화되어야만 할 것들에 대한 어떠한 평가든 간에, 그 평가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본유적인 남성의 공격과 지배가 여성 억압의 근저에 있다면, 논리적으로 페미니스트 기획은 공격적인 성의 근절이나 그 공격적인 특성을 수정하기 위한 우생학적 기획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성차별주의sexism가 이익을 위한 자본주의의 냉혹한 욕구의 부산물이라면, 성차별주의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출현과 함께 시들어버리게 될 것이다. 만약 세계 역사 속에서 여성의 패배가 무장한 가부장제의 폭동의 손아귀에 일어난 것이라면, 이제 아디론댁Adirondacks 산맥에서 아마존Amazon 게릴라를 훈련시키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 논문의 시야는, 성적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유명한 몇몇 설명들ㅡThe Imperial Animal에 의해 예시된 유명한 진화에 관한 이론이나, 선사시대 모계사회에 대해 추정된 전복overthrow에 관한 것이나, 자본Capital 1권에서 사회적 종속의 현상 모두를 발췌해내려고 하는 시도까지ㅡ을 지지하는 비평의 바깥에 있다. 대신 나는 그러한 문제의 대안적인 설명에 대한 몇몇 요소들을 간략히 그려보고자 한다.

맑스는 한 때 이렇게 질문했다. “흑인Negro 노예란 무엇인가? 흑인 종족black race의 사람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흑인Negro은 흑인Negro이다. 면 방적기는 면을 방직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특정한 관계에서만 자본이 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이것이 자본이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money이 아닌 것이나 설탕이 설탕의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Marx, 1971b:28)” 이것은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가정적인 여성women이란 무엇인가? 한 종species의 여성female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woman은 여성woman이다. 그녀는 오직 특정한 관계에서만 하녀, 와이프wife, 동산動産, 바람둥이 토끼, 성매매 여성prostitute, 인간 딕터폰(속기용 구술 녹음기)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그녀가 남성의 조력자가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성female이 억압받는 여성women이 되는 그 관계는 무엇인가? 여성이 남성의 먹이가 되는 관계의 구조를 해명하기 시작할 수 있는 토대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중복되는 작업 안에 있다. 여성women 길들이기domestication는 그 두 사람의 작업에서 충분히 토론될 수 있다. 그 작업들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여성을 정제되지 않은raw 물질로 간주하고, 길들여진(가정家庭화된) 여성을 생산물로 만들어 버리는 구조적인 사회적 장치social apparatus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물론 프로이트도 레비-스트로스도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기술한 과정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분석과 기술은, 반드시 맑스가 맑스 앞에 있었던 고전적인 정치 경제학자들을 읽었던 방식처럼 읽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1970:11-69)를 참조하라).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는 리카르도와 스미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즉 그들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작품이 페미니스트의 눈에 제시되었을 때 생성할 수 있는 비평적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성, 성적 소수자, 개인에 존재하는 특정한 인간 성격의 특성들에 대한 억압의 장소가 되는, 그 사회적 삶의 부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적인 도구를 제공해 준다. 나는 더 정치精緻한 용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삶의 부분을 “섹스/젠더 시스템”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임시적인 정의로써, “섹스/젠더 시스템”이란 사회가 생물학적 성을 인간 행동의 산물로써 변형시키는 배치arrangement, 그리고 변형된 성의 그 욕구가 충족되는 그 배치의 일단을 일컫는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독특하면서 해석적인exegetical 읽기의 한 방법을 통해서, 섹스/젠더 시스템에 대한 풍부하게 발달된 정의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나는 “해석적exegetical”이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한다. 사전적으로 “해석exegesis”은 “특히 성서의 해석에 관한, 비판적인 설명이나 분석”으로 정의된다. 때때로,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읽기는 자유로이 해석적이며, 또한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만족으로부터 그것의 전제와 함축하는 바까지 이동한다. 나의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텍스트에 대한 독해는, 레비-스트로스로부터 강하게 영향 받아서 프로이트주의자들의 경전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을 갖고 있는 자크 라캉에 의해 제공된 렌즈를 통과했다. 1)

나는 후에 섹스/젠더 시스템의 정의에 관해서 더 섬세한 것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먼저 나는 성 억압을 완전히 표현하거나 개념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맑시즘의 실패를 검토함으로써 그러한 개념의 필요성을 논증하려고 한다. 이러한 실패는, 사회적 삶의 이론으로서의 맑시즘이, 성sex을 상대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사회적 세계에 대한 맑스의 지도map에서, 인류는 노동자, 농부, 혹은 자본가이다. 그들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반대로,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그려진 사회적 현실의 지도에서는, 사회 내에서의 성의 위치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경험 사이의 뿌리 깊은 차이에 대한 심원한 인식을 볼 수 있다.



맑스


비교-문화적,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여성의 억압을 해명하는 이론들 중에서 그 끊임없는 변화형들과 단조로운 유사성이라는 지점에서 봤을 때, 계급 억압에 관한 맑시스트들의 설명 능력 만 한 이론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여성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맑시스트의 분석을 적용하고 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맑시스트의 분석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지금껏 여성들은 자본주의를 위한 예비 노동력이며, 일반적으로 낮은 여성들의 임금은 자본가-고용주에게 특별한 잉여 가치를 제공하며, 여성들은 가족 소비의 관리자라는 그들의 역할 속에서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말미를 제공한다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문들은 훨씬 더 야심찬 노력을 기울여 왔다. 즉 가사노동과 노동 재생산 사이의의 상관관계를 지적함으로써, 자본주의 역학의 핵심 속에 여성의 억압을 위치시키는 것이다(Benston, 1969; Dalla Costa, 1972; Larguia and Dumoulin, 1972; Gerstenin, 1973; Secombe, 1974; Gardiner, 1974; Rowntree, M. & J., 1970을 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정의定意 그리고 자본에 의해서by capital 노동으로부터 오는 잉여 가치의 착취로 인해 자본이 생산되는 그 과정에 여성들을 공평하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맑스는 자본주의가 그 특유의 목적으로 인해 다른 어떠한 생산 방식과도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은 창조creation와 자본의 확장이다. 다른 생산 방식들이 그들의 목적을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쓸모 있는 물건들을 만드는데 두거나, 혹은 지배 귀족계급을 위한 잉여를 생산하는데 두거나, 혹은 신의 교화를 위한 충분한 희생을 보증하기 위해서 생산하는데 두었다거나 했던 것에 반해서, 자본주의는 자본을 생산한다. 자본주의는 생산production이 돈, 상품, 인간들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관계ㅡ소유의 형식 등등ㅡ의 세트이다. 그리고 자본은, 노동으로 교환되었을 때,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 속에서 무보수 노동의 착취나 잉여가치를 통해 그 자신을 재생산하고 증식하는 상품이나 돈의 양quantity이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의 결과는, 단지 생산(사용가치)이라거나 상품commodity인 것은 아니며, 적어도 교환가치를 가진 사용가치이다. 그것의 결과나 생산은, 자본을 위한 잉여가치의 창조이며, 결과적으로 돈이나 상품의 자본으로의 실질적인 변형이다. (Marx, 1969:399; 이탤릭은 원전에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 그럼으로써 자본이 되는 이 교환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으며, 자본가는 노동자 그/녀가 고용 시간동안 만들어낸 물건들을 갖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물건의 총 가치가 그/녀의 임금의 가치를 초과한다면, 자본주의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자본가는 임금의 비용을 되찾는 것에 더해서 잉여 가치의 증가분도 갖는다. 이것은 임금이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가 아니라, 그/녀를 계속 유지하는 것ㅡ매일매일 그/녀를 재생산 하는 것, 그리고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체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ㅡ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는 노동 계급이 전체로서 생산하는 것과 노동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재순환되는 그 전체 총계 사이의 차이이다.

노동력을 위한 교환에 주어진 자본은, 생존하는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뼈, 그리고 뇌를 재생산하는 소비에 의해 필수품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노동장workshop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발생하는, 생산 과정의 일부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노동자의 개인 소비는 마치 세탁기washing machine(*)가 그리하는 것처럼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요소factor를 형성한다. (Marx, 1972:572)

개인적인 상황에서, 노동력의 생산은 그 자신의 재생산이나 그의 생계maintenance를 포함한다. 그의 생계를 위해서, 그는 생계 수단으로 주어진 양quantity을 요구한다(**). 노동력은 노동하는 행동으로서만 그 자신이 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의 근육, 뇌, 신경 등의 일정한 양은 소모되며, 따라서 그것들은 회복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Ibid.:171)

따라서 노동력의 재생산과 그것의 생산 사이에서의 차이의 양은, 노동력을 재생산 할 것으로 취하는 그 측정determination에 달려있다. 맑스는 노동자의 건강, 일상, 그리고 힘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음식, 옷, 주택, 연료 등의 일용품의 양을 그 측정의 기초에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용품들은 그것들이 생계의 수단이 되기 이전에 먼저 소비되어야 하며, 그것들이 임금에 의해 구매되었을 때 곧바로 소비 가능한 형태가 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 이전에(***), 그것들에게 추가적인 노동이 행해져야 한다. 음식은 요리되어야 하며, 옷은 빨아져야 하며, 침대가 만들어지고, 나무는 쪼개져야 한다, 등등.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를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재생산과정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여성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필요조건sine qua non인 잉여가치 연쇄 속으로 여성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그 노동력 재생산을 통과한다고 관찰되어왔다. 2) 좀 더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가사 노동에는 임금이 지불되지 않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자본가에 의해 파악되는 잉여가치의 궁극적인 양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여성의 유용성usefulness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유용성이 여성의 억압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꽤나 다른 문제다.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분석이 여성과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 설명을 중단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여성들은 자본주의로 기술될 수 있는 상상력이 뻗치지 않은 사회에서도 억압당한다. 아마존 계곡과 뉴기니 고지(高地)의 여성들은, 남성적 위협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증명되었을 때, 집단 성폭행gang rape에 의해 그녀들의 장소에 자주 가두어진다. 한 Mundurucu의 남성은 "우리는 우리들의 여성을 바나나로 길들이지요"라고 말했다(Murphy, 1959:195). 민족지적인 기록은 남성 숭배, 비밀스러운 비법 전수들, 불가해한 남성 지식 등등을 통해 "그녀들의 공간"에 여성들을 가두어 놓는 효과를 갖는 관습들로 어지럽혀진다. 그리고 전-자본주의 봉건제의 유럽은 성 차별주의가 없는 사회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수 세기를 거쳐 자본주의보다 앞서 존재했던 여성과 남성이라는 개념을 계승하고 다시 연결시켰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에 관한 어떠한 분석도 다양한 시간대와 장소 속에서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전족, 정조대(貞操帶), 비잔틴의 믿을 수 없는 의상들, 물신화된 모욕들, 그리고 더 평범한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분석은 많은 경우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왜 많은지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노동의 재생산에 대한 맑스의 논의로 돌아가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노동자를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것은 부분적으로 인간 유기체의 생물학적 요구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노동자가
살고 있는 장소의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 또한 부분적으로 문화적 전통에 의해서 결정된다. 맑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맥주가, 프랑스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와인이 필요하다고 관찰했다.

그의 [노동자의] 소위 반드시 필요한 욕구와, 그리고 그들을 만족시킬 방법으로써의 수효와 양은 그 자체로 역사적 발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국가의 문명화 정도에 엄청난 양을 의존하게 되며, 더 자세히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그 조건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안락함의 정도와 습속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상품commodity의 경우와 비교하여 봤을 때, 이는 역사적이고 도덕적moral인 요소인 노동력 가치의 결정으로 융화된다. (Marx, 1972:171, 이탤릭은 필자가)

"아내"가 노동자의 필요성 위에서 존재한다는 것, 남성들이라기 보다는 여성들이 가사 노동을 한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가 여성들이 상속 받지도 앞장서지도 신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던 오랜 전통의 상속자라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정확히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자본주의를 남성성과 여성성 형성의 문화적 유산과 함께 나타낸다.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성sex, 섹슈얼리티, 그리고 성 억압의 전체 범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맑스가 한 주장의 간결함은, 단지 그것이 포괄하는 사회적 삶의 거대한 영역을 강조할 뿐이며, 그것을 검토되지 않은 채 내버려둘 따름이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를 분석의 과제로 만듦으로써만, 성 억압의 구조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

1) 맑시즘, 구조주의, 그리고 정신분석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어떤 인식론적인 충돌을 만들어 낸다. 특히, 구조주의는 인식론적 지도 전체에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귀찮은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나는 라캉과 레비-스트로스가 현대 프랑스 지식인 혁명에 있어 선도적인 살아있는 조상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무시하려고 한다(Foucault, 1970을 보라). 만약 프랑스에서라면, "실천을 의미화하는 변증법적 이론"의 길을 따라 구조주의자들의 미로의 중심으로부터 나의 주장을 시작하는 것과 거기로부터 나의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2) 여성과 가사노동에 관한 많은 논쟁이, 가사노동이 “생산적인” 노동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의 가운데에 있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가사 노동은 용어의 테크니컬한 관점에서 보면 보통은 “생산적인” 노동은 아니다(I. Gough, 1972; Marx, 1969:387-413). 하지만 이 차이는 이 주장의 요점과는 관련이 없다.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와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한다는 관점에서는 “생산적인” 노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잉여 가치와 자본 생산의 결정적인 요소다.

3) 우리들의 관점에서, 그것들[전통/관습들] 중 다소 기괴하게 보이는 것들은, 섹슈얼리티는 문화의 개입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Ford and Beach, 1972를 보라). 몇몇의 예들은 아마도 인류학자들이 즐기고 있는 이국exotica에서 선택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2/02 21:21

오 마이갓 -_-;; 거의 한달만에 재개하는구나; 11월에 난 대체 뭐 한거지?; 거침없는 날림 번역 ㅋㅋ

일단 좀 유의할 점은, 본문에서는 "sex system"과 "sexual system"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냥 이것들을 전부 "섹스 체계"라는 다소 어색한 말로 다 바꾸어버렸다. 아무리봐도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생식"이라는 표현은 procreation의 국역어로 썼다. "출산"이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출산이라는 의미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서...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4-167

translated by Namunnib


엥겔스Engels

『가족, 사적 소유, 그리고 국가의 기원(이하 『기원』)』에서, 엥겔스는 성의 억압을 이전의 사회 형태들로부터 자본주의가 물려받은 것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게다가, 엥겔스는 그의 사회 이론에 성sex과 섹슈얼리티를 통합한다. 『기원』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기원』에 실려 있는 증거의 상태는 인류학 내의 보다 더 현대적인 발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옛스럽다는(기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이 반영하고 있는 다른 19세기의 가족과 결혼의 역사 학술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것의 한계들에 의해 무색해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통찰을 갖고 있다. 특히 "섹슈얼리티 관계"가 "생산 관계"로부터 구분될 수 있고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엥겔스의 직관이다.


유물론적 관념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당면하고 있는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생존 수단들의 생산, 즉 의식주와 그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대와 특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제도 안에서 살아간다. 이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 즉 한편으로는 노동의 발전 단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엥겔스, 1972:71-72; 이탤릭은 루빈이)


이 단락은 중요한 인식을 암시한다. 즉 인류는 옷, 음식, 그리고 따뜻함을 위해 그 자신의 활동력을 자연 세계를 개척하는데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자연 세계의 요소들은 인간들의 소비 대상으로 변형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체계를 일컬어 "경제"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서조차 경제 활동을 통해 충족된 욕구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들을 없애지 못한다. 또한 인류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그 자신을 재생산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생식의 욕구는 식욕만큼이나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학의 자료들에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추론들 중 하나는, 그러한 욕구들은 식욕이 그러한 것처럼 그 어떤 "자연적인" 형태로는 거의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굶주림은 굶주림이다. 하지만 음식으로 간주된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조직화된 경제적 활동의 형태들을 갖는다. 섹스는 섹스이다. 하지만 섹스로 간주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또한 섹스/젠더 체계를 갖고 있다. 이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생식의 생물학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요소들이 인간들과 사회적 개입에 의해 고안되고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 전통이 얼마나 기괴한지와는 상관없이 전통적인 방식 속에서 만족되는 것이다. * (각주)

인간의 섹스, 젠더, 그리고 생식의 영역은, 수 천 년 동안 냉혹한 사회적 행동들에 종속되었고, 또 이 행동들에 의해 변화되어 왔다. 우리가 아는 바ㅡ젠더 정체성, 성적 욕망과 판타지, 유년시절에 대한 개념ㅡ로서의 섹스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생산물이다. 우리는 섹스의 생산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잠시 동안은 음식, 옷, 자동차, 그리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대해서는 잊을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맑시스트의 전통에서, 그리고 심지어 엥겔스의 책에서는, "물질 생활material life의 두번째 양상[무슨 말이지?; 이 말은 second aspect of material life의 번역인데 확실히 맑시즘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으니;]"의 개념은 배경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혹은 "물질 생활"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었다. 엥겔스의 제안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섬세한 고안을 따르지도, 종속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내가 섹스/젠더 체계라고 부르고 싶은 사회적 삶의 영역의 존재와 중요성을 보여준다.

섹스/젠더 체계를 부르기 위한 다른 이름들도 제안되어 왔다. 가장 일반적인 대안들은 "재생산 양식mode of reproduction"과 "가부장제patriarchy"이다. 용어를 가지고 애매한 말을 늘어 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 두가지 용어들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한 3가지 제안들은 "경제" 시스템과 "섹스" 시스템 사이의 구별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섹스 시스템은 나름의 자율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경제적 힘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예컨대 "재생산 양식"은 더 친숙한 "생산 양식"의 반대로써 제안되었다.  하지만 이 용어는 "경제"를 생산에, 그리고 섹스 체계를 "재생산"에 연결시킨다. 허나 "생산"과 "재생산"은 두 체계에서 모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두 체계의 풍부함을 축소시킨다. 모든 생산 양식은 (도구, 노동,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의 다양한 국면의 양상들 모두를 섹스 시스템으로 이관할 수는 없다. 기계의 대체는 경제 속에서 볼 수 있는 재생산의 한 예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섹스 체계를 "재생산"이라는 용어의 사회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관점 안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섹스/젠더 체계는 단순히 "생산 양식"의 재생산적 순간은 아니다. 젠더 정체성의 구성은 섹스 체계의 영역에서 생산되는 것의 한 예이다. 그리고 섹스/젠더 체계는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재생산인 "생식 관계"를 넘어서는 것을 포함한다.

* 각주: 우리들의 관점에서, 그것들[전통/관습들] 중 다소 기괴하게 보이는 것들은, 섹슈얼리티는 문화의 개입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Ford and Beach, 1972를 보라). 몇몇의 예들은 아마도 인류학자들이 즐기고 있는 이국exotica에서 선택되었을 것이다.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2007/10/31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3-164
2007/12/02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4-167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31 14:19

맑스 편은 끝났고, 다음 편은 엥겔스!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3-164의 번역


여성들은 자본주의로 기술될 수 있는 상상력이 뻗치지 않은 사회에서도 억압당한다. 아마존 계곡과 뉴기니 고지(高地)의 여성들은, 남성적 위협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증명되었을 때, 집단 성폭행gang rape에 의해 그녀들의 장소에 자주 가두어진다. 한 Mundurucu의 남성은 "우리는 우리들의 여성을 바나나로 길들이지요"라고 말했다(Murphy, 1959:195). 민족지적인 기록은 남성 숭배, 비밀스러운 비법 전수들, 불가해한 남성 지식 등등을 통해 "그녀들의 공간"에 여성들을 가두어 놓는 효과를 갖는 관습들로 어지럽혀진다. 그리고 전-자본주의 봉건제의 유럽은 성 차별주의가 없는 사회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수 세기를 거쳐 자본주의보다 앞서 존재했던 여성과 남성이라는 개념을 계승하고 다시 연결시켰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에 관한 어떠한 분석도 다양한 시간대와 장소 속에서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전족, 정조대(貞操帶), 비잔틴의 믿을 수 없는 의상들, 물신화된 모욕들, 그리고 더 평범한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분석은 많은 경우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왜 많은지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노동의 재생산에 대한 맑스의 논의로 돌아가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노동자를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것은 부분적으로 인간 유기체의 생물학적 요구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노동자가 살고 있는 장소의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 또한 부분적으로 문화적 전통에 의해서 결정된다. 맑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맥주가, 프랑스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와인이 필요하다고 관찰했다.

그의 [노동자의] 소위 반드시 필요한 욕구와, 그리고 그들을 만족시킬 방법으로써의 수효와 양은 그 자체로 역사적 발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국가의 문명화 정도에 엄청난 양을 의존하게 되며, 더 자세히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그 조건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안락함의 정도와 습속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상품commodity의 경우와 비교하여 봤을 때, 이는 역사적이고 도덕적moral인 요소인 노동력 가치의 결정으로 융화된다. (Marx, 1972:171, 이탤릭은 필자가)

"아내"가 노동자의 필요성 위에서 존재한다는 것, 남성들이라기 보다는 여성들이 가사 노동을 한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가 여성들이 상속 받지도 앞장서지도 신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던 오랜 전통의 상속자라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정확히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자본주의를 남성성과 여성성 형성의 문화적 유산과 함께 나타낸다.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성sex, 섹슈얼리티, 그리고 성 억압의 전체 범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맑스가 한 주장의 간결함은, 단지 그것이 포괄하는 사회적 삶의 거대한 영역을 강조할 뿐이며, 그것을 검토되지 않은 채 내버려둘 따름이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를 분석의 과제로 만듦으로써만, 성 억압의 구조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2007/10/31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3-164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30 14:03

이 부분은 좀 뻔해서 재미가 없었다.. 다음 부분은 엥겔스인데, 그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책세상 문고판으로 구해놓긴 했다. 허지만 일부 번역이라서..) 좀 기대가 된다만.. 맑스 부분 번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0-163의 번역

맑스

비교-문화적,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여성의 억압을 해명하는 이론들 중에서 그 끊임없는 변화형들과 단조로운 유사성이라는 지점에서 봤을 때, 계급 억압에 관한 맑시스트들의 설명 능력 만 한 이론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여성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맑시스트의 분석을 적용하고 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맑시스트의 분석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지금껏 여성들은 자본주의를 위한 예비 노동력이며, 일반적으로 낮은 여성들의 임금은 자본가-고용주에게 특별한 잉여 가치를 제공하며, 여성들은 가족 소비의 관리자라는 그들의 역할 속에서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말미를 제공한다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문들은 훨씬 더 야심찬 노력을 기울여 왔다. 즉 가사노동과 노동 재생산 사이의의 상관관계를 지적함으로써, 자본주의 역학의 핵심 속에 여성의 억압을 위치시키는 것이다(Benston, 1969; Dalla Costa, 1972; Larguia and Dumoulin, 1972; Gerstenin, 1973; Secombe, 1974; Gardiner, 1974; Rowntree, M. & J., 1970을 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정의定意 그리고 자본에 의해서by capital 노동으로부터 오는 잉여 가치의 착취로 인해 자본이 생산되는 그 과정에 여성들을 공평하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맑스는 자본주의가 그 특유의 목적으로 인해 다른 어떠한 생산 방식과도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은 창조creation와 자본의 확장이다. 다른 생산 방식들이 그들의 목적을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쓸모 있는 물건들을 만드는데 두거나, 혹은 지배 귀족계급을 위한 잉여를 생산하는데 두거나, 혹은 신의 교화를 위한 충분한 희생을 보증하기 위해서 생산하는데 두었다거나 했던 것에 반해서, 자본주의는 자본을 생산한다. 자본주의는 생산production이 돈, 상품, 인간들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관계ㅡ소유의 형식 등등ㅡ의 세트이다. 그리고 자본은, 노동으로 교환되었을 때,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 속에서 무보수 노동의 착취나 잉여가치를 통해 그 자신을 재생산하고 증식하는 상품이나 돈의 양quantity이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의 결과는, 단지 생산(사용가치)이라거나 상품commodity인 것은 아니며, 적어도 교환가치를 가진 사용가치이다. 그것의 결과나 생산은, 자본을 위한 잉여가치의 창조이며, 결과적으로 돈이나 상품의 자본으로의 실질적인 변형이다. (Marx, 1969:399; 이탤릭은 원전에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 그럼으로써 자본이 되는 이 교환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으며, 자본가는 노동자 그/녀가 고용 시간동안 만들어낸 물건들을 갖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물건의 총 가치가 그/녀의 임금의 가치를 초과한다면, 자본주의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자본가는 임금의 비용을 되찾는 것에 더해서 잉여 가치의 증가분도 갖는다. 이것은 임금이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가 아니라, 그/녀를 계속 유지하는 것ㅡ매일매일 그/녀를 재생산 하는 것, 그리고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체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ㅡ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는 노동 계급이 전체로서 생산하는 것과 노동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재순환되는 그 전체 총계 사이의 차이이다.

노동력을 위한 교환에 주어진 자본은, 생존하는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뼈, 그리고 뇌를 재생산하는 소비에 의해 필수품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노동장workshop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발생하는, 생산 과정의 일부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노동자의 개인 소비는 마치 세탁기washing machine(*)가 그리하는 것처럼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요소factor를 형성한다. (Marx, 1972:572)

개인적인 상황에서, 노동력의 생산은 그 자신의 재생산이나 그의 생계maintenance를 포함한다. 그의 생계를 위해서, 그는 생계 수단으로 주어진 양quantity을 요구한다(**). 노동력은 노동하는 행동으로서만 그 자신이 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의 근육, 뇌, 신경 등의 일정한 양은 소모되며, 따라서 그것들은 회복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Ibid.:171)

따라서 노동력의 재생산과 그것의 생산 사이에서의 차이의 양은, 노동력을 재생산 할 것으로 취하는 그 측정determination에 달려있다. 맑스는 노동자의 건강, 일상, 그리고 힘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음식, 옷, 주택, 연료 등의 일용품의 양을 그 측정의 기초에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용품들은 그것들이 생계의 수단이 되기 이전에 먼저 소비되어야 하며, 그것들이 임금에 의해 구매되었을 때 곧바로 소비 가능한 형태가 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 이전에(***), 그것들에게 추가적인 노동이 행해져야 한다. 음식은 요리되어야 하며, 옷은 빨아져야 하며, 침대가 만들어지고, 나무는 쪼개져야 한다, 등등.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를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재생산과정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여성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필요조건sine qua non인 잉여가치 연쇄 속으로 여성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그 노동력 재생산을 통과한다고 관찰되어왔다.1) 좀 더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가사 노동에는 임금이 지불되지 않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자본가에 의해 파악되는 잉여가치의 궁극적인 양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여성의 유용성usefulness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유용성이 여성의 억압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꽤나 다른 문제다.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분석이 여성과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 설명을 중단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미주]
1) 여성과 가사노동에 관한 많은 논쟁이, 가사노동이 “생산적인” 노동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의 가운데에 있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가사 노동은 용어의 테크니컬한 관점에서 보면 보통은 “생산적인” 노동은 아니다(I. Gough, 1972; Marx, 1969:387-413). 하지만 이 차이는 이 주장의 요점과는 관련이 없다.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와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한다는 관점에서는 “생산적인” 노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잉여 가치와 자본 생산의 결정적인 요소다.

* washing machine이 뭔지 잘 모르겠다. 세탁기 맞겠지? - -; 맑스가 살아 있을 때도 세탁기라는 개념이 존재했나?;

** 이 문장은 "For his maintenance he requires a given quantity of the means of subsistence"라는 문장의 어색한 번역이다. subsistence와 maintenance의 주요한 차이를 모르겠다.. 영영 사전을 보면 좀 드러나긴 하는데, subsistence는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총체적인 것과 관련이 된다면, maintenance는 정부나 외부 기관들에 의해서 지원되는 최소 생계 정도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 이 문장은 "before they can be turned into people"이라는 표현의 번역이다. 좀 어색한디;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2007/10/31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3-164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29 15:52

다듬지 않은 거친 번역물-_- 번역 하는 건 상관 없는데 다듬는건 무지 귀찮다. 나야 시간도 원체 남아도는 인간이니 하루에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번역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아야 겠다. 영어 공부도 할 겸해서... (speaking/listening은 어떡하지 ㅠ.ㅠ)

사실 어제 했듯이 <젠더 트러블>을 먼저 해볼까 했는데, 너무 어렵기도 하거니와 오역의 리스크가 다른 것들에 비해 너무 크기 때문에 먼저 다른 것들 위주로 하려고 한다. 그를 위해서 일단 버틀러가 좋다 좋다 하는 게일 루빈의 중요한 논문 중에 하나인,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을 번역 해볼까 한다. 다른 중요한 논문인 Thinking Sex: Notes for a Radical Theory of the Politics of Sexuality는 도서관에 없길래 일단 포기. 1975년에 쓰여진데다가 수많은 텍스트에 인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고전적인 저술인 건 맞는데, 그만큼 참고해 두지 않으면 어쩐지 허전;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57-160의 번역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모두에게, 여성에 대한 문학은 여성의 억압과 사회적 종속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질문의 오랜 심사숙고의 결과물이다. 그 질문은 사소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주어진 답은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에 대한 희망이 현실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 억압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젠더 위계gender hierarchy가 없는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 변화되어야만 할 것들에 대한 어떠한 평가든 간에, 그 평가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본유적인 남성의 공격과 지배가 여성 억압의 근저에 있다면, 논리적으로 페미니스트 기획은 공격적인 성의 근절이나 그 공격적인 특성을 수정하기 위한 우생학적 기획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성차별주의sexism가 이익을 위한 자본주의의 냉혹한 욕구의 부산물이라면, 성차별주의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출현과 함께 시들어버리게 될 것이다. 만약 세계 역사 속에서 여성의 패배가 무장한 가부장제의 폭동의 손아귀에 일어난 것이라면, 이제 아디론댁Adirondacks 산맥에서 아마존Amazon 게릴라를 훈련시키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 논문의 시야는, 성적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유명한 몇몇 설명들ㅡThe Imperial Animal에 의해 예시된 유명한 진화에 관한 이론이나, 선사시대 모계사회에 대해 추정된 전복overthrow에 관한 것이나, 자본Capital 1권에서 사회적 종속의 현상 모두를 발췌해내려고 하는 시도까지ㅡ을 지지하는 비평의 바깥에 있다. 대신 나는 그러한 문제의 대안적인 설명에 대한 몇몇 요소들을 간략히 그려보고자 한다.

맑스는 한 때 이렇게 질문했다. “흑인Negro 노예란 무엇인가? 흑인 종족black race의 사람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흑인Negro은 흑인Negro이다. 면 방적기는 면을 방직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특정한 관계에서만 자본이 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이것이 자본이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money이 아닌 것이나 설탕이 설탕의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Marx, 1971b:28)” 이것은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가정적인 여성women이란 무엇인가? 한 종species의 여성female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woman은 여성woman이다. 그녀는 오직 특정한 관계에서만 하녀, 와이프wife, 동산動産, 바람둥이 토끼, 성매매 여성prostitute, 인간 딕터폰(속기용 구술 녹음기)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그녀가 남성의 조력자가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성female이 억압받는 여성women이 되는 그 관계는 무엇인가? 여성이 남성의 먹이가 되는 관계의 구조를 해명하기 시작할 수 있는 토대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중복되는 작업 안에 있다. 여성women 길들이기domestication는 그 두 사람의 작업에서 충분히 토론될 수 있다. 그 작업들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여성을 정제되지 않은raw 물질로 간주하고, 길들여진(가정家庭화된) 여성을 생산물로 만들어 버리는 구조적인 사회적 장치social apparatus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물론 프로이트도 레비-스트로스도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기술한 과정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분석과 기술은, 반드시 맑스가 맑스 앞에 있었던 고전적인 정치 경제학자들을 읽었던 방식처럼 읽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1970:11-69)를 참조하라).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는 리카르도와 스미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즉 그들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작품이 페미니스트의 눈에 제시되었을 때 생성할 수 있는 비평적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성, 성적 소수자, 개인에 존재하는 특정한 인간 성격의 특성들에 대한 억압의 장소가 되는, 그 사회적 삶의 부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적인 도구를 제공해 준다. 나는 더 정치精緻한 용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삶의 부분을 “섹스/젠더 시스템”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임시적인 정의로써, “섹스/젠더 시스템”이란 사회가 생물학적 성을 인간 행동의 산물로써 변형시키는 배치arrangement, 그리고 변형된 성의 그 욕구가 충족되는 그 배치의 일단을 일컫는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독특하면서 해석적인exegetical 읽기의 한 방법을 통해서, 섹스/젠더 시스템에 대한 풍부하게 발달된 정의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나는 “해석적exegetical”이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한다. 사전적으로 “해석exegesis”은 “특히 성서의 해석에 관한, 비판적인 설명이나 분석”으로 정의된다. 때때로,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읽기는 자유로이 해석적이며, 또한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만족으로부터 그것의 전제와 함축하는 바까지 이동한다. 나의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텍스트에 대한 독해는, 레비-스트로스로부터 강하게 영향 받아서 프로이트주의자들의 경전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을 갖고 있는 자크 라캉에 의해 제공된 렌즈를 통과했다. 1)

나는 후에 섹스/젠더 시스템의 정의에 관해서 더 섬세한 것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먼저 나는 성 억압을 완전히 표현하거나 개념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맑시즘의 실패를 검토함으로써 그러한 개념의 필요성을 논증하려고 한다. 이러한 실패는, 사회적 삶의 이론으로서의 맑시즘이, 성sex을 상대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사회적 세계에 대한 맑스의 지도map에서, 인류는 노동자, 농부, 혹은 자본가이다. 그들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반대로,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그려진 사회적 현실의 지도에서는, 사회 내에서의 성의 위치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경험 사이의 뿌리 깊은 차이에 대한 심원한 인식을 볼 수 있다.

[미주]
1) 맑시즘, 구조주의, 그리고 정신분석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어떤 인식론적인 충돌을 만들어 낸다. 특히, 구조주의는 인식론적 지도 전체에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귀찮은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나는 라캉과 레비-스트로스가 현대 프랑스 지식인 혁명에 있어 선도적인 살아있는 조상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무시하려고 한다(Foucault, 1970을 보라). 만약 프랑스에서라면, "실천을 의미화하는 변증법적 이론"의 길을 따라 구조주의자들의 미로의 중심으로부터 나의 주장을 시작하는 것과 거기로부터 나의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 이 문장은 "In particular, structuralism is a can from which worms crawl out all over the epistemological map."이라는 문장의 번역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특히, 구조주의는 벌레들이 인식론적 지도 전체에서 기어 나오는 깡통이다." 정도 일텐데 당연히 이런 뜻 일리 없다. 일단 "a can of worms"라는 표현은 복잡하고 귀찮은 문제, 혹은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에 적당히 옮겨보았다 -_-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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